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Studio 서로아키텍츠, 김정임 10월 17일 5:00PM
OpenStudio 원오원아키텍츠 스튜디오, 최욱 10월 17일 2:00PM
OpenStudio TRU건축사사무소, 조성익 10월 16일 5:00PM
OpenStudio 삶것건축사사무소, 양수인 10월 14일 2:00PM
OpenStudio 운생동건축사사무소, 장윤규, 신창훈 10월 14일 2:00PM
OpenStudio 유현준건축사사무소, 유현준 10월 13일 2:30PM
Special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④ 다공성, 구축술, 기하학의 중첩   춘원당의 경우 한의원의 오랜 역사, 종로의 복잡한 뒷골목, 모텔 밀집 지역에 대응하는 방식 등 여러 면에서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특히 한약방의 탕전기를 끄집어내자고 설득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건축가가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을 통해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걸 보여줬다고 생각했거든요. 기획자로서 건축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으로 접근하는 건 제가 잘하는 일인 것 같아요. 다만 제안을 할 때는 프로젝트가 날아갈 것을 각오해야 해요. 결정은 클라이언트의 몫이니까요. 처음 탕전기를 전면에 내세우자고 제안했을 때, 클라이언트가 도면을 보고는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 힘드니 오늘은 이만하자’고 하셨어요. 나중에 이야길 들어보니 굉장히 깜짝 놀라셨다고 해요. 당시 저는 프로젝트가 날아갔다고 생각했어요. 그 안은 열광하든 아니든 둘 중 하나지, 중간의 타협 지점이 없는 아이디어니까요. 그런데 며칠 후에 전화가 와서 ‘나에게도 힘든 결정인데, 생각해보니 이게 맞는 것 같다’라고 하셨어요. 그분도 이해하신 거예요.   그 안은 시각적 투명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투명성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 무렵에 한방계가 필요로 했던 것인데, 사회적으로 한방에 대한 불신이 커질 때였거든요. 그러니까 그분도 ‘이것은 우리 집안이 아니면 하기 힘들다’라는 생각을 하신 거죠. 7대째 한방을 해 오던 집안이었으니까요. 일단 안을 받아들이고 난 이후에는 그 아이디어가 구현될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을 해주셨어요. 결과적으로 보이는 건 세련된 기계지만, 실현하는 과정은 아주 지난했어요. 그 약 다리는 기계, 즉 탕전기는 남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어서 원래 모습은 그리 비주얼하지 않았어요. 탕전기를 만드는 회사가 대구에 있었는데 거기 분들이 서울에 오셔서 우리 도면과 그분들 제작도를 펼쳐놓고 함께 회의했어요. ‘이 재료 바꿀 수 있냐, 이거 이렇게 바꿔도 되냐’ 하면서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계가 갖는 자연스러운 거친 느낌, 날 것의 느낌을 없애거나 패키지 디자인을 하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보는 사람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고 시각적 감흥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지금도 제가 건축가로서 갖는 큰 강점은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다는 것 같아요. 만약 저에게서 그런 걸 활용하지 못하면 건축가로서 제 능력의 일부만 쓰는 거죠. 본인이 뭘 하고자 하는지 확고하게 정해져 있고, 심지어 답도 정해져 있는 건축주에게는 그냥 친절하고 효율적인 디자인 서비스를 해드려야 하는데, 그건 별로 자신이 없고요. 뭘 하고 싶은지 확실한 건 좋은데, 다만 어떤 방식으로 하면 좋을지는 열어줘야죠. 그래야 건축가가 잘릴 각오를 하고 용기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같은 경우가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에도 있었죠. 훈련하는 공간과 숙소가 같은 공기(air volume)를 쓰도록 하겠다는 게 핵심이었는데, 그런 형식은 선례가 없었으니까요. 그런 제안은 받아들이는 건축주의 용기도 필요하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건축가의 노력이 엄청나게 필요합니다. 아이디어가 작동되어야 하니까요. 항상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저는 그런 기회를 많이 얻길 원해요. 처음에는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즉흥적인 생각이나 감성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나름의 관찰과 일련의 합리적인 생각 끝에 나오는 이야기이니, 그게 구현이 되면 결과가 즐거운 거죠. 결국 제가 관심 있는 것은 건축이란 것도 연장하면 기계인데, 이 기계를 어떻게 인간적으로, 인간과 공존할 수 있게 하느냐인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그 두 건물에서 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회가 또 오기를 바라죠.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처음으로 광활한 대지에 나갔다’는 표현으로 그 프로젝트의 성격을 설명하셨죠. 조건 많은 도심 골목이 아닌 곳에서 새로운 질서를 설정하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 일종의 직주근접 프로그램인데 프로젝트 초기의 접근 태도, 그 공간을 만들어갈 때 주의 깊게 고민하셨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사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프로젝트에 비해 두 배의 시간이 걸렸어요. 설계를 두 번 했거든요. 천안 시청 옆 부지를 정해 설계를 마치고 착공 직전까지 했다가, 부지가 바뀌었어요. 사실 그때 내색은 안 했지만 앞이 캄캄하긴 했어요. 다행히 몇 개월 후 기회가 다시 왔어요. 그때 이전 설계안을 다시 보면서 내적 크리틱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좀 더 객관적으로 내 설계를 보게 된 거죠. 보통 내 설계를 객관적으로 보는 순간, 건물은 이미 지어진 거잖아요. 그런데 머릿속에서 원래 설계했던 건물의 이미지와 생각의 잔상이 남은 상태에서 다른 대지에 설계하니까 또 다른 생각을 할 좋은 기회가 생긴 것 같아요. 현대캐피탈 쪽에서도 당연히 원래 부지에 설계했던 내용을 조금 손봐서 새 대지에 잘 앉힐 거로 생각했던 것 같고, 저도 그렇게 해보긴 했어요. 그런데 뭔가 미진한 거예요. 실무적으로야 효율적일 수 있고 세부적인 어휘(vocabulary) 같은 것은 물론 가져올 수 있지만,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개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단면을 보고 있었어요. 배구는 공간을 넓게 쓰는 스포츠이다 보니 코트의 천장이 높아야 합니다. 최소 8m, 보통은 16m 정도 있으면 된다고 해요. 그런데 코트 주변은 그렇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요. 그러면 거기다가 숙소를 넣으면 어떨까 생각했지요. 이렇게 코트와 숙소가 같은 공기(air volume)를 쓰면 무슨 상황일까 생각하다 보니 오페라하우스와 같이 가운데는 높고 주변에는 발코니석이 있는 것 같은 구조가 되더라고요.   훈련공간과 숙소가 한 건물에 있는 것에 대해 사용자의 부담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나왔을 것 같아요. 그 안을 제안했을 때 가장 열광적으로 받아들이신 분은 김호철 감독님이셨어요. 본인과 코치진의 가장 큰 고민은 선수들이 이동하면서 감기 걸리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운동능력은 좋으나 의외로 면역력이 약하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성이면 심리적으로 좀 답답하고 압박감을 줄 수 있지 않겠냐고 우려하셨죠. 그 부분은 저희도 고민하던 내용이라 저층부는 구심적으로 풀지만, 상층부는 주변 경관이 좋으니 밖을 향해 발코니를 내고 원심적으로 풀려고 생각했어요. 숙소에 있는데 코트에서 보이거나 하면 안 되니까요. 이렇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구심에서 원심으로 전환했습니다. 그 건물 짓고 나서 비평 글을 몇 번 받았는데, 예상대로 판옵티콘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전형적으로 도면만 보고 도상학적으로만 이해한 결과죠. 그 건물을 직접 경험해봤다면 판옵티콘이라고 이야기하기 힘들어요. 왜냐하면 판옵티콘은 중심에서는 주변을 바라볼 수 있지만, 주변에서는 중심이 안 보여야 하거든요. 즉 감시의 시선이 한 방향이어야 해요. 하지만 여긴 시선이 다차원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공간이라서 상황이 다르죠. 건물이 지어지고 나서 체육계 분들과 인연이 생겼는데 김성근 야구 감독님께 이 건물 도면과 사진을 보여드린 적이 있어요. 그분이 제게 ‘스포츠 시설 설계를 안 해보셨죠?’라고 묻더라고요. 이게 첫 건물이라고 했더니, 어쭙잖게 경험이 있었으면 이렇게 안 했을 거라고 하시는 거예요. 뭔가 근본적인 걸 생각한 결과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관습적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코치진의 고민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요. 물론 저도 매우 반가웠어요.   처음에 선수들도 이 안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선수단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제가 한 이야기는 이것이었어요. ‘내가 집과 사무실을 합쳐 산 지가 10년(지금은 16년)인데, 그로 인한 불편함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서는 이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직업은 70, 80세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스포츠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최대 40세면 은퇴한다. 프로 생활이 길어 봐야 십몇 년 남짓이다. 그동안 힘들게 선수 생활 해서 아주 좋은 결과를 안고 사회로 돌아가는 것과 인간적으로는 재미있게 살았는데 초라한 성적표를 가져가는 것이 있다면, 나는 당연히 전자를 원할 것 같다. 여러분은 어떤가?’ 그리고 이 설계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없다면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 같다고 했어요. 최종 판단은 구단에서 할 테니 저는 최선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전달했다고 했죠. 지금은 그 건물을 어떻게 쓰냐 하면, 합숙하건 말건 선수 개인의 자유에요. 지금의 최태웅 감독님이 그렇게 풀어줬어요. 그런데 본인들이 훈련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가 김종성 건축상을 받았습니다. 이곳은 거대 공간을 싱글 레이어로 지지하는 기술적 성취도 있었죠. 네, 대각선 방향으로 50m에 달하는 거대한 지붕을 트러스 없이 싱글 레이어(single layer)로 해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독일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구조 엔지니어 황경주 교수(서울시립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죠. 당시 우리 사무실에 한 번 와서 그동안 자기가 해온 일에 관해 설명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체육 시설 프로젝트가 있으니 함께 하자고 제가 제안했어요. 황경주 교수와는 통인시장 등 다른 프로젝트도 몇 개 했었는데 이분과 같이 일하면 정말 재미있어요. 마치 건축가하고 이야기하듯이 하면 되는데 다만 이분은 계산을 할 줄 알죠!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지붕 말고도 36m 길이의 벽이 열리는 등 다양한 구조 시스템들이 총망라되는, 구조의 역할이 큰 건물입니다. 저는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고 건축적으로 다루기 위한 노력을 했고요. 아마 그런 점에서 김종성 건축상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았나 합니다. 최근에야 깨달은 게 있는데, 이 건물의 레퍼런스에 대한 것입니다. 특히 중정식 건물의 역사적인 선례들이 염두에 있었어요. 루이 칸의 필립스 엑세터 도서관이나 군나 아스플란트의 스톡홀름 도서관, 심지어 비잔틴 건축인 성 소피아 성당, 중세의 성 같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죠. 하지만 아마도 가장 심연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김종성 선생님의 작품인 <올림픽 역도경기장>이었건 것 같습니다. 거대 경간을 해결하는 방법, 하중이 전달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단순한 외관 속에 복잡한 기능을 담는 과정 등에서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는 <올림픽 역도경기장>에 대한 오마주 적인 측면이 있어요. 같은 스포츠 시설이기도 하구요. 우연 같은 필연이라고나 할까요. 결국 제가 여전히 모더니즘이라는 큰 흐름의 틀 안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계 과정에서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의 기획에 대해 새로운 제안을 많이 하는 편이신가요? 앞서 말했듯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획해서 제안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칼을 쥐여주고 내 목을 들이미는 거예요. 일반적인 디자인은 ‘이거 어떠세요, 저건 어떠세요’라고 제안할 수 있어요. 하지만 기획은 선택되느냐, 잘리느냐인 거예요. 이런 태도는 교보생명의 신용호 (1917-2003) 회장님에게 배웠어요. 제가 개업하기 이전, 김태수 선생님 서울 사무실의 현지 법인장을 할 때인데, 회사의 주된 고객이 교보생명이었어요. 김태수 선생님이 저를 사전에 교육하셨죠. 그분이 ‘호랑이 할아버지’라고요. 다만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한계가 있으니 결국 황두진 소장이 직접 가서 부딪히고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한국에 온 이후에 신 회장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한번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당신이 김태수 씨가 믿고 한국으로 보낸 사람이냐’ 그러셔서 ‘네, 그렇습니다’ 했지요. 그랬더니 1980년대에 지은 교보생명 천안연수원이 그 동안 세월이 많이 지나서 전면 리노베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셨어요.   그 프로젝트를 서울 사무실과 미국 사무실이 같이 하는데, 강당과 공용공간은 미국에서 김태수 선생님이 하시고, 숙실은 제가 서울에서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예전 설계 당시에 김태수 선생님은 기본 계획을 하시고 숙실 등 세세한 것은 교보에서 상황에 따라 현지에서 했다고 해요. 제가 보기에 평면이 좀 이상했어요. 각 방의 화장실이 방 가운데 있어서 전체적으로 ㄷ자 평면이다 보니 침대 위치도 이상하고, 게다가 3인 1실이 기본이더라고요. 방의 갯수는 백 몇 십 개고요. 당시 IMF 사태가 한창일 무렵입니다. 아무리 상대가 교보라도 비용을 생각하면 그 기본 구조를 바꿀 수가 없는 거에요. 화장실 하나 털어서 다시 만드는 것도 엄청난 일이잖아요. 이 ㄷ자 형태를 유지한 상태에서 모형도 만들고 도면을 그려보고 계속 바꿨어요. 계속 퇴짜를 맞았고요. 물론 신용호 회장님은 제게 잘해주셨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저도 불안해지는 거에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용기를 내서 화장실 다 털어버리고 획기적으로 안을 바꾸어 갔더니 회장님이 보시고는 ‘이제 됐군’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 황 소장에게 할 얘기가 있습니다. 화가 나려고 합니다. 이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왜 미리 얘기 안 했습니까’ 하시는 거예요. 임원들의 얼굴빛이 죄 어두워졌죠. 그래서 ‘방이 백 개가 넘어서 이대로 다 뜯어고치려면 비용이 어마어마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이러시더군요. ‘그 고민은 내가 하는 겁니다. 물론 건축가가 그런 고민을 해주는 건 건축주로서는 고마운데, 그 고민 때문에 더 좋은 아이디어를 안 보여주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라고요. 그러면서 크게 격려해주셨어요. ‘당신이 앞으로 오래 일해야 하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서 배워갈 수 있는 건 이거다. 건축주가 결국 판단할 거니까 당신이 믿는 대로 얘기하는 거다. 건축주가 힘들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대안을 찾지 않겠느냐. 좋은 게 있으면 소신 있게 보여줘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리고는 놀랍게도 정말 모든 방을 그렇게 고쳤습니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죠. 당시 제가 서른여섯, 일곱 즈음이었는데, 그 말씀 때문에 그 뒤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신껏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기획가의 역할이 건축가의 영역을 확장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실무적으로 보면 건축가의 작업에 여러 단계가 있는데, 기획, 디자인(개념을 위한 디자인과 실무적 디자인), 인허가, 공사 기간 중 감리, 완공 후 소프트웨어 측면에서의 건물 관리가 있겠죠. 하드웨어 측면의 관리는 집주인이 하겠지만 의미상으로 유통하는 건축가가 한다고 보면요. 냉정하게 얘기하면 기획 단계는 아무나 할 수 있어요. 건축주든 제삼자든 누가 더 잘 한다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세부적인 설계나 인허가는 건축가밖에 할 사람이 없겠죠. 건축 설계에서 남이 가져갈 수 없는 영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지 않아요. 다만 그 남은 부분이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어느 곳에선가 ‘건축가의 게임’이라고 쓰기도 했는데, 최종 프리젠테이션이 끝나면 실시설계 납품하는 과정까지 누가 별로 개입하지 않아요. 바로 그 부분이 ‘건축가의 게임’인데 그게 많을수록 건축적으로 좋아지죠. 그런데 기획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기획은 건축가가 상대적으로 비교 우위에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다만 건축가가 기획을 잘하면 작업에 연속성이 생기니까 좋아요. 건축가가 진심으로 기획의 의도를 최종 디테일까지, 의미 있는 소통까지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만약 건축가에게 기획의 기회를 주지 않으면, 나중에 의미적 소통으로 넘어갔을 때 양손이 묶인 채로 임할 수밖에 없게 되죠. 종종 건축주가 ‘사실 설계는 내가 했고, 그 사람(건축가)은 도면만 그렸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매우 많잖아요? 건축가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인데, 엄격히 따지면 건축주가 기획을 자신이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죠.   건축가가 도면 열심히 그리고, 모형 열심히 만들고, 대지에 열심히 간다고 기획의 능력이 향상되는 것이 분명 아니에요. 거듭 얘기하지만 제가 보기에 건축가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도 초기 단계의 기획을 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과장입니다. 의식적으로 별도의 노력을 해야 해요. 그리고 그런 노력의 과정을 거친 사람이면 건축가가 아니어도 좋은 기획의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획을 하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요. 제가 하게 될 게임의 룰을 제가 쓰고 싶은 거지요. 기획 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매일 같이 훈련을 해야 해요. 우리 사무실에서 16년째 영추포럼을 하잖아요? 사실 기획을 해 보자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저나 우리 사무실의 기획 역량을 테스트하고 키워볼 좋은 기회를 스스로 갖고 싶기 때문이에요. 물론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독서로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겠지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그들과 직접 대화 나누고, 어떤 주제로 누구를 초대할까 하는 고민하는 과정 모두가 기획이니까요. 일단 재미있어서 하긴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기획 능력이 배양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절대로 건축가이기 때문에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고도 건축과 관련한 기획을 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기획은 다들 하고 싶어 하는 거라 경쟁도 치열하고요.      최근 공간 기획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있죠. 중요하죠. 제가 보기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은 굉장히 긴 호흡으로 넓은 스케일의 기획을 한 사람들이에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겠다.’ 이런 걸 제안하는 거죠. 대표적으로 르코르뷔지에가 그렇고, 렘 콜하스도 기획하고 조직하는 게 뛰어난 건축가고요. 다만 저는 개념적으로 큰 성격을 결정하는 것을 잘하는 건축가가 되는 것을 원해요. ‘아이디어는 나에게 다 있는데 그것을 충실히 구현해 줄 건축가 없나’하는 건축주에게 저는 그렇게 좋은 선택이 아닐 거예요. 다만 ‘이 사람의 생각을 내가 높이 사겠다. 일은 당연히 성실하게 할 거다. 그러므로 결과물도 남다르고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건축주와는 궁합이 착착 잘 맞죠. 단순 기능인으로서의 건축가는 매력이 없는 직업이에요. 기획하고 판을 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도시적인 삶-무지개떡 건축 탐사 프로젝트>, <무지개떡 건축-회색 도시의 미래>,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한옥이 돌아왔다> 등 책을 통해 건축가로서 생각을 전하고 도시에 대한 제안을 해오셨는데요. 책을 쓰게 된 계기와 도시에 대한 주제를 잡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결국 그것도 기획에 해당하는 노력입니다. 일단 제가 하는 직업으로서의 건축과 글쓰기는 매우 상보적이라고 생각해요. 건축이 답답하다고 느낄 때가 있죠. 제가 기획하고 설계하고 싶다고 해서 그 기회가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물론 그 기회를 스스로 얻고 싶으면 공모전 같은 것을 해야 하죠. 아쉽게도 공모전은 좋은 아이디어를 원한다기보다는 무난한 아이디어를 세련되게 잘 풀어주기를 원하는 게 대부분이에요. 그렇다면 제가 가진 생각이나 뜻을 건축을 통해서 전달하기 이전에 일단 글로 풀어내는 게 훨씬 효과적이죠. 글은 건축과 달라서 남이라는 존재가 필요 없잖아요. 내가 시작해서 내가 끝내면 되니까요. 그런 게 저는  너무 좋아요.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걸 다 할 수도 없고 기회도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니까요. 만약 글쓰기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제 성격이 온전하지 않았을 거예요. (웃음) 내적인 욕구가 큰 사람이니까요. 사실 건축계에서 동료, 선후배들을 봤을 때 무언가 별도의  분출구가 없으면 답답함에 시달리는 현상을 종종 감지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글을 쓰는 것이 저에게 다른 기회도 많이 가져다줘요. 무엇 보다 앉아서 조용히 글 쓰는 상황 자체를 좋아하기도 해요. 주로 일과 시간 외에 글을 씁니다. 대부분 퇴근을 해서 가장 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밥은 먹었고, 와인이나 위스키가 있고, 그렇게 글을 쓰다가 잠을 자러 가면 되는 상황이죠. 그 시간이 주는 물성을 최대한 즐긴다고나 할까요. 건축은 회의, 현장 방문 등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같이해야 하는데, 글쓰기는 혼자 할 수 있으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런 전환이 너무 좋죠. 미술계에 보면 작가정신이 투철해서 평생 개인전을 한 번도 안 했다 하는 분도 있던데,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글이나 작품을 공개하는 것에는 일단 자신이 어느 정도 여물었기 때문에 세상에 꺼내놓는다는 측면이 있기는 하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는 거예요. 아무리 완성되고 성숙한 인생이라도 매 단계에서 새로 배울 게 있는 건데, 자기 인생이 다 끝난 다음에 배운다면 그걸 쓸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정 기간 내에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서 사회를 향해 끄집어내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글도 그렇죠. 그리고 글을 쓰면 아무래도 좀 더 많은 세상과 접하게 돼요. 출판 과정도 그렇지만 책이 나오면 강연을 하게 되니까, ‘이런 데서도 나를 부르나?’, ‘세상에 이런 모임도 있나?’ 하면서 삶의 우연에 저를 맡긴다고 할까요. 보고 싶은 사람만 보는 게 아니라. 한 번 저를 굴려 보는 건데 그러면 거기서 뭔가 새로운 게 나오기도 하거든요. 하여간 일차적으로는 표현의 욕구가 있는 사람이라 앉아서 내 생각을 겉으로 꺼내는 상황을 즐기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아요.   ‘무지개떡’이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라면 상가주택은 한국의 도시에 남아있는 건축 유형이자 실제 건축물이잖아요. 사실 ‘무지개떡’이라는 표현도 건축적으로는 새로운 개념이라기보다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들어간 건물인데, 좀 더 쉽고 친절하게 전달하고자 한 건가요? 물론 그렇죠. 건축계에서 흔히 하는 유형적 분류대로 한다면 상가주택이나 상가아파트라고 했겠죠. 그런데 그건 너무 오염된 단어라고 생각했고 뉘앙스가 별로 안 좋았어요. 당시 그런 식의 건물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기억도 썩 좋지 않아서 그 단어를 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소비자가 엄청나게 데인 상품명이 있다면 그걸 또 쓸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그것 중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진화 발전시킬 부분이 있죠. 그러면 리브랜딩을 해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상가아파트, 상가주택을 리브랜딩 하는 거죠. 그리고 이름만 바꾼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지향점이 다르니까요. ‘좋은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깔려 있어요. 디테일도 당연히 중요하고요. 그래서 언젠가는 그런 책도 써볼까 싶어요. 좋은 무지개떡 건축이 되기 위한 각종 디테일에 대해서요. 가령 1층에 레스토랑이 들어온다면 환기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음식 냄새가 위로 올라갈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렇게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사전처럼 정리해서 ‘실무 디테일 사전’을 써볼까 하고 있어요. 엔트리가 한 200개 정도 되는 책이요.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제가 실제 건축을 통해 구현하는 것이지만, 답이 항상 하나는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해보고 싶어요.   말씀대로 16년째 직주근접의 삶을 살고 계시잖아요.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은 전혀 아니고, 아주 의도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한 거예요. 그전에는 장거리 출퇴근을 굉장히 오래, 많이 했어요. 대학교 다닐 때 집에서 학교까지 어마어마한 거리를 매일 왕복했는데,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았어요. 서울건축에 다닐 때 과천에서 여의도로 다니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요. 처음 유학가서는 학교 옆 아파트에 살았지만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는 아예 다른 도시였어요. 매일 편도 1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다녔죠. 당시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서 한국 프로젝트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차 때문에 집에 일거리를 싸서 가곤 했어요. 집에서도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고요. 그때 가장 싫었던 건 ‘아차 이거 회사에 두고 왔는데’, ‘아, 이거 집에 있는데’ 하는 거였어요. 이런 모든 것이 계기가 돼서, 집과 사무실을 아예 붙이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이 동네를 알게 됐고 의도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지금은 숙달이 되어 괜찮아졌지만 처음 왔을 때는 몸이 많이 상했죠. 너무 앉아 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도 많이 했어요. 아침에 집을 나와 골목을 따라 동네 한 바퀴를 빙 돌고서 다시 출근하고 저녁에는 그 반대로 한다든가. 소위 말하는 직주근접 상황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어느 정도 익힌 건 이사 후 2, 3년 후에나 가능해졌어요. 그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무조건 걷기 시작했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사는 게 익숙해서 크게 불편한 것은 없고요. 나름 생산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앉아있는 시간이 긴 것은 여전히 사실이에요.   페이스북에 소장님의 생각을 풀어내고 계시죠. 관심사에 대해 적은 글의 정보량이 웬만한 자료 조사를 뛰어넘기도 해요. 무언가 발굴하고 연구하는 걸 즐기신다고 할까요? SNS는 제가 일과를 다 마치고 마실나가서 맥주 한잔하며 이런저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기분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제 성향이 조사하고 앞뒤 관계 맞춰보는 걸 좋아하니까, 어떤 분들이 보기에는 좀 ‘되다’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페이스북에 회사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안 올립니다. 일은 일이니까요. 물론 간접적으로 연관 있는 건 많지만요.   카약을 타시거나, 캠핑하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하는 취미를 갖고 계시죠. 모두 고독을 즐기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웃음) 요새는 SNS가 취미가 됐죠. (웃음) 역시 그것도 글을 쓰는 것이죠. 건축이나 글쓰기 모두 생각도 많이 하고 머리도 많이 써야 하는데 그래서 몸을 많이 움직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SNS는 저의 직업과 사회 속에서 개인적인 삶을 잘 조율해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아직은 즐겁게 하고 있고요. 사실 제가 카약을 타든, 글을 쓰든, 답사하든 SNS를 통해 일부 드러나기 때문에 착시현상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건축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몸을 험하게 굴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중 카약이 참 좋고, 요즘은 답사로도 그런 욕구를 많이 풀고 있어요.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니까요. 특히 답사는 여러 사람과 같이 다닐 수 있으니 나름 즐겁죠. 음악과 관련해서 가장 해 보고 싶은 것은 전원이 노래하고 전원이 악기 하는 밴드에요. 그러니까 제가 의외로 남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해요. 다만 선택권이 있어야 하겠죠.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혼자 있고요. 그래서 지금도 남들과 어울리다 굉장히 늦게 들어올 때도 바로 안 자고 한 시간 정도 혼자 있다가 자는 버릇이 있어요. 여러 사람과 있다가 바로 집에 들어와서 자는 건 저한테 안 좋더라고요.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단체여행을 못 가요. 몇인 1실을 주잖아요. 부부가 아니면 성인은 같이 자는 거 아니라며. (웃음)     앞서 한옥을 다루면서 다공성, 중첩된 기하학 등 건축 개념으로도 이어졌다고 하셨는데요. 한옥의 고유한 가치가 반영된 현대 건축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저 자신의 관심을 넘어서, 크게 얘기하면 한국 건축계의 관심이죠. 한국 건축계에는 메시아 신앙이 있어요. 누군가 나타나서 통쾌하게 국제적으로 한국 건축의 위상을 높여주는 거죠. 다만 소위 일반적인 글로벌 아키텍처가 아니라 한국 사람의 DNA가 강렬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건축으로요. 그걸 보면 역사와 문화의 연속성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으로도 좋고 외국인도 보면 경탄해 마지않는, 그런 건축가의 등장에 대한 메시아 신앙이죠. 일본은 그 길을 갔어요. 일본의 근대화도 우리 못지않게 괴로운 과정이었어요. 발전이라는 게 원래 자기 부정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일본도 그 이전에 해온 많은 일을 부정해야 했으니까요. 다만 일본은 탈근대화 과정에서 자기들의 전통을 재해석하면서 소위 ‘젠’ 스타일의 미니멀리즘을 글로벌 스탠다드의 단계까지 올려놨죠. 수많은 건축가가 그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건축을 만들어내고 있잖아요.   다만 한국 건축이 과연 그 길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프리츠커상을 받은 중국 건축가 왕슈만 해도 우리가 그를 진심으로 부러워하면서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기에는 왕슈의 건축이 직설적인 요소를 너무 눈에 보이게 차용한 경우가 많아요. 무엇보다 왕슈는 하는 말과 만들어낸 작품 사이의 괴리가 큰 사람이죠. 말은 농경사회의 전원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 같지만 그런 그도 도시 상황으로 들어오면 별수 없어요. 강연을 들었는데 그 괴리에 관해서는 설명이 없더군요. 좋게 말하면 전략적으로 사고해서 말을 가리는 거고, 나쁘게 얘기하면 현실을 직시하는 진실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인이 그렇게 자기의 속내를 숨겨가면서 교묘한 이중플레이를 할 수 있는 캐릭터인가? 한국인은 좀 순진하게 솔직한 면이 있어요. 그게 미덕이건 아니건 한 특성이죠.     글로벌한 측면에서 봤을 때 전 세계의 수많은 지역 문화(local culture)는 문화 다양성의 요소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각 지역은 자기들의 문화에서 무언가 근사한 것을 끄집어내서 글로벌한 문화를 다양하게 만들어주어야 하는 책무가 있어요. ‘나는 지역 문화나 역사와 상관없다, 오로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에만 관여하겠다’하는 원초적 근대주의자가 아직도 많은데,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하는 건 중요하다고 봐요. 이 모든 것이 모더니즘의 진화라고 믿고요.   모더니즘 초기 단계에는 가장 근저에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 하나로 종교나 구시대의 정치 질서를 격파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인간의 마음까지는 지배가 안 되는 거죠. 인간이 100% 합리주의적인 존재는 아니기 때문에요. 그래서 모더니즘을 비판하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근본적인 대안 제시는 못 하고 있죠. 그래서 모더니즘은 폐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완 진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좀 넓은 접근, 다양한 관점이 필요해요. 지역 문화로부터 보편적인 가치를 끄집어내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그걸 할 수 있으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갈 수 있어요. 저는 예전부터 한국 전통건축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했지, 이것을 들고나와 오직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는 식의 접근은 일종의 문화적 제국주의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제가 말하는 ‘다공성’이나 ‘중첩된 기하학’ 같은 것은 한국 사람에게만 어필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흥미롭고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일 수 있어요. 생각의 국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누구나 이 개념을 잘 받아들여서 유용하게 쓰면 됩니다. 막연하게 그것을 만들어낸 상황이 한국에 있었구나 하는 정도가 족하지, 마치 국가 브랜딩 하는 것처럼 내세운다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한 건축가가 평생을 살면서 너무 많은 주장을 할 수는 없어요. 제 경우 무지개떡 건축은 도시 건축의 기본 유형에 관한 문제고, 그것과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는 ‘다공성’(벤야민의 다공성과는 다른 의미로)과 ‘중첩된 기하학’이 건축가로서 제 트레이드마크가 될 확률이 높아요. 앞으로 제가 제3, 제4의 이론을 또 만들어낼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이론 안에서 다양하고 풍성한 건축의 세계를 실물로 펼쳐 보일 수 있느냐가 중요한 일이 될 거로 생각해요. 적어도 예측 가능한 미래의 제 경력에서 말이죠. 이미 무지개떡 이론이 예일 대학교에서 펴내는 계간지에, 개성공단의 미래와 관련된 복합도시의 가능성에 대한 논문이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 저널에 소개되는 등 제 작품뿐 아니라 생각이 외국에도 여러 경로로 소개되기 시작했어요. 그 동안 가져왔던 생각들이 점점 집대성 되는 과정이지요. 거기에 공감하는 분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Special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② 과학적 합리주의와 모더니즘   대학원 논문은 어떤 주제로 쓰셨나요? 「근대건축의 과학적 합리주의의 형태적 표현」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지금 제 건축에 대한 의식의 심층이 깔린 주제가 아닐까 싶어요. 다른 레이어도 있지만 가장 바닥에는 ‘과학 기술’이 있어요. 공예적인 건축이나 맥락적인 건축도 다 유효하고 좋을 수는 있는데, 적어도 저에게는 과학 기술이 기본으로 깔려 있다고 생각해요. 대단한 이론은 아니어도 논문을 쓰면서 이것저것 정리했는데, 합리주의라는 게 합리주의 그 자체(과학과 기술)가 있고, 건축으로 들어올 때는 건축가의 해석을 거치잖아요. 그래서 구조 엔지니어와 아키텍트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 과학적 합리주의가 건축의 엔지니어링이 아니라 건축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어떤 문제가 있으며 건축가는 어떻게 조율해왔는지를 보자는 게 제 논문 주제였어요 당시 지도 교수님은 누구셨나요? 이광노 교수님이셨는데, 당시 교수님은 반대하셨어요. 실측 논문을 쓰거나, 근대 건축에 대한 연구를 원하셨죠. 지도 교수님 말을 안 들어가면서 주제를 정한 건데, 만약 그때 그런 논문을 썼다면 건축가가 안 됐을 확률이 높아요. 앞서 얘기했지만, 건축과에 온 이유도 ‘뭘 좀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였으니까요. 교수님도 지도 교수의 권한으로 제가 하려는 걸 못하게 하시는 스타일도 아니었고요. 대학원 때에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한 거네요. 유학은 군대 이후 다녀오신 건가요? 네. 군대 가기 전에 6개월의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서울시가 밀라노 트리엔날레에 초대받았는데, 우리나라가 국제적인 전시에 최초로 초대받은 경우였어요. 전시 디자인 프로젝트가 주택공사 주택연구소로 갔고, 그 담당자가 김진애 박사님이었어요. 이분이 제 사회생활 최초의 보스시죠. 표현이 이상하지만, 보스가 똑똑할 때 겪는 걸 다 겪어봤고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분이 일 처리 능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분이니까 많이 배웠죠. 학교는 마쳤으니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어서 열심히 일했어요. 지금이야 근사한 포트폴리오라는 개념이 있지만, 그 때는 그런 것이 없었어요. 김진애 박사님이 면접 때 원도를 들고 오라고 해서 둘둘 말아 가져갔죠. ‘내일부터 나와요’라고 하시는데 ‘제가 지금 집에 가도 할 일이 없습니다’라며 구석에 가서 일했어요. 집이 멀기도 하니까요. 그날부터 야근했죠. (웃음) 입대 전날까지 야근하다가 술 한잔하고 심야 이발소에서 머리 깎고 입대한 기억이 납니다. 군대 다녀온 다음에 바로 경력을 쌓기 위해 서울건축에 갔죠. 당시 밀라노 트리엔날레의 한국관 주제가 ‘서울’이었잖아요. 주제와 관련해서 인상 깊었던 것이나 진행 과정에서 경험했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주택공사가 강남구에 있던 시절이었어요. 지금은 그 일대가 완전히 재건축되었는데, 지하철 학동역에서 멀지 않았어요. 그 옆으로 AID 아파트 단지 안의 시범 주택 몇 동 중 하나가 사무실이었어요. 당시엔 그곳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곳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작업 환경이 좋았던 기억이 나고요. 강홍빈 박사님이 주택공사 연구소 소장이셨고 그분을 비롯해 여러 석학 밑에서 일한 것도 좋았어요.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양질의 자료를 접해봤던 것이에요. 서울시 항공사진을 무제한으로 봤으니까요. 들여다보기만 해도 너무 좋더라고요. 지금이야 건축계에 소위 지역에 대한 관심이 생겼지만, 그때는 서울에 대한 관심이 형성된 때가 아니어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죠. 다른 논리로 만들어진 강남과 강북, 서울이 성장해온 과정 등을 놀랍게 봤죠. 사대문 안에 어마어마한 역사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피부로 느낀 것 같아요. 다음은 그것을 어떻게 드러낼까였어요. 그러한 생각들을 전시 도판에 담으면서 소위 전시라는 물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경험했죠. 그때 경험이 이후 <메가시티> 전시 기획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전시라는 것이 어느 정도 유치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내용을 요약하고 생략하고 강조하다 보면, 현실의 미묘한 결을 전시에 다 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요. 전시의 가장 큰 과제는 최대한 명쾌하게 사람들에게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왜곡이 있고 유치할 수밖에 없구나, 책과 전시가 다르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어요. 그리고 전시 하나에 정말 많은 분야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어요. 당시 도판과 보고서는 안그라픽스에서 했어요. 자료 리서치에는 최종현(한양대) 교수님이 참여하셨고요. 보고서를 보면 제가 한 기초 스케치가 몇 개 있어요. 같이 일했던 팀 중에 더 기억나시는 분이 있나요? 이름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 외에도 상명대 백명진 교수님, 우규승 선생님 등 많은 분을 만나고 코멘트를 들으면서 배웠죠. 건국대 정태용 교수, 경기대 이영범 교수가 동기로 같이 들어가서 일했고요. 당시 주택공사 직원이었고 우리 팀을 지원해주신 현 토문건축 정경상 소장님, 그리고 주공에 계신 다른 분들이 계셨어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팀에 참여하셨다는 건 흥미로워요. 김진애 박사님도 그 전시가 이후 ‘서울포럼’을 설립하는데 정신적인 바탕이 되었다고 하셨거든요. 서울에 대해 확실히 접하셨을 것 같아요. 정확히 말씀드리면 서울 역사의 대강을 훑어본 계기이고, 나중에 제가 더 깊이 관심 두게 된 단초가 됐죠. 유학을 하러 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예일대를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잘 모르고 갔죠. 그 시절엔 다 그랬어요. 원래는 유학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쓰러지셔서 유학 갈 돈이 없었어요. 유학을 하러 가는 유일한 길은 국비 유학생 시험을 보는 것이었어요. 학생 때 두 번 시험을 봤는데 둘 다 1차는 되고 2차는 떨어졌어요. 그러다가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도 하고 서울건축에 다니던 어느 날 깨달았어요. 건축가가 되기 위한 디자인 교육의 기본량이 있는데 제게 그 절대량이 부족하다는 것을요. 그렇다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유학을 가야겠다 하고 세 번째 국비 유학생 시험에 붙었어요. 1년 조금 넘게 회사 생활을 즐겁게 했지만 “죄송합니다”하고 나왔죠. 처음에는 유학 준비가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몰랐어요. 정보전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당시엔 좋은 학교라는 데는 다 지원했어요. 학교 특성도 모르고요. 더구나 예일은 한국 학생을 받은 적이 없어서 이 학교가 뭐 하는지도 몰랐어요. 김태수 선생님이 예일대학을 다니셨던 것은 알았어요. 한국에서는 이미 저명하셨고 대가셨으니 그 정도나 되어야 갈 수 있겠구나 했었죠. 나름으로 열심히 했는데 예일에 합격해 당연히 좋았죠. 대학마다 그 시기의 학풍이 있어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텐데, 예일에서는 어떠셨나요? 지나서 생각해보면 예일대학은 미국 대학 중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그 영향이 오래 가는 학교 중 하나였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사실 ‘이게 뭐지?’ 했어요. 당시 학장이 토마스 비비인데 이 사람은 미국에서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실무가 중 하나였어요. 드미트리 포르피리오스(Demetri Porphyrios)나 크리어 형제(Leon & Rob Krier)가 와서 강연하고 그랬으니까요. 저는 논문 주제도 그렇고 서울건축 김종성 선생님께 불의 세례를 받아서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한국에서 나름 모던한 교육을 많이 받았지만 교육이라는 게 이런 거다, 다 겪어보자 했어요. 그래서 장식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다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포스트모던은 예일에서 교육받으면서 이해하게 된 측면이 있어요. 모던에 비해서 이론적으로는 재미있잖아요. 그렇게 양쪽 세계를 다 경험해 본 것 같아요. 학교에서 정말 좋았던 건 만들기였어요. 한국의 건축 교육에서는 뭘 만들어본 경험이 없죠. 모형과 도면 그리기는 생각의 만들기이지, 실제 만들기는 아니니까요. 예일대학에 갔을 때 지하 작업실에 내려가니 학교 자체가 공장인 거에요. ‘와, 드디어 내가 왔다’ 했죠. (웃음) 그때 설계 스튜디오 못지않게 지하실에서 과도하게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만큼 너무 좋았어요. 그때 만든 게 까오 의자(Kao chair)예요. 재료도 직접 많이 다뤄봤어요. 조각 수업이 듣고 싶어서 미대 수업도 듣고 했거든요. 몸을 써서 만들어보는 걸 상대적으로 많이 해본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경험 덕에 현장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아요. 예일대에는 시류에 영합하지 말고 ‘끈질긴 개인주의자(diehard Individualist)’를 키우려는 정신이 있어요. 그게 특정 시점에서 그 학교에 대한 평가를 나쁘게 하는 것이기도 해요. 좀 고루하게 보이거든요. 길게 보면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긴 생각을 갖게 하는 데 좋은 학풍을 가진 학교예요. 올 초에 다시 학교를 방문했을 때도 지적 풍토가 좀 답답하다고 느꼈는데, 그래도 저한테는 좋은 양분을 많이 준 학교예요. 그 대신 너무나 서양 학교죠. 예일은 지금도 아메리카니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거든요. 까오 의자의 경우 의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실제 구현하고 제작해냈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당시 그 수업을 진행한 선생님이 로저 크롤리(Roger Crowley)라고 뉴욕에서 온 건축가였는데 로버트 벤투리 계열이에요. 어떤 스타일인지 짐작이 가시죠?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가구를 디자인했어요. 대신 가구의 역사에 대해선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죠. 제 의자는 작동도 안 될 거라고 엄청나게 반대했어요. 1학기 디자인, 2학기 제작인데 그 선생님이 2학기 때는 저 가르치기 싫다고, 수업 듣지 말라고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저 말고는 아무도 그 수업을 신청하지 않은 거예요. 다른 친구 하나는 제가 들으면 듣겠다고 했고요. 뉴욕에서 온 그 선생님에게 제가 필요한 사람이 된 거죠. 그러다가 학기 말에 완성품을 가져갔는데 앉아보고 시연해 보니 ‘내가 틀렸네, 열심히 했다’고 칭찬해 주었어요. 평상시 갖고 있었던 소위 ‘이성적 만들기’에 대한 욕구가 그 의자에 다 담겨 있어요. 당시 친구들이 저를 ‘체어맨’이라고 불렀으니까요. (웃음) 적절한 별명이네요. (웃음) 이성적 만들기라는 표현처럼, 까오 의자는 탱크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잖아요. 기능에 충실하면서도 디자인과 소재가 갖는 견고한 매력이 있어요. 그런 작업이 건축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그럼요. 그 작업을 하면서 내가 건축가가 되겠구나,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죠.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이 길을 가자고 허락하는 계기였죠. 그런 계기가 두 번 있었는데. 하나는 학부 때 졸업 설계였고 다른 하나가 그 의자였어요. 내가 무언가를 만들 수 있구나,  인간이 뭔가를 만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인데, 기능이 있고 생각이 담겨 있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 수 있구나 했죠. 그게 큰 계기가 되었어요. 아직도 무한 애정으로 그 의자를 보관하고 있으니까요. 구체적인 재료를 다루는 게 얼마나 즐거운 지도 그때 알았고요. 합판으로 틀을 다 짜고 라미네이팅하고, 목공에 대한 책이며 잡지며 다 섭렵하며 실험했어요. 그런 관점에서 현재 작업에서 물성에 대한 실험을 양껏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해요. 이게 아쉬운 부분인데, 남을 통해서만 그걸 한다는 게 싫어요. 가끔 설계 다음으로 시공에 들어가면 누를 때마다 오작동하는 리모컨으로 원하는 것을 해야 하는 느낌이에요. 한국에서 산업체와 건축가가 더 긴밀히 연결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으면 훨씬 용이하겠죠. 현재로서는 그 욕구가 잘 충족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일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양하게 접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혔다고 하셨는데, 그 외에 인상적인 건 무엇이었나요? 지금도 예일대에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그 학교가 지역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거예요. 처음 입학했을 때 학교 정식 과목에 <History of New Haven Architecture and Urbanism>라는 게 있었어요. 물론 뉴헤이븐이 근대건축에서 유명한 도시이긴 해요. 하지만 우리로 치면 연세대에서 신촌 건축학개론을, 서울대에서 신림동 지역의 건축과 역사를 가르치는 셈이잖아요. 게다가 수업을 들어보니 매우 재미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역의 역사에 거시적 관점의 건축사와 세계사가 편입이 돼가는, 부분 안에 전체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을 학교가 몸소 실천하는 거죠.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죠. 우리는 빨리 지역(local)을 벗어나서 세계로 나가고자 했잖아요. 그런데 세계 건축의 중심 중 하나에 갔더니 자기 동네를 가르치더라는 거죠.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교수들도 지역 전통(local tradition)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있었어요. 저는 그분들과 특히 잘 지냈고요. 한국에서 김종성 선생님을 통해 받았던 전형적인 모더니즘 교육과는 상반되지만, 보완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안에서도 철저한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공통적인 거고요. 김종성 교수님도 한국에서는 가장 서구적인 건축가지만, 대학원 당시 수업에서는 근현대 건축의 관점에서 사찰이나 종묘 같은 전통 건축의 공간을 분석하는 수업을 진행하셨어요. <공간건축 구성론>이라는 수업이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너무나 잘 찍은 슬라이드로 종묘의 맞배 지붕을 설명하는데, ‘맛배 지붕은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건국 초기에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기로 했기 때문에 (왕조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팔작지붕과 같은 단정적인 형식으로 할 수 없고, 따라서 이런 경우에 만들어진 비례는 결과적인 것이다. 인간의 조형 의지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비례에는 상대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스 신전도 사람들은 보통 파르테논이 백미라고 하지만 파에스툼의 묵직함에도 나름의 미가 있다’라고 하시면서 모든 길과 문을 열어주셨어요. 너무나도 신선하게 다가왔죠. 예일대를 졸업하고 김태수 건축사무소에서 실무를 하셨잖아요. 미국과 한국 중 실무를 어디서 할 것인지 고민은 없었나요?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 가길 원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학교냐 실무냐, 미국 유학 시절에도 박사과정이냐 설계 사무소냐 등 경력의 갈림길에 있을 때마다 번민은 없었어요. 이 길로 가겠다는 확실한 자기 선언을 했죠. 졸업하고 보통 설계사무소를 가는데, 저는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갈 거로 생각했어요. 생물학적으로 미국에서 오래 사는 게 싫었어요. 결국 노마드는 못 되는 사람이고요. 그때 생각했던 게 김태수 선생님이었어요. 김종성 선생님은 접근하기 어려운 캐릭터시지만, 한국에 계셔서 직접 뵐 수 있었는데, 김태수 선생님은 멀리 계셔서 경원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실무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셨고, ‘나는 상자(Box)의 건축가다’라는 선언적인 말들도 대단했어요. 작품의 물성도 너무 좋고요. 김태수 선생님의 작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교보 천안연수원이었어요. 처음 사진으로 보고 근대건축의 어휘를 다 갖고 있으면서 한국의 산세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걸 보며 이런 고수가 있을 수 있구나 했죠. 한국에 잠시 오셨을 때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마침 예일을 가게 됐다고 했더니 학기 시작하기 전에 자신의 미국 사무실에 좀 있다 가라고 하셨어요. 신나서 바로 갔죠. 거기서 인턴을 하면서 용돈을 벌 수 있었어요. 학교가 끝나면 당연히 그곳으로 갈 거로 생각했어요. 어찌 보면 참 행복하게 학교에 다닌 셈이죠. 대선배도 옆에 계셨고요. 그렇게 유학 생활과 입대했을 때가 가장 철없지만 즐겁게 산 때였어요. 한국에는 언제 돌아오셨나요? 김태수 선생님 사무소를 3년 반 정도 다녔는데 선생님이 서울에 사무소를 내셨어요. 그런데 사람이 계속 바뀌니까 저에게 한국에 가서 그 사무소를 좀 맡을 수 있겠느냐 하셔서 ‘언제든지요. 어차피 갈 거였어요’라고 했는데 뜻밖이셨나 봐요. 그렇게 1996년 연말에 한국으로 왔어요. 김태수 선생님의 서울 사무실을 3, 4년 맡다가 IMF 사태 후 독립을 한 거죠. 독립은 불경기에 하는 거라는 주변 사람들 말에 용기를 얻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사무실을 열었어요. 김태수 선생님에게서는 어떤 영향은 받으셨나요? 김종성 선생님보다 복잡해요. 김종성 선생님은 명확한 철학적 입장에서 건축의 중요한 지점을 말씀하시길 좋아하시는 분이고 그 외에는 이야기 안 하시죠. 두 분은 기본적으로 말씀이 별로 없으시고 과묵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두 분에 비하면 저는 뭐든지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편이죠. 차이가 있다면 김종성 선생님은 본인이 철저한 모더니스트였을 뿐 아니라 활동한 대한민국 또한 알고 보면 아주 모더니스트 국가였던 거죠. 박해천 교수가 북한에서 내려온 분들 이야기를 하면서 서북 모더니즘이라고 했듯이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은 모더니즘이 꽃피었던 나라였던 건 맞아요. 심층적으로든 피상적으로든 그걸 받아들여서 우리를 다시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죠. 그런 의미에서 김종성 선생님은 자신과 딱 맞는 곳에 계셨던 거죠. 특히 대한민국 대기업을 상대하면서 거대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고요. 절대적인 시공 퀄리티라는 당시 시대의 한계가 있긴 했지만, 적어도 철학적으로는 동조해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에 계셨던 것이죠. 반면 김태수 선생님은 미국은 물론 아마 전 세계적으로 건축문화가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에서 활동하셨어요. 그곳은 모든 건축허가가 우리나라의 문화재 심의 수준이라고 보면 되거든요. 그런 곳에서 자신의 마음속 깊이 갖고 있던 것을 펼치려면 고도의 능숙한 플레이가 필요하죠. 그래서 김태수 선생님의 어휘가 훨씬 다양해요. 저는 서울건축을 다닐 때나 김태수 선생님 사무소를 다닐 때나 제 보스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어요. 지금도 어떤 회사에서 최대한 배우고 나가려면 그런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회사는 하나의 기관(institution)이기도 하니까요. 서울건축이야 워낙 아카이빙이 잘 되어 있었던 회사고, 제가 다닐 때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은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것이었는데 지하실이 아카이빙 룸이었어요. 그때 회사 허락 받고 청사진도 굽고 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아름다운 손도면이 많았으니까요. 제가 두 분에 대해서 전문적인 연구를 한 건 아니지만, 두 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했을 때 저는 상대적으로 김태수 선생님의 작품을 더 많이 알았어요. 젊은 시절에 하신 주택은 다시 봐도 정말 감동적이에요. 뉴잉글랜드라는 토양이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맘껏 펼치지 못했을 거고요. 결국 그 출구를 한국에서 찾은 거죠. 한국에서 초기에 하신 것 중 하나가 국립현대미술관인데, 어찌 보면 절충식에 가까워요. 김태수 선생님은 그만큼 담론의 범위가 넓어요. 김종성 선생님은 자신의 개인적인 배경에서 건축의 단서를 찾는 분이 아니신데, 김태수 선생님은 그런 부분이 있으시죠.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김태수 선생님이 오히려 한국에서 훨씬 더 추상적인 건축을 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대덕의 엘지연구소 같은 건 전혀 로맨틱한 생각이 개입되지 않았죠. 여전히 김태수 선생님은 땅과 한판 붙는 태도, 그런 감각이 인상적이에요. 국립현대미술관이 압도적인 경우죠. 땅을 추상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물성을 읽는 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디테일에 대한 집념은 두 분이 다 똑같고요. 시차를 두고 두 분을 겪었던 게 재미있었어요. 그렇다고 김중업, 김수근 선생님처럼 성향이 아주 다른 두 분도 아니었고요. 실무 건축가로서는 김태수 선생님 사무실에서 좀 더 중요한 위치에서 일했기 때문에 배운 게 더 많았죠. 지금도 제 회사 운영의 일정 부분은 김태수 선생님께 배운 거예요. 매주 월요일에 전체가 모여 주간회의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장하는 방식이랄까요. 김태수 선생님이 그리 사교적인 분은 아닌데 깊이 있는 교우 관계를 통해서 건축가로 계속 성장하는 걸 가까이서 봤으니 까요. 미국 사회에서 그분의 지위가 대단해요.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았고, 여전히 현역으로 호흡이 길게 활동하시죠. 소장님의 초기작 중 몇몇 도면을 보면 질서를 찾고 싶어한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게 본인의 성향일 수도,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건축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보였다고 할까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무심하게 긋는 선은 없어야 한다.’ 제 편견일 수 있는데 도면을 보면 질서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벽이 가기로 했으면 가야 하는 거에요. 자신이 부과한 틀과 질서 속에서 스스로 제약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게 건축이지, 질서를 만들어놓고 지키지 않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줄 안 맞으면 아주 싫어하는 일종의 강박 같은 거죠. 그 극단의 작업을 해본 게 바로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예요. 연습공간인 배구 코트와 숙소를 한 건물에 담으면서 정방형 공간을 설정하고 원형을 품고, 지붕은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구조로 풀었어요. 엄청나게 고생했죠. 정방형의 공간 안에 고도의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처음에 부여한 정방형, 원, 대각선 틀 안에서 그걸 다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도면을 죽어라 많이 그리면 해결되더라고요. (웃음) 사실 공간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에 필요한 절대적인 기하학적 규칙이라는 건 없어요. 대부분 공간은 건축가가 스스로 부여한 질서 안에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 인터뷰 ③으로 이어지며, 인터뷰는 오픈하우스서울 2018 홍보 기간 중 한편씩 업데이트됩니다. 
Special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① Interview 다시 모더니즘을 말하다, 건축가 황두진 ① 오픈하우스서울 2018은 해마다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건축가의 대표작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건축가 특집을 진행한다. 건축가의 연작을 모아 문을 열어 그 흐름을 직접 체험할 기회다. 건축가와 함께 건축물을 직접 경험하고 강연과 오픈스튜디오를 통해 건축가가 추구하는 철학과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생각을 나눈다.  올해는 서울 사대문 안의 복잡한 골목의 조건을 풀어가고, 한옥의 텍토닉을 재해석하고, 작가로서 도시와 건축에 대한 생각을 책으로 엮어내며, 영추포럼, 답사 등의 문화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건축가 황두진을 만난다. 다공성, 구축술, 시스템이라는 키워드로 전개하고 있는 황두진의 건축은 모더니즘의 과학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건축가 황두진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사고와 물성을 가진 결과물의 연결고리를 탐색해본다.    이북, 서울, 사대문 서울에서 나셨지만, 이북에 대한 관심이 높아 보여요. 부모님이 실향민이신 걸로 알고 있어요. 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다 실향민인 경우는 많지 않아서 그 부분에서 남들보다 민감한 것 같아요. 보통 우리는 연고가 없는 집단을 실향민이라고 생각해요. 퉁쳐서 문자 그대로 ‘고향을 잃고 내려온 사람들’ 그리고 부제처럼 ‘자유대한의 품으로’라는 말이 따라오죠. 엄격하게 실향민은 네 그룹 정도가 있다고 봐요. 제1그룹은 일제 강점기 때 내려오신 분들이에요. 단순 이사죠. 어찌 보면 그 그룹이 사상적으로는 가장 다양해요. 다음 제2그룹이 해방 이후부터, 즉 1945년부터 한국전쟁 이전까지 오신 분들이에요. 북한에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그야말로 자유대한의 품으로 오신 분들이죠. 성향으로는 반공적이고 당연히 지주, 자본가, 지식인, 기독교도가 많죠. 서울 교회의 상당수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설립했다는 게 그것을 반증하죠. 제3그룹은 한국 전쟁 당시에 내려오신 분들인데, 이분들도 사상적으로는 다양해요. 당시 미국이 북한을 엄청나게 폭격하던 시기였고 핵폭탄 투하설도 있어서 그냥 경황 중에 난리를 피하려고 내려오신 분들이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제4그룹으로는 탈북자가 있죠.   탈북자를 실향민으로 함께 분류하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네요. 그건 제가 분류한 거예요. 거대한 흐름에서 보자면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온 사람들이 있는데, 어떤 이유이든 자기가 태어난 곳이 떠나온 사람들은 실향민의 연장으로 보는 거죠. 이 네 그룹 중 저희 아버지는 제1그룹, 어머니는 제3그룹인데, 어릴 땐 그걸 신경 쓰지 않았고요. 나이 들면서 ‘우리 집안이 그렇구나’를 깨달았고, 더 나이가 든 요즘은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제가 생각이 좀 다를 수 있겠구나 해요. 예를 들면, 다른 분들보다는 북한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향의 설움에 목이 메어’ 같은 레토릭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한에 대해 오직 적대감이나 친근감만 느끼는 것도 아니고요. 어찌 보면 굉장히 복잡한 입장이죠. 아직 건축가로서 행동으로 옮긴 건 없지만 그런 점에서 생각이 남과 조금 다르다는 생각은 해요.   한번은 페이스북에서 만우절 농담으로 ‘황두진건축사사무소 평양 지점’을 내셨다는 글과 사진을 올리신 적이 있어요. 유쾌한 농담이었지만, 북한에 대한 관심이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이라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심리적으로는 그런 측면이 있을 거예요. 북한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문화에서 크신 분들이 보는 상황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어서 한국전쟁에 대한 문헌을 폭넓게 보는 편인데, 현대 한국을 이해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그런 기회가 없었지만, 건축가로서의 경력이 후반기로 가면서 제 삶에 주어진 소명이라면, 북한과 관련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대해서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최근 건축가협회 ‘남북교류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으셨죠? 제가 단체활동을 열심히 해온 편은 아니지만, 이런 문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사람도 모아야 하고요. 위원회 활동에 대한 제 기본적인 생각은, 북한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판단을 빨리 내릴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는 거예요. 우선 국회에서 한 달에 한 번 <북한의 도시와 건축> 콜로키엄을 하고 있어요. 저 못지않게 위원회 분들의 공통된 의견이 북한에 대해 연구하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거였어요. 좀 신중해지자는 거죠.   양가 부모님이 기억하는 이북의 도시 공간을 기록하려는 글이 인상적이었어요. 부모님이 의식적으로 과거 도시 공간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주신 것은 아니고, 흘러가는 말씀을 하신 거죠. 아버지는 제가 대학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쓰려지셨고 이후 2004년에 돌아가셔서 이야기가 많진 않아요. 가령 냉면은 겨울 음식이라는 이야기, ‘돌싸움’, 그야말로 투석전으로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이야기, 평양 사람들의 거친 성향 등에 대해서 들은 정도예요. 반면 어머니는 원산 분이신데, 어머니가 기억하는 원산은 매우 아름다운 곳 같아요. 실향민인 부모님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말하려 하진 않으셨어요.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장모님에게서 많이 들었어요. 우리 가족은 독특하게 사돈 안주인 두 분이 함경도 출신인 경우에요. 장모님이 함흥 분인데, 아까 구분한 실향민 중 제2그룹이에요. 기독교 집안이지만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은 아니세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북한이 고향인 기독교 사람들을 모두 보수적이라고 싸잡아 이야기할 수 없는 개개인의 사정이 있다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실향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매우 투박하다는 거고요. 장모님은 오빠가 함흥 학생만세운동에 관여했어요. 공산당 치하에서 기독교계가 주도한 학생 사건에 연루된 것이니 그 이유만으로도 북한에서 살 수가 없죠. 감시가 있으니 주변에는 시골에 들어가 살기로 했다고 말하고 경원선을 타고 오다가, 철도가 끊어진 철원에서 내려 한탄강을 맨발로 건너왔다고 해요. 얼마 전에 그 장소도 가 보았습니다. 흥미로운 건, 장모님이 서울에 와서 깜짝 놀랐다고 해요. 물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신 분들이니 서울이 수도라는 개념은 없었겠죠. 하지만 임금이 살던 조선의 수도였고 서울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했을 것 아니에요?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장모님이 서울 와서 보니, 집들이 게딱지처럼 산 능선까지 있었다고 해요. 제 생각에 그게 피난민 지역은 아니고 자연 지형을 따라 언덕이 집으로 다 가려진 걸 보고 그러신 것 같아요. 다른 하나는, 내려오니 조상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많더라는 거에요. 때가 어느 땐데 조상을 찾나 싶어서라고요. 그래서 함흥은 어떤지 여쭤보니, 공산 치하에서 살다 오신 분이라 봉건시대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으셨던 것 같아요. 함흥은 워낙 일제강점기 때부터 소위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개발했던 공업 도시에요. 길이 넓고 도시계획을 반듯하게 하고 건물들이 크고 천장이 높고 깨끗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서울은 계획도시의 느낌이 없고, 건축적으로 좋게 얘기하면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한 유기적이고, 나쁘게 얘기하면 무질서하게 보이고, 사람들의 성향이 신기했다고 하신 기억이 나요.   소장님의 고향은 서울이지만 양가 부모님의 고향도 멀지 않게 느끼겠네요. 저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생각하죠. 평양이나 원산에 대해서는 부모님이 사신 곳이니 관심이 있는 거고요. 은연중에 제게 사대문 중심주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죠. 마침 사는 곳이 여기(서촌)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기는 해요. 하지만 삶의 궤적을 보면, 우리 가족은 사대문 안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구질서 핵심세력에 한 번도 편입된 적이 없어요. 변방이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제가 아버지를 너무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7, 8년 전에 어머니를 인터뷰하면서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됐어요. 부모님이 서울 와서 사신 곳, 즉 제가 태어난 곳은 한양대학교 근처의 경원선 철도 변 한옥이었어요.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지번이 없어졌다고 해요. 그런데 어머니의 고향이 원산인 것을 알고 좀 뭉클하더라고요. 고향 가는 기찻길 옆에 산 거잖아요. 그러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정릉의 개량 한옥에 살았고 이후 결혼 전까지 2, 3번 이사했고, 그다음 신도시로 구분도 안 되는 0기 신도시인 과천에 있다가 유학 후 돌아왔을 때도 과천에 있었어요. 집안 내력이나 제가 살아온 현장으로 보면, 서울 주변 지역에서 성장했던 거죠. 요즘 옛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1950~60년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압도적으로 사대문 안에 있는 한옥에 산다는 걸 새삼 느껴요. 1950년대 후반에 부모님이 결혼하셨는데, 이때 왕십리, 정릉에 살았던 사람들은 서울의 외곽에 살았던 것이죠.   어렸을 때도 이북이 고향이라는 인식이 있었나요? 어린 애들은 잔인한 측면이 있어요. 순수함의 이면에 있는, 판단력 부족에서 오는 잔인함이죠. 저희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내려오셔서 친가 쪽 친척이 많은데, 어머니는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오신 분이라 외가가 없었어요. 북한 집안들이 또 좀 짜요? 설 이후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제가 받은 세뱃돈이 절반도 안 됐어요. 친구들이 시골 종가에 다녀온 얘기를 하는데 제가 ‘종가가 뭐야?’ 하니까 갑자기 애들이 ‘너 종가가 뭔지 몰라? 할아버지 할머니 사는 기와집 없어?’ 하는데 아마도 좀 사는 친구들이었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너 족보는 있냐?’ 하고 저를 놀리기 시작했어요. 제가 집에 와서 ‘왜 우리는 종가가 없어요?’라고 물었죠. 그랬더니 엄마가 그제야 우리 집안 이야기를 해주신 거예요. 충격을 받았어요. 당시 학교에서 도깨비가 있는 반공 포스터를 그리던 때인데, ‘그럼 우리가 그런 집안인 거냐?’ 하고요. 어머니는 그전에도 우리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하셨어요. 명절이나 크리스마스에 ‘왜 우리는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한테 인사 안 가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어요. 둘러는 데야 했고, 당시 세계지도가 집에 걸려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코펜하겐이 있더래요. (웃음) 그래서 저희한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코펜하겐에 사신다 한 거에요. 또 마침 무역 일을 하셨던 아버지도 맞장구를 쳤어요. 유럽 출장을 가시면 아버지 회사 동료에게 편지와 함께 선물을 대신 보내게 해서 저는 정말 유럽에 외가가 있는 줄 알았죠. 사실은 이북에 계셨던 거죠. 그 일로 ‘이 사회에서 뿌리박고 살아오던 집안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박혔어요. 코펜하겐 이야기는 제게 여운이 남아 있어요. 처음 유럽에 갔을 때 코펜하겐에 갔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티볼리 공원에 앉아 있으니 곱게 늙은 할머니 할아버지 중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어릴 때 나고 자랐던 경원선 근처 집에 대한 기억은 있으신가요? 전혀 없어요. 기억이 있다면 그다음 정릉에서 살던 집이 전형적인 ㄷ자 도시형 한옥이었는데, 그 집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게 흑백으로 있어요. 그게 제 인생에서 기억하는 첫 장면이라 몇 년 전 스케치한 적이 있어요. ㄷ자 한옥이니까 빛이 네모로 딱 떨어질 것 아니에요? 그게 대청마루의 끝과 댓돌, 시멘트 바른 앞마당에 떨어졌죠. 대신 실내는 굉장히 어두웠어요. 집에 웅크린 어두운 구석들과 대청, 어릴 때 그 장면을 생각하면 매우 무서웠어요. 지금 건축가로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밝은 집을 짓기보다는 비교적 빛을 분산하는 데 관심이 있는데, 어두운 구석에 대한 공포가 강해서 그랬던 것 아닌가 싶어요. 다락에서 노는 것은 좋아했어요. 다락의 빛은 밑에서 올라오니 포근했거든요. 생각해보면 개량한옥에 살았지, 소위 부흥주택에도 살았지, 어머니가 유치원을 하시느라 당시 엄이건축에서 설계한 주택 겸 유치원에 살면서 직주근접의 삶도 처음 체험해 봤고, 결혼해서 아파트에 살아봤으니, 나름 초고층 주상복합 제외하고는 다양한 주거 형태에서 살아본 거죠.     지금 통의동 목련원은 집과 사무실이 붙어 있는데, 경복궁 서측으로 온 계기가 있었나요? 경복궁 서측으로 온 것은 성인이 되어서예요. 당시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는데, 그때도 경비가 삼엄했어요. 동네가 1970년대에서 멈춰진 타임캡슐 같았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이유가 있었죠. 1968년 김신조 사태가 일어난 다음에 이 동네 경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에요. 효자로가 부암동으로 가는 중요한 길이었는데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려고 자하문로를 낸 것이죠.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 정도에 멈춰져 있고, 2000년 초반쯤 건축 규제가 조금씩 풀려서 효자로 변에 <열린책들> 건축물을 설계했어요. 그때 이 동네를 알게 되어 결국 이사를 오게 되었죠. 어릴 때 살았던 정릉처럼 서울의 외곽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사람들이 많이 오가지 않았고 서촌이란 말도 없었고요. 지금은 다르게 볼 수 있어도, 당시 저는 어릴 때 살던 동네를 찾아서 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어렸을 때 건강이 안 좋아서 많이 누워있었다는 기억을 많이 말씀하셨는데요. 초등학교 2학년 때인데, 거의 죽은 거였어요. 급상 신장염으로 학기 초에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래저래 학교를 못 다닌 게 방학을 포함해 10달 정도였어요. 절대 안정을 해야 하거든요. 오래 누워있어서 퇴원 당시에는 다리 근육이 다 빠졌어요. 걸음마부터 다시 배웠죠. 당시 입원했던 성모병원이 명동에 있었어요. 지금도 그 건물이 있어요. 1호 터널로 가다보면 명동 입구에 면한 건물 3층이에요. 제가 어느 정도 회복하니 수녀님들이 저를 데리고 명동성당에 갔었는데 그때도 무서웠던 기억이 나요. 웅장하고 근사하지만 컴컴하잖아요. 당시 입원해 있으면서 얻은 게 있다면, 시간이 안 가니까 침대에 누워 뭔가 집중해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천장의 금이 커지나 안 커지나를 매일 봤고, 자연학습도감을 가져다 열심히 보고, 그 와중에 오탈자 찾아 출판사에 보내면 기특하다고 선물을 보내주고 했던 기억도 나고요. 또 배운 게 있다면, 저 혼자 잘 노는 거예요. 남한테 의존하지 않고요. 물론 옆에서 많이 돌봐주셨지만, 저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으니까요. 그리고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이제부터 사는 인생은 덤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어느 날 제가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진 때가 있었는데, 누워 있는데 시야가 점점 좁아졌어요. ‘이게 뭐지’하고 조바심은 나도 마음은 편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손이 하나 내려오더니 ‘두진아 안돼!’ 하면서 어머니가 나를 잡아채는 거예요.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으니 제가 정신을 잃어 뺨도 치고 하셨다고 해요. 죽기 직전까지 갔었던 거죠. 그게 1971년 일이에요. 용감무쌍하게 세상에 돌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제 나름대로는 너무 눈치 안 보고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아요.   평소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 영향도 있을까요? 선천적인 것도 있겠지만 후천적인 변수가 있었다면, 아마도 어린 시절의 그런 경험 때문이 아닐까 해요. 지나서 생각해보면, 병약했던 유년 시절은 죽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의미 있었다고 생각해요.   예전 인터뷰에서 건축가는 대부분 부모님의 뜻을 꺾고 건축을 선택한다는 표현을 하셨어요. 건축가가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사실 제가 건축가가 된 계기는 초라해요. 일단 중고등학교 6년 동안은 건축과를 생각한 적이 없고, 대학 입시 때도 그랬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아무래도 적성과 무관한 것에 빠지는 것 같아요. 당시 저는 물리학자들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될 거로 생각했어요. 특히나 중고등학교에 가니 물리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수학을 잘 못 했으니 물리학을 안 한 건 다행이죠. 수학을 도구로 하지만 물리는 세상을 관찰하고 이론을 만들어요. 또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역으로 세상에 뭔가를 하는 일이잖아요. 그게 매력 있었어요. 그러고 보면 그런 점에서는 건축도 다르지 않죠. 대학은 자연과학 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입시제도의 희한한 상황 때문에 어느 날 보니 공대생이 되어 있는 거예요. 사실 당시 응용과학을 시시하게 생각했거든요. 양자역학에 대한 영웅시대 책도 엄청나게 봤고, 당시 씨엔 양이라는 중국계 물리학자가 한국에 왔을 때는 고등학생인데도 들으러 갔으니까요. 어쨌든 당시 대학교에서 공대 신입생을 과 별로 안 뽑고 공과대학으로 뽑았는데, 700명 중의 한 명이 된 거죠.   참 신기한 게 전공이 아닌 단과대별로 뽑으니까 우리가 소속감이 없는 걸 보고, 공대 17개 과에 신입생들을 매칭시킨 거예요. 그때 공대 1반이었는데 가나다순으로 하면 건축과가 제일 앞이잖아요. 그래서 제 지도교수님이 건축과 교수님이었어요. 3월 중순이 되니 면담하러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교수님이 어려우니 면담 30분 전에 갔는데,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공대 건물이 서울대 35동 4층엔가 있었는데 복도를 들어가니까 그 전해의 졸업작품 도면과 모형들이 있는 거예요.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더라고요. 그중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해안건축의 윤세한 소장님 졸업작품이었어요. (웃음) 그때 면담이라는 건 ‘너 데모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자리였는데, 저는 교수님께 솔직히 얘기했어요. 건축에 대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복도에 있는 걸 보니 근사하게 보인다고요. 이런 마음으로 전공을 선택해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당시 김진균 교수님이셨는데, 그분 멋있잖아요. 웃으시면서 ‘삶에 우연이라는 게 있다. 어쩌면 이것도 좋은 뜻일 수 있다’ 하면서, 지오 폰티의 <건축예찬>과 같은 책을 몇 권 추천해 주셨어요. 감사하다 하고 나가면서 ‘내년에 뵙겠습니다’라고 했던 것 같아요. 당시 우리는 1학년 학점을 가지고 입시를 한 번 더 했거든요.   학번이 어떻게 되시죠? 82학번입니다. 공대 1반이었는데 자매반이 건축과였던 것이고 건축과는 다행히 포용력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대 축제에도 우리 1학년들을 초대해줬고, 그래서였는지 공대 1반에서 건축과 간 친구들이 많았어요. 촌극 할 때도 우리에게 출연하라 해서 저도 출연했어요. 내용이 중동에 한국 건설회사가 가서 부실공사로 난리 난 이야기였는데, 제가 아랍인 건축주였어요. (웃음) 문제는 그렇게 해서 2학년이 되어 건축과에 들어가니, 소위 즉흥적으로 건축과에 온 사람은 저밖에 없는 거예요. 학기 초 신입생환영회에서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했는데 제가 황 씨라 거의 마지막에 했어요. 앞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니 가령 이런 거예요. ‘나는 어렸을 때 마르셀 브로이어의 ‘밤과 낮의 주택’을 보고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에 구현해 내는 것에 매료되어 건축과에 왔다’ (웃음) 내 순서는 점점 다가오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고 해서 솔직히 얘기했어요. 앞의 친구들과 같은 건 없고, 원래 자연과학대학에 가려 했는데 우연히 공대 왔다고요. 그러다가 ‘사람이 무엇을 만드는 건 대단한 일인데, 만든 결과가 심지어 쓸모도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인 거 같다, 그래서 만들기를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소개했던 것 같아요.   80년대는 데모도 많고 학교가 어수선했죠? 저는 전형적인 데모 안 한 386입니다. 그건 솔직하게 얘기해야죠. 그게 저에게 두 가지의 흔적을 남겼는데, 하나는 부채의식이고요, 또 하나는 소속감이 없어요. 그렇다고 제가 전두환을 옹호했을 리는 없잖아요. 그런데 확실하게 나설 게 아니라면 동조하지 않았어요. 그런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면 하고 말면 말고죠. 아마 누나의 영향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3형제의 막내인데 누나는 정말 열심히 데모했어요. 당시 제가 대학교 1학년, 형이 2학년, 누나가 4학년, 이렇게 같은 학교를 다녔어요. 누나가 피아노를 전공한 음대생인데 사상 교육을 조직적으로 많이 받았는지, 이미 고등학교 때 집에 소위 불온서적이 많았어요. 그때 다 읽었으니 대학 와서는 새삼스럽게 뭘 읽지 않았죠. 광주를 보면서는 솔직히 두려웠어요. 앞서 말한 것처럼 그래서 사회 문제에 대해서 할 얘기를 해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남아있기도 하고요. 이 세상에 참여할 수 있는 많은 일이 있지만, 저에게는 남북문제인 것 같다고 방향을 정했습니다.   대학 시절은 어땠나요? 대학 2학년에 들어가면서 한 달 만에 아버지가 쓰러지셨어요. 바로 은퇴하셔서 22년을 그렇게 사시다가 2004년에 돌아가셨어요. 어린 나이에 조실부모한 것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중산층 집 아이였는데, 인생에 처음 시련이 온 거죠. 50대에도 암벽등반을 하셨던 분인데 그렇게 자기 육신의 감옥에 갇혀 계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기가 정말 괴로웠어요. 당연히 아버지 본인이 가장 괴롭고, 어쩌면 어머니가 더욱 괴로웠을 수 있죠. 매우 활달하신 분인데, 한창나이에 항상 아버지 옆에서 병간호해야 했으니까요. 대학교 때 열심히 놀고 연애도 했지만, 그런데도 그때 기억이 썩 좋지도 않고, 생각만큼 공부에 집중했던 것 같지도 않아요. 학점도 들쑥날쑥하고요. 그래서 지금도 우리 회사 직원 뽑을 때는 학점을 안 봐요. 의리상, 제가 별로 안 좋아서. (웃음)   설계 전공 수업에 충분히 만족하셨나요? 4학년 졸업 때가 되어서 대학을 너무 부실하게 다닌 걸 깨달았어요. 집중도 안 했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졸업 설계를 잘 해보자 했어요. 당시 팀으로 하던 분위기였는데, 평소에 잘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것도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한 번 열심히 해보자 했고, 논의 끝에 주제를 잡은 게 북창동 재개발이었어요. 수직입체 도시로 만들어 저층부에 데크, 위에 주상복합이 올라가는 계획을 했어요. 그게 그해 졸업 전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아마 제 동기들에게는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거에요. 저는 꼭 끝에 가서 열심히 하더라고요.(웃음) 8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는데, 당시 영향을 받으셨나요? 대학생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 게 쉽진 않죠. 대학원 가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매우 시원찮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론으로 공부하면서 이런 게 왜 나왔는지는 알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던을 대체할 만한 핵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요. 결국 모더니즘의 가장 심원에는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대체하겠어요? 모더니즘의 단점을 이야기하거나 부분적인 보완을 할 뿐이죠. 자주 하는 비유 중에,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부적을 붙이는 사람보다 세콤을 설치하는 사람이 많다면 모더니즘은 퇴조하지 않는다는 게 제 믿음이에요. 그런 면에서 저는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해요. 모더니즘이 보완할 부분은 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믿는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이번에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로 김종성 건축상을 받은 것도 옛 생각으로 돌아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시 한국의 학교 분위기가 디자인에 강한 사람을 키우는 건 약했지만, 오히려 사회적 관점을 많이 키워준 게 지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앞장서서 데모를 안 했다 뿐이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북창동을 대상으로 재개발 설계를 하며 고민했던 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건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렵게 만들기도 해요. 단순히 조형예술이 아닌 사회적 측면이 건축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요.   대학원 시절의 자료 중 가회동 한옥 실측작업 드로잉이 인상 깊었어요. 당시 실측 작업이 중요한 출발점이 된 건축가도 여럿 계시고요. 근대 한옥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던 때에 실측 작업은 의미 있는 흔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학창 시절의 사건 하나를 뽑자면 가회동 한옥 실측 작업이죠. 제 건축가 경력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니까요. (웃음) 제 기억에 당시에 그뿐 아니라 농촌 마을, 농촌 주택처럼 다양한 분야의 실측이 있었어요. 가회동 한옥은 이광노 교수님 무애연구실에서 한 게 처음인 것 같아요. 사실 실측에 처음 참여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어느 날 학교에 실측에 대한 공고가 붙었는데 학부생도 지원을 받아주어서 무슨 생각에선지 덜컥 지원했어요. 제가 성적이 별로 안 좋았다고 했잖아요. 고백하자면 그중 한국 건축사가 가장 낮았거든요. 후일담이지만 나중에 윤장섭 교수님이 ‘자네가 한옥에 대한 책을 썼다니, 놀라운 일이야!’ 하셨으니까요. (웃음)   그때는 그 실측 작업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지금도 당시 참여했던 분들의 면면을 보면 그때부터 뭔가가 시작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무애연구실은 서울대와 홍대가 같이 참여했거든요. 금요세미나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다른 학교 학생도 많이 알게 됐죠. 대학원에선 강원도 민가 조사에도 참여했죠. 보고서의 실측 도면 중에 과도하게 그린 그림이 하나 있어요. 당시 기준에서는 열심히 한 건데, 야단도 맞았죠. (웃음). 개도 그리고 개집도 그리고 개가 다니는 범위도 그렸던 기억이 나요. 아무튼 그때 실측하러 들어갔는데, 한국 건축사에서 배우고 고건축답사(당시는 그렇게 불렀어요) 때 돌아다녔던 그런 집의 풍경이 아닌 거예요. 도시형 한옥은 창고 같더라고요. 그때 뭔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이야기하던 한옥에서의 정갈한 삶과 너무 다른 거예요. 당시 4.3그룹 등 선배 건축가들이 한옥에 대한 글을 많이 쓰셨는데, 실제 실측하면서 보니 뭔가 그분들 말씀이나 현대인의 삶과는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변해야 하는 건 한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정리 이경희, 김상호  + 인터뷰 ②로 이어지며, 인터뷰는 오픈하우스서울 2018 홍보 기간 중 한편씩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