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건축가 조병수 ①

건축가의 여러 작업을 돌아보면서 건축 세계를 탐색해온 건축가특집으로 올해는 건축가 조병수를 만납니다. 건축가 조병수는 건축을 실용적이면서도 솔직한 재질의 거친 사과 상자 혹은 막사발에 비유하곤 합니다. 실용적인 박스의 절제된 형태는 사용자의 경험과 인식을 일깨우는 본질적인 공간의 경이로움을 담기 위한 것입니다. 나아가 단순한 형태의 병렬 혹은 조합은 사이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내외부 공간의 흐름을 엮어냅니다.

기능에 충실하지만 그 안에 기품이 담긴  조선 시대의 막사발, 미국 몬태나 지역의 농업, 산업 건물, 한옥의 경험을 좋아하는 건축가는 기능과 재료 본연의 특성에 충실하면서도 기능을 넘어서는 아름다움과 기품을 발견해냅니다. 이는 일관성 있는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형태의 흐름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인식을 우선하는 유기적인 건축과 맞닿아 있습니다.

유기적인 공간을 담기 위해 조병수의 건축은 간결하고 기하학적인 추상성을 띱니다.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모더니즘과 동양 사상, 유기성과 추상성과 같은 공존하기 어려운 극단을 포용하면서 현대 지역주의를 추구한다고 설명합니다. ‘거칢 속의 세련됨, 세련됨 속의 무심함'으로 대표되는 그의 건축은 그로 인해 세계화와 지역성의 경계에서 보편성을 갖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 이유로 올해 세계적인 비평가 케네스 프램튼의 저서 <현대 건축:비판적 역사>의 개정판(5th edition)에 처음 소개되는 한국 건축에서 건축가 조병수는 고 김수근, 조민석과 함께 등장합니다.

재료에 대한 이해, 쉬운 시공 방식과 구조에 대한 해석 등 만드는 것에 관한 관심 또한 그의 건축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정제된 원형의 공간이 주는 감동, 동시에 재료와 구조에 대한 실험과 시도는 우리가 건축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우리는 건축을 통해 적어도 사람들이 주변 환경을 인식하는 방법에 변화를 줄 수 있다’라는 마크 라자탄스키의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올해 건축가특집은 건축 영상/영화 제작 스튜디오 <기린그림>과 협업으로 공개된 5개의 건축 영상과 함께 인터뷰로 만나봅니다. 
 

항상 한옥에서의 경험, 기억들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나고 자란 곳이 궁금해요. 
6.25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서울에서 태어났죠. 부모님들이 서울로 올라오셔서 기억 속에 있는 집은 서울의 개량 한옥이었어요. 서촌의 근대 한옥처럼 작은 한옥이었는데, 그때는 큰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가보니까 20평 정도 되는 집이더라고요.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들은 어쨌든 자신들의 고향을 저의 고향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미국에 이민을 가면, 끊임없이 ‘너는 한국인’이라고 말해주듯 말이에요. 방학이면 자꾸 시골에 데려다 두셨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방학을 여러 번 보낼 수 있었고, 깊은 산골 동네의 경험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죠. 경상북도 상주 낙동이라는 곳인데 버스를 타고 깊게 들어가는 산골 동네였어요. 지금은 중앙고속도로가 뚫려서 완전히 흔적도 없어졌더라고요.
 
자고 일어나면 자리끼 물마저 얼었을 정도로 추우면서도 방바닥은 지글지글했다고 하셨죠. 또 다른 한옥에서의 기억이 있을까요?
가장 강렬하게 기억나는 부분은 마당인 것 같아요. 마당에 봄 햇살이 들었을 때 어린 마음에도 정말 따뜻하고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가 올 때는 마당에 나와서 흙으로 물 막으며 놀고요. 장난감도 별로 없을 때이니까요.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있는 것은 시골에서 사촌 형님들이 올라오셨을 때였어요. 서울 유학을 와서 좁은 집에 여러 명이 같이 살았어요. 마당에서 세수하고 같이 화장실 쓰고 북적북적하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던 기억들이 기억에 남아요.
 
 
학창 시절엔 어떠셨나요? 즐겨 찾던 관심사가 있으셨나요?
이렇게 모으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고, 문화적인 것에 관심이 있었는지 고궁 가는 것도 좋아했고, 골동품을 보러 황학시장부터 장안평도 다녔죠. 걷는 걸 좋아했어요. 특별히 갈 데가 없었으니까요. 데이트를 해도 한창 5시간씩 걷다 보면 종로에서 올라와서 성대 쪽으로 돌아 광화문으로 오면 서울 한 바퀴를 다 돌아요.
 
서울에 있을 때는 주로 어느 동네에 계셨던 건가요?
처음에 용산구에 살다가 동대문구 쪽에도 살았어요. 젊을 때 놀던 곳은 대부분 명동이나 종로였죠. 종로 2가의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 명동에는 필하모니 음악 감상실, 그리고 을지로에 타임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아주 시끄럽게 음악을 틀어주는 음악 감상실을 좋아했어요. 음악을 좋아했다기보다도 친구들이나 여자친구들을 사귀면 아는 척하고 데리고 가고 무게 잡는다고 다녔던 것 같아요.(웃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벽제 가마터에 도자기를 구우러 가셨던 게 흥미로워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만드는 것은 어릴 때부터 항상 좋아했어요. 수업 시간에도 항상 책상 밑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도자기도 좋아하고 골동품도 좋아하고 가구도 좋아하긴 했는데, 그걸 진지하게 생각했다기보다는 친구가 도예를 하는 게 계기가 되었어요. 친구 따라 가보니 그곳이 조용하고 좋더라고요. 흙을 만지는 게 좋았고요.
대신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실망스러웠죠. 기껏 만들어서 가마 속에 넣었는데 완전히 다른 게 나오는 거예요. 가로 세로로, 30%가 줄어드니까. 면적으로 보면 0.7×0.7, 49%가 되잖아요. 거기에 또 높이를 0.7로 곱하면 부피는 3분의 1로 줄어드는 거죠. 깜짝 놀랐죠. 요즘은 전기나 가스 가마를 사용해서 일관성이 있지만, 옛날에 장작으로 땔 때는 그야말로 불이 어떻게 휘몰아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예요. 불이 방향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도자기가 휘기도 하고 색이 한쪽은 밝고 한쪽은 유약이 안 녹는다든지 하니, 너무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뭔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컨트롤도 안되고 기껏 꺼내 보니까 결과물도 그렇고요. 산에 가만히 앉아서, 건축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리는 순간에 행복감을 느낀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면서 건축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건축이라는 분야를 처음 알게 된 건 언제인가요?
사실 그 당시에 건축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어요. 1970년대 후반 정도였는데, 교보빌딩이 지어졌고 그곳에 맛있는 스파게티집이 생겼어요. 큰 서점과 음식, 잘 지은 건물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었죠.
그러면서 세종문화회관이 지어졌는데 오픈할 때 전시를 했어요. 그때 도면을 보게 되었어요. 청사진 도면이 두껍게 있는데, 뭔가 알아보지 못하게 그려져 있는 게 있어 보였어요.(웃음) 이걸 가지고 건물을 짓는구나,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는 넘어서는 것 같은데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세종문화회관이 처음에 지어졌을 때 젊은 사람들은 마음에 든다, 안 든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너무 투박하고 무겁다’, ‘경복궁 앞에 그렇게 무거운 게 들어가야 하나’라는 이야기들도 나왔죠. 저는 어쨌든 그게 좋아 보이고, 대단해 보였어요. 도면으로 시작해서 건물이 되는 과정이 궁금했어요. 건축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고, 건축과를 가서 뭔지 한번 보고 싶었어요. 예술적이고 만드는 것이 중요한 건지, 엔지니어링을 잘해야 하는 건지 궁금했는데, 만드는 것, 예술적이거나 문화적인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교육받다 보니 흥미로웠어요. 엔지니어링을 굳이 많이 안 해도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천직이라고 생각했죠.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왜 바로 유학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해요.
제가 성장한 1960~70년대는 우리나라가 많이 개방되지 못했었던 때죠. 70년대를 지나면서 유신을 겪었지만 저는 잘 몰랐어요. 선생님들이나 과외선생님들이 이야기해주는 것만 듣고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하면서 통제된 사회 속에서 자라게 되었죠.
1970년대 후반, 80년대는 그야말로 격변기였어요. ‘국풍’이라는 문화 운동 같은 걸 국가적인 차원으로 내세우면서, 한편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죠. 그게 바로 저희 세대였어요. 학생 운동에 참여했던 친구들도 친한 친구들이었고,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친구들도 있어서 같이 언쟁도 하고…….통제된 사회에 있으면서 더 자유로운 곳에 가서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게 되었어요.
 
미국 대학을 선택할 이유도 독특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따라 몬태나대학을 선택하셨어요. 왜 그 소설이 동기가 되었을까요?
누구나 그런 기억 몇 개는 가지고 있을 것 같아요. 무시해도 될 만큼의 영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자신에게 굉장히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렇기 때문에 작업의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일들이죠.
저에게 그중 하나는 당시 청계천 헌책방이었어요. 지나다가 들어가서 집은 책이 마크 트웨인의 『What is man』이었는데, 한글판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어요. 당시엔 『톰 소여의 모험』을 쓴 그 마크 트웨인인지도 몰랐어요. 인간을 너무나 비관적으로 그린 책인데, 인간의 순수한 사랑이란 없고,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마저도 결국 자기를 위한 선택이고 결정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어요. 그게 저에게는 큰 질문을 던졌어요. 어떻게 보면 약간 괴롭다고 해야 하나, ‘저게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어요. 항상 인간이나 인생을 훨씬 더 아름답게 긍정적이라고 바라보고 행복하게 자란 편이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궁금했죠.
어쨌든 그분의 소설이 좋아서 도대체 어릴 때 어떤 동네에서 어떻게 자라고 살았을지 궁금했어요. 이왕 가는 거면 그 지역에 가보고 싶었죠.
나중에는 스스로 어느 정도 답을 얻게 되었던 것 같아요. 『What is man』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을 이성적으로만 바라봤던 것 같고 그 이면에 감성적인 면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그 책을 읽고서 10년, 15년 건축 공부를 하면서도 계속 이성과 감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원 졸업 논문 때 한 ‘경험과 인식’이라는 주제도 감성적인 부분을 다루고자 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몬태나 지역을 맞닥뜨렸을 때,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몬태나대학은 완전히 허허벌판 시골 같은 곳이었죠. 등록금이 저렴하고 공부하기 편할 것 같아서 그곳에서 2년 정도 영어도 익히고 공부한 다음에, 대도시의 큰 학교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워낙 날씨도 좋은 주립대학이다 보니 학교 시설도 잘되어 있었어요. 어느 날 하늘을 보다가 순간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몬태나에서 2년 정도 지나서였던 것 같아요. 교수님들도 학교를 옮기는 걸 추천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곳에 머물게 되었죠.
 
몬태나 지역에서 마주한 창고나 농업 시설들을 보면서 강렬한 감흥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지역의 풍경에서 얻은 건 무엇이었을까요?
아무래도 몬태나대학은 미국으로 치면 깡촌의 지방대죠. 시골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겨울에 눈이 엄청나게 왔을 때 같이 흑백사진을 찍으러 여러 마을을 다녔던 기억도 나고, 그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농촌 생활이 쉬운 게 아니라서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건물도 형식보다는 최소한의 재료로 스마트하게 지었어요. 옛날에 지었던 우리나라 건물들도 담백하고 솔직하고 꾸밈없이 실용적으로 지었잖아요. 서구의 벌판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시설들이었기 때문에 감명받고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당시 활발했던 국제 담론도 현장에서 접할 수 있었을 듯해요.
몬태나에 처음 갔을 때 선배들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책을 보여줬어요. 저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누군지 몰랐어요. 너무 딱딱하고 형식에 치우친 것 같아 재미없다고 했더니 다들 깜짝 놀라면서 ‘네가 뭘 안다고’하며 저를 아주 싫어하더라고요.(웃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멋있다고 보여줬는데 건축을 시작도 안 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하니까요.(웃음)
당시의 건축 스타일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저뿐 아니라 친구들도 그런 경향이 딱딱하다는 생각하게 되고, 그런 것에 꼭 얽매이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포스트 모더니즘도 나오고 1980년대에 디컨스트럭티비즘이 나오는 등 경직된 것을 새롭게 해체하는 형식도 나왔죠. 그야말로 프랭크 로이드의 딱딱함을 깨는 완전히 다른 형식이 나왔을 때 거기에 다 동의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많이 나눴던 것 같아요.
캐나다 시골에서 온 친구가 있었는데, 건물의 아름다움과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런 형식을 깨든지 다른 형태가 필요해서 덧붙이듯 만들었을 때, 그 자체가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해 준 적 있었어요. 저는 그 말에 공감했어요. 우리가 공부하던 1980년대가 포스트모던이나 해체주의 건축이 나오기 훨씬 전인데, 경험이 없고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사람들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시골의 건물을 보고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것 같고요.
 
아직도 기억하는 그때의 장면들이 있으신가요?
랜드스케이프, 그곳의 풍광과 어우러지는 건물들이 편안하게 있는 게 좋았죠. 형식적으로는 굉장히 달라요. 우리나라 사찰이나 마을은 작은 조각들로 되어서 랜드스케이프에 스며들듯이 들어가는데, 몬태나는 형태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로 서 있고 그게 풍광과 더불어서 가게 되죠. 형식은 아주 다르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물과 풍광이 하나가 되어서 전체적으로 어우러지는 것 또한 매우 아름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소 ‘실용성과 솔직한 재질감, 투박하지만 기품이 담겨있는 건축’을 말씀하시던 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이 먼저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결이 닮아있는 곳을 경험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한국인의 어떤 심성과 자연관이 일본 사람과 굉장히 다른데, 제가 볼 때는 한국과 미국이 더 비슷한 것 같아요. 미국 사람들이 볼 때는 한국과 일본이 비슷하다고 보겠지만요. 한국의 경우, 유교적인 생각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자연환경이 척박하여서 모여서 편안하게 만들고자 하는 이유도 있을 수 있죠. 미국도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청교도 정신 속에서 담백하고 솔직하게 있는 걸 그대로 표현하는 것과 두 번째는 최소한의 재료로 스마트하게 구조나 마감, 결부 같은 걸 만들어 시공하는 거죠. 농업 건축물에서 보면 솔직담백한 유사점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일본이나 중국의 토속 건축에도 대부분 그런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형식이 다른 것 같아요. 스위스에 갔을 때 아기자기하고 잘 다듬어서 만든 건축을 봤을 때 일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일본이나 스위스나 독일 이쪽이 비슷하다고 한다면, 아마 언어를 연구하면 연관성을 밝혀낼 수 있을지 몰라요. 표현 방식 같은 것들도 분명하고요. 우리는 그와 다르게 오히려 미국의 농업건축이 보여주는 특성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몬태나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으로 가셨습니다. 하버드 대학을 선택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대학원 가기 전에 한 2년 정도 보스턴에서 일을 했어요. 하버드에서 공부하신 교수님들이 저를 추천해서 보스턴으로 가게 되었는데, 대학원은 하버드로 가도 좋겠다고 이야기해주셨어요. 하버드 출신들이 많이 있던 동네니까, 몬태나 대학교 나왔다고 조금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웃음)
꼭 졸업장을 딸 생각은 아니었어요. 어차피 건축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내가 보기엔 그들도 별거 아닌 것 같은데 한 번 가보자 했죠. 역시 가보니까 재미없고 싫어서 교환 학생으로 스위스에 도망가 있었어요. 수업도 학교에서 많이 안 듣고 외부에서 들었죠. 하버드 대학은 근처의 13개 대학 어디서든 수업을 들을 수 있고 학점을 다 인정해 주는 게 좋았어요.
MIT 대학에 있던 조각가분들이 계셨는데 한 분은 건축과 비주얼 아트를 가르치는 에디 레빈(Edward Levine)이라는 교수님이셨어요. ‘사람이 걷지 못한다면, 보지 못한다면, 어떤 건물을 만들었을까, 어떤 환경을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프로젝트를 하신 분이죠. 또 한 분은 일본계 여성 타호 리스코(Risutko Taho)라는 조각가셨어요. 건물이나 버려진 공간 속에 환경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분이었어요. 그분들에게 수업을 들으며 영향을 받았고, 대학원 논문 프로젝트를 할 때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학교 자체는 별로 안 좋아했어요. 너무 형식에 치우친다고 생각했죠. 제가 지원해서 들었던 수업은 맥 스카건(Mack Scogin) 교수님 한 분이었던 것 같아요. 맥 스카건 교수는 스튜디오 때 돼지우리를 보여줬어요. 본능적인 환경에서 돼지들도 밥을 먹게 할 수도 있고, 멈추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는데, 감정과 감성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었어요. 맥 스카건 교수는 잘 만들기도 하지만, 미국 시골에서 그야말로 혼자 실무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만든 분이죠. 공부를 많이 했던 것도 아니고 석사 학위가 있던 것도 아니고요. 그분도 시골의 랜드스케이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어쨌든 하버드 사람들이 추구하던 경향 혹은 그 방향을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몬태나 영향이 커서 계속 몬태나를 그리워하면서 혼자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시골 생각을 많이 했었죠.
 
어느 대학이나 학장의 분위기에 따라서 그 시기 커리큘럼이나 교육의 방향이 확고해지잖아요. 그 당시 하버드 대학의 학장은 어떤 분이셨나요?
어떻게 보면, 하버드 대학은 모더니즘의 줄기를 약간 가져왔던 거죠. 1937년대에 그로피우스가 히틀러를 피해 와서 제대로 된 건축 대학(graduate school of design)을 만들 때 건축과 디렉터로 일하면서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를 데려왔으니까요.  
저는 맥 스카건 교수의 감각적 건축의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 학장은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 교수였어요. 당시 유럽의 젊은 건축가들을 많이 초대해 왔죠. 스위스의 헤어초크 앤 드 뫼롱(Herzog & de Meuron)도 젊었을 때 와서 가르쳤고 디너 앤 디너(Diener & Diener) 그리고 멀스 앤 메이니(Mercel Meili)라는 젊은 건축가도 있었어요. 만들기에 치중해 있는 부분들은 좋았어요. 디테일에 관심이 있어서 수업을 듣고 싶었고, 1:1 수업을 요청하면 그분들이 받아들여 주셔서 한 시간, 두 시간씩 벽돌을 어떻게 쓰는 게 좋은 것인지, 유럽에서는 어떤 전통을 가지고 돌을 써왔고 조인트 방식은 어떤 것이 있는지 등등 건물을 만드는 것에 대해 배운 것은 좋은 계기가 되었죠.
 
진행 임진영
사진 텍스처 온 텍스처 texture on texture
인터뷰 ②에서 이어집니다.
 
인터뷰_임진영 사진_텍스처 온 텍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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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P 5주년 기념 SPECIAL TOUR <위기 시대, 사회적 돌봄과 공간 변화>, 뉴노멀의 라이프스타일 “문화인류학자와 건축가가 만나    위기 시대, 뉴노멀의 과 공간을 이야기합니다.”    집, 학교, 돌봄, 공적 공간  코로나-19는 경제, 정치, 사회, 문화뿐 아니라 사회 규범과 라이프스타일, 젠더의 역할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전제로 일상이 작동하지만, 더는 누릴 수 없는 경험과 닫힌 공간은 생활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위기로 촉발된 이 난감한 시대에 뉴노멀의 라이프스타일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무엇을 살펴야 할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팬데믹 이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전제로 일상이 작동하지만, 우리의 삶 전반에는 조용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도시 공간의 사용 방식과 해석이 달라지고, 공간에 대한 가치도 변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사람들의 만남은 줄었지만, 거리를 뛰어넘는 온라인 연결은 네트워크를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하기도 합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공간의 가치도 변화합니다. 온라인 수업으로 인해 학교의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전례 없는 상황의 사각지대에서 사회 안전망도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돌봄의 영역을 여성에게 전담하는 암묵적인 동의도 작동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돌봄이 공적인 영역에서 재편되어야 할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물리적인 공간의 쓰임과 사회적 관계 모두 재편되는 시기에 뉴노멀의 라이프스타일은 어떻게 변화할까요?   서울디자인재단은 8월 13일 오후 2시, 조한혜정 교수와 유현준 교수를 모시고 ‘위기 시대, 사회적 돌봄과 공간 변화’라는 주제의 강연을 진행합니다. <뉴노멀의 라이프스타일>을 탐색하는 이 강연은 오는 12월 디자인뮤지엄 개관을 앞두고 준비 중인 개관특별전 <우먼 인 디자인(가칭)>의 연계 강연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이번 강연은 위기로 촉발된 난감한 시대에 뉴노멀의 라이프스타일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함께 살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프로그램  강연 1. 조한혜정 교수 (20분)  강연 2. 유현준 교수 (20분)    대담 및 질의응답 조한혜정 x 유현준 교수 (30분)  모더레이터_임진영(오픈하우스서울) 일시 : 2020.08.13 (수요일) 오후 2시  유튜브 '디디피 서울' 채널에서 생중계 www.youtube.com/user/ddpseoul 주최 : 서울디자인재단, DDP 디자인 뮤지엄 주관 : 오픈하우스서울  
OPENHOUSE 기획, 소유, 거래의 방식, 오픈하우스서울 x 이강석작업실 “어떻게 ‘살’ 것인가”   집에 대한 생각, 기준, 가치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가 변화하고, 가족 기본 구성원 및 라이프스타일이 다양화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삶의 주거 방식을 고민하는 새로운 시도를 목격하게 됩니다.  집을 '사는 법'도 변해가고 있습니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집을 투자의 대상으로 삼는 기존 방식과는 다른 다양한 시도들이 많아지는 것이 주목할만한 변화입니다. 선택지가 풍성해지는 덕분일까요? 우리의 고민도 깊어만 갑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고민 말입니다.  <오픈하우스서울 2020>은 유례 없는 뉴노멀의 시대와 마주하고 있는 지금, 주어진 현실과 공간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닌,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고 삶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보고자 합니다. 그들이 지금 생각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런 새로운 시도들이 앞으로의 서울의 주거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집에 대한 바람이 다양해지면 집을 다루는 시장과 플랫폼도 달라질까요?  글 최진이(오픈하우스서울 오거나이저)   영상ㅣ 집을 기획하다 / 서울·소셜·스탠다드(삼시옷)_ 김하나, 김민철 대표 영상ㅣ 공간 발굴, 그리고 탐색  / 초현실부동산_ 박성진, 이진오 공동대표 영상ㅣ 세컨드하우스의 공유 / 강미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영상ㅣ 색다른 부동산 거래  / 별집 공인중개사사무소_ 전명희 대표 
OPENHOUSE 비짓유어셀프 함께 모이지 못하지만, 개별 방문 가능한 건축물을 소개합니다. 도시 곳곳의 건축물을 찾아 나만의 조용한 도시 탐색을 추천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 안내된 내용이 수시로 달라질 수 있으니, 안내된 웹사이트에서 방문 가능한 시간을 한번 더 확인해주세요.   태양의 집 / 김중업 문화비축기지 / 허서구, 백상진, 김경도 평화문화진지 / 유종수 + 김빈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 김택빈, 장용순, 이상구 아트벙커 B39, 김광수 코스모 40 / 양수인, 임승모 약현성당, E. 코스트 신부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서소문 역사공원 및 성지 역사박물관 / 윤승현, 이규상, 우준승 한국정교회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 / 조창한 가회동 백인제 가옥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 최욱 현대카드 Vinyl & Plastic / 서승모 현대카드 Cooking Library / 최욱 현대카드 Travel Library / 카타야마 마사미치 현대카드 Music Library / 최문규 수락행복발전소 / 장윤규, 신창훈 누하동 이상범 가옥과 화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도서관 / 조진만 필운동 홍건익 가옥 백남준 기념관 / 최욱 계동 배렴가옥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 최욱 세운베이스먼트, 이충기 PLACE 1, 김찬중 선벽원 (善甓苑), 이충기 한내 지혜의 숲 / 장윤규, 신창훈 유유제약 안양공장 / 김중업 올림픽 세계평화의 문 / 김중업  
OPENHOUSE 집의 공간, 오픈하우스서울 x 기린그림 ‘발코니 확장형’이라는 말은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 유형인 아파트의 지향점을 보여줍니다. 외기와 면한 발코니를 실내화하면서 따뜻하고 편리한 내부 공간 위주의 집은 4계절의 더위와 추위를 고려한 방법이기도 하고, 거실의 면적을 늘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면적을 늘리고 단열에 유리한 주거 환경은 관리와 기능에 최적화된 밀폐된 실내를 만듭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안전하고 편안한 이 집의 공간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오픈하우스의 첫번째 스페셜 테마인 ‘집의 공간’은 실내 환경에 최적화된 한국 상황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집의 요소들을 살펴봅니다. 그동안 방치되었거나, 주목하지 않았으나 다시 생각하게 된 집의 공간과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마당, 옥상, 열린 담, 안과 밖의 경계, 공동의 공간뿐만 아니라, 자연과 어우러진 조선의 별서, 집과 도시의 중간 주거까지, 집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글 임진영(오픈하우스서울 대표)    온라인 프로그램  영상_하늘과 만나는 마당, 옥상 ㅣ 부암동 주택_ 최두남  영상_열린 담 ㅣ 케이브하우스_김광수  영상_공동의 거실 ㅣ 유일주택_최하영, 박창현  영상_한옥 리노베이션 ㅣ 가회동 한옥 및 장푸르베 하우스_최욱  영상_안과 밖을 확장하는 반외부공간 ㅣ 새정이마을 주택_정재헌  영상_은퇴자의 재택근무 ㅣ 청운동 주택_김현대  영상_흐르는 마당 ㅣ G하우스_서승모  영상_동네의 접점 ㅣ 해방촌 해방구_임태병, 스튜디오빅미니  영상_정원과 별서 ㅣ 반계 윤웅렬 별서_김봉렬  영상_일상과 비일상의 공존 ㅣ 캐빈하우스_김창균    현장 프로그램 (10.19일 예약 오픈)  11월 8일  오전 11시        서드플레이스 홍은2_박창현  11월 8일  오후   1시        서드플레이스 홍은2_박창현  11월 8일  오전   3시        서드플레이스 홍은2_박창현   
SPECIAL 건축가 조병수 건축가의 여러 작업을 돌아보면서 건축 세계를 탐색해온 건축가특집으로 올해는 건축가 조병수를 만납니다. 건축가 조병수는 건축을 실용적이면서도 솔직한 재질의 거친 사과 상자 혹은 막사발에 비유하곤 합니다. 실용적인 박스의 절제된 형태는 사용자의 경험과 인식을 일깨우는 본질적인 공간의 경이로움을 담기 위한 것입니다. 나아가 단순한 형태의 병렬 혹은 조합은 사이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내외부 공간의 흐름을 엮어냅니다. 기능에 충실하지만 그 안에 기품이 담긴  조선 시대의 막사발, 미국 몬태나 지역의 농업, 산업 건물, 한옥의 경험을 좋아하는 건축가는 기능과 재료 본연의 특성에 충실하면서도 기능을 넘어서는 아름다움과 기품을 발견해냅니다. 이는 일관성 있는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형태의 흐름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인식을 우선하는 유기적인 건축과 맞닿아 있습니다. 유기적인 공간을 담기 위해 조병수의 건축은 간결하고 기하학적인 추상성을 띱니다.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모더니즘과 동양 사상, 유기성과 추상성과 같은 공존하기 어려운 극단을 포용하면서 현대 지역주의를 추구한다고 설명합니다. ‘거칢 속의 세련됨, 세련됨 속의 무심함'으로 대표되는 그의 건축은 그로 인해 세계화와 지역성의 경계에서 보편성을 갖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 이유로 올해 세계적인 비평가 케네스 프램튼의 저서 <현대 건축:비판적 역사>의 개정판(5th edition)에 처음 소개되는 한국 건축에서 건축가 조병수는 고 김수근, 조민석과 함께 등장합니다. 재료에 대한 이해, 쉬운 시공 방식과 구조에 대한 해석 등 만드는 것에 관한 관심 또한 그의 건축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정제된 원형의 공간이 주는 감동, 동시에 재료와 구조에 대한 실험과 시도는 우리가 건축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우리는 건축을 통해 적어도 사람들이 주변 환경을 인식하는 방법에 변화를 줄 수 있다’라는 마크 라자탄스키의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올해 건축가특집은 건축 영상/영화 제작 스튜디오 <기린그림>과 협업으로 4개의 건축 영상과 라이브로 진행될 오픈스튜디오, 그리고 소규모 오픈하우스를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글 임진영(오픈하우스서울 대표)  사진 texture on texture 온라인 프로그램   영상 수곡리 ㅁ자집  영상 땅집 : 윤동주의 하늘과 땅과 별을 기리는 집  영상 꺾인 지붕 집  영상 기지 (GIZI)_Art Base   영상 운중동 주택   Live 오픈스튜디오 현장 프로그램 (10.19일 예약 오픈)  10월 25일 오전 10시 반  수곡리 ㅁ자집, 땅집_ 조병수  10월 25일 오후 1시         수곡리 ㅁ자집, 땅집_ 조병수  10월 25일 오후 2시 반     수곡리 ㅁ자집, 땅집_ 조병수   10월 25일 오후 4시         수곡리 ㅁ자집, 땅집_ 조병수  
SPECIAL 건축가 조병수 ① 건축가의 여러 작업을 돌아보면서 건축 세계를 탐색해온 건축가특집으로 올해는 건축가 조병수를 만납니다. 건축가 조병수는 건축을 실용적이면서도 솔직한 재질의 거친 사과 상자 혹은 막사발에 비유하곤 합니다. 실용적인 박스의 절제된 형태는 사용자의 경험과 인식을 일깨우는 본질적인 공간의 경이로움을 담기 위한 것입니다. 나아가 단순한 형태의 병렬 혹은 조합은 사이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내외부 공간의 흐름을 엮어냅니다. 기능에 충실하지만 그 안에 기품이 담긴  조선 시대의 막사발, 미국 몬태나 지역의 농업, 산업 건물, 한옥의 경험을 좋아하는 건축가는 기능과 재료 본연의 특성에 충실하면서도 기능을 넘어서는 아름다움과 기품을 발견해냅니다. 이는 일관성 있는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형태의 흐름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인식을 우선하는 유기적인 건축과 맞닿아 있습니다. 유기적인 공간을 담기 위해 조병수의 건축은 간결하고 기하학적인 추상성을 띱니다.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모더니즘과 동양 사상, 유기성과 추상성과 같은 공존하기 어려운 극단을 포용하면서 현대 지역주의를 추구한다고 설명합니다. ‘거칢 속의 세련됨, 세련됨 속의 무심함'으로 대표되는 그의 건축은 그로 인해 세계화와 지역성의 경계에서 보편성을 갖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 이유로 올해 세계적인 비평가 케네스 프램튼의 저서 <현대 건축:비판적 역사>의 개정판(5th edition)에 처음 소개되는 한국 건축에서 건축가 조병수는 고 김수근, 조민석과 함께 등장합니다. 재료에 대한 이해, 쉬운 시공 방식과 구조에 대한 해석 등 만드는 것에 관한 관심 또한 그의 건축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정제된 원형의 공간이 주는 감동, 동시에 재료와 구조에 대한 실험과 시도는 우리가 건축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우리는 건축을 통해 적어도 사람들이 주변 환경을 인식하는 방법에 변화를 줄 수 있다’라는 마크 라자탄스키의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올해 건축가특집은 건축 영상/영화 제작 스튜디오 <기린그림>과 협업으로 공개된 5개의 건축 영상과 함께 인터뷰로 만나봅니다.    항상 한옥에서의 경험, 기억들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나고 자란 곳이 궁금해요.  6.25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서울에서 태어났죠. 부모님들이 서울로 올라오셔서 기억 속에 있는 집은 서울의 개량 한옥이었어요. 서촌의 근대 한옥처럼 작은 한옥이었는데, 그때는 큰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가보니까 20평 정도 되는 집이더라고요.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들은 어쨌든 자신들의 고향을 저의 고향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미국에 이민을 가면, 끊임없이 ‘너는 한국인’이라고 말해주듯 말이에요. 방학이면 자꾸 시골에 데려다 두셨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방학을 여러 번 보낼 수 있었고, 깊은 산골 동네의 경험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죠. 경상북도 상주 낙동이라는 곳인데 버스를 타고 깊게 들어가는 산골 동네였어요. 지금은 중앙고속도로가 뚫려서 완전히 흔적도 없어졌더라고요.   자고 일어나면 자리끼 물마저 얼었을 정도로 추우면서도 방바닥은 지글지글했다고 하셨죠. 또 다른 한옥에서의 기억이 있을까요? 가장 강렬하게 기억나는 부분은 마당인 것 같아요. 마당에 봄 햇살이 들었을 때 어린 마음에도 정말 따뜻하고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가 올 때는 마당에 나와서 흙으로 물 막으며 놀고요. 장난감도 별로 없을 때이니까요.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있는 것은 시골에서 사촌 형님들이 올라오셨을 때였어요. 서울 유학을 와서 좁은 집에 여러 명이 같이 살았어요. 마당에서 세수하고 같이 화장실 쓰고 북적북적하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던 기억들이 기억에 남아요.  
SPECIAL 건축가 조병수 ② 스위스에 교환 학생으로 가셨을 때 경험이 궁금해요. 최근 『건축 문답』이라는 책에서 건축가 이동준은 스위스 건축이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다면 만드는 방식까지 고려해서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소장님과 가장 맞닿은 지점이 아닌가 싶어요. 스위스는 3개의 문화권 - 루가노 지역의 이탈리아 문화권, 취리히 지역의 독어 문화권, 그리고 제네바 쪽의 불어 문화권으로 나뉘어요. 서로 좀 싫어하죠. 저는 취리히에 가 있었고요. 어쨌건 취리히 대학도 이성주의적 건축, 이탈리아 합리주의(Italian rationalism)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당시 학장인 마리오 캄피(Mario Campi) 교수도 루가노 지역에서 오셨는데, 이탈리아 영향을 많이 받으셨죠. 그 당시에 안토니오 츄치(Antonio Chuchi)라는 학자분을 모셔서 강의를 했고,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마치고 제가 하버드로 돌아왔을 때 그분도 또 하버드에 방문 교수로 오셨어요. 츄치 교수의 수업을 들었던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오래된 것(old)과 새것(new)을 도면상에서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굉장히 혼나는 거예요. 뭐가 뭔지 알고 해야 한다는 거죠. 만드는 것에서도 그래요. 예를 들자면 일본의 이세 신궁(Ise Shrine)은 나무 몇 개로 아주 간결하게 짜 맞히듯 만드는데, 스위스 건물도 그렇죠. 명료한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취리히 대학은 만들기와 재료(material)에 대해 강력했던 것 같아요.   프랑스 불어 문화권은 그 당시에 로맨틱하고 멋을 부리는 것 같았고 이탈리아 문화권도 저와 동료 학생들은 싫어했죠. 그 당시에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유명할 때인데 우리 학교 학생들이나 교수들은 그의 건축을 비판했어요. 형태를 가지고 포스트 모던처럼 형상화하는 방식이라고요. 강남 교보빌딩처럼 두꺼운 벽돌 건물 같아 보이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붙여서 만드는 치장 벽돌(face brick)이에요. 그런 색상이나 질감이나 투박함이 실제로 안에 들어가 보면 다른 건물이 되어요. 형태적으로 과장되어 진실하게 드러나지 않죠. 그렇지만 따뜻해 보이고 전통성을 가지고 있고요.   취리히 대학은 그런 면에서 달랐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가장 모던하다고 해야 하나? 그로피우스 이후로 이어진 미스 반 데어 로에처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표현하는 쪽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 이유로 하버드와 취리히 대학이 교환 학생 프로그램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 연구소를 같이 공유해왔죠. 취리히 대학(ETH)과 하버드 대학이 어떤 공통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교환 학생으로 갔을 때 마리오 캄피 교수가 점심에 초대해서 라파엘 모네오 교수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둘이서 함께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하면서, 자유롭게 공부하고 서로 배울 기회를 주고자 하는데 도장을 찍었다고요. 서로 학점도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수업도 안 들어와도 되고요. 마리오 캄피 교수는 합리주의(rationalism)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명쾌한 건축을 주장하셨던 분이고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 교수도 텍토닉(tectonic)한 건물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은 분이다 보니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스위스에 계시는 동안 유럽을 돌아볼 기회도 있으셨나요? 저희 때에는 비행깃값도 비싸서 많이 못 다녔어요. 몬태나 대학교 4학년 때 유럽에 가는 스튜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비행깃값이나 경비를 따로 내야 하기 때문에 못 갔어요. 당연히 너무 가고 싶었죠. 대학원에서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통해서 갈 수 있게 된 거죠. 스위스 대학에서는 경비도 지원해줘서 터키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어요. 유럽도 다닐 수 있었는데 정말 포스트 카드에서 본 것처럼 아름다울지 궁금했어요. 관광 사진만 보면 아름다운데 막상 가보면 그렇지 않은 곳이 많잖아요. 처음 스위스 공항에서 내려 버스 타고 들어가는 데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그런데 많이 돌아보면 볼수록 좀 실망스러웠어요. 프랑스 파리에서도 그랬고요. 생각할수록 성 베드로 성당(Saint Peter's church)과 같은 곳은 감동적이지 못했죠. 너무 형식이나 형태에 치중한 게 아닌가 싶었어요.   유럽에서는 현대 건축물이 좋았어요.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건물에 들어가 봐도 좋더라고요. 그러니까 1900년대 초나 이후에 지어진 것들 아니면 1700~1800년대 지었더라도 에펠탑 이후의 철과 콘크리트, 공장이라든지 모던한 건축은 좋은데 돌로 붙여서 요란하게 장식한 성당 건축물은 잘 모르겠더라고요. 우연히 가다가 성당 문이 열려서 들어가서 보니 형태는 클래식한 성당이고 그 안은 콘크리트 건물이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독창성(originality)이 있어야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죠.   그러다가 터키에서 폐허 같은 고대 도시를 봤을 때는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유럽에 한 학기 체류하면서 슬라이드를 5통 정도 찍었는데, 터키에서는 보름 만에 한 20통 찍은 것 같아요. 마을과 언덕에서 양 치는 아이들, 언젠가 꼭 와서 살고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았어요. 터키에서 더 감동을 받아 좋다고 했더니 그때 갔던 유럽이나 미국 친구들이 ‘야, 너 여기 한국과 허름한 게 비슷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놀렸죠.(웃음)   르코르뷔지에가 주도하는 국제주의 건축이 태생한 배경에 르코르뷔지에가 배제한 스위스 건축가의 유기적 모더니즘이 있습니다. 유기적 모더니즘의 태도가 지금 많은 지역 건축가들이 시도하는 것과 연결 지점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물론 케네스 프램튼이 말하는 비평적 지역주의와도 연결되고요. 소장님에게도 스위스의 경험이 연관되는 게 있으신가요? 학술적으로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마르셀 메일리(Marcel Meili) 교수의 작은 건물에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모던하고 현대적인 건물을 설계하면서도 지금까지 자신들이 건물을 지어왔던 형식이나 양식을 반영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죠. 그런 것들은 학교에서 배우거나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는 이해하지 못 하는 의미일 수 있겠다 싶어요. 그런 건물들은 결국 토속적인(Vernacular) 건축에서 나오죠. 풍토, 재료와 잘 맞는 건축물들은 굉장히 좋아요. 그래서 우리도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건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한옥이라는 형식은 현대적인 요구사항과 잘 안 맞는 거죠. 면적도, 층수도 많이 필요하고 건폐율도 많이 잡아야 하고 사용의 편리성을 고려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사실 뜯어보면 우리도 현대적인 지역성, 그런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하버드대에서 ‘경험과 인식’이라는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쓰셨습니다. 네모난 박스 안에 정적이면서 순수한 공간의 아우라를 담고자 하셨어요. 당시에 표현하고자 하셨던 건 어떤 것일까요? 그때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알았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죠.(웃음) 뭔지 모르는 단계에서 시작한 거예요. 누구나 똑같은 것 같아요. 논문 프로젝트를 하고 나면 내가 왜 잘못했는지, 어떻게 하면 안 되는지, 어떤 것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겠다든지 어렴풋이 아는 정도죠. 저는 동양적인 것에서 출발하고자 했어요. 1970~80년대에는 현대 건축에 대한 비판이 많았으니까요. 현대 건축은 죽었다, 모든 것들을 망가트리는 말라비틀어진 건축일 뿐이다, 껍질만 있고, 알갱이가 없어졌다고 했죠 현대 건축의 실패에 관한 책도 많이 나왔을 때인데 그게 과연 무엇인가, 왜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선택은 여러 가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 알베르토 페레스 고메스(Alberto Pérez-Gómez) 맥길대학교 교수의 『현대 과학의 위기와 건축(Architecture and the Crisis of Modern Science)」이라는 책이 막 나왔어요. 현대 문명이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섰고, 모든 걸 인간 중심적으로 보고자 했고 통제하며 만들다 보니 결국 인간이 살 수 없는 방향으로 가버렸다는 이야기인 거죠. 인간 중심적으로 보게 된 시작점은 어떻게 보면 르네상스 때가 아닐까, 투시도법을 통해 예수님이 가운데 앉아 계시고 열두 제자가 하나의 소실점을 향하는 다빈치의 회화는 인간의 통제적인 방식을 보여주죠. 그 이후로 만들어진 건축이나 도시에 대해서도 상당한 비판을 하는 편이었죠. 결국은 동양적인 생각이나 방식에서 뿌리를 찾는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설령 지난 100년 가까이 단절되었다고 해도 말이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대부분 마음속 깊숙이 스스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역사도 자신들 위주로 쓰죠.   저는 모더니즘 자체가 동양의 영향에 의해 나왔다고 생각해요. 불교의 선종이나 도가사상을 통해서 추상성이 나오게 되고, 송나라 때에 추상적인 그림들이 나오면서 자연을 함축적으로 이해하고자 했죠. 동양의 영향으로 몬드리안의 추상적인(abstract) 회화가 나오게 되었고 건축물들도 그 방향으로 가고요. 나중에 반고흐부터 인상주의(impressionism)로 흘러간 것을 보더라도 사실 동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전까지 서양 문명에서는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나 물질적인 것 이외에는 이해를 못 했던 것 같아요.   다만 중세 때에는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미스테리어스(mysterious)한 것들을 믿었던 것 같고요. 중세의 그림들을 보면 신화적인 것들이 나타나는데, 르네상스 이후로는 그야말로 카메라 속에 담겨있는 것처럼 적나라하게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리는 거죠. 그러다가 반 고흐로 와서 어떤 인상을 담게 되고 그림자도 까만 게 아니라 파랗게 혹은 노랗게 표현한다든지 하고요. 우리나라 그림을 보면 그늘진 부분을 까맣게 표현하는 부분들이 없었거든요. 어떤 인상(impression)을 담는 것들을 인상주의(impressionism)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미 추상적인 그림이 있잖아요. 십장생화도 그렇고 단청도 그렇고요. 오방색의 오방이라는 것 자체도 굉장히 개념적이죠. 동서남북에다가 중앙을 설정하고, 이 세상의 색도 5가지로 함축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니 철학적으로 이미 정리가 다 되어있는 거죠.   그런 배경이 근본이 되어서 나온 것이 모더니즘인데, 결국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게 되었고, 결국 껍질만 있는 박스 건물만 주장하게 된 것을 모더니즘의 실패라고 많이 비판했고요.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모더니즘이랄까요? 사람들의 따뜻한 감성이나 경험적이고 인식적인 부분들이 많이 무시되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 역시 저 혼자의 생각이 아니라, 알베르토 페레스 고메스 교수라든지 다른 분들의 주장에 도움을 받은 거죠   그러면서 우연히 고유섭 선생님의 한국 미술사에 관한 책, 한국 미술사 미학론 논문을 봤어요. “한국 미술은 내 몸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적인 그림이다”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걸 통해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죠. 뭐랄까,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만드는 것에 대한 공허함, 그래서 깊이감이 없어 보이는 것을 못 참을 것 같았어요. 그려놨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뜯어내고 싶은 거죠. 형태적으로 만드는 것은 부수고 싶고, 껍질 같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작업을 보면 새 건물보다 기존 건물을 고치는 리노베이션이 더 많았던 것 같고요. 이런 여러 가지로 인해 ‘경험과 인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논문에서 박스 안에 빛이 들어오는 원초적인 공간을 만드셨는데요. 무엇을 제안하고자 하셨나요? 르네상스 이후로 건축에서 시각적인 접근이 너무 크게 장악한 게 아닌가 싶었죠. 시각적인 표현이 강하지 않더라도 감동을 줄 수 있고 감성을 자극할 수 있고, 자연이나 인간의 따뜻한 부분을 드러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죠. ‘경험과 인식’은 시각적으로 보이는 비례감의 반대말로써 이야기했던 거예요. 도릭, 이오니아식, 로코코 형식처럼 여러 양식이 나오지만 다 시각적인 발전이거든요. 경험적인 발전이 아니죠. 제가 좋아하는 부석사라든지, 한국 마을의 구도를 보면, 우리나라 건축은 자연과 어떻게 놓이느냐에 대한 배치의 방식, 경험의 방식으로 이뤄져요. 건물의 형태가 바뀐 건 별로 없는 거죠. 신라 때부터 조선까지 쭉 넘어와도 양식은 바뀌었지만 크게 모양이 바뀌지는 않았거든요. 그런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정림 건축에서 실무를 하셨는데, 달동네 프로젝트도 그때 나온 건가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88 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안 돼서였어요. 우리나라가 나름대로 엄청 발달한 거죠. 만나는 사람마다 저에게 물었어요. “한국이 엄청 발전했지? 몰라보게 바뀌었지?” 제가 볼 때는 별로 발전한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런 건물들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많이 봤기 때문에 감동적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연히 정릉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달동네에 갔어요. 그 언덕에 있는 친구네 집에 갔다가 새벽에 그곳이 너무 아름다워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당시 정릉에 있는 교회도 가끔 갔는데, 그곳 목사님이나 주변 분들과도 어울리고 싶었죠. 정말 사람 사는 마을 같고 따뜻해서 좋아했어요. 그래서 정림건축에 있는 동안에는 달동네를 방문하는 어떤 클럽을 만든 거죠. 매주 주말마다 방문하고 목요일 저녁마다 지하 공간에 모여 토론하다가 ‘이것만이 내가 갈 길이다’하고 독립해서 달동네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첫 프로젝트로 달동네 프로젝트를 하고, 신당동에 세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중 두 개가 지어졌어요.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옆집과 동의가 안 되어 진입로 확보가 안 되었어요.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때 심장병이 생겼어요. 해결이 안 돼서 세 번째 프로젝트는 결국 지어지지 않았고 설계비도 다 물러줬어요. 너무 스트레스받던 차에 옛날 알던 교수님이 독일로 오지 않겠냐고 해서 도망을 갔죠.   달동네 프로젝트에서는 어떤 제안을 하셨나요? 주거 공간을 개선하려고 하신 건지 혹은 마을에 대한 접근이었는지요. 제가 추구한 것은 공간을 개선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이 공간을 통해서 배우고자 하는 거였어요.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보자는 거죠. 아파트가 이렇게 많이 지어지는 이유는 그 뒤에 우리가 이해 못 하는 결탁이 있을 거다. 왜 아파트는 저리 높게 지을 수 있게 해주면서 달동네는 이렇게 규제가 심할까? 뭐하나 지으려면 사선 제한에다가 정북 사선, 옆집과의 관계와 도로 규정 등 규제가 심한데, 뭐가 잘못된 것일까? 달동네의 구조가 우리에게 편안한 이유는 뭘까? 건폐율로 따지면 요즘 짓는 동네보다 더 높은데, 모든 집이 마당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바깥에 나와서 세수하고 앉아서 쉴 수 있는 마당이 있는 거죠. 어떻게 건폐율도, 용적률도 높고, 많은 사람이 높은 밀도로 사는데 인간적인 동네가 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같이 연구해보자는 것이었죠. 그중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곳은 동숭동 언덕이에요. 최근 10년 동안 엄청나게 인기 있는 곳이 되었는데, 당시에 제가 좋아하는 건물이 몇 개 있어, 저 나름 아름답고 좋은 건물이 많다고 생각했었죠.   그 연구를 통해서 배운 게 더 많으셨다는 거네요. 경험적이고 인식적인 부분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썼던 글을 읽어보면 어릴 때 길에 다닐 때 그림자나 조명 빛, 냄새 등의 기억이 있는데,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라든지, 걸어 다닐 때의 그림자 등이 그야말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달동네처럼 꼬불꼬불한 길은 왜 좋을까? 이게 정말 좋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토론해보자는 거였죠.   이때의 경험들이 다른 작업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나요? 현대적으로 법규라든지 경제 시스템 등이 달라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조금 작게 짓더라도 마당이 있으면 좋겠고, 형식은 다르지만 하나하나의 공간적 경험이나 순간들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퇴근해서 집에 온다면, 저녁에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 공간의 느낌이 어떨까? 달동네에서는 집에 오면 굉장히 좋잖아요. 마을에 사람들도 앉아있고 마당이 있고요. 물론 하수 시설이나 환경은 열악하죠. 그래서 그 당시에 생각했던 것은 제반 시설(하수 등)만 잘해주면 굉장히 좋은 곳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런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어떤 것일까 질문을 던졌죠. 그 당시 지은 2개 프로젝트를 보더라도 직접적으로 유사하게 적용했던 부분은 있었던 것 같아요. 계단이라든지, 계단과 계단 사이의 외부 공간이 조금씩이나마 있으면서 내부 공간과 연계하고자 했던 거죠. 좀 더 큰 동네나 계획도시 내의 작업에 직접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으로 꾸준히 질문을 던졌던 거죠.   성북동 사무실은 독일을 다녀오신 후에 내신 건가요? 그렇죠. 독일에 머물면서 자연이 좋다는 생각을 더 확실히 가지게 되었어요. 독일 대학 내에 숲길을 많이 걸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귀국길 비행기에서 한국에 오면 두 가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는 내 사무실은 항상 나가서 테라스에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곳을 얻으려 다니는데, 대학로 전체에 없었어요. 그래서 성북동에 공간을 마련해서 일도 하고 조그만 마당에 앉아서 작업도 하게 되었죠.   성북동 사무실에서 재료가 켜켜이 보이는 벽의 단면 사진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어떻게 보면 적은 예산으로 직접 현장까지 해결해야 하는 건축가의 숙명일 수도 있지만, 그걸 통해서 건축하는 접근방식이 크레프트맨쉽으로 더 심화한 듯했습니다. 성북동 사무실은 직접 지으신 거죠? 네, 직접 시공까지 다 한 거죠. 굉장히 즐거웠어요. 우리가 쓸 공간을 만든다는 것처럼 행복한 게 없었어요. 당시에 독일에서 쫓아온 학생과 경희대학교 건축과 다닌다는 3학년 학생이 도와주고 있었는데, 같이 질통을 지고 그랬어요. 그때 허리가 망가져서 나중에 고생도 했죠. 뜻대로 안 된 부분도 많았어요. 기술적으로 많이 해결하지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해나간 건물이어서 좀 더 자유롭게, 더 손맛이 느껴지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소장님의 건축은 구조의 작동 방식을 완전히 이해한 다음에 ‘이렇게 해결하면 되지 않아? ‘하며 해법까지 나오는 것 같아요. 짓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건축을 한다는 게 아마 그런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했는데요. 아직도 인상 깊은 소장님의 말 중 하나가 ‘노출콘크리트를 가장 싸게 쓸 수 있는 노하우를 알고 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건축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연구하시는 것 같아요. 저렴하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친환경적인 경우가 많아요. 친환경 소재라도 비싼 소재는 따지고 보면 친환경이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요. 재활용을 했는데 오히려 거기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훨씬 더 많은 거죠. 저렴하게 하면 손이 적게 가고, 톱질도 두 번 할 걸 한 번 해서 끝나는 경우가 많죠.   ‘ㄱ’자 집과 ‘ㅡ’자 집 주택은 초기 프로젝트입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달동네서 하셨던 작업과 여건과 상황이 달라 다른 고민을 하셨을 것 같아요.  달동네에서는 골목이 좋았고 마당이 좋았고, 마당을 통해서 사람들의 삶이 들여다보이는 거죠. 일자 집의 형식은 시골 가면 많았던 것 같아요. 옛날 한옥이 아니고 요즘 간단하게 지은 집들도 일자 집인데, 항상 마당이 있고 그 앞에 담장이 있고 앞집이 있고, 멀리 보면 산이 보이고 그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집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조경이라고는 약간 풀을 심거나 장독대가 있거나 씻는 공간이 있거나 그런 정도고, 마당과의 관계, 앞 담장과 앞집이 있고 멀리 산이 보이는 관계인 경우가 많은 것 같고요.  ‘ㄱ’자 집과 ‘ㅡ’자 집은 형태적으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죠. 평면적으로 담장과 마당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에 의해서 달라지는 거고요. 건물 자체도 사실 의미가 없는 건데, 관계성에 의해서 삶을 담아내는 상황이 생기는 거죠. 그 관계가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용해보자 했고, 또 평면 형식에 대해 실험해보고 싶었어요.   한편으로 ‘ㅡ자’라는 단조로운 기하학적인 형태가 주변 담장이나 주변 집들, 삶의 모습이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유기적 상황과 대응하면서 서로가 좀 더 아름답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순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죠.   'ㄱ'자 집에서는 불 켜진 것이 보이는 게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산 ‘ㄱ’자 집의 건축주는 학교 선생님이셨어요. 저녁 늦게까지 아이들 점수를 매기고 있을 때 선생님이 작업하는 공부방과 방이 서로 바라다보이는 그 관계나, 바깥에 나와서 걸을 때 그 공간을 통해 따뜻한 삶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좋았어죠. 옛집들은 담장이라는 걸로 프라이빗하게 막혀 있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창호지 정도만 막혀서 다 열려 있었잖아요. 그 안에서 소리가 들리고 빛이 보이고요.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만들었던 것 같아요.   건축가 박헬렌주현과 같이 하셨던 파주 우리마을 프로젝트도 인상 깊은 초기작 중 하나인데요. 적은 예산이지만 공간을 다양하게 하면서도 재료 자체가 갖는 질감을 다 표현한 작업입니다. 당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셨을지 궁금합니다. 우리마을의 경우 원래 그렇게 평평한 땅이 아니었더라고요. 여러 다른 용도로 쓰느라 언덕의 돌을 파내고 깎아낸 흔적이 있었어요. 밑에서 주어온 돌을 보니 약간 붉은 색이었어요. 그 밑에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를 파야 하는데 돌이 꽤 많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라 그걸로 돌담을 만들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다음에 이곳은 지적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라 영역을 구분하는 게 중요했어요.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18세 이상 친구들은 한쪽 방향으로 계속 걷는다고 해요 그래서 영역 구분에 대해 요청을 하셨고 그걸 동그란 공간과 기하학적인 ‘ㅡ’자 공간으로 배치하면서 그걸 통해서 움직이는 상상을 했던 거죠. 건물 자체의 형태를 멋있게 만들고자 했다기보다는 땅에서 나온 재료를 활용하고, 형태를 배치하면서 만드는, 공간을 정의하는 프로젝트가 되었어요. 그런데 ‘ㅡ’자나, ‘ㄱ’자나, ‘ㄷ’자나, 우리나라 건물들이 보면 다 편복도식이에요. 서양 건축은 공간 안으로 들어가서 방들이 나열되잖아요. 우리는 펼쳐져서 바람도 잘 통하고 햇빛도 잘 들게 만드는 거죠.     얇은 나무를 겹쳐서 구조를 보강하는 방법도 썼는데, 늘 최적화된 구조 방식을 찾아내는 듯합니다. 판단하신 근거가 있을까요? 저층부는 콘크리트 구조로 했고, 상층부는 목구조로 했어요. 얇은 목재(2by 재)를 두 겹으로 하고 중간에 스틸 파이프를 설치하면 효율적인 구조가 되죠. 목구조 자체가 단열효과가 좋고 비용도 비교적 적게 들어가고 빨리 시공할 수 있는 방식이죠. 좀 따듯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박공 구조로 했어요. 아이들을 생각하고 땅을 생각하면서 효율적으로 참 열심히 만든 프로젝트였습니다.   합판에 오일 스테인을 바른 마감이 그대로 건물 외관의 인상을 만들어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구조적인 질서도 잘 갖추려고 하셨다는 생각도 들고요. 평창동 ‘ㅡ’자 집도 전면 합판에 오일 스테인으로 마감한 거였죠. 합판은 지금도 2만원대  정도밖에 안 하는데, 1.2m X 2.4m가 아마 재료 중에 가장 저렴한 재료일 거예요. 처마가 있다든지, 바람을 잘 통하게 한다든지, 습기 문제만 크게 발생하지 않게 한다면 괜찮은 재료예요. 나중에 파주 어유지 동산도 합판을 활용했고, 아마도 비용 때문에 합판을 많이 사용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재료가 순수하고 담백한 느낌도 주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꾸밈없이 그런 걸 썼죠.   진행 임진영 사진 텍스처 온 텍스처(texture on texture) 인터뷰 ③에서 이어집니다.
SPECIAL Interview, 건축가 조병수 ③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프로젝트는 ㅁ자집일 것 같아요. 단순한 구조, 박스를 활용한 공간 구현의 출발점이 됐다고 볼 수 있는데요.  ㅁ자집은 방수 방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집이에요. 또 제가 쓸 건물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과감하게, 홀가분하게 평소 생각을 적용해볼 수 있었죠. 방수를 하지 않으면서 심플하게 지붕을 마무리할 수 있었고 한옥에서 쓰인 목재 기둥을 사용하면서 실험적인 부분도 있었어요. 만약 방수면을 처리하게 되면 끝으로 물이 스며들기 때문에 파라펫 벽을 올려야 하거든요. 형태적으로 복잡해지는 거죠. 없어도 될 것들이 군더더기처럼 붙으니 자꾸 다른 식으로 건물을 만들게 돼요. 이 경우 파라펫을 안 올려도 콘크리트 단면 자체로 간단하게 끝나니 충분히 담백한 맛이 나죠. 방수를 처리하는 방법을 통해 지붕 단면을 심플하게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걸 통해서 방수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단순한 박스 시리즈가 생겨났죠. 나중에 제주도 명상집도 하게 되고 아름솔유치원, 이외수 선생님 문학관도 같은 방식으로 하게 되면서 새로운 캐릭터가 생겨나게 된 거예요. 땅집, 틸트 루프 하우스, 최근에 한 지평집까지 다 같은 방식이죠.   말씀하신 것처럼 본인의 집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가 가능했을 듯합니다. 지붕에 방수하지 않고 20cm 두께로 타설하겠다고 했을 때 어느 의뢰인이 용납했을까 싶어요. 그렇죠. 실험하려고 했다면 용납을 안 했겠죠. 저의 집이라 하더라도 시공사에서조차 용납을 못 해서 본인들이 직접 방수액을 타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 집은 실험하는 거니까 그냥 해보자 했어요. 콘크리트 타설 때 피니셔를 통해 표면 장력으로 시멘트를 끌어올리는 식으로 방수를 해서 성공했어요. 새로운 방수 방법을 개발하게 된 거죠.   동생이신 씨앤오건설의 조영묵 대표님이 시공에 참여해서 설득이 가능했던 부분도 있을까요? 안 그래도 동생이 콘크리트 타설하는 날 전화가 왔어요. ‘이거 크랙이 가기 때문에 분명히 물이 샐 것입니다. 방수액을 좀 타서 하겠습니다’라고 해서 타지 말라고 했어요. 크랙은 콘크리트 타설 후 4시간 안에 발생하기 때문에 4시간 후에 쇠흙손으로 문질러서 마감해주면 크랙이 안 갈 것이라고 믿는다, 한번 해보자고 강력하게 주장을 했죠. 자료를 찾아보면서 크랙이 가는 시간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시도해도 물이 새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물론 시공자는 물이 샐 거라고 생각하고 콘크리트가 굳자마자 올라가서 담수 테스트를 했어요. 옆을 막아놓고 물을 부어서 ‘물아 새라, 물아 새라’ 했는데 새지 않으니 놀란 거죠.(웃음) 지금 20년이 넘었는데 전혀 안 새요. 이제는 콘크리트 방수 중에 가장 완벽한 방수는 방수를 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데 동의를 하죠.   덕분에 완벽하게 떨어지는 상자의 원형이 만들어졌는데 그 외에도 유리를 끼우는 방식이나 다른 디테일에서도 상당히 과감한 방식을 시도했어요. 구상한 바를 실험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확신을 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래서 공부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시공자들이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다 안된다고 했거든요. 보통 천창을 만들면 스틸로 프레임을 짜고 실리콘으로 메꾸는데, 늘 물이 새요. 그 스틸 프레임 없이 그냥 유리만 얹자고 제안하니까, 다 터지고 문제가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저희가 공부하기로는 콘크리트도 돌을 갈아서 만든 거고 유리도 돌 속에 있는 석영으로 만든 건데, 비슷한 성격의 성분이라고 본 거죠. 철이 열을 받으면 늘어나잖아요. 스틸 프레임의 경우 팽창지수가 훨씬 높기 때문에 하자가 날 수 있지만, 유리를 콘크리트에 바로 끼우고 실리콘 처리하면 하자가 나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천창은 어떤 스틸로 해도 문제가 생기지만, 수축팽창지수가 거의 비슷한 콘크리트와 유리는 하자가 거의 없죠.  시각적으로 봤을 때도 제3의 재료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유리와 콘크리트가 아주 담백하게 대비되어요. 또 유리를 여러 겹으로 쌓아서 빛을 받았을 때 빛이 엣지에 비치게 하고자 했죠. 물론 ㅁ자집에서는 시공사가 꺾어서 빛이 새어 나오지 않게 만들어져 있기는 해요. 이후 두 상자집부터는 빛이 완전히 새어 나오게 만들었어요.  항상 의문스러웠던 부분이었어요. 유리라는 게 참 아름다운데 왜 프레임에 끼는 순간 그 아름다움이 사라질까 생각해봤죠. 유리의 엣지가 같이 보이는 게 중요했어요. 빛이 유리에 닿았을 때 옆으로 타고 가서 엣지에서 빛이 나오는데, 틀이 끼워져있으면 엣지의 반사가 덜 되는 거죠. 그런 부분을 생각해볼 때, 같은 표면에 붙고 제3의 재료가 들어가지 않을 때 하자도 적고 시각적으로도 깨끗한 경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 시도한 거죠.   결국, 재료와 구조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한 부분이 아닐까 싶네요. 경험만 가지고 밀어붙이는 것으로는 부족할 수 있는 거죠. 특히 설계자와 시공자의 차이점이라면, 시공자들은 시공의 편리성을 더 잘 이해하고 있지만, 설계자는 그 근본 원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구조라든지, 두 재료가 만났을 때 어떻게 되는지 말이죠. 그런 후에 그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서 만들지는 시공자가 더 잘 알겠죠.   한옥의 고재를 써서 기둥을 대신하셨는데 불규칙하게 배치하면서 공간이 더 흥미롭게 전개되는 듯해요. 저는 불규칙함이라는 말씀이 흥미로운 것 같아요. 기둥은 나중에 2층 증축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지만, 보 없이 한 번의 콘크리트 타설로 끝내보자는 의도였어요. 보 없이 20cm 두께의 콘크리트로 타설했을 때 지탱할 수 있는 거리는 5~ 6m가 최대거든요. 어느 부분에서 재더라도 5~6m 내에 들어오게끔 하다 보니까 나온 배열이죠. 그러니까 완전히 불규칙은 아니고 숨겨진 규칙이 있는 거죠.   고재가 갖는 특성 때문에 묘하게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한국적인 공간의 느낌을 받는 순간들이 있어요.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이 10개의 기둥은 ㅁ자집 설계 전에 가지고 있었어요. 지나가다가 고재 쌓아놓은 걸 봤는데 그 질감이라든지 듬직함이라든지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 놨던 거예요. 다만 목재는 콘크리트와 상반된 재료인데, 콘크리트는 반영구적인 재료라면 목재는 습기를 먹었을 때나 건조해졌을 때 수축 팽창이 일어나고 변화하는 재료죠. 그래서 두 가지를 같이 접목해서 구조로 쓰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때도 어느 정도 계산을 한 거죠. 나무가 옆으로는 많이 줄어드는데 위, 아래는 거의 줄지 않거든요. 그래서 5~7mm 정도 줄어드는 걸 예측하고 시공자와 협의했어요. 그런데 눈에 띄지 않지만 대략 이 정도 크기 지붕의 콘크리트는 크립(creep)이라고 해서 1~2cm 정도 서서히 주저앉아요. 그 변화가 비슷하게 맞아떨어지면 크랙이 발생하지 않고 목재가 줄어드는 길이와 비슷하게 맞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유리로 가운데 중정을 만들고 바깥쪽에 나무를 기둥으로 세웠는데 유리를 통해서 보이는 투박한 목재 기둥의 느낌이 좋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자신의 집을 지을 때 졸업 논문 때 그렸던 박스 형태가 등장한 것은 오래 생각한 건축 원형과 맞닿는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경험과 인식’이라는 주제를 본인의 집을 통해 실현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설계하실 때 염두에 두신 건가요? 그랬던 것 같아요. 왜냐면 성북동에 있을 때 제 책상 옆에 포스트잇이 7~8장이 붙어 있었는데 항상 ㅁ 자에 사람이 누워있는 그림이었거든요. 훨씬 더 작은 공간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최소한의 공간이면서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ㅁ자집은 원래 땅속으로 묻고자 했어요. 그때 지금 씨앤오건설의 조영묵 씨가 담당이었는데, ‘예산도 없는데 묻으시면 안 됩니다. 물이 들어가서 파손되고 습기가 차고 방수가 어려워요’라고 했어요. 미국을 오가면서 대학에서 가르치던 때라 시간이 없어서 마지막 날, ‘알겠다 그러면 땅속에서 끌어올려 위에다 올려서 짓자, 그렇지만 밖으로 창은 거의 내지 말자’하고 지었죠. 졸업 논문 프로젝트의 원형에 가까우려면 땅에 묻혀 있어야 해요. 그마저 형태가 없고 경험만 있는 공간이었는데 그래서 땅집을 다시 하게 된 거죠. 또 제가 윤동주의 시를 좋아하니까 이왕이면 위에는 집을 지었으니 이곳은 윤동주의 시와 정신을 기리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땅집을 시낭송회하고 포럼이나 토론회를 하는 공간으로 쓰게 되었어요. 어쨌건 졸업 논문의 원형에 가까운 건 땅집이죠. 졸업 논문은 교수님들이 굉장히 좋아하셨는데 그 당시에 했던 작품 자체는 실패작이라는 평을 받았어요.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죠. 꼭 땅에 묻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니었고, 시각적인 비례에 얽매이지 않는 경험, 체험이 중요한 공간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거였는데 그중 하나가 땅집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최근의 거제도 지평집까지 그와 유사한 박스 시리즈가 비슷한 맥락에서 이어지고요.   흥미롭게도 저는 땅집에 갔을 때 평안하면서도 아직 닫히지 않은 무덤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매우 고요한 공간인데 왜 죽음을 떠올렸을까 싶었죠. 소장님이 젊은 시절 그렸던 해골 그림도 연상되었고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다만 짓고 나서 몇 년 후 이나미 교수님이 저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질문을 이어 나가다 보니 땅에 대해 처음 생각했던 건 언제일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무덤 팠던 구멍에 대해 생각도 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끄집어낸 적이 있었죠. 땅집을 짓겠다 하고 웅덩이를 파놨는데, 한번은 저녁 늦은 시간에 현장에 도착한 적이 있어요. 웅덩이 밑으로 내려가서 본 여름의 하늘이 너무 좋았죠. 나무가 바람에 움직이는데 하늘이 보이고 반딧불이 날아다녔죠. 땅속으로 약 2m 남짓 내려갔는데, ‘내려와서 보는 나무숲은 땅 위에 서서 볼 때와 완전히 다르구나’, ‘자연을 좀 더 특별하게 경험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포근하고 훨씬 더 낭만적인 느낌을 받았어요. 사우스케이프 프로젝트 할 때는 나무를 옮기느라 뽑은 자리가 언덕 위에 파여 있더라고요. 그 안에 들어가서 앉았는데 굉장히 느낌이 좋은 거예요. 언젠가 이런 공간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죠.   지금 다시 ㅁ자집을 바꾸셨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는지, 무엇을 구현하고 싶으셨는지요? 막 ㅁ자집을 지을 당시, 공사 중에 봤을 때 굉장히 좋았어요. 그런데 단열재도 붙이고 유리도 붙이고 마감재도 붙이고 다 해놓고 나니까 실망스럽더라고요. 군더더기가 많이 붙은 거 같고요. 그렇지만 단열도 해야 하고 바람도 막아야 하니 한 18년 동안 그렇게 살았죠. 그런데, 집이 오래되어 수선하려고 보니 공사 당시가 기억났어요. 그러면 집을 해체해 놓고 한 일 년 정도 써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전시도 계획하고 있고요. 결국, 내부로 막혀 있지 않다면 건축이 아니고 조형물이 되는 거겠죠? 어떻게 보면 비와 바람은 막아주고 그늘도 만들어 주니까 건축물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고요. 지금 이 상태로 새로운 걸 찾아보고 탐구할 수 있는 부분이 뭘지 생각해보면서, 부분적으로 커튼이나 등도 설치해서 어떤 제3의 건축공간, 환경적 조각(sculpture)과 건축 사이의 공간을 실험해보고자 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자연에 대한 경험으로 귀결되는 것일까요? 오히려 ‘이게 뭐지?’라는 반문을 통해서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 방에 앉아있을 때도 그렇고요. 공간이 크면 클수록 좋겠지만 작은 공간에 앉았을 때도 공간감이 확고하고 좋은 공간과 그렇지 못한 공간의 차이가 뭘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거고요. 결국은 편안함이나 행복일 것 같은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것들, 그 속에 자연도 포함되겠죠. 바람이 살랑 불면 ‘아, 아주 미세한 바람인데 편안하고 좋구나’, 소나기가 쏟아지면 ‘비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이게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구나!’, 그렇게 나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고 느끼는지 보고, 그다음 나 자신에 대해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 그런 여유로움을 주는 것이 건축이 할 수 있는 좋은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카메라타 뮤직 스튜디오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공간입니다. 단순한 박스가 등장한 곳이기도 하고요. 처음 설계하실 때 의도가 궁금해요. 카메라타를 설계할 당시 저는 미국 몬태나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어요. 그 지역에서 농부들이 지었던 건물들, 솔직하고 담백한 공간들에 관심이 있었어요. 특히 창고 같은 경우엔 큰 볼륨으로 지어지는데, 몇 개의 재료로 잘 지은 것들이 많았죠. 창이 많지 않은 창고에 들어갔을 때의 차분함이나 썰렁함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음악감상실을 설계할 때 그런 창고 같은 공간에서 조용히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제안하게 됐죠. 물론 창고만 생각했던 것은 아니고 오래전에 본 아주 심플한 성당 건물도 있었어요. 오스트리아 콘스탄츠(Konstanz) 호숫가에 있는 성당인데, 길고 좁고 높은 비례감이 참 좋아서 그 건물을 연상해서 제안했죠. 황인용 선생님은 소금 창고를 떠올리셨어요. 어릴 때 인천 앞바다의 염전에서 소금 창고에 숨어 들어가 있을 때의 조용함과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아름다움을 연상하셨죠. 그런 공간에서 음악을 들으면 좋겠다고 동의해주셨어요. 거의 비슷한 시기에 ㅁ자 집도 지어졌어요. 아주 심플하게 그려서 쉽게 시공할 수 있는 건축, 그러면서도 그 안의 경험은 풍요로운 건축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그게 결국 친환경적인 건축이 아닐까 생각했었죠.   카메라타의 경우는 음악 감상을 위해 공간 안에서 소리의 경험을 많이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기다란 박스의 건물을 설계해놓고 보니 앞뒤의 거리가 꽤 길어졌어요. 벽의 폭이 좁으니까 반사된 음이 다시 반사되어서 갈 때까지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죠. 앞에 앉은 사람이 바로 듣는 소리와 돌아 들어오는 소리의 시차 때문에 에코가 발생할 것을 예상하게 되죠. 물론 흡음재를 사서 쓸 만큼 여유가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었어요. 어느 정도의 에코가 발생할지 일단은 지어놓고 봐가면서 흡음을 보강해가자고 설명해 드렸어요. 약간의 울림소리는 울림통 역할을 해줄 수도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흡음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천장판 구조재를 톱으로 켜서 칼집을 냈어요. 그렇게 천장판에 높고 낮게 결을 만들면서 고음, 저음을 고루고루 흡수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한 면을 흡음판으로 만들어 준 셈이 되었고요. 목재를 부분적으로 썼고 또 사람들이 앉으면 몸 자체가 흡음재 역할을 할 거라고 봤어요. 다만, 반사돼서 도는 음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겠더라고요. 난반사를 시키게끔 벽체는 일반 합판 거푸집을 쓰지 않고 거친 질감을 냈죠. 그 지역의 오래된 제재소에 아직도 큰 줄 톱을 가지고 있는 곳이 있었는데, 거푸집 목재를 줄톱으로 자르면 줄 자국이 출렁거리면서 그 자국이 수평으로 나게 돼요. 그걸 의도적으로 더 많이 나게 했어요. 또 남북으로 들어오는 빛이 낮에는 높은 각도에서 들어와 줄톱에 의해 콘크리트 질감이 생동감 있게 살아나도록 의도했죠.   내부 공간의 간결함을 만들기 위해 메자닌 부분은 와이어를 강하게 당기는 식으로 매달았습니다. 단순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구조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연구하고 적용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직원들에게도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20여 년간 해온 건물을 보려면 구조를 보라고 해요. 건물 디자인이 특별한 게 아니라 구조적으로 해결함으로써 그 안의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자 했던 경우가 꽤 있다고 말하죠. 구조라는 것은 구조사무실에서 해결하는 게 아니고, 건축가가 확실하게 어떻게 하라는 제안을 주고 왜 그런지, 어떻게 해결할 건지 같이 풀어나갈 때 좋은 건물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림만 그려서 넘겨선 안 되고, 구조를 철저하게 생각해서 넘겨야 한다고 많이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카메라타의 경우에도 내부를 심플하게 하려면 기둥이 많이 나오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위의 메자닌으로 올라갈 때 계단이 생기면 산만하고 사람들 발소리도 들릴 것 같아서 콘크리트 벽을 하나 놓고 그 뒤로 다 숨겼죠. 주방시설, 계단, 화장실이라든지, 소음이 발생할만한 것들을 다 뒤로 숨겨주고 그 안의 공간은 순수한, 그야말로 비어있는 사과 상자 같은 공간을 만들었어요. 일부는 동쪽으로 나지막하게 들어가는 공간을 깔아 넣었고, DJ 실도 안쪽으로 밀어서 넣었어요. 네모난 보이드 공간 자체는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죠.   박스를 시도하는 이유에 대해서 한 비평가는 ‘본질적인 공간의 경이로움을 탐구한다’라는 비평을 하기도 했는데요. 박스 시리즈를 통해서 담고 싶으셨던 아이디어는 무엇이었나요? 처음 시작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한 것이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고요. 자연이나 지형, 여러 건물이 있거나 하는 조건들로 주변은 항상 복잡하니까, 건물은 더 단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죠. 헤이리 마을도 이미 복잡해지기 시작했었고 여러 건축가가 들어와서 각양각색의 목소리를 내게 될 테니까요.   그 이후로 두 개의 상자, 세 개의 상자로 만든 집이나 상자 안에 상자가 들어간 집 등 여러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상자를 좀 더 띄우기도 하고 빗기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좀 더 상자와 상자 간의 관계성,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관계성이라고 하면 둘 사이의 관계도 있을 테고, 둘과 주변과의 관계도 있을 테고, 두 개의 사이 공간도 있겠죠. 사적인 사이 공간도 있고 개방적으로 연결되는 곳도 있고요. ㄱ과 ㄴ의 관계 아니면 너와 나의 관계, 그런 관계성을 많이 생각하면서 만들어나갔어요.   고려제강 수영공장인 <F1963>은 공장을 리노베이션한 프로젝트로 철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는 프로젝트입니다. 규모도 컸고요. 어떤 주제로 접근하셨나요? F1963보다 2년 정도 앞서 키스 와이어 콤플렉스가 지어졌어요. 키스 와이어센터 쪽은 수련원, 기숙사, 오피스 공간이 같이 들어가 있고, 키스 와이어 뮤지엄이 지어졌고요. F1963은 공장건물을 공공에 개방해 상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쓸 수 있게 개조한 프로젝트에요. 2차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죠. 처음 설계 의뢰를 받고 가보니 언덕이 있더라고요. 항상 부산에 가면 특별한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그때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그게 무얼까를 생각해봤는데 일단은 날씨가 더 온화하고 포근해요. 그리고 산과 비슷한 가파른 지형과 바다가 만나는 도시인 것 같아요.  그런데 키스 와이어 센터가 놓일 대지에 갔더니, 그 뒤로 고속도로가 뚫리고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아름다운 지형과 산이 다 뭉개지고 잘려나가는 게 안타깝더라고요. 약 3,000평 정도의 공간을 넣어야 하는데, 기대어 놓기에는 언덕의 크기가 너무 작은 거예요. 언덕을 다 없애고 앉혀야 하는 정도의 크기인 거죠. 법규상 고층(high rise)으로 세울 수 없는 지역이었고요. 그래서 지형을 망가트리지 않고 그나마 보존을 하고자 했어요. 자생적으로 조성된 대나무와 뒤편의 좋은 소나무 군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 그리고 박스로 풀어낼 때처럼 몇 개의 박스가 어떻게 배열될지, 자연스럽게 흐르는 지형이 박스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죠. 물론 모두 박스는 아니지만요. 가서 보시면 건물 모양도 모양이지만 그보다는 땅의 흐름과 건물의 흐름이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 땅의 흐름을 좀 더 경험하게 만드는 공간이 된 것 같아요. 뮤지엄으로 들어가면 와이어로 지지가 되는 램프를 타고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밖으로 나오면 언덕의 윗부분까지 도달해서 자연스럽게 언덕을 타고 내려가게 되죠.   키스 와이어 뮤지엄과 센터가 신축이라면, F1963 프로젝트는 리노베이션으로 진행되었는데요. 뮤지엄 의뢰를 하셨을 때 그곳에서 공장을 보게 되었죠. 허름하지만 나름의 성격이 있어서 언젠가 이걸 개조해서 뮤지엄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처음에는 회장님이나 담당자 분들이 그게 무슨 말인지 긴가민가하셨겠죠. 요즘은 재생 건축이 많아졌지만, 벌써 10여 년 전이었고 허름한 공장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짓는 것만 생각하고 계실 때였으니까요. 리노베이션을 몇 번 제안하고 기록으로라도 남기려고 사진을 찍곤 했었죠. 그러다가 공장건물이 없어지기 전에 그 공장에서 부산 비엔날레의 일부가 열리게 되었고 작가들이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그렇다면 일반인들이 좋아할 수 있겠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고쳐보자고 했고, 현재의 방향으로 진행되었어요.   공장건물을 리노베이션할 때 주의 깊게 다루었던 부분이 무엇이었을까요? 첫 번째는 기존에 있는 걸 가능한 한 그대로 활용하고자 했어요. 그래서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연관되는데 쓰레기를 하나도 만들지 않는다, 여기 있는 건 다 100% 재활용한다고 생각했어요. 거친 바닥도 그냥 두거나 꼭 제거하거나, 잘라내야 하면 그걸로 가구를 만든다든지, 다른 곳의 바닥재로 쓰든지 재활용하고자 했죠. 그런데 건축법이 까다롭다 보니까 기초를 상당히 보강해야 했어요. 그곳이 옛날에 진흙 바닥이어서 지반이 약한 데에다가, 흙을 다져서 만든 공장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구조 엔지니어 측에서는 구조를 많이 보강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때문에, 건물을 거의 새로 지어야 경제성이 있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30년간 쓰면서 지금 있는 구조도 많이 다져졌기 때문에 괜찮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구조 측에 제기했고, 한국의 구조 엔지니어들은 이 흙의 토질 자체가 안 좋으니 새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어요. 그래서 외국의 사례들을 찾아보게 되었고, 외국 엔지니어의 의견을 검토해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솔루션과 방법을 제시했어요. 파일을 박지 않고 기존 구조 위에다가 엮어서 보강하는 방식으로 간단하게 처리를 했죠. 중요한 구조적인 보강을 했고 그러면서 기둥에도 있는 듯 없는 듯 추가된 기둥들이 있어요. 또 공장 여러 개를 계속 붙여가며 지었기 때문에 내부는 빛도 안 들고 환기도 안 되고 동선도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게 되어 있었어요. 일반 건물로 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죠. 그래서 가운데를 잘라내서 중정을 만드는 것으로 제안했어요. 처음엔 좀 더 깊게 파서 땅에 내려가 있는 포근한 느낌을 받도록 제안했죠. 이 건물이 앉혀지기까지의 땅의 본질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편의상 설계 과정에서 조금씩 줄어들게 되었어요. 그래서 현재는 의자 높이 정도(45cm 정도)로 되어 있죠. 도서관 부분만 1.2m 정도로 깊게 파여서, 내려가면 공간감이 있고 포근한 느낌이 들어요. 어쨌건 건물이 구조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라든지 문제점, 가능성에서 출발하고자 했어요.   트윈 트리(TT)의 경우는 기존 작업과 달리 수직 타워입니다. 또 그 위치가 광화문이자 동십자각 맞은편에 있는 중요한 자리이잖아요. 여러 가지로 어려운 땅인데, 상당히 유기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사과 상자를 주장하던 바쁜 시기에 다른 손으로는 트윈 트리의 유기적인 곡면 건물을 구상하게 되었어요. 물론 거기에도 두 개의 박스를 앉혀 봤었죠. 그런데 차가 돌아가는 길이라 어떻게 해도 투박하게 튀어나오게 돼요. 특히 코너에 있다 보니 경복궁 쪽에서 바라다볼 때 어느 각도에서건 모서리 부분이 아주 날카롭고 느낌이 좋지 않았어요. 박스라는 걸 고집할 게 아니라 땅의 흐름을 더 보자고 생각하고 운전해서도 가보고, 걸어도 봤어요. 경복궁 쪽에서 바라볼 때 강한 모서리 선이 나오는 것보다는 부드러움이 있으면 좋겠다고 싶었어요. 그래서 흐름을 따라 앉히게 된 게 지금의 곡면이 나온 거예요. 땅 자체가 사각이 아니라 찌그러져 있어요. 그 형태를 따라서 뒤로는 90도 직선형을 따르고, 앞은 라운드 형태를 따르면서 자연스럽게 나온 형태예요. 사과 상자가 만들어질 때 널빤지를 가져다 잘라서 로직에 의해 쉽기 쉽게 만들었듯이, 이곳도 주어져 있는 요건에서의 로직 자체는 분명했던 것 같아요. 사과 상자에서는 판재라면 여기서는 약간 휘어져 있는 형태, 뒤는 조금 더 반듯한 형태죠. 그러면서 두 건물 사이의 관계가 중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그 두 건물 사이로 광화문으로부터 피맛길 쪽으로 이어지고, 또 피맛길 쪽에서 걸어 나올 때는 동십자각을 통해서 경복궁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두 개의 타워가 선다면 어차피 곡면으로 만들어지니 그 사이공간에 더 드라마틱한 경험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죠. 그게 설계의 출발점이었던 것 같아요.   수직 타워, 임대용 건물은 기준층이 반복되기 때문에 변화를 주기가 어렵고 경험 측면에서도 한정적일 수 있죠. 건축가로서 어떻게 다른 경험을 주고자 하셨나요? 때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어떤 경우는 땅이 특별한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그 땅으로부터 좋은 기운이나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흐름을 받아들이고 싶은 경우가 있을 테고요. 트윈 트리 프로젝트의 경우에도 그걸 받아들이는 방법으로써 틈새에 중간 공간을 두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게 했어요. 그냥 바로 땅 위에 세운 게 아니고 틈을 만들어서 두 건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게 만들고자 했던 거죠. 그렇지만 항상 그렇게 하는 건 아니에요. 어떤 경우는 건물이 약간 떠오르면서 주변에서 들어오게 한다든지, 위에서 쓰는 공간의 마당이나 플랫폼이 필요하다면 조금 띄우고 밑에는 흐름을 허용해준다든지,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것 같고요. 평면이 반복되어 올라갈 때 건축가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쓰죠. 특히, 1980년대 이후로는 휴먼 스케일의 건물을 만들고자 매스를 분절해서 적층한다거나, 그 사이에 녹색층을 둔다든지 사람들이 모여드는 사회적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기능적으로 둔다든지 하는 거죠. 어떤 건물이 도로에서 너무 가까워, 보는 각도에 따라서 위압적이라면 셋 백 시키면서 리듬으로 분절하는 방법도 있을 테고, 때에 따라서는 중간을 열어서 바람이 통하고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도 있겠죠. 땅이 가지는 조건이 첫 번째로 영향을 미칠 것 같고, 두 번째로는 기능적인 측면, 즉 어떤 것이 필요한지, 유용한지 프로그램상 사용자 측면인 거죠. 그리고 법규적인 해석과 비용들이 세 번째로 작용하는 게 될 것 같아요.   트윈 트리는 보기에 3차원 곡면처럼 보이지만 모두 2D로 분할해 해결한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DDP처럼 두 방향으로 휘어진 3차 곡면은 만들기가 굉장히 어렵죠. 이 건물은 처음 모델링 했을 때 유기적인 면을 수평적으로 분할했어요. 각 층을 6개로 분할해서 수직으로 서 있는 면으로 이어지죠. 그러니까 2차 곡면이 적층해 연결됨으로써 3차 곡면이 되도록 만든 최초의 건물일 것 같아요. 오브아럽(Ove Arup)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왜냐면, 창문 프레임 단면상에서 어느 부분은 유리가 안에 들어가고 어느 부분은 밖에 들어간다면 단열이 안 될 거라고요. 결국, 구조적으로 연결을 시키면서도 단열이 해결되는 방안을 찾았어요. 그렇게 해결한 유일한 건물이라서, 오브아럽에 초청받아 강의도 했어요. 어쨌건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기도 했어요. 명확한 논리를 가지고 만들고자 한 것도 있었고요. 그렇게 2차 곡면의 유리를 마감하게 됐는데, 85% 정도는 평유리에요. 15%만 가지고 곡면을 만들었고, 곡면도 반경(radius)이 50cm짜리부터 2m까지 변화되는 5종류만 만들어서 그걸 조합함으로써 면을 만들었죠. OHS   진행 임진영 사진 텍스처 온 텍스처(texture on texture) 인터뷰 ④에서 이어집니다.
SPECIAL Interview, 건축가 조병수 ④ 이번 건축가특집에서 기린그림의 영상으로 소개되는 건축물에 대해서도 여쭤볼게요. 꺾인 지붕 집의 경우는 ㅁ자집, 땅집 이후로 지붕에 변주가 일어나는 집을 만드셨는데요. 지붕에 변화를 주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지붕이란 기분 좋은 공간이죠. 앉아있으면 여유롭고요. 다만 지상층이 좋은데 굳이 힘들여서 지붕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으니 많이 이용하지 않는 편이기는 하죠. 꺾인 집의 경우, 땅을 처음 보러 갔을 때 경사가 너무 심했어요. 거의 45도 이상이었던 것 같아 놀랐죠. 어렵게 올라가야 하는데 위로 가도 평지가 없어요. 어딘가는 파서 넣어야 하는데 그러면 박스를 넣었을 때 묻히게 되죠. 그래서 지붕을 꺾으면서 넣게 되었어요. 그렇게 되면 마당을 하나도 못 갖는 집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지붕을 제2의 마당으로 활용하자고 했어요. 집 옆으로 돌아 올라와서 지붕에 앉아 차를 마신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고추를 말린다든지, 그런 기능을 할 수 있게 했죠. 밑에서 볼 때와 3m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느낌이 또 매우 달라요. 위로 올라가서 여유롭게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활용한 거죠. 지붕은 경사 따라 자연스럽게 꺾여 올라갔는데, 약 10년 전에 만든 ‘이외수 문학관’도 유사한 이유로 경사를 따라 꺾여 있죠.   꺾인 집은 내부에서도 단 차이가 있는데 지붕과 연관이 있나요? 만들고 보니 땅속으로 반 정도가 매입된 상태인데, 뒤쪽으로 환기, 채광이 안 되잖아요. 작지만 중정을 하나 뚫어서 주방 쪽으로 공기가 통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바람이 밑에서 불어오면 전면 창을 통해 올라가서 뚫린 공간으로 돌 수 있게 환기를 유도한 거죠. 또 지붕에 앉을 때 꺾인 곳은 기대앉을 수 있지만, 평평한 바닥에 앉는 건 불편하잖아요. 그곳을 웅덩이처럼 파서 내 몸이 그 안으로 편하게 내려가 앉도록 했죠. 거제도 지평집에서처럼 내 몸이 조금 내려가서 앉았을 때 훨씬 포근하게 느끼고, 보는 각도도 지평선에 더 가까워지는 거죠. 조경을 더 멀리 조망할 수 있게 두 개의 공간을 밑으로 내리게 되었어요. 밑으로 내린 마당 하나는 주방 위의 독립된 실링이 되어서 아래층의 공간감을 정의해주고, 그 아래로 식탁도 두어 아늑한 공간을 만들었어요. 또 하나는 안방 바닥을 내려앉게 해서 침대에 누웠을 때 지평선 높이로 보이게끔 유도하게 된 거죠. 작은 높이 변화를 통해서 전체를 조망하거나 편안하고 풍요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집을 만들고자 했어요.     지평집은 예약이 몇 개월 이상 밀릴 정도로 인기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펜션과 같은 숙박 시설에 일상과 다른 체험을 하러 오는데, 그곳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경험은 어떤 것일까요? 제주도에 가보면 3, 4층짜리 모텔들이 마구잡이로 지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깝곤 해요. 최소한 바다 쪽으로는 건물이 없으면 너무 좋겠는데 말이죠. 거제도의 지평집 땅은 돌아서 위로 올라가는 땅이 아니라 내려가는 땅이었어요. 그 땅을 통해서 바다가 보이는데, 건물을 지으면 너무 안 좋아지는 거죠. 방치된 상태의 조경과 땅의 흐름이 너무나 좋고 아름다운데, 우리가 또 망가트려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망가트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안을 만들어서 건축주가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땅집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 이후 작업한 명상집 등을 바탕으로 응용문제 푸는 기분으로 해보자 했죠. ‘과연 될까?’ 생각했는데 적당한 경사가 있었어요. 기존 지형의 높이를 조심스럽게 단면도로 그려서 그곳에 계속적으로 설계해봤죠. 그래서 지평집 단면도를 보시면 점선으로 그려져 있는 게 기존의 지형인데, 우리가 새로 설계한 것과 거의 비슷하게 가요. 그러면서 식사하는 공간, 오피스 위에 있는 공간들과 아래 있는 공간에 레벨 차이를 좀 두었죠. 땅의 뒤편에서 볼 때는 땅과 거의 하나처럼 붙어가게 하고, 뒤에 있는 공간도 낮춰서 튀어나오지 않게 해주고, 카페 내부바닥 자체도 40~50cm 낮춰서 내 몸의 위치가 지평선에 조금 더 가깝게 했어요. 그래서 지평선과 수평선이 만나는데, 앞에 있는 집들의 지붕이 살짝 떠서 그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그런 관계를 만들고자 했죠.   처음에는 6개 건물을 똑바로 배치했어요. 뭔가 거북하게 올라온 건물은 아니었지만, 주변이 유기적이다 보니 그걸 따라서 기하학적인 형태로 네 채와 두 채로 나누었죠. 바다를 향해서 옆의 경사를 따라가게 되었고, 그렇게 건물들이 꺾이면서 그 사이로 빛이 들어가고 환기, 채광이 되게 했어요. 땅 사이가 벌어지면서 빛이 새어 나온다면 건물 자체가 아름답지 않더라도 특별함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마당도 시골집 마당의 느낌처럼 땅의 생긴 모양대로 충돌하면서 생기는 자투리 공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방문객들이 이런 모습과 경험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기지(GIZI)_Art Base>는 박서보 화백의 작업실이자 뮤지엄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주변의 복잡한 환경에 대해 어떻게 보호하면서 열린 공간을 만드느냐가 핵심이었는데요. 기지 프로젝트가 위치한 곳은 반듯하고 언덕도 적당하고 참 좋은 땅이었어요. 반면에 그 땅에서 주변을 바라본 느낌은 주거단지 대부분이 그렇듯이 연립주택들이 난립해서 시각적으로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거꾸로 프라이빗의 문제도 있었어요. 우리가 짓고 들어가야 할 집은 자연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 어느 정도는 닫혀야 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죠. 동시에 3세대가 거주할 공간, 스튜디오와 전시 공간이 다양하게 들어가야 하는 복잡한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래서 그걸 하나로 묶으면서도 바람이나 빛이 통하고 주변에 거슬리지 않는 어떤 상자를 만들어내고자 알루미늄 메탈을 접고 타공을 해서 해결했던 거죠.   알루미늄 메탈의 틈을 통해서 빛과 바람은 통하고 시각적인 보호를 하도록 의도하신 건가요? 기지에서 사용한 알루미늄은 익스팬디드 메탈(expanded metal)이 아니에요. 여기서는 다른 방식을 써보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곳의 중요한 기능이 주거고, 밖에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안쪽의 보조프레임이 많이 들어가지 않은 걸 만들어내야 했죠. 그래서 종이를 접으면 더 단단해지듯이, 알루미늄판을 접어서 테스트를 해봤어요. 굉장히 단단해져서, 위아래 두 지점만 고정해도 될 정도로 보강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높은 곳은 거의 6m까지도 가능해, 밖에서도 심플하고 안에서도 심플하고 수직 보강제가 하나도 안 들어가게 해결되었어요. 눈높이에서만 잘 보이게 하고자 했던 건데, 이곳에 맞는 걸 찾아낸 케이스죠.                             하이라이트는 완전히 열리는 2층의 코너 창입니다. 어떤 경험을 주고자 하셨나요? 기지에는 여러 기능이 요구됐는데, 그중 하나가 손님맞이 공간이었어요. 박서보 선생님의 손님들이 많이 오시기 때문에 그분들을 접대하고, 그림도 보여드리고, 앉아서 편하게 말씀도 나누실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어요. 특히 세계적인 박물관장님들이나 출판사 관계자 등 외국에서 손님이 많이 오시는데, 열려 있는 한국적인 마당의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옥에서도 문이나 창을 열면 외부와 하나가 되는 공간이 있죠. 열렸을 때와 닫혔을 때의 느낌이 굉장히 다른데, 전체가 열렸을 때는 그야말로 시원하게 외부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하고자 했어요. 특히 동남측 코너에서는 유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양쪽으로 열려서 트이게 만들고자 했어요. 박서보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창이고 공간이 되었죠.   이번에 소개된 운중동 주택은 기존과 다른 어휘도 보입니다. 특별히 표현하고자 하는 게 있으셨나요? 운중동 주택은 프로그램이 복잡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주변의 조건이 상당히 달랐어요. 남서 측 방향으로는 전망이 좋고 남쪽은 비교적 괜찮은데, 옆으로는 건물들에 의해 거의 다 막혀있는 구조였어요. 또 집이 도로에 바짝 붙어야 해서 올려다보이는 상황이었고요. 그런 부분이 배타적이면 안 되니까 박스가 아무리 좋더라도 배타적이지 않게끔 변화를 준거죠. 아래 박스와 뒤 박스를 일부 휘게 하고 그 사이로 빛이 들어가게 해서 하루의 변화를 주택 안에서 느낄 수 있도록 했어요. 그리고 안에서 사각형으로 창을 내기보다는 프레임으로 만들어 안쪽은 조금 가려주고 트여주는 방법이 시도되었고, 그것이 형태적으로 나오게 된 것 같아요.   많은 비평가가 소장님의 건축을 ‘유기성과 추상성의 만남’이라고 표현합니다.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 주제를 어떤 식으로 접목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유기성이라는 건 기하학적인 형태가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선과 흐름, 바람이나 구름의 흐름이라든지 지형의 흐름처럼 아주 부드러운 부분을 의미하는 거고요.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자연인 거죠. 추상성은 실제로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럴 것이라고 가정하는 거죠. 사각을 그리면 사각형이 되고 직선을 그리면 수평선이 되고 직선을 세워서 그리면 수직선이 되는 것들을 추상성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그곳에 사각형 공간을 콘크리트로 만들었는데, 그 안에 들어가서 자연을 관찰할 때 구름이 좀 더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거나, 바람이 내 몸을 통과해서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든지, 그런 경험을 더 잘 인지할 수 있게 하려는 거죠. 추상적인 것을 통해서 유기적인 것들을 경험하는 것, 딱딱한 선을 통해서 부드러운 것이 적극적으로 우리 몸에 인지될 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 같은 거겠죠.   또 다른 키워드는 ‘땅의 건축’입니다. 여러 프로젝트에서 지형은 중요한 출발점으로 언급되는데요. ‘땅의 건축’은 땅과의 관계에 대한 건축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땅집을 지어놓고 꺼진 공간에 들어가서 보니 하늘이 잘 보이더라, 나무가 더 잘 보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움직임, 반딧불의 움직임이 더 잘 인지되더라는 거죠. 꼭 땅만의 건축은 아니고 땅을 통해서 하늘도 보이고 자연도 보이고 우리 자신을 좀 더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건축이 아닐까 하는 거죠. 그에 관한 관심은 땅이 좋다는 데서 시작한 것 같아요. 땅이 좋다는 건 땅에 앉는 느낌이 좋다는 거죠. 땅에 웅덩이를 파고 앉으면 느낌이 색다르면서 포근할 수 있다, 땅을 많이 훼손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부터 출발하는 것 같아요. 어릴 때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시골에서 놀았던 기억을 통해서 받았던 인상, 흙냄새, 빗소리 등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그런 것들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싶고요. 또 땅은 하늘처럼 태연하고 아름답지 않지만, 만물을 소생시키는 어머니 같은 것, 나 자신의 존재감은 없지만, 남들을 존재하게 해주는 참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하늘보다 더 강하고 힘이 있는 것이라는 도덕경의 글, 노자 사상도 저에게 영향을 줬어요.   단순한 구축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경험과 인식’에 대해 비평가들은 ‘거침 속의 세련됨, 세련됨 속의 무심함’으로 표현합니다. 그 부분이 소장님께서 말씀하시는 ‘막의 미학’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평소 한국 고유의 특성으로 막사발의 예를 자주 드셨는데, ‘막의 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와 이것이 소장님의 건축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막’의 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던 건 막사발로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막사발을 공부하다 보니 빠른 속도로,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의 정서와 문화, 그리고 지형과 날씨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죠. 적당히 만들어서 잘 적응하고 써야 하는 건축의 흐름을 보더라도 말이죠. 중국으로부터 전형적이고 대칭적인(symmetrical) 건축이 들어와서 불국사 같은 게 지어졌다면, 이후 시대가 지나면서 지형에 적응해가죠. 막사발도 그 자체가 대칭적이거나 완벽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어떤 재질감이나 손의 흐름, 만드는 속도에 적당히 적응해서 우리가 만졌을 때는 따뜻하게 다가오는 미학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죠. 막사발뿐 아니라 민화라든지 춤이라든지, 음식이나 술,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막'자가 들어간 게 많아요. '막'자가 없더라도 버무려내는, 순간적으로 만들어내는 깊은 맛 같은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거고요. 그렇다고 해서 막의 미학이나 의미를 건축에 직접적으로 도입하려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가끔 생각은 해보죠. 그런 것들이 적용돼서 나타날 수 있는 어떤 편안함이나 아름다움은 없을까? 아니면 이미 그렇게 되었던 것들은 없을까? 그러면서 고건축도 바라보게 되죠. 기둥을 편안하게 받히는 주춧돌처럼요. 까치호랑이 같은 경우도 그렇고, 막 생긴 것들을 ‘못난이’라는 귀여운 애칭으로 불렀던 것처럼 해학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던 것 같아요. 한국 문화에 그런 따뜻하고 좋은 면이 있는 것 같은데, 현대 미학이나 현대 건축, 서양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게 아닌가. 이런 좋은 점들을 부각시키고 더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우리나라 고건축 특히 민간에서 만드는 한옥이나 도자기 같은 미학에서는 많이 적용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에서 배우면 어떨까. 약간 거친 상태로 덜 끝마쳤어도 편안함이 있는 상태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무조건 완벽하게, 모든 게 매끈해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 떨치고, 때에 따라 비틀어줘야 할 경우 너무 강박관념을 가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편안하게 받아들여진다면 그 공간이 과연 나쁜 공간이기만 할지, 때에 따라선 그 또한 흥미로운 공간이 될 수 있을지, 그런 부분에 꾸준히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는 편이고요. 하지만 건축이라는 게 만드는 과정이나 법규 등에서 그런 부분을 많이 허용하지는 않죠. 그런 생각을 반문하는 정도로 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도시 재생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데요. 지난 전시를 통해 광화문과 옛 중앙청에 대한 제안도 새롭게 화두를 던지셨고요. 최근에 도시 재생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건축가가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재생에 대한 소장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게 됐던 건 재생 프로젝트라서가 아니라, 기존 건물을 허물지 않고 쓰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였어요. 물질을 절약하는 것 이전에, 땅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구축물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활용함으로써 굉장히 흥미로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도시 재생의 의미는 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기존에 있던 걸 보전함으로써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이라든지, 주변과의 관계를 훨씬 친근감 있게,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요소에 있는 것 같고요. 무엇보다도 건축가들이 설계한 건물이 멋있게 잘 지어지고 있지만, 막 지어도 오래된 건물이 대부분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나이를 먹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지 않나 싶죠. 재료가 주는 편안함도 있고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 기억도 있고요. 1960~70년대의 역사적 콘텍스트(context) 속에서의 우리를 일깨워주거나 흥미롭게 해주죠. 어떤 재료를 쓰더라도 새 재료가 주지 못하는 감흥이 있어요. 제가 보는 가장 큰 가치는 편안함인 것 같아요. 주변과의 관계도 있고 재료가 주는 느낌이나 그 자체일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있었던 건물을 수리해서 들어갈 때의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번에 케네스 프램튼의 <현대건축:비판적 역사> 5쇄에 드디어 한국 건축에 대한 챕터가 등장합니다. 한국 건축에서는 고 김수근, 건축가 조민석과 함께 조병수 소장님이 언급되었는데요. 그 연장선에서 한국 건축에서 한국성은 이미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본질에 대한 질문을 탐구하고 건축을 통해 해석하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의 건축 지형 속에서 한국 건축이 어떻게 포지셔닝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소장님의 생각과 소감도 궁금합니다. 케네스 프램튼의 역사책에 나온다는 것 자체는 자랑스럽고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아직 한국 건축이 국제적으로, 미학적으로 논리화되어있지 않아서 그 사람들은 ‘이게 뭐지?’ 긴가민가한 정도죠. 일본 건축의 ‘와비사비’처럼 확실하게 이해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 같아요. 그것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 생각에 국제적으로 인간이 다뤄온 미학 중 중요한 하나의 장르가 빠져있는 것 같아요. 자연에 순응하면서 생기는 편안함과 해학, 그러면서 해결해나가는 미학적인 부분은 분명 거론되지 않았죠. 이제 주목할만한 시점이 온 것 같아요. 외국에서도 ‘한국, 뭐지? 뭐가 있는 거야? 중국과 일본과 다른 게 뭔가가 있나?’하며 주목하기 시작한 거죠. 때문에 우리 스스로 이걸 국제적 기준에서 잘 정리하고, 비판할 건 비판하고 그와 유사한 건 유사한 대로 설명하면서,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요. 이번에 나온 책에는 그런 부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다거나 의미가 부여되지 못해 아쉽지만, 이런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다 정도는 소개가 되고 있으니, 우리의 미학을 조금 더 정리해서 좋은 건축, 좋은 미학적 개념으로 발전되고 잘 받아들여지면 좋겠다는 생각이죠.   건축가로서의 삶도 여쭤볼게요. 하루 중 여유로운 시간은 언제이신가요?                                                                       저는 새벽형이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조용히 작업을 정리해볼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이 있고요. 두 번째로는 저녁 7시에 집에 가거나 누군가를 만나 와인 한잔하건, 이야기를 나누건 편안해지는 시간이 있죠. 저녁 일곱 시에 사무실을 떠나면 일은 잊어버리는 편이거든요. 고민을 많이 안 하는 편이라 그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는 그야말로 온전히 먹고 쉬고 사람들을 만나서 담소하기 때문에 행복한 시간이죠.   즐겨 하는 취미가 있으신가요? 저는 태생적으로 아날로그형인 것 같아요. 젊었을 때부터 골동품 시장 다니는 걸 좋아했고 음악도 긁어서 나는 LP 소리가 신기하고 좋았고, 그런 것들이 가지는 맛이 좋아 아날로그적인 취미를 많이 가진 것 같아요. 그리고 하루 중 최소 한 시간 정도는 걷죠. 부지런히 땀 흘리며 걸으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요. 걷는 것 자체가 싫을 때도 있지만 그러면서도 어떤 행복감을 주는 것 같아요. 건강을 유지해주고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취미는 일하는 것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것과 연관성이 있죠. OHS   소장님이 머무르시거나 지내시는 곳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산길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설악산에 거의 2주에 한 번씩은 가는 것 같아요. 주로 가는 짧은 코스는 2~3시간 만에 올라갔다 내려갈 수 있어요. 세계 어디에 가도 그런 좋은 코스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몬태나에도 오래 살았고 유럽에도 살아봤지만 정말 아름답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곳이죠. 지금처럼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하늘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이럴 때 산에 가면 물이 철철 넘쳐흐르거든요. 깨끗하게 땀도 씻겨 내려가고 신선한 공기의 느낌이 너무 좋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태풍과 태풍 사이, 지금인 것 같아요. 곡성이라는 작은 도시에도 자주 갔어요. 논밭 버드나무 우거져있는 들길에 개울물이 철철 넘쳐 흐르거든요. 정말 풍요롭고 더위도 꺾이기 시작하면서 잘 익은 찐 옥수수들도 있고요. 평범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지만, 코로나를 겪고 다른 곳에 가서 보면 그게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건지 새삼 알게 되죠.   소장님께 건축은 무엇인가요? 저에게 건축은 놀잇거리예요. 아무리 휴가를 가서 즐거운 일을 해도, 설계만큼 흥미롭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어떠한 즐거운 일도 설계 다음으로 즐거워요. 그렇다면 저는 이걸 놀잇거리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진행 임진영 사진 텍스처 온 텍스처(texture on tex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