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HOUSE 재단법인 아름지기 사옥, 김종규, 김봉렬 2019년 10월 15일 4:00PM
OPENHOUSE 만휴당(晩休堂), 서승모 2019년 10월 19일 10:00AM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영국대사관, F.J. 마셜 2019년 9월 27일 3:30PM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원효로 예수성심성당과 옛 용산신학교, E. 코스트 신부 2019년 9월 22일 1:00PM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근대 및 왕실의 국제 교류 공간 국제 교류의 장은 국가 간 교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간 교류의 장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며, 특히 근대 시기에는 선교와 교육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교류가 이어져 왔다. 근대의 선교기지와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근현대 시기의 학교는 서양 문물의 전파와 함께, 한국의 문화를 존중하고 맞이하는 교류의 장이 되었다. 대표적 근대 선교기지와 교육기지를 살펴본다. 또한 근대국가로 변모하기 위해 열강들과 치열한 외교 전쟁을 펼쳐야 했던 대한제국의 공간들은 근대를 향한 꿈과 좌절이 배어있는 곳이다. 경운궁(현 덕수궁)을 중심으로 한 대한제국의 외교 장소와 건축물을 통해 대한제국 국제 교류 공간의 근대성을 살펴본다. 
SPECIAL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③ 이론적 배경의 출발점은 피터 아이젠만이었지만 케네스 프램튼(Kenneth Frampton)의 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어요. 글은 언제 처음 접했나요?   한국에서 대학생 때 아티클로 접했던 것 같아요. 책으로 접한 것은 1997년~98년 정도였고요. 스위스로 교환학생을 가기로 하게 된 계기도 ‘버내큘러 아키텍쳐’에 대한 케네스 프램튼의 내용이 많은 영향을 줬어요. 케네스 프램튼은 책에서 동서양 건축의 비교,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소재와 소재의 결부 방식, 중국이나 일본의 목공예 결부 방식이 어떤 식으로 환경을 구축하는가에 관해 이야기해요. 그가 말하고 있는 논리는 텍토닉인데, 피터 아이젠만의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어요. 인문, 사회, 과학적인 컨텍스트로 폭이 더 넓어졌다고 느꼈죠. 피터 아이젠만이 건축가 사고의 논리성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케네스의 책에 와서는 더 확장된 느낌이었달까요. 그런 부분에 매료되었어요. 구축의 논리를 역사적으로 다루기도 하고요. 그래서 직접 스위스라는 사회를 경험하고, 환경이 설계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을 확인하고 싶었어요.   지역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계신가요? 지역성은 수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최근 VR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만, 지역성을 벤치마킹함으로써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운영하는 방법과 관계에 대한 학습, 그리고 우리 지역 사회에 어떻게 반영해야 할 것인가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좋은 모델의 재현으로는 해결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쓰타야처럼 해달라는 사람들은 많아요. 그러나 그 어떤 모델도 한국에서 현지와 똑같이 성공할 수는 없어요. 일본인의 직장 문화와 그들이 갖는 취미 세계, 종업원들의 큐레이션 능력, 그 누구보다도 경험이 많다는 것 등이 함께 작용해야 하는 거죠. 그저 상품과 음식, 책만 꽂힌 공간이 생겨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걸 받아들이는 상태여야 하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는 무얼 해야 하는 걸까? 한국의 쓰타야는 결국 다른 것이어야 해요. 쓰타야를 통해 인사이트는 얻을 수는 있어도, 수출할 수 있는 모델은 아니라고 봐요. 모든 게 글로벌해지더라도 지역성은 생존력이 클 거라고 봐요.   건축적인 측면에서 지역성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가 될 수 있다고 보나요? 영향을 미치는 요소일까요? 지역성은 영향을 미치는 요소예요. 지역성을 만드는 인자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가 문제예요. 지역성의 가장 직접적인 개념으로는 프로젝트의 특수 상황, 특히 발주처의 상황에 대한 맥락이 있어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는 발주처의 상황보다는 건축가의 입장에 치우쳐 있어요. 예를 들면 프로젝트의 정의를 지나치게 지형적 관계성에 두죠. 갤러리를 절벽이 있는 대지에 최대한 어우러지게 만들겠다는 것처럼요. 그런 판단 이전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건축주의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다음에 지형 등을 고려하는 거고요.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비용의 문제가 먼저 고려가 되지 않는다면 작업이 완성되기 힘들어질 거예요. 많은 사람이 의뢰인에 대한 고려를 비즈니스적이라 생각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것이 인문학적이고 사람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해요. 파트너쉽을 가진 프로젝트를 만들어나가기란 너무 힘든 일이에요. 비용만 주면서 원하는 대로 만들라고 하는 의뢰인이 몇이나 될까요? 대부분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건축가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지는 않아요. 따라서 건축가는 설득해야 하죠. 그들을 이해시키고 끌고 와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사람들의 고민은 직접적이고 자극적이기 때문에 건축가가 들여야 하는 노력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죠.   그저 고상하게 이야기하는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겠네요. 그렇죠.   귀국 후 진행한 대표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어요. 대학교수로 왔지만, 당시 한국의 시장이나 상황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요. 그때는 일단 너무 몰랐어요. 의뢰인을 만날 수 있는 상황이 거의 없다가, 교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나마 ‘교수’가 약간의 보증수표로 작동하는 시장은 아주 작아요. 또 저와 일을 하긴 하지만 교수 타이틀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부리기도 쉽지 않죠. 이건 당사자들의 인식 문제예요. 정말 심한 사람들은 업체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왜냐면 자신이 상대하는 건축가가 명성이 없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지‘,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 식의 말들을 하는 사람도 있죠. 이런 갈등이 제가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의 실무 경험이었어요. 업체 취급하거나, 선생 취급하거나. 당시 저는 35살이라는 이도 저도 아닌 나이였고, 스스로 증명해내기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첫 프로젝트는 주로 서울시의 일들이었어요.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바로 <한강 보행자 터널 프로젝트>였어요. 짧은 설계, 시공 기간, 적은 예산으로 많은 수의 보행자 터널을 리노베이션해야 하는 미션이었는데요. ‘싸고 빠르게’를 원하는 한국 시장에 산업 재료로 문제를 해결한 첫 번째 프로젝트였습니다. 과정은 어땠나요? 갈등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지속해 나간다는 것이 괴로웠어요. 시간이 매우 부족해서 디자인 검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던 상황을 극도로 단순하게 진행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었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인지하거나 인정하기 쉬운 상황이 만들어졌달까요. 성공적인 마감 이후부터는 ‘정말 빠른 시간 안에 설계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인지로 시장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제가 따로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죠. 일정이 너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찾아왔거나, 문제도 매우 단순하고 목표는 시간 안에 완성하는 것이라는 식의 프로젝트가 많이 들어왔어요. 대부분은 담당 건축가가 있었다가 발주처의 의견 확정이 미뤄지면서 버려진 프로젝트를 하게 된 경우가 많았죠.   산업 재료인 폴리카보네이트 모듈은 교수님의 관심사와도 부합했겠지만 모든 게 빠르게 돌아가는 한국 상황에서 절묘한 한 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80m짜리 터널 안에 타일이나 벽돌, 도장 외에 사용하기 힘든 상황에서 어떤 재료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도장보다 더 빠른 속도의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습식 대신 건식으로 가야 한다고 정했죠. 건식 재료는 곧 조립식일 테니, 조립식의 개념을 생각했고. 처음엔 재활용 폐자재도 생각해보고 요구르트병 수천, 수만 개의 가격을 알아보기도 했어요. 공산품을 찍어내는 과정을 알아보다가 폴리카보네이트가 가장 흔한 소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물론 건축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지 재료였어요. 건식 연결부를 생각하면 요소(component)가 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또 서도호 씨의 작업도 영향을 미쳤죠. 밀도(density)에 대해 의미 있게 생각해요. 밀도가 만들어 내는 강력한 텍스쳐같은 것들요. 큰 것 하나를 만들긴 힘들지만 작은 걸 여러 개 만들기는 쉬우니까요. 제 작업을 발표할 때도 서도호 씨의 작업에 대해 많이 언급해요.   아이디어가 있다 하더라도 건축 재료로 사용된 적이 없어서 제작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쉽지는 않은데, 당시 함께 하는 구성원들이 없었기에 제가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유학을 다녀오고 나니 유학을 가지 않았던 친구들의 경력이 훨씬 높더라고요. 이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니, 표준 디테일에 관한 게임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차라리 디테일을 만들자는 생각이었어요. 어쨌건 디테일의 본질은 물이 새지 않는 것이니까. 표준 디테일보다 더 경제적인 해법을 찾게 되면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게 제 지론이에요. 그래서 아직도 우리 사무실은 표준 디테일이 없어요. 그때그때 풀어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죠. 보통 대형설계사무소는 계단, 난간 등의 디테일이 정해져 있지만 우리는 계속 만들어요. 최근 되어서야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자는 내부 의견이 있지만 디테일 재활용을 위한 것은 아니에요. 조금 더 진보된 방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매번 새로운 디테일을 만들지만 우리의 논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해요.     구체적으로 얼마나 기간과 예산을 단축했는지 궁금해요. 합정 보행자 터널 프로젝트 같은 경우 시공까지 일주일에 하나씩 마감했던 것 같아요. 원래 주어진 기간은 좀 더 길었지만요. 개소당 예산이 6억 원이었는데 2억씩 예산을 절감해서 20억을 절약했죠. 서울시가 매우 좋아했어요.   슬프게도 시간과 예산은 한국 시장의 핵심처럼 보여요. 그래서 아쉬워요. 시간과 예산이 우리의 가치처럼 되는 것이 매우 아쉬워요. 컨버전스, 협업의 의미에서 이런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나라는 협업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작동했을 때 얼마나 상승효과가 있을지가 의문이에요. 능력 있는 뛰어난 개인들이 모여서 그다지 의미 있는 일을 해내지는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더 빠르고 더 싸게’를 외치는 한국 사회에서 산업적 생산 방식이 두각을 나타낸 것 같아요. 특히나 한강 보행자 터널 프로젝트처럼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에서는 더더욱 그렇고요. 인상적인 건 문제 해결에 대한 추가 비용을 청구했다는 부분이었어요. 빠른 배송을 위해 비용을 더 지불한다는 페덱스(Fedex)를 예로 들었던 것도 흥미롭고요. 건축이라는 분야가 제값을 청구할 수 있는, 비용에 합당한 지점을 보여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도 문제 해결 비용을 더 요구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과감한 태도였을 것 같아요. 제가 건축을 해나가는 방향 자체가 일반적인 건축 수련 방식과는 굉장히 달랐어요. 저는 표준 디테일을 잘 알지 못했고, 어떻게 보면 그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마찬가지로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타당한 지점을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거예요. 용기를 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에 이야기한 것일 뿐이죠. 만약 제가 설계 조직이나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더라면 하지 못했을 일이에요. 한울건축에서 실무 할 때나 미국에서의 실무는 의뢰인과 발주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의 구체화에 집중되어 있었어요. 그 때문에 발주처와 건축가, 그것이 돌아가는 기류와 시스템에 대한 정보가 저에게 있을 리 만무했어요. 페덱스를 생각해보세요. 목적지에 빨리 배송해 주기 때문에 비싸요. 그러니까 빠르면 비용을 더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상대방은 황당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본인들도 워낙 급했던 상황인 만큼, 저에게 약속(기한)을 지키지 못할 것에 대비해 페널티를 걸더라고요. 하지만 기한은 지켰고, 그렇게 인센티브를 받게 되었죠. 너무 많이 알면 못 하는 것들이 있어요. 지식(knowledge)이라면 고민을 더 했을 테지만, 정보(information)가 많은 상황은 두려움만 커지는 것일 수 있어요.   현실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학교에서 졸업 설계반 학생들의 면담을 한 적이 있어요. 설계를 잘하던 친구였는데, 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어요. 건축 설계사무소에 취직하게 되면 연봉 얼마를 받게 되는데, 그 연봉으로는 결혼할 상대도 맞벌이를 해야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고민이었어요. 문제는 그 기준점이 높고요. 아기가 태어나면 영어유치원에도 보낼 수 없고 백화점에서 장을 보기에도 터무니없을 거라는 거죠. 저는 그 친구에게 설계를 하지 말라고 조언했어요. 당신은 이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라고요. 생각해 보면, 선배들도 정말 너무 하기 싫은 일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거예요. 왜 굳이 후배에게 자신들의 삶이 불행하다고 하겠어요. 말하는 뉘앙스와는 별개로, 그 이면에는 본인들이 하고 있는 일의 자부심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사람은 프로그램한 대로 살아갈 수 없어요. 본인들이 예측하는 것만큼 인생이 단순하게 흘러가지는 않아요. 체크리스트에 하나씩 체크하며 넘어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니까. 결론은, 너무 많은 정보들을 갖고 있다면 용기를 잃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어떻게 지식화하고 현명하게 체득하느냐가 관건일 거예요. 저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전혀 예측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어요. 그저 내 일을 묵묵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 살게 되겠지라고만 생각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지금의 환경이 다른 것같아요. 예전엔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는 시대였고, 지금은 그마저도 불투명한 시대이니까요. 상대적으로 어려운 시기인 것은 맞지만 본질의 문제를 생각하면 판단하기가 훨씬 쉽다고 생각해요. 지금 상황에서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상황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실천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오케이’예요. 그러나 50대 즈음에 접어들었을 때 ‘힘들었더라도, 그 때 디자인을 할 걸’이라는 후회가 남아있게 된다면, 그 인생은 불행하지 않을까요? 어떠한 사회에 살아가던 간에, 결국 본인의 가치 판단 문제예요. 좋아하는 것을 할 것인가, 현실적인(금전적인) 부분에 비중을 둘 것인가. 이런 말에 지금 공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건축가가 문제 해결 비용을 청구하고 합리적으로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고무적인 부분이라 생각해요. 그만큼 건축가가 리스크를 감당했기 때문에 가능했고요. 맞아요. 게다가 항상 성공하는 것도 아니에요. 말에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 힘들어지기도 해요. 계약금보다 더한 피해 보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해요. 물론 지금까지는 큰 피해가 되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요. 또 손해를 감수하고 감행한 경우도 있어요. 예전같았으면 그 정도면 사무실이 뒤집어 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규모도 커져서 크게 무리가는 상황이 오지는 않아요. 사람이 어떻게 매번 안타만 칠 수 없잖아요. 다만 타율이 너무 낮아지면 곤란하니까 일정 이상으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인 것같아요.   폴리카보네이트 마감을 활용한 이후, ‘모델하우스계의 황태자’라는 표현도 들었다고 했어요. 임시로 만들었다 부수는 모델하우스에 새로운 재질 선택, 입면 스터디, 모듈화하는 방식 등 산업 생산 방식은 딱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니었나 싶어요. 잘 맞아 떨어졌어요. 그리고 모델하우스는 저에게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실험을 할 기회를 준 셈이었어요. 보통 모델하우스의 경우 3~4개월 내로 마무리되어요. 일반적인 주택의 경우에는 설계에서 결과까지 1년이 넘게 걸리는데, 빠른 시간 내에 그것보다 큰 규모의 프로젝트 결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파빌리온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실험에 대한 부담도 적었고요. 프로젝트를 빠른 시간 내에 매니징한다든지, 운영방식에 대해서까지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프로젝트들이었어요.   모델하우스를 통해 여러 실험을 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재료에 대한 스터디와 제작 방식, 운반을 고려한 사이즈- 예를 들면 트럭에 실릴 수 있느냐-까지 고려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재료에 대한 실험은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 그것을 통해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 또, 이러한 시도에 흥미가 사라진 시점이 있는지 궁금해요. 가장 경계했던 것은 매너리즘이에요. 공장 산업 방식이라는 것이 굉장히 다양하나, 건축에 적용 가능한 스케일에서 보자면 몰드 작업이 주를 이뤄요. 사출, 프레스 등의 방식은 건축 스케일에서 적용할만한 기계 사이즈도 없었어요. 따라서 몰드 작업을 주축으로 했기 때문에 그건 자신이 있어요. 이제는 형태만 봐도 몰드 작업이 가능하겠다, 아니겠다를 파일 수정 없이 진행하게 되어요. 몰드가 우리의 노하우가 된거죠. 다만 빠른 완성을 요구할 때에 몰드보다 빠른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로 인해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진것이 아닌지 고민했어요. 물론 조금 더 확산적으로 사고해서 더 할 수 있겠지만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이 정도 했으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오픈소스로 돌리자는 이야기도 스태프들과 나누는 중이에요.   모델하우스 이후에는 새로운 방식을 테스트하기 위한 투자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마침 전시 프로젝트가 많이 들어왔어요. 전시를 통해 실험 대상을 정했죠. 전시 준비는 건축보다 훨씬 더 개념적이거나 시론적인 부분에 대해 사고할 수 있기 때문에 이때가 또다른 중요한 시기였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필두로 FRP라는 물성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고, 그 외의 전시를 통해서도 절곡기계 사용, 미디어 관련 실험을 했어요. 항상 전시는 일종의 테스트베드가 되어주었죠. 예를 들면 현대백화점 어린이책미술관 설계에 FRP를 적용했더니 훨씬 부드럽게 해결되었고요. 하나은행 PLACE 1의 부분 몰드로 모두 FRP가 사용되었어요. 금호미술관 전시에서는 절곡기계 사용을 실험했는데 아직 설계에 직접 적용해보지는 않았어요. 입면 구조(façade structure)를 스틸로 만드려는 시도인데, 전시 준비 과정이 데이터화되어 이후 실무에서 물성 작업에 영향을 주게 되더라고요.   건축에 적용할만한 산업재의 규격이 많지 않다는 것이 건축과 일반 산업과의 차이를 가장 명쾌하게 보여주는 지점인 것같아요. 스케일이 다르니까요.   산업방식에 대한 관심이 결국 그것을 전환하는 지점을 만난게 된것이 아닌가 싶어요. 건축에서 컴포넌트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을 것 같은데요. 학생 때도 크리틱을 받을 떄 제 작업을 두고 ‘kit & part’ 라고 정의를 내리더라고요. 하나은행 PLACE 1 프로젝트까지는 부품 제작 공정과 같은 그동안의 맥락과 함께 했었고, 한남동 빌딩이나 폴스미스의 경우도 건물은 일체화되었지만 작업의 공정상으로는 부분적으로 같은 매락이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울릉도 코스모스(kosmos)호텔 프로젝트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어요. 일체화되었기 때문이에요. 울릉도는 물리적 상황을 반영하여 한번에 구축했죠. 공간을 이야기하지 않고 외피에만 집중을 하는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직원들은 ‘껍데기 건축’이라고 폄하했다며 울분을 토해냈지만 정작 저는 별 관심이 없었어요. 제 반응은 ‘나 껍데기 좋아하는데(웃음)’ 정도였어요. 뭐 어때? 껍데기라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캐쥬얼하게 반응했죠. 직원들은 조금 억울해 했지만요. 어쨌든 비판을 불식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울릉도의 경우는 결과물로 이야기했다고 생각해요. 그 상황에서 최적화된 시스템은 한번에 구조물을 구축하는 것이었기에 선택했을 뿐이지만요.   건축 담론을 이야기할 때에, 저도 들으면서 ‘진짜 어렵다, 나도 어려운데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더 어려울까’ 싶어요. ‘왜 이렇게 건축이 어려워졌을까’에 대해 생각해요. 어짜피 건축은 짓기 위해 어려워야 하는 것이지, 보고 반응하는 데 어려울 필요는 없다고 봐요. 물론 콘크리트 벽 하나만으로도 심오한 인사이트를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해요. 도슨트는 그것을 쉽게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갖지만,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니겠죠. 그래도 내면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사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사이트를 주는 건축이라면 그건 예술의 경지라고 생각해요. 건축도 그럴 수 있지만, 건축이 기본적으로 갖는 역할은 예술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건축의 본질은 외부 환경으로부터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 그 이외는 본질이 아니죠.   진행 임진영 녹취 및 정리 우경희  사진 이강석 인터뷰④에서 이어집니다.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중명전 덕수궁 중명전은 1901년 황실도서관 용도로 지어진 것으로 궁중에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처음 이름은 수옥헌이었다가 1904년 덕수궁의 화재로 고종 황제가 이곳을 평상시 집무실 겸 외국사절의 접견실로 사용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곳은 대한제국 말기 주요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곳이자, 1907년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가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했다가 일제에 의해 퇴위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책봉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덕수궁 권역이 축소되었고, 1915년에는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 외국인 사교 클럽인 경성구락부(Seoul Union Club)로 사용되었다. 또한 1925년에는 화재로 인해 외벽만 남기고 소실되었다가 다시 재건축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원형을 잃었다. 2007년에 중명전이 공식적으로 덕수궁에 편입되었고 2009년 복원을 착수하여 2010년 공사를 완료하였다. 현재는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위탁 관리하고 있다. 출처 및 사진 : 서울 중구청, 문화재청 제공   주소 서울시 중구 정동길 41-11 이용 시간 09:30 – 17:30 휴관일 매주 월요일 이용요금 무료 문의 문화유산국민신탁 https://nationaltrustkorea.org/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한 시대”,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 한국에 오신 지 2년이 되어간다. 한국에 오기 전 서울에 대해 접할 기회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2003년과 2004년에 처음 한국을 짧게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이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4년 후인 2017년에 다시 왔을 때 변화한 서울의 모습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여러 고궁이 복원되고 녹지가 조성되어 수많은 매력적인 공간들이 새로 생겨나 있었다. 주한 영국대사로 부임하기 전, 2017년 하반기에 서울에 머물며 한국어를 공부했다. 이때 여러 장소를 방문하여 서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한 곳을 고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사관 옆에 있는 덕수궁은 산책하기 매우 좋다. 생각에 잠겨야 할 때 종종 덕수궁을 걷곤 한다. 가끔은 연필과 스케치북을 챙겨가서 덕수궁을 스케치하기도 한다. 서울의 박물관과 미술관도 매우 좋아한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청계천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 그리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자주 간다. 각 박물관의 특별전도 다 챙겨보려고 노력한다. 내가 오기 전 옛 서울의 모습을 매번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돈의문박물관마을도 찾아가기 좋은 장소다. 광장시장과 같은 서울의 전통 시장도 좋아하는 곳 중 하나다. 동대문 시장의 수많은 옷과 액세서리의 종류는 갈 때마다 매번 놀랍다. 야구팬이기 때문에 잠실 야구경기장 또한 내 리스트의 상위 10위에 항상 포함돼 있다. 이 모든 장소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경험은 바로 인왕산 등산이다. 인왕산에 오르면 서울의 멋진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윤동주 문학관에서 그의 삶과 시를 감상하는 것 또한 매우 감명 깊었던 경험 중 하나다.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위치한 서울시 중구 정동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과거 한국에서 영국대사관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사관도 영국대사관이 유일하다. 정동이라는 장소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조선 시대와 대한제국의 수많은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중구 정동에서 살며, 또 일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다. 그 시대에 건축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축물 대부분은 현재 박물관 또는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여 영국의 선대 외교관들이 130여 년 전 사용했던 건물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역사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정동에는 영국문화원도 있다. 한국 최초의 현대 교육 기관 중 한 곳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위치한 이곳에서 영국문화원은 다양한 연령층에 영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사관저가 1890년에 지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벽돌과 석재를 이용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서양식 건물이다. 그로부터 130여 년이 흘렀고, 보기 드물게 여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건축, 디자인 강국으로 유명한 영국인데, 혹시 새로운 건축 디자인에 대한 욕심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영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자국의 디자인 및 건축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와 전통 또한 존중한다. 선대 외교관들이 한영 관계를 구축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건물을 이어받아 오늘날까지 우리의 파트너들을 환영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는 종종 서울시청 서소문 건물 13층에 올라 정동의 전경을 눈에 담는다.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 사이에 영국 관저가 자리한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이러한 건물을 현대식 건축물로 바꾼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한국에 부임한 후부터 계속 살고 계실 텐데, 대사님과 가족들은 어느 공간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불편함과 좋은 점은 무엇인지, 1890년에 지어진 건물에 산다는 것에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 관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1층의 테라스와 2층의 발코니이다. 두 곳 모두 관저의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이며, 2층 발코니에서는 남산도 조금 보인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더욱 사랑받던 장소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테라스와 발코니는 복잡한 도시 속 휴식과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공간이다. 관저 인테리어는 현대 생활방식을 따라가기 위해 여러 차례 리모델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19세기 건축 양식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원효로 예수성심성당과 옛 용산신학교, E. 코스트 신부 * 9월 16일 오후 2시부터 참가 신청 가능  * 이 프로그램은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와 연계한 스페셜 프로그램입니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티켓 혹은 방문 스탬프를 소지하셔야 입장 가능합니다.(입장 시 현장 확인) * 프로그램 신청 시 오픈하우스 웹사이트 회원가입이 필수(가입 시 휴대폰 본인 인증)이며 신청한 본인만 참여 가능합니다. 참가비는 무료이나 노쇼 방지를 위해 예약금 결제 후 참석 시 반환합니다. 자세한 방법은 How to를 참고해주세요.  2019년 9월 21일 (토) 13:00 2019년 9월 22일 (일) 13:00 프로그램 예상 시간 : 1시간 내외 프로그램 진행  김정신(단국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  원효로 예수성심성당 현재 성심기념관과 성심여고의 부속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원래 용산신학교와 신학교 부속성당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1885년 원주 부엉골에서 개교한 예수성심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부의 전신)가 1887년 용산 원효로에 이전한 후 신학교 교사동은 1892년부터(현재 남아있는 성심기념관은 1911년 건축), 예수성심성당(신학교 부속 성당)은 1902년에 세워졌으며, 이 성당 출입구 안쪽 상부에 있는 명문에는 김대건 신부의 이니셜 A. K. 및 그의 생존기간(1821-46)이 로마자로 표기되어 있다. 신학교 부속성당인 예수성심성당(사적 제 521호)은 1902년에 세워졌으며, 프랑스인 코스트(E. Coste) 신부가 설계·감독 했다. 언덕을 이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남쪽 언덕 아래는 3층이고 수녀원 쪽은 2층이 된다. 주로 이용하는 출입구가 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치우쳐있어 비대칭의 모습을 이루었다. 건물의 내부는 제단과 예배석만 있는 단순한 교회형식이지만, 뾰족아치로 된 창문이나 지붕위의 작은 뾰족탑은 전체적으로 약식화된 고딕풍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이 성당은 신학교 부속 성당(chapel)이기 때문에 일반 교구성당과는 평면형식이 다르다. 정면 입구에 배랑(narthex)이 없으며, 출입구는 제단 쪽 양 측면에 나있고 제의실이 제단 반대측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신자석 바닥도 원래는 제대를 향해서가 아니라 중앙축을 향해 좌우에서 아레나(arena) 형식으로 단을 지어 내렸다. 지금은 평평한 마룻바닥으로 바뀌었고, 제의실은 벽을 터서 신자석으로 쓰이고 있다. 대신 한동안 제의실이 좌측 외부에 부가되어 복도로 연결되었으나, 보수・복원공사를 통해 철거되고 1층방(과거 신부방)을 제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의 지붕은 가파른 맛배지붕이며, 후면의 앱스(apse)는 5각으로 꺾여있다. 규모에 비해 다소 육중한 버트레스가 각 베이마다 설치되어 있고 버트레스 꼭데기에는 피나클로 장식하였다. 규모와 폭에 비해상대적으로 높은 천장, 제대부의 천장 구성, 간결하면서도 정교한 디테일 등 고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건축당시 제단 뒷벽 5개의 아치창에는 중세풍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 시멸실되었고, 1985년 故 이남규에 의해 제단 뒷벽 5개의 아치창의 달드베르와 양 출입구 상부의 엔티크글라스 원형창이 설치되었다. 성심학원의 오랜 숙원이었던 스테인드그라스 창의 보수복원 사업은 2013년 달드베르의 제단 창이 보수되었고, 나머지 양 측면 및 남측 창은 2015년 스위스출생의 마르크 수사(Fr. Marc)와 헤이리 유리재 공방에 의해 제작 설치되었다. 글 : 김정신 옛 용산신학교 최초의 신학교였던 베론 신학당(1855년)은 1866년 폐쇄당하고, 여주 부엉골 신학교가 현재 신학교 부지로 옮겨와 1887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가 세워졌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가톨릭 신학교 건물로 의미가 깊다. 용산신학교 건물은 1911년에 완공되어 1942년까지 대신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외부가 조지아 양식으로 장식된 2층 붉은 벽돌 구조로 사적 제52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956년부터 성심수녀회 수녀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해 현재 성심수녀회 관구 사무실과 성심기념관 및 역사 자료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 용산신학교 건물의 설계자가 코스트 신부로 알려져 있으나 코스트 선종(1896)과 건물의 완공 시기(1911)가 큰 차이가 있는 등, 여러 정황상 코스트 설계로 보기 어렵다는 학계 주장이 있다.  글 : 김정신 사진 : 문화재청, 성심수녀회, 김정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