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용산과 용산공원, 바로 읽기

안창모

2022년 10월 10일 4:00PM
* 유아 동반 불가능 프로그램
사진_안창모
사진_안창모

1904년 우리 근대사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있었다.러일전쟁!
그 후, 용산 신시가지가 만들어졌다.

용산 신시가지가 만들어진 직후 만들어진 지도에는 용산 신시가지의 중심에 용산역이 있지만, 용산 신시가지의 존재 이유는 용산병영 지원에 있었다. 도시와 함께 또는 도시의 한편에 병영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병영을 만들면서 병영을 위한 도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용산 신시가지가 만들어졌을 당시에 1900년에 건설된 한강철교가 있었고, 현재의 한강로와 후암로가 신시가지와 함께 만들어졌지만, 모든 길은 일본군 병영을 위해 용도가 바뀌고 새로 만들어졌다.

경인철도가 처음 놓였을 때, 용산역은 서측의 한인 마을(용산전자상가 쪽)을 향했지만, 신시가지 조성 이후 용산역은 현재와 같이 동쪽으로 돌아서 앉았다. 그리고 용산역에서 두 갈래로 뻗친 방사형 도로의 한 축은 조선 총독 용산관저로 이어졌고, 또 다른 한 도로는 일본군 병영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방사형 도로의 원점으로 이어졌다.

새로 한강로와 후암로가 개설되었지만, 남대문 밖에서 시작되어 한강과 만나는 곳에서 멈춘 한강로보다, 남산에서 일본군 병영으로 연결되는 후암로가 더 중요했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용산병영이 만들어진 지 100년이 훌쩍 넘어섰고, 그 시간 대부분은 우리가 아닌 남들의 땅이었다. 해방 후 용산이 우리에게 돌아왔지만, 일군병영은 미군이 사용했고, 미군이 물리적으로 점유한 공간 이외의 땅은 미군을 위해 존재했고, 군납상권이 형성되었으며, 용산역은 입영열차가 떠나는 곳이었다.

변화는 88서울올림픽 이후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까지 용산 미군기지를 돌려받기로 했고, 그 첫 조치가 미8군이 사용하던 골프장을 돌려받아 시민공원(현 용산가족공원과 국립박물관 터)을 조성하기로 하면서다. 국방부가 사용하던 땅에는 전쟁기념관도 지어졌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용산 미군기지의 반환이 가시화되었고, 공원 조성을 위한 큰 계획이 수립되고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용산기지 반환과 비전 그리고 공원화 계획 등 많은 뉴스가 쏟아졌지만, 100여 년 만에 시민의 품에 돌아온 용산기지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해 그 실체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대한민국 건축주간+오픈하우스서울 강연에서는 용산 신시가지의 형성에서 오늘에 이르는 과정 전체를 조명하고, 구체적으로 용산과 용산기지가 가진 역사성과 장소성의 실체를 살펴보고 미래 성장의 동력을 지닌 용산과 어떻게 함께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글, 사진 안창모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사회사와 기술사로서의 근대건축 역사를 연구하며 역사문화환경 보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현대건축 50년』, 『덕수궁』, 『평양건축가이드북』(독어/영어, 공저) 등이 있고, 2014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에서 서울과 평양의 도시와 건축을 비교 전시한 한국관의 공동큐레이터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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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TURE 용산과 용산공원, 바로 읽기, 안창모 2022년 10월 10일 4:00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