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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두

민경식

한식레스토랑 콩두 자리는 경운궁(덕수궁)의 일부로 인수대비 집무실 터로 알려져있다. 1927년 2월 경성방송국이 설립되면서 그 원형을 잃었으며 한국전쟁 때 방송국 자리는 모두 타 없어지고 개인소유지의 땅이 되었다. 이후 한옥이 지어져 요리옥, 고급한정식집으로 변모했다가 이십 여 년전 소유권이 바뀌면서 교회 연수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한옥의 형태는 입구쪽 11평만 남아있으며, 20년 넘게 폐가로 버려져 있던 곳이라고 한다. (자료제공: 콩두)  

‘콩두’는  ‘콩’을 중심으로 오랜 시간 숙성 시켜 만든  ‘장’을 기본으로 한 한국음식에 서양의 코스 개념을 접목시켜 새로운 스타일의 한식을 선보이는 한식 레스토랑이다. 건축가 민경식은 한식 레스토랑의 이미지에 맞춰 기존 한옥이 갖고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살리고 낡은 건물을 최대한 복원하는 것으로 디자인 초안을 잡았다. 여기에 전통의 아름다움과 건축의 거친 미학의 믹스 앤 매치(mix & match)를 콘셉트로 잡아 설계했다.

건물은 입구쪽 한옥부터 내부 공간까지 길로 낮게 뻗어 있는데, 이 단점을 한옥 특유의 물흐르듯 막힘 없는 공간의 특성으로 살려내어 전체적인 공간의 틀을 잡았다. 건물의 중심에는 천막 아트리움을 두어 한옥 창호지를 통해 드러오는 부드러운 햇살의 느낌을 살려내고 있다. 건물의 복도뿐만 아니라 열린 천장(open ceiling)과 맞닿은 창을 두어 공간에 입체적인 풍경을 선사하고자 했다. 이곳은 2층 테라스와 연결되어 계절에 따른 하늘의 변화와 주변 풍경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구한말, 근대에 이르는 역사의 굴곡만큼이나 내력이 깊은 터에 그 의미를 더하고 가꾸려는 건축주와 건축가의 의지가 반영된 곳이다.  


사진 김종오
민경식
민경식은 서울대 조경학과 및 환경대학원을 졸업하고 (주)공간건축사사무소 뉴욕지사장을 거쳐 뉴욕 S.O.M(Skimoto Owing & Merril)과 뉴욕 ISD(Interior Space Design)의 수석디자이너로 활동하였다. 이후 뉴욕 C.C.M.P 건축사무소와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 소장을 거쳐 현재 ㈜민경식건축사사무소의 대표로 몸담고 있으며 건축가 승효상과 함께 이로재 북경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서울대 조경학과, 아주대 건축학과, 한양대 건축학과 등에 출강하였으며 미국건축가회(AIA), 미국건축사협회, 한국건축사협회, 한국실내건축가협회(KOSID), 한국박물관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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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House 서울시립대학교 경농관, 박물관, 자작마루, 이충기 서울시립대학교 선벽원 영역의 경농관, 박물관, 자작마루는 서울시립대학교 전신인 경성공립농업학교 시기인 1937년에 건립한 것으로 대부분 소멸되고 세 건물만 보전, 유지되고 있었다. 건립 당시 경농관은 대학본관, 박물관은 교실, 자작마루는 대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의 학교건물로서 근대건축의 사료적 가치가 큰 건축물이다. 헐고 새로 짓는 대신 구조보강공사와 리모델링을 통해 재탄생한 선벽원은 건축가 이충기의 설계로 잠재된 세 건물의 시간과 공간을 다시 펼쳐내고자 하였다. 외부 벽돌을 제외한 마감재를 모두 벗겨내고 초기의 건축물에 담긴 공간적 숨결과 흔적을 드러내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공간의 흔적은 살려내고, 현 시대의 기술과 상상력을 더한 건축물로 다시 태어난 공간이다. 사진 신경섭
OpenHouse 한국 이슬람교 서울 중앙성원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서울중앙성원은 한국 정부의 배려와 이슬람 국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1874년 착공, 1976년 개원한 한국 최초의 이슬람 성원이다. 1층의 사무실과 대회의실, 2층의 남자 예배실, 3층의 여자 예배실이 설치되어 있으며, 부속건물로 이슬람센터가 있다. 높은 첨탑은 예배를 알리는 ‘아잔’을 낭송하는 곳이며, 건물 상단에는 녹색 글씨로 ‘알라후 악바르(신은 위대하다)’라는 아랍어가 쓰여 있다. 내부 예배실 천장의 돔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며 붉은 카페트에 선이 그려져 서로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예배를 드릴수 있도록 했다. 건축물 곳곳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이슬람교와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OpenHouse 반계 윤웅렬의 별서, 김봉렬 반계 윤웅렬 별서는 구한말 윤웅렬이 지은 별장이다. 반계 윤웅렬은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부대신을 지냈다.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 정부에 의해 남작 작위를 받았다. 슬하에는 전주 이씨와의 사이에 좌옹 윤치호, 김정순과의 사이에 남포 윤치왕과 윤치창 3형제를 두었다. 1904년 여름동안 서울지역에 성행하던 성홍열이 10월이 되어도 수그러들지 않자 이를 피해 지내기 위해 창의문 밖 경승지로 손꼽히던 부암동에 조성한 여름 별장이다. 뒤편의 조적조 건물을 별장으로 지었는데, 윤웅렬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셋째아들 윤치창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조성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가 되었다. 1977년 서울시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에는 건축물 외에 바위, 연못, 소폭포가 문화재로 추가 지정되면서 별서정원의 주요 구성요소들이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별장의 건축적, 조경적 요소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집이다. 윤웅렬 별장은 1944년까지 셋째아들 윤치창의 소유였으나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980년대 말부터는 도쿄에 거주하는 집주인이 주로 세를 놓아 집이 망가지는 시초가 되었다. 이후 거의 폐허와 같이 방치되던 이 집을 개인이 소유하게 되면서 보수공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사랑채는 마당을 모두 덮어 거실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원형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다. 건물은 공기가 통하지 않아 썩고 있었으며 마당의 연못은 쓰레기 투기장이 되어버렸다. 이 집을 보수하는데 가장 큰 난제는 서울시 지정문화재라는 점이었다. 문화재는 원형보존을 원칙으로 하므로 생활에 필요한 변형과 상충되었는데 그에 따른 가장 큰 설계의 기준은 외관은 유지하되, 내부는 편리하게 하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단열을 해결해야 했는데, 한식 창호는 기밀성이 떨어져 단열성능이 거의 없으므로 내부에 한식 시스템창호를 새로 개발하여 설치하였다. 원래 이 집에 없던 화장실과 주방 등 위생설비는 건물의 외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편리한 위치를 선정하여 실내로 들였다. 안채-사랑채-문간채로 분리된 각 건물을 신발을 신지 않고 연결되도록 하였으며 협소한 건물 규모에 맞는 가구에 대해서도 고민하였다.   글, 사진 온지음 제공
OpenHouse 성수문화복지회관, 운생동 성수문화복지회관은 문화의 숲이라는 콘셉트에서 출발한다. 숲은 자연을 경험하고 힐링하는 공간일 뿐아니라 공기, 나무, 물, 흙과 바람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존재하는 곳이다. 건축가는 이곳에 주변 흐름을 끌어들이고 강렬하면서도 이야기를 담고 있는 랜드스케이프를 만들어 성동구의 풍경을 담을 뿐만 아니라, 흐르는 공간과 녹색 영역 등으로 친환경적이고 창의적인 문화공간으로 구성하고자 했다. 저층부는 기하학적인 패턴과 자연의 형태를 차용한 적극적인 사선을 활용했고 다양한 오픈스페이스로 구성하고 있다. 건축물을 통해 도시의 조직을 재생하고 공공광장으로써 역할을 하기 위해 열린 입체 광장으로서의 문화복지회관을 제안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건물 내부에서 수직적으로나 수평적으로 3차원적인 광장을 제공하면서 마치 도시 구조를 집약한 듯해 성동구의 역동적인 공공시설로 자리잡고 있다. 사진 Fernando Guerra
OpenHouse 비트윅스트, 조병수 비트윅스트(Be-twixt)는 건물을 두 개의 상자로 분리하고 그 사이로 공용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의 진입을 돕고 바람길을 만들어냈다. 건물 중앙에 외부 공간을 두고 계단실을 만들면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교차하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청담동의 높은 땅값을 생각하면 대부분 낭비라고 하겠지만 이 빈 공간 덕분에 건물 내부의 환경은 훨씬 풍부하고 쾌적해졌다. 과감하게 비움으로써 더 좋은 건물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건축가의 믿음이 반영된 건물이다. 외벽에는 콘크리트와 레진, 유리 재료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이곳에 영상물을 투영하면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다. 비트윅스 지하층은 높은 천장고 덕에 유치원 체육실로 쓰이던 공간이었는데, 이 공간을 건축 가구 전시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약간의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했다. 막혀있던 중층공간을 트고, 계단으로 연결하여 분리되어 있던 세 공간을 하나의 연속된 공간으로 조직하고 있다.
OpenHouse 투문정션, 문훈 건축가 문훈이 설계한 근린생활시설로 그의 키치적 미학이 비교적 얌전하게 표현된 건물이다. 건물 정면에는 두 개의 달을 형상화한 큰 곡면이 움푹 파여 있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두 개의 달은 교묘하게 겹쳐진다. 문자 그대로 ‘two moons junction’이다.  '투문정션'이라는 영화 제목에서 따온 건물 이름은 로맨틱한 장소를 만들고 싶은 건축주의 바람에서 출발되었고, 그것이 곧 이 건물의 디자인 테마가 되었다. 이런 희한한 형태를 저예산으로 실현해낸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적은 예산에서 맞추기 위해 가장 평범한 상자 모양을 잡고, 거기에 달이 충돌해서 생긴듯한 표면을 새겨 넣었다.  두 개의 달이 새겨진 입면은 공간으로서의 간판이다. 옥상 테라스와 2층에 발코니를 통해 건물 속 이벤트를 슬쩍 드러냄으로써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도록 의도했다. 양쪽 측면에는 원형 창이 나 있고 모서리 부분에는 건축주의 별자리를 딴 조명이 새겨져 있다. 이런 장식적 요소들은 무표정하게 지어지기 일쑤인 근린생활시설에 인간적이면서 유쾌한 연결 고리가 된다. 사진 남궁선
OpenHouse 더 엠 빌딩, 핸즈코퍼레이션 사옥, 김찬중 최근 완공된 한남동 더 엠 빌딩은 한 기업의 사옥이다. 내부 공간과 외부 발코니의 관계를 풀어내면서 마치 건물 외관은 허공에 각 층이 떠있는 듯하다. 넓고 얇은 핸즈코퍼레이션 사옥과 달리 좁고 긴 더 엠 빌딩 프로젝트는 서로 다른 대지에 접근하는 방식을 비교해볼 수 있다. 최근 완공된 더 엠 건물의 오픈하우스 프로그램 진행 후 대로변에 강렬한 형상을 남기고 있는 핸즈 사옥은 건축가의 설명과 함께 외부 관람만 진행한다. 사진 김용관
OpenHouse 도천 라일락집 도천 라일락집 터는 도상봉 화백이 기거하며 작품활동을 하던 곳이면서 우리나라 근대 서양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1929년 터를 잡고 30년대 화실과 가정집을 이곳에 꾸려 작품활동을 하면서 당대의 화가 김환기 천경자 등과 교류하였고 초기 학생들을 모아 근대 서양화를 가르쳤던 곳이다.  도상봉 화백이 작고한 이후에도 후손들은 1974년 증축을 한 일반 양식 가옥에서 4대째 살아가고 있었다. 도상봉 손자 도규영 씨는 주변이 밀도가 높은 다가구 다세대 주택으로 급속히 변해가면서 주거 환경이 열악해지고, 70년대 지은 집이 낡고 노후해 이주할 계획을 세우다가 살아온 터의 의미와 중요성을 생각해 원래 집터에 작은 기념관을 겸한 살림집을 짓자는 건축가 정재헌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곳에 신축을 하기로 했다. 성균관 명륜당의 돌담을 마주하고 있는 집은 차분하고 서정적인 풍경과 주변의 무질서한 주택들 사이에 있다. 건축가는 이 틈에서 간결하고 존재감 없는 배경으로, 주변의 시각적 소음을 제거하는 흡음재로 집을 설계하고자 했는데, 각기 다른 패턴과 재료의 벽돌쌓기로 담백한 건물의 외관을 만들고 있다.  살림집은 ㄱ자형으로 배치하고 도상봉 화백의 기념관을 별채 처럼 배치했지만 마당을 중심으로 내부 공간을 연결했고, 담을 두르는 대신 건물의 배치로 자연스럽게 안마당이 만들어졌다. 도상봉 화백이 즐겨 그리던 명륜동의 담과 라일락 두 그루가 있는 이 집은 터의 내력을 잇고 건축물로 이전의 기억을 잇고자 하는 건축가와 건축주의 노력이 담겨 있다.  사진 박영채
OpenHouse 성북동 들꽃집, 임형남, 노은주 어떤 분이 성북동 길상사 맞은편 언덕에 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들어 갔다가 우연히 20평 남짓한 땅을 하나 샀다. 그 땅에는 아주 낡은 집이 한 채 있었다. 땅을 가득 메우며 들어 앉은 그 집엔 손바닥 만한 마당이 있었다. 작아도 마당이 있는 집에 살고 싶었던 그 사람은 그 집을 고쳐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네를 조금 둘러보다가 집에서 조금 내려오면 나오는 큰 길 변에 있는 ‘북악수퍼’라는 사실은 동네 구멍가게에 음료수를 마시러 갔다. 그곳에서 음료수를 마시다가 북악수퍼 바로 맞은편에 고래등보다도 크게 집을 짓는 현장에 일하러 온 어떤 분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했다. 이차 저차 해서 저기 보이는 골목길에 집을 하나 샀는데 어떻게 할 지 생각 중이라고 했는데 그 분 (아직까지도 누군지 모른다)이 그럼 가온건축에 한 번 가보라고 이야기했다고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동네 수퍼의 도움으로 집을 한 채 짓게 된 것이다. 그 분은 인터넷을 뒤져보고 적당하다 판단을 해서였는지 우리를 찾아왔다. 물론 우리가 거절할 일은 없었다. 우리는 그 동네를 찾아가봤다. 빨리 지나가면 모르고 그냥 지나칠 정도로 좁을 골목이 구부정하게 큰 길에 슬쩍 꼽사리를 끼고 있었고 골목에서 두 번째 집... 너무 낡아서 손가락으로 튕기면 그냥 주저 앉을 정도로 낡은 집이 한 채, 몇 년 째 사람의 냄새라곤 맡아보지도 못한 허기진 자세로 퀭한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일단을 고치자고 이야기를 했고 이런 저런 보강과 이런저런 칸막이와 방수와 통기와 채광을 하면서 보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집을 고치는 것이 쉽지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되어 다시 원점에서부터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신축을 하기 위해서는 현행의 법에 적합한 안으로 다시 시작해야 했는데 법에서 허용되는 범위는 한 층의 면적이 7평 정도 밖에 되지 않고 층 수도 2층 이상은 불가능 했다. 결국 집의 연면적이 14평인데 그 면적으로는 아무리 단출한 살림을 한다고 해도 턱없이 작았다. 결국 2층 위에 법에서 허용하는 한도내의 다락방을 넣어 2.5층의 집을 짓게 되었다. 여러 가지 공사여건상 가장 적합한 방식은 경골 목구조 방식이었고 집들로 둘러싸인 동네에서 가급적 햇빛을 잘 받을 수 있고 바람이 잘 통하는 ‘얇은 집’의 형식으로 지었다. 1층은 거실의 용도로 사용하고 2층은 침실의 용도 그리고 다락 층은 누마루와 서재로 사용하기로 했다. 공사는 쉽지는 않았지만 규모가 워낙 작다 보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다만 좁은 마당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 원래 있었던 담장을 살려서 거실에서 바라다보이는 편안한 벽으로 설정하고 그 앞에는 작은 감나무를 한 그루 심어 계절을 느끼고 특히 가을의 주황색을 감상하도록 했고 나머지 모든 빈 곳과 틈새를 마당으로 설정하여 위치에 맞는 들꽃을 50종 정도 열심히 심었다. 그리고 담벼락에는 심었던 들꽃들의 이름과 위치를 적은 ‘들꽃지도’를 그려 넣었다. 마치 꽃씨가 날아와서 느닷없이 메마른 시멘트바닥 틈새에 한 홉도 안 되는 땅을 찾아 꽃을 피우듯이 들꽃처럼 집이 하나 피어 난 것이다. 글 임형남, 노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