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신체 치수와 비례로 구현한 여백의 미, 건축가 정재헌 ① 어릴 적 산골에서 나고 자라 한옥에서 사셨다고 들었어요. 경북 군위라는 곳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냈어요. 보통 경북 군위라고 하면 대구 옆에 있는 존재감 없는 소읍이어서 잘 몰라요. 그런데 김수환 추기경님이 바로 1.5 km 떨어진 이웃 동네에서 나셔서 군위를 많이 알게 됐죠.    저는 읍내에서 4km 정도 떨어진, 전기도, 문화도, 자동차도 없고, 문명과 거의 단절된 곳에 살았어요. 어렸을 때 놀았던 놀이터들은 모두 산이고 들판이고 개울이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몸으로 자연을 체험하지 않았나 싶어요. 가장 큰 즐거움은 여름 되면 개울가에 가서 멱 감고 친구들과 같이 산에 소 몰러 다니고 쇠꼴 베러 다닌 것이었어요. 지금도 저는 낫질, 삽질, 모든 농기구를 잘 다룹니다. 한편으로는 부모님이 농사지으면서 사과 과수원을 하셔서 나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나무 키우는 일을 같이 도와드리면서 몸으로 익혔죠. 지금도 저는 청계산에서 텃밭 농사를 잘 짓고 있어요. 흙에 대한 느낌과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대한 느낌, 나무들의 생육에 대한 것들을 몸으로 느끼면서 자랐던 것 같아요.   어릴 적 기억나는 풍경들이 있으신가요? 어렸을 때 학교까지 4km, 왕복 20리를 걸어서 다녔어요. 봄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무 색깔에서 알았어요. ‘물이 오른다’라고 하죠. 봄철에 물이 쭉 올라서 보라색으로 바뀌는 것들이 보입니다. 여름이 온다는 것은 태양이 작열한다는 거였어요. 학교 마치고 집까지 가야 하는데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 뜨겁고 진공 같은 상태와 풍경을 지나 가을이라는 걸 느꼈을 때는 빛이 기울어지는 것이 기억나요. 겨울은 온도를 모르잖아요. 근데 물체를 만지고 경험한 거로 추위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건축을 하고 풍경을 담는 데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몸으로 느꼈던 것을 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한옥에서 자랐다고 하셨는데, 어떤 집이었나요? 집을 설계하면서 항상 저의 집을 떠올려요. 아니면 우리 동네에 있었던 집들을 떠올립니다. 땅이 산으로 막혀 있어서 분지처럼 둘러싸여 있었는데, 큰길에서 3~40m 논 사이로 들어가면 우리 집이 있었어요. 집에 들어가면 위채와 아래채, 행랑채가 있는 전형적인 ㄷ자 집이었어요. 바깥으로 논이 있고, 그 옆에 허드레 공간이 있는 전형적인 농가형 주택이었어요. 가장 인상적인 건 대청마루 공간이었어요. 또 기억에 남는 집의 공간으로 ‘뒤안’이라는 곳이 있었어요. 호기심 많은 사내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하던 어린 시절의 기지였죠. 개구리 잡아 키운다든가 아니면 새를 잡는다든지, 친구들과 함께 그 공간에서 썼던 기억이 나요. 여름날 문을 열면 맞바람이 시원하게 불던 기억들이 나고요. 지금 와서 보면 어렸을 때 그런 집에서 자랐던 게 가장 큰 행복이지 않았나 싶어요. 아직도 눈을 감으면 50년 전 시골집 풍경이 다 떠올라요. 많이 바뀌었지만, 다행히 워낙 오지였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바뀌지 않은 것도 좋고요.      중고등학교도 그곳에서 다니셨나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왔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막내 외아들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너무 자연 속에서 놀고 공부하는 건 뒷전이니까 어머님이 걱정되셨나 봐요. 셋째 누님이 서울로 시집가니까 같이 생활하게끔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서울 생활이 시작됐던 거죠.   서울에 대한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충격이었어요. 제가 학교에서 말을 하면 모든 친구가 웃었어요. 그러면서 제 성격이 내향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가장 무서웠던 것은 친구들과 싸워서 ‘너희 어머님 모셔와라’라는 말을 듣는 거였어요. 어머님이 시골에 계시는데 어떻게 오시겠어요. 어린 마음에 그런 부분이 참 불편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고 안 일으키고 조용조용히 살았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는 어느 동네에서 사셨나요? 종로 6가 효제동 그리고 충신동 언저리에 살았습니다. 저희는 양옥집에 살았고 그 밑으론 전부 한옥이었어요. 지금도 가보면 종로 5, 6가는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때 제 가장 큰 놀이터가 서울대학교 문리대였어요.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에 가면 큰 운동장이 있었고, 커다란 은행나무에서 친구들과 축구시합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교수님께 집을 의뢰했던 동창분들이 바로 그때 중고등학교 친구들이신 거군요. 그렇죠. 부모와 떨어져서 서울에 와서 산다는 것, 그 어린 나이에 유학했다는 것이 좀 불행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나중에 파리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런 문화적 충격이 있었기 때문에 골목 다니면서 혼자 조용히 지내는 걸 가장 좋아했어요. 또 어렸을 때부터 사물을 관찰하거나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길거리 다니면서 ‘이렇구나, 저렇구나’ 관심 있게 주변 사물들을 봅니다. 아마 그런 것에 민감했던 것 같아요.   건축은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 그 놀이터가 없어졌어요. 서울대학교 문리대 건물이 다 부서져 버리더라고요. 당시엔 그곳이 문리대인지도 몰랐어요. 어마어마하게 큰 운동장이 있길래 공차고 놀았는데, 어느 날 그 좋은 나무들을 다 베어버리고 좋은 건물들과 운동장도 없애 버렸어요. 길을 만들고 하더니 단독주택지를 만들더라고요. 그곳에 근사한 집들이 들어오는 거죠. 저는 보성중학교에 다녀서 항상 학교 갈 때 혜화동으로 갔어요. 대학로에서 걸어서 가다 보니 항상 공사장 옆으로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짙고 빨간 벽돌 건물이 샘터 사옥이었던 것 같아요. 그 옆에 굉장히 유명한 주택들이 있었던 거예요. 3년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에 건물을 짓는 과정들을 보며, 그때 받은 인상이 몇 년 동안 강렬히 지속됐던 것 같아요. 지금 와서 보니 김수근 선생님 작업이었죠. 그 길로 다니면서 한국 해외개발공사 건물이 지어지는 현장을 구경했어요.    건축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저는 82년도에 대학을 들어갔는데요,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학과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습니다. 사촌 형이 화공과를 나왔는데 “야, 요즘 건축학과랑 건축공학과가 취업도 잘 되고 괜찮은 것 같아.” 라고 지나가듯이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한마디에 건축공학과에 들어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습니다. 제가 동검리 주택을 지어드렸던 고3 담임 선생님이 계세요. 그 선생님께서 “정재헌, 너는 건축공학과 가면 안 돼.”라고 하셨어요. “왜요?” 그랬더니, “현장 소장으로 가서 인부들 직접 만나면 큰소리 내고 해야 하는데, 너 그럴 수 있어?”라고 하셨어요. 그 당시 진학 지도를 하던 선생님들께서는 건축 설계가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 했어요. 우리나라는 건설 공화국이었잖아요. 건축공학과 나오면 무조건 건설 현장을 가는 것만 생각했던 거 같아요. 큰 생각 없이 건축공학과에 갔는데 그게 삶을 규정짓게 된 것 같아요.   성균관대 건축공학과에 들어가셨는데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성균관대에 들어가서 좋았던 것은 저와 비슷한 시골 친구들이 서울에 와서 친한 친구들이 많았다는 거예요. 저와 고향도 비슷해서 자유롭게 보냈고요.   학교 다닐 때 기억나는 것은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 성균관대는 디자인에 집중된 학교는 아니었어요. 졸업 후 직장 다니면서 홍익대나 서울시립대 동료들을 만나면 저보다 훨씬 더 잘했어요. 손도 빠르고, 건축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죠. 대학 다닐 때 중요한 부분은 학교 분위기에요. 그래서 ‘내가 4년 동안 뭐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열심히 뭔가를 하기는 했는데 인상적인 건 없었어요. 대신 건축 사진 찍는 것은 아주 좋아했어요. 저는 학교 다니면서 건축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렇게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많은 건축가가 학교 다닐 때 이미 빼어났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학교 다닐 때 재능 있게 잘하는 것보다 꾸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도 학생들에게 재능보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항상 해요.   그래도 설계의 재미라고 할까요. ‘설계가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었나요? 물론 학교 다니면서 건축을 좋아했어요. 잘하지는 못했는데 명료한 것을 좋아해서, 설계하고 도면 그리고 모형 만들면서 며칠 밤을 새워도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해가 떠오를 때 정신이 맑아지면서 행복을 느꼈죠. 건축을 즐기고 좋아했다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계가 이런 것이구나’, ‘이게 행복이구나.’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건축을 하는 것만으로 좋았습니다.   졸업 후 첫 직장은 어디셨나요? 1987년에 첫 직장을 다녔는데, ‘정일엔지니어링’이라고 서울역 뒤편에 큰 사무실이 있습니다. 전기설비팀도 있고 100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데 월급도 주는 것이 참 행복했어요. 그것이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저는.   정보가 부족한 시기였지만 시대별 분위기가 있었을 듯해요. 당시 기억에 남거나 관심을 가졌던 건축가나 혹은 이론이 있으셨나요? 우리나라는 어떤 경향을 이야기하고 유행을 많이 타잖아요. 은사님들이 미국에서 공부하시면 미국에서 학습했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서 가르치기 때문이죠. 은사님들이 공부하셨던 미국의 경향이, 예를 들어 ‘모던은 갔어.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야.’ 그러면 저희는 다 포스트모던처럼 했어요. 포스트모던이 문화적으로 왜, 어떤 환경에서 나왔는지 본질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이 시대는 포스트모던이야.’ 하는 식으로 무늬만 따라 했던 것 같아요. 유학 가서야 ‘아, 이게 포스트모던이고, 모던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거구나.’하고 본질적인 것을 느꼈어요. 스스로 단편적으로 학습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고, 저도 교육자로서 그런 부분을 굉장히 조심해요. 제한된 정보를 학생들에게 주는 거니까요. 교육자로서 제일 두려워하는 부분입니다.   실무를 하는 중에 유학을 하러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그때는 유학 가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여권을 잘 만들어주지 않았고 시험을 몇 번 쳐야만 입학 허가서 받고 여권을 받아서 외국으로 나갈 수 있었거든요. 학교에서 서양건축사, 현대건축사를 배울 때 교재에 있는 조그만 사진을 보고 상상을 해요. ‘야 이게 정말 지금 남아 있을까?’ 궁금증이 일어났어요. 상상만 해도 좋았죠. 저 어릴 때는 TV도 없고 전기도 없는데 유일하게 트랜지스터, 정확히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를 친구들과 귀 기울여서 들었어요. 그게 유일한 문명이었으니까요. 라디오 드라마 연속극 장면을 들으며 상상하는 거죠. 그런데 서양건축사 책에 나온 정보가 마치 라디오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유럽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속 갈증이 굉장히 강했어요. 마침 당시 성균관대 김용부 교수님이 돈을 들이지 않고도 유학을 할 수 있다는 공지문을 내셨어요. 관심 있는 학생들을 모으셨는데 저까지 세네 명이 모였죠. 선생님께서 프랑스는 학비가 거의 없고 생활비 얼마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불어 공부를 시작했죠. 대학교 2학년 때부터 4년 불어 공부를 하고 유학을 떠났던 겁니다. 1987년에 1년 동안 제가 설계사무실을 다니면서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우리나라 상황에서 그 당시 많은 사무실이 현상 설계를 하고 작업을 하는데, 설계 프로세스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1980년대에는 블랙박스형 설계였죠. ‘이런 게 아주 좋다더라’, 누가 한마디 하면 그 말을 따라서 그냥 하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왜 그래야 하는지가 없었어요. 프로세스 없이 그냥 결과물만 있는 가죠. 그런 작업을 하다 보니 프로세스를 좀 배웠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런 생각의 과정들,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궁금했던 거예요.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첫인상은 어떠셨나요? 문화적 충격이었죠. 환경적인 것은 그랬지만 파리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도움을 많이 받았죠. 불어를 그렇게 잘하진 못했는데 수업 시간에 프랑스 친구들이 저에게 ‘톨레랑스’를 보여줬어요. 약자에 대한 배려가 명료했고 그걸 많이 느끼게 해줬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들과 교류하고 있어요.   그 시기에 많은 분이 프랑스로 유학을 가지 않았나요? 제가 갔을 때보다 3~4년 이후, 저희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활동하던 때에 많이 갔습니다. 제가 프랑스에 있었을 때는 학생이 열 명도 채 안 됐던 것 같아요.   파리에 지내시면서 자주 가던 곳이 있으신가요? 항상 빨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서 그 좋은 곳을 즐기지 못했어요. 당시 부모님 연세가 일흔을 넘기셨고, 제가 외아들이어서 부모님과 3년 안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래도 자주 갔던 곳은 있습니다. 프랑스가 좋은 점은 건축을 공부한다고 하면 박물관, 미술관 등 모든 게 무료였어요. 그래서 항상 시간 날 때마다 퐁피두센터나 루브르박물관에 전시와 강연을 보러 다녔어요. 저는 지금도 루브르박물관이나 퐁피두센터가 파리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건축을 하려면 메트로폴리탄에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문화적 움직임이 있는 뉴욕이라든가, 런던이라든가, 파리 같은 곳에 가서 했으면 좋겠다고요. 아주 많은 전시와 강연이 일어나기 때문이에요. 기억나는 것은 세계적인 건축가가 퐁피두센터에 와서 강연한 거예요. 항상 1년 치 강연을 다 들었던 것 같아요. 아라타 이소자키나 리차드 마이어, 피터 아이젠만 같은 거장들이 와서 강연했어요. 그런 기회가 참 좋았습니다. 그때 멋있었던 건, 프랑스 건축가들이 와서 초청한 강연자를 소개를 해주는 모습이었어요. 그런 것들이 문화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당시 프랑스는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대였어요. 건축이나 예술 분야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였죠. 그때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서 다양한 도시 재건축이 일어났고, 건축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도 활성화되던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어요. 저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루벤스가 사용하던 유화 물감을 써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학교에 가니 그 물감이 쌓여 있는 거예요. 마음대로 쓸 수 있었어요. 그뿐 아니라 모든 시설이 어마어마했어요. 학교 암실도 제가 꿈꿔왔던 곳이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지원금도 많았어요. 매력적이었던 건 학교 다니면서 돈 안 들이고 유럽 답사를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수업 차원에서 답사하는데 정부에서 교통편과 숙식까지 거의 다 지원해줬어요. 저는 프랑스 교육 시스템의 혜택을 많이 받은 거죠. 그래서 가난한 유학생이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파리 벨빌 대학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앙리 시리아니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당시 앙리 시리아니는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제가 유학 갈 시점에 88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유럽 건축이 소개되기 시작했어요. 당시 「꾸밈」 지의 김성환 선배가 파리 특파원으로 계시면서 프랑스 건축에 대한 많은 양의 정보로 연재를 했어요. 굉장히 고맙죠. 그 기사를 보고 파리 8대학 교수이면서 건축가인 앙리 시리아니를 알았죠.   앞서 말한 설계 프로세스에 대한 갈증을 앙리 시리아니 선생님이 단번에 풀어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저에게는 그분이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감성과 감각이 있거나 세련되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분이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감성을 다 일깨워 주셨던 것 같아요. 굉장히 엄한 분이고, 말씀하시는 것도 명징했어요. 지금도 그분과 가끔 교류하는데, 저에겐 아직도 스승입니다. 아마 그 스승님 때문에 저도 지금 학교에 있지 않나 생각해요. 학생들 가르치면서 ‘아, 그런 스승처럼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죠.   유학을 통해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제대로 접했다고 하셨는데요. 서양 건축에 대한 관점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흡수하셨는지요. 당시 벨빌 대학에서 좋은 스승님을 많이 만났어요. 요즘은 그런 분들이 다 미국에 있는 학교나 다른 지역에 가신 것 같아요. 그때 저희에게 역사를 가르쳤던 분은 베르나 유에(Bernard Huet)라는 석학이었습니다. 자크 뤼캉(Jacques Lucan)이 현대 건축을 가르치셨고, 또 미술을 가르쳤던 분들도 하나같이 역사에 남을 만한 대가들이셨어요. 그분들을 통해 역사관을 정립할 수 있었어요. 현대 건축에서는 자크 뤼캉 선생님이 계몽주의가 어떻게 나왔는지, 르코르뷔지에가 어떻게 나왔는지 그리고 건축의 규율은 어떻게 이어졌는지 일 년 동안 수업을 해주셨어요. 그 수업이 저에게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리고 현대미술과 건축과의 관계, 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것 같아요. 설계 스튜디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앙리 시리아니 선생님이었죠. 명료한 것들을 가르쳐 주셨어요. 바닥이 뭐고, 벽이 뭐고, 천장이 뭔지, 하나하나 요소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서 시작해, 건축가의 도덕성, 사회적인 책무에 관한 문제, 집합 주거와 사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가치들, 건축이 무엇인가를 넘어서서 철학적인 문제까지도 질문을 던지셨어요. 제가 보기에 그분은 사회주의자 내지는 공산주의자였어요. 그래서 사회에서 공유하는 부분에 대해서, 공간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주셨어요.   유학 생활을 통해서 얻은 것과 그에 대한 태도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말씀드렸듯이 저는 학교에서 뛰어나거나 건축을 아주 많이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주변에 좋은 환경을 만나서 지금 그런 가치를 알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도 ‘앎의 방법은 잊어버리는 것에 있다’라고 학생들에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생각을 철저히 했던 것 같아요. 앙리 시리아니 선생님께 그런 걸 배웠습니다. 또 아주 학습적인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우연히 미셸 카강이 한 건축물을 보게 됐어요. 파리의 고속도로변에 근사한 게 지어졌더라고요. ‘도대체 건축가가 누굴까?’해서 찾아보니 미셸 카강이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편지를 써서 ‘당신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했는데 답이 안 왔습니다. 전화해서 ‘왜 당신은 답을 안 주냐’고 했더니 지금 보자는 거예요. 일하고 싶어서 제가 작업한 걸 들고 갔죠. ‘그럼 내일부터 나와’ 그러는 거예요. 그분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장점을 아주 좋아했어요. 시리아니 선생님과 달리, 그 젊은 나이에 비례라든가, 형태에 훨씬 더 섬세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감동이었죠. 거기서 같이 일하면서 궁금했던 것들을 항상 메모하고 다녔어요. 밥 같이 먹을 때라든가 시간이 날 때마다 기회가 되면 수첩을 들고 항상 질문했어요. 좋았던 건 질문을 하면 시리아니 선생님이나 미셸 카강이나 아주 쉽고 진지하게 설명을 해줬어요. 미셸 카강과는 그 인연을 계속 이어왔는데, 불행하게도 한 1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굉장히 멋졌던 게 국가에서 1박 2일 동안 미셸 카강의 추모 행사를 해주더라고요. 미셸 카강의 부인이 초청하고 싶은 사람 리스트를 만들어서 저도 프랑스에서 초청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추모식에 가서 제가 30분 동안 추모사를 했어요.     진행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에서 이어집니다.    
Interview 신체 치수와 비례로 구현한 여백의 미, 건축가 정재헌 ② 한국에 들어와서 하신 첫 프로젝트가 양수리 두물머리주택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첫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지금까지 주택을 계속하게 된 이유가 이 첫 집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군위 오지에서 태어났다고 했잖아요. 그 동네에서 상경해 성공하신 분이 저에게 집 설계를 의뢰하셨어요. 우리 누님 친구분이시고 우리 집안과 알고 계시니까, 요즘 땅값으로 치면 몇십억 되는 거대한 집을 서른 살 초반 젊은 건축가에게 맡긴 거예요. 제가 알고 있었던 게 별로 없더라고요. 건축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보니까 작은, 실제 치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이게 맞을까? 틀릴까?’ 다시 공부했어요. 모든 것을 건축가 혼자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요.   두물머리주택은 경사진 땅을 다루면서 지형을 살린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땅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셨는지요?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가 유전적으로 그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아마 프랑스적인 사고를 했다면 르코르뷔지에처럼 필로티를 만들었겠죠. 그런데 유학 갔다 와서 처음에는 다들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들잖아요. 우리 강토를 바로 알려고 지방을 많이 다녔어요. 전통건축도 많이 보러 다니고 우리나라 땅의 색깔은 어떤지, 우리 식물은 어떤 게 있는지도 보고요. 전라도의 흙 색깔은 어떻고 경상도는 어떤지를 느끼고 배웠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산 능선의 풍경에 따라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예요. 예를 들어 경북의 북부 지방은 가파른데, 남부는 조금 느려집니다. 지형뿐만 아니라 거기에 지어진 집들을 보게 됐어요. 그래서 두물머리주택은 어떻게 하면 우리 환경에 적합한 집을 만들고 제가 습득했던 것을 담을 수 있을까 고민 했던 작업이었어요.     경사지를 그대로 살리면서 풍경이 그 높이에 따라서 다르게 설정된 것이 흥미로웠어요. 그랬죠. 처음에 택지 개발을 하면서 대지가 기단처럼 만들어져 있었어요. 그 기단을 없애고 땅의 흐름과 선을 살리려고 의뢰인을 설득했고, 쌓아놓은 기단을 다시 없앴습니다. 아마 어릴 때부터 내재한 그런 풍경, 경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나 싶어요. 지형에 대한 해석과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후 연이어서 했던 작업이 모두 다 경사지였어요. 평지였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정말 힘들었죠.   경사지에 짓는 집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고민한 것은 땅에 어떻게 강하게 반응할 것인가였어요. 예를 들어 르코르뷔지에의 경우 필로티로 집을 들어 버리잖아요. 지면은 지면이고 건축면은 따로 존재해요. 빌라 사보아나 라 투레트 수도원에서는 원래 지형과 다르게 추상화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건축을 보면 대지의 지형 변화에 따라 지면의 높이 또한 바뀝니다. 마당과 외부 공간이 같이 읽히는 거죠. 경사지의 가장 단순한 장점이라면 투영된 대지 면적보다 땅이 넓어진다는 거예요. 투영면적은 작은데 경사지의 실제 표면적은 큰 거죠. 그게 물리적인 부분이고요. 우리나라 경사지의 장점은 땅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건축과 잘 어울리게 만들어 주면 훨씬 더 색깔 있는, 그 땅에만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건축가는 땅에 대한 조력자예요. 제가 뭘 하는 게 아니고 이 땅이 뭘 원하는지 읽어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우선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땅이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려고 해요. 땅에 답이 있고 제가 그에 대한 응답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반면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요? 평지보다 경사지가 훨씬 더 성격이 강해요. 레벨을 맞춰서 만들어야 하니 설계는 분명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땅을 보면 도심에도 지형 기복이 심하잖아요, 평지로 만들어놔도 지형이 있습니다. 그 미세한 차이를 담는 것이 공간의 차이를 만들어요. 예를 들어, 도천 라일락집 같은 경우도 지형 변화에 따라 마당에 다양한 레벨을 만들어 주었어요. 훨씬 더 공간이 입체적이고 풍부하고 넓어 보이는 거죠. 위에서 아래로 본다든가, 아래채에서 위채를 본다든가 할 수 있어요. 아래채와 위채를 넣으면서 아래채를 낮추고 위채를 쓱 올리면 빛이 잘 들어오면서 개방감이 있어요. 물리적으로는 작지만, 실제 느끼는 공간은 훨씬 더 입체적으로 커 보이죠. 땅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어떻게 입체적으로 담아낼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두물머리주택은 저에게도 기억에 남는 작업입니다. 현장에 방문했을 때 ‘이 공간이 너무나 편안하다’라고 각인이 된 집이었어요. 그걸 표현할 방법이 없었는데, 건축가 로랑 살로몽이 교수님에 대한 비평에서 쓴 ‘수학적 감성’, ‘신체가 기억하는 비례’라는 단어를 보고 나니 분명해지더라고요. 저 역시 제가 생각했던 것을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공간을 이렇게 만들면 이렇게 되는구나.’ 반대로 ‘아, 이러면 안 되는구나’ 하는 것도 많이 느꼈어요. 어제 지어진 집이 가르침이고 스승입니다. 백색을 쓴 이유도 처음에는 다른 재료를 쓸 만한 경험이 없었어요. 요즘 젊은 건축가들도 백색으로 많이 마감하죠. 르코르뷔지에도 젊은 시절에 백색 건축을 했어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조형성이 잘 드러나기도 하고, 또 하나는 그만큼 축적된 경험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건축은 쌓는다든가, 디테일이라든가, 모듈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기 전에, 건축이 행해야 할 치수, 고려해야 할 삶에 대한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거기까지 손이 못 닿았던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그런 걸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두물머리주택을 하고 나니 ‘백색이 폼은 나는데 우리 환경에는 안 맞는구나,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어요. 다음 프로젝트인 전주 자운당 주택을 하면서 재료를 분명히 써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우리 땅에 맞는 물성(material)이 무엇이고, 무엇이 어울릴 것인가 하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명료했던 건 제가 알고 있던 지식과 경험했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던 것 같아요. 시리아니 선생이나 미셸 카강 선생에게 배운 비례나 감성적인 접근 그리고 내가 살아왔던 땅에 대한 경험을 총체적으로 집합한 게 그 첫 작업이 아닌가 싶어요.   이후 주택 작업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1년에 한 채씩 꾸준히 집을 지으시면서 판교, 동백 등 다양한 주택 단지들을 접하셨을 텐데요. 교수님이 보시기에 주택 단지들에서 느꼈던 특성과 아쉬움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불행한 건 동백이든 판교든 전주든, 땅을 깎은 다음에 동일한 방법으로 확 눌러버리는 거예요. 지구 단위 계획을 만들어서 담장의 유무 같은 지침도 만들잖아요. 그럼 필지는 필지, 건물은 건물, 길은 길, 하천은 하천, 각각 개별적 개체로 읽히는 거예요. 하나로 통합이 되지 않는 거죠. 집, 도로, 개울, 상점이 다 따로 노는 부분을 고민해 줬으면 좋겠어요. 또 도시계획에서 땅을 만들 때는 모든 곳이 똑같습니다. 판교에서도 본 걸 전주에서도 봐요.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하는 게 참 안타까워요. 그래도 최근에 파주의 주택지는 지형을 조금 살리고 언덕 그대로 대지선을 땅에 맞춘다고 해요. 진화된 부분이 있더라고요. 지구 단위 도시계획은 안 바뀌는데 이런 부분이 바뀌고 있구나 싶어서 참 좋았습니다.   주택 단지들이 바뀌면서 거기에 대응하는 교수님의 설계도 바뀌었나요? 우리나라 주택 단지는 땅이 가지고 있는 큰 속성이 없어요. 70평에서 80평, 외곽으로 나가면 120평 정도 면적만 차이 날 뿐 똑같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부분이 필지를 잘랐을 때 땅의 성격이 없다는 거예요. 그곳에 어떤 건물이 지어지면 좋을지에 대해 탐구를 하고 필지를 배분했으면 좋겠어요.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신도시 계획을 했던 일산, 분당, 판교 등등 기존 주택 단지의 필지 나누기에 대한 피드백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필지를 어떤 방법으로 나누고 길을 어떻게 내야 하는 건지 고민해야 하는데, 과거에 했던 것이 그냥 정답이 돼버려요. 주택이 인기 있으니까 전국적으로 전파가 됩니다. 예를 들어 세종문화회관은 계단을 통해 2층에서 접근해 들어가잖아요. 사실 다른 목적 때문에 그렇게 지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마치 그것이 원형인 것처럼 받아들여요. 할 수 없이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정답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죠.  도시계획에서도 필지 나누기와 같은 부분이 조금 변화되었으면 좋겠어요. 개별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고, 크기도 다양했으면 좋겠죠. 판교가 대표적인데, 설계할 때마다 항상 어려웠어요. 땅이 꼭 한 평 모자라요. 동백주택을 설계할 때도 한 30cm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죠. 신도시 주택 단지에 설계할 때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이에요. 또 하나는 공개 공지와 같은 규정으로 토지 낭비가 심합니다. 어떤 토지는 도로율이 너무 높아요. 도로율이 높다 보니 집이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땅을 도로로 다 잘라버렸어요. 그러니 단지에 깊이가 없어요.   주택에서 늘 진입부에 깊이감 있는 공간을 만드시는데요. 동네와 접점을 만드는 ‘이웃 만들기’라는 표현도 쓰셨습니다. 집의 진입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늘 이웃의 중요성, 동네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파트에 살다 보니까 잘 모르지만, 사실 집에 접근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집으로 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정작 집에 들어가면 집의 모습은 없어져요. 그리고 보이는 건 이웃이죠. 동네가 중요한 것은 내가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떤 방법으로 집에 가느냐, 어떤 풍경을 보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리조트도 똑같을 거예요. 경험하는 과정이 굉장히 중요해요. 아파트처럼 문을 열자마자 바로 집이 나오는 게 아니라 깊이 있는 집을 만드는 것, 과정적 공간 다음에 전이가 일어나고 집 안에 들어가면 심리적으로 아주 편안할 거라는 거죠. 어떻게 하면 한 장면에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공간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인가. 길을 바로 가는 게 아니고 길게 가도록 만들어 주는 거죠.   두물머리주택부터 시작해 여러 주택을 진행하면서 중간 영역도 진화한 것 같습니다. 두물머리 주택은 집 안에서의 이동 경로나 시점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내외부 공간의 관계가 더 선명해 보입니다. 집의 전이 공간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보기에 서양에서 집은 어떤 의미에서 빌라 사보아처럼 오브제 중심적이에요. 우리나라의 전통건축은 집의 형상이 없습니다. 한옥에서 존재하는 건 비어 있는 것들이에요. 서양화와 동양화의 가장 다른 면이라면, 서양은 오일로, 동양화는 잉크로 그린다는 점이에요. 흰색을 칠하려면 비워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중간 영역이 동양화의 그림처럼 근경과 중경, 원경을 표현할 때 그 사이의 비어 있는 흰색과 같다고 생각해요. 집 양쪽에 비어 있는 공간 그 자체는 집의 중심이 됩니다. 집 안으로도 통합돼서 느껴지고 외부에서도 통합되어서 아주 풍요롭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에요. 과거에 집을 지을 때는 사람들이 실내 면적에 대해 배고파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밥을 먹고 나서 배가 조금 부른 상태랄까요. 그런 표현이 좀 우습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아파트 발코니를 확장했잖아요. 몇 평형이라는 관념이 있어서 넓은 게 좋은 거였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테라스 하우스가 더 선호된다고 해요. 아파트도 변하는 거죠. 인식의 변화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실내 면적보다는 다양한 외부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한 거라고 이야기해요. 요즘은 그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단독주택에서 다양한 변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고 내부도 외부도 아닌 중간 영역이 집을 풍요롭게 만들지 않을까 생각해요.   동시에 집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시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초기 작업부터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게 사용자에 대한 배려와 애정 같아요. 하나하나 배려하고 친절하게 고려된 치수라든가 공간을 상상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키에 대한 친절과 배려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용자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나이 들었을 때는 어떨지,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거죠.    저는 기능적인 것보다 디테일을 하나하나 손수 만들어가는 편인 것 같아요. 알바 알토의 집이 그렇거든요. 알바 알토의 집은 그냥 보면 너무 평범한데, 가만히 뜯어서 보면 ‘아, 어떻게 이렇게 지었나?’ 싶습니다. 폼 잡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집을 짓기 때문에 그런 배려가 더 크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나라도 사실 여름에 몹시 덥고 겨울에는 무진장 춥습니다. 그러면 그에 대해 어떤 배려를 해줄 것인지, 볕도 들어오면서 환기도 되면서, 어떤 생활을 할 것인지, 물의 그 시원한 느낌은 어떻게 만들어 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죠. 그런 고민이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경력이 쌓이면서 깊어지는 것 같아요.   교수님이 설계한 공간에서 복도와 계단은 의미심장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작은 공간이지만 그 사이를 경험하게 하는 장치가 항상 있어요. 복도와 계단을 어떻게 고려해 쓰시는지요. 거창하게 말하면 건축은 4차원의 작업인 것 같아요. 만약 시간성이 표현되지 않는다면 건축은 고정되어 버릴 거예요. 결국, 어떻게 체험하느냐의 그 시간, 내가 걸어가는 시간과 움직임 속에서 공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하는 작업에서는 대문과 같은 공간을 풍요롭게 만들어요. 전이 공간을 어떻게 느끼게 할까, 어떻게 비를 안 맞게 할까, 마당에 들어간 뒤 현관에 갈 때는 어떤 전이를 일어나게 할까를 생각해요. 말씀하신 계단과 복도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전이가 가장 강력한 부분이 현관인 것 같아요. 서양에서는 신발을 안 벗습니다. 우리나라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행위가 일어나고 많은 수납공간이 필요해요. 그래서 그런 공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강한 전이가 일어나죠. 계단이라는 건 몸의 중력을 이기는 것이에요. 다리에 힘이 드는 거죠. 전이는 사람을 상쾌하게 만들어 줍니다. 전이를 경험하고 나면 기대치가 올라가서 그다음 공간에서도 쉽고 편하게 지내게 돼요. 저는 집의 계단을 만들 때 천정이 낮지 않으면서 어떻게 단수를 줄일까 고민합니다. 일상에서 단수가 많으면 불편해지거든요.   복도의 경우, 지나갈 때 풍경의 변화가 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움직이면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집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전이되는 공간을 경험하는 것이 현대 건축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고, 그것이 곧 우리나라 전통건축이 가지고 있었던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설계한 집은 모두 홑집이라고 하셨어요. 왜 홑집을 만들고자 하셨는지요? 일단 겹집이면 통풍이 힘들고 햇볕을 잘 받으려면 집이 길어야 해요. 우리나라 전통주거에서 겨울에 햇볕을 잘 받으려면 집을 길게 만드는 환경적인 이유가 있는 것과 같아요. 두 번째로, 우리나라 전통주거는 대부분 홑집이에요. 한옥을 보면 비어 있는 것들을 담기 위해 집채가 외곽으로 나오고 마당을 안에 품고 있어서 그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외부 환경에 대해 내향적이고 거주성을 높이려면 집이 마당으로 열려 있어야 해서 자연스럽게 선형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기다란 집을 환경에 따라서 접으면 컨트롤이 잘 됩니다. 집을 만들면서 크게 느꼈던 우리나라 집에 매력이 있다는 거예요. 창덕궁 연경당에 가보면 집이 아주 얇아요. 앞에서 뒤를 볼 때의 그 투과성은 굉장히 강력한 것 같아요. 거꾸로 이야기하면 르코르뷔지에가 썼던 투명성과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투명성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르코르뷔지에와 같은 근대 건축가들이 사용했던 투명성은 물질에 의한 투명성인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건축은 ‘불투명성에 의한 투명성’의 표현입니다. 채와 채 사이가 대각선으로 열린다든가 하는 것이죠. 불투명 속에서 투명성을 표현하기 때문에 깊이가 있고 훨씬 더 편합니다. 제가 요즘 그런 접근을 하고 있어요. 채가 있고 채 뒤로 돌아간다든가 하는 접근이 우리 건축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고 그것이 투명성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꾸준히 주택 작업을 해오면서 주거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도 느끼실 것 같아요. 제가 첫 집을 한 지 20년이 넘도록 매년 집을 설계하고 있어요. 흥미로운 것은, 제가 실험하면서 업데이트하고 바뀌는 것도 있지만 의뢰인들이 요구하는 것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의뢰인들은 제가 한 작업이 좋아서 찾아오는 분들이 99.9% 예요. 그분들이 먼저 작업을 보고 경험하고 오는 거죠. 또 집이 변화하고 있어요. 방이나 거실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보조 공간(servant space)이 커집니다. 루이스 칸이 주 공간(served space)과 보조 공간(servant space)을 구분하잖아요. 방과 거실이 작동하기 위해서 보조해야 하는 공간이 생기는 거죠.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은 방이 줄어들고 현관과 화장실, 드레싱룸, 창고, 부엌과 같은 주 기능을 위한 보조 공간이 커지는 것입니다. 집이 편안하려면 우리나라 아파트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술관의 경우 전용 면적을 줄이고 공용 면적을 늘리듯이 말이죠. 두 번째는 같은 이유로 면적에 대한 갈증은 사라진 것 같아요. “우리는 몇 자에 몇 자 방이야, 몇 평형이야.” 하는 게 없어졌어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거죠. 또 기본적인 구성을 살펴보면, 거실이 많이 축소되고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부엌이 굉장히 커지고 바깥으로 나와서 아일랜드 부엌에 식탁을 놓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집에서 음식을 할 때 서양 집과 다른 점이 있어요. 서양의 경우, 장을 본 뒤 부엌에서 바로 요리를 합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내놓는 시간이 30분이면 돼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몇 년이 걸립니다. 몇 년 된 묵은지와 장을 다 보관해야 하고 김치 같은 저장 음식이 많잖아요. 그리고 한식 요리는 재료를 다 자른 다음에 요리하니까 준비 시간이 오래 걸려요. 즉, 저장 음식이 많고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서양 집의 주방보다 훨씬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팬트리와 다용도실도 필요하고요. 그 부분이 큰 차이인 것 같아요. 그래서 주방 공간에 공을 들이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아파트에 살다가 주택으로 오면 가장 크게 바뀌는 것이 큰 주방의 큰 식탁에서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것이라고 해요.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하더라고요.   반대로 우리가 삶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나 집에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주택에서 중요한 부분이 배려도 있지만, 건축적인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느낀 것이 있어요. 요즘 편리하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기능적이고 편리한 집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파트를 연상할 것 같아요. 인간이 손을 안 움직여도 작동되는 곳이죠.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손 하나만 까딱해도 불이 저절로 켜지는 곳이 과연 집일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가끔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주택과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진 주택이 큰 차이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로마에 가보니까 별 차이가 없더라고요. 2천 년 전 집에도 제가 살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삶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이 달나라에 가서 살지 않는 한 지구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조건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문화가 급변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편리함 너머에 있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의도적으로 편리함을 억제한다는 뜻에서 아파트의 대척점에 있는 ‘비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편리함을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거죠. 결혼하지 않는 것을 요즘 ‘비혼’이라고 말하듯이,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택하는 것을 ‘비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이 집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계절을 느끼고, 바람을 느끼고, 환경을 경험하고, 땅 냄새를 맡고, 공기를 맡는 것이 영구적으로 변치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주상복합을 좋아하는 분들이나 바쁜 삶을 사는 분들은 또 아파트에 사는 것이 맞습니다. 저는 아파트와 단독주택이 분명히 다를 거라고 봐요. 단독주택의 ‘비편함’이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에요. 젊고 바쁜 맞벌이 부부들은 편리한 곳에 살아야 하겠죠. 다만 단독주택을 즐기겠다면 ‘비편함’이 있는 집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진행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③에서 이어집니다.  
Interview 신체 치수와 비례로 구현한 여백의 미, 건축가 정재헌 ③ 주거뿐만 아니라 오륙도 가원 레스토랑과 같은 상업 공간이나 큰 규모의 프로젝트들도 하셨는데요. 규모가 큰 건물에서도 전이 공간이 많이 보입니다. 오륙도 가원 레스토랑의 경우는 아주 단순합니다. 단지 여러 명이 쓰는 조금 큰 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집에 진입해서 마당에 들어서면 고요합니다. 집은 마당으로 열려 있고 정면은 바다로 열려 있고, 그 너머의 산만한 풍경은 아래채가 가려줘요. 상업 공간이든 일반 집이든 인간이 좋아하는 건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호시담 커피숍은 내향적으로 고요하게 만들었어요. 소쇄원이나 다른 집에서 물길 따라 올라가면 전망이 조금씩 보이던 경험이 이곳에서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다들 좋아하더라고요. 보통 커피숍에서는 전망을 ‘짠’하고 보여주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의 오감을 더 경험하게 만드는 거예요. 오륙도 가원 레스토랑처럼요.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서 물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부는 걸 사람들이 더 좋아하더라고요. 사람이란 다 똑같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경험하고 싶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제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감정을 느끼게 만들면 좋은 공간이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저는 청계산 아래 텃밭에서 일하고 나서 산에 올라가 막걸리에 김밥 먹으면서 발 담그고 있는 걸 가장 좋아하거든요. 그저 비주얼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것을 만들어주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호시담은 많은 사랑을 받는 장소입니다. 호시담이야말로 내향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시퀀스를 보여주는 장치가 많은 것 같아요.   호시담에는 커피숍과 펜션이 있습니다. 펜션의 경우 땅이 크지는 않았어요. 가족들과 단독주택에 살고 싶지만, 아파트에 살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한 가정이 외부 공간을 오롯이 느끼면서 아빠와 엄마, 아이들이 같이 오손도손 이야기할 수 있는 가정의 모습을 상상했어요. 단독주택은 많은 이들의 로망이잖아요. 그 꿈을 하루라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호시담 커피숍에서 전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온 사람들에 대한 배려였어요. 전망만 보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분위기에서 상대와 친밀한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요즘은 상대에게 별로 배려를 안 하잖아요. 밥 먹으면서 서로 핸드폰 들고 이야기하는 게 저는 참 이해가 안 돼요. 이 장소에서는 상대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최근에 완성된 나무호텔은 도심형 호텔입니다. 숙박시설에서는 집과는 다른 경험을 기대하는데, 친숙하면서도 호텔 같지 않은 공간을 보여주고 있어요. 어떤 경험을 의도하셨는지, 숙박시설이 갖춰야 할 조건으로 고려하신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좋은 질문이에요. 호텔에서 항상 싫었던 게 있어요. 바닷가 호텔에 가면 방은 무척 좋은데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바다 전망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바다를 한 3분 보고 나면 할 게 없어요. 차라리 백사장에 나가는 게 좋죠. 호텔에서는 잠자는 것 외에 경험할 수 있는 다른 요소가 없는 셈이에요. 그 많은 시간 동안 갇혀 있는 듯했어요. 그래서 주택처럼 생활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문을 열어놓고 바깥에 나갈 수 있게 만들어서 집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경험을 만들고자 했어요. 다만 주택과 달리 어려웠던 것은 각 객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것이었어요. 호텔에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묵기 때문에, 마당에서 서로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섬세한 배려가 필요했습니다. 바깥쪽에 나무를 심어서 시야가 마당까지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든가, 마당을 서로 엇갈리게 한다든가 여러 가지를 고민했어요. 그래서 모든 유닛이 달라요. 옥상에 있는 유닛과 중간 유닛, 저층부 유닛이 달라서 각 방이 지닌 얼굴도 다 다릅니다. 각 공간과 위치가 가지고 있는 매력, 사선 제한으로 만들어진 볼륨의 매력, 또한 전면과 후면의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어요. 호텔에 집 10채는 집어넣은 것 같아요.     초기작인 이인디자인사옥도 있지만 최근 디파이사옥은 완전히 다른 접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업무 공간을 어떻게 해석하셨는지, 고려하신 부분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디파이라는 회사는 주로 우리나라 대기업의 웹사이트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이곳에서 시작해 사업을 늘려가고 있어요. 흥미로운 건 기업에서 먼저 제가 했던 작업을 찾아보고 설계를 의뢰했다는 점이에요.   지금도 저는 고층건물과 오피스 같은 작업에 익숙하지 않은데, 요즘 클라이언트는 달라진 것 같아요. 과거에는 오피스나 고층건물 작업을 해보았는지 아닌지 경험치를 중요시한 반면, 요즘에는 자체적으로 공간과 건축에 관한 생각을 가지고 자료 조사를 하고 제가 했던 강연을 포함한 모든 작업을 보고 오시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클라이언트도 자기 취향이 선명해졌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디파이 회사도 본인들의 사업을 가장 잘 표현해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의뢰를 하셨어요.   집을 보고 사옥 설계를 의뢰했다는 것이 흥미로워요. 네, 요즘 대부분 제가 설계한 집을 보고 오세요. 최근에 고층건물도 설계하게 되었는데, 디파이 사옥과 접근이 비슷해요. 저는 테헤란로 오피스에서 근무해본 적이 있어요. 답답해서 못 있겠더라고요. 요즘 오피스는 아주 작은 문을 살짝 열어놓고 일해야 하는 곳이죠. 그런데 디파이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보니 영혼이 자유롭더라고요. 출퇴근 시간도 자유롭습니다. 또 30대 이상 되는 사람이 없었어요. 거의 20대이거나 나이 든 사람도 30대 중반 정도밖에 없고, 외국인도 있습니다. 디자인 회사의 업무수행 방식을 보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오피스에서 자유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어디든 돌아다니고, 그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면 장소마다 색을 달리해서 각각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거죠.   또 그곳은 전용 주거 지역이어서 주택지가 많이 있다가 최근 하나씩 바뀌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용적률과 건폐율이 제한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지하 공간을 극대화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지하 공간 같지 않게 자연 채광이 되게 하고, 층고를 높이고, 풍경을 만들어줘야 했어요. 사람이 살 수 있으려면 빛이 잘 들고 환기가 잘 돼야 하거든요.  지하 공간의 매력은 매우 고요하다는 거예요. 단점은 시야가 막혀 있다는 거죠. 집중력이 높은 공간이니 환기를 잘한다면 지하 공간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살릴 수 있습니다. 1층의 매력은 접근성이 좋고 땅에 면해 있다는 점입니다. 2층과 3층, 그리고 옥상이 가지고 있는 매력도 각기 달라요. 옥상은 하늘로 열려 있어서 파티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작업하다가 이곳에 와서 쉴 수도 있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창의적인 회사의 경우지만 일반적인 사무공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보시는지요? 크레이티브 하다는 것은 자유로운 것입니다. 시간을 아무리 쏟는다고 해서 작업 능률이 오르지 않기 때문에 집중도가 중요해요. 이 시대의 업무는 많은 부분에서 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모든 작업을 손으로 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을 투입해야 했어요. 지금은 컴퓨터가 있잖아요. 떠오르는 아이디어로 생각의 차이를 순도 있게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죠. 신나서 집중할 수 있어야 해요. 요즘 업무시설에서는 그게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바뀔 것 같고요. 또 하나 예상되는 변화는 업무시설을 다 모아놓을 것 같지 않다는 거예요. 코로나 19가 우리 사회를 확 앞당겼습니다. 저 역시 오늘도 교수회의를 제 사무실에서 온라인으로 했어요. 이동도 없고 공간적인 제한도 없어서 너무 편한 거예요. 대기업도 앞으로 한군데에 모아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떠나 작동할 거예요. 공간의 장소성을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본인이 원하는 좋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것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똑같다는 거예요. 원할 때 창문을 열 수 있고, 바람 쐬러 바깥에 나갈 수 있고, 외기를 면할 수 있고, 이동하면서 풍경이 만들어지는 것을 원하죠. 그래서 오피스 역시 집처럼 느낄 수 있도록 휴먼 스케일로 만드는 시도를 했습니다. ‘내가 사무실을 쓴다면 어떨지’를 항상 생각해요. 호텔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호텔에서 느꼈던 것과 아쉬웠던 것들을 반영해서 표현하려고 해요.   적극적인 외부 공간의 도입은 주변 환경에 대한 보호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디파이사옥의 공간은 어떻게 구성하셨나요? 대지 주변에 오피스텔이 촘촘히 붙어 있어서 서로가 훤히 보이는 아주 부담되는 환경이에요. 그래서 비어 있는 공간과 두꺼운 벽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주변 건물이 밀도 높게 겹겹이 붙어 있을 때 완충 공간을 어떻게 편안하게 만들까 하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었어요. 디파이사옥은 거꾸로 외곽에 비어 있는 상자를 만들고 그 외곽선을 최대한 대지 경계에 맞춰서 안에 프로그램을 넣었습니다. 비어 있는 공간이 거꾸로 내부에 침투해요. 빈 공간을 만들고 층마다 각각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역전된 경우라고 보면 되죠.   결과적으로 외부 공간에 대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죠? 그렇죠. 외부 공간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실제로 보면 테라스 하우스처럼 되어 있어요. 각층에서 테라스로 나갈 수 있도록 한 거죠. 외부와의 접촉을 어떻게 늘리느냐가 중요해요. 도시의 밀도가 있고 외관도 신경 써야 해서 컨텍스트에 맞춰서 껍질을 만들어준 거예요. 두 개의 껍질이 있고 안에 콘텐츠가 들어가 있는데 대부분은 비어 있죠.   절대적으로 수용해야 할 인원이 있었나요? 수용해야 할 면적이나 인원이 있었기 때문에 지하를 더 작업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어요. 말씀드렸듯이 지하에 들어갔을 때 채광이 잘 되면 고요하게 느껴집니다. 작업할 때 집중도가 올라가죠. 환기와 채광 같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외곽 양쪽 끝단으로 빛이 들어가게 했어요. 그리고 식물을 심어서 빛이 비치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층고는 4.5 m 정도로 높게 만들어서 지하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했어요.   디바인-1주택은 기존 집보다 규모가 크지만, 역시 내외부 공간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고려해 만든 진입부가 인상적이에요.    기본적으로 판교는 땅에 맞춰서 평평하게 택지 개발 작업을 진행했고, 디바인은 타운하우스처럼 조성되어 있어요. 원래 집합적으로 계획되었다가 시행사가 구입해 필지를 나눠 땅을 팔았어요. 도시 계획상의 필지를 형질 변경해 나누면서 아쉬운 점이 있죠. 완만한 사면의 땅에 인위적으로 4m의 장벽을 만든 거예요. 마치 성벽처럼 느껴졌어요. 디바인 전체 단지는 70세대이고 단지 입구는 딱 두 군데입니다. 우연히 디바인에서 세 필지를 설계하게 되었는데, 디바인의 입구 두 개 중에 서쪽에 있는 곳이 처음에 설계한 것입니다. 몇 달 후, 건너편 필지에 두 번째 집을 설계하게 되었어요. 마치 성문의 양쪽을 지지하는 것처럼 되었죠. 어려웠던 것은 300m의 거대한 장벽 위에 건물을 올려야 하는 것이었어요. 또 다른 어려움은 지면과 1층의 높이 차이가 4m나 나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밟고 있는 집 같지 않았어요. 마당의 레벨이 위에 있다 보니까 기단 위에 있는 집이 되었죠.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도로 레벨에서 들어가서 어떻게 집까지 편안하게 도달할 것인가가 최고의 숙제였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걸어 다니지 않고 차로 집에 들어간다고 가정한 듯해요. 동네를 생각했을 때는 집 바깥에 나오기도 하면서 마을의 얼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집이 안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동네의 얼개를 만들어주는 것도 큰 숙제였는데 규정된 전면은 건드릴 수 없었어요. 땅을 뒤편으로 과감히 후퇴시켜 도로 레벨에서 접근하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위해 최소한의 땅을 내주고 나무를 심어서 강한 밀도를 완충시켰어요. 이웃을 잘 만들고 주변 환경이 좋아야 당신이 가장 혜택을 받는다고 의뢰인들을 설득했죠.   디바인-1주택은 단순한 매스 구성이면서 수평적인 선이 인상적입니다.   이 집이 다른 집들에 비해 한 층이 낮아요. 면적이 충분했어요. 주택은 수직으로 만들면 계단을 통해 이동해야 해서 불편해요. 편안함을 주는 것이 주택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앞서 배려에 대해 말씀드렸듯이 집에 수직 동선이 많으면 잘 사용하지 않게 돼요. 계단 위에 있는 곳은 잘 가지 않게 되죠. 그래서 수평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극대화했어요. 디바인-1의 건너편 집을 비슷한 시기에 설계하고 준공했는데, 두 집 모두 수평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해서 이동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위 공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위층에는 침실 영역을 주로 놓고 1층에는 거실과 식당 같은 낮의 공간을 놓았습니다. 낮에는 1층에서 편하게 수평으로 이동하고 밤에 주무실 때만 올라가게 했어요. 수평적으로 거실, 식당과 외부 공간, 진입로 그리고 마당이 하나로 통합되도록 풀었습니다. 핵심 두 가지는 첫째, 집이 수평적으로 이동하는 것이었고 둘째, 고인돌처럼 큰 기단이 위에 놓여 있고 그 밑에 자유롭게 움직이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바라보는 마당과 쓰는 마당으로 구분하셨던 말도 인상적이었어요. 마당에 진입하는 방식에 따라 닫힌 마당과 열린 마당을 달라진다고 하셨는데요. 앞서 이야기했듯이, 한 층을 올라가야 집의 마당이 있어서 편안하게 마당까지 올라가게 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이곳의 집들은 주차장을 통해서 들어가는 걸 전제로 만든 것 같아요. 사람이 다니게 해놓은 것 같지는 않았죠. 그래서 차로 들어가서 접근하는 과정이지만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상징적인 접근로를 만들고, 자연 속을 걷듯 편안하게 집의 풍경을 보면서 올라가도록 만들어주고자 했어요.   주차장에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마당이 나오게 했어요. 내가 처음 맞이하는 공간이 어디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저는 집이 나를 환대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집에 빛이 들어오고 자연이 보여야 합니다. 잘못 설계하면 어두운 곳에서 집에 들어가요. 물론 엘리베이터로 연결되어 있지만, 엘리베이터를 쓰지 않고 기분 좋게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그래서 진입 레벨인 지하층에 마당을 만들어서, 마당을 끼고 돌아서 집에 올라가게 했습니다. 올라간 뒤에는 전면에 막힘이 없어서 프라이버시가 확보되죠. 이 집에서 시도했던 것은 물소리, 바람 소리 등 자연이 바로 집 옆에 있게 한 것이에요. 요즘 주택에서 쓰고 있는 요소인데요. 마감 재료를 각각 다르게 해서 사람이 움직이면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치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이 집의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이어서 꼬마를 생각하면서 물놀이 하는 것, 비 안 맞고 노는 것, 물소리와 바람 소리를 듣는 것 등을 많이 생각하면서 지었어요.   특별히 실내 공간의 구성에서 고려하신 점이 있나요? 말씀드렸지만 수평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예를 들면 1층은 음악실을 제외하고 다 열려서 통합되어 있어요. 이 집에서 근사한 부분이 바로 현관이에요. 여유가 느껴지도록 했어요. 현관은 처음 대면했을 때 사람을 편안하게 맞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에 대한 배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외부 공간과도 연결되고, 진입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많습니다. 집에 들어가서도 상황에 따라 집을 다양하게 면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현관에는 항상 여유롭게 앉을 수 있는 벤치를 놔둡니다. 서양에서는 신발을 신고 다니니까 불편하지 않지만 우리는 항상 신발을 갈아 신고, 무언가를 해야 하고,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옆에 놔야 해서 이 부분을 많이 고려했어요. 집에 진입하면서 빛을 어떻게 쓸지, 어떻게 프라이버시를 이용할지, 어느 쪽을 열어 통합할 것인지 고민해요.   새정이마을주택에서도 이곳 디바인-1주택에서도 욕실 옆에 작은 외부 공간을 두고 있는데요. 저는 집에서 화장실 공간을 가장 많이 신경 써요. 물론 다른 곳도 중요하지만 화장실 공간은 디테일과 시공에 더 신경을 많이 써요. 왜냐하면, 사람이 옷을 벗고 이 공간을 쓴다는 것은 자기 피부로 주변 환경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마감과 조명, 바닥의 미끌림, 쾌적성, 빛이 어떻게 들고 환기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섬세하게 신경 씁니다. 환기가 잘 되면서 바로 바깥까지 나갈 수 있게 하고 아무리 작더라도 꼭 식물을 둬서 더 쾌적하게 만들었어요. 디파인-1주택에도 안방 화장실 옆에 작은 정원이 하나 있습니다. 작은 공간 하나로 눈•비가 오는 계절을 느끼고 환기가 자연스럽게 되면서 시야는 안팎으로 향하지만 프라이버시는 보장되죠.   내외부 공간을 함께 엮어내는 방식이 집의 공간을 풍요롭게 하는군요. 앞서 말했듯 지금 설계하는 집에서 과거와 달라진 점을 보면 우리나라 집의 변천과 같아요. 첫째, 방의 개수가 줄었다는 것이고 둘째, 식당•주방이 굉장히 중요해져서 집의 중심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또 실내 면적 확보에 대한 욕심이 줄어들고 집에 대한 퀄리티와 다양성이 중요해졌어요. 자연스럽게 외부의 가장 좋은 공간을 비워놓고 그 공간이 실내 공간과 짝을 이루어서 같이 쓰일 수 있게 되었죠. 지난 5, 6년 전부터 시도했는데 사람들이 좋아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규정되지 않고 열려 있는 공간이 풍요로움을 주고 있지 않나 싶어요. 그림으로 치면 여백과 같아서 그것이 집의 모든 성격을 규정하고 많은 역할을 해요. 요즘 ‘집의 품격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요. 넓은 집이 품격을 만드는 건 아니에요. 작은 집이지만 현관을 여유롭게 만들거나, 집에 문 하나 열어 바로 들어가지 않고 아주 작은 마당이라도 거닐면서 외부 공간을 길게 늘어뜨려 경험하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공간을 아껴 써야 할 때와 조금 넉넉하게 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판교에 있는 친구네 집은 규모가 작지만 화장실이나 서번트 공간은 비슷합니다. 현관이나 화장실, 창고처럼 꼭 있어야 하는 부속 공간을 넉넉하게 했을 때 격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재료에도 그런 격이 있고요.   재료 역시 점점 더 풍부하게 사용되고 있는데요. 어떤 방식으로 재료를 사용하고자 하는지요. 재료를 쓸 때 중요한 부분이 있어요. 우리는 집을 너무 빨리 짓는 것 같습니다. 빨리 결과를 바라고요. 새마을 운동 이후 산업사회가 되면서 무엇이든 빨리 그리고 싸게, 크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어요. 이것을 덕목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정성이 들어가는 게 하나도 없어요. 뭐든지 세월이 지난 것은 버리고 정을 안 주는 거죠.  또 다른 특징은 빨리 망가지는 거예요. 지금부터 하나하나 정성 들여서 천천히 지으면 파괴되는 것도 천천히 파괴되어 더 좋지 않을까요? 사실 세월이 지나면서 더 좋아지는 것인데 우리가 너무 급하게 결과를 보기 위해서 달려온 것 같아요. 그러려면 산업재를 쓸 수밖에 없잖아요. 산업재는 빠르게, 값싸게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계속 나빠져 가요. 두물머리주택에서도 말했지만 백색 건축은 주기적으로 칠을 합니다. 칠을 하는 건물들은 칠한 상태가 항상 최고의 상태예요. 세월이 지나서 다시 칠을 하면 시간이 축적되지 않아요. 낡으면 완전히 새것으로 만드는 것이 안타깝더라고요. 또 하나는 초기에는 백색을 썼지만, 우리나라 환경과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르코르뷔지에가 백색을 쓰게 된 것도 지중해 기후의 스페인과 그리스를 여행하며 백색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뒤입니다. 그곳과 우리는 날씨의 질이 달랐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황사가 심하고 눈, 비가 강하게 오고 하늘이 투명하지 않아서 백색을 사용할 때 과연 우리 환경에서 버텨낼까 싶어요.     파주 주택의 경우 규모가 작지만 공간의 다양성이나 풍부함은 더 극대화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외부 공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셨나요? 의뢰인분들은 연세가 있으셨고 아드님과 같이 사셨습니다. 의뢰인이 저와 나이가 비슷했는데 ‘지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이가 더 들었을 때를 위해 집을 짓는 것’이라는 말씀을 했어요. 그래서 라이프 사이클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면서 풀어 갔습니다. 또, 집은 작지만 두 분이 연세 들었을 때 어떻게 살지, 외부 공간을 어떻게 이용할지, 지금은 게스트하우스지만 다음에 어떤 것으로 이용할지, 아들은 어떻게 공간을 쓸지 고민하다 보니, 하나의 건물이 세 채의 집처럼 자연스럽게 나누어졌어요. 채가 나뉘고 각각의 외부 공간이 생기면 공간이 분할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편안해집니다. 예를 들어,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지금처럼 대청마루가 있었을 때와 대청마루 없이 바로 붙여 놨을 때는 아주 다릅니다. 완충 공간이 있으니까요. 대청마루에서 놀 수도 있지만, 완충도 해주기 때문에 다목적인 공간이 됩니다. 하나의 이유가 아니라 10가지 이유에서 외부 공간을 만들죠. 재료를 쓰면서도 하나의 벽돌을 가지고 다양한 텍스처를 만들어냈어요. 빛이 어떻게 들여서 거주자가 어떻게 느꼈으면 좋겠는지 고민하죠. 오른쪽은 맨질맨질한 목재를 쓰고 왼쪽은 거친 재료를 쓰면 자연스럽게 우회전을 하지 않을까요? 하나하나의 심리적인 요소와 한 발 한 발 디딜 때의 감긱을 신경 썼습니다. 집에 어떻게 빛이 들어오는가, 뒷산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것도 있어요. 집이 외부에 바로 면하면 부담스러우니까 스크린 같은 것을 만들어 뒷산의 큰 규모를 줄여 집에서 만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집을 여러 채를 짓고 건축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작은 것들이 모여서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국, 바로 어제 했던 프로젝트가 저의 스승이죠. 제가 지었던 집을 자주 방문해서 무엇이 불편한지, 이 집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마치 아이를 지켜보듯 업데이트합니다. 의뢰인들과 만나서 그 집이 뭐가 좋고 나쁜지 얘기를 들으면 저도 느끼면서 경험합니다. 건축가 자신이 가장 잘 알잖아요. 두물머리주택에서 판교 주택까지 오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 큰 변화는 없지만 눈에 안 보이는 작은 차이가 진화한 게 아닐까 싶어요.   사옥이나 호텔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집이라고 할 때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하나의 역할만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보통 의뢰인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 출발이지만, 시대가 어떻게 변할지, 이 방식이 언제까지 버텨낼지 생각합니다. 집을 짓고 시공 감리를 할 때 시공자들에게 ‘이 집이 100년 갈까요?’라고 항상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건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높아져서 어느 정도 먹고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의식주의 첫 번째인 옷의 경우, 이제 아주 세련되게 잘 입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느껴요. 두 번째 음식 역시, 요즘 쉐프들이 음식을 정말 잘 만듭니다. 세 번째 해결해야 할 것이 집입니다. 집이 가장 느리게 바뀌겠죠.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10년 쓰다가 버리겠어요. 물건도 아닌 집인데 어떻게 소홀히 대할까요? 하나라도 제대로 지어서 후손들에게 남겨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끔 학생들에게 10년 이상 가지고 있는 물건이 있냐고 묻는데 잘 없어요. 우리는 계속 새것, 새로운 스타일을 소비합니다. 제가 보수적이라 그런지, 물건 하나를 가지더라도 오랜 친구처럼 같이 지내온 물건들이 저에게는 아주 소중해요. 그렇다면 집은 그보다 더 가치 있지 않을까요?   새정이마을주택 인터뷰 때 집에 대한 정의로 '기억의 저장고’라고 하신 게 기억에 남습니다. 집도 함께 나이 먹어가면서 그 안에 기억이 저장되고 살아온 과정이 축적되더라고요. 그게 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파트에서 유목민처럼 사는 것은 이제 그만둘 때도 된 것은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기억이 축적될 때, 문화가 축적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동네와 자기 자신, 자신의 공간을 사랑해야 하죠. 항상 학생들에게 자기 주변 정리를 먼저 하라고 말해요. 사무실에서도 직원들에게 디자인의 시작은 자기 주변을 먼저 정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앞으로의 젊은 세대는 아마 그런 태도와 취향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 젊은 의뢰인들이 대부분인데 본인이 원하는 바가 아주 명료합니다.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죠. 예전에는 제가 알아서 의뢰인의 집을 지었지만, 요즘은 의뢰인들에게 집에 대한 글을 6장씩 써옵니다. 건축에 관한 생각이 명료하고 지식도 높더라고요. 책도 많이 읽어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래 세대에는 좋은 건축물이 만들어질 것으로 생각해요. OH   진행 임진영 사진 이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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