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②

까오 흔들의자, 드로잉, 예일대학교 작업, 1992
까오 흔들의자, 드로잉, 예일대학교 작업, 1992

과학적 합리주의와 모더니즘

 

대학원 논문은 어떤 주제로 쓰셨나요?

「근대건축의 과학적 합리주의의 형태적 표현」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지금 제 건축에 대한 의식의 심층이 깔린 주제가 아닐까 싶어요. 다른 레이어도 있지만 가장 바닥에는 ‘과학 기술’이 있어요. 공예적인 건축이나 맥락적인 건축도 다 유효하고 좋을 수는 있는데, 적어도 저에게는 과학 기술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고 생각해요.
대단한 이론은 아니어도 논문을 쓰면서 이것저것 정리했는데, 합리주의라는 게 합리주의 그 자체(과학과 기술)가 있고, 건축으로 들어올 때는 건축가의 해석을 거치잖아요. 그래서 구조 엔지니어와 아키텍트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 과학적 합리주의가 건축의 엔지니어링이 아니라 건축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어떤 문제가 있으며 건축가는 어떻게 조율해왔는지를 보자는 게 제 논문 주제였어요


당시 지도 교수님은 누구셨나요?

이광노 교수님이셨는데, 당시 교수님은 반대하셨어요. 실측 논문을 쓰거나, 근대 건축에 대한 연구를 원하셨죠. 지도 교수님 말을 안 들어가면서 주제를 정한 건데, 만약 그때 그런 논문을 썼다면 건축가가 안 됐을 확률이 높아요. 앞서 얘기했지만, 건축과에 온 이유도 ‘뭘 좀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였으니까요. 교수님도 지도 교수의 권한으로 제가 하려는 걸 못하게 하시는 스타일도 아니었고요.


대학원 때에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한 거네요. 유학은 군대 이후 다녀오신 건가요?

네. 군대 가기 전에 6개월의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서울시가 밀라노 트리엔날레에 초대받았는데, 우리나라가 국제적인 전시에 최초로 초대받은 경우였어요. 전시 디자인 프로젝트가 주택공사 주택연구소로 갔고, 그 담당자가 김진애 박사님이었어요. 이분이 제 사회생활 최초의 보스시죠. 표현이 이상하지만, 보스가 똑똑할 때 겪는 걸 다 겪어봤고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분이 일 처리 능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분이니까 많이 배웠죠.

학교는 마쳤으니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어서 열심히 일했어요. 지금이야 근사한 포트폴리오라는 개념이 있지만, 그 때는 그런 것이 없었어요. 김진애 박사님이 면접 때 원도를 들고 오라고 해서 둘둘 말아 가져갔죠. ‘내일부터 나와요’라고 하시는데 ‘제가 지금 집에 가도 할 일이 없습니다’라며 구석에 가서 일했어요. 집이 멀기도 하니까요. 그날부터 야근했죠. (웃음) 입대 전날까지 야근하다가 술 한잔하고 심야 이발소에서 머리 깎고 입대한 기억이 납니다. 군대 다녀온 다음에 바로 경력을 쌓기 위해 서울건축에 갔죠.


당시 밀라노 트리엔날레의 한국관 주제가 ‘서울’이었잖아요. 주제와 관련해서 인상 깊었던 것이나 진행 과정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주택공사가 강남구에 있던 시절이었어요. 지금은 그 일대가 완전히 재건축되었는데, 지하철 학동역에서 멀지 않았어요. 그 옆으로 AID 아파트 단지 안의 시범 주택 몇 동 중 하나가 사무실이었어요. 당시엔 그곳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작업 환경이 좋았던 기억이 나고요. 강홍빈 박사님이 주택공사 연구소 소장이셨고 그분을 비롯해 여러 석학 밑에서 일한 것도 좋았어요.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양질의 자료를 접해봤던 것이에요. 서울시 항공사진을 무제한으로 봤으니까요. 들여다보기만 해도 너무 좋더라고요. 지금이야 건축계에 소위 지역에 대한 관심이 생겼지만, 그때는 서울에 대한 관심이 형성된 때가 아니어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죠. 다른 논리로 만들어진 강남과 강북, 서울이 성장해온 과정 등을 놀랍게 봤죠. 사대문 안에 어마어마한 역사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피부로 느낀 것 같아요.

다음은 그것을 어떻게 드러낼까였어요. 그러한 생각들을 전시 도판에 담으면서 소위 전시라는 물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경험했죠. 그때 경험이 이후 <메가시티> 전시 기획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전시라는 것이 어느 정도 유치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내용을 요약하고 생략하고 강조하다 보면, 현실의 미묘한 결을 전시에 다 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요. 전시의 가장 큰 과제는 최대한 명쾌하게 사람들에게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왜곡이 있고 유치할 수밖에 없구나, 책과 전시가 다르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어요. 그리고 전시 하나에 정말 많은 분야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어요. 당시 도판과 보고서는 안그라픽스에서 했어요. 자료 리서치에는 최종현(한양대) 교수님이 참여하셨고요. 보고서를 보면 제가 한 기초 스케치가 몇 개 있어요.


같이 일했던 팀 중에 더 기억나시는 분이 있나요?

이름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 외에도 상명대 백명진 교수님, 우규승 선생님 등 많은 분을 만나고 코멘트를 들으면서 배웠죠. 건국대 정태용 교수, 경기대 이영범 교수가 동기로 같이 들어가서 일했고요. 당시 주택공사 직원이었고 우리 팀을 지원해주신 현 토문건축 정경상 소장님, 그리고 주공에 계신 다른 분들이 계셨어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팀에 참여하셨다는 건 흥미로워요. 김진애 박사님도 그 전시가 이후 ‘서울포럼’을 설립하는데 정신적인 바탕이 되었다고 하셨거든요. 서울에 대해 확실히 접하셨을 것 같아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서울 역사의 대강을 훑어본 계기이고, 나중에 제가 더 깊이 관심 두게 된 단초가 됐죠.


유학을 하러 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예일대를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잘 모르고 갔죠. 그 시절엔 다 그랬어요. 원래는 유학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쓰러지셔서 유학 갈 돈이 없었어요. 유학을 하러 가는 유일한 길은 국비 유학생 시험을 보는 것이었어요. 학생 때 두 번 시험을 봤는데 둘 다 1차는 되고 2차는 떨어졌어요.

그러다가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도 하고 서울건축에 다니던 어느 날 깨달았어요. 건축가가 되기 위한 디자인 교육의 기본량이 있는데 제게 그 절대량이 부족하다는 것을요. 그렇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유학을 가야겠다 하고 세 번째 국비 유학생 시험에 붙었어요. 1년 조금 넘게 회사 생활을 즐겁게 했지만 “죄송합니다”하고 나왔죠.

처음에는 유학 준비가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몰랐어요. 정보전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당시엔 좋은 학교라는 데는 다 지원했어요. 학교 특성도 모르고요. 더구나 예일은 한국 학생을 받은 적이 없어서 이 학교가 뭐 하는지도 몰랐어요. 김태수 선생님이 예일대학을 다니셨던 것은 알았어요. 한국에서는 이미 저명하셨고 대가셨으니 그 정도나 되어야 갈 수 있겠구나 했었죠. 나름으로 열심히 했는데 예일에 합격해 당연히 좋았죠.


대학마다 그 시기의 학풍이 있어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텐데, 예일에서는 어떠셨나요?

지나서 생각해보면 예일대학은 미국 대학 중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그 영향이 오래 가는 학교 중 하나였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사실 ‘이게 뭐지?’ 했어요. 당시 학장이 토마스 비비인데 이 사람은 미국에서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실무가 중 하나였어요. 드미트리 포르피리오스(Demetri Porphyrios)나 크리어 형제(Leon & Rob Krier)가 와서 강연하고 그랬으니까요. 저는 논문 주제도 그렇고 서울건축 김종성 선생님께 불의 세례를 받아서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한국에서 나름 모던한 교육을 많이 받았지만 교육이라는 게 이런 거다, 다 겪어보자 했어요. 그래서 장식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다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포스트모던은 예일에서 교육받으면서 이해하게 된 측면이 있어요. 모던에 비해서 이론적으로는 재미있잖아요. 그렇게 양쪽 세계를 다 경험해 본 것 같아요.

학교에서 정말 좋았던 건 만들기였어요. 한국의 건축 교육에서는 뭘 만들어본 경험이 없죠. 모형과 도면 그리기는 생각의 만들기이지, 실제 만들기는 아니니까요. 예일대학에 갔을 때 지하 작업실에 내려가니 학교 자체가 공장인 거에요. ‘와, 드디어 내가 왔다’ 했죠. (웃음) 그때 설계 스튜디오 못지않게 지하실에서 과도하게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만큼 너무 좋았어요. 그때 만든 게 까오 의자(Kao chair)예요. 재료도 직접 많이 다뤄봤어요. 조각 수업이 듣고 싶어서 미대 수업도 듣고 했거든요. 몸을 써서 만들어보는 걸 상대적으로 많이 해본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경험 덕에 현장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아요.

예일대에는 시류에 영합하지 말고 ‘끈질긴 개인주의자(diehard Individualist)’를 키우려는 정신이 있어요. 그게 특정 시점에서 그 학교에 대한 평가를 나쁘게 하는 것이기도 해요. 좀 고루하게 보이거든요. 길게 보면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긴 생각을 갖게 하는 데 좋은 학풍을 가진 학교예요. 올 초에 다시 학교를 방문했을 때도 지적 풍토가 좀 답답하다고 느꼈는데, 그래도 저한테는 좋은 양분을 많이 준 학교예요. 그 대신 너무나 서양 학교죠. 예일은 지금도 아메리카니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거든요.


까오 의자의 경우 의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실제 구현하고 제작해냈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당시 그 수업을 진행한 선생님이 로저 크롤리(Roger Crowley)라고 뉴욕에서 온 건축가였는데 로버트 벤투리 계열이에요. 어떤 스타일인지 짐작이 가시죠?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가구를 디자인했어요. 대신 가구의 역사에 대해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죠.

제 의자는 작동도 안 될 거라고 엄청나게 반대했어요. 1학기 디자인, 2학기 제작인데 그 선생님이 2학기 때는 저 가르치기 싫다고, 수업 듣지 말라고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저 말고는 아무도 그 수업을 신청하지 않은 거예요. 다른 친구 하나는 제가 들으면 듣겠다고 했고요. 뉴욕에서 온 그 선생님에게 제가 필요한 사람이 된 거죠. 그러다가 학기 말에 완성품을 가져갔는데 앉아보고 시연해 보니 ‘내가 틀렸네, 열심히 했다’고 칭찬해 주었어요. 평상시 갖고 있었던 소위 ‘이성적 만들기’에 대한 욕구가 그 의자에 다 담겨 있어요. 당시 친구들이 저를 ‘체어맨’이라고 불렀으니까요. (웃음)


적절한 별명이네요. (웃음) 이성적 만들기라는 표현처럼, 까오 의자는 탱크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잖아요.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디자인과 소재가 갖는 견고한 매력이 있어요. 그런 작업이 건축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그럼요. 그 작업을 하면서 내가 건축가가 되겠구나,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죠.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이 길을 가자고 허락하는 계기였죠. 그런 계기가 두 번 있었는데. 하나는 학부 때 졸업 설계였고 다른 하나가 그 의자였어요. 내가 무언가를 만들 수 있구나,  인간이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데, 기능이 있고 생각이 담겨 있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 수 있구나 했죠. 그게 큰 계기가 되었어요. 아직도 무한 애정으로 그 의자를 보관하고 있으니까요.

구체적인 재료를 다루는 게 얼마나 즐거운 지도 그때 알았고요. 합판으로 틀을 다 짜고 라미네이팅하고, 목공에 대한 책이며 잡지며 다 섭렵하며 실험했어요. 그런 관점에서 현재 작업에서 물성에 대한 실험을 양껏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해요. 이게 아쉬운 부분인데, 남을 통해서만 그걸 한다는 게 싫어요. 가끔 설계 다음으로 시공에 들어가면 누를 때마다 오작동하는 리모컨으로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 느낌이에요. 한국에서 산업체와 건축가가 더 긴밀히 연결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으면 훨씬 용이하겠죠. 현재로서는 그 욕구가 잘 충족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일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양하게 접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혔다고 하셨는데, 그 외에 인상적인 건 무엇이었나요?

지금도 예일대에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그 학교가 지역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거예요. 처음 입학했을 때 학교 정식 과목에 <History of New Haven Architecture and Urbanism>라는 게 있었어요. 물론 뉴헤이븐이 근대건축에서 유명한 도시이긴 해요. 하지만 우리로 치면 연세대에서 신촌 건축학개론을, 서울대에서 신림동 지역의 건축과 역사를 가르치는 셈이잖아요. 게다가 수업을 들어보니 매우 재미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역의 역사에 거시적 관점의 건축사와 세계사가 편입이 돼가는, 부분 안에 전체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을 학교가 몸소 실천하는 거죠.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죠. 우리는 빨리 지역(local)을 벗어나서 세계로 나가고자 했잖아요. 그런데 세계 건축의 중심 중 하나에 갔더니 자기 동네를 가르치더라는 거죠.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교수들도 지역 전통(local tradition)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있었어요. 저는 그분들과 특히 잘 지냈고요. 한국에서 김종성 선생님을 통해 받았던 전형적인 모더니즘 교육과는 상반되지만, 보완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안에서도 철저한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공통적인 거고요.

김종성 교수님도 한국에서는 가장 서구적인 건축가지만, 대학원 당시 수업에서는 근현대 건축의 관점에서 사찰이나 종묘 같은 전통 건축의 공간을 분석하는 수업을 진행하셨어요. <공간건축 구성론>이라는 수업이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너무나 잘 찍은 슬라이드로 종묘의 맞배 지붕을 설명하는데, ‘맛배 지붕은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건국 초기에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기로 했기 때문에 (왕조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팔작지붕과 같은 단정적인 형식으로 할 수 없고, 따라서 이런 경우에 만들어진 비례는 결과적인 것이다. 인간의 조형 의지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비례에는 상대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스 신전도 사람들은 보통 파르테논이 백미라고 하지만 파에스툼의 묵직함에도 나름의 미가 있다’라고 하시면서 모든 길과 문을 열어주셨어요. 너무나도 신선하게 다가왔죠.


예일대를 졸업하고 김태수 건축사무소에서 실무를 하셨잖아요. 미국과 한국 중 실무를 어디서 할 것인지 고민은 없었나요?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 가길 원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학교냐 실무냐, 미국 유학 시절에도 박사과정이냐 설계 사무소냐 등 경력의 갈림길에 있을 때마다 번민은 없었어요. 이 길로 가겠다는 확실한 자기 선언을 했죠. 졸업하고 보통 설계사무소를 가는데, 저는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갈 거로 생각했어요. 생물학적으로 미국에서 오래 사는 게 싫었어요. 결국 노마드는 못 되는 사람이고요. 그때 생각했던 게 김태수 선생님이었어요. 김종성 선생님은 접근하기 어려운 캐릭터시지만, 한국에 계셔서 직접 뵐 수 있었는데, 김태수 선생님은 멀리 계셔서 경원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실무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셨고, ‘나는 상자(Box)의 건축가다’라는 선언적인 말들도 대단했어요. 작품의 물성도 너무 좋고요.

김태수 선생님의 작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교보 천안연수원이었어요. 처음 사진으로 보고 근대건축의 어휘를 다 갖고 있으면서 한국의 산세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걸 보며 이런 고수가 있을 수 있구나 했죠. 한국에 잠시 오셨을 때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마침 예일을 가게 됐다고 했더니 학기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미국 사무실에 좀 있다 가라고 하셨어요. 신나서 바로 갔죠. 거기서 인턴을 하면서 용돈을 벌 수 있었어요. 학교가 끝나면 당연히 그곳으로 갈 거로 생각했어요. 어찌 보면 참 행복하게 학교에 다닌 셈이죠. 대선배도 옆에 계셨고요. 그렇게 유학 생활과 입대했을 때가 가장 철없지만 즐겁게 산 때였어요.


한국에는 언제 돌아오셨나요?

김태수 선생님 사무소를 3년 반 정도 다녔는데 선생님이 서울에 사무소를 내셨어요. 그런데 사람이 계속 바뀌니까 저에게 한국에 가서 그 사무소를 좀 맡을 수 있겠느냐 하셔서 ‘언제든지요. 어차피 갈 거였어요’라고 했는데 뜻밖이셨나 봐요. 그렇게 1996년 연말에 한국으로 왔어요. 김태수 선생님의 서울 사무실을 3, 4년 맡다가 IMF 사태 후 독립을 한 거죠. 독립은 불경기에 하는 거라는 주변 사람들 말에 용기를 얻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사무실을 열었어요.


김태수 선생님에게서는 어떤 영향은 받으셨나요?

김종성 선생님보다 복잡해요. 김종성 선생님은 명확한 철학적 입장에서 건축의 중요한 지점을 말씀하시길 좋아하시는 분이고 그 외에는 이야기 안 하시죠. 두 분은 기본적으로 말씀이 별로 없으시고 과묵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두 분에 비하면 저는 뭐든지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편이죠.

차이가 있다면 김종성 선생님은 본인이 철저한 모더니스트였을 뿐 아니라 활동한 대한민국 또한 알고 보면 아주 모더니스트 국가였던 거죠. 박해천 교수가 북한에서 내려온 분들 이야기를 하면서 서북 모더니즘이라고 했듯이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은 모더니즘이 꽃피었던 나라였던 건 맞아요. 심층적으로든 피상적으로든 그걸 받아들여서 우리를 다시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죠. 그런 의미에서 김종성 선생님은 자신과 딱 맞는 곳에 계셨던 거죠. 특히 대한민국 대기업을 상대하면서 거대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고요. 절대적인 시공 퀄리티라는 당시 시대의 한계가 있긴 했지만,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동조해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에 계셨던 것이죠.

반면 김태수 선생님은 미국은 물론 아마 전 세계적으로 건축문화가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에서 활동하셨어요. 그곳은 모든 건축허가가 우리나라의 문화재 심의 수준이라고 보면 되거든요. 그런 곳에서 자신의 마음속 깊이 갖고 있던 것을 펼치려면 고도의 능숙한 플레이가 필요하죠. 그래서 김태수 선생님의 어휘가 훨씬 다양해요.

저는 서울건축을 다닐 때나 김태수 선생님 사무소를 다닐 때나 제 보스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어요. 지금도 어떤 회사에서 최대한 배우고 나가려면 그런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회사는 하나의 기관(institution)이기도 하니까요. 서울건축이야 워낙 아카이빙이 잘 되어 있었던 회사고, 제가 다닐 때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은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것이었는데 지하실이 아카이빙 룸이었어요. 그때 회사 허락 받고 청사진도 굽고 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아름다운 손도면이 많았으니까요.

제가 두 분에 대해서 전문적인 연구를 한 건 아니지만, 두 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했을 때 저는 상대적으로 김태수 선생님의 작품을 더 많이 알았어요. 젊은 시절에 하신 주택은 다시 봐도 정말 감동적이에요. 뉴잉글랜드라는 토양이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맘껏 펼치지 못했을 거고요. 결국 그 출구를 한국에서 찾은 거죠. 한국에서 초기에 하신 것 중 하나가 국립현대미술관인데, 어찌 보면 절충식에 가까워요. 김태수 선생님은 그만큼 담론의 범위가 넓어요. 김종성 선생님은 자신의 개인적인 배경에서 건축의 단서를 찾는 분이 아니신데, 김태수 선생님은 그런 부분이 있으시죠.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김태수 선생님이 오히려 한국에서 훨씬 더 추상적인 건축을 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대덕의 엘지연구소 같은 건 전혀 로맨틱한 생각이 개입되지 않았죠. 여전히 김태수 선생님은 땅과 한판 붙는 태도, 그런 감각이 인상적이에요. 국립현대미술관이 압도적인 경우죠. 땅을 추상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물성을 읽는 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디테일에 대한 집념은 두 분이 다 똑같고요.

시차를 두고 두 분을 겪었던 게 재미있었어요. 그렇다고 김중업, 김수근 선생님처럼 성향이 아주 다른 두 분도 아니었고요. 실무 건축가로서는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서 좀 더 중요한 위치에서 일했기 때문에 배운 게 더 많았죠. 지금도 제 회사 운영의 일정 부분은 김태수 선생님께 배운 거예요. 매주 월요일에 전체가 모여 주간회의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장하는 방식이랄까요. 김태수 선생님이 그리 사교적인 분은 아닌데 깊이 있는 교우 관계를 통해서 건축가로 계속 성장하는 걸 가까이서 봤으니 까요. 미국 사회에서 그분의 지위가 대단해요.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았고, 여전히 현역으로 호흡이 길게 활동하시죠.


소장님의 초기작 중 몇몇 도면을 보면 질서를 찾고 싶어한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게 본인의 성향일 수도,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건축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고 할까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무심하게 긋는 선은 없어야 한다.’ 제 편견일 수 있는데 도면을 보면 질서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벽이 가기로 했으면 가야 하는 거에요. 자신이 부과한 틀과 질서 속에서 스스로 제약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게 건축이지, 질서를 만들어놓고 지키지 않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줄 안 맞으면 아주 싫어하는 일종의 강박 같은 거죠.

그 극단의 작업을 해본 게 바로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예요. 연습공간인 배구 코트와 숙소를 한 건물에 담으면서 정방형 공간을 설정하고 원형을 품고, 지붕은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구조로 풀었어요. 엄청나게 고생했죠. 정방형의 공간 안에 고도의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처음에 부여한 정방형, 원, 대각선 틀 안에서 그걸 다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도면을 죽어라 많이 그리면 해결되더라고요. (웃음) 사실 공간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에 필요한 절대적인 기하학적 규칙이라는 건 없어요. 대부분 공간은 건축가가 스스로 부여한 질서 안에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 인터뷰 ③으로 이어지며, 인터뷰는 오픈하우스서울 2018 홍보 기간 중 한편씩 업데이트됩니다. 

까오 흔들의자 사진 박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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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아트사이드 갤러리, 황두진 2018년 10월 21일 2:30PM
VisitYourself 춘원당, 황두진 *춘원당한방박물관(춘원당한의원 신관 5층)은 전시 기간 중 상시 방문 가능합니다.  개관 10주년 특별전 <춘원당(春園堂) 이야기_평양에서 종로까지>  2018년 9월 17일~12월 31일 개관 시간: 월화수금 9:30-18:00, 목토 9:30-12:30, 일요일 법정공휴일 휴관 공식홈페이지 http://www.cwdmuseum.com/ 오래된 것이 새 것을 잉태하다: 춘원당한의원 신관 나와 우리 사무실 사람들은 거대하고 오래된 도시 서울에서 일하는 건축가들이다. 이것은 우리를 여러가지 도전적인 상황에 놓이게 한다. 오래된 것과의 조우는 필연적이다. 오래된 것 중에는 그냥 낡아서 사라지려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안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도 있다. 다 버릴 수도 없고 다 취할 수도 없다. 동시에 이 도시는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라고 요구해온다. 이 절박한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만큼 흥미로운 일도 없다. 경기를 하면서 규칙을 알아나가는, 그런 상황과도 같다. 춘원당한의원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돈의동과 낙원동 일대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창자가 꼬이고 얽혀있는 곳이다. 공사용 차량이 진입할 수 없는 절대폭 미만의 도로들, 남녀 혹은 남남이 드나드는 모텔들, 한 그릇에 불과 2-3천원 남짓한 냉면을 파는 싸구려 음식점들, 그리고 한 때 종삼으로 불렸던 쇠락한 윤락가의 자취 이 이 지역을 구성한다. 종로에서 이 지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시계가 갑자기 이삼십년 전으로 돌아가는 듯 하다. 서울 느와르(Seoul Noir)의 배경이 되고도 남을 지역이다. 이 지역의 역사는 깊다. 동으로는 종묘의 담장이 버티고 서 있고 서로는 파고다 공원이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남쪽을 향해 나 있는 큰 길, 즉 돈화문로의 바로 옆이기도 하다. 그러니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의 하나인 셈이다. 춘원당한의원이 이 지역에 자리 잡은 것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이었다. 1847년 평북 박천에서 시작되어 7대째 내려오고 있는 이 유서 깊은 한의원은 ‘서울 구도심을 지킨다’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주변 상황이 아무리 열악해져도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새로 지어지는 춘원당한의원 신관이 이 지역의 미래가치를 담았으면 한다는 희망 또한 이야기했다. 주변의 폐쇄적인 건물들과 대비되는, 투명하고 개방적인 건물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정식 명칭이 ‘춘원당한의원박물관’인 신관은 그 이름처럼 복합적인 건물로서 계획되었다. 이것은 한의학의 정기신론(精氣神論)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즉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며 약을 달이는 공간이 사람 몸의 정(精)을 다스리는 것이라면, 공연, 강의 및 전시 등 다양한 행사를 경험할 수 있는 지하의 문화공간은 기(氣)를 키워주고, 춘원당의 역사 및 한방의학의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는 박물관은 신(神)을 고양하기 위한 공간에 해당한다.  2017년에는 5층 정면 테라스 부분에 전시장이 증축되었다. 이 모든 시설은 환자를 포함한 방문객들에게 공개되며, 건물 내의 각 부분에 혼재되어 분포한다. 각 시설로의 접근은 다양한 경로로 이루어진다. 건물 정면의 완만한 계단은 2층의 진료 대기실로 연결되며 몸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서 2층까지만 운행되는 엘리베이터를 따로 설치하였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내방객은 주차장에서 바로 연결되는 또 다른 엘리베이터와 주계단을 통해 건물의 각 부분으로 접근할 수 있다. 지하의 문화공간은 별도의 외부계단을 통해서도 연결되어 건물의 나머지 부분과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밖에도 후면도로를 이용하여 배달차량이 드나드는 등 건물은 주변 지역과 다양한 접점을 통해 연결된다. 재료적인 측면에서 춘원당한의원 신관은 역시 한방의 기본정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가급적 페인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처음부터 있었다. 건물의 내외부는 현무암과 송판널 노출 콘크리트, 목재, 그리고 유리로 마감되었고 금속은 무광 스테인레스와 아연도금마감으로 처리했다. 즉 재료의 성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천연재료로 약을 짓는 한방의 기본 정신을 건축에 담고자 한 것이다.  설계과정의 초반에는 한의원의 운영체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기존 본관 3층의 탕전실(약 달이는 방)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 시설을 신관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진료실이 확장될 예정이었다. 그것은 기계적이면서도 동시에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구도심이라는 도시의 뱃속에 자리 잡은 창자였다. 춘원당한의원은 이 시설의 발명특허까지 갖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린 스케치에서부터 이 탕전실은 신관의 설계를 풀어가는 핵심적인 공간이었다. 마침 북향 대지여서 직사일광으로 인한 문제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 놓이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었던 기존의 탕전기를 시각적으로 노출시키기 위해서는 수 많은 기술적 협의와 시각적 조율을 필요로 했다. 우리는 이 기계를 통해 어떤 시적인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건물 안에서 약을 준비하고 달이는 과정이 거리 풍경의 일부로서 드러나는 새로운 개념의 한의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춘원당한의원 신관은 우리가 그 동안 꾸준히 해 오고 있는 일련의 서울 구도심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복잡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무거운 작업이다. 구도심이라는 콘텍스트, 그리고 유서 깊은 한의원이라는 기능이 더해져 ‘오래된 것이 새 것을 잉태한다’라는 건축가로서 우리의 믿음을 실천할수 있는 기회였다. 사이트(site)와 프로그램(program)은 건축창작의 영원한 두 대척점이다. 양뱡향으로부터 같은 주제를 통해 접근할 수 있었던 이 흔치 않은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에 감사한다.  글 황두진  사진 박영채 황두진건축사사무소 www.djharch.com 황두진 건축가 황두진은 서울대와 예일대에서 수학했다. 그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 현대건축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건축가로 평가받고 있다. 한옥을 현대건축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일련의 작업을 해오고 있기도 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하여 유럽을 순회한 <메가시티 네트워크 한국현대 건축전>에 참여했고 동 전시회의 전시디자인을 맡아 새로운 개념의 건축 전시를 보여준 바 있다. 주요 작업으로 Won & Won 63.5,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 한국관, 춘원당, 엘주택, 휘닉스 스프링스, 가회헌, 한강교량보행자시설(한남, 잠실, 동작), 갤러리 아트사이드, 웨스트빌리지, 열린책들 등이 있다.  저서로는 <가장 도시적인 삶-무지개떡 건축 탐사 프로젝트>(반비, 2017), <황두진-다공성·구축술·시스템>(열린집, 2016), <무지개떡 건축-회색 도시의 미래>(메디치미디어, 2015),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해냄, 2005), <한옥이 돌아왔다>(공간사, 2006) 등이 있다. 대한민국 한옥공모전 올해의 한옥 대상(목경헌, 2016), 서울특별시건축상 우수상(원앤원 63.5, 2015), 대한민국공공디자인대상 대상(통인시장 아트게이트, 2012), 서울특별시건축상 우수상(더 웨스트 빌리지, 2012), 대한민국 한옥공모전 올해의 한옥 대상(엘주택, 2011),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상 공동수상 (북촌 한옥, 2009),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집운헌, 2009),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가회헌, 2007)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건축 춘원당한의원박물관 설계 담당 김수현, 임하정, 박의진 위치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153-1외 6필지 지역 지구 일반상업지역, 지구단위계획구역 주요 용도 문화 및 집회시설 및 제1종근린생활시설(한의원 및 한방박물관) 대지면적 626.58 ㎡ 건축면적 373.74 ㎡ 연면적 1882.52 ㎡ 건폐율 59.65% 용적률 232.28% 규모 지상6층/지하1층 주차대수 10대 구조방식 철근콘크리트조 내부 마감 송판널노출콘크리트, 무늬목, 투명에폭시도장, 원목마루, 타일 외부 마감 현무암, 복층유리, 적삼목 구조설계 단구조 기계설비 보우기술공사 전기설비 신한전설 시공 장학건설(건축)+장학디자인(인테리어) 설계 기간 2007. 1~2007. 5 시공 기간 2007. 4~2008. 9 건축주 윤영석 탕전기설계 및 제작 청산 ENG 박물관 자문 쇳대박물관 박물관 전시대 제작 최가철물점 일반가구제작 모티브 사인 및 그래픽 투플러스
VisitYourself 춘원당, 황두진 2019년 9월 19일 6:26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