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중성적인 모더니즘의 질서 ①

건축가 이성관          

‘건축의 날’ 동탑산업훈장을 받으신 소감이 듣고 싶습니다.
겸손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수상하게 되면 늘 ‘나보다 더 나은 분이 많은데 왜 내가 받았을까?’ 이 생각이 먼저 들어요. 고맙고 영광으로 생각하지요.
 
수상과 함께 용산공원 부분개방부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에서 그동안 직접 찍으셨던 건축가들의 인물 사진을 전시하셨어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의 건축 환경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아직은 자리 잡히기 전이라고 봐요. 그래서 같이 힘듦을 나누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료 건축가들, 선배들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면서 고마움과 동료 의식을 느껴요. 이 척박한 풍토에서 용케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늘 경외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격변기에 나도 이렇게 같이 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을 한번 되짚어보고 나누고 싶다는 가벼운 뜻이죠.  
건축물은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볼 기회가 있지만, 이런 기록은 대부분 10여 년 전에 내가 찍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궤적이에요. 그 부분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 시작한 겁니다.

건축인들의 자화상을 기록하셨네요.
그런 거죠. 그 당시에 수시로 찍어 놓은 것들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어서 보면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그런 분의 얼굴을 전시장에서 만나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1948년에 부산에서 태어나셨어요.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서 자라신 건데요. 유년 시절의 부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나이가 들수록 과거 가슴에 묻혔던 이미지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요. 부산은 땅이 좁아서 우리는 주로 바다를 향한 경사지에 살았어요. 제한된 평지에는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었어요. 쉽게 얘기하면 오늘날 산동네하고 비슷해요. 거기서 남쪽을 보게 되면 역광이 되는데, 바다에 물결이 반짝반짝하는 풍경을 보면서 컸어요. 바다에 대한 로망, 그리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뒷산이 내가 살아온 큰 정서적인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 시절의 동네 골목은 지금과 달라서 제 또래 건축가들은 ‘그런 것은 못 잊어’ 라며 울컥하고 그래요.
 
옛날 도시 조직을 몸으로 체득하신 거네요.
특히 부산만 해도 서울에 비해 계량식 한옥, 특히 일본강점기 적산 가옥이 많았어요. 저도 적산 가옥에서 살았는데 일본적인 공간, 분위기, 척도가 무의식적으로 배어 있었죠. 시간만 나면 옛날에 살았던 동네를 습관적으로 가봐요. 큰 삼복도로가 나고 이미 변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적을 뒤적이는 마음으로 혼자 옛날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죠.

건축과는 어떻게 선택하셨나요?
과정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데, 기계과를 적어내서 고맙게도 떨어졌어요. 그 바람에 재수하게 되면서 건축과를 가게 됐어요. 보통 선배들이 와서 자기 과를 설명해 주고 그래요. 그때 서울대 건축학과 선배 한 분이 ‘그림 좀 잘 그리고 머리 똘똘하면 건축가가 딱이다’라고 해서 막연히 ‘내가 저기에 해당하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때 서울에 처음 올라오신 건가요? 서울에 대한 인상이 어떠셨나요?  
저는 서울의 모습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서울의 풍경이 영화 배경처럼 보였어요. 막연하게 서울이 더 세련되고 부산보다 격이 더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그 소중한 것들이 사라질 줄 몰랐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기록을 해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게 많아요. 그때만 해도 이문동에 가면 괜찮은 한옥들이 있었고, 을지로에도 소중한 마당이 있고 사람 사는 삶의 흔적들이 많았는데, 공장으로 변해서 마음이 짠하고 그랬어요.
 
저학년 때는 건축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4학년 2학기 이구 선생님이 강연을 들으면서 자극을 받았다고 하셨어요. 어떤 강연이었나요?
제가 68학번이에요. 그 당시에 건축에 관심은 있었는데, 건축 수업은 재미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구 선생님의 ‘건축 윤강’이라는 수업을 들었어요. 맨 마지막에 과제를 하나 내주셨는데, 36개의 그리드(격자)에 형태 구성을 하는 거였어요. 우리가 애를 써서 이것저것 다이나믹하게 구성했는데, 어느 날 보더니 독백 비슷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 수업을 7년간 했는데 단순한 덩어리 구성이 하나도 안 나온다.’고요. 가령 36이라면 3x4x3 큐브로 만드는 단순한 덩어리도 구성인데,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는 거죠. 또 그리드를 빈칸으로 두고 다 지하에 넣는 구성도 할 수 있는데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큰 자극을 받고 건축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유치원 숙제 같은 거였어요. 요즘 같으면 여러 정보에 대한 상호작용(interaction)이 있어서 충분히 역발상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충격이 컸어요. 무조건 저분 사무실에 가서 배워야겠다는 확신을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졸업 후 삼고초려 끝에 거기서 일하게 됐습니다.  

이구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구 선생님은 왕손이잖아요. 깔끔하신 분이었어요. 일본과 미 8군 일을 주로 했어요. 수시로 출장을 가서 우리와 대화할 기회는 사실 별로 없었어요. 바로 위 직속 선배인 고주석 씨가 있었는데, 그분과 이야기를 많이 하고 영향을 받았죠. 굉장히 똑똑하고 괜찮은 분이었어요.
 
고주석 선생님의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건축 태도에 영향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분위기가 그랬어요. 제가 졸업했을 때가 1972년 이후였는데 그 당시 세계적인 풍조가 논리, 합리, 공동 작업, 객관성 등이 중요한 가치로 대두될 때입니다. 작품에서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보다는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을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룹, 시스템 이런 말이 도입되고, 개인의 임의적인(arbitrary) 영감은 약간 감성에 의한 거라고 봤죠. 건축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객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 당시에는 마치 좋은 방법론을 채택해서 그 과정을 밟게 되면, 좋은 작품이 저절로 나오는 연금술 같은 방법론이 있을 거라는 게 세계적인 붐이었어요.
그런 측면에서 다들 ‘이런 식으로 될 수밖에 없지 않으냐’ 강요하는 식으로 자기 작품을 설명했어요.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라는 접근은 훨씬 뒤의 일이죠. 지형, 지질, 교통, 기능만으로 보면 다 낱개의 옳은 아이디어가 있잖아요. 그걸 오버랩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식이었죠.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거기엔 주관이 많이 개입하게 되고 모순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는 거죠.
 
이구 선생님 사무실에서 실무는 어떠셨나요?
미국 스타일이 많이 깔린 회사였어요. 그 당시 한 여덟 아홉 분의 선배들이 그곳에 계셨어요. 세 번이나 찾아가서 생떼를 쓰듯 들어가게 되었는데, 들어가서는 굉장히 좋아했죠. 그 착각 때문에 열심히 했는데, 대학원 들어가면서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는 정림건축에서 한 6년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보면 정림건축이 친정이고, 실제 작품을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곳이에요.

대학원에서 한국의 전통공간에 대한 논문을 쓰셨습니다. 전통 공간에는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었나요? 저는 서울에서 처음 전통 건축과 담장을 봤어요. 대학원을 다니면서 과제를 위해 현장 방문을 했는데, 성균관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의 담 높이가 내 키보다 좀 낮았어요. ‘폴짝 뛰어넘으면 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담을 만들었지?’ 궁금했어요. 그냥 선을 구획해놓은 것 같은데, 왜 이런 걸 설치했을까? 그러다가 담은 부수적인 도구일 뿐이고 구획이 필요할 때 줄로 끊는구나, 담이 있구나 생각하니, 마당으로 개념이 확장되더라고요. 유럽의 대공간과는 어떤 유사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을까 생각하니, 공간론으로 넘어가고요. 그 당시에 사찰과 전통건축을 많이 다녀보고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고 깨달은 게 과정적 공간이었어요. 진입의 프로세스를 깨우치고 나니 번번이 제 공간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더라고요.

정림건축에서 6년간 실무를 쌓으셨는데, 유학을 결심하게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버님이 교수였지만 저는 교수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건축 작품 하는 게 너무 재미있고 의미가 있었어요. 또 유학을 하려고 보니 제 학점이 b하고 c 중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시도도 해보지 않고 괜찮은 학교는 못 간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러다 한 10년쯤 지난 다음, 한 후배가 유학 간다고 바지런 떨 때 ‘선배님은 왜 유학 안 갑니까’ 하더라고요. 가고 싶지만 실은 내 학점이 그 모양이라서 못 간다고 했더니, 포트폴리오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오후에 미 문화원에 가서 미국에 있는 학교 30여 개 자료를 복사했어요. 최종 여섯 군데에 지원해서 사무실 꼬박 다니면서 6개월 만에 준비를 다 하고 가게 된 거죠.
 
컬럼비아대학교를 선택하셨나요?
그 당시 합격한 곳은 몇 군데 되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가 굉장히 좋은 선생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도시 자체가 어떤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비교할 바 없는 교육의 장소가 되지 않을까 싶었죠.
 
서구 건축의 한복판에 가셨는데 당시 건축 흐름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의 작품이 매거진 표지에 나오고 포스트모던의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같은 사람이 한참 활동하던 때죠. 나는 모더니즘에 속해 있던 사람인데 생뚱맞게 포스트모던을 맞닥뜨리니까 거부감도 있고 자기의 반성이 있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랬죠. 방어적이었어요.
제가 컬럼비아대학에 지원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괜찮게 생각하던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와 로말도 기우르골라(Romaldo Giurgola) 두 분이 스튜디오 마스터 디렉터로 오셨기 때문이었어요. 입학했더니 두 분은 전년도까지 하고 새로 오신 분이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와 제임스 스타우드 폴셱(James Stewart Polshek)이었어요. 그 당시에 학생은 21명이었고 영국, AA School 출신이나 그리스, 스페인 등 세계 각지에서 왔는데, 학생들도 괜찮았고 재미있게 잘 지냈어요. 스텐(Robery A. M. Stern)이나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가 크리틱을 오면 좀 떨떠름하게 생각을 했죠. 나머지는 합리주의적인 접근을 했어요. 누구나 공통으로 인정하는 건축의 바탕이잖아요. 포스트모더니즘 트렌드는 일시적이었고, 한 15년 정도 지속하다가 더는 못 갔죠.
 
뉴욕 HOK에서 실무를 하셨어요.
라파엘 비뇰리는 스튜디오에서 만났어요. 우리가 총 두 학기 동안 프로젝트를 7개 했고 첫해는 5개 했어요. 이학 석사(master of science)에 있는 아키텍처 앤드 빌딩 디자인 프로그램(architecture&building design program)이었는데, M.Arch와는 달리 경력이 있는 사람들만 하다 보니 실무 위주로 디자인을 괜찮게 했던 기억이 나요. 라파엘 비뇰리가 ‘너 정도면 뉴욕에 있는 어느 사무실이건 갈 수 있다’라고 무심코 이야기를 흘렸는데, 나는 그게 대단한 말인 줄 생각한 거죠.
정작 졸업해서 직장을 구하려 하니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때가 1983년도 즈음인데 경기가 또 안 좋았어요. 처음 몇 군데 지원했더니 제안은 안 오고 ‘작품을 보니까 모델 잘 만들었는데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냐’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하긴 했죠. 한 달 반 동안 고생을 좀 했어요.
HOK에서도 디자이너를 안 뽑고 제도공(draft man)만 뽑아서 할 수 없이 그거라도 지원했어요. 면접 보러갔더니 ‘왜 디자이너를 지원하지 않고 제도공으로 했나’라고 하길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저를 디자이너 뽑는 사람과 연결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한 다음에 더 봐도 이런 친구는 없다 싶었던지, 3시간 지나 저를 그냥 직원으로 채용했어요. 그렇게 들어가서 5년간 있었죠.
 
그곳에서도 상당히 인정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 제안도 받으셨다고요.
실은 그랬어요. 처음 1년은 디자인 어시스턴트로 있다가 담당자가 휴가를 가는 사이에 그 일을 대신 진행했어요. 이전 담당자보다 훨씬 나으니까 그 일을 끝까지 맡았어요. 한 5만 5천 평 큰 쇼핑몰, 호텔, 오피스가 있는 대형 프로젝트를 맡았죠.
부모님께 미국에는 3년만 있겠다고 허락받고 와서 떠나야 한다고 했더니, HOK에서 영주권 해결해 주고 컬럼비아 안에 있는 프로젝트를 내가 맡도록 해주겠다는 좋은 제안을 해주었어요. 그렇게 3년을 더 있게 됐습니다.
 
제대로 붙잡으셨네요.
그런 셈이죠.  
 
한국에 돌아와서 4.3 그룹과 함께 전시를 준비하셨습니다. 4.3그룹은 안에서 치열한 토론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건축에 관한 생각도 다르셨을 같아요.  
그때가 1990년 초였는데, 세상은 격변하고 건축가로서는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시기였어요. 합리적인 모더니즘이나 국제주의는 이해하기 쉬운데, 포스트모던이 나오면서 객관적으로 논리의 근거가 좀 애매모호했죠. 거기에서 갈등을 느끼게 돼요.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는데 우리가 모더니즘에만 머무는 건 도태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는데, 세상은 또 해체주의로 넘어가는 거죠.
건축가로서는 세계는  흘러가는 데 우리의 마인드나 관성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흐름에 합류하려니 탄탄한 근거 없이 합류하기도 찜찜했죠. 그래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불러가면서 의견을 듣기도 했어요 . 
건축 이론을 한 김광현 교수를 모셔서 강연도 듣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승효상 씨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를 이야기했던 기억도 나요. 동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약간의 불안감도 없잖아 있었을 것 같아요. 굉장히 공격적으로 토론도 많이 하고, 밑바닥까지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을 알려고 했죠. 여행도 많이 갔어요.
 
전쟁기념관으로 비판도 많이 받으셨던 거로 기억합니다.
가차 없이 비평하고, 세게 이야기했죠. 전쟁기념관 설계할 때 이분들이 벼르고 공격했어요. 새벽 5시까지 토론하기도 했어요.
전쟁기념관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나는 하나의 문화 시설로 봤어요. 넉넉하게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장기적으로 공원도 생기고 효자 노릇을 할 거라고 크게 봤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군사 문화의 잔재이고 이데올로기로 봤죠.  전쟁을 왜 해야 하느냐 황당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군사 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시설인데 왜 배운 녀석이 앞장서느냐, 영혼을 파는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저는 현상과 관념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작가 정신에 대해 의문을 표하시기도 했는데요.
작가 정신이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작가로서 판명될 때에는 항상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적 자아(ego)가 중요시 돼요. 순수 예술에서는 그게 가능하죠. 순수 예술에서는 작가의 색(color)이라 할까, 분명히 유전자(DNA)가 표출되어서, ‘누구의 작품이구나,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약간 변신했구나’ 이렇게 작가 개인의 세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해요.
건축은 그런 식으로 고정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는 교도소가 됐다가 도살장이 됐다가 신성한 교회가 되는 것처럼, 장소도 여건도 천차만별이에요. 건축주의 여건도 다 다른데 거기에서 항상 동일한 재료나 색을 가져오고 누구의 작품이라고 읽히는 게 저는 독이 된다고 봤어요.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게 좀 형편없고 치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시그니처는 없어도 된다는 말이시군요.
그렇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아저씨가 했구나, 그럴 때 감동이 클 수도 있고요.  음악은 안 그래요. 음악에서는 남과 차별화되는 게 생명이잖아요. 가령 옛날에는 노래를 듣다 보면 팀의 에고(ego)가 있다고요. AFKN에서 갑자기 롤링 스톤즈 신작이 나오면 금방 캐치를 하죠.
하지만 건축에서 뻔하게 노출콘크리트가 나오고 리처드 마이어의 화이트가 나오는 건 하고 싶지 않아요. 화가란 평생토록 물방울을 그리고, 끝없이 움직이는 불길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건축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당시 건축가들이 건축을 인문학적이고 관념적인 단어로 설명하다 보니 그에 대한 동의가 어려우셨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 당시 한 친구가 ‘나이 40쯤 되어서 자기 거 하나 있어야지’하고 무심코 말을 뱉었는데, 나는 내 것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작품집을 하자고 했을 때도 거부했어요. 개별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지만, 작가의 항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확신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걸 거부했어요. 단지 스스로 솔직하면서 진지하게 작품을 하는데 왜 일관성이 없을까 스스로 고민을 했죠. 어느 날 건축에서 과연 항성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회의를 가지면서 다른 의미의 확신을 했죠.
연기를 할 때는 주어진 상황에서 각본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역할로 해석해서 창조해낼 수 있겠죠. 그런데 ‘나는 항상 멜로 드라마만 할 거야’, ‘표정이나 톤도 그렇게만 하겠다’ 이런 작업은 재미가 없겠더라고요. 천하의 악역과 선한 역을 동시에 오가고, 조연도 굉장히 재밌을 것 같아요. 건축에 대한 욕심도 그와 마찬가지예요. 골라서 하는 게 아니고, 예산이 넉넉한 고급 건축에서 철저하게 예산이 없어서 아껴 만든 건물 모두 무한한 도전이기 때문에 다 흥미로워요.
 
건축을 이론화하고 언어화하는 자체를 벗어나고자 하셨나요?
건축 혹은 건물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하는 게 가장 큰 목표가 아닐까 생각해요. 건축은 확실한 물증이 있으니까요. 문학이나 언어는 책이나 말로 부연해야 하는 반면에, 우리는 확실한 현물이 있어서 건축이 모든 걸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변인 놔두고 내가 옆에서 어설픈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죠.

당시 건축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때, 건축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셨나요?
여태 우리가 배운 건축론은 휴먼 스케일로 지어졌다 하면 공간적인 측면을 이야기했어요. 휴먼 스케일이면 친근감을 준다, 호감이 간다고 이야기해요. 규모가 거대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요.공간적 측면이 갖는 속성이 어떤 감정을 유발한다는 거죠.
한번은 서대문 형무소 건물을 보았는데, 휴먼 스케일에 밭전자 창이고, 모든 게 자그마한 13평 목조 건물이었어요. 휴먼 스케일인데 친근감을 느껴야 하겠죠. 그런데 안내판에 ‘이것은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 집행장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서 다른 걸 느꼈어요. 휴먼 스케일은 친근감을 주는데 왜 이것은 친근감을 주지 않는가 골몰하게 된 거예요. 여태 배운 게 다 무너지잖아요. 그래서 한 보름간 그것만 화두처럼 집착했어요.  왜 그럴까.
나중에 나름대로 가정을 하나 했는데, 건물은 중성적이라는 거예요. 물리적인 실체는 중성적일 뿐이다.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때의 값이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건축물 자체는 굉장히 중성적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가정하니까 그 상황이 설명되는 거예요.
일제 총독부로 쓰인 중앙청도 얼마나 살벌했어요. 해방 후 그곳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있었고, 북한이 내려와서 점령했다가 다시 수복하고, 또 박물관으로 쓰고 사무소 관청을 쓰고요. 결국, 히틀러같은 인물이 썼을 때 거부감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는 것이지, 건물 자체는 중성적이라는 거죠. 처음부터 호감을 준다, 위압감을 준다는 건 아니라는 거죠. 건물이 힘이 있다, 크다 이런 것은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떤 형태, 감정은 우리가 의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건물이 이 모든 시간, 공간의 상황과 절묘하게 잘 맞아 들어갈 때 혹은 그것과 같이 고려할 때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지, 건물 자체가 잘된 설계다 아니다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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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중성적인 모더니즘의 질서 ①, 건축가 이성관           ‘건축의 날’ 동탑산업훈장을 받으신 소감이 듣고 싶습니다. 겸손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수상하게 되면 늘 ‘나보다 더 나은 분이 많은데 왜 내가 받았을까?’ 이 생각이 먼저 들어요. 고맙고 영광으로 생각하지요.   수상과 함께 용산공원 부분개방부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에서 그동안 직접 찍으셨던 건축가들의 인물 사진을 전시하셨어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의 건축 환경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아직은 자리 잡히기 전이라고 봐요. 그래서 같이 힘듦을 나누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료 건축가들, 선배들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면서 고마움과 동료 의식을 느껴요. 이 척박한 풍토에서 용케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늘 경외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격변기에 나도 이렇게 같이 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을 한번 되짚어보고 나누고 싶다는 가벼운 뜻이죠.   건축물은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볼 기회가 있지만, 이런 기록은 대부분 10여 년 전에 내가 찍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궤적이에요. 그 부분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 시작한 겁니다. 건축인들의 자화상을 기록하셨네요. 그런 거죠. 그 당시에 수시로 찍어 놓은 것들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어서 보면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그런 분의 얼굴을 전시장에서 만나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1948년에 부산에서 태어나셨어요.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서 자라신 건데요. 유년 시절의 부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나이가 들수록 과거 가슴에 묻혔던 이미지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요. 부산은 땅이 좁아서 우리는 주로 바다를 향한 경사지에 살았어요. 제한된 평지에는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었어요. 쉽게 얘기하면 오늘날 산동네하고 비슷해요. 거기서 남쪽을 보게 되면 역광이 되는데, 바다에 물결이 반짝반짝하는 풍경을 보면서 컸어요. 바다에 대한 로망, 그리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뒷산이 내가 살아온 큰 정서적인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 시절의 동네 골목은 지금과 달라서 제 또래 건축가들은 ‘그런 것은 못 잊어’ 라며 울컥하고 그래요.   옛날 도시 조직을 몸으로 체득하신 거네요. 특히 부산만 해도 서울에 비해 계량식 한옥, 특히 일본강점기 적산 가옥이 많았어요. 저도 적산 가옥에서 살았는데 일본적인 공간, 분위기, 척도가 무의식적으로 배어 있었죠. 시간만 나면 옛날에 살았던 동네를 습관적으로 가봐요. 큰 삼복도로가 나고 이미 변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적을 뒤적이는 마음으로 혼자 옛날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죠. 건축과는 어떻게 선택하셨나요? 과정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데, 기계과를 적어내서 고맙게도 떨어졌어요. 그 바람에 재수하게 되면서 건축과를 가게 됐어요. 보통 선배들이 와서 자기 과를 설명해 주고 그래요. 그때 서울대 건축학과 선배 한 분이 ‘그림 좀 잘 그리고 머리 똘똘하면 건축가가 딱이다’라고 해서 막연히 ‘내가 저기에 해당하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때 서울에 처음 올라오신 건가요? 서울에 대한 인상이 어떠셨나요?   저는 서울의 모습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서울의 풍경이 영화 배경처럼 보였어요. 막연하게 서울이 더 세련되고 부산보다 격이 더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그 소중한 것들이 사라질 줄 몰랐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기록을 해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게 많아요. 그때만 해도 이문동에 가면 괜찮은 한옥들이 있었고, 을지로에도 소중한 마당이 있고 사람 사는 삶의 흔적들이 많았는데, 공장으로 변해서 마음이 짠하고 그랬어요.   저학년 때는 건축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4학년 2학기 때 이구 선생님이 강연을 들으면서 자극을 받았다고 하셨어요. 어떤 강연이었나요? 제가 68학번이에요. 그 당시에 건축에 관심은 있었는데, 건축 수업은 재미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구 선생님의 ‘건축 윤강’이라는 수업을 들었어요. 맨 마지막에 과제를 하나 내주셨는데, 36개의 그리드(격자)에 형태 구성을 하는 거였어요. 우리가 애를 써서 이것저것 다이나믹하게 구성했는데, 어느 날 보더니 독백 비슷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 수업을 7년간 했는데 단순한 덩어리 구성이 하나도 안 나온다.’고요. 가령 36이라면 3x4x3 큐브로 만드는 단순한 덩어리도 구성인데,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는 거죠. 또 그리드를 빈칸으로 두고 다 지하에 넣는 구성도 할 수 있는데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큰 자극을 받고 건축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유치원 숙제 같은 거였어요. 요즘 같으면 여러 정보에 대한 상호작용(interaction)이 있어서 충분히 역발상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충격이 컸어요. 무조건 저분 사무실에 가서 배워야겠다는 확신을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졸업 후 삼고초려 끝에 거기서 일하게 됐습니다.   이구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구 선생님은 왕손이잖아요. 깔끔하신 분이었어요. 일본과 미 8군 일을 주로 했어요. 수시로 출장을 가서 우리와 대화할 기회는 사실 별로 없었어요. 바로 위 직속 선배인 고주석 씨가 있었는데, 그분과 이야기를 많이 하고 영향을 받았죠. 굉장히 똑똑하고 괜찮은 분이었어요.   고주석 선생님의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건축 태도에 영향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분위기가 그랬어요. 제가 졸업했을 때가 1972년 이후였는데 그 당시 세계적인 풍조가 논리, 합리, 공동 작업, 객관성 등이 중요한 가치로 대두될 때입니다. 작품에서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보다는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을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룹, 시스템 이런 말이 도입되고, 개인의 임의적인(arbitrary) 영감은 약간 감성에 의한 거라고 봤죠. 건축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객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 당시에는 마치 좋은 방법론을 채택해서 그 과정을 밟게 되면, 좋은 작품이 저절로 나오는 연금술 같은 방법론이 있을 거라는 게 세계적인 붐이었어요. 그런 측면에서 다들 ‘이런 식으로 될 수밖에 없지 않으냐’ 강요하는 식으로 자기 작품을 설명했어요.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라는 접근은 훨씬 뒤의 일이죠. 지형, 지질, 교통, 기능만으로 보면 다 낱개의 옳은 아이디어가 있잖아요. 그걸 오버랩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식이었죠.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거기엔 주관이 많이 개입하게 되고 모순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는 거죠.   이구 선생님 사무실에서 실무는 어떠셨나요? 미국 스타일이 많이 깔린 회사였어요. 그 당시 한 여덟 아홉 분의 선배들이 그곳에 계셨어요. 세 번이나 찾아가서 생떼를 쓰듯 들어가게 되었는데, 들어가서는 굉장히 좋아했죠. 그 착각 때문에 열심히 했는데, 대학원 들어가면서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는 정림건축에서 한 6년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보면 정림건축이 친정이고, 실제 작품을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곳이에요. 대학원에서 한국의 전통공간에 대한 논문을 쓰셨습니다. 전통 공간에는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었나요? 저는 서울에서 처음 전통 건축과 담장을 봤어요. 대학원을 다니면서 과제를 위해 현장 방문을 했는데, 성균관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의 담 높이가 내 키보다 좀 낮았어요. ‘폴짝 뛰어넘으면 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담을 만들었지?’ 궁금했어요. 그냥 선을 구획해놓은 것 같은데, 왜 이런 걸 설치했을까? 그러다가 담은 부수적인 도구일 뿐이고 구획이 필요할 때 줄로 끊는구나, 담이 있구나 생각하니, 마당으로 개념이 확장되더라고요. 유럽의 대공간과는 어떤 유사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을까 생각하니, 공간론으로 넘어가고요. 그 당시에 사찰과 전통건축을 많이 다녀보고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고 깨달은 게 과정적 공간이었어요. 진입의 프로세스를 깨우치고 나니 번번이 제 공간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더라고요. 정림건축에서 6년간 실무를 쌓으셨는데,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버님이 교수였지만 저는 교수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건축 작품 하는 게 너무 재미있고 의미가 있었어요. 또 유학을 하려고 보니 제 학점이 b하고 c 중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시도도 해보지 않고 괜찮은 학교는 못 간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러다 한 10년쯤 지난 다음, 한 후배가 유학 간다고 바지런 떨 때 ‘선배님은 왜 유학 안 갑니까’ 하더라고요. 가고 싶지만 실은 내 학점이 그 모양이라서 못 간다고 했더니, 포트폴리오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오후에 미 문화원에 가서 미국에 있는 학교 30여 개 자료를 복사했어요. 최종 여섯 군데에 지원해서 사무실 꼬박 다니면서 6개월 만에 준비를 다 하고 가게 된 거죠.   왜 컬럼비아대학교를 선택하셨나요? 그 당시 합격한 곳은 몇 군데 되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가 굉장히 좋은 선생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도시 자체가 어떤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비교할 바 없는 교육의 장소가 되지 않을까 싶었죠.   서구 건축의 한복판에 가셨는데 당시 건축 흐름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의 작품이 매거진 표지에 나오고 포스트모던의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같은 사람이 한참 활동하던 때죠. 나는 모더니즘에 속해 있던 사람인데 생뚱맞게 포스트모던을 맞닥뜨리니까 거부감도 있고 자기의 반성이 있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랬죠. 방어적이었어요. 제가 컬럼비아대학에 지원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괜찮게 생각하던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와 로말도 기우르골라(Romaldo Giurgola) 두 분이 스튜디오 마스터 디렉터로 오셨기 때문이었어요. 입학했더니 두 분은 전년도까지 하고 새로 오신 분이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와 제임스 스타우드 폴셱(James Stewart Polshek)이었어요. 그 당시에 학생은 21명이었고 영국, AA School 출신이나 그리스, 스페인 등 세계 각지에서 왔는데, 학생들도 괜찮았고 재미있게 잘 지냈어요. 스텐(Robery A. M. Stern)이나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가 크리틱을 오면 좀 떨떠름하게 생각을 했죠. 나머지는 합리주의적인 접근을 했어요. 누구나 공통으로 인정하는 건축의 바탕이잖아요. 포스트모더니즘 트렌드는 일시적이었고, 한 15년 정도 지속하다가 더는 못 갔죠.   뉴욕 HOK에서 실무를 하셨어요. 라파엘 비뇰리는 스튜디오에서 만났어요. 우리가 총 두 학기 동안 프로젝트를 7개 했고 첫해는 5개 했어요. 이학 석사(master of science)에 있는 아키텍처 앤드 빌딩 디자인 프로그램(architecture&building design program)이었는데, M.Arch와는 달리 경력이 있는 사람들만 하다 보니 실무 위주로 디자인을 괜찮게 했던 기억이 나요. 라파엘 비뇰리가 ‘너 정도면 뉴욕에 있는 어느 사무실이건 갈 수 있다’라고 무심코 이야기를 흘렸는데, 나는 그게 대단한 말인 줄 생각한 거죠. 정작 졸업해서 직장을 구하려 하니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때가 1983년도 즈음인데 경기가 또 안 좋았어요. 처음 몇 군데 지원했더니 제안은 안 오고 ‘작품을 보니까 모델 잘 만들었는데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냐’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하긴 했죠. 한 달 반 동안 고생을 좀 했어요. HOK에서도 디자이너를 안 뽑고 제도공(draft man)만 뽑아서 할 수 없이 그거라도 지원했어요. 면접 보러갔더니 ‘왜 디자이너를 지원하지 않고 제도공으로 했나’라고 하길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저를 디자이너 뽑는 사람과 연결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한 다음에 더 봐도 이런 친구는 없다 싶었던지, 3시간 지나 저를 그냥 직원으로 채용했어요. 그렇게 들어가서 5년간 있었죠.   그곳에서도 상당히 인정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 제안도 받으셨다고요. 실은 그랬어요. 처음 1년은 디자인 어시스턴트로 있다가 담당자가 휴가를 가는 사이에 그 일을 대신 진행했어요. 이전 담당자보다 훨씬 나으니까 그 일을 끝까지 맡았어요. 한 5만 5천 평 큰 쇼핑몰, 호텔, 오피스가 있는 대형 프로젝트를 맡았죠. 부모님께 미국에는 3년만 있겠다고 허락받고 와서 떠나야 한다고 했더니, HOK에서 영주권 해결해 주고 컬럼비아 안에 있는 프로젝트를 내가 맡도록 해주겠다는 좋은 제안을 해주었어요. 그렇게 3년을 더 있게 됐습니다.   제대로 붙잡으셨네요. 그런 셈이죠.     한국에 돌아와서 4.3 그룹과 함께 전시를 준비하셨습니다. 4.3그룹은 그 안에서 치열한 토론을 해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건축에 관한 생각도 다르셨을 것 같아요.   그때가 1990년 초였는데, 세상은 격변하고 건축가로서는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시기였어요. 합리적인 모더니즘이나 국제주의는 이해하기 쉬운데, 포스트모던이 나오면서 객관적으로 논리의 근거가 좀 애매모호했죠. 거기에서 갈등을 느끼게 돼요.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는데 우리가 모더니즘에만 머무는 건 도태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는데, 세상은 또 해체주의로 넘어가는 거죠. 건축가로서는 세계는  흘러가는 데 우리의 마인드나 관성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흐름에 합류하려니 탄탄한 근거 없이 합류하기도 찜찜했죠. 그래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불러가면서 의견을 듣기도 했어요 .  건축 이론을 한 김광현 교수를 모셔서 강연도 듣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승효상 씨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를 이야기했던 기억도 나요. 동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약간의 불안감도 없잖아 있었을 것 같아요. 굉장히 공격적으로 토론도 많이 하고, 밑바닥까지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을 알려고 했죠. 여행도 많이 갔어요.   전쟁기념관으로 비판도 많이 받으셨던 거로 기억합니다. 가차 없이 비평하고, 세게 이야기했죠. 전쟁기념관 설계할 때 이분들이 벼르고 공격했어요. 새벽 5시까지 토론하기도 했어요. 전쟁기념관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나는 하나의 문화 시설로 봤어요. 넉넉하게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장기적으로 공원도 생기고 효자 노릇을 할 거라고 크게 봤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군사 문화의 잔재이고 이데올로기로 봤죠.  전쟁을 왜 해야 하느냐 황당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군사 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시설인데 왜 배운 녀석이 앞장서느냐, 영혼을 파는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저는 현상과 관념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작가 정신에 대해 의문을 표하시기도 했는데요. 작가 정신이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작가로서 판명될 때에는 항상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적 자아(ego)가 중요시 돼요. 순수 예술에서는 그게 가능하죠. 순수 예술에서는 작가의 색(color)이라 할까, 분명히 유전자(DNA)가 표출되어서, ‘누구의 작품이구나,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약간 변신했구나’ 이렇게 작가 개인의 세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해요. 건축은 그런 식으로 고정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는 교도소가 됐다가 도살장이 됐다가 신성한 교회가 되는 것처럼, 장소도 여건도 천차만별이에요. 건축주의 여건도 다 다른데 거기에서 항상 동일한 재료나 색을 가져오고 누구의 작품이라고 읽히는 게 저는 독이 된다고 봤어요.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게 좀 형편없고 치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시그니처는 없어도 된다는 말이시군요. 그렇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아저씨가 했구나, 그럴 때 감동이 클 수도 있고요.  음악은 안 그래요. 음악에서는 남과 차별화되는 게 생명이잖아요. 가령 옛날에는 노래를 듣다 보면 팀의 에고(ego)가 있다고요. AFKN에서 갑자기 롤링 스톤즈 신작이 나오면 금방 캐치를 하죠. 하지만 건축에서 뻔하게 노출콘크리트가 나오고 리처드 마이어의 화이트가 나오는 건 하고 싶지 않아요. 화가란 평생토록 물방울을 그리고, 끝없이 움직이는 불길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건축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당시 건축가들이 건축을 인문학적이고 관념적인 단어로 설명하다 보니 그에 대한 동의가 어려우셨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 당시 한 친구가 ‘나이 40쯤 되어서 자기 거 하나 있어야지’하고 무심코 말을 뱉었는데, 나는 내 것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작품집을 하자고 했을 때도 거부했어요. 개별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지만, 작가의 항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확신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걸 거부했어요. 단지 스스로 솔직하면서 진지하게 작품을 하는데 왜 일관성이 없을까 스스로 고민을 했죠. 어느 날 건축에서 과연 항성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회의를 가지면서 다른 의미의 확신을 했죠. 연기를 할 때는 주어진 상황에서 각본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역할로 해석해서 창조해낼 수 있겠죠. 그런데 ‘나는 항상 멜로 드라마만 할 거야’, ‘표정이나 톤도 그렇게만 하겠다’ 이런 작업은 재미가 없겠더라고요. 천하의 악역과 선한 역을 동시에 오가고, 조연도 굉장히 재밌을 것 같아요. 건축에 대한 욕심도 그와 마찬가지예요. 골라서 하는 게 아니고, 예산이 넉넉한 고급 건축에서 철저하게 예산이 없어서 아껴 만든 건물 모두 무한한 도전이기 때문에 다 흥미로워요.   건축을 이론화하고 언어화하는 것 자체를 벗어나고자 하셨나요? 건축 혹은 건물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하는 게 가장 큰 목표가 아닐까 생각해요. 건축은 확실한 물증이 있으니까요. 문학이나 언어는 책이나 말로 부연해야 하는 반면에, 우리는 확실한 현물이 있어서 건축이 모든 걸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변인 놔두고 내가 옆에서 어설픈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죠. 당시 건축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때, 건축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셨나요? 여태 우리가 배운 건축론은 휴먼 스케일로 지어졌다 하면 공간적인 측면을 이야기했어요. 휴먼 스케일이면 친근감을 준다, 호감이 간다고 이야기해요. 규모가 거대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요.공간적 측면이 갖는 속성이 어떤 감정을 유발한다는 거죠. 한번은 서대문 형무소 건물을 보았는데, 휴먼 스케일에 밭전자 창이고, 모든 게 자그마한 13평 목조 건물이었어요. 휴먼 스케일인데 친근감을 느껴야 하겠죠. 그런데 안내판에 ‘이것은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 집행장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서 다른 걸 느꼈어요. 휴먼 스케일은 친근감을 주는데 왜 이것은 친근감을 주지 않는가 골몰하게 된 거예요. 여태 배운 게 다 무너지잖아요. 그래서 한 보름간 그것만 화두처럼 집착했어요.  왜 그럴까. 나중에 나름대로 가정을 하나 했는데, 건물은 중성적이라는 거예요. 물리적인 실체는 중성적일 뿐이다.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때의 값이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건축물 자체는 굉장히 중성적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가정하니까 그 상황이 설명되는 거예요. 일제 총독부로 쓰인 중앙청도 얼마나 살벌했어요. 해방 후 그곳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있었고, 북한이 내려와서 점령했다가 다시 수복하고, 또 박물관으로 쓰고 사무소 관청을 쓰고요. 결국, 히틀러같은 인물이 썼을 때 거부감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는 것이지, 건물 자체는 중성적이라는 거죠. 처음부터 호감을 준다, 위압감을 준다는 건 아니라는 거죠. 건물이 힘이 있다, 크다 이런 것은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떤 형태, 감정은 우리가 의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건물이 이 모든 시간, 공간의 상황과 절묘하게 잘 맞아 들어갈 때 혹은 그것과 같이 고려할 때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지, 건물 자체가 잘된 설계다 아니다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로 이어집니다.    
INTERVIEW 중성적인 모더니즘의 질서 ②, 건축가 이성관 귀국하고 바로 전쟁기념관이라는 큰 프로젝트에 당선되셨습니다. 40대 건축가에게 정말 큰 사건이었을 텐데요.    내가 43살에 그 일을 했어요. 공모전 신청할 때는 정림건축에 있을 때였어요. 신청하고 나오면서 그 담당자에게 심사가 공정하냐고 물었던 기억이 나요. ‘당선되는 사람은 아주 신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왔죠. 당선되고 싶다기 보다는 최우수작이나 우수작 6팀 안에 들면 귀국 신고로 괜찮은 거 아닌가 싶었어요.   전쟁기념관이라는 표현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요. 낯설지는 않으셨나요? 내용이 중요한 거죠. 영어로는 ‘War Memorial’이라 괜찮은데, 우리나라에서는 ‘기념’이라는 말이 잘못하면 마치 호전성을 기념한다는 오해를 사는 거죠. 옛 사전을 보면 기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기억한다는 것과 기념하고 축하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여기서는 망자를 기억하다(remember)는 뜻이죠. 기념이 기억한다는 뜻으로 잘 안 쓰게 되고 축하하는 의미로만 쓰이다 보니 언어적인 불일치가 있었죠.  그것 때문에 공청회도 했어요. ‘전쟁 기념’이 ‘전쟁처럼 좋지 않은 것을 왜 기념하느냐’ 이런 의미로 이야기되니까 논란이 있었죠. 결국 영어로 ‘War Memorial’이라는 의미로 전쟁기념관이 되었어요. 어쩌면 기념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단어에 더 가깝겠네요. 기억이죠. 전쟁이란 힘든 것이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거죠. 전쟁의 비참함을 알기 때문에 어떻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 그런데도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선열들처럼 몸 던져서 나라를 지키는 호국 정신을 기리는 것이죠.   항구적 평화를 지키는 것이 바로 기념관의 존재 이유라고 하셨는데,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전쟁기념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당시에도 예상했던 게 이곳은 문화 시설이라는 것이었어요.  당시 전쟁에 대해 전시할 게 뭐 있냐며 비판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문화 시설은 일단 넉넉하게 잡아놓고, 나중에 국제 정세가 변하면 여러 가지 비밀문서나 공개될 자료가 많을 거라고 봤어요. 지금 안목으로 어떻게 20~30년을 예단하나 생각해서 규모나 예산을 줄이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열주를 둔 회랑과 중심부 좌우 대칭이 큰 특징입니다. 회랑과 수공간 그리고 좌우 대칭의 엄격함을 지키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힘이죠. 많은 거룩한 희생이 있었고 엄숙한 생명을 바쳐서 이룬 것이잖아요. 그러니 장소에 그만큼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외 공간은 느슨하더라도 죽음이라는 지엄함 앞에서는 우리가 옷깃을 여밀 수 있어야 하지, 껌 씹고 슬리퍼 끌고 반바지 입고 오는 곳은 아니라는 약간의 부담을 주려는 게 있었어요. 관람이 끝나고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요.   박물관에 이르는 진입 동선에서 전통건축의 과정적 공간을 염두에 두기도 했는데요. 은연중에 프로젝트에 전통적인 게 깔려 있어요. 박물관 같은 걸 설계할 때, 어떤 확신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성격 자체가 일상의 연장이 아니거든요. 가령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산다면, 방풍실 지나서 바로 물건이 앞에 전시돼 있어도 일상의 연장이기 때문에 금방 대화가 가능해요. 그런데, 기념관에 녹슨 철모가 있으면 그걸 단순히 고철로 보이게 하면 안 되는 거죠. 그 세월과 전쟁, 희생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관람이 되는 거예요. 기념관은 관찰이 아니라,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박물관이나 기념관은 일상의 연장이 아니잖아요. 전쟁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마음의 준비 없이 접근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어요. 진입하는 과정에 텅 빈 공간을 만들어서 서울에 없는 풍경을 주는 거예요. 텅 비었을 때 사람이 받는 정서적 충격 혹은 낯섦을 주어서 마음을 흔든 다음에 비일상적 영역으로 가는 거죠. 마음의 준비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어요.   1989년에 전쟁기념관 이후 2001년 양구전투기념관을 설계하셨어요. 시간 차가 있는 두 프로젝트의 접근 방식이 어떻게 다르셨나요? 전쟁기념관의 경우 군사 문화, 군사 잔재라고 했지만, 변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세월 지나면 오히려 다른 각도로 발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서 개관 전에 전쟁기념관을 박물관으로 바꾸면 어떻겠냐는 문의가 온 적이 있어요. 그래서 박물관이라면 이 땅에 이런 식으로 안 짓는다고 이야기했어요. 너무 불편하고 멀잖아요. 추모를 위한 공간을 거친 다음에는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개념이라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녹슨 철모를 볼 수 있도록 동선을 길게 잡은 거죠. 양구는 지자체에서 조성한 기념관이라 지명도도 다르고 규모도 달라요.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땅이 120평이라는 거예요. 누가 이 평화로운 장소에 고지전을 일으켰는지, 왜 자기 몸을 던져서 죽어야 하는지 명분이 없는 곳이잖아요. 이 땅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는 데서 죽는 게 너무 허망하죠. 그런데 그 전쟁이 없었다면 이게 북한에 있을 땅이에요. 기념관에서 이런 내력을 이야기 안 하면 누가 알겠느냐는 거죠. 더구나 양구전투기념관은 전쟁의 현장이자 죽음의 현장이었어요. 그 현장과 연관 짓는 게 중요했어요. 훨씬 더 밀도 있게 주변 지리에 관계되어서 디자인되었어요. 고지가 다 보이도록 한다거나 그 고지 위로 죽은 자의 이름이 유리에 뜨도록 한 것이나, 지형학적으로 친밀하게 짜인 거예요. 전쟁기념관은 그렇지 않아요. 실은 양구보다는 장소적 의미가 약하지요.  그때 거대주의라는 말이 있었어요. 짓기만 하면 저렇게 크게 만든다고요. 다리도 성수교 하면 될 일을 성수대교 하죠. 그 연장선에서 전쟁기념관 건물이 너무 규모가 크다고 했는데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전쟁기념관은 6.25 전쟁뿐만 아니라 통시적으로 대한민국에 있었던 강토 수호 전쟁을 다 망라한 거니까요.   건축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접근하셨는데, 흥미롭게도 기념관과 종교적인 공간을 많이 하셨어요. 상징과 기념을 담아내는 방식이 다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기념, 상징적인 프로그램이라 합리성이 약간 떨어질 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합리적으로 접근했을 뿐이에요. 되도록 은유적인(metaphoric) 방법으로 건물을 표현하지는 않았어요. 양구전투기념관 설계할 때 철모를 이야기하고 형상을 그린 것은 일종의 유추적인 방법이에요. 철모로 표현하는 순간 많은 가능성이 거기에 국한돼 버리잖아요. 주관적인 것으로 전체의 형상이나 예산을 쓰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기념관의 속성은 일상에서 비일상 영역으로 넘어간다는 생각이 깔려 있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사이 공간이 필요하다, 시간 속을 거치게 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도움 되지 않을까 싶은 거예요. 거리감을 주기 위해서 수공간을 만들기도 하는 거죠. 물을 쓰면 거리감이 생겨서 공간의 확장 개념을 저절로 얻을 수 있고요. 또 물이라는 게 아주 섬세해서 바람 불면 사르르 반사되면서 민감한 미디어잖아요. 그래서 간간이 즐겨 써요.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에서도 불교의 사상이나 탄허 스님의 사상을 잘 담아내고자 하셨는데요. 박물관에서 고민하셨던 부분이 궁금합니다. 그린벨트 내에서 이미 허가를 받은 설계안을 검토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보고 아쉬운 것을 이야기했더니 설계를 바꿔 달라고 의뢰가 들어왔어요. 북향 진입이라는 단점 외에는 불교 사찰에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처음부터 공간이 필요한 것보다 많이 모자랐어요. 그래서 공간을 시차적으로 전용해서 빌려오는 것으로 풀어내고자 했어요. 자동 개폐되는 문을 펼쳐서 가변적으로 넓게 쓰기도 하고 줄여서 따로 쓰는 걸 전제했어요. 또 일반 사찰에서 선형으로 길게 뻗은 동선을 입체적으로 담았어요. 공간을 선형적으로 배열해서 의미 있게 연결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집의 안방은 가장 안쪽에 있지만, 사실 뒤쪽 담에서는 가장 가깝잖아요. 이런 역설적인 장치가 재미있어서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법당은 들어가자마자 밖에서 보이지만 접근은 안 되도록 했어요. 중립적인 공간에 불교 사찰의 상징적인 의미를 압축해서 공포와 단청을 넣고 의미를 부여했어요.   데이콤 사옥이나 강남 사옥처럼 소장님이 설계한 오피스 빌딩은 안정된 비례와 치수를 보여줍니다. 고전적인 질서를 볼 수 있는데,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는지요? 치수(dimension)는 기본이에요. 요즘에는 치수개념이 없죠. 저는 오래전 공간론으로 바닥까지 뼈저리게 훑은 입장이고, 모더니즘 건축에서는 그걸 가르쳐요. 김종성 씨나 김태수 씨, 우규승 씨 같은 분들의 건물은 그런 원칙이 다 녹아 들어가 있어요. 요즘은 그런 게 없죠. 그냥 시원하고 큰 게 좋다는 식이어서 스케일이 크고 시원한 건 있는데 안정감은 많이 약화되어요.   거여 3단지 아파트부터 수입777, 반포 577, 최근에 홍지36까지 주택 프로젝트도 많이 하셨습니다. 삶을 담는 주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무엇인가요? 주택은 한 개인이 24시간 함께 할 동반자를 찾는 것과 같아요. 미팅 파트너를 정하는 것과는 다르죠. 여러 덕목을 살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맞는 자질을 갖춰야 하니 주택을 근생 건물이나 상점처럼 칼같이 디자인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주택 할 때도 외부 재료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해요. 몰라서가 아니에요. 그러면 집에 만만한 게 없고 좀 징그럽지. 너무 미적인(aesthetic) 것만 찾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일부러 투박함을 적당히 그사이에 끼우고 구분되는 정도로 해요. 의도적으로 한 것이지 그 디테일이 비싸서 안하는 건 아니에요.   섬세한 디테일이 삶을 더 긴장하게 한다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한울건축 출신들이 한국 건축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울건축에서 지향했던 원칙 혹은 강조하셨던 태도는 무엇이었나요? 한 번 지어지면 영원히 고치기 힘들고 남는다. 설계를 옳게 해줘야 한다. 그래서 저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미팅 날짜도 사정해서 미루기도 했어요. 그래야 매듭을 잘 지을 수 있어요. 스케줄은 사람이 만드는 건데, 건축주가 좋은 걸 받아들이면 우리는 시간 가지고 즐기면서 일을 하는 거죠. 돈은 그다음 문제였어요. 운영에는 좀 좋지 않지요. 또 직원들이 밤새우면서 고생하는 상황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하니까 날짜를 조금 연기해 달라고 하는 거죠. 또, 일할 때는 디테일이나 큰 개념 잡는 건 똑같다고 해요.  디테일은 사소한(trivial) 게 아니고, 전체의 역할을 다 이야기해 주는 거라는 거죠. 범죄에서 살인 장면이 안 보이더라도 실오라기 같은 증거(clue)를 가지고 우리가 전체를 짐작할 때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디테일이 작은 게 아니고 그것을 네가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자 해요.  또 중요한 건 유도 심문 하듯이 하나에서 열까지 자꾸 질문을 던져서 깨닫게 하는 것. 그러면서 이야기가 나오니까요. 건축가가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로 무엇을 꼽으시나요? 너무나 당연한 건데 경험해 본 바로는 건축주의 존재예요. 우리는 전문성을 가지고 관념, 습관이 된 부분이 있지만, 건축주는 돈이 들어가니 절박해요. 또 주방 같은 곳을 설계할 때 건축주는 본인이 사용하기 때문에 명확해요. 본인이 그 공간 안에 들어가서 행동(behavior)이라는 걸 다 생각해본다고요. 건축가는 설계할 때 시간 개념이 없어요.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레이아웃이나 동선을 이야기해요. 그런데 정작 사용하는 사람들은 달라요. 공간을 사용하는 데 굉장히 구체적이고 시간 개념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거기서 많이 깨닫고 배워요. 직원한테도 사용자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그 사람은 집 짓는 것에 꿈도 있고 모든 재산을 투자하기 때문에 아주 구체적이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고요. 우리는 그냥 공간에서만 머물고, 그 시퀀스 안에 들어가지 못해요. 그 부분이 중요해요.      40년이 넘게 건축을 해오셨는데, 건축을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건축을 보는 관점이나 가치관의 스펙트럼은 넓은데, 적어도 한 가지는 언급하고 싶어요. 건축은 순수 예술과 달라요. 순수 예술은 장소나 주변 관계에서는 벗어나 있어서 면죄부를 받는 반면에, 우리는 건물을 어느 영역, 시간에 짓게 되면 그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값을 내요. 작업의 성격으로 보면 순수 예술과 유사한 부분이 많지만, 장르적 속성상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 놓이는 관계에서 판정되는 거죠. 건축은 생산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관계되어요. 그 이후에도 주변에 지속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윤리적인 문제, 책임 의식이 따르죠. 그래서 우리가 사명 의식을 갖고 더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 건축의 경계를 넘어서다 제18회 대한민국 건축의 날을 맞아 진행되는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와 오픈하우스서울이 스페셜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유공자 특별전으로 소개되는 건축가 이성관의 대표작 오픈하우스와 공공건축상 수상작의 오픈하우스, 용산 지역의 내력을 살펴보는 안창모 교수의 강연까지, 10월 6일(목)부터 10월 13일(목)까지 건축주간에 열립니다.     프로그램 오픈 9월 27일(화) 참가 신청 9월 28일(수) 오후 2시부터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 링크를 통해 신청 https://booking.naver.com/booking/5/bizes/768463   건축주간으로 확대해 만나는 대한민국 건축의 날   건축인의 화합과 단결, 미래 건축에 대한 비전을 모색해온 제18회 대한민국 ‘건축의 날’이 올해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으로 확대해 10월 6일부터 13일까지 8일간 진행됩니다. ‘건축의 날’은 건축의 공공성과 건축 문화를 알리고 우리 시대 필요한 건축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자리로, 내년 공식적인 국가기념일 제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 그 첫 시도로 ‘건축의 날’을 건축주간으로 확장해 다양한 전시회, 강연회 등의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용상공원 부분개방 부지에서 만나는 건축 <건축의 경계를 넘어서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는 건축주간 동안 특별히 개방된 용산공원 부분개방 부지에서 다양한 전시회, 강연회 등의 행사가 열립니다. 책-답사-영화라는 키워드로 진행되는 이번 건축주간은 건축 책과 영화, 건축다큐멘터리를 만나볼 수 있으며, 유공자 특별전(올해의 건축사)로 건축가 이성관의 대표작 전시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한 주 동안 건축의 경계를 허물고 도시건축의 새로운 시나리오에 관한 참여, 그리고 다양한 논의와 전망을 통해 과거와 오늘의 건축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과 함께 하는 오픈하우스서울 스페셜 프로그램 오픈하우스서울은 건축인이 함께하는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와 협력 프로그램으로 <유공자 특별전, 이성관>과 <공공건축상>을 소개하고 오픈하우스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건축가 이성관의 대표작이자 제1회 김종성건축상 수상작이기도 한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전쟁기념관, 그리고 VISIT YOURSELF로 소개하는 여주박물관까지, 건축가 이성관과 함께 건축물을 돌아보는 오픈하우스를 진행합니다. 또한, 공공건축상 대상작인 양구백자박물관 도자역사문화실(건축가 이진오), 우수상인 성북선잠박물관(건축가 이은경), 성수책마루(건축가 김태영, 김현준, 장수정)를 소개하고 인터뷰를 통해 공공건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나누고자 합니다. 준공 2년 후, 발주처에 주는 공공건축상은 공공건축물이 발주처의 기획과 협업, 건축가와 시공자, 운영자가 긴밀하게 협업했을 때 좋은 공공건축물이 완성된다는 취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와 함께 하는 오픈하우스서울 스페셜 프로그램은 건축가 이은경과 함께 수상작인 성북선잠박물관뿐만 아니라 성북구에 조성한 최만린미술관과 함께 돌아보며, 건축가 김태영, 김현준, 장수정과 함께 성동구에서 기획한 책마루가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성수책마루, 성동구의회 의사랑, 성동책마루를 함께 돌아볼 예정입니다.   또한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을 위해 특별히 개방돈 용산공원 부분개방 부지에서 용산미군기지와 주변의 내력을 돌아볼 수 있는 안창모 교수(경기대학교)의 강연이 함께 열립니다. 오픈하우스서울 2022 본행사에 앞서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과 함께하는 스페셜 프로그램을 만나보세요.   [special 1] 유공자 특별전          이성관 INTERVIEW       건축가 이성관    OPENHOUSE     10월 11일 오후 3시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OPENHOUSE     10월 13일 오후 3시       전쟁기념관 Visit yourself                                            여주박물관   [special 2] 오늘의 공공건축을 만나다 VISIT YOURSELF 양구백자박물관 도자역사문화실, 이진오((유)건축사사무소더사이)  OPENHOUSE     10월 08일 오후 2시       성북선잠박물관-최만린미술관_이은경 OPENHOUSE     10월 12일 오후 2시       성수책마루-성동구의회 의사랑-                                                                 성동책마루_김태영, 김현준, 장수정   INTERVIEW 공공건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지역 문화공간의 역할 _ 이진오                                 동네에서 만나는 공공건축 _ 이은경                                 유휴공간의 재구성 _ 김태영, 김현준, 장수정                  + 시민을 위한 공공공간 : 정원오 성동구청장    [special 3] 다시 보는 용산 LECTURE           10월10일 오후 4시       용산과 용산공원, 바로 읽기            안창모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 바로 가기 주최: 한국건축단체연합(FIKA: 대한건축사협회, 한국건축가협회, 대한건축학회) 주관: 대한건축사협회  
유공자 특별전 이성관 올해 건축의 날 유공자 훈장은 한울건축 이성관 대표가 수상하였습니다. 순수예술로서 건축을 지향하기보다 객관적이고 조직적 방법론으로 건축에 접근해 온 건축가 이성관은 중성적이고 중립적인 집이 가진 생명력을 주목합니다. 작가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건축 본연의 구축과 구현에 몰입해 온 건축가 이성관은 군더더기 없는 절제와 효율적인 해법을 보여주면서 건축 본연의 공간을 담아왔습니다.   건축가 이성관의 대표작이자 제1회 김종성건축상 수상작인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전쟁기념관을 건축가와 함께 돌아보는 오픈하우스와 개별 방문할 수 있는 여주박물관을 소개합니다.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 기간에는 건축가 이성관의 인터뷰도 함께 소개합니다.   INTERVIEW                                             건축가 이성관    OPENHOUSE     10월 11일 오후 3시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OPENHOUSE     10월 13일 오후 3시       전쟁기념관 VISIT YOURSELF                                    여주박물관    
오늘의 공공건축을 만나다,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준공 2년 후, 발주처에 주는 공공건축상은 공공건축물이 발주처의 기획과 협업, 건축가와 시공자, 운영자가 긴밀하게 협업했을 때 좋은 공공건축물이 완성된다는 취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올해 공공건축상 대상작인 양구백자박물관 도자역사문화실(건축가 이진오), 우수상인 성북선잠박물관(건축가 이은경), 성수책마루(건축가 김태영, 김현준, 장수정)를 소개하고 인터뷰를 통해 공공건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터뷰는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 기간 중에 공개됩니다.    [special 2] 오늘의 공공건축을 만나다 VISIT YOURSELF                                양구백자박물관 도자역사문화실,                                                             이진오((유)건축사사무소더사이)  OPENHOUSE     10월 08일 오후 2시   성북선잠박물관-최만린미술관_이은경 OPENHOUSE     10월 12일 오후 2시   성수책마루-성동구 의회랑-                                                             성동책마루_김태영, 김현준, 장수정     INTERVIEW          공공건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지역 문화공간의 역할 _ 이진오                                 동네에서 만나는 공공건축 _ 이은경                                 유휴공간의 재구성 _ 김태영, 김현준, 장수정                 + 시민을 위한 공공공간 : 정원오 성동구청장 
INTERVIEW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대상, 양구백자박물관 도자역사문화실, 이진오(건축사사무소 더사이)     양구는 휴전선에 면해 있고 군사 지역이 많아 심리적 거리감도 있습니다. 양구에 백자박물관이 자리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2004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양구지역의 유적 발굴조사를 하면서 그 계기로 발굴조사 보고회가 열렸어요. 그 자리에서 출토된 유물과 기증유물을 전시하고 생산하는 목적의 박물관 계획설계를 제안한 것이 기회가 되어서 군립방산자기박물관을 설계하게 되었습니다. 박물관이 들어선 곳은 직연폭포 인근 양구군 소유의 주차장 부지입니다. 사방으로 백토를 품은 산이 둘러싸여 있고, 북측에 2차선 도로 건너편 마을이, 남측으로 논이, 남서쪽으로 천(川)이 감싸고 도는 곳입니다. 최초 박물관 건축에 쓰인 다짐벽에는 이 냇가의 흙을 사용하기도 했어요.                            양구백자박물관은 왜 증축하게 되었나요? 2005년 계획부터 증축을 고려해서 동측으로 증축 부지를 남겨 두었어요. 먼저 방문객의 체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체험동 건립이 결정되었어요. 입찰을 통해 춘천의 설계사무소가 낙찰되어 기존 박물관의 모티브를 차용한 체험동이 2009년 완공되었죠. 이후 박물관에서는 늘어나는 공간 수요와 미래 프로그램의 운영을 염두에 두고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군유지를 합병하는 등 부지를 확대했어요. 서울대학교 도예과와 MOU를 맺으면서 2013년 백자연구소가,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도자역사문화실이 건립되어 2020년 7월 마침내 박물관 단지가 완성된 거죠.   이번에 설계한 도자역사문화실은 2005년에 설계한 양구백자박물관의 증축과 관련 시설을 설계하면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프로젝트인데요. 어떤 과정으로 설계를 이어올 수 있었나요? 양구군의 관심과 지원, 박물관 구성원의 노력에 따른 결과입니다. 정두섭 관장님은 건물이 완공된 이후에 부임하셨어요. 설계자에게 누수 등의 하자 해결과 운영상 문제가 있는 공간의 변경을 상의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는데, 소소한 건축 문제를 지속적으로 상의하면서 지속적으로 증축 설계를 의뢰한 것입니다. 관장님은 박물관이 통일된 맥락으로 증축되기를 바라셨어요. 백자연구소와 도자역사문화실을 동일한 설계자에게 맡기는 것이 감사에서 지적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입찰이나 설계 공모가 아닌, 원 설계자와의 수의계약을 추진하셨습니다. 우리도 관장님의 설득과 부탁에 동의했고요.   처음 양구백자박물관 설계에서 고려했던 것과 증축한 도자역사문화실을 통해 만들어낸 새로운 관계 설정이 궁금합니다. 도자역사문화실은 기능적으로 전시 공간을 연장하고 수장고를 증축하는 거에요. 따라서 기존 시설과의 연계가 중요했습니다. 배치도를 보면 점으로 존재하던 것들이 선으로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어요. 단면도를 보면 부지의 단자를 이용하여 입체적으로 연결한 것이 보이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존 시설과의 사이에 아치 회랑으로 둘러싸인 마당을 만들고 건물 안에도 중정을 두었어요. 늘어난 동선의 길이감과 함께 겹쳐진 공간의 깊이감을 두어 방문자들이 이곳에서 시간을 길게 감지할 수 있도록 의도했습니다.      새로 증축된 부분의 재료 역시 기존 박물관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접근하셨나요?   양구백자박물관에서는 처음부터 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토가 주인공이었어요. 방문하는 분들에게도 쉽게 그 맥락을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랐고 따라서 재료의 물성과 그 쓰임을 통한 건축의 구법이 생각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다짐흙벽과 전벽돌, 시멘트벽돌(안료를 지정해 주문제작), 점토벽돌 치장쌓기는 본디 흙인 것을 건축화 한 것이고 많은 노동력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구법이라는 점에서 도자기의 생산과정과 닮아 있어요. 검은색 노출콘크리트의 안료 성분은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산화철입니다. 유약의 원료로 쓰이던 느릅나무와 물푸레나무를 식재로 선택한 것도 개념적 맥락을 유지하기 위한 거예요.   공공시설의 설계와 실현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여러 행정 절차를 거치면서 건축가의 설계 의도를 지키고 완성도를 높이는 일일텐데요. 양구백자박물관 증축에서 어떤 협력 과정으로 이를 이끌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양구백자박물관을 작업하는 16년 동안 세 분의 군수에게 보고를 했고 행정과 계획을 협의한 문화체육과, 관광문화과 담당자와 백자박물관의 직원도 여럿이었어요. 하지만 방산자기박물관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행히 정두섭 관장님이 자리하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불만과 불평으로 만났지만 오랜 시간 함께 같은 장소를 고민하면서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죠. 관장님은 실비조차 되지 않는 설계비에도 애정을 쏟는 건축가가 대견했는지 일관되게 건축가의 설계 의도를 지지해 주셨어요. 현장에 자주 방문하지 못하고 공공건축물의 제도적 특수성으로 감리의 권리가 없는 설계자를 대신해 건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공간이 그 쓰임새에 충실하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의 건축물이 변주를 통해 확장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공정이라는 단어를 방패로 빙어적인 태도를 가지는 공공 영역에서 이러한 시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또 이런 시도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두섭 관장님이 코로나로 공공건축상 현장심사에는 함께 하지 못하고 영상으로 참여했어요. 심사위원들이 공공건축 발주의 기준이 되는 설계공모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이 수상의 결격 사유가 될 수도 있다고 물었죠. 관장님은 “제가 그 일로 계약부서와 다투고, 감사에서 수 차례의 경고와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떳떳하고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작업의 결과가 나쁘지 않았고 이후에도 성실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고 이진오 소장은 실력과 신의가 있는 건축가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증축도 같은 사람이 맡아서 완성해 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설계를 부탁하고 행정을 설득해서 진행한 것입니다.” 나 역시 그 마음의 진정성 때문에 일을 했어요. 시공의 품질은 형편없지만 품격을 유지하고 있어 다행입니다.   공공건축에서 발주, 시행, 운영의 영역과 건축가가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부분은 무엇인지, 제도적으로 보안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나라의 건축, 특히 공공건축의 법과 제도는 에너지효율등급이 나쁜 가전제품과 같아요. 절망스러운 것은 문제를 모두 알고 있지만 고칠 수 없다는 거죠. 혁명이 필요한 이유예요. 국민들은 건축 과정에서 공정, 안전, 친환경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제도와 규칙의 상호모순, 이율배반적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책임을 분산시키는 절차와 조달등록 제품의 이윤을 보장하는 시스템이 가장 문제예요. 기획, 예산 편성부터 설계자를 선정하는 설계공모 과정에서는 부단한 노력을 들여요. 반면 시공자를 선정하는 것은 로또복권 당첨과 같은 가격입찰이 대부분이죠. 어이없게도 더 나쁜 턴키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요. 민간시장에서 좋은 건축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을 살펴보면 답이 나올 거라고 봐요. 인터뷰 진행 임진영 
INTERVIEW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우수상, 성북 선잠박물관, 이은경(이엠에이건축사사무소) 성북선잠박물관 일대는 박물관과 여러 시설이 조성되고 있는 지역입니다. 지역의 특징과 선잠박물관이 들어서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선잠단은 조선 시대 역대 왕비가 누에로부터 좋은 실을 얻게 해달라는 기원을 드리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선잠단은 1908년에 사직단으로 옮겨진 이후 터로 남게 되었는데, 복권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인근에 선잠박물관이 조성되었습니다. 작지만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한 선잠박물관은 옛것을 살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잠단의 역사적 가치를 깨우고 함께 호흡하는 성북동 역사문화관광 거점이자 시민문화 공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초등학교에 기대어 있는 대지 주변 상황이 흥미롭습니다.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고자 하셨는지요? 성북동은 역사와 문화적 토대가 비옥하지만, 거리 풍경은 이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차 높은 초등학교 축대벽을 등지고 성북로만 바라보고 있는 위치가, 성북동의 역사적 풍경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잠박물관의 입면은, 직조의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비단처럼, 부분이 조립되어 전체가 만들어지는 구축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작은 박물관으로 시작했지만, 선잠단 방향으로 접하는 다른 공공건물까지 미래에 확장되는 것을 상상했어요. 역사적 거리가 현재에도 재해석되어 이어짐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리모델링 프로젝트라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기존 건물의 특징은 무엇이었는지, 새로 박물관을 조성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셨는지요? 기존 건물은 오래된 근린상가 건물이라서 층고가 낮고, 뒷면이 축대벽과 붙어있어서 평면이 얇아요. 그래서 박물관의 공간감을 실현하기는커녕 필요한 설비공간을 확보할 때 천장이 오히려 더 낮아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물관에 전시장, 수장고, 사무소 등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면적이 있어서, 바닥을 오픈하는 등의 공간적 사치는 지양하고, 가용면적을 최대한 활용하였습니다.   외장재가 건물의 흥미로운 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알루미늄 파사드를 만들게 된 이유와 제작 과정 중 에피소드가 궁금합니다. 선잠박물관 바로 앞으로 한양도성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긴 장벽이지만 산을 따라 곡면으로 올라가는 부드러움이 돌의 물성과 대조되며 아름답습니다. 성벽이 솔리드한 벽면이라면, 이와 상대적으로 가벼운 켜(layer)로서 투과하는 벽(silk wall)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알루미늄 질감으로 만들어진 파사드를 성북로를 따라 길고 곧게 뻗어 나가게 해서, 두 개의 벽이 마주 보며 상호 대화하는 구도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쉬운 것은 착공 후 공사비가 낙찰가 차이로 더욱 줄었습니다. 입면에서 의도했던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 10cm가 필요했지만, 8cm로 줄여 재료비를 절감해야 했습니다. 조립과 확장을 할 수 있는 축조 방식이므로, 나중에 깊이의 차이는 새로운 변화의 이미지를 만들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린생활시설이었던 건물이고 또 면적이 작다 보니 평면을 풀어내기 어려웠을 듯합니다.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내부 가용면적을 최대화하고 이동 동선을 끌어내고, 외부와 관계를 갖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증축한 장애인 엘리베이터로 올라가서 계단으로 내려오는 동선을 고려하여 계단이 전시의 확장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했어요. 가급적 기능적인 화장실과 사무실 공간은 숨겨서 이동 동선이 모두를 지나가며 주변을 전시장 일부처럼 경험하도록 의도하였습니다. 지붕에서는 한양도성 전망을, 길에서는 개방된 전시 공간을 열어두고자 했습니다.   성북구에 기반을 둔 사무소이면서 성북구의 공공건축에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공공시설의 설계와 실현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여러 행정 절차를 거치면서 건축가의 설계 의도를 끝까지 지키고 완성도를 높이는 일일 텐데요. 어떻게 이를 끌어내고 계시는지요? 공공건축의 실현 과정은 끊임없는 논의로 이루어집니다. 많은 관계자에게 설계 의도를 전달해 합의를 끌어내고, 3차원으로 종합되는 건물을 2차원의 분해되는 도면으로 그려내고, 낙찰가로 정해지는 시공사가 정해진 비용으로 실현할 수 있되 전체적인 완성도를 포기하지 않도록 디테일을 선택하고, 시공 현장에서 벌어지는 변수에 대응하며 설계 의도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공공건축의 발주, 시행, 운영의 영역에서 건축가가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고려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제도적으로 보완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공공건축은 건축설계 분야에 과도한 업무 범위와 법적 책임까지 지우고 있습니다. 건축 행위를 하기 위해 관련된 도시, 안전, 환경 등 여러 복합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업무도 건축에 부여하고 그 책임도 물고 있습니다. 발주처가 제시하는 지방계약법과 특약조항으로 만들어진 계약서를 볼 때 과중함과 불공정에 대한 무거운 짐을 느끼게 됩니다. 공공의 재산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일이기에 책임이 따르는 것이겠지만,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조적이고 감동을 주는 건축이 아닌, 늘 해오던 방식으로 복사하듯 건물을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특별하게 떠오르는 공공건축이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공정하며 대등한 관계, 명확한 업무로 일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좋은 결과물은 당연히 따라올 것 같습니다.  인터뷰 진행 임진영 
INTERVIEW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우수상, 성수책마루, 김태영, 김현준(어반토폴로지)+장수정(권축권장건축사사무소) 책마루는 기존 건물의 공간을 활용하는 기획입니다. 공간 전략은 어떻게 세우셨는지요? 김태영 기존 건물이 가지고 있는 공간적 잠재성, 가치를 재정의하여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현재 사용자의 공간 점유 방식도 세심히 관찰하여, 유지하거나 더 활성화했으면 하는 가치 매김을 하기도 합니다. 기존 건물의 공간적 특성을 최대한 향유할 수 있는 공간 점유 방식, 현재의 사용 방식을 강화하거나 기억할 수 있는 건축 요소의 개입이 가능하도록 큰 원칙과 접근방식을 수립합니다. 책마루에 공통으로 사용된 공간 용어들은 그 원칙과 전략의 결과입니다. 성수책마루 뿐만 아니라 책마루 시리즈를 여럿 참여했습니다.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셨는지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현준 성동책마루는 '책마루'라는 공공 서가형 로비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첫 프로젝트였습니다. 구청 로비라는 특성, 1,000명이 넘는 공무원의 업무공간이라는 점, 불특정 다수의 민원인이 방문한다는 점, 무지개도서관이 이미 자리해서 복합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는 점이 도전이자 가능성이었습니다. 성수책마루는 공연예술장이 주 기능인 아트홀의 로비였습니다. 사용 시간대가 명확하고 공간 사용 밀도가 확연히 높아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다수의 프로그램 혹은 서로 간섭할 수 있는 사용자가 한 공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전제라서, 이를 공간 영역의 설정이나 동선 체계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에 특히 중점을 두었습니다. 성수책마루가 들어설 성수문화복지회관의 조건은 무엇이었는지, 해결해야 할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장수정 책을 매개로 한 공공의 거실 같은 공간이고 편안하고 친근한 분위기를 추구한다는 점은 전체 책마루 프로젝트의 공통된 특성인 것 같아요. 공업지역의 특성상 공공건물임에도 조경 공간이 거의 없다는 점, 기존 건물의 지오메트리(geometry)가 복잡하다는 점은 성동구청과 다른 점이었어요. 성동책마루는 계단이나, 서가의 일부에 곡선의 요소를 두어서 그리드를 깨는 시도를 했다면, 여기에서는 가급적 기존 건물의 요소와 평행한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처음부터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태도를 가진 방식을 고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끼리는 책마루가 시리즈가 된다면 주변 지역에 좀 더 기여하는 북 큐레이션을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는데, 명확한 기획을 하지는 못했어요. 다만 이 근처는 젊은 창업자들이 많은 동네니까, 외부 공간이 페차쿠차같은 느낌으로 활용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조경과 휴식, 발표를 겸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했습니다.   성수책마루의 주어진 프로그램을 담기 위해 고민했던 부분도 궁금합니다. 특히 첫 번째 책마루에 대한 호응도 높고 그에 대한 피드백도 고려했을 듯합니다. 김태영 책마루에 공통으로 사용했으면 하는 공간 전략을 성수책마루의 조건에 맞도록 적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곳은 레벨 차이가 나는 여러 공간이 로비에서 연결되어 공연장까지 이어져요. 그리고 소규모 공연이 로비에서 벌어지기도 하고요. 그리고 공연 전후로 관객들이 대기하거나 모이는 장소가 확보되어야 하는 점도 주목하였습니다. 기존 카페가 중심에 있지만, 잘 쓰이지 않는다는 점, 출입 동선과 화장실 입구가 노출된다는 문제에도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외부에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옥외 계단이 낡았다는 것과 길에서 잘 보이지 않는 한계도 개선하고 싶었어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공연이 가능한 '계단 마당'과 중층의 어린이 서가 '북웨이', 서가로 둘러싸여 안정된 느낌을 주는 '클라우드 서가', 그리고 사서 코너와 티켓 오피스를 이어주는 '아카이브' 서가 등을 제안했습니다. 성동책마루에서 사용한 공간 전략을 적용한 것이죠. 가운데 카페를 활성화하기 위해 동선 체계를 재조직하고자 하였습니다. 3개층 높이의 아트리움을 채우고 있는 '아카이브' 대신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과 화단을 제안해서, 많은 사람이 오가는 거리의 코너에서 성수책마루가 인지되도록 하였습니다. 기존 건물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담기 위해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김현준 ‘책마루’는, 새로운 프로그램이기보다 기존의 프로그램들과 어떻게 관계 맺고 융합되는가에 중점을 두고 기획되었습니다. 성동책마루, 성수책마루 건물 상층부에는 공공도서관이 있었어요. 이는 책마루가 공공도서관이라는 기존 프로그램 범주에 속하지 않음을 반증합니다. 성수책마루 위층에는 공연장 외에도 6개의 다른 공공기관이 입주해 있지만, 이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은 부재했다고 합니다. 다른 기관의 직원들, 각각의 민원인들, 그리고 방문객들의 관계와 공유, 흐름과 머무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 재료의 선택에서 고심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장수정 책마루가 비슷한 언어를 갖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클라우드 서가, 스탠드형 계단, 포켓 공간 등등의 공간 요소는 공통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출발했습니다. 이곳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생동감 있지만,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기도 해서, 편안하고 친근한 분위기를 주는 형상과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성수, 성동 둘 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건물에서 진행되는 작업이라, 현장 작업 시간을 줄이고 가급적 공장에서 작업하는 부분을 늘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시민들이 공공건축의 공간을 더 쉽게 활용하기 위해서 고민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장수정 최근 건축 단위의 변화는 정말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지하철 역사나, 동네 길 같은 건축과 도시 사이에 있는 부분도 좀 더 잘 가꿔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구도심의 길을 걷다 보면 가로에 지하철 환기구, 전기설비, 불규칙한 맨홀 등 때문에 산만한데요. 서울은 건물 단위로 제공되는 공간의 퀄리티는 좋은데, 도시 전체로의 경험은 조금 아쉬울 때가 있어요. 그리고 이런 마을 만들기 같은 사업에서 자꾸 벽화를 그리는 방향성은 아쉽습니다. 덧붙이는 것보다 잘 정리하고 버리는 작업이 선행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기존 건물을 활용한다는 책마루의 전략이 흥미롭습니다. 도시의 점적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앞으로 가능성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혹은 건축가로서 더 제안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장수정 사용자의 의견을 모으고 기획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어요. 책마루로 보자면 지역 주민들이 읽고 싶은 책이나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 같은 것들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되는 거죠. 물론 주변 거주자나 지역의 특징을 공개된 데이터 안에서 유추할 수 있지만, 리노베이션의 특성상 신축보다는 공사 기간도 짧고 사용자와의 거리가 더 가까워서 그런 특성을 잘 활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현준 오픈하자마자 별도의 상업적 마케팅 없이 지역 어머니들 SNS에 화제가 되었어요. 몰려드는 사람으로 주말 포함 저녁 9시까지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공공기관의 기획 단계에서 또는 도시 및 건축과 통합되어 이러한 프로젝트가 이루어지기가 참 어렵습니다. 건축법적 용도, 기능적으로 기획되다 보니, 공공기관의 로비 공간은 전국적으로 유사해요. 관리와 보안의 문제도 있고, 공간에 맞는 가구를 제대로 선정하기 어려운 절차적 문제도 있으며, 공간적 또는 운영의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형적인 재료로 시공해 버리는 결과가 단조로움에 한몫을 하기도 합니다. 도시 건축적으로 중요한 공공건물은 기존의 기획, 공모전 방식과 다르게 거시적 그리고 미시적 관점을 함께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김태영 점적인 네트워크의 특성은 동등하거나 유사한 퀄리티의 분산을 통해 접근성을 확보하고 공정한 분배를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네트워크로써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물리적으로 또는 인프라적으로 연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접근성이 좋은 몇 군데에 집중하여 더 좋은 퀄리티를 가지는 공공건축을 실현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미 실현된 지 오래되었지만, 낙후된 동네에 이미 활성화된 시장과 도서관, 취업 지원 등 공공복지 네트워크를 결합하고자 한 런던의 아이디어스토어 프로젝트가 그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해요. 리모델링이 아니라 신축으로 접근한 방식도 흥미로운 프로젝트입니다. 공공건축의 기획 및 발주 방식이 더 유연해진다면 우리 도시와 건축, 공공서비스에 맞는 점적 네트워크를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터뷰 진행 임진영 
INTERVIEW 공공건축의 로비를 쉼과 배움의 공간으로, 성동구 책마루 시리즈, 정원오 성동구청장 성동구청 <00책마루>는 어떤 프로젝트인가요? 책마루는 사람과 도시의 상호성에 주목해 포용도시로 나아가는 시도입니다. UN 해비타트는 포용도시를 “모든 사람이 재산, 성별, 연령, 인종, 종교에 상관없이 도시가 제공해야 할 기회들에 생산적이고 긍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는 장소(UN Habitat, 2002)”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책마루를 기획한 것은 구민에게 도시 속 더 열린 공간(또는 행정), 더 가까운 공간(또는 행정), 더 경계 없는 공간(또는 행정)이 된다면, 포용도시로 나아가는 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청에 남는 공간을 시민들에게 돌려드리면 어떨까, 시민들이 더 잘 쓰시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현재 조성된 성동책마루, 성수책마루, 독서당책마루, 의사랑(구의회)에 대해 짧게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동책마루는 2018년 1월 성동구청 1층 로비에 문을 열었으며 총 장서 3만여 권 중 8,000여 권을 성동구 직원들과 지역 주민이 기증한 도서로 마련되었습니다. 성동책마루에는 매주 수요일 12시 <정오의 문화공연>이 진행되며, 지역 예술인의 공연무대와 전시, 독서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습니다. 성수책마루는 2019년 3월 공연장과 도서관이 있는 성수문화복지회관 3층에 조성했습니다. 약 9천여 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성수책마루에서는 아트홀에 상주한 예술단체의 공연 등 공연장과 연계한 문화 행사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두 책마루 모두 365일 오전 9시에서 오후 9시까지 문을 열고, 폭염, 한파 때는 철야로 운영해 주민들이 무더위를 피해 쉴 수 있는 무더위 쉼터로도 활용해 공공공간으로서 복지 기능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공공건물의 로비를 주목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기존 로비의 아쉬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로비(공용공간)를 활용해보자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첫 시작은 로비에서 민원을 처리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민들의 시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부분 공공청사 1층은 로비 역할을 합니다. 모든 공간이 빼곡히 다 제 기능과 역할에 맞춰 채워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민들이 이 공간을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분명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친 두 단어가 바로 쉼과 배움이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벽면에 구정 홍보물이 아니라 서가가 있다면, 모든 의자가 민원 창구를 바라보며 한 방향으로 배열되지 않고, 각기 다른 모양의 의자가 서로 눈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거나, 창가를 향해 사색에 잠길 수 있도록 놓여 있다면 하는 상상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기다림의 공간이 아닌 직원과 시민 모두를 위한 쉼과 배움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함께 생겼습니다. 이 생각을 우리 구청 직원들과 나누니 아이디어가 샘솟듯이 나왔습니다. 직원, 시민과 함께 TF를 구성해 함께 머리를 맞대니 창의적인 건축적 요소들이 덧대어졌습니다. 3만여 권의 장서와 함께 갤러리, 북웨이, 객석 역할을 하는 계단이 추가됐습니다. 또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아기자기한 무지개색 책장과 다락방 형태의 공간도 만들었습니다. 직원, 주민 그리고 건축가의 상상력과 세심함이 묻어난 덕분에 문화복합공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책마루라는 이름 역시 구청 직원들이 제안해 선정됐습니다.   활용 프로그램으로 열린 도서관을 채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책마루 프로그램 기획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요? 4차 산업혁명 등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정부의 역할 중 하나는 평생교육을 충분히 제공하는 것입니다. 하룻밤 사이에도 산업과 기술이 급격히 바뀌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동구는 유네스코 평생학습도시로 지정돼 있습니다. 독서당 인문 아카데미 등 다양한 평생학습센터를 개설하고 있고, 허준약초학교, 성동지식대학 등 특화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하고 또 지원하고 있습니다. 성동구가 ‘평생직장’이 될 순 없지만, 시민 누구나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평생교육’에 대한 지원은 아낌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 성동구민이 책 살 돈이 없어서, 책 읽을 곳이 없어서 배움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 일은 없어야 비로소 포용도시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책마루는 모두에게 열린 배움터이자 쉼터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무엇보다 시간에 유연합니다. 관공서 업무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365일 평일, 주말 언제든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구청 문을 활짝 열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많은 공공기관이 문을 닫을 때도 닫지 않았습니다. 방역 수칙을 더욱 꼼꼼히 지켜 주신 시민들과 더욱더 신경 써서 관리한 직원들 덕분에 안전하게 책마루를 운영할 수 있었고, 아이들도, 어르신들도 변함없이 책마루를 다녀가 주셨습니다.   성동구의 지역적 특징을 고려할 때, 새로운 건축물을 조성하는 대신 여백의 공간을 활용한 책마루 방식이 갖는 장점과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여백의 미(美)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백을 채울 자리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은 누군가 채워야 한다는 말이지 않겠습니까. 행정이, 구청이 먼저 만든 공공공간의 여백을 아름답게 채울 사람은 당연히 시민뿐입니다. 실제로 이용하는 시민에 의해서 공간은 끊임없이 그 쓸모가 있게 되고 또 변하기 때문입니다. 책마루는 도심 속, 공공청사 속 일부 공간이지만, 그 의의는 이용하는 시민들에 의해 다양하게 이용되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공공공간을 설계하고, 또 이용하는 새로운 접근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책마루 시리즈를 이어가면서 어려움도 있으셨을 듯합니다. 성동구의 모든 공공청사에 책마루 또는 책마루와 비슷한 열린 공간을 조성하고 싶지만, 물리적인 한계에 부딪힙니다. 일정 정도의 면적이 확보되어야 비로소 책마루를 책마루답게 조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 연구해 다양한 건축적 요소를 활용해 여러 형태의 책마루가 나올 수 있기를 바라고 노력해가겠습니다.   인터뷰 진행 임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