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건축가 조병수 ①

건축가의 여러 작업을 돌아보면서 건축 세계를 탐색해온 건축가특집으로 올해는 건축가 조병수를 만납니다. 건축가 조병수는 건축을 실용적이면서도 솔직한 재질의 거친 사과 상자 혹은 막사발에 비유하곤 합니다. 실용적인 박스의 절제된 형태는 사용자의 경험과 인식을 일깨우는 본질적인 공간의 경이로움을 담기 위한 것입니다. 나아가 단순한 형태의 병렬 혹은 조합은 사이 공간을 만들어내면서 내외부 공간의 흐름을 엮어냅니다.

기능에 충실하지만 그 안에 기품이 담긴  조선 시대의 막사발, 미국 몬태나 지역의 농업, 산업 건물, 한옥의 경험을 좋아하는 건축가는 기능과 재료 본연의 특성에 충실하면서도 기능을 넘어서는 아름다움과 기품을 발견해냅니다. 이는 일관성 있는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형태의 흐름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인식을 우선하는 유기적인 건축과 맞닿아 있습니다.

유기적인 공간을 담기 위해 조병수의 건축은 간결하고 기하학적인 추상성을 띱니다.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모더니즘과 동양 사상, 유기성과 추상성과 같은 공존하기 어려운 극단을 포용하면서 현대 지역주의를 추구한다고 설명합니다. ‘거칢 속의 세련됨, 세련됨 속의 무심함'으로 대표되는 그의 건축은 그로 인해 세계화와 지역성의 경계에서 보편성을 갖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 이유로 올해 세계적인 비평가 케네스 프램튼의 저서 <현대 건축:비판적 역사>의 개정판(5th edition)에 처음 소개되는 한국 건축에서 건축가 조병수는 고 김수근, 조민석과 함께 등장합니다.

재료에 대한 이해, 쉬운 시공 방식과 구조에 대한 해석 등 만드는 것에 관한 관심 또한 그의 건축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입니다. 정제된 원형의 공간이 주는 감동, 동시에 재료와 구조에 대한 실험과 시도는 우리가 건축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우리는 건축을 통해 적어도 사람들이 주변 환경을 인식하는 방법에 변화를 줄 수 있다’라는 마크 라자탄스키의 말을 떠오르게 합니다. 
올해 건축가특집은 건축 영상/영화 제작 스튜디오 <기린그림>과 협업으로 공개된 5개의 건축 영상과 함께 인터뷰로 만나봅니다. 
 

항상 한옥에서의 경험, 기억들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나고 자란 곳이 궁금해요. 
6.25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서울에서 태어났죠. 부모님들이 서울로 올라오셔서 기억 속에 있는 집은 서울의 개량 한옥이었어요. 서촌의 근대 한옥처럼 작은 한옥이었는데, 그때는 큰 집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가보니까 20평 정도 되는 집이더라고요.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들은 어쨌든 자신들의 고향을 저의 고향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미국에 이민을 가면, 끊임없이 ‘너는 한국인’이라고 말해주듯 말이에요. 방학이면 자꾸 시골에 데려다 두셨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방학을 여러 번 보낼 수 있었고, 깊은 산골 동네의 경험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죠. 경상북도 상주 낙동이라는 곳인데 버스를 타고 깊게 들어가는 산골 동네였어요. 지금은 중앙고속도로가 뚫려서 완전히 흔적도 없어졌더라고요.
 
자고 일어나면 자리끼 물마저 얼었을 정도로 추우면서도 방바닥은 지글지글했다고 하셨죠. 또 다른 한옥에서의 기억이 있을까요?
가장 강렬하게 기억나는 부분은 마당인 것 같아요. 마당에 봄 햇살이 들었을 때 어린 마음에도 정말 따뜻하고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가 올 때는 마당에 나와서 흙으로 물 막으며 놀고요. 장난감도 별로 없을 때이니까요.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있는 것은 시골에서 사촌 형님들이 올라오셨을 때였어요. 서울 유학을 와서 좁은 집에 여러 명이 같이 살았어요. 마당에서 세수하고 같이 화장실 쓰고 북적북적하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던 기억들이 기억에 남아요.
 
 
학창 시절엔 어떠셨나요? 즐겨 찾던 관심사가 있으셨나요?
이렇게 모으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고, 문화적인 것에 관심이 있었는지 고궁 가는 것도 좋아했고, 골동품을 보러 황학시장부터 장안평도 다녔죠. 걷는 걸 좋아했어요. 특별히 갈 데가 없었으니까요. 데이트를 해도 한창 5시간씩 걷다 보면 종로에서 올라와서 성대 쪽으로 돌아 광화문으로 오면 서울 한 바퀴를 다 돌아요.
 
서울에 있을 때는 주로 어느 동네에 계셨던 건가요?
처음에 용산구에 살다가 동대문구 쪽에도 살았어요. 젊을 때 놀던 곳은 대부분 명동이나 종로였죠. 종로 2가의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 명동에는 필하모니 음악 감상실, 그리고 을지로에 타임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아주 시끄럽게 음악을 틀어주는 음악 감상실을 좋아했어요. 음악을 좋아했다기보다도 친구들이나 여자친구들을 사귀면 아는 척하고 데리고 가고 무게 잡는다고 다녔던 것 같아요.(웃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벽제 가마터에 도자기를 구우러 가셨던 게 흥미로워요.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만드는 것은 어릴 때부터 항상 좋아했어요. 수업 시간에도 항상 책상 밑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도자기도 좋아하고 골동품도 좋아하고 가구도 좋아하긴 했는데, 그걸 진지하게 생각했다기보다는 친구가 도예를 하는 게 계기가 되었어요. 친구 따라 가보니 그곳이 조용하고 좋더라고요. 흙을 만지는 게 좋았고요.
대신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실망스러웠죠. 기껏 만들어서 가마 속에 넣었는데 완전히 다른 게 나오는 거예요. 가로 세로로, 30%가 줄어드니까. 면적으로 보면 0.7×0.7, 49%가 되잖아요. 거기에 또 높이를 0.7로 곱하면 부피는 3분의 1로 줄어드는 거죠. 깜짝 놀랐죠. 요즘은 전기나 가스 가마를 사용해서 일관성이 있지만, 옛날에 장작으로 땔 때는 그야말로 불이 어떻게 휘몰아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예요. 불이 방향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도자기가 휘기도 하고 색이 한쪽은 밝고 한쪽은 유약이 안 녹는다든지 하니, 너무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뭔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컨트롤도 안되고 기껏 꺼내 보니까 결과물도 그렇고요. 산에 가만히 앉아서, 건축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리는 순간에 행복감을 느낀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면서 건축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건축이라는 분야를 처음 알게 된 건 언제인가요?
사실 그 당시에 건축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어요. 1970년대 후반 정도였는데, 교보빌딩이 지어졌고 그곳에 맛있는 스파게티집이 생겼어요. 큰 서점과 음식, 잘 지은 건물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었죠.
그러면서 세종문화회관이 지어졌는데 오픈할 때 전시를 했어요. 그때 도면을 보게 되었어요. 청사진 도면이 두껍게 있는데, 뭔가 알아보지 못하게 그려져 있는 게 있어 보였어요.(웃음) 이걸 가지고 건물을 짓는구나,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는 넘어서는 것 같은데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세종문화회관이 처음에 지어졌을 때 젊은 사람들은 마음에 든다, 안 든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너무 투박하고 무겁다’, ‘경복궁 앞에 그렇게 무거운 게 들어가야 하나’라는 이야기들도 나왔죠. 저는 어쨌든 그게 좋아 보이고, 대단해 보였어요. 도면으로 시작해서 건물이 되는 과정이 궁금했어요. 건축가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고, 건축과를 가서 뭔지 한번 보고 싶었어요. 예술적이고 만드는 것이 중요한 건지, 엔지니어링을 잘해야 하는 건지 궁금했는데, 만드는 것, 예술적이거나 문화적인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교육받다 보니 흥미로웠어요. 엔지니어링을 굳이 많이 안 해도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천직이라고 생각했죠.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왜 바로 유학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해요.
제가 성장한 1960~70년대는 우리나라가 많이 개방되지 못했었던 때죠. 70년대를 지나면서 유신을 겪었지만 저는 잘 몰랐어요. 선생님들이나 과외선생님들이 이야기해주는 것만 듣고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하면서 통제된 사회 속에서 자라게 되었죠.
1970년대 후반, 80년대는 그야말로 격변기였어요. ‘국풍’이라는 문화 운동 같은 걸 국가적인 차원으로 내세우면서, 한편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죠. 그게 바로 저희 세대였어요. 학생 운동에 참여했던 친구들도 친한 친구들이었고,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친구들도 있어서 같이 언쟁도 하고…….통제된 사회에 있으면서 더 자유로운 곳에 가서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게 되었어요.
 
미국 대학을 선택할 이유도 독특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을 따라 몬태나대학을 선택하셨어요. 왜 그 소설이 동기가 되었을까요?
누구나 그런 기억 몇 개는 가지고 있을 것 같아요. 무시해도 될 만큼의 영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면 자신에게 굉장히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렇기 때문에 작업의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일들이죠.
저에게 그중 하나는 당시 청계천 헌책방이었어요. 지나다가 들어가서 집은 책이 마크 트웨인의 『What is man』이었는데, 한글판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었어요. 당시엔 『톰 소여의 모험』을 쓴 그 마크 트웨인인지도 몰랐어요. 인간을 너무나 비관적으로 그린 책인데, 인간의 순수한 사랑이란 없고,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마저도 결국 자기를 위한 선택이고 결정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어요. 그게 저에게는 큰 질문을 던졌어요. 어떻게 보면 약간 괴롭다고 해야 하나, ‘저게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어요. 항상 인간이나 인생을 훨씬 더 아름답게 긍정적이라고 바라보고 행복하게 자란 편이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궁금했죠.
어쨌든 그분의 소설이 좋아서 도대체 어릴 때 어떤 동네에서 어떻게 자라고 살았을지 궁금했어요. 이왕 가는 거면 그 지역에 가보고 싶었죠.
나중에는 스스로 어느 정도 답을 얻게 되었던 것 같아요. 『What is man』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을 이성적으로만 바라봤던 것 같고 그 이면에 감성적인 면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그 책을 읽고서 10년, 15년 건축 공부를 하면서도 계속 이성과 감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원 졸업 논문 때 한 ‘경험과 인식’이라는 주제도 감성적인 부분을 다루고자 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몬태나 지역을 맞닥뜨렸을 때,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몬태나대학은 완전히 허허벌판 시골 같은 곳이었죠. 등록금이 저렴하고 공부하기 편할 것 같아서 그곳에서 2년 정도 영어도 익히고 공부한 다음에, 대도시의 큰 학교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워낙 날씨도 좋은 주립대학이다 보니 학교 시설도 잘되어 있었어요. 어느 날 하늘을 보다가 순간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몬태나에서 2년 정도 지나서였던 것 같아요. 교수님들도 학교를 옮기는 걸 추천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곳에 머물게 되었죠.
 
몬태나 지역에서 마주한 창고나 농업 시설들을 보면서 강렬한 감흥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지역의 풍경에서 얻은 건 무엇이었을까요?
아무래도 몬태나대학은 미국으로 치면 깡촌의 지방대죠. 시골 아이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겨울에 눈이 엄청나게 왔을 때 같이 흑백사진을 찍으러 여러 마을을 다녔던 기억도 나고, 그 친구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농촌 생활이 쉬운 게 아니라서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건물도 형식보다는 최소한의 재료로 스마트하게 지었어요. 옛날에 지었던 우리나라 건물들도 담백하고 솔직하고 꾸밈없이 실용적으로 지었잖아요. 서구의 벌판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시설들이었기 때문에 감명받고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당시 활발했던 국제 담론도 현장에서 접할 수 있었을 듯해요.
몬태나에 처음 갔을 때 선배들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책을 보여줬어요. 저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누군지 몰랐어요. 너무 딱딱하고 형식에 치우친 것 같아 재미없다고 했더니 다들 깜짝 놀라면서 ‘네가 뭘 안다고’하며 저를 아주 싫어하더라고요.(웃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멋있다고 보여줬는데 건축을 시작도 안 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하니까요.(웃음)
당시의 건축 스타일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저뿐 아니라 친구들도 그런 경향이 딱딱하다는 생각하게 되고, 그런 것에 꼭 얽매이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나중에 포스트 모더니즘도 나오고 1980년대에 디컨스트럭티비즘이 나오는 등 경직된 것을 새롭게 해체하는 형식도 나왔죠. 그야말로 프랭크 로이드의 딱딱함을 깨는 완전히 다른 형식이 나왔을 때 거기에 다 동의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많이 나눴던 것 같아요.
캐나다 시골에서 온 친구가 있었는데, 건물의 아름다움과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런 형식을 깨든지 다른 형태가 필요해서 덧붙이듯 만들었을 때, 그 자체가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해 준 적 있었어요. 저는 그 말에 공감했어요. 우리가 공부하던 1980년대가 포스트모던이나 해체주의 건축이 나오기 훨씬 전인데, 경험이 없고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사람들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시골의 건물을 보고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것 같고요.
 
아직도 기억하는 그때의 장면들이 있으신가요?
랜드스케이프, 그곳의 풍광과 어우러지는 건물들이 편안하게 있는 게 좋았죠. 형식적으로는 굉장히 달라요. 우리나라 사찰이나 마을은 작은 조각들로 되어서 랜드스케이프에 스며들듯이 들어가는데, 몬태나는 형태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로 서 있고 그게 풍광과 더불어서 가게 되죠. 형식은 아주 다르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물과 풍광이 하나가 되어서 전체적으로 어우러지는 것 또한 매우 아름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소 ‘실용성과 솔직한 재질감, 투박하지만 기품이 담겨있는 건축’을 말씀하시던 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이 먼저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결이 닮아있는 곳을 경험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한국인의 어떤 심성과 자연관이 일본 사람과 굉장히 다른데, 제가 볼 때는 한국과 미국이 더 비슷한 것 같아요. 미국 사람들이 볼 때는 한국과 일본이 비슷하다고 보겠지만요. 한국의 경우, 유교적인 생각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자연환경이 척박하여서 모여서 편안하게 만들고자 하는 이유도 있을 수 있죠. 미국도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청교도 정신 속에서 담백하고 솔직하게 있는 걸 그대로 표현하는 것과 두 번째는 최소한의 재료로 스마트하게 구조나 마감, 결부 같은 걸 만들어 시공하는 거죠. 농업 건축물에서 보면 솔직담백한 유사점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일본이나 중국의 토속 건축에도 대부분 그런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형식이 다른 것 같아요. 스위스에 갔을 때 아기자기하고 잘 다듬어서 만든 건축을 봤을 때 일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일본이나 스위스나 독일 이쪽이 비슷하다고 한다면, 아마 언어를 연구하면 연관성을 밝혀낼 수 있을지 몰라요. 표현 방식 같은 것들도 분명하고요. 우리는 그와 다르게 오히려 미국의 농업건축이 보여주는 특성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몬태나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으로 가셨습니다. 하버드 대학을 선택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대학원 가기 전에 한 2년 정도 보스턴에서 일을 했어요. 하버드에서 공부하신 교수님들이 저를 추천해서 보스턴으로 가게 되었는데, 대학원은 하버드로 가도 좋겠다고 이야기해주셨어요. 하버드 출신들이 많이 있던 동네니까, 몬태나 대학교 나왔다고 조금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웃음)
꼭 졸업장을 딸 생각은 아니었어요. 어차피 건축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내가 보기엔 그들도 별거 아닌 것 같은데 한 번 가보자 했죠. 역시 가보니까 재미없고 싫어서 교환 학생으로 스위스에 도망가 있었어요. 수업도 학교에서 많이 안 듣고 외부에서 들었죠. 하버드 대학은 근처의 13개 대학 어디서든 수업을 들을 수 있고 학점을 다 인정해 주는 게 좋았어요.
MIT 대학에 있던 조각가분들이 계셨는데 한 분은 건축과 비주얼 아트를 가르치는 에디 레빈(Edward Levine)이라는 교수님이셨어요. ‘사람이 걷지 못한다면, 보지 못한다면, 어떤 건물을 만들었을까, 어떤 환경을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프로젝트를 하신 분이죠. 또 한 분은 일본계 여성 타호 리스코(Risutko Taho)라는 조각가셨어요. 건물이나 버려진 공간 속에 환경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분이었어요. 그분들에게 수업을 들으며 영향을 받았고, 대학원 논문 프로젝트를 할 때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학교 자체는 별로 안 좋아했어요. 너무 형식에 치우친다고 생각했죠. 제가 지원해서 들었던 수업은 맥 스카건(Mack Scogin) 교수님 한 분이었던 것 같아요. 맥 스카건 교수는 스튜디오 때 돼지우리를 보여줬어요. 본능적인 환경에서 돼지들도 밥을 먹게 할 수도 있고, 멈추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는데, 감정과 감성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었어요. 맥 스카건 교수는 잘 만들기도 하지만, 미국 시골에서 그야말로 혼자 실무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만든 분이죠. 공부를 많이 했던 것도 아니고 석사 학위가 있던 것도 아니고요. 그분도 시골의 랜드스케이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어쨌든 하버드 사람들이 추구하던 경향 혹은 그 방향을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몬태나 영향이 커서 계속 몬태나를 그리워하면서 혼자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시골 생각을 많이 했었죠.
 
어느 대학이나 학장의 분위기에 따라서 그 시기 커리큘럼이나 교육의 방향이 확고해지잖아요. 그 당시 하버드 대학의 학장은 어떤 분이셨나요?
어떻게 보면, 하버드 대학은 모더니즘의 줄기를 약간 가져왔던 거죠. 1937년대에 그로피우스가 히틀러를 피해 와서 제대로 된 건축 대학(graduate school of design)을 만들 때 건축과 디렉터로 일하면서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를 데려왔으니까요.  
저는 맥 스카건 교수의 감각적 건축의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 학장은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 교수였어요. 당시 유럽의 젊은 건축가들을 많이 초대해 왔죠. 스위스의 헤어초크 앤 드 뫼롱(Herzog & de Meuron)도 젊었을 때 와서 가르쳤고 디너 앤 디너(Diener & Diener) 그리고 멀스 앤 메이니(Mercel Meili)라는 젊은 건축가도 있었어요. 만들기에 치중해 있는 부분들은 좋았어요. 디테일에 관심이 있어서 수업을 듣고 싶었고, 1:1 수업을 요청하면 그분들이 받아들여 주셔서 한 시간, 두 시간씩 벽돌을 어떻게 쓰는 게 좋은 것인지, 유럽에서는 어떤 전통을 가지고 돌을 써왔고 조인트 방식은 어떤 것이 있는지 등등 건물을 만드는 것에 대해 배운 것은 좋은 계기가 되었죠.
 
진행 임진영
사진 텍스처 온 텍스처 texture on texture
인터뷰 ②에서 이어집니다.
 
인터뷰_임진영 사진_텍스처 온 텍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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