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Tour 서울시립대학교_근현대 100년을 걷다, 박철수 2019년 10월 19일 2:00PM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이집트대사관, 장윤규 + 희림건축 2019년 9월 28일 10:00AM
OPENSTUDIO 에이오에이아키텍츠, 서재원 + 이의행 2019년 10월 15일 4:00PM
OPENHOUSE VT cosmetic 사옥, 이주한 + 김대일 + 김한중, 최한메 2019년 10월 13일 4:00PM
OPENHOUSE 구기동 주택, 조병수 + 이지현 + 윤자윤 2019년 10월 12일 10:00AM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외교의 최전선이자 ‘도시 안의 또 다른 영토’인 대사관은 현대의 대표적인 국제 교류 공간이다. 대사관의 건축은 그 나라의 문화적 역량을 드러내는 동시에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이를 반영해 문화 교류의 상징을 담기도 한다. 영국 빅토리아 양식에 인도의 건축 스타일이 더해진 129년 된 영국대사관, 1962년 한국의 거장 김중업의 대표작인 프랑스대사관, 1976년 주재국의 건축 양식을 따라 지은 최초의 대사관저인 미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 2001년 한국의 건축가 장윤규와 희림건축이 로제타스톤을 재해석해 설계한 이집트대사관, 그리고 2019년 한옥을 재해석해 현대적인 건축물로 승화한 스위스대사관까지, 역사적 내력과 건축적 탁월함으로 주목받는 대사관과 대사관저 6곳의 문을 연다.   Special OPENHOUSE 프랑스대사관   9월 20일 – 22일 스위스대사관   9월 21일 영국대사관       9월 27일 이집트대사관   9월 28일 캐나다대사관   9월 28일 미국대사관저   9월 29일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영국대사관, F.J. 마셜 2019년 9월 27일 3:30PM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프랑스대사관, 김중업 2019년 9월 22일 10:30AM
SPECIAL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② 대학 시절에 선경스튜디오도 참여하셨는데요. 설계에 대한 또 다른 갈증을 해소해준 곳이 아닐까 싶어요. 선경스튜디오는 설계에 대해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었어요. 1992년 대학교 4학년 때 참여했는데, 당시 구성원들은 다들 개성이 강했어요. 저는 소위 정통 건축 교육이나 선배가 있는 작업실 분위기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너무 신기했어요. 반대로 그들이 보기에 저는 야생에서 온 사람이었고요. 정체성이 강한 친구들이었기에 많은 자극도 되고 부러웠죠.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동시에 고대 다니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 면학 분위기를 부러워했으나, 동시에 그 한계, 패턴도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물론 다들 졸업 후에 개개의 정체성을 발전시켰지만, 학교가 만들어 낸 분위기가 있었어요. 패널 디자인도 책에서 나온 형식이 많았고요. 정보가 곧 스킬로 정착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객관적 정보를 얻는 데에는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는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대한 길찾기를 하게 되었어요. 전환점이 되었죠.   한울건축에서 2년의 실무 후에 유학을 하러 가셨어요. 한울건축의 스타일도 체계적이고 사무적인 틀을 가진 곳이 아닌가 싶어요. 집중도에 관해서는 어느 곳보다 세고 밀도가 매우 높았어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성관 소장님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아주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커다란 개념이나 이론보다는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한 디테일, 비례, 전통적인 건축의 판단기준을 지켜나가기 위해 애썼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퀄리티가 매우 높았어요. 오히려 첫 직장으로써 기초를 다지기에 좋은 환경이었죠. 대신 새벽 3~4시 퇴근은 기본이었어요. 사람들이 못 견디고 나가기도 하는데, 진정성 하나는 인정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어요.   하버드(GSD)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색이 없다는 점이 컸어요. 5곳에 지원해서 4개 대학에 붙었는데, 색이 너무 강한 학교는 고민이 됐어요. 예를 들면 콜롬비아 대학에서는 당시 그레그 린을 필두로 프리 폼(free form)이 유행하고 있었고, 엔지니어링 기반을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MIT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일은 실용주의 노선에 관심이 많은 학교였어요. 그런데 GSD는 강사(instructor)도 다양했고 이렇다 할만한 색깔이 보이지 않았어요. 어느 ‘학파’에 편입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막상 가보니 색은 있더라고요. GSD는 리더 양성소예요. 리더십 양성 교육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어서 경쟁이 매우 심했어요. 정치나 헤게모니같은 것도 있고요. 단순히 디자인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실무에서 겪게 될 싸움의 마이크로 버전이라 보고 긍정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죠.   유학 시절, 언어의 한계 때문에 디스 맨(‘this’ man)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어요. 말로 설명하는 대신 세세하게 만든 모형과 도면으로 보여주었다고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건축을 실체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정 지점보다 훨씬 더 많은 결과물이 필요했어요. 말로 하는 설명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제 결과물을 실체 과다로 받아들였어요. 일단 물량에 놀라워했죠. 개별적인 컴포넌트들을 만들어서 프로세스대로 하나씩 끼워가며 설명하곤 했죠. 보통 핀업이라 하면, 학생당 한 개 정도인데 저는 핀업룸을 도배하고도 남을 양을 만들어 갔어요. 양도 그렇지만 제 모델은 훨씬 더 많은 전달력이 있었어요. 아주 구체적으로, 추측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었거든요. 지금도 사무실에서 3D작업을 많이 해요. 보여줄 장면(scene)도 많이 잡고요. 의뢰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확신을 하기 위한 과정이에요. 우리는 조감도를 믿지 않아요. 우리가 보거나 경험하는 시점이 아니니까. 그래서 눈높이에서 투시도를 많이 만들어서 설계와 경험을 체크하고 건물을 미리 다 지어본다는 생각을 해요. 실체를 구체적으로 만드는 태도는 마이크로센터, 홈디포, 제 언어적 한계, 이 3가지의 융복합적인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컴포넌트가 명확해야 했고, 컴포넌트들로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체계까지 모두 이 세 가지의 영향을 받은 거죠.   마이크로센터와 홈디포라는 일반 상점에서 건축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도 흥미로워요. 유학생 시절, 너무 외로웠어요. 홈디포를 구경하거나 마이크로센터에 가서 부품을 사고 컴퓨터를 분해하고 새로 조립하기를 반복하는 게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컴퓨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나에겐 컴포넌트였고, 계속 그것으로 놀다 보니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작업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죠.   ‘홈디포(The Home Depot)’는 건축, 조경에 관련된 하드웨어를 파는 창고형 마트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종류의 건물도 홈디포에 있는 상품으로 다 지을 수 있다”라는 게 이 마트가 표방하는 바죠. 홈디포에서 모든 것들이 부품화되어 유통되는 것을 보며, 결국 건물도 하나의 거대한 조립 체계라는 것을 느꼈어요. 요소들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과 그에 대한 분명한 이유 – 이건 피터 아이젠만의 영향이지만 -가 저로 하여금 설계와 프로세스의 단계적 과정을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사무실에서도 너무 멋진 것을 만들어보라고 하지 않아요. 최단 시간에 이 지점에 다다를 수 있는 동선을 잡으라는 식의 요청을 할 때는 있어요. 발주처에 설명할 때도 명확하게 의사 전달을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막연히 말하지 않게 되고, 어떤 부분이 개선되는지 객관적이고 합리적 타당성을 갖고 말하게 돼요. 이런 관점들이 그때 만들어졌죠.   마이크로센터와 홈디포를 통해 건축이 하나의 ‘산업’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는데, 반대로 실제 건축 산업은 워낙 보수적이죠. 그 때문에 건축에 적용 가능하기 위해 부딪혔던 점이 있을 것 같아요. 건축은 선발 산업이 아니라 후발 산업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종합 산업이죠. 종합 예술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는 예술이 산업이던 때도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엔터테인먼트였기 때문에 예술의 비중이 지금보다 훨씬 컸죠. 물론 지금의 산업은 그때와는 다른 산업이고요. 건축이 후발 산업이라는 의미는 뒤떨어진다는 것이 아니에요. 건축은 여러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부품들이 다른 분야에서 파생된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건축에 통합적으로 적용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의미예요. 예를 들어 건축에서 유리 접합부를 개스킷(gasket)으로 막는데, 이는 자동차 산업에서 소음과 빗물 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해법이 건축에 적용된 거예요. 건축은 시대의 주력산업에서 파생된 것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어요. 건축 안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찾으려고 한다면 많이 힘들 거예요. 오히려 다른 산업에서 벤치마킹할 부분을 생각하고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적용할지를 생각하다 보면, 5~10년 뒤에는 건축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와 있으리라 생각해요. 즉, 다른 산업에서 안정성을 인정받고 검증된 것이 건축에 합쳐지게 되는 거죠. 주력산업의 방향성에 대한 이해는 건축의 다음 단계를 예측하는 데에 필수적이라 생각해요. 건축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앞당길 수는 없지만, 건축은 후발 산업인 대신 종합산업이니까요.   그런 의미로 한국에선 건축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모더니즘 신화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모더니즘은 정치적인 상황과 많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건축 자체로 말하기보다는 사회적 패러다임과 정치적 방향성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전쟁 이후였고. 사회주도세력 중 정치적 신념을 건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그런 부분들이 녹아 들어갔던 거죠. 여전히 지금도 그때의 잔재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집권당이 바뀌면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바뀌거나 사라져버린다거나.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건축물이 의미하는 게 크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권력을 쥐게 되면 바꾸고 싶어 하는데, 눈에 띄게 바꿀 수 있는 부분 중 하나가 토목, 건축, 환경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부분에 건축가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그래도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당시 아방가르드 운동과 함께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사실 건축은 누군가 자본을 대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는 분야잖아요. 자본과 연결되어 있고 가장 많은 영향을 받다 보니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성향에 건축이 편향될 수밖에 없어요. ‘그건 아니다’라고 투쟁하면 더는 일을 주지 않겠죠. 그러면 건축을 실제로 구현하지 못하는 페이퍼 아키텍트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중화시킬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요. 건축주가 신념보다 공적인 가치에 눈을 뜨게끔 해주는 게 건축가의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공공성도 요즘은 너무 편향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공공성은 미학적인 부분일 수도 있고, 기술적인 부분이나 개념일 수도 있어요. 여러 방법을 통해 공공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공공의 사람들이 바로 쓸 수 있느냐 없느냐에만 편협하게 생각해요. 건축은 그 자체로 공공재의 성격을 피할 수 없어서 다양한 사고와 실험의 적용에 높은 가치가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공성의 가치가 사람들에게 ‘좋아요’를 많이 받는 포퓰리즘적 방향으로만 향하는 게 아니라요.   건축계를 지배하는 신화적 시각에서는 컴포넌트와 조립식 시스템을 통해 건축을 산업 시스템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가볍다고 비판했을 수도 있겠어요. 그렇죠. 왜냐하면, 그전의 건축은 철학적 사고와 연동된 체계이거나, 정신적 가치에 대한 표현 같은 게 있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해주냐 아니냐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모더니즘 이후 우리나라는 신비주의로 흐르는 경향인 것 같고요. 건축은 쉽게 이야기되거나 이해되는 것이 아닌, 고뇌하고 어렵고 고차원의 문제라는 식으로 포장되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