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②

대학 시절에 선경스튜디오도 참여하셨는데요. 설계에 대한 또 다른 갈증을 해소해준 곳이 아닐까 싶어요.
선경스튜디오는 설계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었어요. 1992년 대학교 4학년 때 참여했는데, 당시 구성원들은 다들 개성이 강했어요. 저는 소위 정통 건축 교육이나 선배가 있는 작업실 분위기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너무 신기했어요. 반대로 그들이 보기에 저는 야생에서 온 사람이었고요. 정체성이 강한 친구들이었기에 많은 자극도 되고 부러웠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동시에 고대 다니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 면학 분위기를 부러워했으나, 동시에 그 한계, 패턴도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물론 다들 졸업 후에 개개의 정체성을 발전시켰지만, 학교가 만들어 낸 분위기가 있었어요. 패널 디자인도 책에서 나온 형식이 많았고요. 정보가 곧 스킬로 정착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객관적 정보를 얻는 데에는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는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대한 길찾기를 하게 되었어요. 전환점이 되었죠.
 
한울건축에서 2년의 실무 후에 유학을 하러 가셨어요. 한울건축의 스타일도 체계적이고 사무적인 틀을 가진 곳이 아닌가 싶어요.
집중도에 관해서는 어느 곳보다 세고 밀도가 매우 높았어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성관 소장님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아주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커다란 개념이나 이론보다는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한 디테일, 비례, 전통적인 건축의 판단기준을 지켜나가기 위해 애썼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퀄리티가 매우 높았어요. 오히려 첫 직장으로써 기초를 다지기에 좋은 환경이었죠. 대신 새벽 3~4시 퇴근은 기본이었어요. 사람들이 못 견디고 나가기도 하는데, 진정성 하나는 인정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어요.
 
하버드(GSD)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색이 없다는 점이 컸어요. 5곳에 지원해서 4개 대학에 붙었는데, 색이 너무 강한 학교는 고민이 됐어요. 예를 들면 콜롬비아 대학에서는 당시 그레그 린을 필두로 프리 폼(free form)이 유행하고 있었고, 엔지니어링 기반을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MIT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일은 실용주의 노선에 관심이 많은 학교였어요. 그런데 GSD는 강사(instructor)도 다양했고 이렇다 할만한 색깔이 보이지 않았어요. 어느 ‘학파’에 편입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막상 가보니 색은 있더라고요. GSD는 리더 양성소예요. 리더십 양성 교육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어서 경쟁이 매우 심했어요. 정치나 헤게모니같은 것도 있고요. 단순히 디자인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실무에서 겪게 될 싸움의 마이크로 버전이라 보고 긍정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죠.
 
유학 시절, 언어의 한계 때문에 디스 맨(‘this’ man)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어요. 말로 설명하는 대신 세세하게 만든 모형과 도면으로 보여주었다고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건축을 실체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을 같아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정 지점보다 훨씬 더 많은 결과물이 필요했어요. 말로 하는 설명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제 결과물을 실체 과다로 받아들였어요. 일단 물량에 놀라워했죠. 개별적인 컴포넌트들을 만들어서 프로세스대로 하나씩 끼워가며 설명하곤 했죠. 보통 핀업이라 하면, 학생당 한 개 정도인데 저는 핀업룸을 도배하고도 남을 양을 만들어 갔어요. 양도 그렇지만 제 모델은 훨씬 더 많은 전달력이 있었어요. 아주 구체적으로, 추측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거든요.
지금도 사무실에서 3D작업을 많이 해요. 보여줄 장면(scene)도 많이 잡고요. 의뢰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확신을 하기 위한 과정이에요. 우리는 조감도를 믿지 않아요. 우리가 보거나 경험하는 시점이 아니니까. 그래서 눈높이에서 투시도를 많이 만들어서 설계와 경험을 체크하고 건물을 미리 다 지어본다는 생각을 해요.
실체를 구체적으로 만드는 태도는 마이크로센터, 홈디포, 제 언어적 한계, 이 3가지의 융복합적인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컴포넌트가 명확해야 했고, 컴포넌트들로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체계까지 모두 이 세 가지의 영향을 받은 거죠.
 
마이크로센터와 홈디포라는 일반 상점에서 건축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도 흥미로워요.
유학생 시절, 너무 외로웠어요. 홈디포를 구경하거나 마이크로센터에 가서 부품을 사고 컴퓨터를 분해하고 새로 조립하기를 반복하는 게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컴퓨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나에겐 컴포넌트였고, 계속 그것으로 놀다 보니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작업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죠. 
 ‘홈디포(The Home Depot)’는 건축, 조경에 관련된 하드웨어를 파는 창고형 마트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종류의 건물도 홈디포에 있는 상품으로 다 지을 수 있다”라는 게 이 마트가 표방하는 바죠. 홈디포에서 모든 것들이 부품화되어 유통되는 것을 보며, 결국 건물도 하나의 거대한 조립 체계라는 것을 느꼈어요. 요소들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과 그에 대한 분명한 이유 – 이건 피터 아이젠만의 영향이지만 -가 저로 하여금 설계와 프로세스의 단계적 과정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사무실에서도 너무 멋진 것을 만들어보라고 하지 않아요. 최단 시간에 이 지점에 다다를 수 있는 동선을 잡으라는 식의 요청을 할 때는 있어요. 발주처에 설명할 때도 명확하게 의사 전달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막연히 말하지 않게 되고, 어떤 부분이 개선되는지 객관적이고 합리적 타당성을 갖고 말하게 돼요. 이런 관점들이 그때 만들어졌죠.
 
마이크로센터와 홈디포를 통해 건축이 하나의산업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는데, 반대로 실제 건축 산업은 워낙 보수적이죠. 그 때문에 건축에 적용 가능하기 위해 부딪혔던 점이 있을 같아요.
건축은 선발 산업이 아니라 후발 산업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종합 산업이죠. 종합 예술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는 예술이 산업이던 때도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엔터테인먼트였기 때문에 예술의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컸죠. 물론 지금의 산업은 그때와는 다른 산업이고요.
건축이 후발 산업이라는 의미는 뒤떨어진다는 것이 아니에요. 건축은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부품들이 다른 분야에서 파생된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건축에 통합적으로 적용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의미예요. 예를 들어 건축에서 유리 접합부를 개스킷(gasket)으로 막는데, 이는 자동차 산업에서 소음과 빗물 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해법이 건축에 적용된 거예요. 건축은 시대의 주력산업에서 파생된 것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어요.
건축 안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찾으려고 한다면 많이 힘들 거예요. 오히려 다른 산업에서 벤치마킹할 부분을 생각하고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적용할지를 생각하다 보면, 5~10년 뒤에는 건축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와 있으리라 생각해요. 즉, 다른 산업에서 안정성을 인정받고 검증된 것이 건축에 합쳐지게 되는 거죠.
주력산업의 방향성에 대한 이해는 건축의 다음 단계를 예측하는 데에 필수적이라 생각해요. 건축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앞당길 수는 없지만, 건축은 후발 산업인 대신 종합산업이니까요.
 
그런 의미로 한국에선 건축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모더니즘 신화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모더니즘은 정치적인 상황과 많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건축 자체로 말하기보다는 사회적 패러다임과 정치적 방향성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전쟁 이후였고. 사회주도세력 중 정치적 신념을 건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그런 부분들이 녹아 들어갔던 거죠. 여전히 지금도 그때의 잔재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집권당이 바뀌면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바뀌거나 사라져버린다거나.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건축물이 의미하는 게 크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권력을 쥐게 되면 바꾸고 싶어 하는데, 눈에 띄게 바꿀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토목, 건축, 환경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부분에 건축가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그래도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당시 아방가르드 운동과 함께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사실 건축은 누군가 자본을 대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분야잖아요. 자본과 연결되어 있고 가장 많은 영향을 받다 보니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성향에 건축이 편향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아니다’라고 투쟁하면 더는 일을 주지 않겠죠. 그러면 건축을 실제로 구현하지 못하는 페이퍼 아키텍트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중화시킬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요. 건축주가 신념보다 공적인 가치에 눈을 뜨게끔 해주는 게 건축가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공공성도 요즘은 너무 편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공공성은 미학적인 부분일 수도 있고, 기술적인 부분이나 개념일 수도 있어요. 여러 방법을 통해 공공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공공의 사람들이 바로 쓸 수 있느냐 없느냐에만 편협하게 생각해요. 건축은 그 자체로 공공재의 성격을 피할 수 없어서 다양한 사고와 실험의 적용에 높은 가치가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공성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좋아요’를 많이 받는 포퓰리즘적 방향으로만 향하는 게 아니라요.
 
건축계를 지배하는 신화적 시각에서는 컴포넌트와 조립식 시스템을 통해 건축을 산업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가볍다고 비판했을 수도 있겠어요.
그렇죠. 왜냐하면, 그전의 건축은 철학적 사고와 연동된 체계이거나, 정신적 가치에 대한 표현 같은 게 있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해주냐 아니냐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모더니즘 이후 우리나라는 신비주의로 흐르는 경향인 것 같고요.
건축은 쉽게 이야기되거나 이해되는 것이 아닌, 고뇌하고 어렵고 고차원의 문제라는 식으로 포장되어 있어요.
이런 포장이 필요 없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건축의 본질이 마치 철학이나 정신적 가치인 것처럼 대하는 건 문제라고 봐요. 저는 건축의 본질은 결국 하나라고 봐요.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나약한 인간을 척박한 환경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이냐는 기능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아무리 멋져도 무너져서 사람이 죽으면 소용이 없는 거고요. 나머지는 다차원적으로 파생된 거죠.
 
팔기 위한 집도 등가의 가치를 갖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조금 다를 것 같아요. 자기만을 위한 것 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지점은 꼭 있어야 하고요. 예를 들어 넘지 못하게 담을 치는 것은 그 기능에 충실한 것이지만, 접근도 못 하게 송곳을 박아놓는 건 관계성에 문제가 있다고 봐요.
상업 시설이건, 뭐건 공공의 개념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없어요. 그것의 많고 적음이 건축의 좋음과 나쁨의 판별 기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일이죠. 기술의 발전, 새로운 실험, 그런 여러 가지 가치가 공공성에 영향을 줘요. 건축 심사를 해보면 공공성의 개념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버려 오히려 그 깊이나 진실성을 느끼기 힘든 것 같아요.
 
특히 젊은 건축가들에게 주는 상에서 공공의 영역에 이바지해야 인정받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경향이 있었죠.
맞아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미래 공공의 가치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저 더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건축물을 ‘공공적’ 이라 보고 높은 점수를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미국에서 실무를 쌓았는데, 첫 직장을 선택한 기준이 있었나요?
첫 직장으로 SOM에 갈지, KPF에 갈지 고민을 조금 했어요. 그러나 전 제가 없으면 망하는 회사에 가고 싶었어요. 저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기여(Contribution)였어요. ‘내가 없으면 우리 회사는 힘들어’라고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위치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야심가의 면모가 보이는데요?(웃음)
스스로에 대한 존재 가치의 문제였어요. 이미 모든 것이 세팅된 환경에 있기보다는 개척하고 싶었어요. 이바지할 바가 없는 직장이라면 내가 그 직장을 다닐 이유가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고른 회사가 ‘Chan Krieger Associates’라는 도시설계 회사였어요. GSD나 MIT 출신의 12~13명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부 도시설계를 전공했더라고요. 도시설계, 블록설계 하다 보면 버리기 아까운 건축 설계의 부분이 필요했는데,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 회사의 건축 설계는 혼자 도맡아 했어요. 엄청난 자유도 있었지만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죠. 그로 인해 많이 성장했지만, 고생을 사서 한 거예요. 거기서 <Brigham & Woman’s Hospital>이라는 설계비 300억 규모의 공모를 당선시켰어요.
 
그런데 결국 그 프로젝트에 교수님의 크레딧이 나오지 못했다고 들었어요.
이해는 가요. 당시 사무소에서 한국인 PM은 유태인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에서 불리한 상황이었어요. 그렇지만 그 이유가 더 화가 나더라고요. 당시 이러한 상황이 소문이 나서, 우규승 선생님의 부름으로 사무실을 옮기게 되었어요. 당시 우규승 건축사무소에는 10명 정도의 인원이 있었고 매번 1명은 한국 사람이 있었어요. 서울대학교 최두남 교수님부터 시립대 이선영 교수님, 서울대학교 최춘웅 교수님이 나가고 나서 제가 들어갔죠. 그다음이 최상기 교수, 그리고 그다음 권경원 씨였어요.
그곳에서 우규승 선생님이 미국인들에게도 존경받는 모습을 보고 더 존경스러웠어요. 평생 우규승 선생님을 보필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 평생 옆에 있겠다고 하니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내 아래 있을 사람이 아니니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러 떠나라고요. 그래서 지금 경희대학교 교수로 오게 되었어요.
 
실무를 쌓은 설계사무소마다 성향이 다르겠지만 이성관 소장님이나 우규승 소장님 사무실에서 건축가로서 실무를 쌓은 경험은 어땠나요? 자신만의 스타일이 튀어나오는 갈증은 없었나요?
우규승 선생님은 작업의 전반적인 방향, 즉 마스터 플랜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어요. 가장 초기 블록 단계에서의 사고, 즉 건물을 어떻게 앉힐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셨어요. 결국엔 모든 디테일까지 풀지만, 초기 단계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셨어요.
그곳에서 일할 때 우규승 선생님이 양재동 납골당 설계를 하고 계셨는데, 이미 배치가 어느 정도 나와 있었던 단계였어요. 제가 보조했던 프로젝트예요. 전반적인 움직임, 합리적인 매스의 방향성도 있겠지만 건물을 경험하기까지의 시퀀스 설계를 많이 하셨죠. 한번은 제가 단면을 끊어서 건물 전체에 전동 스크린 시스템을 넣자는 제안을 보여드렸어요. 매스가 완전히 솔리드해질 수도 있고, 투명해질 수 있다는 걸 렌더링으로 보여드렸죠. 한번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설득이 어려운 분이신데, 이렇게 오케이 하신 적은 처음이라고 동료 직원들이 놀라더라고요. 설명보다 렌더링부터 보여드렸기 때문에 빠르게 판단하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규승 선생님이 이 프로젝트를 2002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 출품했는데 “다음엔 김찬중 선생이 해야지”하셨어요. 그런데 4년 뒤 정말 참여하게 되어서 2006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 납골당 설계를 출품하게 되었죠. 그런 말씀을 해주신 게 가당치도 않지만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절 일개 막내 직원으로 본 것이 아니라 건축가로 인정해 주신 느낌이었거든요.
 
각 실무 경험들을 통해 스스로 하고자 하는 방향의 건축을 구체화할 수 있었나요?
사실 제가 선택한 사무실들은 건축 언어가 중심인 곳은 아니었어요. 건축을 정공법으로 해결하시려는 분들이었고, 결과도 굉장히 탄탄한 느낌이었어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근한 힘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지금 제 작업에 대한 레퍼런스로 지난 사무실의 작업을 언급하는 것은 잘 맞아떨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정통적인 구축 논리에 집중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 작업의 여러 카테고리 중 하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이죠. 사람들은 익숙한 것들에 대해 반응을 잘 하지 않으니까요.
 
이전 세대의 건축가들은 서양건축과 문화를 접하면서 다시 본인의 정체성, 한국 건축에 대한 정체성을 중요한 화두로 마주하게 된 경험이 있어요. 교수님은 그런 고민이 없었나요?
한국 건축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서는 특별히 고민해 본 기억이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어차피 한국 사람인데 그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지, 한국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 아닌 이상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한국인임을 떠나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었어요. 저는 건축가 - 인공적인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환경과 공간에 관한 문제 해결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이지, 제 개인적인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작업에 발현시켜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페셔널로서의 역할에 중점을 두었죠.
작업에서도 정체성이 문제가 된 때는 없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구름애 리조트> 프로젝트에서는 전통건축으로 리조트나 숙박 시설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상황의 문제 해결에 집중했지, 전통이라는 키워드나 ‘한국의 미’라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글쎄요. 종교시설을 설계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해당 프로젝트가 가진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지, 한국적인 방식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국제적인 반응이에요. 국제 콘퍼런스에서 작품 발표를 할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굉장히 신선하다.’, ‘그동안 보던 방식과 다른데, 굉장히 한국적인 것 같다’라는 뉘앙스가 있었어요. “So Korean”이라고요. 그게 뭘까 생각해 봤는데, 프로젝트에서 느껴지는 적극적 문제 해결의 방식이 한국적이라고 느껴진 것 같아요. 한국이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다이내믹하다는 느낌에 가까운 것 같아요.
 
한국의 상황에 가장 근접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한국적으로 보인다는 이야기겠네요.
그렇죠. 지금은 버네큘러나 로컬에 대한 인식 문제가 많이 대두되고 있는 것 같아요. 시장을 모두 열어놓고 생각해 보면, 조직의 역량은 정체성보다는 문제를 어떻게 인지하고 해결하느냐와 관계된 문제예요. 건축 언어(language)가 정체성으로 생각되는 때도 있죠. 예를 들어 전 세계의 안도 다다오 건축물들은 순전히 그의 정체성 덕분에 만들어진 경우니까요. 그 정체성 안에는 일본의 정체성, 일본적이라는 개념도 있고, 안도는 그 건축 언어에 가장 강한 것이고요. 가끔 그가 주로 사용하던 재료를 다른 것으로 바꾸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해요. 저도 나오시마를 다녀와서 역시 안도 다다오라고 감동했는데,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에 한 작업은 조금 실망스러워요.
결국 안도 다다오의 나오시마 프로젝트가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굉장히 종합적이고 총체적인데, 지역성과 육체가 융화되어있던 것을 몸체(건축물)만 떼어 놓으면 약해지게 되는 거죠. 결국, 선택의 문제예요. 오퍼레이션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발주처의 방향성 등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을 때,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지게 완성되는 것은 일본에서만 가능하겠다 싶었어요. 스타일만 해외로 나간 것 뿐인 거죠. OHS
 
진행 임진영
녹취 및 정리 우경희 
사진 이강석
인터뷰③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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