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③ 여러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택도시연구원을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천기술개발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우리 팀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만든 이후, 불행히도 제가 회의에 빠져들었어요. 그때가 거의 2년 좀 넘었을 때였는데 이것도 여성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내부에서 받는 견제는 항상 있었지만, 나보다 남자들을 먼저 승진시키더라고요. 별것 아니었지만, 예를 들면 월급을 더 많이 준다거나 했어요. 또 제가 후배라 해서 선배가 슬그머니 얹혀가려는 상황도 기분이 얹짢았고요. 여기에 계속 있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이 물이 저에게 너무 작아서 마음대로 뛰놀지 못하겠더라고요. (웃음) 당시 외부 원고 청탁도 많이 들어올 때였는데 원고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고, 여러모로 자유롭지가 않았어요. 또 제도 개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어딜 가든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모든 회의에 들어가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바꿔나가고 그랬죠. 그것도 한 2년 하니 지치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관둬야 하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갈 데가 없는 건 괜찮아요. 오라는 데가 없는 건 찾으면 돼요. 더 큰 문제는, 도대체 내가 가고 싶은 곳도 없었어요. (웃음) 요새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벤처를 만들듯 하고 싶은 걸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때는 희귀한 케이스였어요. 더군다나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사람들은 제가 어떤 조직에서 일하기를 기대하잖아요. 그래서 몇 달 동안 고민했어요. 어느 날 새벽에 혼자 앉아 있는데 불현듯 ‘아니, 가고 싶은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으면, 그냥 하고 싶은 거 혼자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우, 나 천재다!’ 했어요. (웃음) 그래서 그때 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물론 혼자서 했던 것은 아니에요. 주변에 벤처 형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회사를 만들었어요. 물론 제가 주도적으로 일하는 거지만. 그렇게 해서 ‘서울포럼’이 만들어졌어요.   서울포럼으로 독립한 게 가장 힘든 선택이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선택이었어요. 그때 스스로 바보라고 생각한 게 뭐냐면, 30대 중반까지 한 번도 이런 독립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박사 학위도 받았으니 어느 조직에 가서 팀장이나 기관장 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 자신의 폭, 제 세계의 폭을 한정시켜놨던 거죠. 사람이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 그런 거죠. 그때 완전히 알을 깨고 나온 거예요. 그때 독립한 것이 인생에서 저 자신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고, 또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됐다고 믿습니다. (웃음)   서울포럼에서 도시건축과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기획, 출판, 저술까지 다 아우르셨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기획 업무가 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말해 설계에 주력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설계 잘하는 사람은 워낙 많아요. 저는 스스로 특정 프로젝트를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저 자신을 잘 파악했던 거죠.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는 아직 그런 요구가 별로 없었어요. 활동했던 시기가 1990년대인데, 마침 앞서 얘기했던 민영화와 세계 자본주의에 관련된 일들이 말하자면 물밀 듯이 생길 때였어요. 그러면서 기획에 대한 요구(needs)가 필요해진 거죠. 솔직히 그전까지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지만, 이제는 ‘무엇을 지을까? 어떤 구성으로 해서 짓는 게 좋지? 이건 누구하고 함께 하면 좋지? 기술은 어떻게 하면 좋지?’ 등등을 기획하는 수요가 있었어요. 그걸 파악했기 때문에 시작했던 거였어요. 건축 설계는 가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했지요. 인사동 프로젝트는 제가 재미있어서 한 거였어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제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잖아요. 출판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보면 대기만성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30대 중반부터 신문에 칼럼을 쓰곤 했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작가이기도 했고, 글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서 책도 많이 읽었어요. 언젠가는 책을 쓰겠다고도 했지만,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이유가 있더라고요. 글에 대해서 확실하게 눈을 떴을 때가 미국에 있을 때였는데, 영어로 글을 써야 하니 항상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미국에 있는 애들이 나보고 글을 참 잘 쓴다는 이야기는 했어요. 문법만 조금 고치면 될 뿐, 톤이나 글의 시작이 굉장히 좋고, 주제 개념도 참 좋다고요. 영어라 소극적이었던 거였는데, 한글로 쓰게 되니 막 폭발을 하는 거죠. 또 프레젠테이션을 매우 잘한다는 것도 주택공사에 가서 알았어요. 미국에서 영어로 할 때는 항상 조심스러웠던 거죠. 미국에서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야기하던 것이 나중에 다 힘이 됐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프리젠테이션인지 알게 된 거예요. 미국에서는 확실히 그런 게 훈련이 돼요. 무엇을 하든 상대편, 즉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해요. 또 콘셉트 없이 이야기하면 바로 외면당해요. 이 분야에서 강홍빈 선배가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인데, 제가 그분에게 인정을 받았어요. (웃음) 농담 삼아 “강홍빈을 이겨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는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항상 후배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이제 동료로구나’라는 메시지를 선배의 눈에서 읽었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여성이나 남성이나 우리는 일하면서 프로로 인정받을 때, 동료로 인정받을 때, 그리고 내가 정말 잘한다는 것을 상대편이, 그것도 일 잘하는 상대편이 존경해줄 때 기분이 매우 좋아지잖아요. 그래서 자신감도 생겼고, 스스로도 ‘나가도 먹고살기는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사람들은 저를 까칠하다고 보는 편이지만 저는 꽤 사교에 능한 편이에요. 혼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아해요. 이중적이죠.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게 해주려는 성향이 있어요. 사람들 만나면 나도 모르게 흥이 나고, 얼굴이 환해져요. 일단 접하기 힘든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툭툭 던지는 제 이야기가 자극도 되고 하니까. 그러다 보니 클라이언트 관리도 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서울포럼 하면서 제 여러 가지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출판도 전혀 생각이 없다가 하게 됐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결론은 어쩌다 하게 된 게 참 많다는 거네요. <서울성>이란 책을 처음 냈었는데, 그 책은 서울포럼을 시작하면서 저를 알리고 싶어서 계획했던 책이에요. 유명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였고 계약까지 갔는데 저자로서는 달갑지 않은 조건을 걸더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직접 내자 하면서 출판하게 된 거예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하면서 온갖 종류의 인쇄 과정은 다 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② 대학 입학 당시 공대 800명 중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셨다고 들었습니다. 3명이었다가 한 명이 되었어요. 그 세 명이 모두 이화여고를 나왔어요. 너무 흥미롭지 않아요? (웃음) 이화여고에는 확실히 항상 ‘야’성이 있는 것 같아요. 기독교적이기도 하지만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있어요. 그 중 숨겨져 있는 게 ‘야’성이에요. ‘뭔가를 바꾸고 싶다’, ‘뭔가 다르게 하고 싶다’라는 것이 항상 있어요. 그 가기 어렵다는 공대 한 기수에 3명이나 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화여고를 다닌 것은 매우 고마워하죠. 나머지 두 명이 여러 이유로 같이 못 다니게 돼서 혼자 다니는 바람에 많이들 물어보는데, 저는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요. 나중에 같이 들어갔던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당시 상계동 캠퍼스였는데, 입구 들어갈 때 긴 잔디밭을 통과해야 해요. 거기에 맨날 시커먼 남자들이 너댓 명 앉아서 ‘기루다’라는 일종의 브리지 카드 게임을 하고 있어요. 여자가 지나가면 다 같이 쳐다보는 게 친구는 그렇게 싫었다고 하더라고요. 글쎄 나는 싫고 말고 할 게 없었어요. 남이 쳐다보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었어요. 미니스커트도 입고 다니고, 내가 등장해서 분위기 바뀌면 오히려 재밌어하고 그랬죠. 그건 제 체질인가 봐요. 물론 가끔 짜증 나는 것은 있었어요. 가장 짜증 나는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 제가 서울공대 전설이 된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어서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는 것 때문인데 그건 별 것 아니고요. 지금도 그걸 많이 이야기하더라고요.   화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왔죠. 사실이 아니에요. (웃음) 과장이 됐을 수도 있죠. 손잡이가 얼마나 더러우면. (웃음) 손잡이도 제대로 없어서 끈으로 해놓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만지기 싫을 정도로 더러워서 그랬을 거예요. 발로 차고 들어갔다니, 나 같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요. (웃음) 대학 때 연극부를 했는데, 7년 만에 서울 공대에 여자가 들어온 거예요. 역사적 사건이니 무대에 서야 한다고 난리였죠. 그것도 좋겠다 해서 무대에 두 번 올랐어요. 모여서 합숙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하잖아요? 냄비가 뜨거워서 스웨터를 잡아당겨 손잡이를 잡고 그랬는데, 남자들이 보기에는 터프한 게 놀랍고 신선했나 봐요. 그 때문에 홀딱 반한 남자들도 많았어요. (웃음) 솔직히 인생을 돌아봤을 때 좋았던 것은, 당시 저는 제가 그렇게 예쁜지 몰랐어요. 나중에 그때 사진을 돌아보니 예쁘고 매력적이더라고요. 중요한 건 그때는 그걸 몰랐다는 사실이에요. 제 언니가 워낙 예쁘고 매력적이어서 저는 외모경쟁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실력 경쟁만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는 거예요. (웃음) 그때부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요. 서울 공대 다니면서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것을 배웠던 것 같아요. 항상 몇천 명 무대에 여자 몇 명이었기 때문에 주목의 대상인 것은 확실했어요. 거기서 별로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그거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대학 생활은 불행했어요. 대학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죠.   당시 대학 다니셨던 분들은 암흑시대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시대적 상황이기도 하고 당시 건축 교육의 수준 때문이기도 하고요. 연애하고 여행하고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학교가 일 년 중 반은 문을 닫아서, 아예 안 다녔어요. 공대는 심하게 데모하지도 않았어요. 남자들은 선배들에게 불려가서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여자는 시켜주지도 않았어요. 네트워크고 뭐고 그런 거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어디에 관심 있으셨나요? 가장 재밌었던 건 도시에 관한 책을 접했던 것이에요. 대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조교 하나가 저를 부르더니 몇 가지를 이야기해줘요. 그림 트레이스를 많이 해봐라, 사진 책 보면 평면을 그려봐라, 영어 원서를 읽으라고 하면서 당장 세 권을 추천해주는 거예요. 그중 하나가 찰스 젠크스가 쓴 <Architecture 2000 and Beyond>라는 유명한 책이었어요. 바로 종로서점 가서 원서를 샀어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2학년 학생이 그걸 보느라 정말 혼났어요. (웃음) 당시 선배로부터 받은 조언은 그거 하나만 기억나요. 덕분에 당시 원서를 많이 찾아 읽었어요. 미국문화원에서 도서관을 운영했는데, 학교가 하도 노니까 그곳에 가서 책을 읽었어요. 미국의 1960~70년대가 끓어오르는 혁명 시대였잖아요. 그때 매우 많은 저작들, 특히 도시사회학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어요. 두 가지 주제에 심취했는데, 도시사회학 분야의 주제와 ‘이상 도시(Ideal City)’에 대한 거예요. 이상 도시에 대한 미국 책은 낱낱이 읽었어요. 제 머리가 일찍 깬 거예요. 반면 건축과를 가자마자 너무 싫었던 것은 건축의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거였어요. 작가가 일필휘지로 그려내거나 하는 판타지가 무척 못마땅했던 거예요. 그런 부분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건축과를 잘못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도서관에 다니면서 다시 사회학과를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도시사회학, 문화인류학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요. 당시에는 학교가 너무 재미없었고, 설계라고는 배운 적이 없어요. 학교가 어떤 지경이었냐면, 어떤 교수는 ‘미국 주택교통부 장관이 여자 출신이다’ 이러더라고요. 요즘 같으면 손들고 뭐든 말했겠지만 당시엔 속으로만 ‘아휴’ 했어요. (웃음) 또 어떤 교수님은 나만 들어가면 ‘여기 앉아요~’하며 먼지까지 털어주시면서 완전히 레이디 취급하는 거예요. 솔직히 저는 서울대에서 배운 게 없어요. 그때는 대학 졸업하면 그저 일하면 되는가 보다 하고 교수님이 소개해 준 설계사무소에 취직했어요. 거기서 처음으로 토시를 끼고 구조설계도를 그리는 걸 배웠어요. 처음 구조설계도를 그릴 때는 정말 신기했어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설계사무실은 어쨌든 일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떻게든 배울 수가 있었죠. 나중에 이광노 교수님이 라멘도 그리는 저를 보고서 ‘어, 이 자식 봐라’ 하더라고요. (웃음) 그곳도 몇 달 후 관두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혹은 선배가 하는 새로운 기획팀에 가서 일도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난 후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생 절반이 다 대학원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때까지 대학원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정말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는 거죠. 그러다가 다들 대학원에 가 있는 것을 보고,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 분위기도 조금 나아져 있어서 1년 사회생활 하다가 가게 되었죠. 대학원 가서는 꽤 알차게 공부했어요. 주종원 교수님(도시설계 전공)을 지도교수로 선택했고 프로젝트도 꽤 했고요. 졸업 후 박정희 대통령 말기 때 KIST에 생긴 신행정수도 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설계사무소에서 꽤 재미있게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가 1977년에 쓴 소셜믹스(social mix)에 대한 논문을 보고 당시 강홍빈 팀장이 전화 걸어서 인터뷰를 했어요. 일종의 스카우트를 한 거죠.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① 지난 2018년 5월, 김진애 박사를 만났다. 그가 2000년에 설계했던 인사동길에서다. 검은 전벽돌 바닥과 골목을 상징했던 많은 장치는 사라졌고 인사동길의 성격도 달라졌지만, 석물과 간판, 골목길 안의 이야기들은 이제 인사동길의 일부가 되었다. 표구방과 필방 대신 호객을 위한 입간판과 플랜카드가 내걸린 인사동길 사이로, 김진애 박사의 힘 있는 목소리가 흘렀다. 서울대 공대의 유일한 여학생, 도시건축가, 기획자, 편집자이자 발행인, <타임>지 선정 차세대 리더 100인,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에서 국회의원, 그리고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까지, 김진애 박사를 소개하는 수식어는 전문가로서 폭넓은 행보를 보여준다. 도시와 건축 분야의 전문가로서 그가 보여준 연구와 설계, 그리고 전시와 출판도 의미 있지만, 건축기본법과 건축도시공간연구소를 만든 것은 중요한 성과 중 하나다. 국회의원으로서 4대강 곳곳을 누비며 전문가의 역할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성 전문가의 아카이빙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김진애 박사가 던진 방향은 명확했다. 자신의 프로젝트를 강조하기보다 전문가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는 것. “전문가의 역할은 왜 필요한가? 또 그런 역할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여러분 앞길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있는가?” 건축계의 영웅적 서사와 과잉된 자아를 비판하면서도, 인터뷰 곳곳에는 건축이 외연을 넓혀 더 넓은 세계와 만나길 바라는 바람이 묻어 있었다. 건축과 도시 분야의 프로페셔널을 말했던 ‘자라기 시리즈’는 이제 한 사람이 어떻게 전문가가 되고 성장해 시민이 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자신의 토대를 만들고 있는 것은 건축이지만, 세상을 향해 큰 걸음을 걸어온 그의 세상은 도시를 넘어 사회와 전방위로 만난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인사동길에서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본 라디오 애청자들, 그의 책을 좋아한 팬들이 악수를 청해왔다. “요즘은 귀엽다는 소리를 들어야 성공을 한 거예요. (웃음)” 전문가의 엄격함은 종종 까칠함처럼 보이지만, 그런 긴장감을 무너뜨리는 김진애 박사의 필살기는 ‘귀여움’이다. 여전히, 지금도 김진애 박사는 인생이 주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다.
OpenStudio 경영위치건축사사무소, 김승회 10월 21일 2:00PM
Interview “수많은 관계가 만들어 낸 삶의 형식”, 건축가 김승회 오픈하우스서울 2018의 미니 인터뷰 두 번째는 서울시 교육청 건축 자문을 통해 ‘꿈을 담은 교실’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건축가 김승회(서울대학교 교수)를 만났습니다. 공공 영역에서 기여한 건축 프로젝트, 또 건축과 도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할 지, 또 건축의 근본적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보건소를 비롯해 공공 영역에서 여러 의료시설을 설계하셨는데, 최근 아프리카의 병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이번 프로젝트가 특히 의미가 깊을 듯해요. 공공의료시설은 시민의 건강과 행복에 가장 깊이 연관된 시설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학교와 더불어서요. 과거에 보건소, 의료시설을 하면서 공공보건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는데 그게 알려져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 공공보건 병원 설계를 맡게 됐어요. 그곳 시민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열악한 병원들의 사정을 직접 보면서 그들이 유지 관리 하고 스스로 가꿔나갈 수 있는 지속가능한 체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직접 아프리카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의사나 병원장에게 어려움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했는데 어떤 병원장은 막 울어요. 그 누구도 그런 질문을 안 했다면서요. 환자는 몰려오고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고, 인력도 없고, 해결해 나갈 방법이 너무 없어서 답답하니까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의사선생님이 막 울더라고요.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런 분들이 좀 더 좋은 여건에서 환자를 볼 수 있고, 환자들도 동네 가까운 좋은 시설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일을 한 게 보람되죠. 그것이 90년대 제가 개업했을 때, 품었던 이상과도 잘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공간에서 어떤 것을 경험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신경쓰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건축은 삶의 형식이다(Architecture is life form)’라는 모토로 건축가의 삶을 살고 싶어요. 이것은 서양의 전통적인 ‘아키텍처’의 정의와는 상당히 다르거든요. 보통 아키텍처라고 하면 빌딩을 넘어선 이념을 갖고 있다고 정의하는데, ‘삶의 형식’이라고 하면 건축을 훨씬 더 바닥으로 끌어내린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아프리카든, 후암동이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형식이 있잖아요. 그것이 고스란히 건축 안에 잘 작동하는 것(work), 그게 가장 기본이고 시작인 것 같아요. 또 건축가이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빌딩 그 이상의 공간에 대한 야망도 있어요. 그 두 가지를 같이 이루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건축가로서 새로운 공간감, 새로운 물성에 대한 제안, 이런 것들이 삶의 형식(life form)과 부합이 되는 게 좋잖아요. 그 접점을 찾는 게 참 쉽지는 않아요. 늘 고민하면서 그 속에서 결과물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도시와 건축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이전보다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오픈하우스서울을 통해 건축물을 감상할 때,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 일반인에게 제공되는 건축 이야기들이 상당히 파편적인 경우가 많아요. 앞서 말한 삶의 형식이라는 것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잖아요. 건축도 역시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건데, 매체를 보면 그 관계에 대한 담론보다는 시각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주를 이루어요. TV나 모니터를 통해 전달되는 이미지가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에게 오는 클라이언트들도 관계에 대한 얘기는 없고,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 달라, 그와 비슷한 느낌을 해달라고 해서 오히려 힘든 경우가 있어요. 건축을 보실 때, 시각적인 이미지 외에 집이 길과 어떻게 만날까, 이 공간에서는 밖의 어떤 것들이 보일까, 밖에서는 이 집이 어떻게 보일까,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갈 때 어떤 것을 느낄지, 촉각은 어떠한지 등 그런 풍부한 것들을 많이 느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건축에서 중요한 게 뭐냐라고 한다면 촉각인 것 같아요. 건물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어요. 직접 가면 촉각이 느껴지거든요. 예를 들어, 음식이 존재감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온도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리 사진이나 TV로 사람들이 먹는 걸 봐도, 음식의 온도는 느끼지 못하잖아요. 건축에서는 그게 촉각이라고 생각해요. 사진으로는 보고 느낄 수 없는 것을 직접 가서 발바닥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는 촉각적 경험은 좋은 것 같아요. 그 이전에 건축은 관계의 예술이니까 왜, 어떤 관계가 이곳을 만들었는가를 보시면 좋겠어요.   서울시 교육청의 건축 자문을 통해 교육 시설 개선 프로젝트를 꾸준히 해오셨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공간을 변화시키면서 의미가 크셨을 것같아요 지난 2년 반 동안 열심히 해왔고 좋은 결과를 만든 것 같습니다. 신문이나 TV에서도 많이 나오고 소개도 됐는데, 지난 달로 그 프로젝트가 끝나서 이제 정리를 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성공적으로 된 것 같아서 오랜만에 공공의 일을 하면서 만족스럽게 끝난 것 같아요. 체계가 완전히 잡혔기 때문에 앞으로도 잘 돌아갈 것 같습니다.   공공 프로젝트는 공공기관에 건축에 대한 이해를 얻는 것부터 어려움이 많은데요. 초반에 건축의 가치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은 부분일 것같습니다. 초반에는 힘들었죠. 교육청 관련 공무원들이 초반에는 저를 보고 ‘저 사람, 뭐야?’ 하는 분위기였는데, 다행히 교육감 님이 건축에 대해서는 김승회 교수가 교육감이라고 생각하라며 힘을 실어 주셨어요. 한편으로는 교육청의 경우 시설 담당이 완전 비주류예요. 교육청은 교사가 중심이잖아요. 공무원들에게 이건 중요한 일이고 당신들에게도 좋은 일이다라고 설득했어요. 그래서 성과가 나오는 걸 보니까 다들 힘이 됐죠. 결과도 좋고 생각보다 잘 따라준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여러 일들은 생기겠지만, 짧은 기간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변했어요. 여전히 보수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크게 보면 변해가고 있고 대세는 그렇게 될 것 같아요.   교육청 프로젝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역시 꿈을 담은 교실(꿈담교실)실이죠. 초등학교 교실인데 원래는 중학교 몇 개, 고등학교 몇 개 정도 고치자는 내용으로 입안되어 왔어요.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1학년, 2학년만 하자고 했어요. 왜냐하면 초등학교 쪽 장학사들과 이야기 하다 보니, 유치원이라는 좋은 공간에 있다가 그보다 열악한 학교로 오면 아이들이 더 힘들어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힘든 게 1학년 교실이었죠. 또 1, 2학년 초등학교 교육과정이 많이 변했기 때문에, 기존의 교실로 교육을 하기는 너무 어렵다고 했어요. 그래서 모든 예산을 거기에 몰았어요. 그건 잘 한 것 같아요. 중요한 건 그래프가 아래를 향하느냐, 위를 향하느냐인데, 어쨌든 더 나은 방향으로 전체적인 흐름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경영위치의 이 ‘소율’ 건축물을 합리적이고 최적화된 하나의 시스템으로 설명하셨는데요. 건축의 합리적인 시스템이 갖는 가치에 대해 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건축이 개인의 특성을 분명히 닮는다고 생각해요. 건축가의 성격이나 취향이 암암리에 담길 수밖에 없거든요. 가치관도 그렇고요. 동시에 건축주의 입장도 담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언어나 윤리는 매우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언어나 글자가 필요한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요. 왜냐하면 우리 삶이 굉장히 다른 것 같지만, 또 서로 공유하는 것도 많고 공통적인 게 참 많다고 생각해요. 건축은 특이성도 내세워야 하겠지만 동시에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기반으로 만들 때에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누릴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설계할 때 보편적인 체계나 관점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져요. 어떻게 빌딩이 합리적으로 도시와 관계를 맺는가를 주로 봐요. 예를 들어, 이곳 경영위치 건물의 경우 1층이 개방적이잖아요. 합리적인 이유예요. 1층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보이고 만나는 곳이니까요. 그리고 주변과 적절한 높이를 가져야 하죠. 주변이랑 어울려야 하잖아요. 혼자 우뚝 있으면 주변에 그림자가 지고 불편해지겠죠. 할 수 있다면, 주변의 적정한 공간이나 건물의 크기들을 존중하는 걸로 가야해요. 공사를 할 때 10, 20년이 지나도 하자 없이 잘 유지될 수 있게 하는 것도 합리적인 부분이죠. 원론적인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자면, 건축물이 한국에 있기 때문에 갖는 관계가 있어요. 한국 사람들 또는 우리 도시가 갖는 특징이 있거든요. 골목이 있다든가, 필지가 불규칙하게 생겼다든가, 주변에 산이나 강이 있다든가, 이런 특성에도 초점을 맞추면서 그것이 갖는 관계를 찾아보는 거죠. 가령 산을 등진다든가 바라본다든가 또는 좁은 건물에 어울리게 건물의 스케일을 너무 크지 않게 좀 더 분절한다든가 등등 조금씩 하다보면 건축적인 언어들이 생성되는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 즉 1층은 열려야 하고, 주차가 돼야 하고, 지하층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많이 파야 하고, 위에서는 철저하게 도시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다 보면 지하부터 위로 올라가는 구조 체계가 다양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든가 하죠. 그 속에서 일반적으로 편한 해법을 찾는다든가, 어떤 때는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도시, 어떤 때는 평면의 형식에 대한 것으로 발전해 나가죠. 그게 깊어지면, 어떤 디자인 이론(theory) 내지는 건축방법론이 되겠죠. 제 경우 ‘내가 좋아서 했다. 특이하게 형태적인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만으로는 만족이 안 돼요. 물론 그게 어필하기는 쉬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심플하면 더 전달이 빠르고 간단하게 잘 되거든요. 그런데 그런 게 제게는 의미도, 재미도 없어요. 감각 이상의 것, 즉 사람들은 삶의 형식을 찾는데, 그것은 수많은 관계들이 만들어내는 형식이거든요. 건축도 결국 여러 형식들, 삶의 진실과 형식을 수정해 가면서 만들어지거든요. 솔직히 어려운 이야기죠. 보편성에 대한 이야기는 건축가 사이에서도 논쟁적인 소재지만, 보건소, 병원을 많이 짓고, 또 학교 프로젝트도 많이 하면서 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어요. OHS 진행 임진영   정리 이경희
OpenStudio SKM ARCHITECTS, 켄민성진 10월 20일 11:00AM
OpenStudio guga urban architecture, 조정구 10월 19일 5:00PM
Interview “모든 도시의 매력은 공존”, 건축가 켄민성진 오픈하우스서울 2018에서는 미니 인터뷰를 통해 오픈하우스서울과 함께 하는 건축가를 만나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건축가 켄민성진을 만나 지난해 오픈한 부산 아난티 코브에 대한 이야기,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생각을 듣습니다. 오픈하우스서울 2018에서는 SKM Architects 오픈스튜디오와 준오 아카데미 오픈하우스를 통해 건축가 켄민성진을 만납니다.     지난해 오픈한 부산 <아난티 코브 Ananti Cove>가 많은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공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컸고요. 아난티 코브에서 보여준 휴식 공간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어떤 공간 경험을 주고 싶으셨는지요.   <아난티 코브>는 하나의 호텔이나 리조트를 넘어 부산이라는 도시에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공공장소를 제공하고자 했어요. 프라이빗한 콘도미니움도 있으면서 세미프라이빗한 힐튼호텔도 있고, 퍼블릭한 성격을 띠는 아난티 타운과 그 앞엔 공공 공원이 공존하고 있죠. 부산 시민은 주말에 가서 커피 한잔하면서 책도 보고, 다양한 종류의 음식과 이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요. 도시에 새롭게 가볼 수 있는 장소를 하나 더 중첩한 거죠. 반면 호텔 투숙객 입장에서는 사적인 공간을 즐길 수도 있고요. 호텔 리조트라는 기존의 프라이빗한 거대한 장소에 여러 성격의 공간이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 저희의 주요한 도전이었어요. 저는 모든 도시의 매력을 ‘공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시간이 중첩되고 켜가 계속 생기고 포개지는 것처럼, 아난티가 부산에 또 하나의 시간과 장소, 기억을 더할 수 있는 곳이길 바랐죠. 그 켜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어야 하고요. 저는 어떤 건물이든 그 지역에 켜를 하나 더한다는 생각으로 건축 설계를 하고 있어요.   아난티의 계단, 지하, 1, 2층의 숍의 경우, 기능적으로 끊임없이 혁신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근린생활의 모습을 반영하려 했어요. 5성급 호텔이지만 1층을 시민에게 열어서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든 거죠. 대부분 5성급 호텔들은 프라이빗하잖아요. 그에 비하면 굉장히 열려 있고, 그런 면에서 다양한 쉼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쉼이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죠. 모든 건축가가 하는 노력인데 저평가받는 것 같아요. 건축가는 엄청난 혁신을 보여주기도 하고 공적인 작업도 하지만, 일상의 삶에서 건물을 더 낫게 진화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한다고 생각해요.   소장님과 아난티 모두 휴식의 의미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신 거로 알고 있어요. 소장님이 생각하시는 휴식은 무엇인가요.   휴식은 삶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쉼일 수도 있고, 집에서 온종일 누워 있는 것도 일탈이고 쉼이죠. 이제는 쉼이라는 용어 자체가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현대 사회의 반복되는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일탈과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가 많은 도시가 풍족하다고 생각해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멋진 곳, 걸을 수 있는 곳, 자전거 탈 수 있는 곳, 미술관 등 만약 오늘 하루 일을 안 한다면 가보고 싶은 곳이 많은 도시요. 사람들이 뉴욕 같은 도시를 가고 싶어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의 욕구를 다양하게 수용할 수 있는 곳, <아난티 코브>에서 주요하게 실현하고자 노력한 부분이에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거죠.   아난티 부산의 경우, 서울에서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다는 것도 중요했어요. 많은 사람이 외국 나가서 관광을 즐기는데, 대부분 한국에는 왜 그런 멋진 곳이 없냐고 해요. 저희가 아난티와 계속 의미를 둔 것은 그 부분이었어요. 외국 가는 비행기 표 값으로 <아난티 코브>에서 3박 4일 즐기는 것이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외국인 관광객을 한국으로 유치하는 것도 의미가 있고요.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사계절 때문에 겨울에는 즐기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부산은 온천이 있고 여기에 쉼과 여행, 독서, 음악, 자전거, 바다 산책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길 수 있는 것 같아요. 세상은 항상 변하고 우리 삶은 진화하므로 쉼도 진화하죠. 선진국일수록 쉬는 방식도 다양해져요. 그런 고민을 건축주와 했던 것 같아요. 우리에게 쉼을 줄 수 있는 장소란 과연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쉴 수 있는 장소는 다양성을 주는 장소인 것 같아요.   아름다운 공간미가 회자되고 있는데,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시도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소장님이 좋아하는 공간도 궁금해요.   여러 장소가 있지만 몇 가지 건축적 시도가 있어요. 먼저 콘도 쪽으로 들어오는 자동차 드롭 장소를 지하에 만들었어요. 힐튼호텔은 지상에 있고 지하에 콘도 드롭존을 만든다고 했을 때 다들 왜 콘도의 얼굴을 지하에 놓느냐고 했어요. 지하지만 멋지게 만들자고 제안했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많은 지상 공간을 자동차가 점유하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아난티 타운인데요. 보통 호텔은 지하에 아케이드 형식의 상점이 많잖아요. 그것들을 지상으로 꺼내서 작은 건물들로 만들고, 바다 풍경을 보게 해주면서 일반인에게 오픈했어요. 많은 분이 이런 방식의 상점은 장사가 안될 거라고 했어요. 그래도 우리가 한번 해보자 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오기 시작한 거죠. 이제는 소비의 자기 주도적인 성향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강제로 물건을 팔려고 해서 팔리는 게 아니라, 방문하고 싶은 곳을 만들고 선택권을 주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사람들이 그 공간을 즐길 수 있고 좋아하게 만들면 좋은데 역설적으로 힘든 일이죠. 아난티 타운은 그냥 사람들이 방문하고 싶은 공간을 만들고자 했어요. 그래서 일반적인 쇼핑몰에 대한 모든 통념, 가령 서비스 동선은 뒤에 있어야 한다는 등의 공식을 무시했어요. 서비스 동선 때문에 공간이 불필요하게 커지거든요. 멋진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이 거기 오고 싶게 하자 했고 장사가 되든 안 되든 그 공간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어요.   바닷가이기 때문에 1층을 공공에 열어주고자 했고 이를 위해 프라이빗해야하는 호텔의 로비는 최상층으로 올려보냈죠. 스카이 로비를 두려면 인력이 더 필요하지만 말이에요. 부산에 새로운 레이어를 더해간다는 느낌으로 ‘스카이 로비란 무엇인가?’, ‘상점은 어떤 성격이어야 하는가?’, 하나하나 질문을 하면서 채워갔어요.   아난티 프로젝트가 알려지다 보니, 소장님의 작업이 리조트 프로젝트로만 주목받는 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소장님이 애착을 가지는 프로젝트는 어떤 게 있을까요? 평당 220만 원 정도의 매우 낮은 공사비로 지었던 엠파크 허브 매매단지가 있어요. 한국에서 가장 큰 조립식 콘크리트 건물이고요. 금강산에 지은 아난티 클럽하우스도 한국에서 가장 큰 조립식 목조건물인데, 구조적 실험을 하면서도 공사비를 맞추는 게 중요한 콘셉트였어요.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공간적인 임팩트를 가져가는 것이죠. 너무 시각적 임팩트만 있고 기능이 충실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좋은 건축물이 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결국 건축물은 특정 개인에 의해서 평가되기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받게 되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요. 부산 아난티 코브 건물이 30도 정도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외관을 중요하게 생각한 게 아니에요. 개별 발코니마다 수영장이 있기 때문에 발코니에 햇볕이 드는 것이 매우 중요했어요. 테라스가 수직으로 올라가면 수영장에도 방에도 햇볕이 안 들기 때문에 리조트에서 기대하는 따뜻한 햇볕을 느끼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건물을 뉘면서 야외 테라스에서 햇볕과 바다를 즐길 수 있게 했죠.   아난티 프로젝트에서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도 있지만 하나 사서 오래 쓰고 클래식으로 남한테 물려주는 것이 있죠. 저희는 클래식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해요. 디자인, 철학, 총체적 맥락이 맞을 때 비로소 클래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것은 만들어지자마자 ‘멋지네!’라고 반응하지만, 곧 소비되고 잊혀지죠. 우리는 아난티를 통해 클래식을 만들려고 하죠. 사람들도 그런 가치에 의미를 두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철학과 공간과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면서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도시에서 긍정적인 일원이 되는 그런 건축물요. 그게 제가 가진 목표인데 사실 쉬운 건 아니에요. 그런 마음을 갖고 가는 거죠. 100년 전에 나온 어떤 램프는 현재의 사무실에 놨을 때 어색하지 않아요. 그런 퀄리티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항상 생각해요.   저는 도시도 그렇게 보거든요. 역사와 맥락을 보면 무엇을 보존하고 싶은지 알잖아요. ‘아 저건 부수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클래식이죠.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은 유명 건축가들이 한 거예요. 유명 건축가들이 했다고 해서 보존하겠다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이 생기는 거죠. 나중에 사람들이 ‘이 건물을 보존해야겠네?’ 하는 마음이 들면, 그리고 그런 건물이 많아지면 저는 풍족한 도시라고 생각해요.   더 나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도 지금부터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보존할 것하고, 없앨 것은 없애다 보면 만들 수 있어요. 더 중요한 건 지금부터 지어지는 건물 자체를 하나하나 도시의 일원이라는 마음으로 지어야겠죠. 삶도 그렇잖아요. 당신의 건물도 도시의 일원이라는 이야길 하고 싶어요. 도시의 기록에는 건축가의 이름도 남지만, 건축주의 이름도 항상 같이 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영향력 있는 행정가이고 꼭 한 가지를 해야 한다면 그 기록을 남기도록 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난티 코브>에는 잘 보이는 광장에 그 기록을 넣었어요. 건축주의 이름도 물론 있고요. 그렇게 하면 많은 건축주가 달라질 것 같아요. 건축물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 도시 역사에 켜를 더하는 작업이거든요. 건물의 등기부 등본을 떼었을 때, ‘건축주 누구와 건축가 누가 언제 지은 거다’ 그리고 그걸 허가해준 공무원도 같이 기록되면 많은 것이 바뀔 것 같아요. 건물이 도시의 한 부분이고, 하나의 켜를 더하는 거로 생각하면 건물 하나하나가 중요한 거죠.      우리 도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소장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가 근시안적으로 바라본 것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조급할 필요 없어요. 왜냐면 도시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중첩된 켜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금 만들어 가는 건축물이 새로운 켜를 더해 나가고 있는 것이죠. 서울은 큰 켜로 한강이 있고 북한산, 관악산이 있고 경복궁이 있고 창경궁, 시청, 청계천, 서울역이 있고 지하철 등등이 있죠. 많은 사람이 쓰는 공공 건축과 인프라를 잘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건축가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결국 건축은 우리의 진화하는 라이프스타일의 시대성을 반영하는 거죠. 그 화두는 영원한 거고, 우리는 끝없이 변화해요. 한시라도 가만있지 않잖아요. 사람이라는 존재가 참 재미있는 게,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원해요. 양면성을 갖고 있죠. 애증의 관계 같아요. 시간의 신이 절대적 존재예요. 그건 이길 수가 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건 소멸하지만 시간이 허락하니까 우리가 존재하는 거죠. 하루살이에게는 신이 하루라는 시간을 준 거고, 인간에게도 한정된 시간을 줬지만, 산과 바다는 1만 년도, 지구에는 1억 년도 주어지죠. 우리는 시간과 역사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데 그걸 잊으면 사람들이 오만해지고, 돈과 명예에 집착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창의적인 우위(creative edge)를 잃는 것 같아요. 크리에이티브는 세상사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사물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 같아요. 예술가 집단이 가장 그러한 집단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사회에 신선한 자극을 던질 수 있는 거고요.   자신의 맥락을 찾아가고 자기가 살아가는 삶과 추구하는 삶과 시간과 공간, 도시와 건축을 보는 맥락이 통일되고, 그것을 본인이 디자인하는 건축물에 충실히 반영하려고 노력할 때 좋은 건축가가 될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드물죠. 인간의 삶과 도시의 공통점은 좋건 싫건 끊임없이 레이어가 계속 중첩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도시를 보는 관점은 그 계속되는 켜에 있어요. 도시에서 내가 짓는 건물도 하나의 켜가 되는 거고, 건축주도 그걸 알아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전반적으로 영향을 주니까 모두 플라스틱을 줄이려고 하잖아요. 행동으로 이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잖아요. 서울시에 지어지는 건축물도 하나의 구성원이 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좀 더 풍부한 걸 하고 싶지 않을까요? 사람은 길게 100년을 살지만, 건축은 몇백 년 존재하며 도시의 한 구성원으로 켜를 만들고 있으니,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건축물을 설계하고 만들어 간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요. OHS  진행 임진영   정리 이경희  사진 SKM Architects 제공  
OpenStudio 조병수건축연구소, 조병수 10월 18일 4:00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