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HOUSE 한내 지혜의 숲, 장윤규, 신창훈 지역문화재생 이제 서울의 도시재생은 도심 중심의 거창한 도시 구조나 도시 블럭을 개발하고 변화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은 지역, 작은 동네를 이해하고, 버려지고 소외된 장소를 찾아내서 재생(Regeneration)함으로써 도시인의 직접적인 삶과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작은 공간인 한내 지역 주민커뮤니티 공간을 통해서 지역문화를 재생하려는 제안이다.  한내근린공원은 중랑천변과 나란히 자리잡은 자연체육공원이다. 대지는 한내근린공원의 초입에 위치하며 오래전부터 고장이 나고 버려진 분수대가 방치되어있어 지역주민들과 공원 사이의 단절된 공간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주거집중지역이지만 주민과 아이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부재하였다. 버려진 공공공간을 재활하여 한내근린공원의 활기를 되찾고, 작은 주민커뮤니티를 매개로 하여 지역문화와 자연공원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프로그램의 공간을 구성하고자 했다. 내부로부터의 건축 공간을 이루는 기본단위는 책꽂이 벽(wall)인 가구적 구조로부터 시작한다. 책꽂이 벽은 공간을 구성하는 구조이면서 분할하고 배분하는 장치이다. 과거의 벽이 구조적 한계에 의해서 고전적이며 공간적 소통을 막아서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가 제안하는 책꽂이 벽은 유동하는 공간으로 구성하여 서로 소통하여 통합되고 혹은 적절이 독립되는 이중적인 미로 구조를 재현한다. 책꽂이 벽의 배치와 크기는 프로그램 배치와 구조의 적용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했는데 즉, 가구와 공간과 구조의 조화를 실현하려 하였다. 100평이 안되는 작은 복합문화공간이지만 이곳에 오는 다양한 계층의 마을사람들은 유동하는 공간 곳곳에서 자신들의 목적과 유목성을 동시에 경험한다. 작은 공간은 통합적이며 순환적 공간을 통해 규모의 작음을 극복하고 다변적 가치의 공간으로 발전한다. 지붕을 이루는 삼각 프레임은 책꽂이 벽의 연장이며 미로와 같은 지붕 형태의 다양한 겹침은 그 사이로 자연의 빛을 받아들이는 틈새의 장치라 볼 수 있다. 다중적 코드의 미로공간이 자라나는 지역주민과 아이들의 상상과 창의 그리고 즐거움을 자극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글 OHS 사진 윤준환   운생동건축사사무소  http://www.usdspace.com   한내 지혜의 숲 장소 서울특별시 노원구 마들로86(월계동) 한내근린공원내 개관 월-토 도서관   09:00∼18:00                    지역아동센터  학기중 10:00∼19:00, 방학중 09:00∼18:00 휴관 매주 일요일, 법정공휴일, 임시공휴일 문의 02-979-7420 웹사이트 https://www.nowonlib.kr/htmlmanager/service/83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오픈하우스서울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우수상, 성북 선잠박물관, 이은경(이엠에이건축사사무소) 성북선잠박물관 일대는 박물관과 여러 시설이 조성되고 있는 지역입니다. 지역의 특징과 선잠박물관이 들어서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선잠단은 조선 시대 역대 왕비가 누에로부터 좋은 실을 얻게 해달라는 기원을 드리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선잠단은 1908년에 사직단으로 옮겨진 이후 터로 남게 되었는데, 복권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인근에 선잠박물관이 조성되었습니다. 작지만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한 선잠박물관은 옛것을 살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잠단의 역사적 가치를 깨우고 함께 호흡하는 성북동 역사문화관광 거점이자 시민문화 공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초등학교에 기대어 있는 대지 주변 상황이 흥미롭습니다.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고자 하셨는지요? 성북동은 역사와 문화적 토대가 비옥하지만, 거리 풍경은 이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차 높은 초등학교 축대벽을 등지고 성북로만 바라보고 있는 위치가, 성북동의 역사적 풍경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잠박물관의 입면은, 직조의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비단처럼, 부분이 조립되어 전체가 만들어지는 구축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작은 박물관으로 시작했지만, 선잠단 방향으로 접하는 다른 공공건물까지 미래에 확장되는 것을 상상했어요. 역사적 거리가 현재에도 재해석되어 이어짐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리모델링 프로젝트라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기존 건물의 특징은 무엇이었는지, 새로 박물관을 조성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셨는지요? 기존 건물은 오래된 근린상가 건물이라서 층고가 낮고, 뒷면이 축대벽과 붙어있어서 평면이 얇아요. 그래서 박물관의 공간감을 실현하기는커녕 필요한 설비공간을 확보할 때 천장이 오히려 더 낮아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물관에 전시장, 수장고, 사무소 등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면적이 있어서, 바닥을 오픈하는 등의 공간적 사치는 지양하고, 가용면적을 최대한 활용하였습니다.   외장재가 건물의 흥미로운 인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알루미늄 파사드를 만들게 된 이유와 제작 과정 중 에피소드가 궁금합니다. 선잠박물관 바로 앞으로 한양도성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긴 장벽이지만 산을 따라 곡면으로 올라가는 부드러움이 돌의 물성과 대조되며 아름답습니다. 성벽이 솔리드한 벽면이라면, 이와 상대적으로 가벼운 켜(layer)로서 투과하는 벽(silk wall)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알루미늄 질감으로 만들어진 파사드를 성북로를 따라 길고 곧게 뻗어 나가게 해서, 두 개의 벽이 마주 보며 상호 대화하는 구도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쉬운 것은 착공 후 공사비가 낙찰가 차이로 더욱 줄었습니다. 입면에서 의도했던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 10cm가 필요했지만, 8cm로 줄여 재료비를 절감해야 했습니다. 조립과 확장을 할 수 있는 축조 방식이므로, 나중에 깊이의 차이는 새로운 변화의 이미지를 만들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린생활시설이었던 건물이고 또 면적이 작다 보니 평면을 풀어내기 어려웠을 듯합니다.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내부 가용면적을 최대화하고 이동 동선을 끌어내고, 외부와 관계를 갖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증축한 장애인 엘리베이터로 올라가서 계단으로 내려오는 동선을 고려하여 계단이 전시의 확장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했어요. 가급적 기능적인 화장실과 사무실 공간은 숨겨서 이동 동선이 모두를 지나가며 주변을 전시장 일부처럼 경험하도록 의도하였습니다. 지붕에서는 한양도성 전망을, 길에서는 개방된 전시 공간을 열어두고자 했습니다.   성북구에 기반을 둔 사무소이면서 성북구의 공공건축에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공공시설의 설계와 실현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여러 행정 절차를 거치면서 건축가의 설계 의도를 끝까지 지키고 완성도를 높이는 일일 텐데요. 어떻게 이를 끌어내고 계시는지요? 공공건축의 실현 과정은 끊임없는 논의로 이루어집니다. 많은 관계자에게 설계 의도를 전달해 합의를 끌어내고, 3차원으로 종합되는 건물을 2차원의 분해되는 도면으로 그려내고, 낙찰가로 정해지는 시공사가 정해진 비용으로 실현할 수 있되 전체적인 완성도를 포기하지 않도록 디테일을 선택하고, 시공 현장에서 벌어지는 변수에 대응하며 설계 의도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공공건축의 발주, 시행, 운영의 영역에서 건축가가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고려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제도적으로 보완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공공건축은 건축설계 분야에 과도한 업무 범위와 법적 책임까지 지우고 있습니다. 건축 행위를 하기 위해 관련된 도시, 안전, 환경 등 여러 복합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업무도 건축에 부여하고 그 책임도 물고 있습니다. 발주처가 제시하는 지방계약법과 특약조항으로 만들어진 계약서를 볼 때 과중함과 불공정에 대한 무거운 짐을 느끼게 됩니다. 공공의 재산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일이기에 책임이 따르는 것이겠지만,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조적이고 감동을 주는 건축이 아닌, 늘 해오던 방식으로 복사하듯 건물을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특별하게 떠오르는 공공건축이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공정하며 대등한 관계, 명확한 업무로 일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좋은 결과물은 당연히 따라올 것 같습니다.  인터뷰 진행 임진영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오픈하우스서울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대상, 양구백자박물관 도자역사문화실, 이진오(건축사사무소 더사이)     양구는 휴전선에 면해 있고 군사 지역이 많아 심리적 거리감도 있습니다. 양구에 백자박물관이 자리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2004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양구지역의 유적 발굴조사를 하면서 그 계기로 발굴조사 보고회가 열렸어요. 그 자리에서 출토된 유물과 기증유물을 전시하고 생산하는 목적의 박물관 계획설계를 제안한 것이 기회가 되어서 군립방산자기박물관을 설계하게 되었습니다. 박물관이 들어선 곳은 직연폭포 인근 양구군 소유의 주차장 부지입니다. 사방으로 백토를 품은 산이 둘러싸여 있고, 북측에 2차선 도로 건너편 마을이, 남측으로 논이, 남서쪽으로 천(川)이 감싸고 도는 곳입니다. 최초 박물관 건축에 쓰인 다짐벽에는 이 냇가의 흙을 사용하기도 했어요.                            양구백자박물관은 왜 증축하게 되었나요? 2005년 계획부터 증축을 고려해서 동측으로 증축 부지를 남겨 두었어요. 먼저 방문객의 체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체험동 건립이 결정되었어요. 입찰을 통해 춘천의 설계사무소가 낙찰되어 기존 박물관의 모티브를 차용한 체험동이 2009년 완공되었죠. 이후 박물관에서는 늘어나는 공간 수요와 미래 프로그램의 운영을 염두에 두고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군유지를 합병하는 등 부지를 확대했어요. 서울대학교 도예과와 MOU를 맺으면서 2013년 백자연구소가,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도자역사문화실이 건립되어 2020년 7월 마침내 박물관 단지가 완성된 거죠.   이번에 설계한 도자역사문화실은 2005년에 설계한 양구백자박물관의 증축과 관련 시설을 설계하면서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프로젝트인데요. 어떤 과정으로 설계를 이어올 수 있었나요? 양구군의 관심과 지원, 박물관 구성원의 노력에 따른 결과입니다. 정두섭 관장님은 건물이 완공된 이후에 부임하셨어요. 설계자에게 누수 등의 하자 해결과 운영상 문제가 있는 공간의 변경을 상의하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는데, 소소한 건축 문제를 지속적으로 상의하면서 지속적으로 증축 설계를 의뢰한 것입니다. 관장님은 박물관이 통일된 맥락으로 증축되기를 바라셨어요. 백자연구소와 도자역사문화실을 동일한 설계자에게 맡기는 것이 감사에서 지적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입찰이나 설계 공모가 아닌, 원 설계자와의 수의계약을 추진하셨습니다. 우리도 관장님의 설득과 부탁에 동의했고요.   처음 양구백자박물관 설계에서 고려했던 것과 증축한 도자역사문화실을 통해 만들어낸 새로운 관계 설정이 궁금합니다. 도자역사문화실은 기능적으로 전시 공간을 연장하고 수장고를 증축하는 거에요. 따라서 기존 시설과의 연계가 중요했습니다. 배치도를 보면 점으로 존재하던 것들이 선으로 연결된 것을 알 수 있어요. 단면도를 보면 부지의 단자를 이용하여 입체적으로 연결한 것이 보이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존 시설과의 사이에 아치 회랑으로 둘러싸인 마당을 만들고 건물 안에도 중정을 두었어요. 늘어난 동선의 길이감과 함께 겹쳐진 공간의 깊이감을 두어 방문자들이 이곳에서 시간을 길게 감지할 수 있도록 의도했습니다.      새로 증축된 부분의 재료 역시 기존 박물관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접근하셨나요?   양구백자박물관에서는 처음부터 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토가 주인공이었어요. 방문하는 분들에게도 쉽게 그 맥락을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랐고 따라서 재료의 물성과 그 쓰임을 통한 건축의 구법이 생각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다짐흙벽과 전벽돌, 시멘트벽돌(안료를 지정해 주문제작), 점토벽돌 치장쌓기는 본디 흙인 것을 건축화 한 것이고 많은 노동력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구법이라는 점에서 도자기의 생산과정과 닮아 있어요. 검은색 노출콘크리트의 안료 성분은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산화철입니다. 유약의 원료로 쓰이던 느릅나무와 물푸레나무를 식재로 선택한 것도 개념적 맥락을 유지하기 위한 거예요.   공공시설의 설계와 실현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여러 행정 절차를 거치면서 건축가의 설계 의도를 지키고 완성도를 높이는 일일텐데요. 양구백자박물관 증축에서 어떤 협력 과정으로 이를 이끌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양구백자박물관을 작업하는 16년 동안 세 분의 군수에게 보고를 했고 행정과 계획을 협의한 문화체육과, 관광문화과 담당자와 백자박물관의 직원도 여럿이었어요. 하지만 방산자기박물관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행히 정두섭 관장님이 자리하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불만과 불평으로 만났지만 오랜 시간 함께 같은 장소를 고민하면서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죠. 관장님은 실비조차 되지 않는 설계비에도 애정을 쏟는 건축가가 대견했는지 일관되게 건축가의 설계 의도를 지지해 주셨어요. 현장에 자주 방문하지 못하고 공공건축물의 제도적 특수성으로 감리의 권리가 없는 설계자를 대신해 건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공간이 그 쓰임새에 충실하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의 건축물이 변주를 통해 확장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공정이라는 단어를 방패로 빙어적인 태도를 가지는 공공 영역에서 이러한 시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또 이런 시도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두섭 관장님이 코로나로 공공건축상 현장심사에는 함께 하지 못하고 영상으로 참여했어요. 심사위원들이 공공건축 발주의 기준이 되는 설계공모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이 수상의 결격 사유가 될 수도 있다고 물었죠. 관장님은 “제가 그 일로 계약부서와 다투고, 감사에서 수 차례의 경고와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떳떳하고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작업의 결과가 나쁘지 않았고 이후에도 성실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고 이진오 소장은 실력과 신의가 있는 건축가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증축도 같은 사람이 맡아서 완성해 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설계를 부탁하고 행정을 설득해서 진행한 것입니다.” 나 역시 그 마음의 진정성 때문에 일을 했어요. 시공의 품질은 형편없지만 품격을 유지하고 있어 다행입니다.   공공건축에서 발주, 시행, 운영의 영역과 건축가가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부분은 무엇인지, 제도적으로 보안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나라의 건축, 특히 공공건축의 법과 제도는 에너지효율등급이 나쁜 가전제품과 같아요. 절망스러운 것은 문제를 모두 알고 있지만 고칠 수 없다는 거죠. 혁명이 필요한 이유예요. 국민들은 건축 과정에서 공정, 안전, 친환경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제도와 규칙의 상호모순, 이율배반적 상황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책임을 분산시키는 절차와 조달등록 제품의 이윤을 보장하는 시스템이 가장 문제예요. 기획, 예산 편성부터 설계자를 선정하는 설계공모 과정에서는 부단한 노력을 들여요. 반면 시공자를 선정하는 것은 로또복권 당첨과 같은 가격입찰이 대부분이죠. 어이없게도 더 나쁜 턴키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요. 민간시장에서 좋은 건축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을 살펴보면 답이 나올 거라고 봐요. 인터뷰 진행 임진영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오픈하우스서울 이성관 올해 건축의 날 유공자 훈장은 한울건축 이성관 대표가 수상하였습니다. 순수예술로서 건축을 지향하기보다 객관적이고 조직적 방법론으로 건축에 접근해 온 건축가 이성관은 중성적이고 중립적인 집이 가진 생명력을 주목합니다. 작가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건축 본연의 구축과 구현에 몰입해 온 건축가 이성관은 군더더기 없는 절제와 효율적인 해법을 보여주면서 건축 본연의 공간을 담아왔습니다.   건축가 이성관의 대표작이자 제1회 김종성건축상 수상작인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전쟁기념관을 건축가와 함께 돌아보는 오픈하우스와 개별 방문할 수 있는 여주박물관을 소개합니다.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 기간에는 건축가 이성관의 인터뷰도 함께 소개합니다.   INTERVIEW                                             건축가 이성관    OPENHOUSE     10월 11일 오후 3시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OPENHOUSE     10월 13일 오후 3시       전쟁기념관 VISIT YOURSELF                                    여주박물관    
SPECIAL 유종수, 김빈(코어건축사사무소)   건축가 특집  유종수, 김빈(코어건축사사무소)     올해 건축가특집은 공공 건축에 주목하는 주제에 맞추어 공공 프로젝트의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코어건축(유종수, 김빈)을 소개한다. 코어건축의 대표작인 서울서진학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풍부한 표정을 지닌 학교 공간은 오랜 시간 이어진 지역의 사회적 갈등을 위로하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일반 학교 건축에서도 보기 힘든 팟(POD), 넓은 복도와 중정, 다채로운 재료가 만드는 공간은 이곳을 이용하는 아이들에게도, 지역 주민들에게도 건축이 주는 하나의 가능성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통의 방식으로 그러나 특별한 건축을 풀어내 온 코어건축의 작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공공 건축 영역에서 공모전에 참여해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이를 건축가의 의도대로 완성하는 과정은 하나의 의뢰인과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 민간 시장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친다. 최저 입찰과 조달청 시스템 안에서 비현실적인 일정과 기획의 부재를 만나게 되면, 설계안의 의도와 완성도를 지키기 위해 몇 배의 노력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코어건축은 이 고단한 공공 영역에서 공모전이라는 진검 승부로 프로젝트를 얻고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건축 원칙을 지키며 공공 건축의 다양성을 만들어오고 있다.   대전차방호시설을 리노베이션해 예술창작공간과 문화공간으로 바꾼 평화문화진지, 공진초등학교를 개, 증축해 가장 보통의 특수학교를 만들어낸 서울서진학교, 한강 공원의 전망을 바라보는 한강 공원 양화지구 매점, 한강 수난구조대를 위한 광나루 119 수난구조대, 주변 대형 건축물 사이에서 분절된 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까지, 코어건축은 공공 건축의 질적 완성도를 높이고 자신들만의 건축 유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올해 건축가특집은 기린그림과 협업으로 진행된 서울서진학교 영상과 함께 코어건축이 진행한 6개의 공공 건축을 만나보며, 인터뷰를 통해 공공 건축에 개입하는 건축가의 태도와 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SPECIAL 보편적이고 특수한 건축분투기 ③, 유종수, 김빈(코어건축사사무소) 대전차 다음에 당선된 게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이다. 서울서진학교와 비슷한 시기에 당선이 되었는데, 준공까지 오래 걸린 편이다. 김빈 설계도 그렇지만, 공사가 한동안 멈춰 있었다.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는 건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철역 연결 통로가 함께 있다. 관리 주체도 다르고 건축 허가 사항도 달라서 거기서 오는 복잡함이 있었다. 공사 시작하고 나서 상수도관 문제로 거의 한 1년 정도 멈춰 있었던 것 같다. 유종수 설계 기간이 3배 늘어났고 계약 연장이 6회차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하를 연결하는 부분에서 협의할 부분이 많으셨을 것 같다. 그 과정은 좀 어떠셨는지 궁금하다. 김빈 대표적인 예로 건물과 통로가 같은 벽이다. 그 벽을 SH와 지하철 교통공사가 어떻게 나누어 소유할 것인가부터 시작했다. 단일 벽의 소유에서부터 설계를 시작한 거다.   그다음은 관리 문제인데, 그 통로는 지하철 일부가 되고 관리는 시설공단에서 하니까 멋지게 하려고 해도 관리 주체나 소유 주체는 ‘관리가 불편하다, 통로가 이래서 되느냐’는 의견을 낸다. 우리는 SH 공사와 협의했기 때문에 끝까지 의사 표현을 하고 디자인해서 설계하긴 했는데, 시공이 원하는 만큼 되지는 않았다. 디자인이 조금 변경되었지만 큰 틀에서 원하는 방향대로 갔다.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나 서진학교도 재료와 팟(POD) 같은 요소가 공간을 풍부하게 한다.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도 공기업이 갖기 힘든 외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어떻게 이런 제안을 했고 또 발주처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사람들이 가장 빨리 인지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재료와 낯선 창의 패턴 같은 것이다. 공공건축이라고 해도 당연히 건축가로서 시도하고 싶은 것이 있다. 더군다나 이 대지의 경우 바로 옆에 큰 주차장과 건너편 대형쇼핑몰이 있어서 그 덩어리들과 싸우려면 훨씬 도드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경치가 워낙 좋은 이말산이라는 북한산 자락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조형이 나왔다. 김빈 처음 공모전에 제안했던 안은 더 단순했다. 중요했던 것은 루버와 사이사이 있는 판들이 전체 매스를 분절하는 것이었다. SH 담당 부서가 설계를 잘 아시는 분들이 모여있었기 때문에 실시설계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의견도 받아주고 입면을 바꿀 기회가 왔다. 예쁘게 하려고 바꾸었다기보다, 유 소장님 말처럼 주차장과 광장 사이에서 더 세져야겠다는 생각에 이 디자인으로 진행되었다.   사용하는 건축 언어는 단순하지만 특별한 장면을 만든다. 모든 프로젝트가 단순한 언어를 쓰는데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건축을 표현하는데 지향하거나 친숙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는지 궁금하다. 김빈 유 소장님은 타고난 것 같다. 형태를 잘 다룬다. 반면 저는 선을 하나 그어도 명확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잘 안 된다. 사선 하나, 재료나 형태, 볼륨을 전체로 확장할 때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결과적으로 납득이 되는 경우가 많다. 유종수 모든 건축가가 그럴 것 같은데, 저 자신만 놓고 봤을 때 아직 건축 어휘를 가지고 작업하고 싶지는 않다. 20년 가까이 건축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선생님의 건물을 봤겠나. 내가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했든 이미지로 머리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저는 그게 무의식중에 나온다고 생각한다. 한편 다른 사람이 한 건 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의 차이를 두고 새로운 것을 지향한다. 그런 것들이 다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우리는 둘이 같이해서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찾는데 적절하게 도움이 된다. 많은 시간이 쌓이고 접점이 많이 생겨서 동의하는 부분도 많고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같은 방향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 김빈 그래도 다행히 1+1이 2까지는 못 가도 1.2 정도 되는 것 같다. 당장 프로젝트를 딸 수 있을지 앞일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지난 10년을 버티고 있는 것 같다. 유종수 앞서 말씀하신 계보나 좌표에 대해 우리도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건축적인 태생이 어디냐고 한다면, 한국건축에 대해서 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제가 본 건 다 현대 건축이고 한옥에서 무언가를 느낄 만한 기회도 없었다. 단지 좋은 건물을 많이 접하거나 건축을 하면서 학습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무언가를 정해 놓기보다는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좋은 건축에 대한 기준이나 혹은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일단 콘셉트가 명확한 게 좋다. 우리도 그런 방향을 지향하려고 하는데, 새로운 건 굉장히 어려운 것 같다. 명쾌하면 좋을 것 같고 재료도 항상 새로웠으면 좋겠다. 건축 산업 전체가 진보하는 기술력을 무시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당연히 루이스 칸의 건물처럼 그 자체로 압도하는 빛, 공간 등 건축의 기본이 되는 요소가 중요하다. 결국, 그것을 취하는 태도가 조금씩 다른 거 같다. 김빈 공간도 좋고, 빛도 좋고, 명쾌함도 당연한 부분인 것 같다. 제가 더 끌리는 부분이라면 절제된 것을 좋아한다. 미니멀하다거나 재료가 단순하다는 차원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자하 하디드의 DDP를 보면서도 절제돼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명쾌하다는 것과 연결되는 것 같다. 과도한 제스처가 나오지 않는 절제된 건물을 좋아한다.    사무실을 처음 열면서 건축의 새로운 유형 탐구에 관해 관심을 적었다. 결국, 불명확한 관념을 걷어내고 건축 자체의 구성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유종수 예를 들어 신설동 한옥(2016)을 보면 건물 위로 철골 구조를 올렸다. 한옥을 좋아하는 분들이 보면 한옥을 모르는 사람이 건축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옥의 아름다움과 좋은 점은 많은데, 저희는 새로운 유형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좋고 나쁘다를 떠나서, 이야깃거리를 만들 수 있고 가능성을 확장해줄 계기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문제작이 오히려 이야깃거리가 많을 수도 있다. 김빈 유형이라는 단어는 구체적인 무언가를 하고자 했다기보다 조금씩 새롭게 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말씀하신 것처럼 신설동 한옥은 우리에게 파격적인 업무였다. 통상적인 한옥 위에 증축하는데 띄워서 올렸다. 결과적으로 기존 한옥을 덜 해치는 방식이 되었다. 만약 다른 방식으로 증축했다면 많은 부분을 해체하거나 기와를 다 부셔야 했을 거다. 이 방식은 상대적으로 기둥만 뚫고 내려갔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 한옥의 많은 부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접근하지 않았을 거다.      건축의 요소가 풍부하다.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과하지 않다. 과감한 요소를 절제해서 쓰는 태도가 코어건축의 특징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어 당선된 것이 광나루 수난구조대, 망우119안전센터, 한강공원 양화지구 매점인가? 김빈 2018년도에 서울시 스케이트장, 광나루 수난구조대, 돈의문박물관 수직 정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2019년에 망우 119안전센터가 당선되었다. 이때 사무실이 조금 배고팠다. 2020년도에 다시 공모전에 엄청나게 참여했다. 한 해 동안 15개 정도 했고 마감은 13~14개 정도 했다. 내내 낙선하다가 연말에 일산직업능력개발원이 당선되고 해를 넘겨 1월에 2개의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2021년 하반기에 민간 지명 공모전에서 당선되었다.  유종수 한강공원 양화지구 매점은 공모전이 아니라, 광나루 수난구조대를 하면서 협력했던 특수구조 업체의 제안으로 진행된 작업이었다.     서울광장스케이트장은 해마다 젊은 건축가가 공모를 통해 진행되었다. 그때도 지명 공모였나? 김빈 그렇다. A3 세 장 정도 제출하는, 지명 공모 중에서도 가장 간소화한 공모전이었다. 스케이트장이 시간이 촉박하고 빨리 지었다가 빨리 없어지니 간소하게 진행되었다. 유종수 대지를 1년 중 3개월 정도 스케이트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부분이 재미있어서 참여했는데, 어떻게 하면 예산을 아끼고 공사 기간도 수월하게 할까 고민해서 공기막 구조를 제안했다. 가벼운 재료를 쓰고자 했다. 시청 광장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 같다. 제안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김빈 구조물이 일시적으로 있다가 사라지는 거라, 빨리 짓고 빨리 없앨 수 있는 게 가장 좋다. 그리고 재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조건으로 이중 공기막을 제안했다. 구현하는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공기도 금방 넣었다가 철거할 때도 금방 뺄 수 있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형태적인 것도 있지만 그 공간의 원형을 사람들이 한 바퀴 돈다는 공간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고려했다. 공기막 구조는 단열에 대한 장점도 있다. 유종수 시청 광장은 3면이 도로라서 접근이 좋지는 않다. 시청광장에 약 80m 지름의 원형경기장을 만드는 것이고, 조명까지 고려하면 그 안에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장면이 시민들에게 일종의 공공미술처럼 다가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광장을 광장답게, 이벤트 공간으로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광나루 수난구조대는 부유하는 건물이라서 기술적인 부분도 있지만, 외관의 질서도 인상적이다. 김빈 뜨는 구조는 기술적인 부분이고 사실은 놓였을 때를 생각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잔디밭에 있는 장면을 처음 생각했고 부유체라고 두께가 약 1.8m정도 되는 덩어리가 밑에 있는데 땅을 파서 그걸 감추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한 번 떴다가 내려오면 파인 땅에 진흙이 가득 차서 기술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디자인의 형태는 사실 프로그램과 관계가 있다. 한강을 관리하는 소방서니까 상주하는 사람이 있고 먹고 자야 한다. 체력 단련을 하는 시설도 있어야 한다. 지금은 그렇게 쓰이지 않는데, 지침에는 시민들을 교육할 수 있는 안전교육장을 담겠다고 했다. 그래서 계단식 강당도 필요했다. 이곳은 필지가 아니니 땅도 직사각형으로 주어졌다. 그 안에 필요한 요소를 넣어보니 형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숙소와 대피 동선, 1, 2층을 연결하는 출입 동선이 필요해서 동선 따로, 매스를 따로 배치하면서 만들어졌다. 향을 고려해 숙소를 배치하고 재료는 단순하게 쓰고 싶었다. 유종수 서울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 시청 광장도 그렇고 낙산도 그렇다. 한강도 서울에서 너무 중요한 공간이다. 그런 곳에 무언가를 한다는 게 굉장히 끌렸다. 장소적인 측면에서 끌리는 게 있었고, 부력체를 이용한 특수구조인데, 홍수 때 수난 구조를 하기 위해서 땅에 있어야 하는 것도 난센스 같았다. 1년 중 비 오는 기간은 얼마 안 되는데, 사용하는 사람을 위하면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플로팅 한다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광나루 수난구조대는 건물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건물이 아니라 시설물이다. 한강에는 건축이 없다. 시설물밖에 안 된다. 그리고 철골콘크리트로 지을 수 없다 보니 재료도 철물 같은 거로 조립할 수 있는 것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터디할 때는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재료도 있었는데 비용 때문에 실현하지 못했다. 마지막에 해머로 누른 콘티 타공을 썼는데, 현장에서 햇살이 딱 한강에 비치면 울렁이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 한강에 뭔가를 할 때, 한강공원을 이용하는 많은 시민이 보기에도 좋아야 한다. 주변의 다른 건물을 보면 예전 서울시 디자인과에서 화장실을 매뉴얼화해서 노란색으로 만든 게 있다. 그 이후에 건축가들이 만든 전망대도 있어서 조금 일반적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필요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하지만 4면의 표정이 다르다. 어떻게 접근했는지 궁금하다. 김빈 우리 작업을 보면 기본적으로 재료를 많이 쓰지 않는다. 쓰더라도 하나의 재료로 강조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면서 변화를 주는 건데 광나루의 경우는 긴 면과 짧은 면의 프로그램이 극단적으로 달랐다. 메인 프로그램은 짧은 면에 다 몰려 있고 긴 쪽으로는 서비스-헬스장이나 이런 동선이 붙어 있다. 그러면 접근할 때 한쪽 재료를 다르게 표현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키네틱으로 접근했다가 그곳이 창이 많아야 하는 곳과 적어도 되는 곳이 있어서 피하고, 그럼 뭐가 좋을까를 고민했다. 결국, 철골 구조라 물에 떠야 해서 무거운 재료를 배제하고 나니 금속으로 점점 좁혀졌다. 금속 표면이 울렁거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프로젝트마다 재료를 통일하려고 애쓰고 그걸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며 접근하는 것 같다. 망우 119안전센터에서는 콘크리트를 쓰고 있는데 어떻게 접근했는지 궁금하다. 김빈 덩어리를 스터디하면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어긋나게 하면서 복합적으로 아이디어가 생긴 것 같다. 3.9라는 세팅을 해놓고 3분의 1씩 끊어내면서 외부에서 조경이 되는 면이 생기고 어느 곳은 안에서 쓰기 좋은 공간이 생기도록 조합했다. 그래서 큰 틀에서는 보면 한 층에 재료 세 개가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사이 공간에 대한 비례감이나 공간감이 인상적이다. 망우 119안전센터나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에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사이 공간을 만날 수 있다. 특별히 공을 들이는 부분이 있는가? 김빈 일반론으로 말하자면 공간을 시뮬레이션하고 세팅할 때 적당한 치수를 가지고 접근한다. 예를 들어 망우 119안전센터의 조그만 테라스 같은 경우, 숙소 사이에서 한 사람이 바람 쐬러 나왔을 때 적절한 공간이다. 어느 정도 크기라면 이곳을 쓸 수 있냐는 접근을 하고, 이것을 입체적으로 보았을 때 어떤지 살펴본다. 결국, 치수나 스케일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치수의 기준은 무엇인가? 치수가 아니더라도 외부 공간이나 연결 공간을 만들 때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서 듣고 싶다. 김빈 당연히 감이 있다. 말씀드린 것처럼 예를 들어 외부 공간이 있다면 거기에 접한 복도나 실이 있다. 그 둘의 관계로 정해지기도 하고 아니면 전체 볼륨에서 테라스가 디자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다른 볼륨을 조정하기도 하는데, 시작은 평면의 치수이고 이를 조정해나간다.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 유종수 처음 설계할 때 항상 콘셉트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 방향을 어떻게 잡을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놀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 주어진 조건에만 만족한다면 그냥 단순한 건물이 될 거다. 처음 콘셉트를 유지하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건 결국 그런 부분들인 것 같다. 적정하게 부분마다 스케일, 비례감을 잘 찾아가면서 만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김빈 SH 은평서대문종로센터같은 경우 튀어나온 볼륨과 들어간 부분이 요철을 이룬다. 튀어나온 부분은 책상 하나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폭에서 조금 넓다. 그곳이 주 사무 공간이었기 때문에 마주 보는 책상이거나 책상 하나 정도 용납할 수 있는 최소 폭이었고, 그런 기준으로 폭을 조정해나갔다.   건축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태도에서 ‘직업인으로서 건축가의 의미’를 생각한다고 하셨는데, 직업인으로서 건축가는 무엇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일단 직업으로서는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는 직원들을 같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사회는 계속 나아지고 있어서 우리도 더 좋은 환경을 만들려고 하고, 한편 아무리 하려고 해도 뒷받침이 안 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경제적인 부분도 있고 시스템 문제도 있고, 저희 때와 생각이 다르기도 하다. 그래서 조금씩 변화해 가면서 바꿔야 한다. 기본적으로 노동의 대가를 미루면 안 되고,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노동 시간과 근무 기준은 맞추고 싶은 게 우리의 큰 방향인데, 아직 우리도 그걸 지키지 못하고 있다. 실천을 함으로써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을 개선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있다.   김빈 ‘직업으로서의 건축가’라는 표현은 이런 거다. 건축가라는 직업이 가진 속성이 있다. 본질은 당연히 도시와 사회에 좋은 건물을 만들고 도시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반면 그냥 직업으로서 속성이 있다. 건축가는 클라이언트가 있어야 존재한다. 의뢰인의 요구에 충실하다는 의미 보다는 직업이 가진 속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미다. 공공 건축이든, 민간 건축이든, 일이 들어오면 제한된 조건에서 우리가 가진 전문성과 타고난 감각, 재능을 발휘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직업적 본질이다. 그것을 최대한 집중해서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이 당연히 중요한데 건축가의 속성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는 차원에서 한 이야기이다.   건축가로서 서울에 대응하는 태도도 궁금하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 건축가로서 서울의 속도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여쭤보고 싶다. 김빈 사실 서울을 바라본다고 할 때 건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빨리 변하는 것도 맞고 그 와중에 오래된 것을 남기려고 하는 반작용도 너무 강하다. 거기에 부동산이라는 경제 현상이 서울을 지배하고 있어서 건축적인 시각으로만 보기 어렵다. 어쩌면 지금 용광로 같은 상황 자체가 서울의 모습이 아닐까? 변화의 속도에 대응한다기보다 서울에서 계속 작업을 한다면, 결국 우리가 가져와야 할 콘텍스트는 서울의 역사라기보다 지금 주어진 상황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때그때 주변에서 취할 수 있는 걸 취하면서 자유롭게 접근하면 좋겠다. 유종수 깊게 생각해본 것이 아니라서 조심스럽다. 단지 내가 사는 도시이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사실 건축하면서 속도감은 잘 인지하지 못한다. 단지 대전차기지처럼 프로젝트가 주어졌을 때 불과 50년 전에 황무지였던 곳에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서는 자료를 보면 정말 빠르게 변하는 도시구나 싶다. 하지만 그런 것도 그냥 관념 중 하나인 것 같다. 그저 내게 주어진 건축에서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저는 건물 하나로 도시를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50년 만에 이렇게 바뀌었는데, 과연 50년 이후에는 우후죽순 들어선 아파트들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를 우리 모두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항상 조심스러운 게 건축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도시와 도시 계획대로 조성되는 도시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건축가가 만든 도시 중에서 좋은 도시가 없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완성도를 만들기 가장 어려운 공공 건축 분야에서 좋은 결과물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이미 증명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지금 진행하시고 있는 민간 프로젝트 소개도 부탁드린다. 김빈 제주도에 300㎡(90평) 주택을 하고 있다. 또 성수동에 복합문화시설을 설계하고 있다. 기존 공장을 남기면서 위로 새롭게 증축하는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남산에 네리앤후 상하이 중국 건축가와 로컬 아키텍트로 협업하고 있다.   코어건축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김빈 건축적인 부분과 회사 시스템이 아닐까? 회사의 시스템은 상식적인 회사 운영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아틀리에라는 게 시간을 많이 들이니까 당연히 시스템이 필요하다.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게 의미 있는 건 알지만 일반적인 회사 운영의 관점에서 보면 비상식적인 부분이 많다. 상식적인 근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직원들이 아직 야근을 많이 해서 안타깝지만 덜 하게 하고 싶다.   유종수 최근 민간 지명공모전에서 우리가 선택된 것은 건축주의 요구를 잘 받아들여 줄 수 있겠다는 이유였다. 안을 고집할 수도 있지만, 충분히 바뀔 수도 있다. 그게 좋다, 나쁘다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우리는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색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과물로 만들어 보여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부탁드린다. 유종수 시민들에게 쉽게 얘기한다고 해도 건축가의 이야기가 잘 와닿지도 않을 수 있다. 건축이라는 게 꼭 어려운 게 아니고, 오픈하우스서울에서 시민들에게 많은 건축을 알리면서 건축이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다가오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다. 저희 작업도 그렇게 봐주시면 좋겠다. 김빈 순간순간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 애쓰고 있다. 결국, 우리가 하는 일이 건축이니까 좋은 걸 만들려고 한다. OHS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SPECIAL 오래된 집 집에 대한 탐색을 이어온 오픈하우스서울의 올해 두번째 테마는 <오래된 집>이다. 이번 테마에서는 시간의 축적뿐만 아니라, 집의 오래된 내력을 주목하고, 손님을 맞고 환대하는 집의 공간을 탐색한다. 그 시대 삶의 양식을 짐작할 수 있는 오래된 집을 통해 TV가 거실을 점령한 ‘게으르고 나태한 거실’이 아닌, 아직 응접과 환대가 이루어지던 1960~80년대의 주거 공간 구성을 탐색하려는 의도이다. 특히 이번 <오래된 집>에서는 건축가 김수근의 초기 주택인 청운동 주택과 그의 마지막 주택 설계가 된 고석공간이 오픈하우스서울을 통해 처음 공개된다. 두 집은 건축가 김수근의 시작과 마지막에 놓여 있지만, 애착을 가진 새 주인을 만나 오늘의 일상을 쌓아간다는 공통점도 있다. 1968년에 완공된 청운동 주택은 외부와 내부 마감재는 변형되었지만, 강한 조형성을 가진 외관과 기본 공간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김수근의 초기 건축을 탐구할 기회를 주고 있다. 고석공간은 건축가 김수근의 누나인 김순자 여사와 한국 화단의 대표 작가인 박고석 화백의 아틀리에이자 집으로, 현대적인 평면 구성 안에 한식 공간의 정갈한 공간감을 담고 있다. 배형민 교수는 고석공간을 통해 모듈 구성을 탐색하던 김수근의 후기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고 평한다. 1966년에 지어진 장충동 까치내는 건축가 나상진이 설계한 집으로 4대에 걸친 대가족의 역사가 담긴 곳이면서 지역 어른으로서 많은 친척과 청년들을 맞아주던 환대의 공간이었다. 2000년대 집을 수리하면서 내부 마감재 등 일부가 바뀌었지만, 응접실이 반복적으로 배치된 평면 구성과 계단실은 여러 세대가 함께 살던 이 집의 내력을 보여준다. 또한, 사진으로 남은 목재 마감의 흔적은 수공예에 가까운 당시 제작 방식을 보여준다. 인상적인 것은 오래된 집들의 가장 깊은 곳에 집의 청사진이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집주인에게 건네는 건축가의 마지막 선물인 청사진과 허가 도면은 집의 출생신고서처럼 기록물로 남아 있다. 올해 오픈하우스서울에서는 청운동 주택 청사진과 고석공간의 도면 일부를 최초로 공개하고, 동백꽃 까치내 건축주가 제공하고 건축가 임태병이 기록화한 건축가 나상진의 청사진과 외부 투시도를 공개한다. 또한 모래내주택 허가도면을 통해 교수촌이라 불리던 모래내 일대에 그 시절 전형적인 2층 주거를 설계했던 건축가 김종호를 추적한다. 1~2세대 건축가가 활동한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주택부터, 당시 보편적인 주거 양식을 짐작하게 하는 교수촌의 2층 주택, 적산 가옥으로 지어진 후 오랜 시간 덧대고 개조되며 새롭게 활용되고 있는 삼청동 주택까지, 집의 가치와 의미를 알아본 새 주인을 맞은 집들과 문화공간으로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 옛집까지, 오래된 집이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대한민국 건축주간 2022+오픈하우스서울 중성적인 모더니즘의 질서 ①, 건축가 이성관           ‘건축의 날’ 동탑산업훈장을 받으신 소감이 듣고 싶습니다. 겸손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수상하게 되면 늘 ‘나보다 더 나은 분이 많은데 왜 내가 받았을까?’ 이 생각이 먼저 들어요. 고맙고 영광으로 생각하지요.   수상과 함께 용산공원 부분개방부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에서 그동안 직접 찍으셨던 건축가들의 인물 사진을 전시하셨어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의 건축 환경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아직은 자리 잡히기 전이라고 봐요. 그래서 같이 힘듦을 나누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동료 건축가들, 선배들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면서 고마움과 동료 의식을 느껴요. 이 척박한 풍토에서 용케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늘 경외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격변기에 나도 이렇게 같이 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을 한번 되짚어보고 나누고 싶다는 가벼운 뜻이죠.   건축물은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볼 기회가 있지만, 이런 기록은 대부분 10여 년 전에 내가 찍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궤적이에요. 그 부분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서 시작한 겁니다. 건축인들의 자화상을 기록하셨네요. 그런 거죠. 그 당시에 수시로 찍어 놓은 것들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어서 보면 많이 그리울 것 같아요. 그런 분의 얼굴을 전시장에서 만나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1948년에 부산에서 태어나셨어요.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서 자라신 건데요. 유년 시절의 부산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나이가 들수록 과거 가슴에 묻혔던 이미지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요. 부산은 땅이 좁아서 우리는 주로 바다를 향한 경사지에 살았어요. 제한된 평지에는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었어요. 쉽게 얘기하면 오늘날 산동네하고 비슷해요. 거기서 남쪽을 보게 되면 역광이 되는데, 바다에 물결이 반짝반짝하는 풍경을 보면서 컸어요. 바다에 대한 로망, 그리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뒷산이 내가 살아온 큰 정서적인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 시절의 동네 골목은 지금과 달라서 제 또래 건축가들은 ‘그런 것은 못 잊어’ 라며 울컥하고 그래요.   옛날 도시 조직을 몸으로 체득하신 거네요. 특히 부산만 해도 서울에 비해 계량식 한옥, 특히 일본강점기 적산 가옥이 많았어요. 저도 적산 가옥에서 살았는데 일본적인 공간, 분위기, 척도가 무의식적으로 배어 있었죠. 시간만 나면 옛날에 살았던 동네를 습관적으로 가봐요. 큰 삼복도로가 나고 이미 변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유적을 뒤적이는 마음으로 혼자 옛날 흔적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죠. 건축과는 어떻게 선택하셨나요? 과정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데, 기계과를 적어내서 고맙게도 떨어졌어요. 그 바람에 재수하게 되면서 건축과를 가게 됐어요. 보통 선배들이 와서 자기 과를 설명해 주고 그래요. 그때 서울대 건축학과 선배 한 분이 ‘그림 좀 잘 그리고 머리 똘똘하면 건축가가 딱이다’라고 해서 막연히 ‘내가 저기에 해당하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때 서울에 처음 올라오신 건가요? 서울에 대한 인상이 어떠셨나요?   저는 서울의 모습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서울의 풍경이 영화 배경처럼 보였어요. 막연하게 서울이 더 세련되고 부산보다 격이 더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그 소중한 것들이 사라질 줄 몰랐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기록을 해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게 많아요. 그때만 해도 이문동에 가면 괜찮은 한옥들이 있었고, 을지로에도 소중한 마당이 있고 사람 사는 삶의 흔적들이 많았는데, 공장으로 변해서 마음이 짠하고 그랬어요.   저학년 때는 건축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4학년 2학기 때 이구 선생님이 강연을 들으면서 자극을 받았다고 하셨어요. 어떤 강연이었나요? 제가 68학번이에요. 그 당시에 건축에 관심은 있었는데, 건축 수업은 재미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구 선생님의 ‘건축 윤강’이라는 수업을 들었어요. 맨 마지막에 과제를 하나 내주셨는데, 36개의 그리드(격자)에 형태 구성을 하는 거였어요. 우리가 애를 써서 이것저것 다이나믹하게 구성했는데, 어느 날 보더니 독백 비슷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이 수업을 7년간 했는데 단순한 덩어리 구성이 하나도 안 나온다.’고요. 가령 36이라면 3x4x3 큐브로 만드는 단순한 덩어리도 구성인데,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는 거죠. 또 그리드를 빈칸으로 두고 다 지하에 넣는 구성도 할 수 있는데 누구도 시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큰 자극을 받고 건축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유치원 숙제 같은 거였어요. 요즘 같으면 여러 정보에 대한 상호작용(interaction)이 있어서 충분히 역발상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충격이 컸어요. 무조건 저분 사무실에 가서 배워야겠다는 확신을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졸업 후 삼고초려 끝에 거기서 일하게 됐습니다.   이구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이구 선생님은 왕손이잖아요. 깔끔하신 분이었어요. 일본과 미 8군 일을 주로 했어요. 수시로 출장을 가서 우리와 대화할 기회는 사실 별로 없었어요. 바로 위 직속 선배인 고주석 씨가 있었는데, 그분과 이야기를 많이 하고 영향을 받았죠. 굉장히 똑똑하고 괜찮은 분이었어요.   고주석 선생님의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건축 태도에 영향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분위기가 그랬어요. 제가 졸업했을 때가 1972년 이후였는데 그 당시 세계적인 풍조가 논리, 합리, 공동 작업, 객관성 등이 중요한 가치로 대두될 때입니다. 작품에서 개인의 창의적인 생각보다는 객관성을 보장하는 것을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룹, 시스템 이런 말이 도입되고, 개인의 임의적인(arbitrary) 영감은 약간 감성에 의한 거라고 봤죠. 건축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객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 당시에는 마치 좋은 방법론을 채택해서 그 과정을 밟게 되면, 좋은 작품이 저절로 나오는 연금술 같은 방법론이 있을 거라는 게 세계적인 붐이었어요. 그런 측면에서 다들 ‘이런 식으로 될 수밖에 없지 않으냐’ 강요하는 식으로 자기 작품을 설명했어요.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라는 접근은 훨씬 뒤의 일이죠. 지형, 지질, 교통, 기능만으로 보면 다 낱개의 옳은 아이디어가 있잖아요. 그걸 오버랩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식이었죠.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거기엔 주관이 많이 개입하게 되고 모순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는 거죠.   이구 선생님 사무실에서 실무는 어떠셨나요? 미국 스타일이 많이 깔린 회사였어요. 그 당시 한 여덟 아홉 분의 선배들이 그곳에 계셨어요. 세 번이나 찾아가서 생떼를 쓰듯 들어가게 되었는데, 들어가서는 굉장히 좋아했죠. 그 착각 때문에 열심히 했는데, 대학원 들어가면서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리고 나서는 정림건축에서 한 6년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보면 정림건축이 친정이고, 실제 작품을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곳이에요. 대학원에서 한국의 전통공간에 대한 논문을 쓰셨습니다. 전통 공간에는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되었나요? 저는 서울에서 처음 전통 건축과 담장을 봤어요. 대학원을 다니면서 과제를 위해 현장 방문을 했는데, 성균관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의 담 높이가 내 키보다 좀 낮았어요. ‘폴짝 뛰어넘으면 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담을 만들었지?’ 궁금했어요. 그냥 선을 구획해놓은 것 같은데, 왜 이런 걸 설치했을까? 그러다가 담은 부수적인 도구일 뿐이고 구획이 필요할 때 줄로 끊는구나, 담이 있구나 생각하니, 마당으로 개념이 확장되더라고요. 유럽의 대공간과는 어떤 유사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을까 생각하니, 공간론으로 넘어가고요. 그 당시에 사찰과 전통건축을 많이 다녀보고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고 깨달은 게 과정적 공간이었어요. 진입의 프로세스를 깨우치고 나니 번번이 제 공간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더라고요. 정림건축에서 6년간 실무를 쌓으셨는데,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버님이 교수였지만 저는 교수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건축 작품 하는 게 너무 재미있고 의미가 있었어요. 또 유학을 하려고 보니 제 학점이 b하고 c 중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시도도 해보지 않고 괜찮은 학교는 못 간다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러다 한 10년쯤 지난 다음, 한 후배가 유학 간다고 바지런 떨 때 ‘선배님은 왜 유학 안 갑니까’ 하더라고요. 가고 싶지만 실은 내 학점이 그 모양이라서 못 간다고 했더니, 포트폴리오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오후에 미 문화원에 가서 미국에 있는 학교 30여 개 자료를 복사했어요. 최종 여섯 군데에 지원해서 사무실 꼬박 다니면서 6개월 만에 준비를 다 하고 가게 된 거죠.   왜 컬럼비아대학교를 선택하셨나요? 그 당시 합격한 곳은 몇 군데 되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가 굉장히 좋은 선생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도시 자체가 어떤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비교할 바 없는 교육의 장소가 되지 않을까 싶었죠.   서구 건축의 한복판에 가셨는데 당시 건축 흐름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의 작품이 매거진 표지에 나오고 포스트모던의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같은 사람이 한참 활동하던 때죠. 나는 모더니즘에 속해 있던 사람인데 생뚱맞게 포스트모던을 맞닥뜨리니까 거부감도 있고 자기의 반성이 있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랬죠. 방어적이었어요. 제가 컬럼비아대학에 지원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괜찮게 생각하던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와 로말도 기우르골라(Romaldo Giurgola) 두 분이 스튜디오 마스터 디렉터로 오셨기 때문이었어요. 입학했더니 두 분은 전년도까지 하고 새로 오신 분이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와 제임스 스타우드 폴셱(James Stewart Polshek)이었어요. 그 당시에 학생은 21명이었고 영국, AA School 출신이나 그리스, 스페인 등 세계 각지에서 왔는데, 학생들도 괜찮았고 재미있게 잘 지냈어요. 스텐(Robery A. M. Stern)이나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가 크리틱을 오면 좀 떨떠름하게 생각을 했죠. 나머지는 합리주의적인 접근을 했어요. 누구나 공통으로 인정하는 건축의 바탕이잖아요. 포스트모더니즘 트렌드는 일시적이었고, 한 15년 정도 지속하다가 더는 못 갔죠.   뉴욕 HOK에서 실무를 하셨어요. 라파엘 비뇰리는 스튜디오에서 만났어요. 우리가 총 두 학기 동안 프로젝트를 7개 했고 첫해는 5개 했어요. 이학 석사(master of science)에 있는 아키텍처 앤드 빌딩 디자인 프로그램(architecture&building design program)이었는데, M.Arch와는 달리 경력이 있는 사람들만 하다 보니 실무 위주로 디자인을 괜찮게 했던 기억이 나요. 라파엘 비뇰리가 ‘너 정도면 뉴욕에 있는 어느 사무실이건 갈 수 있다’라고 무심코 이야기를 흘렸는데, 나는 그게 대단한 말인 줄 생각한 거죠. 정작 졸업해서 직장을 구하려 하니 만만치 않더라고요. 그때가 1983년도 즈음인데 경기가 또 안 좋았어요. 처음 몇 군데 지원했더니 제안은 안 오고 ‘작품을 보니까 모델 잘 만들었는데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냐’라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하긴 했죠. 한 달 반 동안 고생을 좀 했어요. HOK에서도 디자이너를 안 뽑고 제도공(draft man)만 뽑아서 할 수 없이 그거라도 지원했어요. 면접 보러갔더니 ‘왜 디자이너를 지원하지 않고 제도공으로 했나’라고 하길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저를 디자이너 뽑는 사람과 연결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인터뷰한 다음에 더 봐도 이런 친구는 없다 싶었던지, 3시간 지나 저를 그냥 직원으로 채용했어요. 그렇게 들어가서 5년간 있었죠.   그곳에서도 상당히 인정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프로젝트 매니저 제안도 받으셨다고요. 실은 그랬어요. 처음 1년은 디자인 어시스턴트로 있다가 담당자가 휴가를 가는 사이에 그 일을 대신 진행했어요. 이전 담당자보다 훨씬 나으니까 그 일을 끝까지 맡았어요. 한 5만 5천 평 큰 쇼핑몰, 호텔, 오피스가 있는 대형 프로젝트를 맡았죠. 부모님께 미국에는 3년만 있겠다고 허락받고 와서 떠나야 한다고 했더니, HOK에서 영주권 해결해 주고 컬럼비아 안에 있는 프로젝트를 내가 맡도록 해주겠다는 좋은 제안을 해주었어요. 그렇게 3년을 더 있게 됐습니다.   제대로 붙잡으셨네요. 그런 셈이죠.     한국에 돌아와서 4.3 그룹과 함께 전시를 준비하셨습니다. 4.3그룹은 그 안에서 치열한 토론을 해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건축에 관한 생각도 다르셨을 것 같아요.   그때가 1990년 초였는데, 세상은 격변하고 건축가로서는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시기였어요. 합리적인 모더니즘이나 국제주의는 이해하기 쉬운데, 포스트모던이 나오면서 객관적으로 논리의 근거가 좀 애매모호했죠. 거기에서 갈등을 느끼게 돼요.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는데 우리가 모더니즘에만 머무는 건 도태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는데, 세상은 또 해체주의로 넘어가는 거죠. 건축가로서는 세계는  흘러가는 데 우리의 마인드나 관성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흐름에 합류하려니 탄탄한 근거 없이 합류하기도 찜찜했죠. 그래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불러가면서 의견을 듣기도 했어요 .  건축 이론을 한 김광현 교수를 모셔서 강연도 듣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서 승효상 씨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를 이야기했던 기억도 나요. 동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약간의 불안감도 없잖아 있었을 것 같아요. 굉장히 공격적으로 토론도 많이 하고, 밑바닥까지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을 알려고 했죠. 여행도 많이 갔어요.   전쟁기념관으로 비판도 많이 받으셨던 거로 기억합니다. 가차 없이 비평하고, 세게 이야기했죠. 전쟁기념관 설계할 때 이분들이 벼르고 공격했어요. 새벽 5시까지 토론하기도 했어요. 전쟁기념관은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나는 하나의 문화 시설로 봤어요. 넉넉하게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장기적으로 공원도 생기고 효자 노릇을 할 거라고 크게 봤어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군사 문화의 잔재이고 이데올로기로 봤죠.  전쟁을 왜 해야 하느냐 황당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군사 문화를 보여주기 위한 시설인데 왜 배운 녀석이 앞장서느냐, 영혼을 파는 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저는 현상과 관념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작가 정신에 대해 의문을 표하시기도 했는데요. 작가 정신이 없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작가로서 판명될 때에는 항상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적 자아(ego)가 중요시 돼요. 순수 예술에서는 그게 가능하죠. 순수 예술에서는 작가의 색(color)이라 할까, 분명히 유전자(DNA)가 표출되어서, ‘누구의 작품이구나, 이전 작품과 비교하면 약간 변신했구나’ 이렇게 작가 개인의 세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해요. 건축은 그런 식으로 고정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는 교도소가 됐다가 도살장이 됐다가 신성한 교회가 되는 것처럼, 장소도 여건도 천차만별이에요. 건축주의 여건도 다 다른데 거기에서 항상 동일한 재료나 색을 가져오고 누구의 작품이라고 읽히는 게 저는 독이 된다고 봤어요. 나의 흔적을 남기는 게 좀 형편없고 치사하다고 생각했어요.   시그니처는 없어도 된다는 말이시군요. 그렇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아저씨가 했구나, 그럴 때 감동이 클 수도 있고요.  음악은 안 그래요. 음악에서는 남과 차별화되는 게 생명이잖아요. 가령 옛날에는 노래를 듣다 보면 팀의 에고(ego)가 있다고요. AFKN에서 갑자기 롤링 스톤즈 신작이 나오면 금방 캐치를 하죠. 하지만 건축에서 뻔하게 노출콘크리트가 나오고 리처드 마이어의 화이트가 나오는 건 하고 싶지 않아요. 화가란 평생토록 물방울을 그리고, 끝없이 움직이는 불길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죠. 하지만 건축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당시 건축가들이 건축을 인문학적이고 관념적인 단어로 설명하다 보니 그에 대한 동의가 어려우셨던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 당시 한 친구가 ‘나이 40쯤 되어서 자기 거 하나 있어야지’하고 무심코 말을 뱉었는데, 나는 내 것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작품집을 하자고 했을 때도 거부했어요. 개별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지만, 작가의 항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확신은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걸 거부했어요. 단지 스스로 솔직하면서 진지하게 작품을 하는데 왜 일관성이 없을까 스스로 고민을 했죠. 어느 날 건축에서 과연 항성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회의를 가지면서 다른 의미의 확신을 했죠. 연기를 할 때는 주어진 상황에서 각본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역할로 해석해서 창조해낼 수 있겠죠. 그런데 ‘나는 항상 멜로 드라마만 할 거야’, ‘표정이나 톤도 그렇게만 하겠다’ 이런 작업은 재미가 없겠더라고요. 천하의 악역과 선한 역을 동시에 오가고, 조연도 굉장히 재밌을 것 같아요. 건축에 대한 욕심도 그와 마찬가지예요. 골라서 하는 게 아니고, 예산이 넉넉한 고급 건축에서 철저하게 예산이 없어서 아껴 만든 건물 모두 무한한 도전이기 때문에 다 흥미로워요.   건축을 이론화하고 언어화하는 것 자체를 벗어나고자 하셨나요? 건축 혹은 건물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하는 게 가장 큰 목표가 아닐까 생각해요. 건축은 확실한 물증이 있으니까요. 문학이나 언어는 책이나 말로 부연해야 하는 반면에, 우리는 확실한 현물이 있어서 건축이 모든 걸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변인 놔두고 내가 옆에서 어설픈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죠. 당시 건축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때, 건축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셨나요? 여태 우리가 배운 건축론은 휴먼 스케일로 지어졌다 하면 공간적인 측면을 이야기했어요. 휴먼 스케일이면 친근감을 준다, 호감이 간다고 이야기해요. 규모가 거대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요.공간적 측면이 갖는 속성이 어떤 감정을 유발한다는 거죠. 한번은 서대문 형무소 건물을 보았는데, 휴먼 스케일에 밭전자 창이고, 모든 게 자그마한 13평 목조 건물이었어요. 휴먼 스케일인데 친근감을 느껴야 하겠죠. 그런데 안내판에 ‘이것은 서대문 형무소의 사형 집행장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서 다른 걸 느꼈어요. 휴먼 스케일은 친근감을 주는데 왜 이것은 친근감을 주지 않는가 골몰하게 된 거예요. 여태 배운 게 다 무너지잖아요. 그래서 한 보름간 그것만 화두처럼 집착했어요.  왜 그럴까. 나중에 나름대로 가정을 하나 했는데, 건물은 중성적이라는 거예요. 물리적인 실체는 중성적일 뿐이다.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때의 값이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건축물 자체는 굉장히 중성적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가정하니까 그 상황이 설명되는 거예요. 일제 총독부로 쓰인 중앙청도 얼마나 살벌했어요. 해방 후 그곳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있었고, 북한이 내려와서 점령했다가 다시 수복하고, 또 박물관으로 쓰고 사무소 관청을 쓰고요. 결국, 히틀러같은 인물이 썼을 때 거부감이 생기고 감정이 생기는 것이지, 건물 자체는 중성적이라는 거죠. 처음부터 호감을 준다, 위압감을 준다는 건 아니라는 거죠. 건물이 힘이 있다, 크다 이런 것은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떤 형태, 감정은 우리가 의도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건물이 이 모든 시간, 공간의 상황과 절묘하게 잘 맞아 들어갈 때 혹은 그것과 같이 고려할 때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지, 건물 자체가 잘된 설계다 아니다 이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요.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로 이어집니다.    
SPECIAL 보편적이고 특수한 건축분투기 ②, 유종수, 김빈(코어건축사사무소) 첫 당선작인 대전차방호시설까지 몇 개의 공모전에 참여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열 몇 개였던 것 같다. 2015년에 둘이서 거의 한 달 반 정도 간격을 두고 공모를 했다. 2014년 그해만 9개 정도 한 것 같다. 그중 단 하나가 당선되었다. 2015년 즈음 공공건축가로 선정되었는데, 당시 설계비 1억 원 미만의 프로젝트는 지명 공모전을 했다. 선정위원회에서 젊은 신진 그룹 5팀을 선정했고 거기에 운 좋게 지명되었다. 금액을 떠나서 프로그램이 굉장히 매력적이어서 너무 하고 싶었고, 바라던 대로 당선이 됐다. 우리에게는 큰일이었다. 서울시에서 연락을 받고 너무 좋아서 조그만 사무실 책상을 쳤을 정도였다.   대전차 방호기지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 유종수 벙커에 담긴 히스토리가 있다. 군사시설을 위장하기 위해 시민 아파트가 있었고 그게 무너져서 철거해 폐허처럼 남아 있다. 그곳을 다시 창작 공간을 만드는 재생 사업이었다. 건축하면서 벙커라는 프로그램 자체를 접해보기 힘들 것 같았다. 군사시설이니까. 최근 DMZ 안에 있는 군사시설도 보존하느냐 철거하느냐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프로젝트로 진행된 건 대전차 방호기지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선유도공원 프로젝트나 김광수 선생님이 설계한 소각장(아트벙커 B39)이 산업시설이라면, 군사시설이 문화시설로 리모델링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공간적인 측면에서 차이점도 있는가? 김빈 실제 군 작전 시설의 경우 그 자체가 너무 낯설고 특별한 공간을 갖고 있다. 성격도 완전히 다르다. 현장 설명회 때 또 한 번 더 공간에서 보고 느끼는 게 있었다. 역사적으로 사람이 살았다고 하니, 복합적인 느낌을 받았다. 유종수 이게 벙커였다는 걸 느낀 것은 두께 1m짜리 방호벽을 봤을 때다. 서울시에서도 벽을 보존하길 원했다. 나머지 건물은 안전 등급이 2등급이어서 대부분 철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벽을 존치하고 나머지를 건드려보는 상황이었다. 공모전 현장 답사 때는 방호벽을 일부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쓰레기 더미 창고에 잡초가 무성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선 후 착공하면서 쓰레기를 다 걷어내니 그때 이 골조들이 다 살아나더라. ‘여기가 대전차 기지였구나!’ 싶을 정도로 방호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벙커와 아파트가 공존하는 시설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종수 이곳에 벙커가 필요했던 이유는 서북부 전선에서 서울에 진입하기 위한 루트이기 때문이다. 옛날 ‘다락원 터’라는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1968년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까지 들어오면서 1969년부터 서울 요새화 작업 진행되어 이런 벙커를 만들었다. 서북부 쪽으로 도봉구, 경기 고양시 일산 쪽의 유진상가도 같은 배경이다. 나중에 건물을 무너뜨려서 막겠다는 의도다. 유진상가가 지어질 당시 건물을 보면 길게 장벽처럼 만들었는데 대전차도 그랬던 것 같다. 당시 도봉구 지역의 군사작전 지도를 보면 아파트 5개 동이 있었다. 그런데 지하에서는 1층 벙커 전체가 다 연결이 되어 있었다. 아파트만 5동처럼 보였던 거다. 결국, 이 구조물은 도봉산과 수락산 전체를 막기 위한 시설이었다.      아파트는 철거가 된 것인가? 김빈 항공사진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있는 시점이 있다. 1999까지 건물이 있었는데, 2006년 사진을 보면 아파트가 없어진다. 1층만 남겨놓고 2004년에 철거가 됐다. 그리고 길이 없다가 2009년에 창포원이라는 공원이 조성되면서 길이 생긴다. 그때 길이 연장되면서 아파트 절반 정도가 잘려나갔다.   설계에서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무엇인가. 김빈 그 길에 5개 동의 아파트가 있었다. 1층은 쭉 연결되고 2개 동이 하나로 묶여 있고 3개 동이 하나로 묶여 있다. 밖에서는 2개나 3개, 5개짜리 동으로 보이는 건물인데, 안에서는 하나로 쭉 연결돼 있다는 걸 데이터로 알고 있어서, ‘이것은 하나의 긴 건물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접근했다. 250m가 수평으로 누워 있는 긴 건물이다. 그래서 이 평평한 수평 건물 그리고 장벽을 만들고 있는 서울과 의정부의 경계라는 포인트부터 시작했다. 거기서 무엇을 남기고 혹은 없애고 어떻게 고칠 것인가의 문제였다.   앞부분에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와 누워있는 건물의 관계도 고려한 것인가? 김빈 타워는 원래 함께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군사시설이 문화 창작 시설로 변모하지만, 40% 정도의 공간은 국방부가 여전히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말은 평상시에는 문화시설이지만 유사시에는 군사시설이 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군부대의 의견이 중요했다.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 군부대와 계속 협의를 했고, 군부대 의견이 계속 반영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군부대와 협의하는 중에 인근 군부대에서 일정 높이의 관측소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총알을 방어할 수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하나 올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렇다면 관측소를 만들되, 평상시에는 전망대처럼 쓸 수 있도록 시작했다. 진행 중에 관측소가 필요 없게 되어 온전히 전망대로 바뀌었다. 건축적인 관계보다는 여러 발주처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수직 타워이다.   첫 번째 당선작이자 첫 번째 공공 프로젝트이다. 현실의 공공 건축 프로세스가 어렵진 않았는지. 유종수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인지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도봉구 측에서 저희 안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게 지지해주었다. 김빈 공공 프로세스는 원래 손이 많이 가고 복잡하지 않은가. 공공 프로젝트마다 특별한 점이 있는데 대전차 기지에서 다른 점은 군부대와 협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저희가 직접 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도봉구청에서 잘 정리해 주시기는 했는데, 함께 협의할 부분이 많았다. 또 이 사업은 서울시가 먼저 추진한 것이 아니라, 2014년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시민추진단이 있었다. 시민들이 모여서 이곳을 어떻게 해보자고 계속 제안해서 서울시가 수락한 거라서, 서울시민추진단과도 협의가 필요했다. 그렇게 여러 주체와 이해관계가 있다는 게 달랐던 점이고 어렵다면 어려운 점이었다.   보통 공공건축물은 기획 단계 프로그램이 진행 중에 바뀌어 어려움을 겪는다. 프로그램은 어떻게 고려되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프로그램은 정해지지 않았다. 공모전 지침에는 예시만 있었고 저희가 제안하게 돼 있었다. 공모전에서 중요했던 것은 앞서 말한 1m 두께의 방호벽이었다. 방호벽을 무조건 존속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프로그램은 창작 공간, 공방, 시민들이 사용하는 공간이 큰 틀에서 주어졌다. 공방, 세미나실, 카페, 사무실 그다음에 군사시설로 작전 지휘소가 구석에 있다. 무엇보다 이 구조물 하나뿐만 아니라, 전체가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어서 공원도시계획시설 인가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시설 면적을 조정하면서 대전차 기지 리모델링의 면적이 많이 늘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모전 때 주어진 원래 대전차 기지 면적을 거의 유지했던 것 같다. 김빈 모형에서 검은색 ‘ㄷ’자로 되어 있는 부분이 군사시설이다. 실제 탱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 ‘ㄷ’자들은 무조건 군사시설로 써야 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를 창작 공간으로 디자인하는 게 출발점이었다.   협의 주체가 많다는 건 원하는 목적이나 방향이 다르다는 이야기인데, 각기 다른 주체들과 협의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군부대는 사실 기능적이다. 지금 이 시설의 목적이 무엇이든 적이 침투했을 때 탱크가 들어가고 방어를 해야 한다. 그래서 군부대와 협의하면서 결정된 부분이 많다. 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반영해야 했다. 그런 건 괜찮다. 언제 군부대와 협의를 해보겠나?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김빈 서울서진학교 인터뷰할 때 그런 질문을 종종 받았다.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나요?”라고. 사실 특별히 어려운 건 없다. 공공 건축은 당연히 협의해가야 하는 스트레스가 있다. 특별히 점이라면 군부대처럼 보수적이고 상대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집단이라는 것이 다른 부분이었다.   당선 후 완공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설계를 한 1년 정도 했다. 시공은 2015년부터 2017년 초반까지 한 것 같다. 리모델링 건물이 항상 그렇듯, 이곳도 기존 도면이 없었다. 그래서 실측하면서 철거하고, 또 현장에서 보나 계단을 살려야겠다는 요구가 있어서 현장에서 설계가 바뀐 부분이 있었다. 철거하면서 발견된 것도 있었다. 구조물 밑에 있던 연결 통로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철거 중 발견해서 살려내고자 했다.     대전차 기지 당선 이후, 어떤 공모전을 진행했는가. 김빈 많이 했다. 2015년에 대전차 기지 공모전 이후 2016년만 해도 한 달에 하나씩 공모전에 참여했다. 떨어진 것도 있었는데 그 중 당선된 것이 양남시장이었다. 계획 설계까지 다 했지만 아쉽게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사이 입상을 하나 하고 그렇게 계속해왔다.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활동했다. 공공건축가 제도를 포함해서 개선된 공모전 제도가 어떤 면에서 도움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유종수 제한된 인원을 지명 공모전을 진행한 것, 서울시에서 선정한 심사위원이 실무를 하는 건축가 위주로 포진되었던 것, 또 제출물을 간소화해준 것이 괜찮았다.   공공 건축 실현 과정의 어려움을 꼽는다면 운영 주체가 없는 상태에서 공모전이 이루어진다는 점도 있다. 기획 따로, 운영 따로, 설계 따로 진행되면서 프로그램이나 요구사항이 계속 바뀐다. 기획, 운영, 주체가 삼각 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 공공 건축의 의사결정 과정을 대하는 건축가의 태도가 궁금하다. 김빈 세부적으로 보면 그럴 수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처음부터 건물 지을 때까지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은 건축가밖에 없다. 말씀하신 대로 중간에 담당자도 바뀌고 기획한 사람도 다르고, 시공자는 설계 후에 참여하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게 우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발주처에 그 사실을 인지시켜드리고자, 필요할 때 이야기를 한다. ‘당신은 자리를 옮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끝까지 이걸 진행하니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우리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라고. 그런 근거로 이야기하면 많이 도움이 된다. 신선한 발상이다. 김빈 물론 훨씬 더 에둘러서 친절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인식을 환기시키는 거다. 유종수 그렇지만, 저희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서울 지역에서 프로젝트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의 각 구 지자체도 있고 SH 같은 지방 공기업도 있는데, 그래도 이곳은 건축가의 당선안을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있다. 지방은 더 보수적이고 아직 인식도 부족한 것 같아서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주로 줄다리기를 하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 유종수 오늘도 설계의도 구현법 때문에 계약이나 과업의 조건이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 있었다. 공무원은 당연히 법적 기준을 가지고 접근한다. 제도가 처음 시행될 때 시행착오를 겪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접근하는 태도가 너무 갑을 관계로 접근한다.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 항목도 넣어서 우리를 구속하는 것도 있다. 이것이 받아들여지든 아니든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의견을 피력한다. 한 번에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해서 일부는 수정되기도 하지만, 또 발주처 입장에서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그 부분이 행정 프로세스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유종수 건축을 해본 기술직은 대화가 되고 설명을 할 수 있지만, 보통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담당자들은 일반 보직 순환제로 일한다. 그래서 더 힘든 부분이 있다. 건물이 설계하는 과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걸 행정적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쉽게 바뀌진 않겠지만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개선되었으면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김빈 그것도 태도의 문제일 수 있는데, 당연히 공무원은 내부 논리가 있다. 감사도 생각해야 하고 시스템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결국 결과물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게 맞는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사실 건물이 어떻게 지어지든지 상관없다는 공무원이 의외로 많다. 건물이 좋다 아니다 보다 행정적인 절차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건물을 짓는 것이니, 프로젝트가 제대로 지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대전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행정적인 절차를 바꾼다고 해도 다를 게 없을 듯하다. 그런 대전제가 공유된다면 보직이 중간에 바뀌어도 그대로 가면 된다.   공공건축물을 설계할 때 건축가로서 두 분의 목표도 있을 텐데, 무엇을 어디까지 이루고 싶다는 목표나 얻고자 하는 바가 있는지 궁금하다.    김빈 공공 건축도 시스템이 다른 것뿐이지 하나의 프로젝트다. 물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과정이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가야 한다는 과정은 짜여 있다. 민간 프로젝트는 모호한 경우가 많고 오히려 클라이언트 한두 명에 휘둘리기도 한다. 공공 건축은 그래도 여러 사람이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기 때문에 목표가 어느 정도 구체화하여 있다. 그래서 그 구체화한 목표에 동의하면 저희도 맞춰 가는 게 기본적인 코드다. 결국, 프로젝트이니까, 그 안에서 멋있고 좋은 건물을 만들어내는 거다. 공공 건축의 다른 점이라면 그냥 저에게 주어졌을 때의 바탕, 기준이 조금 다른 게 아닐까 싶다. 그 외에 저희 생각은 크게 차이가 없다. 유종수 공공 건축은 그 범위가 넓어서 선택의 기회는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저희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선택적으로 할 수 있었다. 당선작 중 다 완공하지는 못했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프로그램이 치우치지 않고 다양하다는 것이다.    민간 프로젝트를 할 때 한 프로그램을 잘해놓으면 같은 프로그램이 계속 들어오곤 한다. 예를 들어 체육관을 잘 지어 놓으면 체육관만 설계하거나, 주택을 하면 주택만 계속 들어오거나, 4~5층 근린생활시설이 홍보가 잘 되면 그런 프로젝트만 들어오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수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거꾸로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었다. 김빈 확률은 좀 낮지만, 선택권은 있다. 그래서 다양하게 해볼 수 있다. 공공 건축끼리도 다르고, 민간건축끼리도 다르다. 의뢰인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에 더 집중하려 한다.   건축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프로젝트가 진행되거나 갈등이 노출될 때 어떻게 해결하는 편인가?    김빈 할 때까지 한다. 끝까지 최대한 밀어붙인다. 그런데도 안 되면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수긍한다. 그 프로젝트를 접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유종수 당선되든 수의 계약으로 하든, 그런 부분은 다 수행했던 것 같다. 협의 과정에서 서로 맞춰 가면서 밀고 당기면서 끝까지 갔다. 다만 시범사업으로 당선된 양남시장 같은 경우는 공모할 때부터 기본 설계까지 하는 게 조건이었다. 조합의 요구와 관의 사정으로 중지되었다가 새 조합이 들어서서 다시 시작되었을 때, 조합에서 원래 안 대신 일반적인 주상복합 건물로 설계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면 저희는 안 하겠다고 했다. 김빈 그렇게 극단적으로 사업이 접히는 경우가 아니면 밀고 당기기를 계속한다. 산으로 가다가 그래도 산 중턱까지 못 가게 하는 과정인 거다. 그래도 수도권 발주처들은 대체로 건축가 의견을 많이 존중해주셨다. 그래서 부딪히는 것도 있었지만, 조정 가능한 상황에서 대응했고 갈등이 아주 심한 경험은 별로 없다.   이치훈 소장님이 말한 ‘책임 회피 시스템을 뚫고 가는 결과물’이라는 표현이 핵심이 아닐까 싶다. 공공 프로젝트의 책임 회피 시스템을 뚫고 가는 건축가의 전략은 무엇인가? 김빈 우리가 책임진다. 건축가가 책임진다. 돌아보면 그런 전략이 있었다. 그냥 잘 만들려고 한 거다. 유종수 발주처가 공공일 때는 어쨌든 확보한 예산이기 때문에 그들도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얼마큼 설계안을 유지할 수 있는가, 조율을 잘하느냐의 차이인 것 같다. 대부분 문제가 되는 것은 설계 기간 안에 끝내는 것과 공사비 문제가 가장 크고, 바꿔 달라는 요청은 잘 설명을 하면 대부분 이해한다. 또 공공 프로젝트는 보고 절차가 많아서 윗선의 의견이 나왔을 때 잘 반영해주면 대부분 시행이 되었던 것 같다.   김빈 생각을 해보면 책임 회피 시스템을 돌파하는 전략이 있다기보다, 저희가 조율을 잘했던 것 같다. 공무원 설득을 잘했거나. 그래서 풀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요구사항은 있지만, 공모전 당선안은 또 공모전 안대로 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많이 흔들 생각을 안 하기도 한다. 담당 공무원이 바뀌면서 소소하게 바뀌는 것은 저희가 대안을 제시하든가 아니면 더 좋게 제안하는 식으로 풀었다. 그게 방법이라는 방법이다. 유종수 공모전 안이 완전할 수 없고, 의견을 들어보면 맞는 것도 있다. 그것이 또 바꿀 기회라고 생각한다. 서울서진학교의 중정 같은 경우도 사실 처음에 식당으로 계획했는데, 심의 때 나왔던 의견을 받아들여서 북카페로 만들었다. 의견을 반영해서 그런 디자인이 나온 것이어서, 꼭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힘들긴 하지만, 그건 민간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올해는 민간 프로젝트밖에 없는데 민간도 힘들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오픈하우스서울 2022>의 주제가 공공 건축이지만, 저희의 태도 자체는 민간과 공공을 구별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건축을 대하는 태도의 일관성이라고 생각한다.   공공 공간에서 공간의 가치를 높이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코어건축의 여러 공공 프로젝트는 자체의 완결성을 잘 이루고 있다. 설계할 때 포기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인지도 궁금하다. 김빈 꼭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보편성이다. 어차피 디자인은 주관적이고 다양한 시각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공공 건축에서는 보편성을 절대 놓을 수 없다. 그 보편성이 흔히 말하는 동선일 수도 있고 공간의 사이즈, 스케일일 수도 있다. 그걸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를 가지기 시작하면 서진학교의 넓은 복도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합리적으로 들여다보려 애를 쓴다. 사실 코어건축의 프로젝트를 보고 심미적인 질문을 하면 대답을 잘 못 하겠다. 왜 그런 형태가 나왔는지 물어보면, 미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만큼 필요하고 그렇게 곡선을 두어야 내부가 좋아지니까 하는 식이다. 그래서 원하는 대답을 못 드릴 때가 종종 있다. 그렇다고 디자인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말씀하신 대로 공공 건축은 행정, 운영이 모두 익명의 주체들이다. 또 당선 후에 많은 경우 예산이나 조건도 바뀐다. 이 흔들리는 과정에서 건축이 어떻게 하면 자기 완결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김빈 참 힘들고 어렵다. 주변 건축가와 이야기해봐도 공공 건축을 하면 다 힘들어한다. 다만 그 힘들어하는 지점이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저희는 이 정도 힘든 상황은 어느 작업에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연하게 접근하는 편이다.   행정적인 어려움을 대하는 자아와 건축가로서 자아를 분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요구에는 이렇게 대응하지만 나는 이렇게 만들 거야’라는 의지가 있는 게 아닐까? 유종수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주면 그들도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크게 이견이 없다. 김빈 발주처 담당자도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선의로 하는 거다.  물론 진짜 화가 나면 싸우기도 하는데, 결국 그분들은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접점을 잘 찾아가면서 풀었던 것 같다. 힘들기는 하지만 해결을 해내야지 어떻게 하겠나.   결국, 어떻게 하면 공공 건축이 나아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일 것 같다.   유종수 많은 건축가가 힘들어하는 이유는 명확한 기준과 가이드라인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담당하는 공무원들도 어디에 맞춰야 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짜깁기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계속 좋아지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다만 법이 구체화하면 좋겠다. 설계의도 구현법도 아직 구체적인 시행령이 없어서 국토교통부와 건축사협회에서 협의하고 조절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런 것들이 좀 더 구체화하면 어려움이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 공공 건축 공모전을 했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더 좋은 환경이 되었다. 발주처에 계속 의사 표현을 하는 이유도 이걸 관철하겠다기 보다는 담당자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도 있다. 당장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담당자가 알아야 다음 사람이 프로젝트를 했을 때 조금이라도 변한다고 생각한다. 건축가들도 발주처에서 요구하는 것에 그냥 사인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의견을 내야 한다. 저희는 의사 표현을 하면 늘 발주처에서 ‘너희는 왜 유난이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건축가들이 현장에서 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무원들은 사실 일반 수의 계약으로 하는 프로젝트도 많다. 이렇게 공모전을 통해 디자인을 제대로 하려는 건축가는 천 명도 안 되는 것 같다. 공무원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들도 같은 설계 방식으로 보이는 거다. 너무 다르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설계안을 잘 마무리하더라도 시공 입찰 방식은 또 다른 영역이다. 규정되지 않은 재료를 쓰기 힘들 때도있다. 이런 부분은 어떻게 해결해가는지 궁금하다. 김빈 시공사 입찰이야 운을 바랄 수밖에 없다. 재료는 시스템적으로 제한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전제를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재료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기술위원회를 연다든가, 자재 선정위원회를 열어서 선정하는 절차도 있다. 발주처와 협의가 잘 되면 발주처가 건축가에게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조달청 시스템에 있는 제품이라는 제한이 있지만, 저희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시스템은 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한다. 시공사나 감리사가 알아서 제안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타이밍이 되면 샘플을 들고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샘플 시공도 가능하다. 그러면서 재료도 바꾸고 페인트 샘플 색상도 여러 개 칠해본다. 필요하면 계속 부탁하고 요청해서 할 수 있는 최대한 구현해 왔던 것 같다.   인터뷰 임진영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③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