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수많은 관계가 만들어 낸 삶의 형식”, 건축가 김승회 오픈하우스서울 2018의 미니 인터뷰 두 번째는 서울시 교육청 건축 자문을 통해 ‘꿈을 담은 교실’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건축가 김승회(서울대학교 교수)를 만났습니다. 공공 영역에서 기여한 건축 프로젝트, 또 건축과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할 지, 또 건축의 근본적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보건소를 비롯해 공공 영역에서 여러 의료시설을 설계하셨는데, 최근 아프리카의 병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이번 프로젝트가 특히 의미가 깊을 듯해요. 공공의료시설은 시민의 건강과 행복에 가장 깊이 연관된 시설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학교와 더불어서요. 과거에 보건소, 의료시설을 하면서 공공보건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는데 그게 알려져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 공공보건 병원 설계를 맡게 됐어요. 그곳 시민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열악한 병원들의 사정을 직접 보면서 그들이 유지 관리 하고 스스로 가꿔나갈 수 있는 지속가능한 체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직접 아프리카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의사나 병원장에게 어려움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했는데 어떤 병원장은 막 울어요. 그 누구도 그런 질문을 안 했다면서요. 환자는 몰려오고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고, 인력도 없고, 해결해 나갈 방법이 너무 없어서 답답하니까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의사선생님이 막 울더라고요.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런 분들이 좀 더 좋은 여건에서 환자를 볼 수 있고, 환자들도 동네 가까운 좋은 시설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일을 한 게 보람되죠. 그것이 90년대 제가 개업했을 때, 품었던 이상과도 잘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공간에서 어떤 것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신경쓰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건축은 삶의 형식이다(Architecture is life form)’라는 모토로 건축가의 삶을 살고 싶어요. 이것은 서양의 전통적인 ‘아키텍처’의 정의와는 상당히 다르거든요. 보통 아키텍처라고 하면 빌딩을 넘어선 이념을 갖고 있다고 정의하는데, ‘삶의 형식’이라고 하면 건축을 훨씬 더 바닥으로 끌어내린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아프리카든, 후암동이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형식이 있잖아요. 그것이 고스란히 건축 안에 잘 작동하는 것(work), 그게 가장 기본이고 시작인 것 같아요. 또 건축가이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빌딩 그 이상의 공간에 대한 야망도 있어요. 그 두 가지를 같이 이루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건축가로서 새로운 공간감, 새로운 물성에 대한 제안, 이런 것들이 삶의 형식(life form)과 부합이 되는 게 좋잖아요. 그 접점을 찾는 게 참 쉽지는 않아요. 늘 고민하면서 그 속에서 결과물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도시와 건축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이전보다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오픈하우스서울을 통해 건축물을 감상할 때,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일반인에게 제공되는 건축 이야기들이 상당히 파편적인 경우가 많아요. 앞서 말한 삶의 형식이라는 것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잖아요. 건축도 역시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건데, 매체를 보면 그 관계에 대한 담론보다는 시각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주를 이루어요. TV나 모니터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가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에게 오는 클라이언트들도 관계에 대한 얘기는 없고,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달라, 그와 비슷한 느낌을 해달라고 해서 오히려 힘든 경우가 있어요. 건축을 보실 때, 시각적인 이미지 외에 집이 길과 어떻게 만날까, 이 공간에서는 밖의 어떤 것들이 보일까, 밖에서는 이 집이 어떻게 보일까,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갈 때 어떤 것을 느낄지, 촉각은 어떠한지 등 그런 풍부한 것들을 많이 느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건축에서 중요한 게 뭐냐라고 한다면 촉각인 것 같아요. 건물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어요. 직접 가면 촉각이 느껴지거든요. 예를 들어, 음식이 존재감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온도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리 사진이나 TV로 사람들이 먹는 걸 봐도, 음식의 온도는 느끼지 못하잖아요. 건축에서는 그게 촉각이라고 생각해요. 사진으로는 보고 느낄 수 없는 것을 직접 가서 발바닥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는 촉각적 경험은 좋은 것 같아요. 그 이전에 건축은 관계의 예술이니까 왜, 어떤 관계가 이곳을 만들었는가를 보시면 좋겠어요.   서울시 교육청의 건축 자문을 통해 교육 시설 개선 프로젝트를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공간을 변화시키면서 의미가 크셨을 것같아요 지난 2년 반 동안 열심히 해왔고 좋은 결과를 만든 것 같습니다. 신문이나 TV에서도 많이 나오고 소개도 됐는데, 지난 달로 그 프로젝트가 끝나서 이제 정리를 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성공적으로 된 것 같아서 오랜만에 공공의 일을 하면서 만족스럽게 끝난 것 같아요. 체계가 완전히 잡혔기 때문에 앞으로도 잘 돌아갈 것 같습니다.   공공 프로젝트는 공공기관에 건축에 대한 이해를 얻는 것부터 어려움이 많은데요. 초반에 건축의 가치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은 부분일 것같습니다. 초반에는 힘들었죠. 교육청 관련 공무원들이 초반에는 저를 보고 ‘저 사람, 뭐야?’ 하는 분위기였는데, 다행히 교육감 님이 건축에 대해서는 김승회 교수가 교육감이라고 생각하라며 힘을 실어 주셨어요. 한편으로는 교육청의 경우 시설 담당이 완전 비주류예요. 교육청은 교사가 중심이잖아요. 공무원들에게 이건 중요한 일이고 당신들에게도 좋은 일이다라고 설득했어요. 그래서 성과가 나오는 걸 보니까 다들 힘이 됐죠. 결과도 좋고 생각보다 잘 따라준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여러 일들은 생기겠지만, 짧은 기간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변했어요. 여전히 보수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크게 보면 변해가고 있고 대세는 그렇게 될 것 같아요.   교육청 프로젝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역시 꿈을 담은 교실(꿈담교실)실이죠. 초등학교 교실인데 원래는 중학교 몇 개, 고등학교 몇 개 정도 고치자는 내용으로 입안되어 왔어요.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1학년, 2학년만 하자고 했어요. 왜냐하면 초등학교 쪽 장학사들과 이야기 하다 보니, 유치원이라는 좋은 공간에 있다가 그보다 열악한 학교로 오면 아이들이 더 힘들어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힘든 게 1학년 교실이었죠. 또 1, 2학년 초등학교 교육과정이 많이 변했기 때문에, 기존의 교실로 교육을 하기는 너무 어렵다고 했어요. 그래서 모든 예산을 거기에 몰았어요. 그건 잘 한 것 같아요. 중요한 건 그래프가 아래를 향하느냐, 위를 향하느냐인데, 어쨌든 더 나은 방향으로 전체적인 흐름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경영위치의 이 ‘소율’ 건축물을 합리적이고 최적화된 하나의 시스템으로 설명하셨는데요. 건축의 합리적인 시스템이 갖는 가치에 대해 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건축이 개인의 특성을 분명히 닮는다고 생각해요. 건축가의 성격이나 취향이 암암리에 담길 수밖에 없거든요. 가치관도 그렇고요. 동시에 건축주의 입장도 담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언어나 윤리는 매우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언어나 글자가 필요한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요. 왜냐하면 우리 삶이 굉장히 다른 것 같지만, 또 서로 공유하는 것도 많고 공통적인 게 참 많다고 생각해요. 건축은 특이성도 내세워야 하겠지만 동시에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기반으로 만들 때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누릴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설계할 때 보편적인 체계나 관점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져요. 어떻게 빌딩이 합리적으로 도시와 관계를 맺는가를 주로 봐요. 예를 들어, 이곳 경영위치 건물의 경우 1층이 개방적이잖아요. 합리적인 이유예요. 1층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보이고 만나는 곳이니까요. 그리고 주변과 적절한 높이를 가져야 하죠. 주변이랑 어울려야 하잖아요. 혼자 우뚝 있으면 주변에 그림자가 지고 불편해지겠죠. 할 수 있다면, 주변의 적정한 공간이나 건물의 크기들을 존중하는 걸로 가야해요. 공사를 할 때 10, 20년이 지나도 하자 없이 잘 유지될 수 있게 하는 것도 합리적인 부분이죠. 원론적인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자면, 건축물이 한국에 있기 때문에 갖는 관계가 있어요. 한국 사람들 또는 우리 도시가 갖는 특징이 있거든요. 골목이 있다든가, 필지가 불규칙하게 생겼다든가, 주변에 산이나 강이 있다든가, 이런 특성에도 초점을 맞추면서 그것이 갖는 관계를 찾아보는 거죠. 가령 산을 등진다든가 바라본다든가 또는 좁은 건물에 어울리게 건물의 스케일을 너무 크지 않게 좀 더 분절한다든가 등등 조금씩 하다보면 건축적인 언어들이 생성되는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 즉 1층은 열려야 하고, 주차가 돼야 하고, 지하층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많이 파야 하고, 위에서는 철저하게 도시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다 보면 지하부터 위로 올라가는 구조 체계가 다양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든가 하죠. 그 속에서 일반적으로 편한 해법을 찾는다든가, 어떤 때는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도시, 어떤 때는 평면의 형식에 대한 것으로 발전해 나가죠. 그게 깊어지면, 어떤 디자인 이론(theory) 내지는 건축방법론이 되겠죠. 제 경우 ‘내가 좋아서 했다. 특이하게 형태적인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만으로는 만족이 안 돼요. 물론 그게 어필하기는 쉬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심플하면 더 전달이 빠르고 간단하게 잘 되거든요. 그런데 그런 게 제게는 의미도, 재미도 없어요. 감각 이상의 것, 즉 사람들은 삶의 형식을 찾는데, 그것은 수많은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형식이거든요. 건축도 결국 여러 형식들, 삶의 진실과 형식을 수정해 가면서 만들어지거든요. 솔직히 어려운 이야기죠. 보편성에 대한 이야기는 건축가 사이에서도 논쟁적인 소재지만, 보건소, 병원을 많이 짓고, 또 학교 프로젝트도 많이 하면서 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어요. OHS 진행 임진영  
Interview “모든 도시의 매력은 공존”, 건축가 켄민성진 오픈하우스서울 2018에서는 미니 인터뷰를 통해 오픈하우스서울과 함께 하는 건축가를 만나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건축가 켄민성진을 만나 지난해 오픈한 부산 아난티 코브에 대한 이야기,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생각을 듣습니다. 오픈하우스서울 2018에서는 SKM Architects 오픈스튜디오와 준오 아카데미 오픈하우스를 통해 건축가 켄민성진을 만납니다.     지난해 오픈한 부산 <아난티 코브 Ananti Cove>가 많은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컸고요. 아난티 코브에서 보여준 휴식 공간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어떤 공간 경험을 주고 싶으셨는지요.   <아난티 코브>는 하나의 호텔이나 리조트를 넘어 부산이라는 도시에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공공장소를 제공하고자 했어요. 프라이빗한 콘도미니움도 있으면서 세미프라이빗한 힐튼호텔도 있고, 퍼블릭한 성격을 띠는 아난티 타운과 그 앞엔 공공 공원이 공존하고 있죠. 부산 시민은 주말에 가서 커피 한잔하면서 책도 보고, 다양한 종류의 음식과 이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요. 도시에 새롭게 가볼 수 있는 장소를 하나 더 중첩한 거죠. 반면 호텔 투숙객 입장에서는 사적인 공간을 즐길 수도 있고요. 호텔 리조트라는 기존의 프라이빗한 거대한 장소에 여러 성격의 공간이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 저희의 주요한 도전이었어요. 저는 모든 도시의 매력을 ‘공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시간이 중첩되고 켜가 계속 생기고 포개지는 것처럼, 아난티가 부산에 또 하나의 시간과 장소, 기억을 더할 수 있는 곳이길 바랐죠. 그 켜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어야 하고요. 저는 어떤 건물이든 그 지역에 켜를 하나 더한다는 생각으로 건축 설계를 하고 있어요.   아난티의 계단, 지하, 1, 2층의 숍의 경우, 기능적으로 끊임없이 혁신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근린생활의 모습을 반영하려 했어요. 5성급 호텔이지만 1층을 시민에게 열어서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든 거죠. 대부분 5성급 호텔들은 프라이빗하잖아요. 그에 비하면 굉장히 열려 있고, 그런 면에서 다양한 쉼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쉼이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죠. 모든 건축가가 하는 노력인데 저평가받는 것 같아요. 건축가는 엄청난 혁신을 보여주기도 하고 공적인 작업도 하지만, 일상의 삶에서 건물을 더 낫게 진화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고 생각해요.   소장님과 아난티 모두 휴식의 의미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신 거로 알고 있어요. 소장님이 생각하시는 휴식은 무엇인가요.   휴식은 삶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쉼일 수도 있고, 집에서 온종일 누워 있는 것도 일탈이고 쉼이죠. 이제는 쉼이라는 용어 자체가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현대 사회의 반복되는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일탈과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가 많은 도시가 풍족하다고 생각해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멋진 곳, 걸을 수 있는 곳, 자전거 탈 수 있는 곳, 미술관 등 만약 오늘 하루 일을 안 한다면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은 도시요. 사람들이 뉴욕 같은 도시를 가고 싶어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의 욕구를 다양하게 수용할 수 있는 곳, <아난티 코브>에서 주요하게 실현하고자 노력한 부분이에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거죠.   아난티 부산의 경우, 서울에서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다는 것도 중요했어요. 많은 사람이 외국 나가서 관광을 즐기는데, 대부분 한국에는 왜 그런 멋진 곳이 없냐고 해요. 저희가 아난티와 계속 의미를 둔 것은 그 부분이었어요. 외국 가는 비행기 표 값으로 <아난티 코브>에서 3박 4일 즐기는 것이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외국인 관광객을 한국으로 유치하는 것도 의미가 있고요.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사계절 때문에 겨울에는 즐기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부산은 온천이 있고 여기에 쉼과 여행, 독서, 음악, 자전거, 바다 산책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길 수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은 항상 변하고 우리 삶은 진화하므로 쉼도 진화하죠. 선진국일수록 쉬는 방식도 다양해져요. 그런 고민을 건축주와 했던 것 같아요. 우리에게 쉼을 줄 수 있는 장소란 과연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쉴 수 있는 장소는 다양성을 주는 장소인 것 같아요.   아름다운 공간미가 회자되고 있는데,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시도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소장님이 좋아하는 공간도 궁금해요.   여러 장소가 있지만 몇 가지 건축적 시도가 있어요. 먼저 콘도 쪽으로 들어오는 자동차 드롭 장소를 지하에 만들었어요. 힐튼호텔은 지상에 있고 지하에 콘도 드롭존을 만든다고 했을 때 다들 왜 콘도의 얼굴을 지하에 놓느냐고 했어요. 지하지만 멋지게 만들자고 제안했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많은 지상 공간을 자동차가 점유하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아난티 타운인데요. 보통 호텔은 지하에 아케이드 형식의 상점이 많잖아요. 그것들을 지상으로 꺼내서 작은 건물들로 만들고, 바다 풍경을 보게 해주면서 일반인에게 오픈했어요. 많은 분이 이런 방식의 상점은 장사가 안될 거라고 했어요. 그래도 우리가 한번 해보자 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오기 시작한 거죠. 이제는 소비의 자기 주도적인 성향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강제로 물건을 팔려고 해서 팔리는 게 아니라, 방문하고 싶은 곳을 만들고 선택권을 주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사람들이 그 공간을 즐길 수 있고 좋아하게 만들면 좋은데 역설적으로 힘든 일이죠. 아난티 타운은 그냥 사람들이 방문하고 싶은 공간을 만들고자 했어요. 그래서 일반적인 쇼핑몰에 대한 모든 통념, 가령 서비스 동선은 뒤에 있어야 한다는 등의 공식을 무시했어요. 서비스 동선 때문에 공간이 불필요하게 커지거든요. 멋진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이 거기 오고 싶게 하자 했고 장사가 되든 안 되든 그 공간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어요.   바닷가이기 때문에 1층을 공공에 열어주고자 했고 이를 위해 프라이빗해야하는 호텔의 로비는 최상층으로 올려보냈죠. 스카이 로비를 두려면 인력이 더 필요하지만 말이에요. 부산에 새로운 레이어를 더해간다는 느낌으로 ‘스카이 로비란 무엇인가?’, ‘상점은 어떤 성격이어야 하는가?’, 하나하나 질문을 하면서 채워갔어요.   아난티 프로젝트가 알려지다 보니, 소장님의 작업이 리조트 프로젝트로만 주목받는 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소장님이 애착을 가지는 프로젝트는 어떤 게 있을까요? 평당 220만 원 정도의 매우 낮은 공사비로 지었던 엠파크 허브 매매단지가 있어요. 한국에서 가장 큰 조립식 콘크리트 건물이고요. 금강산에 지은 아난티 클럽하우스도 한국에서 가장 큰 조립식 목조건물인데, 구조적 실험을 하면서도 공사비를 맞추는 게 중요한 콘셉트였어요.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공간적인 임팩트를 가져가는 것이죠. 너무 시각적 임팩트만 있고 기능이 충실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좋은 건축물이 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결국 건축물은 특정 개인에 의해서 평가되기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받게 되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요. 부산 아난티 코브 건물이 30도 정도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외관을 중요하게 생각한 게 아니에요. 개별 발코니마다 수영장이 있기 때문에 발코니에 햇볕이 드는 것이 매우 중요했어요. 테라스가 수직으로 올라가면 수영장에도 방에도 햇볕이 안 들기 때문에 리조트에서 기대하는 따뜻한 햇볕을 느끼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건물을 뉘면서 야외 테라스에서 햇볕과 바다를 즐길 수 있게 했죠.   아난티 프로젝트에서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도 있지만 하나 사서 오래 쓰고 클래식으로 남한테 물려주는 것이 있죠. 저희는 클래식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해요. 디자인, 철학, 총체적 맥락이 맞을 때 비로소 클래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것은 만들어지자마자 ‘멋지네!’라고 반응하지만, 곧 소비되고 잊혀지죠. 우리는 아난티를 통해 클래식을 만들려고 하죠. 사람들도 그런 가치에 의미를 두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철학과 공간과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면서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도시에서 긍정적인 일원이 되는 그런 건축물요. 그게 제가 가진 목표인데 사실 쉬운 건 아니에요. 그런 마음을 갖고 가는 거죠. 100년 전에 나온 어떤 램프는 현재의 사무실에 놨을 때 어색하지 않아요. 그런 퀄리티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항상 생각해요.   저는 도시도 그렇게 보거든요. 역사와 맥락을 보면 무엇을 보존하고 싶은지 알잖아요. ‘아 저건 부수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클래식이죠.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은 유명 건축가들이 한 거예요. 유명 건축가들이 했다고 해서 보존하겠다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이 생기는 거죠. 나중에 사람들이 ‘이 건물을 보존해야겠네?’ 하는 마음이 들면, 그리고 그런 건물이 많아지면 저는 풍족한 도시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도 지금부터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보존할 것하고, 없앨 것은 없애다 보면 만들 수 있어요. 더 중요한 건 지금부터 지어지는 건물 자체를 하나하나 도시의 일원이라는 마음으로 지어야겠죠. 삶도 그렇잖아요. 당신의 건물도 도시의 일원이라는 이야길 하고 싶어요. 도시의 기록에는 건축가의 이름도 남지만, 건축주의 이름도 항상 같이 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영향력 있는 행정가이고 꼭 한 가지를 해야 한다면 그 기록을 남기도록 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난티 코브>에는 잘 보이는 광장에 그 기록을 넣었어요. 건축주의 이름도 물론 있고요. 그렇게 하면 많은 건축주가 달라질 것 같아요. 건축물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 도시 역사에 켜를 더하는 작업이거든요. 건물의 등기부 등본을 떼었을 때, ‘건축주 누구와 건축가 누가 언제 지은 거다’ 그리고 그걸 허가해준 공무원도 같이 기록되면 많은 것이 바뀔 것 같아요. 건물이 도시의 한 부분이고, 하나의 켜를 더하는 거로 생각하면 건물 하나하나가 중요한 거죠.      우리 도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소장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가 근시안적으로 바라본 것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조급할 필요 없어요. 왜냐면 도시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중첩된 켜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금 만들어 가는 건축물이 새로운 켜를 더해 나가고 있는 것이죠. 서울은 큰 켜로 한강이 있고 북한산, 관악산이 있고 경복궁이 있고 창경궁, 시청, 청계천, 서울역이 있고 지하철 등등이 있죠. 많은 사람이 쓰는 공공 건축과 인프라를 잘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건축가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결국 건축은 우리의 진화하는 라이프스타일의 시대성을 반영하는 거죠. 그 화두는 영원한 거고, 우리는 끝없이 변화해요. 한시라도 가만있지 않잖아요. 사람이라는 존재가 참 재미있는 게,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원해요. 양면성을 갖고 있죠. 애증의 관계 같아요. 시간의 신이 절대적 존재예요. 그건 이길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건 소멸하지만 시간이 허락하니까 우리가 존재하는 거죠. 하루살이에게는 신이 하루라는 시간을 준 거고, 인간에게도 한정된 시간을 줬지만, 산과 바다는 1만 년도, 지구에는 1억 년도 주어지죠. 우리는 시간과 역사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데 그걸 잊으면 사람들이 오만해지고, 돈과 명예에 집착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창의적인 우위(creative edge)를 잃는 것 같아요. 크리에이티브는 세상사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사물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 같아요. 예술가 집단이 가장 그러한 집단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사회에 신선한 자극을 던질 수 있는 거고요.   자신의 맥락을 찾아가고 자기가 살아가는 삶과 추구하는 삶과 시간과 공간, 도시와 건축을 보는 맥락이 통일되고, 그것을 본인이 디자인하는 건축물에 충실히 반영하려고 노력할 때 좋은 건축가가 될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드물죠. 인간의 삶과 도시의 공통점은 좋건 싫건 끊임없이 레이어가 계속 중첩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도시를 보는 관점은 그 계속되는 켜에 있어요. 도시에서 내가 짓는 건물도 하나의 켜가 되는 거고, 건축주도 그걸 알아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전반적으로 영향을 주니까 모두 플라스틱을 줄이려고 하잖아요. 행동으로 이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잖아요. 서울시에 지어지는 건축물도 하나의 구성원이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좀 더 풍부한 걸 하고 싶지 않을까요? 사람은 길게 100년을 살지만, 건축은 몇백 년 존재하며 도시의 한 구성원으로 켜를 만들고 있으니,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건축물을 설계하고 만들어 간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요. OHS  진행 임진영   사진 SKM Architects 제공  
Interview W Interview 오픈하우스서울이 올해부터 시작하는 <W Interview>는 건축, 조경, 도시 분야의 여성 전문가를 만난다. 한국의 현대 건축, 도시, 조경의 현장에서 활동하고, 한 축을 이루고 있으며, 또 오늘을 만들어가는 여성, 전문가를 위한 기록이다.  전문가의 영역에서 ‘여성’이라는 수식어는 간혹 불필요하거나 무의미한 분류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최근 몇 년 동안 줄기차게 이 분류가 호출되는 이유는 기울어진 판에 대한 자각과 남성 중심의 서사가 놓치고 있는 전문 분야의 다양성에 대한 요구이자 필요에 가깝다. 젊은 여성 건축인의 비율은 높아졌지만, 현역에서 활동하는 중견 건축인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무엇보다 여성 건축인에 대한 기록과 작업에 대한 조망이 빈칸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여성 건축가의 존재를 수면 위에 띄우고 재조명하면서 또 하나의 관점과 서사를 쌓아가는 이 과정은 한국 건축에 다른 시각의 타래를 더하고 한국 현대 건축 서사의 깊이와 켜를 확장하려는 노력이다. 이 인터뷰는 2009년 월간 <공간>과 네이버의 협업으로 진행되었던 한국인 시리즈 <건축가> 편에 소개된 12명의 건축가 인터뷰를 연장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시작되었으며, 전문가로서 여성 건축가, 도시, 조경가를 주목하고 그 작업 세계를 만나는 자리로 마련된다. <W Interview>라는 이름은 이미 전시, 연구, 출판을 통해 디자인계의 ‘끊임없이 갱신되는 열린 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를 선언한 <W 쇼>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OH
Interview 그리팅가든, 박 헬렌 주현 그리팅가든은 마임빌리지 단지의 중앙부를 이루는 연못과 아름다운 자연이 한눈에 인지되는 곳에 자리한다. 여주 마임빌리지(여주 인재원)의 방문자가 가장 먼저 방문하게 되는 공간으로 연수생 접수공간, 산책하는 이들을 위한 휴식 기능 그리고 전시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요구된 곳이다.  대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복잡한 요소들이 하나의 큰 조직을 이루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기존 건물과 잔디마당으로 조성된 연수원의 1차 부지와 아직 활발히 조성되지 않은 2차 부지를 연결하는 부분이며, 크고 작은 동선이 교차하고, 대지의 높낮이가 얽혀 있는 곳이다. 남쪽 연못의 수면 높이와 지면 높이의 관계가 민감하였고, 옆 주차장과 기존 숙소건물의 관계도 복잡했다.  정문에서 그리팅가든에 이르는 진입로는 구불구불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대지의 끝이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서부터 접근과 배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주차장과 연계된 열린 잔디공간에 돌 기단을 놓아 계단 하나의 높이와 재료 차이로 공간을 분리, 연결하고 싶었다. 이 기단은 지형의 높이 차이를 고려하며 접혀 올라갔고, 벽이 필요한 기능들은 돌상자, 나무상자, 거울 상자로 구성되어 기단에 올려졌다. 주변의 수려한 녹음과 시선이 끊기지 않도록 수평으로 긴 유리 상자가 작은 상자들을 덮은 안을 생각하였다.  연수원의 진입부에서 걸어 올라가는 방향과, 도착 후 돌아서서 본 전경의 방향 차이에서 유리상자와 돌 기단의 배치가 비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틈으로 출입구를 만들었으며, 유리상자를 둘로 나누고 연못과 연결되는 기단 쪽으로 통로를 두었다. 연못 너머로 여름에는 나무가 우거져 보이지 않는 꽃집이 겨울에는 잎이 떨어진 가지 사이로 보이게 된다. 사무실 공간을 나누어주는 나무 벽은 높이가 달라지며 구부러지는 면으로 표현했고, 슬레이트석의 단면을 사용한 계단과 난로, 돌과 유리 그리고 백일홍이 비치는 거울 상자 등 재료와 표현의 고민이 계속되었다. 그리팅가든은 독립적인 요소들이 대지와의 관계에서 비껴지고 얽히면서 이루어진 하나의 조직이다.  + 글 박헬렌주현  + 사진 김용관 
Interview 영역을 뛰어넘는 시각과 건축의 확장, 건축가 박 헬렌 주현 ③ 건축적 관심에 대해 여쭤볼게요. 작업 중에 공간이 부속으로 딸린 중심공간을 만드는 평면이나, 입면 구성에서 면의 분할, 목재를 활용하는 경향들이 흥미롭습니다. 설계할 때 주로 어떤 부분에 관심을 두고 전개하시는지 궁금해요. 우선 대지와 프로그램이 많은 것을 정해줘요. 건축 설계는 창의적인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법규도 변수를 줄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고맙죠. 다 펼쳐지면 계속 고민을 해야 하는데 다 끊어주니까. 아까 동은재 이야기를 하며 설명해 드린 것 같이 대지 분석에서 나오는 여러 요소를 가지고 문제를 풀 때가 가장 신나요. 너무 차가운 재료보다는 따뜻하고, 덜 가공된 재료를 쓰고 싶죠. 돌이면 돌, 재질이 확실히 느껴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목재가 재미있기는 해요. 시공도 빠르고 따뜻하고 좋은데 우리나라 기후에는 좀 힘들어요.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할 수 없이 콘크리트를 써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단열과 냉방을 동시에 하는 게 쉽지 않죠. 앞으로 전기요금이나 미세먼지, 단열을 고민하다 보면 형태가 많이 바뀔 거 같아요. 미세먼지에 대비한 공조시스템이 발전해야 할 것 같고요. 우선은 정부 정책으로 공기를 개선해주지 않으면 안 돼요. 개개인이 다 공기청소기를 두고 있는데 이것도 다 쓰레기가 될 거 아니에요. 참 큰 문제에요. 여름에 더 덥고 겨울에 더 춥고, 이제 캘리포니아 스타일처럼 전면 유리로 마감하는 건 끝난 것 같아요. 건축에서 이 에어필터를 어떻게 해야 하나. 현실적으로 에너지와 친환경이 건물에서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해요. 땅에 어떻게 앉혀야 단열이 가장 잘되는지, 그런 프로그램이 디자인을 다시 지배하겠죠.   건축가로서, 전문가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꼽으시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역사를 소홀히 하지 않고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구조, 설비 등 전문가와 협업하는 자세도 중요해요. 하청이 아니라 파트너로, 같은 디자이너로서 협업할 수 있는 자세. 저는 건축을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의뢰인의 요구가 있을 때 더 좋은 대안이 있으면 제안하지만 강요하지는 않거든요. 물론 완전히 잘못된 것을 해달라고 하면 거절해야 하지만, 건축은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내 미학적 고집(aesthetic persist)과 의뢰인의 요구가 부딪힌다면 가능한 범위에서 맞춰드려야 할 것 같아요. 주거 공간 같은 경우는 특히나. 그걸 잊고 건축의 숭고함만을 배우면 안 될 것 같아요.   귀국하셨던 1990년대에는 그런 분위기가 팽배하지 않으셨나요? 건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지금과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죠. 어떤 분은 자신만만하게 클라이언트를 야단쳤다고 하는데, ‘왜 야단을 치시지?’ 생각했어요. (웃음) 이해는 시켜드려야 하지만 서비스업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들어가야 해요. 그게 싫으면 클라이언트가 되어야죠. 그래서 힘들어요. 그렇다고 투자를 잘해서 커미션을 받는 게 아니라, 들어간 시간만큼 비용을 받기 때문에, 굉장히 힘든 작업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하는 직업 같아요.   건축 설계에 대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한국의 상황이 안타까워요. 전 세계적으로 건축가가 좀 그래요. 그게 가장 아쉬워요. 대학원 예산을 보면, 디자인 대학과 교육 대학이 가장 예산이 적어요. (웃음) 졸업생들이 그만큼 기부를 못 해요. 너무 빠듯하니까요. 로스쿨이나 비즈니스스쿨은 기부를 많이 받으니까 살림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는데, 디자인 대학은 장학금을 주고 좋은 학생을 데려오고 싶어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살림을 해야 하는 거죠.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에요. 전 세계적으로 건축은 노동 집약적(labor intensive)인 분야이기 때문에 그런 면이 없지 않아요. 의뢰인에게 정정당당하게 시급제로 비용을 청구해야 하고 함께 단합해야 하는데, 일을 놓고 경쟁하다 보면 그런 단합이 힘들기도 하죠. 아쉬운 부분이에요. 요즘은 소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의뢰인들도 많고, 작은 사무실에서 잘해나가는 것 같아요. 세대가 바뀌면서 좀 개선이 되지 않을까요?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건축가에 대한 인식이 넒어져서 집을 지을 때 건축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어났는데, 소규모 프로젝트의 예산이 너무 적은 경우도 많아요. 무리해서 작업을 하다 보니까 젊은 건축가들도 출혈이 생기고요. 작업하더라도 유지가 안 되니 그런 작업을 반복하기는 힘들잖아요. 개개인의 의뢰인이 늘어나는 것보다, 제대로 돈을 쓰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맞아요. 그런 조언을 의뢰인에게 해야 해요. 무리하게 설계비를 150으로 낮추지 말고, 200을 주고 그 대신 제대로 서비스를 받으시라는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소규모 스튜디오를 운영하셨는데요. 개개인의 작업을 충실히 할 수 있는 구조이지만 스튜디오도 결국 사업체인데, 대부분의 건축가가 경영에는 익숙지 않죠. 사무실 운영은 어떠셨나요. 이태원 사무실이었는데 꽤 큰 공간에 식구는 적었지만 재미있게 있었어요. 제가 미국을 가게 되면서 정리를 해야 했죠. 운영은 안 좋았어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내가 직접 관리하는 수준의 작은 아뜰리에고, 프로젝트가 커지면 큰 사무실과 협력하는 네트워크를 해놨어요. 그렇게 구조를 만들었지만, 목표(goal)가 너무 낮았던 거죠.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해야 하니까. 손실이 좀 나면 내 월급으로 메꾸는 차원에서만 생각했지, 사무실을 확대하고 더 큰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마케팅할 여력이 시간상으로 없었던 거예요. 여자나 남자나, 개소를 너무 일찍 해서 한계에 빠지는 선이 있을 거 같아요. 스스로 다룰 수 있는 오버헤드와 프로젝트 규모와의 간극(gap)이 있기 때문에요. 협업하면 좋은데 보통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정석은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설계비를 청구하고, 시공비를 제대로 받아서 의도한 건물이 만족하게 나오고, 그 건물을 기반으로 더 좋은 프로젝트 따고, 더 좋게 짓고, 더 좋은 의뢰인과 만나고, 이렇게 해야 해요. 저는 그것을 잘 못 했죠.     참 어려운 거 같아요. 건축적으로 해결할 수는 있지만 싸게 지으면 결국 저렴한 건축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다음 단계를 보면 과연 더 나아갈 기회가 있을까 싶고요. 싸게 하려면 아이디어가 획기적이지 않고서는 안돼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욕심내면 오히려 화음이 아닌 소음이 되어 실패할 수 있어요. 물성을 보여주는 것보다 아주 간단하고 획기적인 공간 아이디어로 명확하게 돋보여야 그걸로 다른 의뢰를 받을 수 있어요. 저렴한 프로젝트를 자주하면 진만 빠지고 발전이 없기 쉽죠.   지금 젊은 건축가들이 가지는 딜레마가 아닐까 싶어요. 어떻게 보면 자기 스튜디오라는 낭만 때문에 어려운 부분이죠. 저는 사실 제가 아프고 피곤하니까 학생들에게 점점 솔직해졌어요. 건축을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말을 못 하니까요. 이 공부를 하고 얼마나 힘들지 아니까. 멀쩡한 가장이 와서 전공을 바꾸어 건축대학원 지원할 때면 네가 진짜 원하는 거냐고, 힘들다고 말했어요. 학교에선 난감하겠지만 그 비싼 대학원 학비를 내고 오는데 정확하게 알려줘야겠더라고요. 정말 좋아서 하는 학생들은 해야 하고, 또 대형 건축사무소가서 괜찮은 수준으로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정확하게 알아야겠더라고요.   일을 쉬고 계신데, 면역에 취약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과로하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이가 늦었던 것도 몸이 좀 안 좋아서였어요. 31살 정도에 아기를 낳았는데, 좀 아파서 임신을 늦추었다가 그 뒤로는 임신이 안 되어서 늦었죠. 그러다 겨우 생겼는데 유산기가 있어서 10개월을 누워 지냈어요. 아이를 낳고 나서는 홀가분하게 활동을 하다가 2005년도에 다시 몸이 안 좋아서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서 휴직했죠. 3번째 아픈 거였어요. 아이 낳기 전, 후 그리고 2005년. 이렇게 세 번 지병이 오다 보니까 의사인 사촌 언니가 ‘내가 너 같으면 쉬겠다.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일을 하니?’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때까지는 아무 의심 없이 몸이 아파도 좀 나으면 일을 했는데, 삼세번이 되니까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쉬어보자 하다가 아이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뉴욕에 가게 되었어요. 저도 재충전을 하자 했죠. 그렇게 한 해 두 해 늘어나게 되니까 자꾸만 현장에서 멀어지게 된 거예요. 건강은 나아졌지만, 시간이 좀 걸렸어요. 한 가지 지병은 아직 관리하느라 병원에 왔다 갔다 하고 있죠.   건축 설계라는 분야가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격무인 것 같아요. 현명하게 해야 하는데 너무 미친 듯이 무리한 것 같아요. 좋아했으니까. 100만 원 받으면 딱 100만 원어치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다 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싶잖아요. APAP나 그간 했던 전시도 판 하나 깔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꽤 많이 생각하고 모델을 만들곤 했죠. 과정이 참 좋았지만, 너무 무리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면에서 좀 그래요. 여행 가기 전에 집을 다 치워놓고 가는 성격 있죠? 갔다 오면 깨끗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나를 더 막 괴롭히게 되죠. 살림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터득하지 못하고 성에 차게 하니까 안 되죠.   모든 역할을 다 해내려 하신 거네요. 일하는 여성의 힘든 부분인 것 같아요. 저도 딸이 있지만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나눠야 해요. 제 딸은 저처럼 모든 것을 똑바로 정리하지 않아도 괜찮은 성격이에요. 저는 꼭 똑바로 해두어야 하거든요. (웃음) 처음에는 야단을 치다가 지금은 내버려 둬요. ‘네가 앞으로 커리어를 갖고 살려면 이런 부분은 그냥 지나치고 가야 안 아프지, 매번 정리하고 살면 이 아이가 아프겠다.’ 그런 생각을 해요. 저도 좀 바뀌는 것 같아요.   건축 실무에서 의뢰인을 상대할 때 여성이라는 점은 전혀 영향이 없었나요. 현장에서 작업하셨을 때 장단점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여자와 남자는 달라요. 그 다른 점을 쓰면 되는 것 같아요. 어떤 의뢰인은 여자라서 좋아하시는가 하면 어떤 분은 여자라서 불편해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건 사람의 취향이에요. 예를 들어 산부인과 갈 때 여자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자 선생님도 상관없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본인이 편한 쪽으로 가는 것에 대해 성차별이라고 얘기하기는 싫어요. 왜냐하면 건축은 긴밀하게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요. 헤이리 북카페의 경우 건축주분께서는 여자라서 더 좋다고 했어요. 여자라서 더 요구 사항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과는 잘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현장은 어차피 현장 소장이 있고 그 관계만 원활히 하고, 건축가로서 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거기서 밀리거나 할 말을 못 하진 않아요. 저는 교수라는 타이틀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수월했죠. 하지만 거기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면 괜찮을 것 같아요. 대신에 확실하게 알고 얘기를 해야겠죠. 그렇다고 밀리지 않으려고 너무 세게 나와도 곤란하고요. 그게 참 묘미인 거 같아요. 남자들도, 여자들도, 둘 다 힘들기 매한가지지만, 힘든 부분이 다른 것 같아요. 너무 쉽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 사실 힘들죠. 완벽주의자가 되지 않아야 하고, 일을 나누어야 해요. 혼자 다 못해요, 그리고 플랜 B가 많아야 해요. 일이 안 되었을 때 가동해야 하는 플랜 B, C를 준비해야 돌아갈까 말까 하죠.   사무실 운영 측면에서 말인가요? 사무실 운영, 아이 보는 것 모두요. 얼굴 보고 힘든 말도 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더 힘들고 불필요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쓰더라고요. 직원을 하나 내보내야 하면 고민을 하지만 딱 얘기를 하고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줘야 하고, 그런 판단을 빨리하는 연습을 하면 좋아요. 너무 많은 욕심을 내면 일을 그르치거나 건강을 그르치거나 하죠. 저는 건강을 그르친 나쁜 사례이고, 현명하게 하려면 일을 나눠서 해야 하고, 플랜 B가 많아야 하고, 자존감 있게 하나에 집중할 때에는 다른 건 안 해야 해요.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인 거 같아요.   이 인터뷰가 시작된 계기는 자신의 작업을 보여주는 50대 여성 건축가의 부재가 컸습니다. 공간 재직 시절에 네이버 한국인 시리즈 <건축가> 인터뷰를 했는데 동시대의 여성 건축가분들이 안 계신 거예요. 물론 개별적인 사정이나 건강 문제가 컸지만, 한편으로 과연 우리 사회는 여성 건축가에게 큰 프로젝트를 할 기회를 주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어요. 작은 프로젝트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대형 프로젝트, 혹은 지명 공모전에 여성 건축가가 호출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과연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여성 건축가들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사회적인 선입견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어요. 큰 프로젝트를 하는 분들은 있는 데 보통 같이하시는 경우가 많죠. 규모 있게 사무실 운영하는 분으로 김용미 선생님도 있고요. 우리가 좋은 예가 못 돼서 아쉬워요. 그때 저와 민선주 씨, 서혜림 씨를 삼인방이라고 불렀는데, 선주 언니 아프시고 서혜림 씨도, 저도 아프고, 이런 상황이 참 안타까웠던 거 같아요. 서울대 후배들을 보면 사무실을 개소해서 열심히 운영하는데 얼마나 큰 프로젝트를 맡는지는 모르겠어요. 대형설계사무실에 임원진은 계시죠. 정말 더 나와야 할 텐데요.   건축에서 젠더 이슈를 크게 체감하지 않는 이유가 건축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여자든 남자든 큰 차이가 없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졸업생 성비, 젊은 여성 건축가가 배출되는 비율만큼 중견 건축가까지 그대로 유지가 되느냐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잘 안되죠. 너무 힘드니까, 그리고 육아를 하다 보면 쉬거나 파트너쉽으로 가죠. 어떻게 보면 나눠서 하는 게 현명한 거예요. 나눠서 하면 계속할 수는 있으니까. 자신의 이름 하나로 내거느냐 아니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둘 다 원하면 나눠서 하는 것도 좋고,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만약 올인하고 싶으면 희생할 것은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다 백 점으로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예전 글에서 조경이나 건축이냐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으셨고, 그에 대해 ‘랜드아키텍처’라는 표현으로 관계 구성과 구축에 대해 정리하셨습니다. 건축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 된 시기는 언제인가요? 사실 제 마음대로 생각했던 건축물을 충분히 지을 기회가 없었어요. 하지만 항상 랜드스케이프 스케일이 아니라 건축 스케일에서 땅을 더 적극적으로 만질 수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건물을 잘 앉히면서도 그렇다고 땅속에 집을 짓는 것도 아니고요. 할 게 너무 많은데 목표는 세워놓고 많이 미달이 된 느낌이 들죠.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어요.   실현되지 못한 것을 담고 있어서 앞으로를 더 기대하게 돼요. 지금은 일을 쉬고 계신데, 이후에라도 기회가 있으면 작업을 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여건이 되면 하고 싶죠. 이전 프로젝트를 볼 때면 ‘왜이랬어, 더 잘하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평창올림픽 폐막식 영상에 제 프로젝트가 나온 걸 보고도 ‘지붕 색으로 천장을 칠하는 건데’ 그러고 있어요. (웃음) OH  + 진행 임진영 + 사진 정멜멜 
Interview 영역을 뛰어넘는 시각과 건축의 확장, 건축가 박 헬렌 주현② 하버드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건 언제였나요? 1993년, 94년인 것 같아요.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바로 오신 건가요? 조금 있다가 왔죠. 대학원 도중에 결혼해서 상황이 좀 복잡했어요. 시집살이하면서 풀타임으로 사무실에 나가고 밤새우는 것은 무리였어요. 그래서 서울대 박사 과정을 시작한 거예요. 안 그러면 생각이 끊일까 봐. 또 미친 듯이 디자인을 해봤으니까 더 읽어야 하겠더라고요. 학교에서 보고 디자인하고 만드는 것에 대한 갈증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는데, 읽고 공부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부분이 느껴져서 서울대를 간 거죠.   아기를 낳은 시기도 그때인가요? 아기는 딱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니까 들어서더라고요. 그래서 아기 낳고 키우면서 방법을 모색했어요. 감사한 게 기회가 참 빨리 왔어요. 좋은 분들과 서울건축학교에 참여하기도 하고, 두물머리 워크숍도 참여했고요. 두물머리 워크숍은 백문기 선생님, 조병수 선생님 등이 참여하셔서 양평 숙소에서 직접 그리고 전시했는데 참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사람들 많이 만나다가 조병수 선생님이 강화도 우리마을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민)선주 언니와 다른 작업을 하다가 연결된 프로젝트가 동은재 주택이에요 저는 참 감사해야 해요. 마케팅한 것도 아닌데, 교수직이 생겼고 좋은 의뢰인이 연결되어서 사무실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복잡했죠. 아이는 어리고 어른들이 편찮으신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어요.   한국에 들어와서 커리어가 바로 이어졌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사이 결혼과 출산, 박사 학위를 받고 실무를 시작하셨네요. 박사 논문의 주제는 무엇이었나요. 가장 친한 친구가 불문학을 해요. 그 친구와 케임브리지에서 같이 그림을 많이 보러 다녔는데. 같이 초현실주의(surrealism) 미술을 좋아했어요. 친구는 문학으로 초현실주의 시(surrealism poetry)도 좋아해서 언젠가 이 주제로 뭔가 하자고 했는데, 친구는 보들레오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썼어요. 저는 초현실주의 건축(surrealism architecture)에 관해서 쓰고 싶었어요. 회화는 초현실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들어가서 사는 3차원 집에서 이것이 어떻게 표현 가능한가 궁금했어요. 게리의 초기 건물들 그리고 아이젠만의 웩스너 예술센터(Wexner Center for the Visual Arts) 같은 작업과 마그리트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이 네 사람의 작업을 비교분석 했어요.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보면 타운하우스 앞에 가로등이 하나 켜있는데 대낮이잖아요. 언뜻 보면 현실을 그대로 그린 것 같죠. 하지만 가만히 보면 대낮 나무 그늘 안의 가로등 불이 켜져 있는 듯한데, 밤이면서 낮이 공존하는 초현실이에요. 초현실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이성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초현실을 그려놓음으로써 우리가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매개해 주잖아요. 프랭크 게리의 건축도 초현실주의적인 순간들(moment)이 있는 것 같아요. 부엌 바닥을 아스팔트로 마무리하는 것에서 안이냐, 밖이냐에 관한 이슈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초현실적인 면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 것을 찾아보려고 했어요.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 같은 초현실이 아니라, 엄연히 익숙한 하늘과 집, 창문도 다 있는데 그것의 조합으로 이뤄진 마그리트의 초현실적인 순간들을 건축에 응용할 수 있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요소들이 어떻게 다르게 해체(deconstruction)되는지, 다시 조합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비슷한 현상들을 보고 싶었어요. 이런 주제에 관하여 실컷 읽고, 게리와 아이젠만의 작업을 직접 보고 건물 몇 개를 선정해서 마그리트와 에른스트의 그림들과 같이 비교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 패스 패일로 성적을 바꿀 정도로 잘 못 했던 것을 논문으로 쓴 셈이에요. (웃음) 즐겁게 썼어요.     이론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건축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한 것이 있었나요? 어떻게 보면 오히려 너무 복잡하게 생각 안 하기. 이론에서 시작해 형태를 만든다기보다 원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생각을 전개해요. 게리가 초현실적인 생각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당시 뭔가 실험하고 싶어 한 맥락이 있잖아요. 그 시대에서 느끼는 실험하고 싶은 주제와 담론들, 어떻게 보면 시대성인 것 같기도 해요. 이론과 실무가 양쪽에서 다 진행되기 때문에 여러 담론과 작업을 보고 듣고 하다 보면, 그럼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를 들여다보게 되죠. 그렇게 자신이 궁금해하는 것을 탐구할 때에 좋은 작업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론가들은 이런 것들을 이론적 배경으로 설명하고요. 제 경우 이론이 앞서면 디자인이 잘 나오지 않더라고요. 마치 스펀지의 물을 짤 때처럼 다 읽고 받아들이고 있다가, 물이 가득 차오를 때 원하는 방향으로 짜다 보면 거기에 맞는 나만의 디자인, 실험해보고 싶은 것들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 나오는 소재도 중요하지만 매일 신문 읽고 꾸준히 흡수하는(keep up) 게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어떤 것이 먼저라고 얘기할 수 없겠더라고요. 그리고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새삼 느껴요. 요즘 나오는 건축 잡지를 열심히 봐서 짜깁기하는 것과 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습득해서 나오는 것하고는 다르지 않나. 요즘 그런 밑 작업을 너무 안 하는 분위기인 것 같아서 그게 아쉬워요.   밑 작업도 부족하지만 동시에 한국 건축에 워낙 밑 작업이 될만한 연구가 충분치 않아서 토대가 부족하다는 문제의식도 많이 보여요.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한국 건축의 근현대 시기를 아카이빙하고 다큐멘테이션하는 작업과 움직임이 있어요.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건축큐레이터나 박정현 건축비평가와 같은 분들이 연구자로서 끊임없이 디딜 공간, 초석을 찾아 나서고 있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의 현대 건축은 어디에 기대고 있는가?” 토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굉장히 빈약할 때가 많다는 생각을 해요. 옛 분들의 고민과 작업의 깊이는 항상 놀랍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현대 미술만 따르며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휘트니 뮤지엄만 가는 사람이 있어요. (웃음) 제대로 이해하려면 메트로폴리탄부터 가야 하는데. 그런 부분을 많이 느낀 것 같아요. 논문을 쓰고 나니까 예전에 배웠던 건축 역사 코스가 다르게 이해되는 거죠. 학생 때는 처음 접하기 때문에 해석이 돼서 입력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젊기 때문에 흡수력이 빠르잖아요. 그때 한번 봐놓으면 건축하는 사람은 시각적으로라도 기억을 하거든요. 그런 경험과 이론이 쌓여 작업하다 보면 거기에서 깊이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요즘은 모든 정보를 ‘구글’할 수 있으니까 전문 영역(expert)이라든지 자기의 무지에 대해 너무 자신감 있는 세대가 되어버려요. 전문가 필요 없이 다 내가 전문가이고 서로 다 잘 모르는 게 쿨한 분위기가 되는 게 아쉽죠. 특히 건축 분야는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접근하는 것에 대해 위험하다고 느껴요. 제대로 많이 보고 공부하고 고민하는 분들의 작업이 가볍게 여겨질 것 같아요. 기록이 부족해서 그렇지, 한국 근현대건축 또한 활발하고 정열적이었을 것 같아요. 전통건축의 장인들도 왕성하셨을 것 같고, 소수이지만 외국의 변화를 보고 듣고 한국에서 펼쳐보고 싶었던 분들이 계셨을 거예요. 의뢰인일 수도 있고, 화가였을 수도 있고요. 건축 공간에서 느끼는 희열은 전염성이 아주 강해요.   본격적인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매스로 공간을 구성했던 삼현여고 프로젝트가 거의 초기 작업이었죠? 1999년 작업이었어요. 그때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 조병수 씨, 민선주 씨가 계셨는데, 제가 한국에 나왔을 때 게스트 크리틱으로 불러주셨어요. 그 후, 인연이 돼서 겸임으로 나가다가 교수를 하게 되었죠. 그때 제 학생 아버님이 삼현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어요. 그 학생이 저와 일하고 싶다고 해서 제 첫 번째 직원이 되었고 그 작업을 같이하면서 김은미 씨가 영입되어서 우리 셋이 삼현교사 프로젝트와 삼현생활관 두 건물을 설계한 거예요. 사무실은 그렇게 시작됐죠.   조병수 소장님과 ‘강화도 우리마을’ 프로젝트를 같이 하셨죠? 하버드 대학원 다닐 때 조병수 선생님이 제 작업을 좋게 봐주셨어요. 리뷰할 때면 본인 수업도 아닌데 와서 들으시더라고요. 정말 고맙고 긴장됐죠. 강화도 우리마을 작업을 의뢰받으시고, 조병수 선생님께서 이건 거의 신의로 하는 작업(Bonafide work)인데 같이 디자인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좋다고 했죠. 아시다시피 정신지체아 시설인데, 저에게 기숙사를 맡아달라고 하시고 본인은 교실을 디자인하시겠다고 해서 우리마을 설계가 나온 거예요. 설계비를 거의 안 받고 했지만, 저에겐 의미 있는 초기 작업이었어요. 완공 후 2001년, 영국 건축지 The Architectural Review에서 주는 Ar+d Emerging Architecture 상을 받게 되어 저에게 많은 용기를 준 작업이기도 해요.    중간에 타일로 외부를 마감한 매스도 인상적이었어요. 저렴한 마감이어도 나무 소재가 가지는 차분한 공간감도 있고, 원형 외부 공간이 갖는 임팩트가 강렬했어요. 왜냐하면 비가 오면 학생들이 놀 데가 없어요. 없어질 염려가 있어서 학생들이 갇혀 살아야 했죠. 그래서 비가 와도 옥외에 활동할 수 있도록 하고, 학생들이 가방도 놓고 할 라운지가 필요해 추가되면서 진행되었어요. 이 프로젝트는 참 의미 있어요. 원형 데크에서 옥외활동을 하고, 뛰어내리거나 밖에 나가면 안 되니까 창살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안전하게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해서 제약이 많았지만 그래서 좋은 설계가 나온 것 같아요.   디자인에서 재료 마감까지 많이 고려해서 공사비를 최대한 절감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맞아요. 설계하기로 정한 후, 가장 먼저 한 작업은 정신지체아 시설의 기준, 사례들을 연구해서 나름대로 우리마을 설계지침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뢰인의 요구사항들도 많은 도움이 됐죠. 그런데 예산 안에서 좋은, 지침에 맞는 설계를 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어요.  예산을 절감하는 방법은 조병수 선생님께 배웠어요. 모든 것에서 조금씩 빼면 예산이 금방 쑥 내려가요. 예를 들어 마지막에 마감을 합판으로 정했어요. 가장 바깥쪽(top layer)은 외장으로 가능한 것을 썼지만, 그래도 합판이에요. 처마를 꼭 만들어주고 관리를 해줘야 하지만 비용 절감은 많이 되죠. 원형 지붕 재료의 일부도 폴리카보네이트라서 지금 가면 많이 노랗게 변색해있을 거예요, 하지만 유리나 더 좋은 재료를 쓸 여지는 못 되었죠. 또 아이들이 타박상을 입을 수 있어서 마감을 가능한 한 나무로 해야 하는데, 거칠기는 하지만 예산 안에서 해결했어요. 조 선생님과 참 좋은 인연이에요. 제가 활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가장 아까워하시고. (웃음) 그렇게 사이사이에 공모전이나 협업을 한 게 많아요. 민선주 선생님, 고 장림종 교수님과도 협업했었죠.   초기 작업 중에 주택인 동은재도 인상 깊은 프로젝트였습니다. 어떤 부분에 집중하셨나요. 헌 운동화같이 편한 집, 저렴한 집을 원하셨어요. 대지가 길고 좁지만, 두 개의 축을 가진 특성을 의뢰인이 요구하신 프로그램과 맞추어 디자인했어요. 다만 중간에 시공업자의 문제가 있어서, 의뢰인이 저희에게 공사 마무리를 부탁하셨고 사무실의 김은미 씨가 현장을 맡으면서 끝낸 작업이에요. 현장에 상주하면서 마감을 하니 꼼꼼히 끝난 결과물이었어요. 저는 이렇게 대지를 이해하는 축들을 찾아서 건물 배치 및 형태를 생각할 때 디자인이 잘 풀려요. 진입, 동선, 전망 등이 정리가 되면서 축들의 사이에서 좋은 공간들을 찾을 수 있어요. 소쇄원을 분석하여 논문을 쓸 기회가 있었는데, 소쇄원을 이러한 축들로 이해할 수 있었고, 구조물과 건축물의 배치를 분석할 수 있었어요.   헤이리 아트밸리에서는 주택에서 상가까지 꽤 많은 작업을 진행하셨어요. 의뢰가 들어오는 순서대로 단독 건물의 형태로 디자인하여야 했지만, 헤이리 설계지침의 취지인 ‘한 단지로서의 헤이리’라는 목적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헤이리 한스갤러리 이후에 바로 옆에 있는 써니갤러리를 디자인할 기회가 주어졌죠. 연결해서 한 블록을 설계할 수 있었던 기회였고, 독립적으로 각 의뢰인의 목적에 맞는 맞춤 건축물이지만, 옆 건물과 조화로운 결과를 이룰 수 있어서 만족했어요. 헤이리아트밸리의 경우, 블록 단위로 디자인하면 좀 더 조화로울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아쉬워요. 나란히 위치한 프로젝트들인데 개별적으로 소리를 지르니까 화음이 안나요.   방주처럼 생긴 헤이리 북카페 프로젝트는 내부에서 본 목조 지붕이 인상적인데, 지붕 아래를 바로 유리로 처리해서 살짝 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게 기억에 남아요. 땅이 그렇게 생겼어요. (웃음) 지붕 부분은 저도 맘에 들어요. 그렇게 하느라 애를 썼죠. 그 프로젝트를 하신 목수가 알로에마임 야외 바를 만든 분이세요. 목공을 참 잘하시더라고요. 토탈미술관에서 이 작업을 보고 좋아서 전시도 해보라고 제안해주셨고, 안양 APAP에도 추천해주셔서 프로젝트를 했죠.     2002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에서 작가로 참여하셨습니다. 당시 주제와 제안했던 작업은 어떤 것인가요. 2002년 건축비엔날레의 주제는 ‘NEXT’였어요. 수디치 총감독의 방향은 진행 중인 또는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건축 작업의 전시로 현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건축적 활동과 디자인 방향이 어떠한 형태로 구체화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어요. 한국관의 총감독이셨던 김종성 교수님은 7팀의 작업을 선정하셔서 전시를 기획하셨고요. 저는 헤이리 한스갤러리 프로젝트를 전시했어요. 건축 모형을 반투명한 아크릴 재질로 만들고, 열 수 있게 제작하여서, 가운데 계단으로 분리되고 연결되는 건물 개념을 설명했어요. 폴리카보네이트로 제작한 사이트 모형을 세워서 전시함으로써 사이트의 이야기도 하지만, 모델을 통해서 보이는 재질의 특성 — 관람객의 눈 위치에서만 투과되는 관점 — 으로 건물이 보이고 건물을 통하여 보이는 관계를 설명하려고 했어요. 건물 모델과 사이트 모델에 각각 소형카메라와 작은 화면을 설치해서, 화면에 화면을 보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위의 관찰되는 것과 관찰자(observed & observer)의 관계를 다시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대표작으로 마임 빌리지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선생님에게 마임 빌리지가 갖는 의미가 클 것 같아요. 파빌리온뿐만 아니라 프로젝트도 여러 개 진행하셨는데, 처음엔 파빌리온으로 시작하셨나요. 그렇죠. 알로에마임 프로젝트는 정영선 선생님이 먼저 관여하고 계셨어요. 이곳에 주택을 하나 짓는 제안이 있을 때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부지에 갔는데, 제 생각에는 대지 위치가 주택으로 적당하지 않아서 다른 곳에 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그런 와중에 기숙사도 짓자고 해서 위치를 잡고, 그리팅가든이 필요하다고 해서 대지 위치를 잡아드렸죠. 그렇게 프로젝트가 늘어가니 정영선 선생님이 기술 좋다고 웃으셨어요. (웃음) 프로젝트의 위치가 적당할 것 같아서 아이디어를 던진 건데 하나씩 실현된 거예요. 어떤 곳은 빈 공간을 놔두고 싶고, 또 다른 곳에는 랜드아키텍처처럼 앞은 정원이고 뒤에 집이 숨어있는 안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그 안은 받아들여 지지 않아서 우선 그 위치에 야외스테이지처럼 파빌리온을 만들기로 했어요. 건물 설계, 시공이 진전되는 와중에 이벤트를 할 공간이 필요해서 작은 프로젝트가 먼저 진행되었죠. 정 선생님이 야외 원형극장을 디자인하시면 제가 다과를 할 수 있는 냉장고가 들어간 바를 디자인해서 짓고, 한쪽에서는 건축 시공이 진행됐어요.     마임 빌리지 일대는 말 그대로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곳입니다. 콘텍스트 없이 자연 속에 놓이면 오히려 난감할 수도 있을 텐데, 선생님 입장에서는 좀 더 친숙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곳은 원래 연수원 부지였어요. 클라이언트가 조경에 관심이 깊으시고 부지를 하나의 정원같이 가꾸셔서, 건축물의 자리를 잡는데 더욱 신중했어요. 기존의 스웨덴식 목조 건물과 비슷한 건물들을 원하셨는데, 그리팅가든은 현대적인 건물로 제가 좀 고집을 부렸죠. 다행히 그리팅가든 아이디어는 좋아하셨어요. 조금 더 땅과 과감하게 어우러진 랜드아키텍쳐로 다른 건물들을 설계하고 싶었는데, 잘 받아들여 지지 않아 아쉬웠죠. 그래도 그리팅가든은 건물의 특성상 잘 풀렸어요.     그리팅가든은 배치나 주변 자연과의 관계, 글래스하우스에 대한 해석까지 다양한 면에서 주목할 만한 프로젝트인데요. 설계에서 중점을 두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팅가든은 연수원에 당도한 손님들이 처음 도착하는 공간이에요. 숙소 열쇠를 나눠주기도 하고 화장실, 휴식 공간 등의 프로그램이 있어요. 제가 ‘Greeting Garden’으로 이름을 지은 이유는, 손님을 반기는 ‘정원‘으로 설계하고 싶어서였어요. 위치도 단지 초입보다는 버스나 차량으로 정문을 지나 아름다운 단지를 어느 정도 가로질러 중심에 있는 위치를 선정했어요.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면, 넓은 마당에 놓인 하나의 플랫폼(platform)에 올라서고, 사방의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경험을 원했어요. 유리 상자로 바람과 온도를 조절하지만 사방이 트여있고, 한 판의 지붕으로 비를 막으며, 그 지붕도 위에는 식재를 한 녹색 지붕(green roof)이죠. 화장실과 에어컨 등은 플랫폼 위에 놓인 돌상자, 나무상자, 거울 상자 형태로 표현하고 한 지붕 아래에 놓아서 사방이 틀어진 느낌을 해치지 않으려 했어요. 비를 피하고 온도가 조절되는 공간이지만 정원 일부로 설계하고 싶었어요. 연못의 경계로 놓인 돌, 플랫폼에 놓인 상자들이에요.   조경 작업은 어떤 게 있으신가요? CJ 필동 연수원은 박진(Jean Park) 소장님이 설계한 건물이에요. 조경을 맡아달라고 해서 제가 조경가 김용택 씨와 함께 뒤늦게 참여했어요. 엔트리 가든, CJ 마크 식재, 물 정원(water garden), 아트리움, 루프탑과 소나무 공간 등을 디자인했어요. 알로에마임이 땅이 넓은 연수원이라면 이건 도시 한가운데(urban) 있는 연수원이라서 나무와 야생화, 코르텐 스틸로 간결하게 디자인한 거예요. 각각의 공간들을 분리해서, 코너를 돌 때마다 소나무, 자작나무를 두어 다른 공간에 와있는 변화를 주고 싶었죠. 지붕에서는 남산이 보이는 전망이 좋아서 식재는 야생화로 낮게 하고 남산 자체를 바라보게 했어요.   마임 빌리지는 조경과 협업하는 건축으로, CJ 연수원에서는 건축과 협업하는 조경으로 작업하셨는데, 태도나 접근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나요? CJ연수원의 경우, 건축적으로 손댈 여지가 없었어요. 말 그대로 빈 공간 채우기(fill in the blank)였어요. 수종과 코르텐 스틸 디자인을 제안하면서 연못 가장자리라든지 그 공간 안에서 건물 재료와 맞춰가는 식으로 풀어드리는 것이었지, 과격하게 할 수 없었죠. 하지만 데크를 더 납작(flat)하게 한다든지 건축가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른 제안을 해서 그게 받아들여 진 건 좋았어요. 조경하시는 분들이 다 그렇겠지만 단순히 빈 공간 채우기보다는 나름대로 더하고 싶은 게 있죠.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조경이 들어갔는데, 지붕에 사이프러스를 흐드러지게 심었어요. 잘 받아들여 주시더라고요. 여지가 없을 것같아도 재미있는 공간이 생겨요. 시대에도 맞고요. 사람들이 그것을 즐길 줄 아는 것 같아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종이와 콘크리트’ 전시가 1987-97년 사이의 한국 건축운동을 주목했는데,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의 움직임도 다루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작업과 분위기는 당시 신선한 충격을 주었어요. 해외에서 건축을 공부했던 분들이 대거 한국에 들어오면서 스튜디오를 통해서 그 에너지와 정보를 학생들과 공유하고 이끌면서 바람이 불었던 기억이 납니다. 초기 체계를 잘 잡았던 것 같아요. 전적인 자유(total freedom)! 학생과 공간이 있고, 큰 설계프로그램은 김준성 교수님이, 정진원 교수님은 행정을 맡으셨고 각 선생님에게 전적인 자유를 주셨어요. 선생님들은 자유자재로 가르칠 수 있고, 스튜디오 학생들도 열심히 하고 굉장히 좋았어요. 부담 없이 건축 실무를 하면서 스튜디오를 할 수 있도록 겸임 체계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저로서는 그곳에서 선배들을 만나는 것뿐 아니라 국내에서 활동하시는 다양한 분들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어요. 제가 가르치고 싶은 대로 가르쳐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그 열정이 다 모여서 스튜디오 크리틱을 하고 전시를 했죠.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한 스튜디오 시스템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방식이 처음이라, 모두 그것을 정착시켜 보자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선생님들끼리도, 학생과도 재미있었고 여러 가지 조건이 참 좋았어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스튜디오 공간이 열악했어요.   함께 강의했던 분들과 공유하는 생각과 정보도 많았을 것 같아요. 굉장히 다양했어요. 백문기 선생님, 김헌 선생님, 김헌태 선생님, 토마스 한 등 국내파, 국외파 다 섞여 있었어요. 그리고 큰 크리틱 마다 외부 건축가분들을 초빙해서 늦는 줄 모르며 리뷰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여러 선생님이 있다 보니 좋았죠.   여름 워크숍 형식으로 열렸던 서울건축학교에도 튜터로 참여를 하셨나요. 네. 서울보다는 여름에 열렸던 무주 워크숍에 합류했었고, 강의처럼 단편적으로 참여했었죠.   당시 여러 활동을 하면서 한국 건축의 담론이라고 할 만한 이슈가 있으셨나요? 그런 논의는 스튜디오 크리틱에서 많이 나온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서울건축학교가 공간 건물에서 수업했을 때인데, 그때는 제가 크리틱에 많이 참여하지 않았어요. 무주 워크숍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고, 한예종 민현식 교수님 스튜디오 크리틱에서 고 이종호 선생님과 의견이 달라서 많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보는 각도가 다른 게 흥미로워요. ‘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부분이 좋았어요. 어떤 담론이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기보다는 분위기가 굉장히 달랐어요. OH
Interview 영역을 뛰어넘는 시각과 건축의 확장, 건축가 박 헬렌 주현 ① 2006년 이후 꼭 12년 만의 인터뷰다. 봄비치고는 제법 빗줄기가 거셌던 3월, 이태원 아파트 자택에서 박헬렌주현을 만났다. 하버드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생은 우연히 들은 건축 역사 수업에서 18세기 블레, 르듀의 거대한 상상의 공간에 열광하며 건축을 찾아 나선다. 조경을 탐닉하고 다시 건축 분야까지 전공하면서 얻은 것은 전문 영역에 대한 이해, 시각의 확장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어떻게 협업해야 하는가에 대한 유연한 태도이다. 초현실주의와 해체주의건축에 대한 관심, 땅과 건축이 갖는 관계 구성과 구축, 경계를 넘나드는 협업 작업과 전시 참여 등 2000년대 중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박헬렌주현은 경기대 건축대학원의 실험을 이끌었던 일원이자, 자신의 스튜디오를 통해 건축을 만들어가던 젊은 건축가였다. 2006년 이후 건강 문제로 잠시 휴식을 취한 이후에도 건축가 박헬렌주현의 대표 프로젝트인 ‘그리팅가든’은 드라마 <시크릿 가든>부터 최근 <김비서가 왜그럴까>까지, 꾸준히 드라마와 광고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간혹 영상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볼 때마다 “천정을 지붕 색으로 칠했어야 했는데” 한다는 건축가의 말은 작업에 대한 남은 갈증을 전해준다. 자신이 직접 리노베이션한 자택에서 여전히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로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물리학, 조경, 건축   이 집의 인테리어도 초기 작업(1999년) 중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접이식 문이 인상적이에요.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절할 공간이 부족해서 만든 거예요. 다행히 이 아파트는 벽 구조가 아니라서 거실과 서재를 구분하는 벽을 튼 거예요. 서재의 책상 앞에 병풍을 치고 상을 놓으면 딱 접이식 문 위치까지 상이 놓여요. 그 앞 거실 공간에 돗자리를 놓고 교회 다니시는 분은 뒤에 서 계시고, 절하시는 분만 앞으로 오면 대충 수용돼요. 평소에는 접이문을 닫고, 현관 쪽 중간 유리문을 닫으면 저 서재는 반-공적인(semipublic) 공간이 되어서 독립적으로 외부손님을 만날 수 있어요.   실용적인 공간 활용이네요. 사무실은 2006년에 정리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10여 년 만의 인터뷰네요. 그렇죠? 2006년에 미국에 가고, 남은 일 정리는 2007~2008년까지 한 것 같아요.   1964년에 서울에서 나셨습니다. 아버님이 교육자시라고 알고 있어요. 아버지께서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오래는 아니지만 영어 선생님이셨어요.   교육하는 집안의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학교라는 분위기, 선생님이 되어 가르치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작은어머니도 스웨덴 분이셨지만, 유치원 원장으로 몬테소리를 처음 도입하셨죠. 우리 집은 할머니가 더 활동적이셨어요. 교육 열정이 많으시고 여자가 집에 있는 것보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저에겐 할머니가 큰 롤모델이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도 어렸을 때 혼자 일본으로 유학을 하러 가셨어요. 신여성이었죠. 자전거 타고 스타킹에 하얀 드레스 입고, 그런 사진들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접하셨겠네요. 제 기억엔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보다 더 바쁘셨던 것 같아요. 증조할머니도 아들보다 계속 할머니하고 지내시길 원했고. 가부장적인 집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집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관훈동 종로경찰서 옆집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사셨고, 엄마와 아버지가 결혼해 그곳에서 시집살이하셨어요. 아빠가 둘째 아들이셨는데, 셋째 아들 내외분도 거기 계셨고, 사촌들도 있었어요. 대가족이죠. 집은 큰 기와집이었어요. 종로경찰서 대로변 쪽으로 기와지붕을 한 2층 벽돌 건물이 더해졌는데, 1층은 상가였고 2층은 안쪽 한옥에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던 걸로 기억해요. 한옥은 문간방 있는 옛날집이니라 옛날식으로 대문, 중문, 사랑채, 안채로 되어 있고요. 원하시는 대로 개조하셔서 앞은 한옥인데 뒷면은 복도로 다 연결해서 화장실도 붙이시고 부엌도 붙이시고, 희한하게 개조가 된 한옥에 벽돌 상가 건물이 연결되어 있었어요.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내신 건가요? 관훈동 일대에 대한 기억이나 경험이 많이 남아 계실 것 같아요. 초등학교 2~3학년까지 살았죠. 그러고 나서는 진짜 계단이 있는 혜화동 양옥집으로 이사를 하였어요. 인사동 생각이 많이 나요. 그때는 인사동에 차가 못 들어가서 똥지게로 정화조 청소를 해야 하는 좁은 골목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었는데, 아직도 그 골목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수도약국. 아프면 늘 수도약국에 가서 약을 지었는데, 아직도 남아 있어요. 인사동이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그 뒷길의 도시 구조(Urban fabric)는 아직 있어요. 옛날 같지는 않지만요.   당시 인사동은 고미술품 거래가 활발하고 예술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는데, 그 동네의 인상도 남아있나요? 대학 방학 때, 한국에 나오면 관훈동 집에 있었어요. 그제서 고미술 가게가 눈에 들어와서 많이 들어갔죠. 그때는 오래된 표구사들이 참 많았어요. 어머니께서 표구할 게 있으시면 같이 따라가서 비단 구경도 하고 그랬는데 다 없어졌어요. 요즘 가면 인사동에 무슨 가게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을 떠나 하와이에 가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하와이에는 1978년에 갔어요. 그때가 중2 때였어요. 처음에는 식구들이 다 같이 하와이로 갔다가, 아버지가 다시 한국으로 나오시게 되었어요. 저희는 한국에서 다 자퇴하고 하와이에서 학교를 시작한 상태라 애매하잖아요. 본의 아니게 기러기 아빠로 바뀐 거죠. 하와이에 살 때는 지루했죠. 사실 휴양지가 은퇴한 분들에게는 좋은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하루면 섬 한 바퀴를 돌고 오는 곳이니까요. ‘나는 눈 내리는 곳으로 다시 갈 거야, 대학은 서부도 안 본다, 동부만 본다.’(웃음) 그렇게 되었죠.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없으셨나요? 있었죠. 다행인 것은 하와이에는 동양인이 많아요. 영어를 하지만 동양인이었고 하와이 사람들은 굉장히 따뜻했어요. 하와이에서는 가족과 같이 있었고, 모든 게 느리고 다 웃어주고, 고등학교도 작은 학교로 가서 좀 수월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대학교에 갔을 때 서양인이 더 많은 환경에서 보내게 되면서 미국, 서양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것 같아요.   흥미롭게도 전공이 물리학입니다. 건축, 설계라는 분야와 물리학은 상당히 거리가 느껴지는데, 하버드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건축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사실 고등학교 때는 건축을 몰랐어요. 수학, 과학을 잘했고요. 물리가 진짜 재미있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기 전에 물리 선생님이 캘리포니아의 천문학 캠프에 가보라고 팸플릿을 주시는 거예요. 본토에 가보자 했죠. 비교하자면 거제도 섬에서 서울도 아닌 부산에 가는 거잖아요. (웃음) 그곳에서 경험한 모든 게 좋았어요. 그래서 더 물리학에 빠졌고, 고등학교 4학년 때는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다 마쳤기 때문에 하와이주립대(UH)에 가서 수학과 물리과목을 더 들었어요. 재미있더라고요. 하버드대학교에 갔을 때는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물리 공부만 생각했어요. 다 이과 코스에 교양과목만 넣고 시작을 했죠. 그런데 하버드대학에서는 다양하게 해보라는 분위기가 있어요. 너무 한쪽만 파지 말고 ‘뷔페에서 다 먹어보고 나서 싫은 거 좋은 거 가려보라’는 조언이 좋았죠. 그래서 건축 역사 수업(History of Architecture)을 들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에드워드 세클러 교수라고, 빈(Vienna)에서 오신 역사학자였어요. 아인슈타인처럼 중력을 따르지 않는 머리와 커다란 안경을 쓰신 분이었는데, 옛날 유리로 만든 슬라이드를 보여줬어요. 유리 슬라이드는 해상도가 참 좋아요. 특히 크게 확대했을 때, 엄청났죠. 그 슬라이드들을 프로젝터 두 대로 계속 보여주면서 강의하시는데, 제가 완전히 넘어갔어요. 그때 블레(Etienne Louis Boullee, 1728~99년), 르듀(Claude Nicholas Ledoux, 1736~1806년) 등 18세기 계몽주의(enlightenment) 시대의 작업과 앙리 라브르스트(Henri Labrouste)의 생트 쥬느비에브 도서관 같은 건물이 등장하는데, 그때까지 그런 건물을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서울에서 하와이에 가서 살다가 케임브리지에 있는 학교 건물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앞에서 펼쳐지는 건물과 상상의 공간들이 너무 좋아서 이 코스를 들어야겠다 결심했죠. 신청해서 가보니 GSD 대학원생과 같이 듣는 코스였어요.   대학생도 같이 들을 수 있었나요? 과목은 대학원 코스였는데 학부 학생들이 같이 들을 수 있었어요. 뭣도 모르고 좋으니까 들어간 거죠. 그곳에 박승홍 씨, 고 장림종 씨 다 앉아 계시더라고요. 한국분들 같아서 인사하고 제가 건축이 재미있다고 하니까 놀러 오라고 하시고, 놀러 가니까 당시 GSD에서 학생으로 계셨던 서혜림 씨에게 저를 소개해주고. (웃음) 서혜림 씨는 졸지에 저를 데리고 구경시켜주게 되면서 만나게 되었어요. 문제는 그 코스의 중간고사 성적이 너무 안 좋았어요. 선생님께 중간고사를 못 본 것 같다고 아무래도 패스 패일(pass-fail)로 해야겠다고 이야길 했죠. 왜냐하면 그런 시험을 처음 쳐봤거든요. 성적을 보시더니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사인을 해주시는 거예요. (웃음) 그 때부터 아주 마음 편하게, ‘패스 패일이니까 패일은 안 하겠지’ 하면서 즐겁게 수업을 들었어요. 그다음부터 전공을 바꾸려고 했는데, 당시 하버드 학부에는 건축전공이 없었어요. 물리학 전공으로 졸업을 하지만 건축 쪽으로 대학원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대학원에서 같이 듣는 건축 역사 코스를 많이 듣기 시작했어요. 그나마 학부에 시각 환경 스터디(Visual Environment Study)가 있어서 비쥬얼 아트 분야 과목을 들으면서 신이 났었죠.   물리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게 된 것도 흥미롭지만, 건축뿐만 아니라 조경학 석사도 받으셨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같은 시점에 제가 물성물리학 연구실(Material Science Lab)에 가서 지도교수님 밑에서 물리학 개별 연구(independence study research)를 했어요. 그 교수님은 정말 휴일도 없고, 주말도 없고, 연구실에서 사시는 거예요. 물론 물리가 좋았지만, 교수님처럼 사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게 되니까, 제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걸 알았죠. 거기서 결단을 내렸어요. 대학교 3~4학년 사이 여름에 하버드 디자인대학원(GSD)에서 건축, 조경 분야가 적성에 맞는지 시도해볼 수 있는 ‘커리어 디스커버리’ 여름학교에 응모했어요. 그때 제가 건축이 좋다고 난리니까 기숙사를 책임지시는 교수님이 자신이 아는 여자 건축가를 한번 만나보라고 하셨어요. 당시 기숙사에서는 학생이 쿠폰을 내면 선생님을 기숙사 다이닝룸으로 초대할 수 있었어요. 비싼 식사는 못 하니까, 만날 방법을 가르쳐주신 거죠. 그런데 소개해주신 분이 조경 교수님이셨어요. 제 마스터가 잘못 아셨던거예요. (웃음) 그때 그분이 조경에 대해서 완전히 전도를 하셔서, 커리어 디스커버리는 조경 분야로 갔어요. 거기서 교수님들이 제 작업을 좋아해 주시고, 원서 내라고 해주시니 즐겁게 조경 프로그램으로 GSD를 간 거죠. 가서 보니 건축이 또 있는 거예요. 하면 할수록 역사나 여러 체계를 보았을 때 건축을 같이 공부하고 싶었어요. 다시 지원했죠. 건축을 2학년(second year)부터 했는데 당시에는 두 가지 학위를 같이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제가 제안을 해야 했어요. 필수과목(required subject)은 다 하되, 선택과목(elective)의 경우 겹치는 것을 같이 인정해주면, 조금만 더 하면 되었죠. 그런 식으로 제안하고 허락을 받아서 공동 학위(joint degree)를 할 수 있었어요.   묘한 인연이 이어졌네요. 그렇죠. 대학교 3학년 때는 건축 코스를 패스 패일했는데, GSD에서는 성적이 좋아서 상을 받고 졸업을 했어요. (웃음) 처음엔 선생님이 아무 말 안 하고 사인을 해줄 정도였는데, 배우고 터득을 하다 보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거든요. 처음부터 낙심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물리를 좋아해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건축, 조경에 관심을 두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흥미로워요. 전혀 다른 전공을 공부하면서 물리에 접근할 때의 사고방식과 창작 과정의 사고방식에 차이를 느끼셨나요? 테크닉컬하게 배운 면이 직접 응용되는 건 구조 계산을 빨리하고 숫자에 익숙하다는 것과 공간 개념이지만, 큰 부분이 아닌 것 같고요. 중요한 건 한 분야(field)를 깊게 공부하고 나면, 문제 해결 방식으로써 한 방법은 터득했다는 거예요. 한 가지 규율(discipline)을 어느 정도 깊이 있게 하면, 거기에서 배운 디스플린이 다른 분야에서도 문제 해결 능력으로 적용되어서 훨씬 빨리 풀어내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비전공이라고 해도 점프가 가능하다고 봐요. 문제 해결방식을 알고 다른 접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GSD 같은 곳에서는 더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싶어 하죠. 그래야 같은 스튜디오 프로젝트에서 같은 선생님이 가르치더라도 전혀 다른 접근이 나오니까요. 물론 기본적으로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그래도 생각하는 각도가 더 달라지니까요.   건축의 경우 도면을 그리거나 읽어내는 등 스킬이 필요한 분야라서 만만치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너무 모르고 가서 디테일 같은 것은 따라잡아야 할 것들이 많았죠. 정말 잘 그리는 선배를 보면 입이 벌어지는데, 그런 건 열심히 물어보고 어깨너머로 연습하면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미술을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고, 미적인 관심은 옛날부터 있었어요. 비례와 시각적인 감각은 있어야 해요. 전공을 시작하면서 미친 듯이 그동안 못 봤던 건물 보러 다녔죠. 더 잘 그리면 더 좋았겠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할 것을 못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던 때는 포스트모던이 한창이었던 시기였잖아요. 당시에 영향을 받으셨나요? 제게 큰 영향을 준 건 라파엘 모네오 교수님이에요. 그때 GSD 건축과 학장이셨어요. 그분이 하신 건, 정말 다양한 건축가를 학교에 불러 모은 거예요. 스페인 사람만 부른 것이 아니라 당시 논의가 되고 있던 사람, 대립점에 있는 여러 사람까지요. 포스트모던과 같은 담론에 맞는 환경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로버트 벤투리도 있었고, 헤르초크 드 뫼롱이 초기 작품을 소개하는 렉쳐도 들었고, 그러면서도 피터 아이젠만의 웩스너 센터(Waxner Center) 같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 작업도 많이 나올 때였고 자하 하디드의 홍콩 프로젝트도 ‘와 이럴 수가!’하며 보았죠. 로비 전시장에는 안도 다다오의 초기 주택 청사진 도면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모네오가 준 첫 번째 과제는 학교에 있는 옛날 벽돌 건물을 실측한 후 도면 작업을 하는 것이었어요. 19세기의 미학(aesthetic)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모네오는 그 시대에 건축가는 어떤 그림이 필요했고, 그 그림을 통해 그때의 건축물 개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기회를 준 거였어요. 굉장히 전통적이고 촉각적인(tactile) 벽돌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어떻게 조합했는지, 벽 뒤에 있는 디테일을 상상해서 그려보라고 했죠. 그래서 세 사람이 한 팀이 돼서 큰 테이프자로 건물을 직접 재면서 입면을 그려야 했어요. 그리고는 데리다, 푸코의 철학을 말하는 헤이즈 교수의 강의실로 뛰어가고요. 매우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이론도 이론이지만 건축은 지어야 하는 공간임을 체득한 게 참 좋았어요. 매우 개념적이지만 나름대로 공간을 힘들게 만들어내는 조형 작업인 스튜디오, 또 현실적인 건축물을 도시와 사회개념을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건축가들의 스튜디오 등 스튜디오도 다양해서 여러 접근(approach)을 체험했어요.   당시 함께 공부하셨던 한국 건축가분들도 많으셨죠. 조병수 선생님은 도시 계획(urban planning)에 계셨어요. 제가 초년병으로 논문 도면을 보조했던 분이 민선주 선생님, 박승홍 씨는 제가 너무 초보라서 그림에 손을 못 대게 하셨어요. (웃음) 서혜림 씨, LA에서 활동하시는 앨리스 김, 조경 쪽으로는 박도경 씨가 계셨고. 현재 조경가로 활약하는 김미경은 제 룸메이트였어요.   그 시기에 같이 작업하셨던 분들은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면을 보입니다. 유학을 본격적으로 가게 된 세대라서 동시대의 건축 흐름을 책이나 다른 경로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얻고 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요. 네, 굉장히 운이 좋았죠. 한 학파가 아닌 다양한 생각과 접근법을 가진 건축가들과 공부할 기회였기 때문에 굉장히 감사하죠. 물론 발품을 팔아서 열심히 보러 다니기는 해야 했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정보를 빨리 흡수할 수 있던 게 좋았어요.   반면에 그 세대는 동시대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한국성이라는 화두가 나오기도 하고, ‘나는 한국 사람인데 한국 건축은 뭐가 특징이지?’라는 고민을 결국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혹시 선생님은 그런 계기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개별적인 관심사를 끌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 부분에서 한쪽이 약할 수밖에 없어요. 한국 건축에 대한 저의 경험은 한옥에서 산 경험 그리고 한국에서 방문한 사찰이나 고택 정도이지만 깊게 연구할 기회가 없었어요. 서울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는 윤장섭 교수님께서 은퇴하셨을 때라서 기회를 놓쳤어요. 그래서 잘 모르지만 나름대로 공부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저는 미국 사람, 한국 사람을 다 떠나서 그냥 짬뽕 된 사람으로 저 자신을 편하게 받아들였어요. 요즘은 그런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태어나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컴퓨터와 매체를 통해서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세계인이라는 공감대가 생길 수 있죠. 한국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서양 공간이든 한국 공간이든 내가 좋아하는 공간, 만들고 싶은 공간이 있었을 때 그걸 바라보고 배워서 응용하고 싶다고 생각했지, 분류하지(categorize)는 않았던 것 같아요.   이른 나이에 외국에서 생활하고, 교육 과정도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지금은 그 경계가 많이 없어졌습니다만 당시 조경과 건축이라는 분야는 경계가 명확했을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를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둘 다 공부하고 싶어서 갔는데 한 지붕 세 가족이었어요. (웃음) 도시 계획, 조경, 건축 다 달라요. 다 그 분야가 먼저라고 이야기하고, 다 같이 시작해야 한다고 하죠. (웃음) 건물을 지어놓고 조경을 채우라고 해서는 안 된다, 건물 다 짓고 나서 어반 플래너에게 작업하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런 것 같아요. 물론 많이 좋아졌어요. 제가 건축과 조경을 동시에 했던 두 번째 학생이었고 그다음부터는 복수전공이 많아져서 나아졌대요. 아직 과목이 나누어져 있지만, 결국은 다 공간을 다루기 때문에 양쪽에 다 관심을 가지고 보니까요. 팀워크로 디자인한다는 게 원래 힘들어요. 다만 같이 공부를 하더라도 둘 중 하나의 전공(specialty)은 있어야 해요. 제 경우, 건축 쪽으로 더 했고요. 알로에마임 프로젝트를 할 때도 저는 건축, 조경 다 전공이었지만 건축 쪽으로 더 작업했고요. 예를 들어 그리팅가든 뒤 연못을 디자인할 때 과감하게 연못을 넓혀서 다리를 제안하신 분은 정영선 선생님이셨어요.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결과물이 훨씬 더 잘 나오는 거예요. 건물 옆에 있는 수목도 선생님 생각이 너무 잘 맞았고, 연못 물도 다리 쪽은 탁한 물이고 반대편은 맑은 물인데, 그런 디테일은 전문가에게서 나오는 것이죠. 그렇게 협업해야 해요. 학교에서 기초를 습득하고 실무에서 같이 협업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 되기까지 노력을 해야 하죠. 하지만, 한 사람이 두 개 다 잘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너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하나의 전공을 가지되 더 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협업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사실 구조도 건축을 알아야 아름다운 구조가 나오고요.   대학원 작업 중 기억에 남는 건 어떤 게 있나요? 사무엘 베켓의 연극 ‘Text for Nothing’의 무대장치(stage set)를 디자인하는 프로젝트가 많이 기억나요. 그 연극에는 무대 장치가 명시되어있지 않아요. 그래서 글을 읽고 무대 장치를 제안하는 과제였어요. 모래 위에서 배우 한 명이 나와서 모놀로그를 하는데, 저는 ‘무대‘의 영역을 1막, 2막, 3막,…, 막마다 배우가 모래에 발자국으로 그리면서 걷는 길(path)이 무대가 되도록 했어요. 선에서 타원형, 다시 원으로 가는 개념이죠. 베켓의 이 연극은 초현실적(surrealism)이잖아요. 자신이 여기 있으면 저쪽에서 자신의 손이 막 가는 게 보이는, 자신이 하나의 존재인데 분리되어 보이는 내용처럼, 타원의 초점(foci)이 가장 멀었을 때는 선이고, 같았을 때는 원이지만 그 사이에는 여러 모양의 타원이 나오는 특성이 이 연극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타원의 점과 두 초점(foci)과의 거리의 합은 항상 같기 때문이죠. 무대 초점(foci)에 위치한 두 조형물은 막이 바뀌며 무대가 다시 그려질때마다 움직이고, 관중이 동그랗게 앉아있으니까 관객의 관점에서 연극 도중 한번은 겹쳐 보이게 돼요. 그 보이는 순간들이 원과 타원이 되는 임계점(critical point)과 맞으면서 어느 순간에는 떨어져 보이고, 어느 순간은 같이 보일 수 있는 것을 해보려고 시도했죠. 평이 좋았어요, 저도 그 작업이 재밌었고요. 한국의 것을 해보겠다고 시도한 졸업논문 작업도 있었어요. 오행을 공부해서 나름대로 펜슬 드로잉으로 그려보고, 개념 모델을 만들어, 졸업 작품의 시작으로 삼았어요. 이 초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서도 스튜디오를 했어요. 학생들이 어떻게 접근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토탈미술관에서 제가 건축 전시를 큐레이팅한 적이 있는데, 그때 토마스 한이 이 아이디어를 빌려서 작품을 내기도 했죠.   대학원 작업 초기 작업이 완공된 작업보다 표현이 더 강렬한 것 같아요.  대학원 가서 그렇게 밤을 많이 샌 적이 없어요. (웃음) 샌드위치 하나 사면 그게 점심이 되고 저녁이 되었죠. 당시에 3D 프린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손으로 잘라서 풀칠하고. 서혜림 선생님이 모델용 종이 껍질 벗겨서 페인트칠하는 걸 가르쳐줘서 칠하던 기억도 나고, 재밌었어요. 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