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③ 동네, 골목, 그리고 한옥   2000년에 독립하셨는데, 처음엔 이곳 통의동이 아니셨지요? 김태수 선생님 서울 사무소가 서초동에 있었는데 그 사무소를 정리하고 제가 독립하면서 공간과 집기를 승계하는 프로세스를 밟았어요. 지금도 2000년 5월 31일 퇴근하면서 TSK 건축사사무소 간판을 떼고 6월 1일 출근하면서 제 간판을 달았던 기억이 납니다.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 막판에는 파트타임으로 일했어요. 당시 제가 대표였지만 개업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김태수 선생님이 많이 배려해주신 거죠. 공간이 다 필요하지 않으니 일부는 집주인에게 돌려줬고 작게 시작했어요.   경복궁 서측 이곳 통의동으로 오시게 된 게 <열린책들> 프로젝트가 계기가 되셨는데요. 그게 첫 프로젝트였나요? 정확하게 말하면 첫 프로젝트는 동대문 시장의 한 상가를 리노베이션하는 프로젝트였어요.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 시절에 제가 수주하면 제한적으로 일부 프로젝트는 제 이름으로 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그때 동대문 시장 한 상가의 전면을 고친 적이 있었는데, 그게 계기가 돼서 개업할 무렵 근처 더 큰 상가의 전면 리노베이션을 의뢰받았어요. 그때는 실망감도 있었어요. 온갖 큰 꿈을 갖고 내 사무소를 시작하는데 상가를 고치고 있다니 싶었죠. 하지만 건축가로서 살아가는 것에는 냉엄한 리얼리즘이 있다는 걸 그때 배웠죠. 동대문 상인들과 일하면서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열린책들’ 홍지웅 대표와 연결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시더군 요. 오래된 적산가옥을 사옥으로 쓰고 있었는데 불이 나서 새로 짓고 싶다고요. ‘위치가 한갓지고 좋아요’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막상 가 보니 경복궁을 마주하고 있는 땅이었어요. 건축가로서는 큰 도전인 거죠. 개인적으로 조선왕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무관하게 경복궁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건축가로서 첫 작업인데 그 위치가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김태수 선생님의 금호미술관과 대칭점에 있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복잡한 서울 사대문 안에서 프로젝트가 시작된 거네요 아직도 <열린책들> 사옥이 저에게 시사하는 것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골목길 인파이팅(infighting)이 시작된 거예요. 그 건물은 대로에 있지만 뒤편으로는 지적(地籍)이 꼬여 있는 골목길에 접하다 보니까 본격적인 ‘골목의 애환’, 즉 ‘앨리 블루스(alley blues)’가 시작됐어요. 그때 건물의 외연은 컨텍스트를 고려한 방향으로 가는데 내용으로는 지적도 따져야 하고,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공간은 앞서 말한 기하학적 질서를 적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가지를 병행할 수밖에 없는 거죠. 경제학에 ‘globally asymmetric; locally symmetric’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그 말처럼 전체 시스템은 비대칭인데, 부분적으로는 대칭인 방식을 채택하게 된 거죠. 그 상황에서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플레이(geometric play)를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한옥을 하면서 더 힘들어졌죠. 한옥 평면에는 곡선이 없고 직각밖에 없잖아요. 부드럽게 휠 수도 없고요. 결국 이 동네로 오면서 내적 질서를 갖는 단위 공간을 조합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건축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거죠. <열린책들> 이후 한동안 저 자신도 사무실 안에서도 <열린책들>은 넘어야 하는 벽이었는데, <춘원당>을 하면서 넘었어요. 인파이팅의 정수를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그런 저를 해방해 준 프로젝트고요.   건축적으로 <열린책들>의 인파이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열린책들> 전면의 효자로는 넓고 반듯하고 의전적인 길이잖아요. 앞의 경복궁 돌담은 개념적으로도 일자의 벽이고요. 하지만 대림미술관 뒤쪽으로 가보시면 골목이 꼬불꼬불하고 복잡해요. 그러면 골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그 안에서도 사각형을 고집할 것이냐 아니면 유연해질 것이냐는 갈등이 생겨요. 그 부분에서 저는 질서 있는 유연함을 찾겠다는 거였죠. 저는 지금도 자유 형태(free form)는 절대로 못 할 사람이고요. 그다음 마당을 전면이 아니라 오히려 뒤에 놓았어요. 원래 그 건물은 골목이 뒤로 연결되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개념이었죠. 자동차도 뒤로 진입하는 방식이었는데 민원 때문에 할 수 없이 앞으로 다니도록 했어요.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인파이터의 기질을 보여준 것은 카리프트예요. 카리프트는 양쪽으로 문이 열려서 뒤로도 들어갈 수 있도록 해놨어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예를 들어 그 민원인이 이사를 가면 가능하도록 열어놓은 거죠.   복잡한 골목과 사연이 얽힌 땅에서 건축하면서 무엇이 달랐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복잡한 땅에 건물을 앉혀 봤는데 그다음부터는 그런 프로젝트를 정말 많이 하게 되었어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김태수 선생님이 한판 붙듯이 땅을 다루는 대가인데, 비유하자면 선생님은 미국이라는 넓은 땅에서, 저는 비슷한 게임을 굉장히 좁은 링에서 하는 거죠. (웃음) 거기다 한옥의 경우 심의와 민원이 달라붙으면서 종합선물세트가 됩니다. <열린책들> 프로젝트가 남겨준 또 다른 유산이라면, 제가 본격적으로 도시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는 거에요. 도대체 이 건물 뒤는 왜 이렇게 복잡한 거야, 하면서 자료를 찾아보니까 그 일대가 옛날 동양척식회사 사택 단지였더군요. 해방 이후에 동척 사택이 민간에게 적산가옥으로 풀려 나온 거죠. 원래 단지 내 도로는 법적 도로가 아니잖아요? 그 때문에 보기엔 도로인데 그 가운데로 대지 경계선이 지나가는 거죠. 그래서 민원도 발생했던 거고요. 그런 역사를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된 거죠. 우리 도시에는 아직도 지나간 시대의 흔적이 족쇄처럼 남아 있다가 21세기에도 발목을 잡는구나, 그게 재미있었고 공부해야겠구나 했어요. 글 쓰는 건축가가 된 계기이기도 하죠. 아시겠지만 지금도 특정 프로젝트를 위해서 공부하는 것 못지않게 이것저것 뒤져보는 것 자체에 굉장히 관심 있어요. 제 정체성이기도 하죠.   어떤 건축주가 “복잡한 골목은 황두진이 최고”라고 했다는 표현이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연결된 것이 <춘원당>이에요. 춘원당에 저를 소개해준 분이 ‘골목은 이 사람이 제일 잘해요’라고 했다더군요.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웃음)   골목이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보다는 골목에 대응하는 건축을 풀어낼 때의 태도나 접근방식이 섬세해야 한다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면서도 질서 잡힌 공간을 만들어내겠다는 욕심은 제가 버린 적이 없죠. 골목이 이런 상황이니 여긴 찌그러져도 된다고 하는 건 용납 안 했던 것 같아요. 건축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질서 잡힌 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춘원당>의 도면은 지금 봐도 그런 생각이 강박적으로 들어가 있어요. 주변은 찌그러질지언정 건물은 똑 떨어져야 하고요.   건축가 황두진의 작업에서 한옥 프로젝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옥 프로젝트를 연달아 하면서 한옥 건축가로 알려진 부분이 흥미로워요. 제가 보기엔 현대 건축가로서 한옥의 시스템을 해체해서 텍토닉을 탐구하는 자세가 더 강한데, 사회에서는 한옥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아름다운 전통으로 포장되거든요. 반대로 건축계에서는 당시 문화재로서 한옥의 가치는 말하면서도 건축가가 다뤄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의식도 팽배했습니다. 미묘한 줄타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제가 한옥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는 건축가인데, 그에 못지 않게 관심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한옥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역시 사람이죠. 나무와 벽돌의 윤형주 씨가 계기를 만들어주었어요. 귀국하고 나서 개업할 무렵에 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조정구 소장을 만났어요. 그런데 원서동의 한옥 현장에서 만나자는 거에요. 그때 ‘그런 일을 한단 말이야?’ 하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가서 보니까 참 재미있더라고요. 조 소장이 신기한 일을 하네, 생각했죠. 그러다가 윤형주 사장님이 북촌에 한옥을 하나 사서 고치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제 첫 반응은 ‘그걸 왜 제가 해요?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닌데’였죠. 실무로 다룰 생각도 안 했고, 오히려 하면 안 된다고 배웠고, 그래서 잘 모른다고 했어요. 결국 그분이 저를 설득하셨죠. 그런데 한두 채 해보니까 놀랍더라고요. 한옥 건축이 굉장히 체계적인 거에요. 심지어 말로 지을 수 있을 정도로요. 지금 그 어떤 현대건축도 한옥만큼 체계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ㄷ자 집인데 정면 몇 칸, 측면 몇 칸, 경간 얼마에, 지붕은 팔작이나 맞배로 하면 대충 집의 얼개가 만들어지잖아요. 그런 건축이 어디 있겠어요?   초기에는 기존 한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점점 과감한 시도가 이어져요. 내부 공간을 재구성하는 것에서 나아가 나중엔 한옥 지붕에 유리를 얹는 시도도 하고요. 처음 한두 채는 기존 도시형 한옥 본연의 방식대로 접근했어요. 집주인도 그걸 원했고요. 크게 보면 제 한옥 클라이언트는 둘로 나뉘어요. 하나는 원형에 충실하되 살기 편하게 해달라는 분들, 다른 하나는 좀 다른 요소가 들어가도 괜찮고 제 생각대로 해달라는 분들이에요. 후자는 해방감이 있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프로젝트 규모가 커져서 휘닉스스프링스 컨트리클럽 골프장의 클럽하우스 한옥을 하게 됐는데, 물론 그분들도 재현(representation)한 한옥을 원했죠. 주 건물이 덕수궁 중화전 정도 규모인데, 처음에는 대들보를 목철 합성으로 하는 안을 보내드렸어요. 그런데 회장님이 ‘주 건물은 전통 방식대로 갔으면 좋겠지만 나머지 한 군데는 황 선생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두 건물을 잇는 회랑에 유리 지붕을 덮겠다고 했고 재미있어하셨어요.   유리와 목구조의 결합이 신선했어요. 실제 짓는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기술적으로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시공 현장의 한옥 대목과 유리 다루는 사람이 실무적으로 다른 체계로 일하는 사람이어서 현장 소장이 이를 결합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결국은 우리가 설계 감리자로서 그 역할을 했는데, 모형을 만들어 설명해준 다음에야 진행됐어요. 그런데 한옥은 주초 위에 그냥 올려놓은 집이잖아요. 위에서 육중한 지붕으로 누르는 건데 우리가 설계한 구조에서는 지붕이 유리라서 연처럼 날아간다는 거예요. 재미있더라고요. 한 번도 집이 날아간다는 생각을 안 했으니까요. 그래서 주춧돌에 앵커를 넣어 기둥을 모두 볼트로 붙들어 맸어요. 못 날아가게. (웃음) 그전에는 비유적으로만 지붕이 날개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날개로구나 하는 생각이 재미있었고요. 나중에 그런 생각들이 합쳐진 게 통인시장 프로젝트예요.   통인시장 입구의 지붕에서 앞서 제안하셨던 목철 합성의 부재를 활용하셨잖아요. 덕분에 부재가 가늘어지고 유리 지붕과도 견고하게 연결되었어요. 처음에는 시각적으로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통인시장 프로젝트는 우리 사무실의 한옥 연표에서 완전 초기는 아니고 중간보다 조금 앞쪽인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개념적으로는 아직 그 이상으로 확장이 안 되고 있죠. 그 개념이 확장되면 저는 한옥이라는 타이틀도 필요 없다고 봐요. 또 다른 관점은 한옥 무지개떡 건축을 해보는 거죠. 이미 대학교 3학년 때 그려봤어요. 당시 ‘3층이면 굳이 나무로 할 필요 없잖아?’ 하면서 콘크리트로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보기에도 충격적이었나 봐요. 강봉진 씨가 설계한 국립박물관(현 민속박물관)은 4.3 그룹 등으로부터 완전히 평가 절하되었잖아요. 지금 봐도 희한한 건물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 콘크리트로 한옥을 만든 게 그리 몹쓸 짓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목조건축의 전통이 있던 나라에서 다층화되면서 목조를 콘크리트가 대체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에요. 싱가포르, 캄보디아 등에서도 볼 수 있어요. 우리만 그리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꼭 그럴 필요가 있냐는 거죠. 싱가포르에 강의하러 갔다가 마침 현지 체류 중이던 정인하 교수님과 차이나타운에 갔었어요. 그곳의 헤리티지 뮤지엄이 원래 상가주택이었어요. 그걸 박물관으로 개조했는데 골격이 콘크리트더군요. 다시 지었냐고 물어보니 오리지널이라는 거예요. 원래 목조 아니냐 물어봤더니 그 박물관 사람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시대가 바뀌었는데 신재료를 쓰는 게 뭐가 이상해, 하더군요. 저도 동의해요. 안동대 정연상 교수님이 자택을 철골조 한옥으로 지으셨는데 정말 신선했어요.   목구조에서 다층화가 충분히 가능한데, 굳이 콘크리트로 목구조를 흉내 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목재를 탄화시키고 철골과 합성하고 기기묘묘한 재주를 피우면 고층 목조가 가능하겠죠. 그런데 한옥을 다루면서 어느 순간부터 건축의 보편성에 눈을 뜬 것 같아요. 물론 특정한 사람을 위해 어쩌다 짓는 건축도 있지만, 결국은 그런 건물조차도 보편성의 토대에 있잖아요. 소위 ‘랑그(langue)’의 토대에서 ‘파롤(parole)’이 있는 거죠. 굳이 얘기하자면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의 문화적 관습인지도 모르겠어요. 부채의식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이 경험이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한옥의 형태를 지우고 추상적인 공간 요소만 다루는 접근이 4.3 그룹으로 대표되는 경향이라면, 한편에는 한옥의 원형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소장님 작업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한옥의 시스템 혹은 목구조의 체계, 구성 요소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다음 해체해서 재조립하는 것 같다는 거예요. 통인시장이 그런 경우죠. 물론 어느 지점에 가면 정말 철학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한옥을 놓아야 하는 지점이에요. 그때가 되면 정말 한옥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옥에서 뭔가 얻어왔으면 된 거죠. 다시 말해 한옥 그 자체의 작업이 있고 한옥의 개념과 가치가 있는데, 한옥이 아니면서 한옥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제가 부분적으로는 거기까지 갔다고 생각하고요. 그 이상은 누가 기회를 줘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다 보니 기다리는 중이고요. 사실 과학적 합리주의 입장에서 보면 한옥은 말이 안 돼요. 너무 재료를 많이 쓰고, 구조로서의 효율이 떨어져요. 게다가 미국식 경량목구조 건축과 비교하면 여염집이라기엔 너무나 고도의 기술이 필요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저는 구조적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있는데 한옥의 경우 과연 어디까지 구조적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예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렇다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인가, 그건 또 아니라는 거죠. 그렇게 딜레마에 빠져 있을 때 나름대로 해답을 준 건 건축계가 아닌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이석재 교수였어요. 제 딜레마를 얘기하니 ‘그럴 땐 둘 다 잡고 가는 거예요’ 라고 하더라고요. 답이 바로 안 나온다는 거죠. 전 세계 건축을 봤을 때 지금 관점에서 비합리적이라고 해도 형상, 비례, 체계 등에 담겨 있는 집단의 기억이 소중하지 않다고 하면 건축에 뭐가 남냐는 거죠. 인류 문명 전반이 사실 그런 것일 텐데 말이죠. 분명 냉엄한 이론가 입장에서는 양립이 안 되겠지만, 현실 세계에서 작업하는 사람으로서는 둘 다 안고 가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제게 이야기해준 것이 기대승과 이황의 사단칠정론 논쟁이었어요. 퇴계는 안동에 있으면서 중앙정계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고, 기대성은 훨씬 어리지만 중앙정계에서 놀던 전라도 출신의 신진이었죠. 사단칠정론은 외국에서도 유명해서 ‘Four-Seven Debate’라고 하거든요. 한국 주자학의 대표적인 논쟁으로 동양 철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요. 겉보기에는 퇴계가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구조래요. 그런데 퇴계가 ‘당신 말이 맞고, 내가 수세에 몰린 것도 맞는데 그래도 나는 못 놓는 게 있다’라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갔다고 해요. 그게 굉장히 감동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석재 교수도 내게 끝까지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아마 영원히 승부가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놓지 않고 갔으면 좋겠다고 해서 알겠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한옥 작업은 저를 독특하게 혹은 어떤 각도에서는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제 커리어에서 하나의 특별한 요소인데 돌이켜보면 아마 그걸 안 했으면 무지개떡 건축을 추구해야겠다는 강렬한 욕구를 만들지 않았을 것 같아요. 단층 저밀도 건축인 한옥의 한계에서 시작된 생각이었으니까요. 물론 무지개떡은 프로그램에 대한 개념이지만, 저의 또 다른 건축 개념인 ‘다공성’과 ‘중첩된 기하학’은 한옥을 실무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면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비유해서 얘기하자면, 경영학에서 말하는 ‘우회를 통한 축적’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 한옥 작업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한옥을 원하는 사회의 일차적 요구에 부응한 거죠. 다만 그 과정에서 제가 얻은 것은 나름대로 완성도 있게 만든 일련의 작업 결과물과는 별도로 앞에서 말한 다공성과 중첩된 기하학, 이 두 가지 개념이에요. 한옥 실무가 없었다면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겠죠. 앞서 한옥은 말로도 건축할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이라고 하셨는데, 그런 면에서 일반 설계 과정과 다를 텐데요. 더군다나 한국건축 고유의 미는 섬세해서 설계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예측해 구현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요. 처마의 곡면처럼 말이죠. 최근 지어진 한옥 중에서 비례라는 게 참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된 장면들이 있거든요. 한옥의 실현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혹은 느끼신 점은 없는지 궁금해요. 영원한 과제예요. 시스템의 특성이 개별 케이스의 완성도를 보장해주지는 않잖아요. 그걸 가장 많이 느끼는 게 한옥 작업이죠. 일단 좋은 대목을 만나야 하고요. 이제는 도면을 많이 그려봐서 뭐가 되고 뭐가 안 되겠다는 것을 대강 알죠. 다만 조형이 복잡해서 전부를 예상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역사적 레퍼런스를 근거로 삼아가며 작업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한옥이 갖는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것을 따라가는 경우도 있어요. 다만 사람의 삶이 풍성하게 담기기 위해서는 한옥 이외의 다른 요소들도 많이 필요한데, 저는 거기에 대한 저항은 전혀 없어요. 그냥 필요하면 하는 거죠. 아마도 조만간 한옥 지붕 위에 태양광 패널을 어떻게 접목할까 고민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한옥의 역사가 한번 중단되었다는 사실이 그런 시도를 어렵게 하죠. 그 사실이 영원히 고통스러운 기억처럼 되어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게 좀 과장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치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서양의 고전건축도 근대로 넘어오면서는 다 중단됐잖아요. 근대란 인류 역사상 보통의 사건이 아니었으니까요. 그 단절로 인해 우리가 한옥을 바라보는 시각이 편향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제게 그런 강박관념은 적어도 2000년부터 20년 동안 실무 과정을 통해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해요. 형이상학적으로는 남아있을지 몰라도요. 우리 사회가 한옥을 짓지 않은 것이 1970년대 정도라고 아는데 그러다가 2000년 전후해서 다시 짓기 시작했으니 그 기간이 30년밖에 안 된 거고요.   가회헌의 별채로 지형에 맞게 틀어진 ㅅ자 형 한옥이 인상 깊었습니다. 한옥이 만약 진화해서 변형을 시작한다면 여기가 출발점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임팩트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저도 유리 지붕과 ㅅ자 평면은 이제 현존하는 사례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또 겉으로 잘 보이지 않지만, 한옥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빈 공극(cavity)들, 즉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 안에 다양한 현대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발견했다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에요. 한참 한옥 프로젝트를 할 때 저 자신도 ‘내가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됐을까?’ 생각했는데, 그때 그 프로세스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하면서 가장 핵심을 잘 이해했던 사람이 건축가 조민석 소장이에요. 신기하다고 하면서, ‘황소장님 이야기대로 한다면 동그라미 한옥도 된다는 거잖아요?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 등이 하듯 기둥 쭉 박은 한옥 유니버설 스페이스가 가능하단 거잖아요?’라고 묻기에 ‘그렇죠’라고 이야기하며 웃었던 기억이 나요. 보통 구축술을 가지고 한옥이라고 하는 거지, 공간의 집합을 두고 한옥이라 하지 않는다고, 그걸 나눠서 생각해야 한다고 했어요. <한옥이 돌아왔다> 책에서도 그 이야기를 했어요. 미스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을 한옥으로 지어놓고 이게 한옥이냐 하면 누가 봐도 한옥이라 하겠지만, 사실 그 건물의 공간 개념은 한옥이랑 상관없어요. 그래서 구축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거죠. 근대주의자들은 자꾸 공간의 집합에서 단서를 찾으려고 하는데 그건 이제 오히려 상대적이라는 이야기죠. 예를 들어 습관적으로 나오긴 하지만 안채, 사랑채란 단어를 이제는 거의 안 쓰잖아요. 그래서 구축술과 공간의 집합을 구별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한옥과 관련된 이론에 기여를 했다면 그런 부분이겠죠.   한옥의 재해석에 대해 반발도 많았다고 하셨잖아요. 초기에 한옥의 원형에 충실하다가 가회헌 ㅅ자 한옥처럼 변형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 이야기를 들어가기 전에 대전제를 깔아야 하는 것이 있어요. 일반 현대건축은 구체적으로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규정이 많지 않아요. 이 경우 설계란 열린 답을 찾아가는 것이죠. 다르게 말하면, 설계를 시작할 때 어떻게 끝날지 모르고 만들어가는 거잖아요. 한옥은 아무래도 기존 관념이라는 게 강하게 작용하는, 소위 장르적 특성이 있는 건축이죠. 그러면서도 모든 관습적 기존 관념을 100% 인정한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고, 어떤 부분을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어요. 당시 가장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것은 대지에 어떻게 적응하는가 하는 거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전통적인 한옥에서는 건물에 대해서는 완고하고 외부 공간의 이형은 관대하게 봐줍니다.   마당과 같은 비어있는 공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비어 있는 외부 공간은 얼마든 변형되어도 좋고, 심지어 거기서 새로운 논의를 찾으려고도 하죠. 예를 들면 프랑스 바로크 양식의 조경(landscape)에서 보이는 외부 공간의 기하학적 질서만큼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세계는 아니란 말이에요. 굳이 얘기하자면, 경복궁처럼 내외부 공간이 똑같은 기하학 질서로 조율된 세계도 있지만, 대체로 우리가 이해하는 한국적 특징은 창덕궁처럼 집 자체의 질서는 양보하지 않는데 외부 공간은 양보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평지보다는 산이 많은 조건이기 때문에 ‘지형에 순응한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경복궁과 창덕궁 중에 무엇이 한국적이냐고 한다면 압도적으로 후자일 텐데, 하지만 그것도 그만큼 외부 공간이 풍성할 때나 쓸 수 있는 방식이죠. 일반적인 도시형 한옥은 입체적으로는 고밀도가 아니지만, 평면적으로는 고밀도잖아요. 북촌의 경우도 대지의 형상이 네모반듯하지 않고 제각각인데, 그런 곳의 한옥에 양보 없는 직교좌표계만 적용하면 너무나 많은 외부 공간이 낭비되죠. 도시 건축에서 그것을 개선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집을 조적으로 짓든, 콘크리트로 짓든, 철골로 짓든, 유연하게 각을 만들 수 있는데 한옥은 그런 가능성이 없었던 거죠. 앞에서도 이야기한 질서있는 유연함이 필요했어요. 만약 한옥에 대해 문화재적인 접근 방식을 택했다면 둔각을 갖는 ㅅ자 형태는 절대로 안 했을 일이죠.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다른 형태를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텍토닉 차원에서 너무 말이 안 된다면 하지 말아야죠. 그런데 대목과 상의하니 가장 먼저 나오는 답이 ‘뭐 팔각정도 있는데요’ 였어요. 결국 문제없다는 거죠. 건축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는 제 문제지만, 대목의 입장은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거였어요. 다만 그 판단이 자기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던 거죠. 사실 대지를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게 큰 명분이었고요.   새로운 평면 형태를 도입하는 것이니 한옥 심의 과정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북촌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수많은 심의 장벽을 통과해야 하는 걸 말하는데, 특히 그때는 비교적 이른 시기였어요. 뭐든 새로운 것은 그냥 통과되는 법이 없고 난항을 겪는 거죠. 그걸 다 알고 했고요. 사무실의 정상적인 운영 내지는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너무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죠. 아니나 다를까 심의를 세, 네 번은 받은 것 같아요. 심지어는 심의가 부결되면서 선례를 찾아오라는 주문이 주어졌어요. 그래서 동궐도(東闕圖)나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 같은 것을 인터넷에서 내려받아서 돋보기를 들고 찾아보기도 했어요. 물론 그런 예는 없죠. 북촌이나 서촌을 다녀보면 이상하게 찌그러진 집이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예외적인 거고요. 사실 선례를 찾아오라는 건 어찌 보면 정신적으로 압박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모욕을 주는 건데, 아마도 심의하는 분 입장에서는 그런 새로운 시도가 역사적 근거 없이 이루어지는 걸 될 수 있는대로 막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결국 다음 심의에서 ‘선례 없는 걸 아시면서 찾아오라고 한 거 아니냐,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역시나 없었고, 굳이 있다면 팔각정이 있는데 그렇게 구차하게 선례를 들이대서 정당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냥 시대가 변했으니까 내가 21세기 ㅅ자 한옥의 창시자가 되려고 한다. 그런 기회를 한번 주시면 좋겠다. 한번 해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안 하겠다’라고 얘기했어요. 그분들도 논리적으로는 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아요. 한옥의 미래에 관해 쓴 수많은 글 중 어느 것도 한옥을 있는 그대로 박제해서 재현해야 한다고 하지 않아요. 다들 변화해야 한다고 써요. 하지만 막상 변화가 이루어진 걸 보면, 머리로는 이해하려 하지만 몸은 거부해요. 일단 눈이 싫어하고 마음이 아픈 거예요. 그런데 설계자가 의지를 가지고 설득을 하면 굳이 못 하게 할 이유도 없는 거죠. 가회헌 ㅅ자 한옥을 하고 나니 ㅅ자 한옥이 주는 독특한 내부공간의 운동성이 매우 매력적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하지만 그 이후로 아무런 외부적 제약이 없을 때 순전히 건축공간 구성이라는 차원에서 그 방법을 쓴 적은 없어요. 건축적으로는 사례를 하나 만든 것이니 앞으로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죠. 현대 건축가의 시선에서 한옥을 바라봤기 때문에 이런 작업이 나온 게 아닐까요? 결국 그런 거죠. 조적식 건물이 예각이나 둔각을 가졌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듯이, 한옥이 좀 더 많은 레퍼런스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적어도 그렇게까지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아니라는 거죠.   그 이후에도 한옥을 지으시면서 몇몇 시도들이 이어졌어요. 창호의 분할, 주차장, 그리고 지하 공간 등 말이죠. 1회전이 ㅅ자 한옥이었다면, 2회전은 지하주차장을 만드는 거였어요. 그것도 저는 보편적인 건축의 테두리에서 생각했었죠.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국은 70%가 산과 언덕인데, 경사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은 마땅히 가져야 해요. 건축의 종류를 따지기 이전에 말이죠. 축대를 쌓아서 평지를 구성하는 방식은 한옥도 조선 시대부터 쓴 건데, 그 밑에 주차장과 약간의 생활공간을 집어넣으면, 현대인의 삶을 지원할 수 있는 건축이 될 수 있는 거죠. 보통 이런 경우 돌아오는 반응은 ‘원래 한옥에는 지하실이 없거든요’ 예요. 심의위원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와서 자꾸 뭘 하겠다고 하나,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야 만들지 않으면 되는데 집주인이 자동차를 포기하지는 않을 거 같아요. 그럼 골목길에 차를 세우겠군요. 뭐가 더 좋은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 넘어갔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무의미한 논쟁이에요. 적절한 지하 개발은 우리 사회의 공간 자원을 확보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한다고 봐요. 요즘의 한옥 심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더 열렸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관습적으로 된 부분도 있어요. 그때는 새로운 시도에 반대하다가도 이쪽이 열심히 설득하면 들어보려는 태도가 있었죠. 지금 한옥 심의를 들어가 보면 오히려 대화 자체가 일방적인 경향이 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일까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첫째 전통한옥이라는 느슨한 범위 내에서 이를 지키는 것과 둘째 소위 한옥을 가지고 실험하는 것과 셋째 한옥의 가치만 가져오는 것을 구분해야 해요. 첫 번째에서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게 맞지, 이거 아니면 안 돼 라는 식으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특히나 주거건축에서는요.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어요. 가회동 엘주택을 설계할 때 어느 심의위원이 자기 사무실로 도면을 갖고 와서 검수를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직원들이 들고 갔더니, ‘당신네 황두진 소장이 하는 건 한옥도 아니니 제발 북촌에서 일을 안 하면 좋겠다’라고 저에게 전해달라고 했대요. 어차피 이런 일을 할 때는 보수적인 반응을 접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다 예상 가능한 일이었어요.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고요. 북촌에서 이런 것은 더 만들지 말라고 했던 그 집은 그해 처음으로 생긴 대한민국한옥대상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궁극적으로는 넓은 세상이 판단을 해주는 것이죠. 지금도 경관, 외부공간 구성 방식 등 소수의 의견 대립은 항상 일어납니다. 저는 한옥이 목표점이 아닌 출발점으로 충분한 사람이기 때문에, 한옥의 과거 레퍼런스를 열심히 찾으려고 하지도 않아요. 가령 경기도 한옥의 특징이 뭔가 하는 방식은 절대적으로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후도 사람이 사는 방식도 모두 변했잖아요. 다만 저는 현재를 잘 읽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옥의 구법을 빌려오는 거죠. 그 동네의 상황, 살아가는 삶의 방식, 집을 짓는 방식, 집주인의 생각과 제 생각이 중요합니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크고 작은 대립이 있고, 그것은 아마 한옥이라는 이름으로 심의를 받는 한 영원히 계속되리라 생각해요.   한옥 작업은 최근에도 하고 계시죠? 계속하고 있죠. 일 년에 2개, 많으면 3개 정도예요. 작업량이 많지 않아요.   한옥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것 때문에 다소 감상적인 부분도 있고 모호하게 뭉뚱그려지는 대상들이 있잖아요. 여전히 한옥에 대한 선입견 혹은 기대, 고정관념도 크고요. 그래서 한옥을 규정하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전히 크죠. 한 달 전에도 어떤 분이 전화로 ‘거기 한옥 수리하는 황두진 씨 사무실 맞죠?’ 하시기에 한숨 푹 쉬고 ‘네, 접니다’ 그랬어요. (웃음) 그런 의뢰가 오면 거절하지는 않지만 다만 제 입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서 이야기한 대로 한옥을 바라보는 관점을 세 개의 카테고리 정도로 나눠서 봐주면 전 불편하지 않아요. 첫째, 소위 한옥 보존지역에 지어지는, 한옥이라는 타이틀이 필요한 재현(representation)된 한옥이 가야 할 길이 있고, 둘째, 보존지역이 아닌 곳에서 실험해볼 수 있는 한옥, 하지만 여전히 한옥이란 타이틀의 범위 내에서요. 셋째는 한옥에서 어떤 유전자나 교훈을 가져와 전혀 다른 건축을 하는 거죠. 이 세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희는 이 세 가지 게임을 다 하고 있는 거죠.   결국 다양한 방식으로 한옥이 진화한다고 할 때 소장님이 생각하시는 한옥의 정의라고 할까요? 이런 부분을 지켰을 때 한옥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한옥에 대해 한 마디로 보편적 정의를 내리는 건 제 역량을 넘어선 것 같아요. 하지만 저에게 한옥이 뭐냐고 물으면, 지붕이 조형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중요하고 적어도 현재 상황에서는 목조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즉 전통 목구조의 변형이죠. 이렇게 이야기는 하지만 사실 재료는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한국 전통건축에서 보편적 가치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니 두 가지로 귀결이 되더라고요. 하나는 다공성이에요. 아무리 디테일이 좋고 비례가 훌륭해도 일체의 다공성이 없는 한옥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내외부 공간이 그냥 만날 수는 없고 그사이 전이 공간이라는 게 있어야 하고요. 전통 한옥이 근대화되면서 전이 공간이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나죠. 방을 넓히려고 처마 끝까지 벽을 내고, 소위 내외부 공간이 없어지면서 지붕에다가 유리를 씌우는 게 근대 한옥이에요. 결국 모더니즘 상자에 한옥 입면을 붙인 건물이 되잖아요? 그럼 그건 다공성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에 한옥적 가치는 없다고 봐요. 분류상으로 한옥일지는 모르지만요. 한마디로 저에게 ‘한옥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다공성이에요’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다공질 건축이죠. 문제는 기후예요. 다공성은 내외부 공간의 원활한 소통 내지는 모드 전환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건데, 요즘 한서의 차이가 60도에 가까워요. 그러다 보니 여름엔 에어컨을, 겨울에는 보일러를 열심히 돌려야 하죠. 이 상황에서 과연 이 다공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가 과제가 됐어요. 저는 문과 창을 다공성 밸브라고 이름 붙였는데, 다공성 밸브를 세련되게 디자인하는 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봐요. 오로지 기후에 실용적으로만 대응해서 다공성이 현저히 낮은 건축을 하기에는 아까운 날들이 많아요. 요즘 같은 날씨 말이죠. 예를 들어 실내, 반외부, 그리고 외부가 있으면, 예전에는 실내와 반외부 사이에 들어 올릴 수 있는 창호지문 하나로 다공성 조절이 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더 기밀성이 높고 단열이 잘 되는 알루미늄 슬라이딩 문으로 대치할 수 있어요. 심지어는 실내와 반외부, 반외부와 외부 사이에 한 번의 켜를 더해서 기후에 따라 다양하게 여닫을 수 있는 집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해요. 하나의 세팅으로 1년 내내 살겠다는 접근은 한국에서는 아쉬워요. 자연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는데 그걸 너무 놓치는 거죠. 여름과 겨울에는 적절히 보호하되 봄, 가을에는 좋은 날씨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다공성 밸브가 다양하고 세련되게 확장하는 건축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해요.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일까요? 다른 하나는 ‘중첩된 기하학’인데, 그 역시도 제가 한옥을 관념적, 도상학적으로 접근했으면 느끼지 못했을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실무 과정에서 깨달았으니까요. 한옥은 수직적으로도 직교좌표계의 목조 가구와 3차원 곡면의 지붕, 누적적 쌓기인 기단 등 서로 다른 시스템이 공존하잖아요. 그리고 그걸 잘 연결해주는 고도의 시스템이 있어요. 그냥 만나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그래서 입면보다는 단면이 중요합니다. 전 세계 건축 중에 중첩된 기하학의 원리를 가진 건물들이 있습니다. 비잔틴 건축이 그 예죠. 평면은 정사각형, 직사각형, 반구, 팔각형 등의 조합인데 거기 올라가는 지붕은 곡면이에요. 고딕도 마찬가지죠. 이처럼 다른 나라에도 유사 사례가 있지만 그런데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봐요. 고딕이나 비잔틴과 같이 서구의 조적식 건축에서 중첩된 기하학은 아래 시스템과 위 시스템이 굉장히 심층적으로 연결이 된 구조에요. 펜던티브(pendentive)도 사각형이 원이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거고요. 그에 반해 한옥은 굉장히 엄격한 직교 좌표로 구성된 칸의 세계와 그 위에 자유 곡선에 가까운 지붕의 3차원 곡면이 올라가 있어요. 서구건축 시스템보다 이질성이 큰 두 시스템이 붙어있어요. 그걸 연결해주는 시스템이 없으면 작동이 안 되는 거죠. 사각형과 원이 공존하려면 서구건축의 펜던티브에 해당하는 게 필요한데, 한옥은 고도로 복잡한 고급기술 - 공포, 추녀, 서까래 등 - 을 사용해야만 하는 거예요. 서로 간에 쉽게 전이되는 시스템이 아니라서 너무나 이질적인 시스템을 서로 연결한다는 거죠. 이질적인 것이 공존한다는 것, 그것이 제게 무척이나 매력적이었어요. 그걸 받아들이며 세련된 연결의 논리를 만드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에요. 왜냐하면 네모반듯한 건물은 지겹잖아요. 우리가 모더니즘 건축에 대해 느끼는 아쉬움이 있어요. 벽은 모르겠지만 천정이 평범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죠. 우리가 모더니즘을 열광하며 받아들였던 나라지만, 문화적 유전자로는 항상 무언가 미진했을 거로 생각해요. 여염집인데도 풍성한 기하학적 질서가 있었던 문화적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니까요.   현대 건축으로 접근함에도 불구하고, 소장님을 한옥 건축가로 통칭하곤 하잖아요. <한옥이 돌아왔다>에서 소장님의 태도는 고증보다는 적극적인 실험에 가까웠어도 말이죠.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그 문제에 대해 고민을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현실적으로는 제가 컨트롤 할 수 없는 혹은 무의미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옥 작업에 대해 한 말과 글이 100% 그대로 전달될 거라고 믿는다면 제가 바보죠. 어차피 불특정 다수를 상대할 때 마땅히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감각이 있는 거고요. 건축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해서는, 일단 제 생각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자주 느껴요. 오히려 건축계가 한옥에 대해 고정관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완된 상태로, 그냥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죠. 저는 사람들이 건축가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철학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 많은 분이 건축 책을 읽고 관심도 커졌지만 여전히 감각적 스타일에 관심이 있는 거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는 관심이 많지 않아요. 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하느냐를 알아야만 그 사람의 철학이 성장할 수 있고, 그 결과물을 건축주와 사회가 누릴 수 있는 거잖아요. 즉 진지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본능적 진지함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것과 친환경이나 동물권이라는 차원에서 음식에 접근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말이죠. 건축가에게 표면으로 드러나는 스타일도 있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명확한 방향도 있을 텐데, 그것에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우리는 삶의 중요한 모든 것에 심층적인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건축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개별 건축가들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기가 뜻한 바를 할 수 있는 것 같고요.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 인터뷰 ④로 이어지며, 인터뷰는 오픈하우스서울 2018 기간 중 한편씩 업데이트됩니다. 
OpenStudio 이로재, 승효상 2018년 10월 20일 10:00AM
Special 아트사이드 갤러리, 황두진 2018년 10월 21일 2:30PM
OpenStudio guga urban architecture, 조정구 2018년 10월 19일 5:00PM
OpenHouse 반계 윤웅렬 별서, 김봉렬 2018년 10월 15일 4:00PM
OpenHouse 백인제 가옥 서울시 민속문화제 제22호인 백인제가옥은 종로구 북촌(가회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1913년 건립된 근대 한옥으로 지난 2009년 서울시가 백인제(백병원 설립자) 유족으로부터 인수 후 보수공사를 거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건축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 연출한 역사가옥박물관이다. 전통한옥과 다르게 사랑채와 안채가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건축재료로 압록강 흑송,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안채의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된 특징이 있는 일제강점기 대형(2,460㎡) 한옥으로 북촌에서 유일하게 실내까지 관람이 가능한 가옥이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60㎡의 대지 위에 당당한 사랑채를 중심으로 넉넉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윤보선 가옥과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꼽힌다. 1907년 경성박람회 때 서울에 처음 소개된 압록강 흑송(黑松)을 사용하여 지어진 백인제 가옥은 동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과 구별되는 여러 특징들을 갖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를 별동으로 구분한 다른 전통한옥들과는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거나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것은 건축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사랑채의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전통한옥에서는 보기 힘든 백인제 가옥만의 특징이다. 글 사진 서울시 제공 장소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7길 16(가회동) 이용시간 09:00~18:00 (입장마감 17:30)  ※ 자유관람시 외부 관람만 가능 휴관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개관), 1월 1일 관람인원 안내해설 1회 15명, 자유관람 동시관람객 100명 이용요금 무료 예약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시스템(http://yeyak.seoul.go.kr) 이용 및 현장접수 병행(문의 724-0200, 0232) 백인제 가옥 http://www.museum.seoul.kr/www/guide/vis/BIJHShow/BIJHIntro.jsp?sso=ok
OpenHouse 남녀하우스 '지금', 서재원, 이의행 2018년 10월 20일 4:00PM
Special 태양의 집, 김중업 * 태양의 집은 상시 방문 가능합니다. 가이드 투어를 원하시는 경우, MMCA(국립현대미술관)의《김중업 다이얼로그》전시 연계 문화프로그램 <MMCA 건축기행-김중업>으로 신청가능합니다.    참가신청 링크 바로가기  태양의 집은 서울시 영등포구에 위치한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9,570㎡ 규모의 철근콘크리트조 쇼핑센터다. 1979년 김중업이 설계해 1982년 준공했다.  이곳은 영등포구 신길동 대로변 모퉁이에 있다. 김중업은 이 건물을 부담 없이 들어가 구경할 생각이 드는 곳이 되길 바라며 설계했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낯선 모습일지 모르나 상품이 보는 이의 감정을 윽박지르는 서울 거리에 이런 집이 기다려진 지 오래다”라고 건축가로서의 소회를 밝혔다.  이 건물에는 원형 모티브, 램프, 곡면의 사용 등 다양한 김중업의 건축 언어가 종합적으로 병치 되어 있다. 현재 ‘썬프라자’라는 이름으로 슈퍼마켓 등 상업 시설이 입점해 있다. 글 MMCA(국립현대미술관) 사진 김태동(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OpenHouse 제따와나 선원, 임형남, 노은주 2018년 10월 21일 10:00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