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④

사무실을 옮긴 지 1 정도인데, 자리가 고정되지 않은 오픈 오피스 개념을 도입했어요. 내부 반응은 어떤가요?

일단 좋아요. 저보다도 직원들이 좋아하니까. 사무실의 경우 물리적인 공간을 바탕으로 일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회적인 분위기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오피스 개념보다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멤버십 개념으로 바꾸고자 해요. 아주 중요한 이슈예요. 여기 있을 필요도 없고 저기 있을 필요도 없어요. 공간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만 멤버가 만들어내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은 거죠. 직원, 소속 같은 개념보다는 개개인이 건축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다른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업무공간과 공용공간이 같은 비율입니다. 공용공간이 상당히 넓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업무공간의 연장이죠. 자기 자리에서만 일하지 않고 회의가 없을 때는 열린 공용공간에서 일하기도 해요. 팀끼리도 자주 회의를 하니까요. 공간의 구분은 없는데 성격은 다르게 하고 싶었어요. 하나는 여유 있게, 하나는 밀도 있게 일하고 작업하는 분위기이에요.

 

직원들의 선호도는 어떤가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달라요. 작업 공간이 답답하다고 느끼는 친구들은 미팅룸에 컴퓨터를 가지고 와서 일하기도 하고 건물 위층에도 낮 동안 쓸 수 있는 라운지가 있는데 그곳에서도 일할 수 있도록 시설이 개방되어 있어요. 원하는 공간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인데, 데스크톱이 아닌 랩톱을 쓰고 클라우딩 서버를 이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앞서 ‘Kit & part’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울릉도 프로젝트는 건축을 컴포넌트로 해석하지 않는 지점이 온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엄밀히 이야기하면 울릉도 코스모스 호텔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내피는 컴포넌트(거푸집)가 건물 일부로 남아 융합된 경우예요. 안쪽 거푸집을 떼어내는 시공상 난제와 촉박한 공사 기간을 극복하기 위해 거푸집에 단열재를 치부하고 이를 뒤집어 매입하는 아이디어로 해결했어요. 거푸집이 인테리어 마감 가이드 역할을 하고 거푸집과 마감 사이 공간을 냉난방 챔버로 썼죠.

지금 3D 프린팅이 발달해 많은 논의가 이어지잖아요. 만약 모든 것을 이음새 없이 하나의 프로세스로 프린팅한다면 정말 일체화된 부품이 공간화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이런 부분에 관심이 많아요. 오래된 영사기 하나를 갖고 있는데, 이 영사기의 기계적인 부분을 줌인(zoom in)해서 촬영하면 드라마틱한 공간이 그 안에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만약 건축 스케일의 3D 프린터가 있고 건축 공간을 3D 프린팅하여 생산한다면 컴포넌트가 구별되지 않고 그야말로 일체화된 공간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산업 측면에서 보면 기술이 가져올 패러다임의 변화는 매우 크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3D 프린팅으로 3일 만에 건물을 만들 수 있다는 상상은 극히 건축가적인 시각이고, 그보다도 중요한 건 3D 프린팅이 가져올 물류 개념의 혁신이 아닐까 싶어요. 자재가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중요해요. 현장의 개념이 바뀌는 거죠. 현장이 공장이고 공장이 현장이 되고요. 래미안 모델하우스 입면에 쓴 3mX3m 패널을 예로 들자면 물류(logistics)를 고려해 4.5t 트럭에 맞춰 컴포넌트 사이즈를 생각해 낸 거예요. 그런데 현장 생산이 가능해진다면 기성품의 치수(dimension)가 필요 없어지고 다른 방식이 될 것이라고 봐요.

 

건축을 제작 방식의 측면에서 들여다보았다는 점은 여전히 중요해 보여요. 한국 건축의 가장 아쉬운 게 그동안 구축에 대한 논의보다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논의 중심으로만 전개된 게 아닌가 하는 부분이거든요.

그 시대에는 그것도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건축이 건설과 구분이 되지 않고 본의 아니게 그 영역에 대한 독립성을 획득하지 못했으니까요. 김수근, 김중업 선생님께서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따로 논의되었고요. 다른 건축가 선배님들은 낮아진 위상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싸움(struggle)의 과정이었다고 봐요. 건축은 건물을 짓는 행위보다 더 다차원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대중에게 인지시키기 위해 더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신 거죠. 이에 대해 대중이 이해를 하거나 원활하게 소통하지는 못하고 건축은 어렵고 철학적이라는 이해로 가버렸지만, 그런데도 건축이 특별하다는 인식은 정립된 것 같아요. 덕분에 후배들이 관심을 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해요.

 

텍토닉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것 같아요. 또 두드러지는 기술적 성취나 시도가 없는 게 아닐까 싶고요.

기술적으로 흥미로운 작업이 충분치 않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안타까운 일이죠. 분명 엔지니어링의 영역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특강 제목을 “THE_SYSTEM LAB Report”, 부제로 “Making Story”라고 써요. 만드는 것에 관해 이야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기도 해요. 결국, 건축은 짓는 게 중요한데, 짓는 것에 대한 새로움이 이야깃거리를 만든다는 이야기도 되고, 실제 만드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하니, 제작과 새로운 기술적 구축에 관한 이야기가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이죠.

 

새로운 재료, 다른 생산 방식을 도입하려면 설계사무소, 엔지니어링, 시공팀까지 소통하는 방식이 매우 중요해 보여요. 기술적인 소통의 방식이 사무실에서 어떻게 진화되어왔을지 궁금해요. 처음에는 작은 규모의 몰드(형틀) 제작에서 시작해 점점 더 확장되는 듯한데요.

안타까운 건 제가 어떻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실제로 만들어야 하는 분들이 안 하겠다고 한다면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항상 쉽지 않은 결정에 기꺼이 동조해 준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지점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과정을 협업(collaboration)이라고 말하게 돼요. 왜냐하면, 제가 감당하는 리스크와 그분들이 감당하시는 리스크는 전혀 다른 부분이기 때문이에요.

최근 우리는 대형 회사들과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실행을 못하더라고요. 리스크가 큰 일이라서요. 담당자가 작업의 결정권자가 아니라서인 것 같기도 해요. 상대적으로 거대 자본이 있는 회사에서는 이 과정이 쉽지 않아요. 그런데 영세한 곳에서 꿈을 꾸시는 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렇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제 언변이나 설득의 힘이 아니었어요. 논리적으로 그분들을 설득하지는 않아요. 그저 ‘꼭 같이 해주셨으면 좋겠다, 꼭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사장님이 내리셔야 한다’라고만 해요. 고민을 많이 하셨겠지만 결국은 함께 해주시더라고요.

 

인상 깊었던 협력업체가 있나요?

FRP, 폴리카보네이트, 몰드 작업, 기계적 작동에 관한 부분, 파이프 밴딩 등등 너무 많죠. 한번은 함께 했던 회사가 망해서 그때그때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했어요. 정말 작은, 영세한 곳이었어요.

 

시공 프로세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신 것을 보았어요. 이게 더_시스템 랩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었어요. 제작 프로세스를 설계하고 엔지니어링을 디자인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는 표현을 쓰셨는데, 해당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내부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해요.

제작비가 예상 비용 안에 들어오는 게 중요해요.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비용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어서 저희가 시공 과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시공사에서 하려는 방식 말고, 우리는 계속 비용 절감(cost saving) 측면을 제안하는 거죠. 우리의 의견은 계속해서 개진하는 거예요.

우리는 도서 납품 후에도 일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어요. 감리까지 맡는 프로젝트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프로젝트에서는 참 어렵죠. 그래서 어떻게든 감리 계약을 하려고 해요. 감리자가 해결 방법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가 지원해 주겠다는 거죠.

감리 계약을 안 하면 설계 계약서에 따라 도서 납품과 동시에 업무가 종료되어요. 그러면 발주처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갈등과 분쟁이 생길 수 있기에, 감리비가 적어도 오해 없이 감리를 맡으려 하죠.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시공사가 특수한 설계 내용에 대해 비용 문제와 기술적 방법론을 사전에 연구하고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구축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던 초기에는 억울한 일들이 많았어요. 시공사에서 파견 나오신 분들이 ‘이건 안된다, 디테일이 안 나온다’라고 하시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해결해 드리겠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무책임해질 수는 없으니까. 물론 초반에는 그에 대한 비용을 받지 못했어요. 요즘은 상황이 달라요. 그러한 노력에 대해 존중받고 함께 비용을 정산받아요.

 

프로젝트에서 가장 최적화된 솔루션을 찾아가면서 시스템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 더_시스템 랩의 시스템 구축 과정이라고 하셨는데, 단지 건축의 구축 문제가 아니라 이슈 비용과 기획 등 건축 업역이 확장하는 느낌도 들어요. 소비자를 이해하고 어떻게 건축을 상품으로 바라볼 것인가로 보이기도 하고요. 이런 전략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각을 전공했다고 조각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듯이, 3차원 형상을 상상하고 제작의 능력까지 보유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조각 전공자가 공업디자인이나 자동차 디자인으로도 많이 편입되기도 하고요. 순수 예술을 전공했지만 거기서 체화된 개념이 다른 곳에서 적용되었을 때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융·복합적인 것이 핵심이 아닐까 생각해요.

건축도 본질의 문제에 대해 딱 그 케이스를 만드는 사람만으로 충분하다면 업역이 확장될 필요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종합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게 건축이잖아요. 예전에 “건축 계획 각론”이라는 교과가 있었어요. 예를 들면 복도는 폭이 몇 m여야 한다는 식의 규율을 정리한 건데, 매우 모더니즘적인 매뉴얼이에요. 그 당시에 종합적이라 하면 구조, 전기설비, 소방, 미적 아름다움, 기능과 동선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지만, 지금 종합이라는 말 안에는 카테고리와 요소가 더 많아진 것이라 봐요. 예를 들면 물류나 이용자 층위에 대한 정보와 이해 등이 더 포함되고 있어요. 사회 현상과 방향까지 광역으로 늘어나고 있는 거죠. 여러 가지 상황과 행동, 그리고 상호작용까지 확장된 경우라고 할 수 있어요.

리테일 디자인을 예로 들면, 저를 기획자로 초청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제 디자인이 훌륭해서보다 리테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총괄건축가(MP)가 되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는 식이에요. 그래도 기획부터 끝까지 풀 패키지가 중요하지, 중간중간 참여하는 것은 선호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기는 하죠. 그러나 제가 선호하지 않을 뿐이지 컨설턴트로서의 가능성은 여전히 건축가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어쨌건 저는 골수 설계/디자이너예요. 그러나 건축 근방의 것들에도 접촉할 수(tapping) 있고 관심이 있는 사람인 거죠.

 

건축가 본연의 일이 주를 이루지만, 주변부와 접촉하고 확장하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최근에 코디네이터, 공간 크리에이터 등의 명칭이 많이 보여요. 그 분야의 전문성이 있겠지만…. 건축가들이 건축이라는 카테고리를 오픈 시스템으로 만들지 않고 너무 닫고 있어요. 다른 곳에서 치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 결벽증적인 반응을 보이죠. 닫혀있으면 본인의 업역을 넓히기 어려워요. 그런 의미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미디어 작가, 아티스트 등과 함께 일하는 경험이 매우 중요해 보여요.

최근 나오시마에 방문해 니시자와가 설계한 테시마 미술관을 보았어요. 흙으로 만들어진 두꺼비집 같은 것이었는데, 직접 가서 보기 전까지는 그저 구축 논리의 아이디어가 좋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직접 보니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이게 진정한 콜라보레이션이구나’하는 것을 목격했죠. 니시자와 류에가 직접 나이토 레이라는 아티스트를 선택하고, 그의 물방울 작업과 통합된 건축물을 설계했다는 지점에서 감동했어요.

아직 우리나라에서 예술과 콜라보레이션을 하라고 하면 요구사항 자체가 일차원적이에요. “한쪽 벽면을 비워달라, 여기에 현대 미술 작품을 걸 것이다(전시할 것이다)”라는 식이죠. 그저 빈 벽면에 작품을 걸기만 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통합(integration)이 아니니 기획을 다시 하고 싶다고 하면 이해를 못 해요.

그래도 하나은행 PLACE 1에서 진달래, 박우혁 작가와 함께했던 작업이 예외라고 볼 수 있겠죠. 제가 ‘아트 디스크’라는 것을 기획하고 아티스트들에게 공모를 했어요. 4명이 참여를 했는데, 진달래, 박우혁 작가가 공간을 잘 이해한 안을 내주었어요. 첫 콜라보라고 볼 수 있어요. 지하 1층 주차장 바닥 통로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빠키와 함께 했고요. 밋밋했던 통로 공간에 2차원 작업으로 3차원적인 입체감을 부여한 작업이에요.

어쨌건 테시마 미술관의 예는 작업이 훌륭해서 받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이렇게 협력할 수 있는 사회적인 인식과 시도에 대한 투자와 맥락이 한 차원 높은 것이기에 받은 충격이에요. 그 공간에는 큐레이팅이 따로 필요 없어요. 그대로 있으면 되기 때문이에요. 한 작품을 위한 단독형 미술관이죠. 이러한 형태는 지정된 예술 작품이 아니면 다른 것은 전시할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구조예요. 조금 예민한 부분이겠지만, 문화 인식의 영역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쨌건 업역은 오픈 시스템이 되어야 해요. 그러려면 건축가도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고요. 그래야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거예요.

 

‘산업적 공예성’이라는 표현이 교수님을 가장 잘 표현해준다는 생각을 해요. 형태와 공간이 통합된 건축을 보여주는 말이고, 울릉도 프로젝트를 통해서 확연히 나타났다고 봅니다. 산업적 공예성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 프로젝트가 있을까요?

사례라기보다는 방향에 관한 얘기예요. 그것도 물론 기술의 진보로 인한 방향이죠. 대량 생산(Mass production) 시대에는 사람들에게 선택권이 없었지만, 매스 커스터마이제이션(Mass customization)으로 바뀐 이후에는 뭘 사더라도 같은 모델의 다른 버전을 자신에 맞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어요. 매우 큰 사회적 변화예요. 저는 그 당시에도 그게 충격이었어요. 애플 컴퓨터를 사는데 사탕 고르듯이 색깔을 골라야 한다니! 결국, 매스 커스터마이제이션을 보면서 다품종 소량생산이란 표현도 쓸 수 있겠다 싶었죠.

그리고 앞으로는 마이크로 커스터마이제이션(Micro-customization) 시대로 넘어갈 거예요. 이제 매스(Mass)에서 마이크로(micro), 개인에 대한 문제로 넘어온 거죠. 개인을 위한 생산이 가능한, 개별화된 내용물을 3D 프린터로 뽑아내서 개인에게 가장 최적화된 제품이 집까지 배송되는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이제 공업 제품이라는 의미가 있을까? 공예는 똑같은 그릇을 만들어도 절대로 100% 똑같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방짜유기처럼 아무리 기술력이 좋은 장인이 만들어도 100% 똑같은 건 없는 거죠. 그게 공예의 속성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하나 개인을 위해서 생산되는 공예의 속성을 닮은 제품이죠.

그런 개념에서 건축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요. 마이크로 커스터마이제이션의 개념에서 보면 다 자기만을 위한 제품이기 때문에 가장 궁극의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건축은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는 개념을 많이 쓰죠. 많은 사람이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매우 민주적인 개념으로 이해를 하지만, 사실 그 대상 범위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소외되는 거예요. 유니버설 디자인에서는 17cm의 계단이 가장 편안한 높이 기준이 돼요. 하지만 2m 키의 사람과 어린 꼬마가 올라가기에는 불편한 계단이 될 수 있죠. 이 치수의 기준은 사실 150cm~185cm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에요.

그럼 마이크로 커스터마이제이션의 건축은 사람에 따라 실시간으로 최적화하며 변해야 할까? 이런 상상을 하곤 해요. 건축은 혼자 쓰는 물건이 아니므로 사고를 할 때도 갈등의 지점이 생기게 되죠. 아직 결론을 낼 생각은 없지만, 그냥 앞으로는 어떨지 계속 생각을 던지는 거예요. 결국은 처음부터 건축은 공공재의 성격이 있어서 어려운 문제예요. 이 갈등의 지점이 현재 제가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결국, 건축은 사회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교수님이 생각하는 사회적인 가치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도 사회적인 가치일 수 있고 공공성이라는 개념,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착한 건축의 개념도 당연히 가치가 있을 수 있어요.

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예요. 예를 들어 한강 프로젝트 때문에 만났던 몰드 제작을 하는 사장님은 사실 명절 선물 안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포장재를 찍어내던 일을 하시던 분이었어요. 처음 뵈었을 때 돈은 잘 벌지만, 인생의 낙이 없는 분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저희와 프로젝트를 하면서 건축 외피를 생산하게 되니까 갑자기 열정맨이 된 거죠. 본인에게는 뜨거운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회까지 확장된 느낌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자기 일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봐요. 그다음으로 공통된 키워드는 결국 ‘새로움’인데, ‘새로움’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 사회적인 인식의 발전이 사회적인 가치 창출이 아닐까 생각해요.

 

여러 재료와 구조에 대한 실험 중 UHPC를 사용한 PLACE 1이 분기점인 것 같아요. UHPC에 대해서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양산 프로젝트와 다락다락 등 일련의 프로젝트가 콘크리트 구조인데 단면이 노출되는 디자인이었어요. 더 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죠. 여러 가지 모색을 하던 와중에 PLACE 1 프로젝트의 외장 패널을 콘크리트로 하려고 했더니, 너무 두꺼운 거예요. 8cm 두께의 이미지를 보여주니까 엔지니어 쪽에서는 최소 18cm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18cm 두께로 잡아봤더니 너무 두껍고, 패널 하나의 무게도 6.5t이나 됐죠. 그러다가 어떤 협력사에서 연필통을 선물로 보내줬는데 쓰다 보니 한 실장이 이게 UHPC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찾아보기 시작했죠. 해외에서 교량의 연결 부위에 쓰고 콘크리트보다 5배 이상의 강도가 있었어요. 두께를 1/5로 줄여도 기존 구조를 대체할 수 있다고 해서 몇 개 검색해서 모크업 시도를 해봤어요. 그런데 안되는 거예요.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UHPC는 연구원과 학계에서 실험을 해왔는데 결국 한국건설기술연구원과 함께 테스트를 해보게 되었어요. 모크업을 하는데 돈이 굉장히 많이 들었죠. 우리가 비용을 다 부담했어요. 은행 쪽에서도 포기하라고 했어요. 시공사를 선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체에 대한 부담이 있어서 발주처에서도 이번에는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죠. 그런데 5번의 모크업이 실패한 후 몰래 마지막 실험을 하고 그게 성공하면서 지어지게 되었어요. 결국은 그 필통에서부터 시작된 거죠. 국내 업체들이 UHPC로 필통과 화분 같은 걸 만들어서 팔아요. 해외에서는 벤치처럼 스트리트 퍼니처에 많이 쓰이고 훨씬 범용화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PLACE 1의 경우 입찰 때 모든 시공업체가 포기할 정도로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로 알고 있어요. 모크업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요.

고민의 밑바닥에는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어요. 최진철 실장이 현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심했을 거예요. 지금이야 말할 수 있는 거지만 거푸집이 깨졌다는 문자, 모크업이 실패했다는 등등의 연락이 오는 게 너무 싫었고 전화 받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 때도 있었죠.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나요?

마지막 시연했을 때. 마지막 모크업이 성공하고 발주처 임원분들을 불러서 보여드렸을 때 놀라셨어요. 그때 좀 눈물이 났죠. 특강을 할 때도 그 당시 시연했을 때의 사진을 자주 보여줘요.  

 

UHPC라는 새로운 재료와 구조로 시도하면서 다양한 협력사, 엔지니어링과 긴밀하게 협업을 했습니다. 협업 과정의 경험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협업 과정에 두 가지 기분이 있어요. 하나는 애잔한 마음과 안 좋은 마음. 함께 협업한 엔지니어링 회사가 결과를 홍보할 때 우리가 진행한 이미지 자료, 거푸집 프로파일링, 도면과 같은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가져다가 마치 자신들이 다 한 것처럼 홍보하는 경우도 봤어요. 윤리적으로 맞지 않아 화가 많이 나기도 했죠.

 

PLACE 1에서는 외장 패널로만 활용했는데, 울릉도 코스모스 호텔에서는 현장 타설 구조체로 시도합니다. PLACE 1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을까요?

PLACE 1을 했기 때문에 훨씬 편하게 접근했어요. 물성에 대한 결과물을 알기 전의 불안감은 말도 못 했지만 결국 구현할 때까지 고생하고 난 다음에는 심리적으로 편했어요. 코스모스의 거푸집 제작도 쉬웠어요. 물론 2번 정도 모크업 실패가 있었고 훨씬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우리로서는 편했어요. 어느 정도는 결과물에 대해 예상하는 것이 있었고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기도 쉬웠어요. UHPC는 시각적인 부분도 그렇고 거푸집 자체의 완성도가 훨씬 높아야 해요. 그 기술이 굉장히 중요하죠.

지금 한남동에 세 번째 프로젝트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같은 UHPC로 반 패널, 반 공간의 개념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이건 콘크리트 두께가 더 얇아 3.5cm예요. 구조재는 아니지만 나름 공간을 형성하는 작업인데, 역시 만만치가 않아요.

 

구조를 해석한 터구조 대표님은 나중에 보니 울릉도 코스모스 호텔의 볼트형 단면이 UHPC에 구조적으로 가장 적합한 형태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UHPC는 얇게 할 수는 있으나 인장에는 취약한 재료였기 때문에 어떤 형태에 적용하느냐도 중요해지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그 구조에 가장 적합한 재료와 형태를 가져와야 하며 자기 완결적"이라는 교수님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형태의 생성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는데요.

힘이 흐를 수 있도록 하고 싶을 때 제 경우는 곡선을 쓰게 돼요. 힘을 받지 못하면 크랙이 가는데 스트레스를 나눠주기 위해서 제 작업에서는 곡면이 쓰여요. 폴리카보네이트의 경우 표면으로 힘을 흐르게 해야만 강성이 나오지, 판재로만 나오면 스트레스가 집중되죠. 울릉도도 볼트형 구조를 선호한 이유는 힘이 흘러서 땅으로 꽂아주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에요. 디자인적으로 의미가 없다기보다 구조적으로 취약한 거예요. 이런 게 재료적인 특성이죠.

자동차 디자인에서 중요한 특징 하나가 안전을 위해서 직선을 쓰면 안 되는 것이 있어요. 보통 자동차의 유선형을 바람에 대한 저항으로만 생각하지만, 충돌이 있을 때 힘을 빨리 차 뒤편으로 보내야 안에 있는 사람이 보호돼요. 직선으로 보이는 것 같아도 모든 차는 바람만 넘기는 게 아니라 충돌을 예상한 곡선이 있죠.

 

사람들은 가우디를 독창적인 형태만으로 인식하지만, 실제 그의 작업은 유기적인 형태에서 오는 가장 안정적인 구조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죠. 사그리나 파밀리아 성당을 설계할 때 추를 달아매어 거울로 반전시켰을 때의 형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해요. 건축가 김찬중의 설계 방식에서 유기적인 형태는 결국 안정적인 구조를 효율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결과물로 봐야 할 부분이겠네요.

물론 동역학이 아닌 정역학과 관련된 거지만 그렇게 되게끔 하는 게 중요한 부분이죠. 아치를 스타일로 보는 게 아니라 더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고 싶은 거예요. 자연적인 흐름이 있으니까요. 폴 스미스 플래그쉽스토어의 경우도 셸(shell) 구조와 같은 방식의 구조예요. 껍데기라고 하더라도 구조 기둥이 없으니까 건물의 응력 또는 구조적 스트레스가 표면으로 흘러서 땅에 꽂히게 되는 거죠. 결국, 구조의 문제인데 왜 사람들은 형태로만 인지하려고 하는지 조금 궁금해요.(웃음) OHS

 

진행 임진영
녹취 및 정리 우경희 
사진 이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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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01 건축가 김찬중 오픈하우스서울 2019 올해의 건축가 특집은 건축가 김찬중을 만난다. 더_시스템 랩 대표이자 경희대학교 교수인 건축가 김찬중은 산업 재료와 제작 방식을 건축에 끌어와 한국의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하면서 메이킹과 텍토닉 주제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제작 방식에 대한 프로세스에 개입하고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면서 김찬중의 주제는 콤포넌트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컨버전스로 확장하고 있다. 올해 오픈하우스서울 2019에서는 건축가 김찬중의 대표작을 방문하고 경험할 수 있는 스페셜 이슈를 준비했다. 건축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인터뷰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OpenHouse 가로골목 + MCM M:AZIT OpenHouse KHVatec OpenHouse 구 폴 스미스 플래그쉽 스토어 (현 헤리티크뉴욕) OpenHouse 우란문화재단  OpenHouse PLACE 1 OpenHouse 서울식물원 온실  OpenStudio 더_시스템 랩 오픈스튜디오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① 자유로운 곡면과 독특한 형태, 건축가 김찬중의 건축은 형태가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형태 안에는 공간 구성, 구조, 예산과 제작에서 최적화된 체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_시스템 랩 대표이자 경희대학교 교수인 건축가 김찬중은 산업 재료와 제작 방식을 건축에 끌어와 한국의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하면서 만들기와 텍토닉 주제를 탐색하는 건축가이다. 제작 방식에 대한 프로세스에 개입하고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면서 김찬중의 주제는 컴포넌트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컨버전스로 확장하고 있다. 이번 스페셜 테마에서는 건축가 김찬중과 인터뷰를 통해 그의 건축적 관심사와 생각을 나누고, 그가 지금까지 시도해왔던 다양한 건축 실험에 대해 들어본다.     아버지는 전문경영인이셨고 어머니는 한국 최초의 누드 크로키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강명순 화백님이십니다. 예술과 현실의 대립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목격했다고 하셨어요. 두 분의 역량 차이는 관리의 유무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모든 걸 매니지먼트하는 성향이었고 어머니는 모든 걸 흐트러뜨려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그림을 구상할 때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이 몰입하는 상태여서 두 분의 마찰이 많았죠. 아버진 휴지 한 통을 쓰더라도 ‘4인 가족 기준으로 어느 기간이면 다 소진할 수 있는지’까지 원칙이 있었어요. 항상 모든 게 정돈된 게 숨막혀서 아버지에게 반항도 많이 했어요. 지금은 달라요. 보기에 좋은 어질러짐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집중할 때 어질러지는 것은 괜찮지만, 끝나고 나면 모두 치우고 다시 어지르자는 입장이에요. 쌓아두는 건 창의적인 일이 아니라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더라고요. 공간도 중요하지만 라이프스타일도 그래요. 자신의 정체성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좋고 나쁘고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서 라이프스타일이 구성되면 굉장히 멋있어 보여요. 그렇지 않고 그냥 사는 경우는 족보 없는 물건들로 둘러싸이게 되는 거죠. 좋은 물건들과 디자인이 있는데 정체성이 없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이 살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인지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어머님이 자유로움이 충만하신 분이라면 아버님은 말씀하신 대로 관리하고 경영하는 분이시죠. 어느 분께 더 영향을 받으셨나요?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결국 어머니 성향이 더 맞는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처럼 정리하는 데 기쁨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논리와 규칙을 다시 세팅하는 것이지 청소의 개념이 아니에요. 그걸 할 줄 알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죠. 처음 몇몇 제자들과 사무실을 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비지니스라고 할 만큼 사무실 규모가 커졌는데, 관리하고 오퍼레이션을 짜고 타당성을 검토하고 논리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제 성향과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공간> 지를 자주 보셨다고 들었어요. 다섯 살, 여섯 살부터 봤던 기억이 있어요. 어머니가 창간호부터 모으셨을 거예요. 그중에서도 기억하는 특집이 있어요. 김태수 선생님, 김수근 선생님의 특집호. 당시에는 김수근 선생님이 발행인인 줄 몰랐어요. <공간>에 자주 나와서 ‘와, 대단한 분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본인 잡지였어요.(웃음) 그래도 역시 대단한 분이신 건 맞지만요.   당시에 도면이란 걸 인식했나요? 인식했죠. 저희 세대는 아카데미 과학 교재, 조립식 장난감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등각도에 익숙해요. 조립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과 잡지의 도면이 같다는 걸 인지했어요. 탱크나 전투기, 군함, 자동차를 만드는데 그 그림이 필요했는데, 집을 만드는 데에는 이런 게 필요한가 보다 했죠. 아카데미 과학 교재를 접한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레고처럼 부품과 부품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일종의 ‘형태 맞추기’죠. 도면 나오고 액소노메트리(axonometry)가 나오면 ‘사진은 여기서 찍었나보다’와 같은 논리로 연결하는 훈련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로트링펜으로 그린 미래도시에 관한 스케치를 보면, 단순히 그림을 그렸다기보단 계획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약간의 자폐 성향이 있었다고 해요. 혼자만 있으려고 하고 말도 거의 안 하고요. 방에 들어가서 온종일 혼자 그런 걸 그리고 있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그냥 그리는 게 재밌어서였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운전을 좋아하셔서 매일 나를 조수석에 태워 데리고 다녔어요. 그러면 집에 와서 그날 본 모든 길을 다 그렸어요. 약국, 양복점, 상회. 걱정을 많이 하셨죠. 커서 지도상회 같은 걸 하려고 하려나?(웃음) 사실 그게 매핑(mapping)이잖아요.    미래도시의 경우엔 다 이야기가 있었어요. 기억나는 건 공항, 비행기, 배, 항구가 나오는데, 쓰레기를 태워 발전하고 그 에너지로 방파제에 불을 켜는 연관성이 있었어요. 활주로를 짧게 하고, 수직 이착륙기로 착륙하고요. 건물은 국방부의 경우 미사일처럼 만든다든지 해서 기호화되어 있었어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죠.(웃음) 도시를 논리로 이해한다기보다 상징체계가 지배하는 도시로 이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인지하는 방식은 단순했지만, 도시가 지속할 수 있으려면 순환되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고 있었죠.   유학을 위해 준비한 포트폴리오 첫 장에 그때 그린 스케치를 넣었는데, 어떤 걸 전달하고 싶었나요? 포트폴리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얘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나는 어릴 때 이런 사람이었고, 지금은 이렇다’라는 개연성을 찾기를 바랐던 거예요. 자동차 스케치도 넣었어요. 한동안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거든요.   유년 시절의 집과 동네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유년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반포아파트예요. 딱 개발 붐이 일어났을 때의 아파트 키즈죠.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서 놀던 게 기억에 남는데, 그때는 차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스팔트 위에서 야구하고 땅따먹기하고 놀이터처럼 놀았어요. 안전하고 집의 시각적 범위 안에 있었던 거죠. 물성(material)만 달랐지, 어떻게 보면 콘크리트 바닥도 자연의 한 부분이었어요. 행복하고 자연스러웠어요. 한강 둔치가 정비되기 전이라 잡초가 우거져있었고 아파트에 살지만 강까지 바로 갈 수 있었어요. 한강 다리 밑도 많이 갔고요. 또 강가에 떨어지는 해, 낙조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보통 해지는 걸 보면서 각오를 다지지는 않잖아요. 내일은 뭐할까? 어떻게 할까? 미래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② 대학 시절에 선경스튜디오도 참여하셨는데요. 설계에 대한 또 다른 갈증을 해소해준 곳이 아닐까 싶어요. 선경스튜디오는 설계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었어요. 1992년 대학교 4학년 때 참여했는데, 당시 구성원들은 다들 개성이 강했어요. 저는 소위 정통 건축 교육이나 선배가 있는 작업실 분위기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너무 신기했어요. 반대로 그들이 보기에 저는 야생에서 온 사람이었고요. 정체성이 강한 친구들이었기에 많은 자극도 되고 부러웠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동시에 고대 다니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 면학 분위기를 부러워했으나, 동시에 그 한계, 패턴도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물론 다들 졸업 후에 개개의 정체성을 발전시켰지만, 학교가 만들어 낸 분위기가 있었어요. 패널 디자인도 책에서 나온 형식이 많았고요. 정보가 곧 스킬로 정착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객관적 정보를 얻는 데에는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는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대한 길찾기를 하게 되었어요. 전환점이 되었죠.   한울건축에서 2년의 실무 후에 유학을 하러 가셨어요. 한울건축의 스타일도 체계적이고 사무적인 틀을 가진 곳이 아닌가 싶어요. 집중도에 관해서는 어느 곳보다 세고 밀도가 매우 높았어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성관 소장님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아주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커다란 개념이나 이론보다는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한 디테일, 비례, 전통적인 건축의 판단기준을 지켜나가기 위해 애썼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퀄리티가 매우 높았어요. 오히려 첫 직장으로써 기초를 다지기에 좋은 환경이었죠. 대신 새벽 3~4시 퇴근은 기본이었어요. 사람들이 못 견디고 나가기도 하는데, 진정성 하나는 인정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어요.   하버드(GSD)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색이 없다는 점이 컸어요. 5곳에 지원해서 4개 대학에 붙었는데, 색이 너무 강한 학교는 고민이 됐어요. 예를 들면 콜롬비아 대학에서는 당시 그레그 린을 필두로 프리 폼(free form)이 유행하고 있었고, 엔지니어링 기반을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MIT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일은 실용주의 노선에 관심이 많은 학교였어요. 그런데 GSD는 강사(instructor)도 다양했고 이렇다 할만한 색깔이 보이지 않았어요. 어느 ‘학파’에 편입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막상 가보니 색은 있더라고요. GSD는 리더 양성소예요. 리더십 양성 교육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어서 경쟁이 매우 심했어요. 정치나 헤게모니같은 것도 있고요. 단순히 디자인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실무에서 겪게 될 싸움의 마이크로 버전이라 보고 긍정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죠.   유학 시절, 언어의 한계 때문에 디스 맨(‘this’ man)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어요. 말로 설명하는 대신 세세하게 만든 모형과 도면으로 보여주었다고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건축을 실체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정 지점보다 훨씬 더 많은 결과물이 필요했어요. 말로 하는 설명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제 결과물을 실체 과다로 받아들였어요. 일단 물량에 놀라워했죠. 개별적인 컴포넌트들을 만들어서 프로세스대로 하나씩 끼워가며 설명하곤 했죠. 보통 핀업이라 하면, 학생당 한 개 정도인데 저는 핀업룸을 도배하고도 남을 양을 만들어 갔어요. 양도 그렇지만 제 모델은 훨씬 더 많은 전달력이 있었어요. 아주 구체적으로, 추측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거든요. 지금도 사무실에서 3D작업을 많이 해요. 보여줄 장면(scene)도 많이 잡고요. 의뢰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확신을 하기 위한 과정이에요. 우리는 조감도를 믿지 않아요. 우리가 보거나 경험하는 시점이 아니니까. 그래서 눈높이에서 투시도를 많이 만들어서 설계와 경험을 체크하고 건물을 미리 다 지어본다는 생각을 해요. 실체를 구체적으로 만드는 태도는 마이크로센터, 홈디포, 제 언어적 한계, 이 3가지의 융복합적인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컴포넌트가 명확해야 했고, 컴포넌트들로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체계까지 모두 이 세 가지의 영향을 받은 거죠.   마이크로센터와 홈디포라는 일반 상점에서 건축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도 흥미로워요. 유학생 시절, 너무 외로웠어요. 홈디포를 구경하거나 마이크로센터에 가서 부품을 사고 컴퓨터를 분해하고 새로 조립하기를 반복하는 게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컴퓨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나에겐 컴포넌트였고, 계속 그것으로 놀다 보니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작업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죠.   ‘홈디포(The Home Depot)’는 건축, 조경에 관련된 하드웨어를 파는 창고형 마트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종류의 건물도 홈디포에 있는 상품으로 다 지을 수 있다”라는 게 이 마트가 표방하는 바죠. 홈디포에서 모든 것들이 부품화되어 유통되는 것을 보며, 결국 건물도 하나의 거대한 조립 체계라는 것을 느꼈어요. 요소들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과 그에 대한 분명한 이유 – 이건 피터 아이젠만의 영향이지만 -가 저로 하여금 설계와 프로세스의 단계적 과정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사무실에서도 너무 멋진 것을 만들어보라고 하지 않아요. 최단 시간에 이 지점에 다다를 수 있는 동선을 잡으라는 식의 요청을 할 때는 있어요. 발주처에 설명할 때도 명확하게 의사 전달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막연히 말하지 않게 되고, 어떤 부분이 개선되는지 객관적이고 합리적 타당성을 갖고 말하게 돼요. 이런 관점들이 그때 만들어졌죠.   마이크로센터와 홈디포를 통해 건축이 하나의 ‘산업’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는데, 반대로 실제 건축 산업은 워낙 보수적이죠. 그 때문에 건축에 적용 가능하기 위해 부딪혔던 점이 있을 것 같아요. 건축은 선발 산업이 아니라 후발 산업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종합 산업이죠. 종합 예술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는 예술이 산업이던 때도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엔터테인먼트였기 때문에 예술의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컸죠. 물론 지금의 산업은 그때와는 다른 산업이고요. 건축이 후발 산업이라는 의미는 뒤떨어진다는 것이 아니에요. 건축은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부품들이 다른 분야에서 파생된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건축에 통합적으로 적용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의미예요. 예를 들어 건축에서 유리 접합부를 개스킷(gasket)으로 막는데, 이는 자동차 산업에서 소음과 빗물 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해법이 건축에 적용된 거예요. 건축은 시대의 주력산업에서 파생된 것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어요. 건축 안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찾으려고 한다면 많이 힘들 거예요. 오히려 다른 산업에서 벤치마킹할 부분을 생각하고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적용할지를 생각하다 보면, 5~10년 뒤에는 건축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와 있으리라 생각해요. 즉, 다른 산업에서 안정성을 인정받고 검증된 것이 건축에 합쳐지게 되는 거죠. 주력산업의 방향성에 대한 이해는 건축의 다음 단계를 예측하는 데에 필수적이라 생각해요. 건축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앞당길 수는 없지만, 건축은 후발 산업인 대신 종합산업이니까요.   그런 의미로 한국에선 건축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모더니즘 신화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모더니즘은 정치적인 상황과 많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건축 자체로 말하기보다는 사회적 패러다임과 정치적 방향성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전쟁 이후였고. 사회주도세력 중 정치적 신념을 건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그런 부분들이 녹아 들어갔던 거죠. 여전히 지금도 그때의 잔재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집권당이 바뀌면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바뀌거나 사라져버린다거나.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건축물이 의미하는 게 크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권력을 쥐게 되면 바꾸고 싶어 하는데, 눈에 띄게 바꿀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토목, 건축, 환경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부분에 건축가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그래도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당시 아방가르드 운동과 함께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사실 건축은 누군가 자본을 대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분야잖아요. 자본과 연결되어 있고 가장 많은 영향을 받다 보니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성향에 건축이 편향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아니다’라고 투쟁하면 더는 일을 주지 않겠죠. 그러면 건축을 실제로 구현하지 못하는 페이퍼 아키텍트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중화시킬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요. 건축주가 신념보다 공적인 가치에 눈을 뜨게끔 해주는 게 건축가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공공성도 요즘은 너무 편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공공성은 미학적인 부분일 수도 있고, 기술적인 부분이나 개념일 수도 있어요. 여러 방법을 통해 공공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공공의 사람들이 바로 쓸 수 있느냐 없느냐에만 편협하게 생각해요. 건축은 그 자체로 공공재의 성격을 피할 수 없어서 다양한 사고와 실험의 적용에 높은 가치가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공성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좋아요’를 많이 받는 포퓰리즘적 방향으로만 향하는 게 아니라요.   건축계를 지배하는 신화적 시각에서는 컴포넌트와 조립식 시스템을 통해 건축을 산업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가볍다고 비판했을 수도 있겠어요. 그렇죠. 왜냐하면, 그전의 건축은 철학적 사고와 연동된 체계이거나, 정신적 가치에 대한 표현 같은 게 있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해주냐 아니냐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모더니즘 이후 우리나라는 신비주의로 흐르는 경향인 것 같고요. 건축은 쉽게 이야기되거나 이해되는 것이 아닌, 고뇌하고 어렵고 고차원의 문제라는 식으로 포장되어 있어요.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③ 이론적 배경의 출발점은 피터 아이젠만이었지만 케네스 프램튼(Kenneth Frampton)의 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어요. 글은 언제 처음 접했나요?   한국에서 대학생 때 아티클로 접했던 것 같아요. 책으로 접한 것은 1997년~98년 정도였고요. 스위스로 교환학생을 가기로 하게 된 계기도 ‘버내큘러 아키텍쳐’에 대한 케네스 프램튼의 내용이 많은 영향을 줬어요. 케네스 프램튼은 책에서 동서양 건축의 비교,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소재와 소재의 결부 방식, 중국이나 일본의 목공예 결부 방식이 어떤 식으로 환경을 구축하는가에 관해 이야기해요. 그가 말하고 있는 논리는 텍토닉인데, 피터 아이젠만의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어요. 인문, 사회, 과학적인 컨텍스트로 폭이 더 넓어졌다고 느꼈죠. 피터 아이젠만이 건축가 사고의 논리성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케네스의 책에 와서는 더 확장된 느낌이었달까요. 그런 부분에 매료되었어요. 구축의 논리를 역사적으로 다루기도 하고요. 그래서 직접 스위스라는 사회를 경험하고, 환경이 설계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을 확인하고 싶었어요.   지역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계신가요? 지역성은 수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최근 VR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만, 지역성을 벤치마킹함으로써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운영하는 방법과 관계에 대한 학습, 그리고 우리 지역 사회에 어떻게 반영해야 할 것인가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좋은 모델의 재현으로는 해결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쓰타야처럼 해달라는 사람들은 많아요. 그러나 그 어떤 모델도 한국에서 현지와 똑같이 성공할 수는 없어요. 일본인의 직장 문화와 그들이 갖는 취미 세계, 종업원들의 큐레이션 능력, 그 누구보다도 경험이 많다는 것 등이 함께 작용해야 하는 거죠. 그저 상품과 음식, 책만 꽂힌 공간이 생겨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걸 받아들이는 상태여야 하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무얼 해야 하는 걸까? 한국의 쓰타야는 결국 다른 것이어야 해요. 쓰타야를 통해 인사이트는 얻을 수는 있어도, 수출할 수 있는 모델은 아니라고 봐요. 모든 게 글로벌해지더라도 지역성은 생존력이 클 거라고 봐요.   건축적인 측면에서 지역성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가 될 수 있다고 보나요? 영향을 미치는 요소일까요? 지역성은 영향을 미치는 요소예요. 지역성을 만드는 인자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가 문제예요. 지역성의 가장 직접적인 개념으로는 프로젝트의 특수 상황, 특히 발주처의 상황에 대한 맥락이 있어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는 발주처의 상황보다는 건축가의 입장에 치우쳐 있어요. 예를 들면 프로젝트의 정의를 지나치게 지형적 관계성에 두죠. 갤러리를 절벽이 있는 대지에 최대한 어우러지게 만들겠다는 것처럼요. 그런 판단 이전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건축주의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다음에 지형 등을 고려하는 거고요.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비용의 문제가 먼저 고려가 되지 않는다면 작업이 완성되기 힘들어질 거예요. 많은 사람이 의뢰인에 대한 고려를 비즈니스적이라 생각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것이 인문학적이고 사람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해요. 파트너쉽을 가진 프로젝트를 만들어나가기란 너무 힘든 일이에요. 비용만 주면서 원하는 대로 만들라고 하는 의뢰인이 몇이나 될까요? 대부분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건축가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지는 않아요. 따라서 건축가는 설득해야 하죠. 그들을 이해시키고 끌고 와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사람들의 고민은 직접적이고 자극적이기 때문에 건축가가 들여야 하는 노력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죠.   그저 고상하게 이야기하는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겠네요. 그렇죠.   귀국 후 진행한 대표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어요. 대학교수로 왔지만, 당시 한국의 시장이나 상황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요. 그때는 일단 너무 몰랐어요. 의뢰인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거의 없다가, 교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나마 ‘교수’가 약간의 보증수표로 작동하는 시장은 아주 작아요. 또 저와 일을 하긴 하지만 교수 타이틀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부리기도 쉽지 않죠. 이건 당사자들의 인식 문제예요. 정말 심한 사람들은 업체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왜냐면 자신이 상대하는 건축가가 명성이 없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지‘,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 식의 말들을 하는 사람도 있죠. 이런 갈등이 제가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의 실무 경험이었어요. 업체 취급하거나, 선생 취급하거나. 당시 저는 35살이라는 이도 저도 아닌 나이였고, 스스로 증명해내기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첫 프로젝트는 주로 서울시의 일들이었어요.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바로 <한강 보행자 터널 프로젝트>였어요. 짧은 설계, 시공 기간, 적은 예산으로 많은 수의 보행자 터널을 리노베이션해야 하는 미션이었는데요. ‘싸고 빠르게’를 원하는 한국 시장에 산업 재료로 문제를 해결한 첫 번째 프로젝트였습니다. 과정은 어땠나요? 갈등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해 나간다는 것이 괴로웠어요. 시간이 매우 부족해서 디자인 검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던 상황을 극도로 단순하게 진행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었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인지하거나 인정하기 쉬운 상황이 만들어졌달까요. 성공적인 마감 이후부터는 ‘정말 빠른 시간 안에 설계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인지로 시장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제가 따로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죠. 일정이 너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찾아왔거나, 문제도 매우 단순하고 목표는 시간 안에 완성하는 것이라는 식의 프로젝트가 많이 들어왔어요. 대부분은 담당 건축가가 있었다가 발주처의 의견 확정이 미뤄지면서 버려진 프로젝트를 하게 된 경우가 많았죠.   산업 재료인 폴리카보네이트 모듈은 교수님의 관심사와도 부합했겠지만 모든 게 빠르게 돌아가는 한국 상황에서 절묘한 한 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80m짜리 터널 안에 타일이나 벽돌, 도장 외에 사용하기 힘든 상황에서 어떤 재료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도장보다 더 빠른 속도의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습식 대신 건식으로 가야 한다고 정했죠. 건식 재료는 곧 조립식일 테니, 조립식의 개념을 생각했고. 처음엔 재활용 폐자재도 생각해보고 요구르트병 수천, 수만 개의 가격을 알아보기도 했어요. 공산품을 찍어내는 과정을 알아보다가 폴리카보네이트가 가장 흔한 소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물론 건축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지 재료였어요. 건식 연결부를 생각하면 요소(component)가 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또 서도호 씨의 작업도 영향을 미쳤죠. 밀도(density)에 대해 의미 있게 생각해요. 밀도가 만들어 내는 강력한 텍스쳐같은 것들요. 큰 것 하나를 만들긴 힘들지만 작은 걸 여러 개 만들기는 쉬우니까요. 제 작업을 발표할 때도 서도호 씨의 작업에 대해 많이 언급해요.   아이디어가 있다 하더라도 건축 재료로 사용된 적이 없어서 제작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쉽지는 않은데, 당시 함께 하는 구성원들이 없었기에 제가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유학을 다녀오고 나니 유학을 가지 않았던 친구들의 경력이 훨씬 높더라고요. 이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니, 표준 디테일에 관한 게임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차라리 디테일을 만들자는 생각이었어요. 어쨌건 디테일의 본질은 물이 새지 않는 것이니까. 표준 디테일보다 더 경제적인 해법을 찾게 되면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게 제 지론이에요. 그래서 아직도 우리 사무실은 표준 디테일이 없어요. 그때그때 풀어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죠. 보통 대형설계사무소는 계단, 난간 등의 디테일이 정해져 있지만 우리는 계속 만들어요. 최근 되어서야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자는 내부 의견이 있지만 디테일 재활용을 위한 것은 아니에요. 조금 더 진보된 방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매번 새로운 디테일을 만들지만 우리의 논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해요.     구체적으로 얼마나 기간과 예산을 단축했는지 궁금해요. 합정 보행자 터널 프로젝트 같은 경우 시공까지 일주일에 하나씩 마감했던 것 같아요. 원래 주어진 기간은 좀 더 길었지만요. 개소당 예산이 6억 원이었는데 2억씩 예산을 절감해서 20억을 절약했죠. 서울시가 매우 좋아했어요.   슬프게도 시간과 예산은 한국 시장의 핵심처럼 보여요. 그래서 아쉬워요. 시간과 예산이 우리의 가치처럼 되는 것이 매우 아쉬워요. 컨버전스, 협업의 의미에서 이런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나라는 협업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작동했을 때 얼마나 상승효과가 있을지가 의문이에요. 능력 있는 뛰어난 개인들이 모여서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을 해내지는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더 빠르고 더 싸게’를 외치는 한국 사회에서 산업적 생산 방식이 두각을 나타낸 것 같아요. 특히나 한강 보행자 터널 프로젝트처럼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에서는 더더욱 그렇고요. 인상적인 건 문제 해결에 대한 추가 비용을 청구했다는 부분이었어요. 빠른 배송을 위해 비용을 더 지불한다는 페덱스(Fedex)를 예로 들었던 것도 흥미롭고요. 건축이라는 분야가 제값을 청구할 수 있는, 비용에 합당한 지점을 보여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도 문제 해결 비용을 더 요구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과감한 태도였을 것 같아요. 제가 건축을 해나가는 방향 자체가 일반적인 건축 수련 방식과는 굉장히 달랐어요. 저는 표준 디테일을 잘 알지 못했고, 어떻게 보면 그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마찬가지로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타당한 지점을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거예요. 용기를 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에 이야기한 것일 뿐이죠. 만약 제가 설계 조직이나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더라면 하지 못했을 일이에요. 한울건축에서 실무 할 때나 미국에서의 실무는 의뢰인과 발주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의 구체화에 집중되어 있었어요. 그 때문에 발주처와 건축가, 그것이 돌아가는 기류와 시스템에 대한 정보가 저에게 있을 리 만무했어요. 페덱스를 생각해보세요. 목적지에 빨리 배송해 주기 때문에 비싸요. 그러니까 빠르면 비용을 더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상대방은 황당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본인들도 워낙 급했던 상황인 만큼, 저에게 약속(기한)을 지키지 못할 것에 대비해 페널티를 걸더라고요. 하지만 기한은 지켰고, 그렇게 인센티브를 받게 되었죠. 너무 많이 알면 못 하는 것들이 있어요. 지식(knowledge)이라면 고민을 더 했을 테지만, 정보(information)가 많은 상황은 두려움만 커지는 것일 수 있어요.   현실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학교에서 졸업 설계반 학생들의 면담을 한 적이 있어요. 설계를 잘하던 친구였는데, 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어요. 건축 설계사무소에 취직하게 되면 연봉 얼마를 받게 되는데, 그 연봉으로는 결혼할 상대도 맞벌이를 해야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고민이었어요. 문제는 그 기준점이 높고요. 아기가 태어나면 영어유치원에도 보낼 수 없고 백화점에서 장을 보기에도 터무니없을 거라는 거죠. 저는 그 친구에게 설계를 하지 말라고 조언했어요. 당신은 이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라고요. 생각해 보면, 선배들도 정말 너무 하기 싫은 일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거예요. 왜 굳이 후배에게 자신들의 삶이 불행하다고 하겠어요. 말하는 뉘앙스와는 별개로, 그 이면에는 본인들이 하고 있는 일의 자부심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사람은 프로그램한 대로 살아갈 수 없어요. 본인들이 예측하는 것만큼 인생이 단순하게 흘러가지는 않아요. 체크리스트에 하나씩 체크하며 넘어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니까. 결론은, 너무 많은 정보들을 갖고 있다면 용기를 잃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지식화하고 현명하게 체득하느냐가 관건일 거예요. 저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전혀 예측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어요. 그저 내 일을 묵묵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 살게 되겠지라고만 생각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지금의 환경이 다른 것같아요. 예전엔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는 시대였고, 지금은 그마저도 불투명한 시대이니까요. 상대적으로 어려운 시기인 것은 맞지만 본질의 문제를 생각하면 판단하기가 훨씬 쉽다고 생각해요. 지금 상황에서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상황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실천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오케이’예요. 그러나 50대 즈음에 접어들었을 때 ‘힘들었더라도, 그 때 디자인을 할 걸’이라는 후회가 남아있게 된다면, 그 인생은 불행하지 않을까요? 어떠한 사회에 살아가던 간에, 결국 본인의 가치 판단 문제예요. 좋아하는 것을 할 것인가, 현실적인(금전적인) 부분에 비중을 둘 것인가. 이런 말에 지금 공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건축가가 문제 해결 비용을 청구하고 합리적으로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고무적인 부분이라 생각해요. 그만큼 건축가가 리스크를 감당했기 때문에 가능했고요. 맞아요. 게다가 항상 성공하는 것도 아니에요. 말에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 힘들어지기도 해요. 계약금보다 더한 피해 보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해요. 물론 지금까지는 큰 피해가 되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요. 또 손해를 감수하고 감행한 경우도 있어요. 예전같았으면 그 정도면 사무실이 뒤집어 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규모도 커져서 크게 무리가는 상황이 오지는 않아요. 사람이 어떻게 매번 안타만 칠 수 없잖아요. 다만 타율이 너무 낮아지면 곤란하니까 일정 이상으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인 것같아요.   폴리카보네이트 마감을 활용한 이후, ‘모델하우스계의 황태자’라는 표현도 들었다고 했어요. 임시로 만들었다 부수는 모델하우스에 새로운 재질 선택, 입면 스터디, 모듈화하는 방식 등 산업 생산 방식은 딱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니었나 싶어요. 잘 맞아 떨어졌어요. 그리고 모델하우스는 저에게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실험을 할 기회를 준 셈이었어요. 보통 모델하우스의 경우 3~4개월 내로 마무리되어요. 일반적인 주택의 경우에는 설계에서 결과까지 1년이 넘게 걸리는데, 빠른 시간 내에 그것보다 큰 규모의 프로젝트 결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파빌리온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실험에 대한 부담도 적었고요. 프로젝트를 빠른 시간 내에 매니징한다든지, 운영방식에 대해서까지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프로젝트들이었어요.   모델하우스를 통해 여러 실험을 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재료에 대한 스터디와 제작 방식, 운반을 고려한 사이즈- 예를 들면 트럭에 실릴 수 있느냐-까지 고려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재료에 대한 실험은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 그것을 통해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 또, 이러한 시도에 흥미가 사라진 시점이 있는지 궁금해요. 가장 경계했던 것은 매너리즘이에요. 공장 산업 방식이라는 것이 굉장히 다양하나, 건축에 적용 가능한 스케일에서 보자면 몰드 작업이 주를 이뤄요. 사출, 프레스 등의 방식은 건축 스케일에서 적용할만한 기계 사이즈도 없었어요. 따라서 몰드 작업을 주축으로 했기 때문에 그건 자신이 있어요. 이제는 형태만 봐도 몰드 작업이 가능하겠다, 아니겠다를 파일 수정 없이 진행하게 되어요. 몰드가 우리의 노하우가 된거죠. 다만 빠른 완성을 요구할 때에 몰드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로 인해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진것이 아닌지 고민했어요. 물론 조금 더 확산적으로 사고해서 더 할 수 있겠지만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이 정도 했으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오픈소스로 돌리자는 이야기도 스태프들과 나누는 중이에요.   모델하우스 이후에는 새로운 방식을 테스트하기 위한 투자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마침 전시 프로젝트가 많이 들어왔어요. 전시를 통해 실험 대상을 정했죠. 전시 준비는 건축보다 훨씬 더 개념적이거나 시론적인 부분에 대해 사고할 수 있기 때문에 이때가 또다른 중요한 시기였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필두로 FRP라는 물성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고, 그 외의 전시를 통해서도 절곡기계 사용, 미디어 관련 실험을 했어요. 항상 전시는 일종의 테스트베드가 되어주었죠. 예를 들면 현대백화점 어린이책미술관 설계에 FRP를 적용했더니 훨씬 부드럽게 해결되었고요. 하나은행 PLACE 1의 부분 몰드로 모두 FRP가 사용되었어요. 금호미술관 전시에서는 절곡기계 사용을 실험했는데 아직 설계에 직접 적용해보지는 않았어요. 입면 구조(façade structure)를 스틸로 만드려는 시도인데, 전시 준비 과정이 데이터화되어 이후 실무에서 물성 작업에 영향을 주게 되더라고요.   건축에 적용할만한 산업재의 규격이 많지 않다는 것이 건축과 일반 산업과의 차이를 가장 명쾌하게 보여주는 지점인 것같아요. 스케일이 다르니까요.   산업방식에 대한 관심이 결국 그것을 전환하는 지점을 만난게 된것이 아닌가 싶어요. 건축에서 컴포넌트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을 것 같은데요. 학생 때도 크리틱을 받을 떄 제 작업을 두고 ‘kit & part’ 라고 정의를 내리더라고요. 하나은행 PLACE 1 프로젝트까지는 부품 제작 공정과 같은 그동안의 맥락과 함께 했었고, 한남동 빌딩이나 폴스미스의 경우도 건물은 일체화되었지만 작업의 공정상으로는 부분적으로 같은 매락이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울릉도 코스모스(kosmos)호텔 프로젝트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어요. 일체화되었기 때문이에요. 울릉도는 물리적 상황을 반영하여 한번에 구축했죠. 공간을 이야기하지 않고 외피에만 집중을 하는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직원들은 ‘껍데기 건축’이라고 폄하했다며 울분을 토해냈지만 정작 저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제 반응은 ‘나 껍데기 좋아하는데(웃음)’ 정도였어요. 뭐 어때? 껍데기라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캐쥬얼하게 반응했죠. 직원들은 조금 억울해 했지만요. 어쨌든 비판을 불식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울릉도의 경우는 결과물로 이야기했다고 생각해요. 그 상황에서 최적화된 시스템은 한번에 구조물을 구축하는 것이었기에 선택했을 뿐이지만요.   건축 담론을 이야기할 때에, 저도 들으면서 ‘진짜 어렵다, 나도 어려운데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더 어려울까’ 싶어요. ‘왜 이렇게 건축이 어려워졌을까’에 대해 생각해요. 어짜피 건축은 짓기 위해 어려워야 하는 것이지, 보고 반응하는 데 어려울 필요는 없다고 봐요. 물론 콘크리트 벽 하나만으로도 심오한 인사이트를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해요. 도슨트는 그것을 쉽게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갖지만,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니겠죠. 그래도 내면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사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사이트를 주는 건축이라면 그건 예술의 경지라고 생각해요. 건축도 그럴 수 있지만, 건축이 기본적으로 갖는 역할은 예술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건축의 본질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 그 이외는 본질이 아니죠.   진행 임진영 녹취 및 정리 우경희  사진 이강석 인터뷰④에서 이어집니다.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④ 사무실을 옮긴 지 1년 정도인데, 자리가 고정되지 않은 오픈 오피스 개념을 도입했어요. 내부 반응은 어떤가요? 일단 좋아요. 저보다도 직원들이 좋아하니까. 사무실의 경우 물리적인 공간을 바탕으로 일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회적인 분위기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오피스 개념보다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멤버십 개념으로 바꾸고자 해요. 아주 중요한 이슈예요. 여기 있을 필요도 없고 저기 있을 필요도 없어요. 공간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만 멤버가 만들어내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은 거죠. 직원, 소속 같은 개념보다는 개개인이 건축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다른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업무공간과 공용공간이 같은 비율입니다. 공용공간이 상당히 넓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업무공간의 연장이죠. 자기 자리에서만 일하지 않고 회의가 없을 때는 열린 공용공간에서 일하기도 해요. 팀끼리도 자주 회의를 하니까요. 공간의 구분은 없는데 성격은 다르게 하고 싶었어요. 하나는 여유 있게, 하나는 밀도 있게 일하고 작업하는 분위기이에요.   직원들의 선호도는 어떤가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달라요. 작업 공간이 답답하다고 느끼는 친구들은 미팅룸에 컴퓨터를 가지고 와서 일하기도 하고 건물 위층에도 낮 동안 쓸 수 있는 라운지가 있는데 그곳에서도 일할 수 있도록 시설이 개방되어 있어요. 원하는 공간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인데, 데스크톱이 아닌 랩톱을 쓰고 클라우딩 서버를 이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앞서 ‘Kit & part’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울릉도 프로젝트는 건축을 컴포넌트로 해석하지 않는 지점이 온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엄밀히 이야기하면 울릉도 코스모스 호텔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내피는 컴포넌트(거푸집)가 건물 일부로 남아 융합된 경우예요. 안쪽 거푸집을 떼어내는 시공상 난제와 촉박한 공사 기간을 극복하기 위해 거푸집에 단열재를 치부하고 이를 뒤집어 매입하는 아이디어로 해결했어요. 거푸집이 인테리어 마감 가이드 역할을 하고 거푸집과 마감 사이 공간을 냉난방 챔버로 썼죠. 지금 3D 프린팅이 발달해 많은 논의가 이어지잖아요. 만약 모든 것을 이음새 없이 하나의 프로세스로 프린팅한다면 정말 일체화된 부품이 공간화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이런 부분에 관심이 많아요. 오래된 영사기 하나를 갖고 있는데, 이 영사기의 기계적인 부분을 줌인(zoom in)해서 촬영하면 드라마틱한 공간이 그 안에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만약 건축 스케일의 3D 프린터가 있고 건축 공간을 3D 프린팅하여 생산한다면 컴포넌트가 구별되지 않고 그야말로 일체화된 공간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산업 측면에서 보면 기술이 가져올 패러다임의 변화는 매우 크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3D 프린팅으로 3일 만에 건물을 만들 수 있다는 상상은 극히 건축가적인 시각이고, 그보다도 중요한 건 3D 프린팅이 가져올 물류 개념의 혁신이 아닐까 싶어요. 자재가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중요해요. 현장의 개념이 바뀌는 거죠. 현장이 공장이고 공장이 현장이 되고요. 래미안 모델하우스 입면에 쓴 3mX3m 패널을 예로 들자면 물류(logistics)를 고려해 4.5t 트럭에 맞춰 컴포넌트 사이즈를 생각해 낸 거예요. 그런데 현장 생산이 가능해진다면 기성품의 치수(dimension)가 필요 없어지고 다른 방식이 될 것이라고 봐요.   건축을 제작 방식의 측면에서 들여다보았다는 점은 여전히 중요해 보여요. 한국 건축의 가장 아쉬운 게 그동안 구축에 대한 논의보다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논의 중심으로만 전개된 게 아닌가 하는 부분이거든요. 그 시대에는 그것도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건축이 건설과 구분이 되지 않고 본의 아니게 그 영역에 대한 독립성을 획득하지 못했으니까요. 김수근, 김중업 선생님께서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따로 논의되었고요. 다른 건축가 선배님들은 낮아진 위상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싸움(struggle)의 과정이었다고 봐요. 건축은 건물을 짓는 행위보다 더 다차원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대중에게 인지시키기 위해 더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신 거죠. 이에 대해 대중이 이해를 하거나 원활하게 소통하지는 못하고 건축은 어렵고 철학적이라는 이해로 가버렸지만, 그런데도 건축이 특별하다는 인식은 정립된 것 같아요. 덕분에 후배들이 관심을 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해요.   텍토닉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것 같아요. 또 두드러지는 기술적 성취나 시도가 없는 게 아닐까 싶고요. 기술적으로 흥미로운 작업이 충분치 않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안타까운 일이죠. 분명 엔지니어링의 영역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특강 제목을 “THE_SYSTEM LAB Report”, 부제로 “Making Story”라고 써요. 만드는 것에 관해 이야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기도 해요. 결국, 건축은 짓는 게 중요한데, 짓는 것에 대한 새로움이 이야깃거리를 만든다는 이야기도 되고, 실제 만드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하니, 제작과 새로운 기술적 구축에 관한 이야기가 굉장히 재미있는 부분이죠.   새로운 재료, 다른 생산 방식을 도입하려면 설계사무소, 엔지니어링, 시공팀까지 소통하는 방식이 매우 중요해 보여요. 기술적인 소통의 방식이 사무실에서 어떻게 진화되어왔을지 궁금해요. 처음에는 작은 규모의 몰드(형틀) 제작에서 시작해 점점 더 확장되는 듯한데요. 안타까운 건 제가 어떻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실제로 만들어야 하는 분들이 안 하겠다고 한다면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항상 쉽지 않은 결정에 기꺼이 동조해 준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지점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 과정을 협업(collaboration)이라고 말하게 돼요. 왜냐하면, 제가 감당하는 리스크와 그분들이 감당하시는 리스크는 전혀 다른 부분이기 때문이에요. 최근 우리는 대형 회사들과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실행을 못하더라고요. 리스크가 큰 일이라서요. 담당자가 작업의 결정권자가 아니라서인 것 같기도 해요. 상대적으로 거대 자본이 있는 회사에서는 이 과정이 쉽지 않아요. 그런데 영세한 곳에서 꿈을 꾸시는 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렇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제 언변이나 설득의 힘이 아니었어요. 논리적으로 그분들을 설득하지는 않아요. 그저 ‘꼭 같이 해주셨으면 좋겠다, 꼭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사장님이 내리셔야 한다’라고만 해요. 고민을 많이 하셨겠지만 결국은 함께 해주시더라고요.   인상 깊었던 협력업체가 있나요? FRP, 폴리카보네이트, 몰드 작업, 기계적 작동에 관한 부분, 파이프 밴딩 등등 너무 많죠. 한번은 함께 했던 회사가 망해서 그때그때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했어요. 정말 작은, 영세한 곳이었어요.   시공 프로세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신 것을 보았어요. 이게 더_시스템 랩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었어요. 제작 프로세스를 설계하고 엔지니어링을 디자인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는 표현을 쓰셨는데, 해당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내부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궁금해요. 제작비가 예상 비용 안에 들어오는 게 중요해요. 새로운 시도를 하는데 비용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어서 저희가 시공 과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어요. 시공사에서 하려는 방식 말고, 우리는 계속 비용 절감(cost saving) 측면을 제안하는 거죠. 우리의 의견은 계속해서 개진하는 거예요. 우리는 도서 납품 후에도 일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어요. 감리까지 맡는 프로젝트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프로젝트에서는 참 어렵죠. 그래서 어떻게든 감리 계약을 하려고 해요. 감리자가 해결 방법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가 지원해 주겠다는 거죠. 감리 계약을 안 하면 설계 계약서에 따라 도서 납품과 동시에 업무가 종료되어요. 그러면 발주처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그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갈등과 분쟁이 생길 수 있기에, 감리비가 적어도 오해 없이 감리를 맡으려 하죠.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시공사가 특수한 설계 내용에 대해 비용 문제와 기술적 방법론을 사전에 연구하고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구축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던 초기에는 억울한 일들이 많았어요. 시공사에서 파견 나오신 분들이 ‘이건 안된다, 디테일이 안 나온다’라고 하시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해결해 드리겠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무책임해질 수는 없으니까. 물론 초반에는 그에 대한 비용을 받지 못했어요. 요즘은 상황이 달라요. 그러한 노력에 대해 존중받고 함께 비용을 정산받아요.   프로젝트에서 가장 최적화된 솔루션을 찾아가면서 시스템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 더_시스템 랩의 시스템 구축 과정이라고 하셨는데, 단지 건축의 구축 문제가 아니라 이슈 비용과 기획 등 건축 업역이 확장하는 느낌도 들어요. 소비자를 이해하고 어떻게 건축을 상품으로 바라볼 것인가로 보이기도 하고요. 이런 전략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각을 전공했다고 조각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듯이, 3차원 형상을 상상하고 제작의 능력까지 보유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조각 전공자가 공업디자인이나 자동차 디자인으로도 많이 편입되기도 하고요. 순수 예술을 전공했지만 거기서 체화된 개념이 다른 곳에서 적용되었을 때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융·복합적인 것이 핵심이 아닐까 생각해요. 건축도 본질의 문제에 대해 딱 그 케이스를 만드는 사람만으로 충분하다면 업역이 확장될 필요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종합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게 건축이잖아요. 예전에 “건축 계획 각론”이라는 교과가 있었어요. 예를 들면 복도는 폭이 몇 m여야 한다는 식의 규율을 정리한 건데, 매우 모더니즘적인 매뉴얼이에요. 그 당시에 종합적이라 하면 구조, 전기설비, 소방, 미적 아름다움, 기능과 동선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지만, 지금 종합이라는 말 안에는 카테고리와 요소가 더 많아진 것이라 봐요. 예를 들면 물류나 이용자 층위에 대한 정보와 이해 등이 더 포함되고 있어요. 사회 현상과 방향까지 광역으로 늘어나고 있는 거죠. 여러 가지 상황과 행동, 그리고 상호작용까지 확장된 경우라고 할 수 있어요. 리테일 디자인을 예로 들면, 저를 기획자로 초청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제 디자인이 훌륭해서보다 리테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총괄건축가(MP)가 되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는 식이에요. 그래도 기획부터 끝까지 풀 패키지가 중요하지, 중간중간 참여하는 것은 선호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기는 하죠. 그러나 제가 선호하지 않을 뿐이지 컨설턴트로서의 가능성은 여전히 건축가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어쨌건 저는 골수 설계/디자이너예요. 그러나 건축 근방의 것들에도 접촉할 수(tapping) 있고 관심이 있는 사람인 거죠.   건축가 본연의 일이 주를 이루지만, 주변부와 접촉하고 확장하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최근에 코디네이터, 공간 크리에이터 등의 명칭이 많이 보여요. 그 분야의 전문성이 있겠지만…. 건축가들이 건축이라는 카테고리를 오픈 시스템으로 만들지 않고 너무 닫고 있어요. 다른 곳에서 치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 결벽증적인 반응을 보이죠. 닫혀있으면 본인의 업역을 넓히기 어려워요. 그런 의미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미디어 작가, 아티스트 등과 함께 일하는 경험이 매우 중요해 보여요. 최근 나오시마에 방문해 니시자와가 설계한 테시마 미술관을 보았어요. 흙으로 만들어진 두꺼비집 같은 것이었는데, 직접 가서 보기 전까지는 그저 구축 논리의 아이디어가 좋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직접 보니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이게 진정한 콜라보레이션이구나’하는 것을 목격했죠. 니시자와 류에가 직접 나이토 레이라는 아티스트를 선택하고, 그의 물방울 작업과 통합된 건축물을 설계했다는 지점에서 감동했어요. 아직 우리나라에서 예술과 콜라보레이션을 하라고 하면 요구사항 자체가 일차원적이에요. “한쪽 벽면을 비워달라, 여기에 현대 미술 작품을 걸 것이다(전시할 것이다)”라는 식이죠. 그저 빈 벽면에 작품을 걸기만 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통합(integration)이 아니니 기획을 다시 하고 싶다고 하면 이해를 못 해요. 그래도 하나은행 PLACE 1에서 진달래, 박우혁 작가와 함께했던 작업이 예외라고 볼 수 있겠죠. 제가 ‘아트 디스크’라는 것을 기획하고 아티스트들에게 공모를 했어요. 4명이 참여를 했는데, 진달래, 박우혁 작가가 공간을 잘 이해한 안을 내주었어요. 첫 콜라보라고 볼 수 있어요. 지하 1층 주차장 바닥 통로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빠키와 함께 했고요. 밋밋했던 통로 공간에 2차원 작업으로 3차원적인 입체감을 부여한 작업이에요. 어쨌건 테시마 미술관의 예는 작업이 훌륭해서 받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이렇게 협력할 수 있는 사회적인 인식과 시도에 대한 투자와 맥락이 한 차원 높은 것이기에 받은 충격이에요. 그 공간에는 큐레이팅이 따로 필요 없어요. 그대로 있으면 되기 때문이에요. 한 작품을 위한 단독형 미술관이죠. 이러한 형태는 지정된 예술 작품이 아니면 다른 것은 전시할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구조예요. 조금 예민한 부분이겠지만, 문화 인식의 영역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쨌건 업역은 오픈 시스템이 되어야 해요. 그러려면 건축가도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고요. 그래야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거예요.   ‘산업적 공예성’이라는 표현이 교수님을 가장 잘 표현해준다는 생각을 해요. 형태와 공간이 통합된 건축을 보여주는 말이고, 울릉도 프로젝트를 통해서 확연히 나타났다고 봅니다. 산업적 공예성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 프로젝트가 있을까요? 사례라기보다는 방향에 관한 얘기예요. 그것도 물론 기술의 진보로 인한 방향이죠. 대량 생산(Mass production) 시대에는 사람들에게 선택권이 없었지만, 매스 커스터마이제이션(Mass customization)으로 바뀐 이후에는 뭘 사더라도 같은 모델의 다른 버전을 자신에 맞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어요. 매우 큰 사회적 변화예요. 저는 그 당시에도 그게 충격이었어요. 애플 컴퓨터를 사는데 사탕 고르듯이 색깔을 골라야 한다니! 결국, 매스 커스터마이제이션을 보면서 다품종 소량생산이란 표현도 쓸 수 있겠다 싶었죠. 그리고 앞으로는 마이크로 커스터마이제이션(Micro-customization) 시대로 넘어갈 거예요. 이제 매스(Mass)에서 마이크로(micro), 개인에 대한 문제로 넘어온 거죠. 개인을 위한 생산이 가능한, 개별화된 내용물을 3D 프린터로 뽑아내서 개인에게 가장 최적화된 제품이 집까지 배송되는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이제 공업 제품이라는 의미가 있을까? 공예는 똑같은 그릇을 만들어도 절대로 100% 똑같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방짜유기처럼 아무리 기술력이 좋은 장인이 만들어도 100% 똑같은 건 없는 거죠. 그게 공예의 속성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하나 개인을 위해서 생산되는 공예의 속성을 닮은 제품이죠. 그런 개념에서 건축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요. 마이크로 커스터마이제이션의 개념에서 보면 다 자기만을 위한 제품이기 때문에 가장 궁극의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건축은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는 개념을 많이 쓰죠. 많은 사람이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매우 민주적인 개념으로 이해를 하지만, 사실 그 대상 범위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소외되는 거예요. 유니버설 디자인에서는 17cm의 계단이 가장 편안한 높이 기준이 돼요. 하지만 2m 키의 사람과 어린 꼬마가 올라가기에는 불편한 계단이 될 수 있죠. 이 치수의 기준은 사실 150cm~185cm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에요. 그럼 마이크로 커스터마이제이션의 건축은 사람에 따라 실시간으로 최적화하며 변해야 할까? 이런 상상을 하곤 해요. 건축은 혼자 쓰는 물건이 아니므로 사고를 할 때도 갈등의 지점이 생기게 되죠. 아직 결론을 낼 생각은 없지만, 그냥 앞으로는 어떨지 계속 생각을 던지는 거예요. 결국은 처음부터 건축은 공공재의 성격이 있어서 어려운 문제예요. 이 갈등의 지점이 현재 제가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결국, 건축은 사회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교수님이 생각하는 사회적인 가치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도 사회적인 가치일 수 있고 공공성이라는 개념,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착한 건축의 개념도 당연히 가치가 있을 수 있어요. 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예요. 예를 들어 한강 프로젝트 때문에 만났던 몰드 제작을 하는 사장님은 사실 명절 선물 안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포장재를 찍어내던 일을 하시던 분이었어요. 처음 뵈었을 때 돈은 잘 벌지만, 인생의 낙이 없는 분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저희와 프로젝트를 하면서 건축 외피를 생산하게 되니까 갑자기 열정맨이 된 거죠. 본인에게는 뜨거운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회까지 확장된 느낌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자기 일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봐요. 그다음으로 공통된 키워드는 결국 ‘새로움’인데, ‘새로움’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 사회적인 인식의 발전이 사회적인 가치 창출이 아닐까 생각해요.   여러 재료와 구조에 대한 실험 중 UHPC를 사용한 PLACE 1이 분기점인 것 같아요. UHPC에 대해서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양산 프로젝트와 다락다락 등 일련의 프로젝트가 콘크리트 구조인데 단면이 노출되는 디자인이었어요. 더 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죠. 여러 가지 모색을 하던 와중에 PLACE 1 프로젝트의 외장 패널을 콘크리트로 하려고 했더니, 너무 두꺼운 거예요. 8cm 두께의 이미지를 보여주니까 엔지니어 쪽에서는 최소 18cm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18cm 두께로 잡아봤더니 너무 두껍고, 패널 하나의 무게도 6.5t이나 됐죠. 그러다가 어떤 협력사에서 연필통을 선물로 보내줬는데 쓰다 보니 한 실장이 이게 UHPC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찾아보기 시작했죠. 해외에서 교량의 연결 부위에 쓰고 콘크리트보다 5배 이상의 강도가 있었어요. 두께를 1/5로 줄여도 기존 구조를 대체할 수 있다고 해서 몇 개 검색해서 모크업 시도를 해봤어요. 그런데 안되는 거예요.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UHPC는 연구원과 학계에서 실험을 해왔는데 결국 한국건설기술연구원과 함께 테스트를 해보게 되었어요. 모크업을 하는데 돈이 굉장히 많이 들었죠. 우리가 비용을 다 부담했어요. 은행 쪽에서도 포기하라고 했어요. 시공사를 선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체에 대한 부담이 있어서 발주처에서도 이번에는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죠. 그런데 5번의 모크업이 실패한 후 몰래 마지막 실험을 하고 그게 성공하면서 지어지게 되었어요. 결국은 그 필통에서부터 시작된 거죠. 국내 업체들이 UHPC로 필통과 화분 같은 걸 만들어서 팔아요. 해외에서는 벤치처럼 스트리트 퍼니처에 많이 쓰이고 훨씬 범용화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PLACE 1의 경우 입찰 때 모든 시공업체가 포기할 정도로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로 알고 있어요. 모크업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요. 고민의 밑바닥에는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어요. 최진철 실장이 현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심했을 거예요. 지금이야 말할 수 있는 거지만 거푸집이 깨졌다는 문자, 모크업이 실패했다는 등등의 연락이 오는 게 너무 싫었고 전화 받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 때도 있었죠.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나요? 마지막 시연했을 때. 마지막 모크업이 성공하고 발주처 임원분들을 불러서 보여드렸을 때 놀라셨어요. 그때 좀 눈물이 났죠. 특강을 할 때도 그 당시 시연했을 때의 사진을 자주 보여줘요.     UHPC라는 새로운 재료와 구조로 시도하면서 다양한 협력사, 엔지니어링과 긴밀하게 협업을 했습니다. 협업 과정의 경험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협업 과정에 두 가지 기분이 있어요. 하나는 애잔한 마음과 안 좋은 마음. 함께 협업한 엔지니어링 회사가 결과를 홍보할 때 우리가 진행한 이미지 자료, 거푸집 프로파일링, 도면과 같은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가져다가 마치 자신들이 다 한 것처럼 홍보하는 경우도 봤어요. 윤리적으로 맞지 않아 화가 많이 나기도 했죠.   PLACE 1에서는 외장 패널로만 활용했는데, 울릉도 코스모스 호텔에서는 현장 타설 구조체로 시도합니다. PLACE 1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을까요? PLACE 1을 했기 때문에 훨씬 편하게 접근했어요. 물성에 대한 결과물을 알기 전의 불안감은 말도 못 했지만 결국 구현할 때까지 고생하고 난 다음에는 심리적으로 편했어요. 코스모스의 거푸집 제작도 쉬웠어요. 물론 2번 정도 모크업 실패가 있었고 훨씬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우리로서는 편했어요. 어느 정도는 결과물에 대해 예상하는 것이 있었고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기도 쉬웠어요. UHPC는 시각적인 부분도 그렇고 거푸집 자체의 완성도가 훨씬 높아야 해요. 그 기술이 굉장히 중요하죠. 지금 한남동에 세 번째 프로젝트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같은 UHPC로 반 패널, 반 공간의 개념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이건 콘크리트 두께가 더 얇아 3.5cm예요. 구조재는 아니지만 나름 공간을 형성하는 작업인데, 역시 만만치가 않아요.   구조를 해석한 터구조 대표님은 나중에 보니 울릉도 코스모스 호텔의 볼트형 단면이 UHPC에 구조적으로 가장 적합한 형태였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UHPC는 얇게 할 수는 있으나 인장에는 취약한 재료였기 때문에 어떤 형태에 적용하느냐도 중요해지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그 구조에 가장 적합한 재료와 형태를 가져와야 하며 자기 완결적"이라는 교수님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형태의 생성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는데요. 힘이 흐를 수 있도록 하고 싶을 때 제 경우는 곡선을 쓰게 돼요. 힘을 받지 못하면 크랙이 가는데 스트레스를 나눠주기 위해서 제 작업에서는 곡면이 쓰여요. 폴리카보네이트의 경우 표면으로 힘을 흐르게 해야만 강성이 나오지, 판재로만 나오면 스트레스가 집중되죠. 울릉도도 볼트형 구조를 선호한 이유는 힘이 흘러서 땅으로 꽂아주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에요. 디자인적으로 의미가 없다기보다 구조적으로 취약한 거예요. 이런 게 재료적인 특성이죠. 자동차 디자인에서 중요한 특징 하나가 안전을 위해서 직선을 쓰면 안 되는 것이 있어요. 보통 자동차의 유선형을 바람에 대한 저항으로만 생각하지만, 충돌이 있을 때 힘을 빨리 차 뒤편으로 보내야 안에 있는 사람이 보호돼요. 직선으로 보이는 것 같아도 모든 차는 바람만 넘기는 게 아니라 충돌을 예상한 곡선이 있죠.   사람들은 가우디를 독창적인 형태만으로 인식하지만, 실제 그의 작업은 유기적인 형태에서 오는 가장 안정적인 구조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죠. 사그리나 파밀리아 성당을 설계할 때 추를 달아매어 거울로 반전시켰을 때의 형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해요. 건축가 김찬중의 설계 방식에서 유기적인 형태는 결국 안정적인 구조를 효율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결과물로 봐야 할 부분이겠네요. 물론 동역학이 아닌 정역학과 관련된 거지만 그렇게 되게끔 하는 게 중요한 부분이죠. 아치를 스타일로 보는 게 아니라 더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고 싶은 거예요. 자연적인 흐름이 있으니까요. 폴 스미스 플래그쉽스토어의 경우도 셸(shell) 구조와 같은 방식의 구조예요. 껍데기라고 하더라도 구조 기둥이 없으니까 건물의 응력 또는 구조적 스트레스가 표면으로 흘러서 땅에 꽂히게 되는 거죠. 결국, 구조의 문제인데 왜 사람들은 형태로만 인지하려고 하는지 조금 궁금해요.(웃음) OHS   진행 임진영 녹취 및 정리 우경희  사진 이강석    
SPECIAL 01 가로골목, 김찬중 2019년 10월 12일 2:00PM
SPECIAL 01 MCM 마지트 플래그쉽(MCM M:AZIT FLAGSHIP), 김찬중 2019년 10월 12일 2:00PM
SPECIAL 01 구 폴 스미스 플래그쉽 스토어 (현 헤리티크뉴욕), 김찬중 2019년 10월 13일 2:00PM
SPECIAL 01 KHVatec 서울사옥, 김찬중 2019년 10월 13일 4:00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