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자아로서의 개인, 건축가 최욱 ① 건축가 최욱을 만나다 올해 오픈하우스서울 2017에서는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건축가의 대표작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건축가 특집을 진행한다. 건축가의 연작을 모아 소개하고 이를 직접 방문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자리다. 올해의 특집은 건축가 최욱. 현대카드 HQ3,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디자인 라이브러리, 1964빌딩, 백남준 기념관,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등 총 8개의 대표작 오픈하우스와 함께 건축가 최욱의 프로젝트 오픈하우스 중 4개를 참가한 분들에 한해 신청을 받은 후 초청자를 선정하는 부암동 주택 오픈하우스가 이벤트로 진행된다. 한국 건축의 기본적인 특성으로 기단을 주목하고 이를 통해 건축의 내외부를 구축하며, 1소점 투시도를 벗어나 공간의 편안함, 빛에 대한 컨트롤, 외부와의 소통을 공간에 담아내려는 작업을 펼쳐내고 있는 건축가 최욱의 작업.  본 인터뷰는 최욱이 말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에서 건축가로서 갖는 태도와 작업에 대한 이야기, 일상성에 주목하고 깨어있는 개인이고자 한 건축가의 생각을 나누고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진행되었다. OHS  
근대적 자아로서의 개인, 건축가 최욱 ② 한국적 미감과 정체성 베니스에서 ‘비평으로서의 역사’와 합리적 태도를 경험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맞닥뜨린 상황에 대해 듣고 싶어요. 유학 후 돌아왔을 때 한국 사회는 어땠나요. 돌아오자마자 군대를 갔어요(웃음) 한국 사회를 확실히 알았어요. 얼마나 이게 생생한 사회인지. 굉장히 힘들었죠.   재단당하는 느낌이 크셨을 것 같아요. 나는 대가를 치렀지만 주관대로 살아왔거든. 남의 잔소리를 안 듣기 위해서 나에 대한 책임도 졌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군대 갔더니 내가 쌓아왔던 긴 세월의 의지가 한순간에 꺾여 버리잖아요. 그것에 대해 너무 좌절을 했어요. 어떻게 보면 타협의 지점을 찾는 기회였을 수 있는데, 당시에는 좌절스러웠어요. 그러면서 한국 사회에 발목 잡혀서 적응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1989년도 겨울.   사무실을 처음 시작한 건 언제였나요. 군대 말년 휴가 때에 조그만 스튜디오를 차렸는데, 제대하고 나서 장건축에 들어갔어요. 장건축에 1년 8개월 있다가 1994년에 사무실을 차린 거죠.   이른 시기에 독립하신거죠? 나이는 이른 게 아닌데, 경력에 비하면 그렇죠. 군대도 갔다 오고 여러 상황 때문에 마음이 급했던 것 같아요. 이탈리아에서도 군대를 안 가려고 공부를 굉장히 빨리 끝냈어요. 뉴욕에 가서 활동하고 싶었거든. 그 당시 한국이 그런 사회였으니까 나중에 들어오려고 했는데, 한국 신군부에 체크를 해야했어요. 들어왔을 때 바로 끌려간 거죠.    어떤 계기로 사무실을 시작하셨나요. 당시에는 기업에서 건축사무실을 만드는 경우가 있었어요. 친한 선배가 사무실을 차려달라고 부탁해왔어요. 내가 합류하면 자기도 해보겠다고 해서 장건축을 나왔죠. 선배는 먼저 입사를 했고 나는 기업 회장님 만나기 하루 전날 밤에 생각하니 이게 옳은 길인가 싶더라고. 사무실을 40~50명 규모로 성장시켜야 하는데, 조직을 만드는데 적어도 4-5년이 걸려요. 들어갈 내 노력과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구요. 못가겠다고 하니 그 선배도 네가 안하면 자기도 할 이유가 없대. 그래서 둘이 실업자가 되었어요. 사무실을 만들 수 밖에 없었죠. 1994년도 강남에서. 그때 사무실도 5년 만에 30명 정도 규모가 되어서 감당하기 힘들더라구요. 선배에게 사무실을넘기고 나는 1997년부터 2년 동안 건축을 안했어요. 여행 다니고 만화책 열심히 읽고.   충전의 시간이었나요? 놀 때는 건축을 정말 해야 할까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했어요. 꼭 재능이 있어서 건축을 한 것도 아니고, 잘할 수 있다는 생각도 없었고, 다른 것에 대한 욕망도 있었어요, 그때 나이가 서른 일곱살 정도였으니까 어중간했었고요. 뭔가 기회를 만들려면 열심히 해야 되는데 주변을 보면 김종규, 김준성, 조병수 선생님 등 건축을 너무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더라고.(웃음) 헌신할 정도의 스피릿이 없었어. 정말 건축을 해야 되는지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2년이 지나도 해결이 안 돼. 아, 난 그냥 이렇게 태어났구나.(웃음) 도망을 못가는 거면 이 모습을 받아들여야겠다 생각해서 2000년도에 사무실을 만든 거예요. 그게 북촌사무실이고, 여기까지 온 거죠.   귀국해서 접한 한국 건축계의 상황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조차도 정립이 안 됐을 때였죠. 그때는 외국 건축 어휘들을 자연스럽게 흉내내면서 원전과 참고문헌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했구요. 이런 한국 건축의 상황이 본인의 건축적인 태도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쳤고, 건축가로서 일차적인 목표로 두 가지를 꼽으셨어요. 하나는 이 땅에 조선시대부터 단절되지 않은 상황에서 건축이 성장했으면 어떤 모습이 될까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오원의 작업이 쌓여서 담론이 되면 좋겠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한국적 미학에 대한 고민과 독창성 혹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인데, 이 문제의식에 대해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후자부터 이야기하자면, 제 경우는 서양에서도 원전을 비평적으로 공부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어요. 학교를 들어갔더니 아카데믹한 분위기였으니까. 공부하면서 많이 배웠다는 게 아니라, 한국 문화를 너무 모른다는 갈증이 났어요. 서양 건축을 공부하면 할수록 한국인으로서 내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모르겠더라구. 돌아와서 한국 문화를 공부해야겠다는 갈망이 있었죠. 돌아왔을 때는 우리나라 건축적 상황이 이해가 됐어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조선시대, 일제시대 때 ‘건축가’라는 개념이 없었잖아요. 일제 하에서 한국인이 건축가가 된다는 건 일본에서 용납될 수가 없는 일이에요. 조선총독부나 제국주의의 상징을 그릴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니 그런 의미에서 건축가가 없었다는 거구요. 당시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의 브로커가 되었죠. 그 민원해결인이 나중에 건축사가 된거죠. 그리고 6.25 전쟁이 시작되었고 전 국토의 70%가 불에 탔고, 재건이 일어났고 독재가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양에서 말하는 건축가가 제대로 존재할 수가 없잖아요.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김중업, 김수근 선생님처럼 극소수의 엘리트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였을 거구요.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이해할 수밖에 없다구요. 김수근 선생님부터 승효상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 상황에서 굉장히 노력하신 거잖아요.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에 괴로웠어요. 쉽게 불평이나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죠. 또 하나, 무언가를 바꾸려면 작은 부분을 하나씩 고쳐야 하는데, 내가 받았던 여러 교육적인 배경을 가지고 한국 문화를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잖아요. 그런 이유로 2년 동안 쉴 때 한옥을 찾았던 것 같아요. 가회동 1번지 30여 채 한옥이 하루 아침에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그 근처로 들어가 한옥 사무실을 연 거예요. 당시 내 심정적인 부분, 한옥을 허물어버리는 것에 대한 충격, 개인적인 상황이 다 엮여서 내 건축 생활이 시작된 것 같아요.   본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건축의 근원이나 한국적 미감을 찾기 위한 노력들이 연결되겠네요. 이를 구현하는 재료나 디테일에서도 상당히 완성도 높은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목재, 철물 등 함께 작업하시는 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한옥에 살면서 발견한 것들이 있어요. 어릴 때는 일본식 집부터 살았거든. 한옥을 잘 몰랐기 때문에 신기한 체험이었죠. 내가 볼 때 서양 건축은 굉장히 관념적이에요. 선도 관념적인 선이고 원도 직선의 일종이라고. 그런데 한옥은 관념적이 선이 아니라 손에서 나온 물질이에요. 달이 동그랗지 않고 둥그스름하잖아. 원과 둥그스름한 것은 달라요. 나는 여태껏 달을 보고 원을 그린 거고, 물질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을 배운 것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을 번역해서 채택된, 선택할 수 있는 물질을 배운 것이더라구요. 한옥에 있으면서 이제껏 배웠던 기하학적인 선과 물질에 대한 의미를 많이 느꼈죠. 학습을 통해 배운 건축과 한국의 건축은 정말 다르구나. 뭘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접점에서 경험했던 것같아요. 또 하나는 김봉렬 선생님의 영향이 큰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그전 상태로 돌아가기까지 100년이 걸렸대요. 임진왜란 때 국토가 거의 다 불탔거든요. 이 관념적인 유교사회에서 100년 동안 경제력이 망가졌는데 제대로 된 장인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조선 영정조 시대 때 가구나 도자기가 아름답잖아요. 그 관념적인 태도와 민중의 솜씨가 만난거죠. 그게 영정조 시대의 미학이 아닐까 싶더라구요. 그때 꽃피운 미학이 어마어마하거든. 그게 어디에 가겠어요. 우리 피 속에 남아 있겠지. 그것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찾느냐. 글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무를 만지거나 철을 다루거나 칠을 하는 분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장인이라기보다도 일반적인 나무 만지는 사람, 철 다루는 분들에게 부탁을 했어요. 도면을 주고 이렇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능할까요?’라고.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여지를 주면서 계속 커뮤니케이션한거죠.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우수한 디테일이 나온 것 같아요. 그게 숨어 있던 한국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는 굉장이 어렵지만, 반복은 중요한 거거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진짜잖아요. 그 작업을 십수 년 동안 해온 거죠.   나무, 철, 칠 등 작업하는 분들과 함께 성장하셨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어요. 결국 소장님 역시 메이커의 시스템이 부재한 한국에서 그 시스템을 같이 만들어 오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분들이 성장하는데 역할을 했겠죠.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오면 한국은 이게 안 좋다는 식의 불평이 많잖아요. 나는 불평하는 말이 너무 싫었어요. 불편하면 본인이 고쳐야지. 일단 불평하지 말자였어요.   말씀하신 것을 들으니, 소장님 작업의 전통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이 시대성을 넘어서 하나로 다 섞여있는 게 이해가 가요. 한옥으로 작업을 하시다가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전혀 한옥이라고 할 수 없는 작업을 하잖아요. 그것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주제가 있을까요.   제 경우 딱히 한옥의 스타일에는 관심이 덜한 것 같아요. 한옥이나 한국건축을 바라보는 내 시각이 편협하거나 왜곡될 수도 있는데, 내가 보는 한옥의 정의는 기와나 창호의 시각적인 문제는 아니예요. 한옥은 근본적으로 목구조인데, 목구조가 가져야 되는 기본적인 태도를 덜 가지고 있어요. 목구조는 가장 효율적으로 휴먼스케일을 다룰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한국건축은 목구조인데 모듈이 안 맞아. 효율적인 목구조가 아니야. 쉽게 서있을 수 있는데 휘어있거나 표준화되지 않았어요. 그 점이 눈에 들어오는 거죠. 다음으로 중국, 한국, 일본건축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은 기단의 크기가 달라요. 중국과 일본의 기단은 서양 건축의 포디움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채나눔이 있어서 한 공간이 있으면 외부가 바로 접하고 있거든. 그래서 기단의 형태가 달라요. 또 온돌이 있었기 때문에 기단의 단면도 달라요. 기단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건축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근원적인 어휘인 것 같아요. 또 하나, 요른 웃존의 중국 건축에 대한 스케치를 보면 거기엔 입면이 없어요. 기와지붕과 기단밖에 없어요. 어떻게 보면 아시아 건축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지 않나 싶어요. 서양 건축은 벽에서 비롯되잖아요. 근데 스케치에 벽이 없거든. 요른 웃존의 스케치에 파사드가 없다는 것, 목구조인데 한국건축은 경험이 다르다는 것, 기단이 다르다는 게 읽히는 거죠. 그게 지켜지는 범위에서 한옥도 바라보는 거죠. 그래서 파사드는 별로 신경 안 쓰고, 원래 가지고 있는 목구조의 원형은 살리고, 목재를 덧붙여야할 경우 원래 구법과 완전히 대별되게 만들어요. 그런 시선을 갖는 게 내 나름대로 합리적인 태도인 거예요.   기단에 대한 해석이 흥미로웠어요. 이상해 교수님(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이 한국건축의 기단을 분석하는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해인사 같은 장소를 분석할 때, 형태적인 것은 모두 배제하고 기단의 구축만으로 그리게 되면 어떻게 공간이 구성되었는지 드러나고 현대적인 공간이 만들어져요. 그 과정이 전통건축의 본질을 현대화하려는 노력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지형의 특색을 파악하고 이를 구축하는 한국건축의 기본적인 특성을 주목한 것이라고 보는데, 기단을 주목하게 된 배경과 이를 어떻게 적용해나갔는지 궁금해요. 현대화라는 생각보다는 그게 한국건축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통도사를 왔다 갔다 한 전력이 깊어요. 고등학교 때 집에서 쫓겨나서 통도사에 갔는데, 사람이 왔다 갔다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통도사는 천년 이상의 시간이 축적이 된 장소인데 사람의 움직임은 기단을 중심으로 한다는 거거든. 기단이 있으면 길을 만들잖아요. 건축물은 기단에 얹힌 오브제처럼 있어요. 건물의 유형(Typology)은 비슷하잖아요. 기단이 어마어마한 역할을 한다고 느낀거죠. 우리나라는 경사지가 많으니까 기단은 건축에서 레벨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일 수도 있고, 그럼 한국의 지형을 잘 이해해야 될거고, 한국적인 공간의 특성을 잘 배려한 크기가 반영되었을테죠. 또 어떻게보면 사람의 행동이 곧 문화인데, 그 행동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곳은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기단이라는 게 건축이구나 싶었어요.   그 장면을 설명하실 때 받는 느낌은 무대 디자이너, 무대 연출하는 언어와 딱 와닿는 것같아요. 그런 거죠. 저에게는 굉장히 근사한 무대네요.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공간의 몇 가지 특징에 대해 언어를 정리하시기도 했어요. 빛에 대한 컨트롤이나 바닥에 대한 연장, 공간을 관통하는 것에 대한 언급을 하셨죠. 설계 과정에서도 좀 더 집중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너무 오래 작업했기 때문에 우리는 잘 못 느낄 수도 있어요. 다만 예를 들어 빛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한국건축에서 빛의 정의가 다르게 느껴질 거 같아요. 빛은 누구나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서양에서 빛을 말할 적에는 벽이 중심이라 빛을 받는 면에 의해서 생길 수 있는 형태적인 그림자를 이야기하죠. 빛을 받는 부분이 공간인거지. 그런데 일본 같은 경우에는 ‘음예 예찬’을 이야기하잖아요. 캐노피가 있고 그늘을 이야기해요. 그렇다면 한국건축은 어떤지 고민해 보는 거죠. 우리는 공간이 채나눔에 의해서 분절되어있기 때문에 일본에 비해서는 양명한 공간이에요. 서양에서 말하는 빛이 반짝 들어오는 그 양명한 공간과는 다르거든. 서양은 커튼으로 가리잖아요. 우리는 캐노피가 나와있고 반사돼서 들어오는 양명함이에요. 내가 생각하기에 그 양명한 빛이라는 것은 그림자가 안 생기는 거예요. 결국 선이 안 뭉게지는거예요. 그 정도의 공간감, 빛의 밀도를 잘 받아들이는 공간감을 만들면 좋겠다 싶어요.   조선시대 때의 그림을 보면 양산을 썼는데 그림자가 없더라구요. 제가 내린 결론은 오히려 심리적인, 지식적인 공간을 원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오묘하게 그런 형상을 만들 수 있는 것까지는 생각을 못했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연출이 가능한 거네요.  선이 뭉개지지 않고, 공간의 콘트라스트가 없어야 되는 건데, 현대건축에서는 힘들잖아요. 그래서 한국건축은 처마가 많아요. 빛이 여러 방향에서 들어와서 공간에 그림자가 덜 생겨요.    일본의 음예공간과는 확실히 다른 부분이네요.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있는 건 아니고, 빛으로 보면 그런 부분이 있는 거죠. 공간에서도 출입구의 이슈가 있어요 우리는 대청이란 게 들어가는 것과 나가는 것이 연결되어 있잖아요. 입구(entrance)의 개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하나씩 해결해보는 거죠. 우리가 설계한 오피스 같은 경우에도 들어가면 빛이 보이거나 바깥 풍경이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엔터런스에 대한 생각. 방에 대한 생각, 빛에 대한 생각들을 그런 식으로 재정립해보는 거죠. 우리가 쉽게 일괄적인 언어(language)로 받아들였던 서양건축을 자칫 잘못 해석하기 싫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전함 포템킨> 영화를 만든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M.Eisenstein)은 몽타주 이론을 만들어서 일상적인 다큐멘터리를 예술로 만든 영화감독이거든. 그런데 그 사람은 몽타주 이론을 중국 상형문자로 설명해요. 상형문자는 이미지를 합친 거잖아요. 그걸 보고 굉장히 쇼킹했었어. 한글이 알파벳 문자에 가깝긴 하지만 상형 문자가 내 DNA에 있을 것이고, 어떻게 보면 나는 사고의 방식이 전혀 다른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베니스대학 다닐 때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가르슈(1927)를 분석하는 수업이 있었어요. 빌라 가르슈는 르 코르뷔지에가 2년 반 동안 리서치한 것이기 때문에, 고전 건축과 현대 건축이 집대성돼서 자기 랭귀지가 다 있어요. 도면을 나눠주고 분석하라는데 학생들이 20-30분 동안 분석해서 발표하는 거야. 나는 상상도 안 됐어요. 보지도 느끼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발표할 수 있는지. 이태리말도 잘 못하고, 논리적으로 발표할 수 있는 능력도 모자라고, 한 달 뒤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파리에 가서 건물을 보고 올테니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 그랬더니 가지 말래요. 네가 본거나 느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판단한 것을 논리적으로 구술하는 것이 원하는 거래요. 완전히 ‘플라톤’처럼 보지 않은 것을 상상을 통해 논리적으로 구축하는 거잖아요. 그때 알파벳 문자권이 가지고 있는 논리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라고 처음 느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사유 방식은 굉장히 상형문자적이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상형문자적 인간인거죠. 그것 때문에 유학 초기 이후부터는 논리적으로 잘 말한다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을 안하기 시작한거 같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글을 어떻게 썼는지 아세요? 그림으로 글을 적어요. 예를 들어서 밀란 쿤데라 같은 경우에는 어떤 장면을 묘사할 적에 굉장히 논리적인 치밀함으로 감성을 묘사하잖아요. 그런데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어요. 여자가 있는데 솜털이 좀 났나거나, 바람에 좀 흩날리는 이미지 하나. 참새가 전깃줄에서 딱 튀어오르는데 흔들리는 이미지, 이 이미지를 가지고 묘사한다고. 그래서 그 글은 그림 같아요, 상형문자에서부터 글이 나오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다른 창작방식이잖아요. 결국 내가 말을 아껴야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상형문자의 논리가 있으니 그것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말을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소장님의 프로젝트에는 감각, 장소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힘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 배경이 이해가 되네요. 다른 식으로 해석해보면 서양건축은 컨텍스트라는 개념 자체가 물리적인 표면의 컨텍스트예요. 주변의 맥락을 맞춘다는 거잖아요. 그건 통상적으로 소실점이 하나인 투시도 화면에서의 2차원적인 컨텍스트를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동양건축은 근본적으로 건축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 개념 자체가 없어요. 우리나라 옛날 마을을 가보면 그냥 한 덩어리라고. 그리고 굉장히 내부 중심적이에요. 내부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방식이죠. 내부에서 해석되는 건축은 서양건축처럼 외부에서 맞추는 것과는 전혀 다르거든요. 내부에서 외부화된 공간 자체는 어떻게 보면 외부와 공간적인 연계가 굉장히 강한 거라고. 그래서 근본적으로 내부에서 시작된 건축의 공간적인 친화력은 대단한 거예요. 서양건축은 시각적인 게 강한 거고. 내 식대로 해석하면 형태적인 외피가 어떻든 간에 내부에서 시작되는 건축은 자연스럽게 공간이 외부 질서와 잘 체득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OHS 진행 임진영, 최춘웅 사진 정유진  다음 인터뷰③ 이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와이드건축 55호 건축가 최욱 특집  
근대적 자아로서의 개인, 건축가 최욱 ③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한걸음 만이라도 앞으로 나가자라는 표현을 인용하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한걸음씩 20년 동안 내실에 충실하는 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어떻게 보면 태도의 문제일 텐데, 제가 처음부터 그런 태도를 갖지는 않았을 거예요, 어릴 때는 마음이 급하고 자기가 잘난 줄 알잖아요. 선언적인 뭔가를 통해서 이뤄내고 싶어 하죠. 그런데 건축도 나라와 시대마다 정의가 달라지잖아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건축이 스위스에서 의미하는 것과 같을 리 없잖아요. 한국의 상황을 보면 선언적으로 해서 될 나라가 아닐 것 같아요. 혹은 사회 계층상 그게 불리해요. 정치가들이 선언해서 나아가는 것과 달리, 건축가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사회가 잘 용인해주지 않아요.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불편하기도 하고 불균형적인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순진하게 프로파간다를 내세워서 될 사회가 아니더라고. 만프레도 타푸리 수업의 청강생이었는데, 이런 얘기를 해줬어요. 너희들은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할거래. 그래서 건축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할거고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거래요. 그런데 절대 안된대요. 이제 자본주의가 진행되면 건축으로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순진한 꿈에 불과하대. 자본주의 사회가 된다는 것은 혁명이 부재하는 사회고, 건축가들은 영원히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주체적인 세력이 될 수 없다구요. 다만, 우리 지식인의 역할은 상황을 똑바로 인식하고, 훌륭한 질문을 통해서 사회에 약간의 기여를 할 수 있는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어요. 해석할 머리는 부족해도, 그 말은 내게 강렬하게 남아있어요. 이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진행이 되면 프로파간다를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였어요. 내가 본 한국적 상황과 내 자신의 능력, 잘 안 되는데 이 상황을 받아드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합쳐져서 그냥 한 발자국씩 사무실 사람들이랑 술마시면서 재미있게, 즐겁게 나가자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 한걸음은 철학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가 할 수 있었던 정도의 것이었을 거예요.   그렇게 쌓여온 모습이 한국 사회 안에서 건축가가 추구할 수 있는 롤 모델처럼 된 것 같아요. 건축물은 하나씩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건축가의 작업을 집중해서 보는 것이 좋은 훈련이더라고요. 이번 오픈하우스서울을 통해서 소장님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였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봐주시면 내가 시간 낭비를 안 한 거니까 다행이죠.   지금까지 외부 인터뷰를 거의 안 하셨잖아요. 말이 앞서는 게 싫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축적된 무언가를 보여 주고 싶으셨던 건가요. 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고민했던 건 있었어요. 건축이라는 게 시대의 생각과 사회를 반영하고 미래에 대한 예지력을 가지고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내가 볼 때 1990년대 상황은 형태를 만드는 걸로 보였어요. 소위 말해 디자인 스쿨이죠. 학생들이 ‘엘크로키’를 보고 있더라구. 어떻게 보면 위험하잖아요. 이렇게 되면 사회가 쓰레기통이나 오합지졸이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생각을 가르치지 않고 눈으로 본 것으로 손재주를 가르치는 것, 대부분의 많은 선생님들이 그런 교육을 받고 왔을 거구요. 그래서 나중에 내 작업이 쌓이면 담론이나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정도가 되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일 거다라는 생각을 했죠. 그건 작업이 쌓여야 가능하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종이와 콘크리트> 전시는 소장님이 한국에 막 돌아와서 서울건축학교에 참여했을 때의 시기를 다루고 있어요. 말씀하신 대로 당시 운동을 주도했던 분들은 나름의 한계와 책임, 무게를 가지고 살아오신 거잖아요. 선언하고 화두를 던지며 인문학적 어휘는 난무하는데 그것이 건축적인 형식으로 연결되지 못한 한계가 있던 시기이구요. 소장님이 목격한 한국 현실에 대해 말을 아끼신 걸까요? 그분들은 선비였기 때문에 선언적으로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사회는 그분들을 선비로 안 봐주고 격하시켜서 봤을 거예요. 그에 대한 간극이 있었을 것 같아요. 우선 저는 건축지에 프로젝트를 많이 소개하지 않았잖아요. 우리 사무실 작업이 그 당시 분위기에서 보면 포토제닉하지가 않아요. 포토제닉하다는 것은 시각적인 정보만 원하는 거예요. 사진은 눈과 거의 비슷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건축은 귀를 막고 냄새를 막고 시각으로 보면 안 읽혀요. 특히 한국건축 공간은 제가 보기에 시각적인 체계의 건축이 아니예요. 느낌을 감지하는 것이 건축이죠. 눈으로 본다는 건 건축에서 소실점이 하나인 투시도 관점에서야 제대로 나오는데, 소점이 다양해지면 잘 안 보여요. 우리나라에서 건축 잡지라는 게 한국건축을 못 읽게끔 되어 있어요. 소실점이 하나인 투시도를 원하는 거예요. 잡지가 시각적인 정보를 원할 때 그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잡지가 비평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어요. 읽지도 보지도 못하는데, 껍데기만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어요. 지금까지 20년 정도 매체, 전문지에 거의 작업을 소개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기록용으로 직접 책을 만들어 내고, 발언을 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아요.     전에도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건축지가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죠. 그 말은 오히려 한 사회의 저널의 수준은 건축가의 수준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편견일 수 있어요. 그래도 그 말의 배경과 의도는 조금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이탈리아 잡지 중에 카사벨라, 도무스가 있잖아요. 둘 다 역사가 있고 훌륭한 잡지이기도 하지만, 똑같은 작품을 카사벨라에 낼 때와 도무스에 낼 때와 달라요. 드로잉도 달라. 혹은 편집한 사람들이 다시 그릴 지언정. 도면은 단순히 악보인데, 그 악보가 매체를 탈 때에는 작품이 된다고. 매체가 그것을 선별할 수 있는 눈이 없으면 그 매체는 번역기, 복사기 밖에 안 되는 거잖아요. 내가 배운 많은 선생님들이 카사벨라같은 저널을 담당했기 때문에, 저널리즘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되겠다라는 그분들의 노력을 봤죠. 한국에서는 복사기로 잡지를 만든다는 생각이 있지.   사무실을 운영하는 방식에서도 원칙과 태도가 보여요. 사무실 환경도 계속 좋아지고 있구요. 사무실 환경을 좋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직원들이 즐거워야겠다는 게 가장 우선이에요. 그 다음으로 가장 안타까운 건 한국에서는 건축가에 대한 상(figure)이 없다는 것. 유럽사회에서는 건축가가 사회적인 오피니언 리더잖아요. 사회적 리더인 힘있는 정치가들만큼이나 사회적으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고, 한 국가의 경제력을 좌지우지해요. 한국에서는 그런 조건이 안 되죠. 건축가에 대한 상이 없기 때문에, 건축주들이 갑을 관계로 대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 상황이 정말 싫어요. 직원들이 이 장소에서 잘 대접을 받는 걸 내 스스로 보여주지 않으면 어떻게 건축주들에게 잘 대해주라고 이야기하겠어요. 그 이유가 가장 큰 거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건축가의 상을 잘 만들어야 되고, 그걸 강요하거나 글로 적을 수도 없는 거잖아요. 결국 건축을 하듯이 건축가의 상도 만들어내려는 거죠.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다양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기존 건축가의 상이 고착화되어 있던 걸 흐트러뜨릴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 역할에 원오원도 일조를 해야죠. 내가 인터뷰하는 목적은 직원들한테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위해서예요.     결국 시스템을 만들려는 노력이신건가요? 그렇죠. 결과적으로는 체계화해야 하는 거구요. 제 경우 스스로 경도된 이론도 없고 스타일도 없어요. 다 버렸고 해체했거든. 논리적인 판단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였죠. 내가 이론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어요. 그것을 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앞서 말했듯이 언어에 대한 생각 때문이에요. 우리 피 속에는 상형문자가 들어가 있는데, 알파벳 문자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 한계를 짓는다고 생각해서 말을 안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몇 개의 작업을 만들면서 서서히 대충의 느낌을 가진 작업은 만들어졌어요. 그걸 직원들한테 ‘해봐’라고 커뮤니케이션할 수는 없잖아요.     내부에서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축가의 생각을 발언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유럽건축가들은 이론을 먼저 이야기하고 실천이 따라가는 게 자연스러워요. 이론이 더 중요하거든.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동양은 좀 달라요. 실현된 것 속에 사고가 있어요. 그 사고는 성숙된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거지. 사고가 앞서면 동양에서는 실패하게 되어 있어요. 동양의 철학이라는 게 근본적으로 서양과 다르죠. 피터 줌터와 같은 경우, 알파벳 문자로 동양 글쓰기를 하는 사람처럼 보여요.   (만약 발언한다면) 좀 더 작업을 진행시킨 다음에 작업이 이미지가 되어서 따라가는 글이 되어야겠죠. 이거 하고 싶다가 아니라, 이미지가 있고 그걸 해석하는 글을 같이 보면서 이래서 이렇구나하는. 좀 더 상호작용이 되면 우리의 건축이 아니라 한국 문화를 이야기하면 좋을 거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에서 건축가의 상은 아직 덜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10년 전보다는 건축에 대한 콘텐츠가 늘어나면서 사회에서 건축에 대해 말하는 것은 늘어났지만 여전히 건축을 미술품처럼 대하는 분위기는 아쉬워요. 그 이상으로 사회에 개입하고 전하는 메시지도 있을텐데요. 매체를 탄다는 것은 대중의 속성을 충족시켜줄 단계도 필요하잖아요. 그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더 진정한 것을 발견하는 길을 터주고, 대중들과 친숙해질 과정이 필요하죠. 건축을 작품을 보는 시각으로 대중매체에 소개되는 것은 중간 과정인거 같아요.   건축가의 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건축의 사회적 역할도 생각하신 바가 있나요? 내가 사회적인 인물이 아니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가파도 프로젝트나 시장 공관 리노베이션이나, 백남준 기념관 등이 다 관 프로젝트거든요. 한국에서는 그 정도 조건에서 좋은 공간이 나오기 힘들잖아요. 이런 공공프로젝트를 통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공공에 최대한 좋은 공간을 돌려주는 것, 그 정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파도 프로젝트는 건물 하나 짓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기획 프로젝트죠? 가파도의 경우는 약간 건축가로서의 의무감이 있어요. 건축가들이 집짓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일들을 조금씩 하고 있거든. 건축가로서 공공에 기여하는 것은 도의적인 거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단체에 가입해서 사회적인 공헌을 하고. 나는 그런 걸 못하고 싫어하니까, 공공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 경우 우리의 헌신이 많이 필요하죠. 또 하나는 제도적으로 좋은 퀼리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요. 정부 입찰이라는 게 도면의 내용이 아니라 도면의 두께만 보고 입찰하니 시스템 자체가 근본적으로 좋은 작업이 나올 수가 없는 환경이에요. 그 시스템에서 좋은 작업을 한다는 것은 엄청난 개인적인 노력, 봉사 혹은 경제적인 희생까지 감수해야 되는 거거든요. 버틸 수 있는 정도에서는 감수하는 게 우리 역할이다 싶어요. 그렇게 한번 기준이 생기면 누군가 따라하겠죠. 한 번 실현된 현상이 있으니까 뭐가 문제인지, 절차에 대한 문제도 살펴볼테고 제도가 바뀌겠죠. 가파도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예요. 불가능한 프로젝트인데 셋업이 되면, 앞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어요. 좋은 사례가 있기 때문에 법을 바꿔 볼까하며 움직이게 되겠죠. 그런 기대치에 대한 소망이 있죠.   공공프로젝트에서 이 정도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했나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힘들었죠. 그런데 우리만 고생한 것은 아니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또 예를 들어 골대 안에 공을 99개 정도는 넣을 수 있어야 눈감고 60개 정도 넣을 거 아니에요. 70개도 못넣는 사람이 눈감으면 반도 못 넣는 거죠. 우리가 공공을 통해 보여준 게 80점이라고 치면, 평상시에는 그 뒤에는 99개를 넣고 있다는 거죠.   좀더 구체적으로 질문드리자면 소장님의 프로젝트는 하이 퀼리티 작업이 많은데 평당 단가나 예산 규모에서 크게 차이가 나잖아요. 그 차이나는 예산의 간극을 공공건축물에서 어떻게 해결하셨는지 궁금해요. 결국 관에서 나온 돈이기 때문에 피나는 노력으로 때우는 거죠. 헌신이죠.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좋은 조건이나 상황에서 일할 수는 있겠죠. 그렇지만 인내, 노력, 헌신이 없으면 이뤄지지 않아죠. 주어진 돈은 똑같고 나머지는 다 땀일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비싼 건축, 많은 돈을 들여야 좋은 퀼리티가 나온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맞죠. 좀 다른 이야기인데, 시대적으로 보면 철을 다루는 분들은 손으로 만들어내잖아요. 이런 건축은 앞으로 못하게 되어 있어요. 북유럽 건축이 점점 공업생산품, 규격품이 되잖아요. 분쟁을 피하고 산업 경쟁에 맞춰야하고 감리 문제와 같은 이유와 관련이 있거든. 우리는 한국의 현실을 냉정하게 보는데, 우리 입장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예요. 우리가 하는 건축이 비싸게 보일 지라도, 서양같으면 10배의 돈을 들여도 못 만드는 거예요. 이렇게 싼 가격에 좋은 퀼리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죠. 우리는 설계비도 많이 안 받거든. 표준으로 받는다구요. 외국 건축가들은 천문학적인 설계비를 요구할 거라고. 우리 건축주들에겐 행운인거죠. 그런데 한국도 얼마 안 남았어요. 이 사회가 더 산업화되면 이것도 못해낼  거예요. 그래서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거죠, 약간 더 노력한다면 한국에서도 공공에서 좋은 퀼리티의 작업을 볼 수 있어요.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나오는지 보고 경험해봤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수준까지 안 나와도 낭비 안하고 80% 까지는 끌고 갈 수 있는 거지.   프로패셔널로서 클라이언트를 어떻게 만족시키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무엇인가요. 건축가로서 한국의 건축가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가장 고민스러워요. 나라마다 건축가의 개념이 다 달라요. 그런데 유럽 사람들이 한국에서 건축을 잘 못 하잖아요. 대화방식이 틀린 거죠. 한국의 건축주들은 건축가라는 사람을 문화적으로 대해 본적이 없어요.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 건축가가 어떤 영역인지 잘 알지 못해요. 그러니까 새로운 직종이에요. 그럼에도 또 지역 색이 다 있어요. 새로운 건축가의 탄생을 한국에서 인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거지. 이런 상황에서 어떤 건축가가 되어야 커뮤니케이션이 빠를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내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주와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그분들이 원하는 것을 잘 해석해서 결과를 만들어내죠. 대신 고통을 받는 대리모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분들의 생각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요. 집장수들은 당신들의 생각을 잘 이해 못해요. 자기 멋대로 짓는 거지. 유럽 건축가나 그곳에서 배운 건축가들은 자기 건축을 하는 거고. 유럽에서는 그게 통하거든.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에서 그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택한 방법은 내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주의 생각을 잘 받아들인다, 그게 우선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사회에 누가 안 되는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건축적으로도 의미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내 숙제로 남는 거죠. 그 입장을 양보하면 프로페셔널이 아닌 거고, 다만 나름대로 해석한 건축적 과제, 도시 문제, 역사적인 문제를 건드려서 만나게 하는 거죠. 그것을 건축주에게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잖아요. 내 숙제지.   한국 사회는 건축가라는 역할과 상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과정조차 없었으니까요. 내 보스는 김병현 선생님이었는데, 한국에 와보니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너무 발전을 했대요. 그런데 “사람들의 문화적인 인식은 떠날 때와 진배없소” 그러더라고. “사람들이 선생님하면서 스케치 하나 주고 가래요. 근데 건축이 그렇게 만들어 지는게 아니지 않소”라고 하면서 너무 낙담하시는 거야. 사람들은 김병현 선생님이 기분이 나면 그냥 슥 그려서 건축이 나오는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고통에서 나오는 거거든. 대리모 이야기도 김병현 선생님이 하신 거예요.   서울건축학교에서 소장님의 젊은 시기를 함께 하셨는데, 앞서 말했던 <종이와 콘크리트> 전시를 보시고 개인적인 감회는 어떤가요? 저는 좋았어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말하지 않으면 역사가 되지 않는다’. ‘기억은 역사가 되지 않는다’. 말한 기억만 역사가 된다구요. 교육단체같은 활동들을 공식적으로 말하는 첫 번째 기회이고 모아놓고 말했다는 자체가 중요한 거죠. 전시에 드러난 것 외에도 무수히 다른 것이 있을 거라구요. 부족하지만 한번 맥락을 짚을 수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어요. 적어도 외국 사람들이 한국 건축에 대해 어떤 맥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고 훌륭한 거 같아요. 이런 계기로 누군가가 관심을 두고 논문을 쓴다면 귀중한 일이지. 많은 논문들이 자기도 모르는 내용을 적어요. 논문은 그 학생의 지적인 상상력을 표현하지만, 그 상상력이 현실을 통해서 분석되어야 자료가 되고 논문이죠. 그게 쌓이면 역사적인 아카이브가 되는 거거든. 최근 목천재단이나 이런 전시를 통해 미시적인 아카이빙을 하는데, 중요한 일이죠. 그렇게 사회가 구축화되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전시가 굉장히 훌륭한 거죠. 빅데이터 분야의 손길영씨가 말한 꼰대의 정의가 있어요. 개인이 극복해야 될 과제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기억이래. 왜냐면 사람은 항상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살잖아요.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은 자신의 기억에 매몰되고, 사회는 점점 빨리 변하는데 개인의 기억으로 사회를 습득하는 순간 자신이 뒤쳐진다는 거죠. 기억을 버려야 한대. 아니면 사회의 시스템에 맞춰 오픈마인드가 되어서 계속 바뀌어야 한다는 거죠. 자기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극히 일부였던 자신의 좋은 시절을 착각해서 꼰대가 되어간다는 거지. 그건 진화론적으로도 맞아요. 개인보다 사회가 월등히 빨리 변하거든. 지금 전시를 기획한 정다영 큐레이터나 함께 한 학자들이 한 계층을 이루면서 갈 거예요. 개개인으로 보면 덜 성장한 부분이 있어도 연대를 하면 다 채워져요. 그래서 사회가 굴러가는 거거든. 사회라는 게 거대한 생명체라는 거죠. 그래서 경직되어 있거나, 남의 이론에 몰두되어 있는 것은 위험한 거죠. 건축계에도 시각이 고정된 분위기가 꽤 있잖아요. OHS   진행 임진영, 최춘웅 사진 정유진  다음 인터뷰 ④가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와이드건축 55호 건축가 최욱 특집
근대적 자아로서의 개인, 건축가 최욱 ④ 깨어 있는 개인, 일상성의 회복 일상을 유지하는 방법이 흥미로워요. 비교적 일찍 주무시고 새벽에 일어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새벽 시간에는 주로 무엇을 하시나요. 특별한 일을 하는 건 아니에요. 깨어나서 일기를 적어요. 전날에 대한 일기 혹은 꿈에 대한 분석. 시인 랭보가 새벽으로부터 아침으로 깨어나는 시간을 굉장히 좋아했거든. 해가 떠있을 때 깨어나면 기분이 안 좋아요. 어스름한 상황에서 밝아오는 걸 직접 봐야 편해요. 내가 있는 공간도 늘 해를 뜨거나 지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요. 그렇게 가볍게 책을 읽거나 마당이나 서재를 돌아다니거나 그리고 운동하러 갔다가 사무실에 와요. 대부분 4시 전에 일어나죠. 우리 집 옆에 절이 있는데, 어느 스님이 염불을 안 외우는 지 다 알아.(웃음)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겠네요. 귀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건축을 하다보면 사무실에 나와서 내 시간을 갖기는 힘들잖아요. 전화를 받거나 미팅을 하거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없죠. 아침 시간에 건축을 하는 건 아니거든, 개인적 시간이지.   아침 시간을 위해서 일찍 주무시잖아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저녁 모임이 만들어내는 사회 생활이라는 게 있고 모두들 참여하길 원하잖아요.   저는 저녁을 아내와 같이 해요. 사회 생활을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공식적인 사회 생활은 거의 참석을 안 하죠. 저녁때 외국에서 온 친구들 혹은 직원들, 내 주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 빼고는 거의 없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생활하셨나요.  학생 때는 당연히 그런 라이프스타일을 가질 수 없죠. 늘 밤을 새야 하니까. 장건축에 다닐 때는 사무실의 스케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잖아요. 1994년도에 개인 사무실을 만들면서 서서히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는 젊었고 직접 모형, 도면부터 일을 다 했어야 하니까. 4시간은 자야 되잖아요. 그 생활이 습관이 되었고, 그때부터 20년 정도 된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서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끔 공간을 다 바꿔놓았죠.   집에도 해가 뜨는 걸 볼 수 있는 큰 창을 만들고, 사무실도 그렇구요. 큰 창을 만드는 건 어릴 적 기억 때문인 것같아요. 어릴 때 몸이 아팠거든. 그래서 집안에서만 살았다고. 6년 정도 집에서만 살다보면 큰 창이 필요해요. 집이 부산이었는데, 마당이 있고 대청이 있었던 기억이 나요. 한때, 내 작업을 스스로 분석해봤어요. 항상 창이 커요. 시선이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봐요. 그게 한국건축의 특징이거든. 내 작업에 그런 특징이 있더라고. 원인을 분석해보니 어릴 적 기억이 영향을 미쳤을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밖에서 들리는 소리, 냄새에 민감해지는 거지.   한국은 워낙 모임도 많고 더군다나 클라이언트가 있는 직업이라 거절하기 힘든 상황도 있잖아요.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물론 기본적인 것은 참석하지만, 가급적이면 안 만든다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패턴화되죠. 저는저녁 파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와인바도 있었고, 사무실도 술 마실 공간이 있고. 내 라이프스타일에 필요한 공간이 이 범주에 다 있어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밖으로 안 가죠. 그런지 오래 됐어요. 내 라이프스타일 안에서 할 수 있는 정도로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거지.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관계들, 저녁 행사와 술자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데, 불안하지 않았을까 궁금했어요. 안 불안해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건축가가 되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고, 현실적으로 목적을 위해서 달려가야겠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모든 게 그냥 과정이었고 어떻게 해결하냐의 문제였죠. 내가 성격은 예민한데 세상에 대해 약간은 둔감해요. 호기심은 있지만, 기웃거릴 정도의 호기심은 없던 것 같아요. 조르지아 아르마니의 자서전을 보면, 이 사람이 워커홀릭이거든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한다구요. 기자가 어떤 책을 보냐고 물었을때, 너무 바빠서 책을 볼 시간이 없다고 해요. 주말에 뭐하냐고 물으니, 자기 친구랑 TV를 본대요.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편안하게 자신의 일상을 지켜준 친구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게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물론 현실 생활은 그보다 복잡하겠죠. 하지만 저런 태도로 살아가면, 자신의 내적인 에너지가 나와서 남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거잖아요. 저렇게 살 자신만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자기 루틴을 가지고 주말을 보낼 수 있고, 일상이 그냥 자신의 충만한 삶이면 좋겠다 싶어요.   개인의 세계에 몰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가장 큰 힘이 아닌가 싶어요. 젊은 세대가 그렇게 하기 힘든 이유는 불안감에 있지 않을까 싶어요. 소셜네트워크가 남을 기웃거리게 되어 있죠.   SNS는 전혀 안하시나요?   안 해요.   스타건축가가 되기보다 일상성을 중요시하는 것을 대비시켜 한 말씀이 인상적이었어요.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이렇다 할 건축가의 위상 자체가 없다보니 스타건축가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스타건축가의 정의가 뭘까요?   대중들이 인지하고, 많은 건축주가 우선적으로 그 브랜드를 사려고 하죠. 그렇죠. 우리가 코카콜라를 먹을 때 항아리에 먹으면 맛이 안 나잖아요. 거기에는 광고의 전략이 숨어있는 거잖아요. 스타건축가는 디자인을 잘해서만 스타건축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이나 순간이 만들어낸 브랜드 가치가 있는 거고, 광고처럼 돈을 더 줘도 스타건축가를 써서 광고 효과가 있어야 스타건축가거든요.   작품과 퍼스널리티가 분리된거죠. 분리된거죠. 자본주의가 심화되면 건축이 광고판이 되는 거고, 스타건축가를 쓰는 게 월등하게 유리하기 때문에 30년 전의 스타는 지금도 스타예요. 자본주의에서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스타건축가로서의 자질을 갖춘 건축가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런 스타성을 건축가가 못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탄생하지 않는 것일 거고. 스타건축가는 사회의 메커니즘 안에서 탄생하는건데, 스타건축가가 되기 위해 건축을 한다는 게 내 입장에서는 어리석고 철없이 느껴지는 거죠. 되면 좋지만 렘 쿨하스처럼 흉내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 주어진 여건과 현실에서 성실하게 해나가는 태도는 중요하잖아요. 우리 사무실에서도 잡지책으로 큰 사람들은 어느 순간만 극복하면 스타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나는 사무실 세미나에 다 동네 건축가들을 초청해요. 화려하지 않더라도 진중하게 만들어내는 사람들. 진지한 생각 자체가 모여서 나라가 되는 거거든요. 한두 명의 스타가 나라를 만들진 못해요. 스타건축가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다국적 기업이 있어요. 유태인이 주를 이루죠. 출발이 달라요. 우리가 유태인이 될 수도 없는 거고. 그 사회 현실을 모르고, 내가 엉뚱한 곳에서 춤추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죽으면 억울하잖아요. 엉뚱한 곳에서 춤을 안 추겠다는 거죠. 에너지 낭비를 안 하겠다는 거지. 그래서 내가 말하는 일상성은 흔히 이야기하는 일상(everyday life)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한 개인의 세상에서 자신의 자각이 인지된 자아에요. 그걸로 일상을 살아야 된다는 거지.   개인의 일상성을 자각하고 개인적인 세계에 몰두하는 건, 창작활동을 하는 모든 분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묵묵히 자기 내면의 시간, 내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내 일상은 지극히 잠잠해요. 특별한 것이 없어요. 호기심이 별로 없죠.   사회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가치는 번뜩이는 천재가 만드는 게 아니라 꾸준한 항성, 일상이 만들어간다는 이야기하셨는데요. 하루키가 글쓰는 작업을 마라톤에 비유한 게 생각나더라고요. 삶에 대한 철학으로 일상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네요. 사르트르가 구토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게 상징적으로 일상에 대한 구토거든. 근대적 자아로서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일상을 회복하는 것은 통상적인 일상에 대한 구토로부터 시작이 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 일상이라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것. 열린 깨어남이죠. 그게 일상이어야 하고 그게 아니면 습관이죠.   중요한 부분이네요. 재미있게 읽은 책이나 영화가 있나요. 워낙 책은 잡식이라. 그보다 기억에 남는 책을 뽑으라고 하면 티지아노 테르자니라는 이탈리아 종군기자가 죽기 전에 아들에게 구술한 내용을 엮은 책이 있어요. 티지아노 테르자니는 뛰어난 중군기자였어요. 중국이건 캄보니아건 위험한 전선으로 달려가 세상에 알렸거든. 지식인으로서의 큰 의무였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그런데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역사는 그런 쳇바퀴에서 끊임없이 달려가는 거였더라.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며, 그저 하나의 단편적인 진실을 전달하는 전달자밖에 아니었다. 그래서 네가 하고 있는 일에 큰 역사적인 일을 부여하는 것은 착각일 수 있으니 그냥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을 하라고 말해요. 소위 공명심을 가지지 말고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진실한 행복일거다’ 이게 아버지의 결론이에요. 『네 마음껏 살아라((La)fine e il mio inizio)』, 좋아하는 책이에요. 중국작가들 책도 좋아해요. 중국 작가들은 문필이 뛰어나고 교묘할 정도로 지적이고, 익살스러워요. 그 이유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인데, 그 단수가 보통이 아니에요. 특히 위화(余華,  Yu Hua), 모옌은 정신적인 레이어가 참 대단하다 싶어요.   취미 생활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집중하는 것이나. 사소한 것들. 대단한 취미는 없고. 나는 매니아는 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책은 꾸준히 보고 많이 봐요. 가볍게 읽는 책들. 음악도 거의 안 들어요. 그냥 일상을 기록하는 게 내 삶인 것 같아. 느끼고 보고, 가끔 여행 다니고.   올해 오픈하우스서울에서 공개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 방문하시는 분들이 어떤 측면을 주목해서 봤으면 하시나요. 우리가 만든 공간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1964빌딩을 예로 들자면 상부의 공간은 그냥 기능적인 것이고 저층부는 높이 열려서 주변과 포용하는 것이에요. 공공에 열려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공간에서는 시각적으로 일소점 투시가 생기는데, 1층 로비 내부 공간을 보면 의도적으로 일소점을 깨는 요소들이 있어요. 내 해석으로 일소점을 깬다는 것은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느낌이나 인지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이에요. 쿠킹 라이브러리 같은 경우에는 예를 들어 부엌이라고 하면 김이 오르고 냄새가 오르는 것들이 포함돼서 공간이 이뤄져요. 공간이 시각적이 투시도가 아니라는 거죠. 낮에도 빛이 들어와서 거리와 동화되기도 하고 밤에는 낮과 밤이 절묘하게 교차해요. 밖에서 보면 단순하지만 안을 살짝 엿보면 뭔가 부엌이라는 공간이 주는 따뜻함, 자연광이 있고, 밤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장면들을 연상해서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디자인 라이브러리도 마찬가지로 주변에 가로등이 몇 개 없어요. 그런데 밤이 되면 도서관에 포근하게 조명이 켜지면서 사람들이 공부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들이 중요해요. 그런 부분이 공공에 대한 배려 같아요. 주변으로 열려있고. 내부는 빛에 대해 다루고, 형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라는 것. 그런 생각들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인가를 통해서 부산물처럼 나온 것이 외관이죠. 파사드 디자인을 거의 안해요. 그것이 한국건축이라고 보고 있어요.   그것을 실행시키는 과정에서 재료에 대한 탐구, 물질로써 공간을 만들기 위한 완성도를 높이는 노력을 계속 해온 것이네요. 한옥에 몰두해 왔으니까 한옥의 현상학의 미에 대해서 주목하죠. 앞서 말했듯이 그림자의 퀼리티가 내외부가 다르다는 것에 주목을 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외벽은 거칠게 처리하고 바닥의 마감은 단단한데, 그 위에 가벼운 건축이 있는 거죠. 우리나라 건축이 그런 거잖아요. 예를 들어 로비 내부의 윗면에 넓은 면이 펼쳐지면 압도적이죠. 근데 윗면이 선이 되면 압도적인 면이 없어져서 천정면이 시각적으로 분산되고 가벼워져죠. 그래서 시각적인 투시도 효과, 중압감이 덜 생긴다는 거죠. 재료 같은 경우, 퍼스펙티브가 생기지 않는 화면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재료가 개입되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그런 의견을 통해서 공간이 나오는 거죠.   건축을 모르는 분들이 서울이라는 도시를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자연스럽게 볼 수 있으면 가장 좋은데. 서울의 역사, 도시 구조를 아는 것은 중요한 거 같아요. 아돌프 로스가 방에서 살기 위해서는 악기 연주하는 법을 배우듯 방에서 거주하는 법을 배워야 된다고 했거든. 도시에 머무는데 이 도시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거에요. 서울이 어떻게 형성이 되어있고. 인구밀도가 전 세계적으로 높고 지형학적으로 굉장히 독특한 입지를 가지고 있고, 빨리 성장했고, 600년 동안 도읍지였고, 그런 것들을 잘 해석하다보면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읽히는 게 있거든요. 그렇지 않다면 이 도시가 못 생겼다는 식으로 볼 수도 있어요. 서양의 시각에서는 이 도시의 밀도, 에너지, 불협화음 등에서 생동감이 있다고 느끼고, 가능성을 찾구요. 이 도시를 건축적으로만 바라보면 굉장히 시선이 한정적이에요. 포괄적으로 보고 즐겨야 미래 예측도 가능하죠. OHS   진행 임진영, 최춘웅 사진 정유진  +참고문헌: 와이드건축 55호 건축가 최욱 특집
현대카드 영등포사옥, 최욱 10월 21일 1:30PM
현대카드 본사 3관, 최욱 10월 21일 3:00PM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최욱 10월 23일 1:30PM
1964빌딩, 최욱 10월 23일 3:00PM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최욱 10월 23일 3:30PM
백남준 기념관, 최욱 10월 26일 1:30PM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최욱 10월 26일 3:00PM
원오원아키텍츠 스튜디오, 최욱 10월 27일 3:00PM
축대가 있는 집, 최욱 사람은 자신의 기억으로 미래를 만든다. 햇볕이 온화한 창가에서 책을 보거나, 주변의 소음들이 정겹게 스며든 공간에 머물기를 좋아했던 나는, 냄새가 스며들고 빛이 머무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한다. 때문에 공간은 담백해야 한다. 공간은 사람의 풍경으로 그림이 되어야 한다. 섬세한 공간은 사람의 표정을 만든다. 공간의 에너지가 몸을 감쌀 때 사람은 공간의 여행자가 된다. 비례나 구성은 공간을 만드는 어휘지만, 긴장과 이완은 공간을 형성하는 시다. 글 최욱  사진 ONE O ONE factory *본 프로그램은 스페셜테마 '건축가 최욱' 프로젝트 중 4개 이상 참여하신 분들을 대상으로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