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Interview

영역을 뛰어넘는 시각과 건축의 확장

건축가 박 헬렌 주현 ①

2006년 이후 꼭 12년 만의 인터뷰다. 봄비치고는 제법 빗줄기가 거셌던 3월, 이태원 아파트 자택에서 박헬렌주현을 만났다.

하버드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생은 우연히 들은 건축 역사 수업에서 18세기 블레, 르듀의 거대한 상상의 공간에 열광하며 건축을 찾아 나선다. 조경을 탐닉하고 다시 건축 분야까지 전공하면서 얻은 것은 전문 영역에 대한 이해, 시각의 확장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어떻게 협업해야 하는가에 대한 유연한 태도이다.

초현실주의와 해체주의건축에 대한 관심, 땅과 건축이 갖는 관계 구성과 구축, 경계를 넘나드는 협업 작업과 전시 참여 등 2000년대 중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박헬렌주현은 경기대 건축대학원의 실험을 이끌었던 일원이자, 자신의 스튜디오를 통해 건축을 만들어가던 젊은 건축가였다.

2006년 이후 건강 문제로 잠시 휴식을 취한 이후에도 건축가 박헬렌주현의 대표 프로젝트인 ‘그리팅가든’은 드라마 <시크릿 가든>부터 최근 <김비서가 왜그럴까>까지, 꾸준히 드라마와 광고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간혹 영상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볼 때마다 “천정을 지붕 색으로 칠했어야 했는데” 한다는 건축가의 말은 작업에 대한 남은 갈증을 전해준다. 자신이 직접 리노베이션한 자택에서 여전히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로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물리학, 조경, 건축

 

이 집의 인테리어도 초기 작업(1999) 중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접이식 문이 인상적이에요.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절할 공간이 부족해서 만든 거예요. 다행히 이 아파트는 벽 구조가 아니라서 거실과 서재를 구분하는 벽을 튼 거예요. 서재의 책상 앞에 병풍을 치고 상을 놓으면 딱 접이식 문 위치까지 상이 놓여요. 그 앞 거실 공간에 돗자리를 놓고 교회 다니시는 분은 뒤에 서 계시고, 절하시는 분만 앞으로 오면 대충 수용돼요. 평소에는 접이문을 닫고, 현관 쪽 중간 유리문을 닫으면 저 서재는 반-공적인(semipublic) 공간이 되어서 독립적으로 외부손님을 만날 수 있어요.

 

실용적인 공간 활용이네요. 사무실은 2006년에 정리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10년 만의 인터뷰네요.

그렇죠? 2006년에 미국에 가고, 남은 일 정리는 2007~2008년까지 한 것 같아요.

 

1964년에 서울에서 나셨습니다. 아버님이 교육자시라고 알고 있어요.

아버지께서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오래는 아니지만 영어 선생님이셨어요.

 

교육하는 집안의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학교라는 분위기, 선생님이 되어 가르치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작은어머니도 스웨덴 분이셨지만, 유치원 원장으로 몬테소리를 처음 도입하셨죠. 우리 집은 할머니가 더 활동적이셨어요. 교육 열정이 많으시고 여자가 집에 있는 것보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저에겐 할머니가 큰 롤모델이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도 어렸을 때 혼자 일본으로 유학을 하러 가셨어요. 신여성이었죠. 자전거 타고 스타킹에 하얀 드레스 입고, 그런 사진들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접하셨겠네요.

제 기억엔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보다 더 바쁘셨던 것 같아요. 증조할머니도 아들보다 계속 할머니하고 지내시길 원했고. 가부장적인 집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집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관훈동 종로경찰서 옆집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사셨고, 엄마와 아버지가 결혼해 그곳에서 시집살이하셨어요. 아빠가 둘째 아들이셨는데, 셋째 아들 내외분도 거기 계셨고, 사촌들도 있었어요. 대가족이죠. 집은 큰 기와집이었어요. 종로경찰서 대로변 쪽으로 기와지붕을 한 2층 벽돌 건물이 더해졌는데, 1층은 상가였고 2층은 안쪽 한옥에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던 걸로 기억해요. 한옥은 문간방 있는 옛날집이니라 옛날식으로 대문, 중문, 사랑채, 안채로 되어 있고요. 원하시는 대로 개조하셔서 앞은 한옥인데 뒷면은 복도로 다 연결해서 화장실도 붙이시고 부엌도 붙이시고, 희한하게 개조가 된 한옥에 벽돌 상가 건물이 연결되어 있었어요.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내신 건가요? 관훈동 일대에 대한 기억이나 경험이 많이 남아 계실 것 같아요.

초등학교 2~3학년까지 살았죠. 그러고 나서는 진짜 계단이 있는 혜화동 양옥집으로 이사를 하였어요. 인사동 생각이 많이 나요. 그때는 인사동에 차가 못 들어가서 똥지게로 정화조 청소를 해야 하는 좁은 골목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었는데, 아직도 그 골목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수도약국. 아프면 늘 수도약국에 가서 약을 지었는데, 아직도 남아 있어요. 인사동이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그 뒷길의 도시 구조(Urban fabric)는 아직 있어요. 옛날 같지는 않지만요.

 

당시 인사동은 고미술품 거래가 활발하고 예술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는데, 그 동네의 인상도 남아있나요?

대학 방학 때, 한국에 나오면 관훈동 집에 있었어요. 그제서 고미술 가게가 눈에 들어와서 많이 들어갔죠. 그때는 오래된 표구사들이 참 많았어요. 어머니께서 표구할 게 있으시면 같이 따라가서 비단 구경도 하고 그랬는데 다 없어졌어요. 요즘 가면 인사동에 무슨 가게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을 떠나 하와이에 가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하와이에는 1978년에 갔어요. 그때가 중2 때였어요. 처음에는 식구들이 다 같이 하와이로 갔다가, 아버지가 다시 한국으로 나오시게 되었어요. 저희는 한국에서 다 자퇴하고 하와이에서 학교를 시작한 상태라 애매하잖아요. 본의 아니게 기러기 아빠로 바뀐 거죠.

하와이에 살 때는 지루했죠. 사실 휴양지가 은퇴한 분들에게는 좋은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하루면 섬 한 바퀴를 돌고 오는 곳이니까요. ‘나는 눈 내리는 곳으로 다시 갈 거야, 대학은 서부도 안 본다, 동부만 본다.’(웃음) 그렇게 되었죠.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없으셨나요?

있었죠. 다행인 것은 하와이에는 동양인이 많아요. 영어를 하지만 동양인이었고 하와이 사람들은 굉장히 따뜻했어요. 하와이에서는 가족과 같이 있었고, 모든 게 느리고 다 웃어주고, 고등학교도 작은 학교로 가서 좀 수월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대학교에 갔을 때 서양인이 더 많은 환경에서 보내게 되면서 미국, 서양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것 같아요.

 

흥미롭게도 전공이 물리학입니다. 건축, 설계라는 분야와 물리학은 상당히 거리가 느껴지는데, 하버드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건축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사실 고등학교 때는 건축을 몰랐어요. 수학, 과학을 잘했고요. 물리가 진짜 재미있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기 전에 물리 선생님이 캘리포니아의 천문학 캠프에 가보라고 팸플릿을 주시는 거예요. 본토에 가보자 했죠. 비교하자면 거제도 섬에서 서울도 아닌 부산에 가는 거잖아요. (웃음) 그곳에서 경험한 모든 게 좋았어요. 그래서 더 물리학에 빠졌고, 고등학교 4학년 때는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다 마쳤기 때문에 하와이주립대(UH)에 가서 수학과 물리과목을 더 들었어요. 재미있더라고요. 하버드대학교에 갔을 때는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물리 공부만 생각했어요. 다 이과 코스에 교양과목만 넣고 시작을 했죠.

그런데 하버드대학에서는 다양하게 해보라는 분위기가 있어요. 너무 한쪽만 파지 말고 ‘뷔페에서 다 먹어보고 나서 싫은 거 좋은 거 가려보라’는 조언이 좋았죠. 그래서 건축 역사 수업(History of Architecture)을 들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에드워드 세클러 교수라고, 빈(Vienna)에서 오신 역사학자였어요. 아인슈타인처럼 중력을 따르지 않는 머리와 커다란 안경을 쓰신 분이었는데, 옛날 유리로 만든 슬라이드를 보여줬어요. 유리 슬라이드는 해상도가 참 좋아요. 특히 크게 확대했을 때, 엄청났죠. 그 슬라이드들을 프로젝터 두 대로 계속 보여주면서 강의하시는데, 제가 완전히 넘어갔어요. 그때 블레(Etienne Louis Boullee, 1728~99년), 르듀(Claude Nicholas Ledoux, 1736~1806년) 등 18세기 계몽주의(enlightenment) 시대의 작업과 앙리 라브르스트(Henri Labrouste)의 생트 쥬느비에브 도서관 같은 건물이 등장하는데, 그때까지 그런 건물을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서울에서 하와이에 가서 살다가 케임브리지에 있는 학교 건물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앞에서 펼쳐지는 건물과 상상의 공간들이 너무 좋아서 이 코스를 들어야겠다 결심했죠. 신청해서 가보니 GSD 대학원생과 같이 듣는 코스였어요.

 

대학생도 같이 들을 수 있었나요?

과목은 대학원 코스였는데 학부 학생들이 같이 들을 수 있었어요. 뭣도 모르고 좋으니까 들어간 거죠. 그곳에 박승홍 씨, 고 장림종 씨 다 앉아 계시더라고요. 한국분들 같아서 인사하고 제가 건축이 재미있다고 하니까 놀러 오라고 하시고, 놀러 가니까 당시 GSD에서 학생으로 계셨던 서혜림 씨에게 저를 소개해주고. (웃음) 서혜림 씨는 졸지에 저를 데리고 구경시켜주게 되면서 만나게 되었어요.

문제는 그 코스의 중간고사 성적이 너무 안 좋았어요. 선생님께 중간고사를 못 본 것 같다고 아무래도 패스 패일(pass-fail)로 해야겠다고 이야길 했죠. 왜냐하면 그런 시험을 처음 쳐봤거든요. 성적을 보시더니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사인을 해주시는 거예요. (웃음) 그 때부터 아주 마음 편하게, ‘패스 패일이니까 패일은 안 하겠지’ 하면서 즐겁게 수업을 들었어요.

그다음부터 전공을 바꾸려고 했는데, 당시 하버드 학부에는 건축전공이 없었어요. 물리학 전공으로 졸업을 하지만 건축 쪽으로 대학원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대학원에서 같이 듣는 건축 역사 코스를 많이 듣기 시작했어요. 그나마 학부에 시각 환경 스터디(Visual Environment Study)가 있어서 비쥬얼 아트 분야 과목을 들으면서 신이 났었죠.

 

물리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게 된 것도 흥미롭지만, 건축뿐만 아니라 조경학 석사도 받으셨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같은 시점에 제가 물성물리학 연구실(Material Science Lab)에 가서 지도교수님 밑에서 물리학 개별 연구(independence study research)를 했어요. 그 교수님은 정말 휴일도 없고, 주말도 없고, 연구실에서 사시는 거예요. 물론 물리가 좋았지만, 교수님처럼 사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게 되니까, 제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걸 알았죠. 거기서 결단을 내렸어요. 대학교 3~4학년 사이 여름에 하버드 디자인대학원(GSD)에서 건축, 조경 분야가 적성에 맞는지 시도해볼 수 있는 ‘커리어 디스커버리’ 여름학교에 응모했어요.

그때 제가 건축이 좋다고 난리니까 기숙사를 책임지시는 교수님이 자신이 아는 여자 건축가를 한번 만나보라고 하셨어요. 당시 기숙사에서는 학생이 쿠폰을 내면 선생님을 기숙사 다이닝룸으로 초대할 수 있었어요. 비싼 식사는 못 하니까, 만날 방법을 가르쳐주신 거죠. 그런데 소개해주신 분이 조경 교수님이셨어요. 제 마스터가 잘못 아셨던거예요. (웃음) 그때 그분이 조경에 대해서 완전히 전도를 하셔서, 커리어 디스커버리는 조경 분야로 갔어요. 거기서 교수님들이 제 작업을 좋아해 주시고, 원서 내라고 해주시니 즐겁게 조경 프로그램으로 GSD를 간 거죠.

가서 보니 건축이 또 있는 거예요. 하면 할수록 역사나 여러 체계를 보았을 때 건축을 같이 공부하고 싶었어요. 다시 지원했죠. 건축을 2학년(second year)부터 했는데 당시에는 두 가지 학위를 같이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제가 제안을 해야 했어요. 필수과목(required subject)은 다 하되, 선택과목(elective)의 경우 겹치는 것을 같이 인정해주면, 조금만 더 하면 되었죠. 그런 식으로 제안하고 허락을 받아서 공동 학위(joint degree)를 할 수 있었어요.

 

묘한 인연이 이어졌네요.

그렇죠. 대학교 3학년 때는 건축 코스를 패스 패일했는데, GSD에서는 성적이 좋아서 상을 받고 졸업을 했어요. (웃음) 처음엔 선생님이 아무 말 안 하고 사인을 해줄 정도였는데, 배우고 터득을 하다 보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거든요. 처음부터 낙심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물리를 좋아해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건축, 조경에 관심을 두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흥미로워요. 전혀 다른 전공을 공부하면서 물리에 접근할 때의 사고방식과 창작 과정의 사고방식에 차이를 느끼셨나요?

테크닉컬하게 배운 면이 직접 응용되는 건 구조 계산을 빨리하고 숫자에 익숙하다는 것과 공간 개념이지만, 큰 부분이 아닌 것 같고요. 중요한 건 한 분야(field)를 깊게 공부하고 나면, 문제 해결 방식으로써 한 방법은 터득했다는 거예요. 한 가지 규율(discipline)을 어느 정도 깊이 있게 하면, 거기에서 배운 디스플린이 다른 분야에서도 문제 해결 능력으로 적용되어서 훨씬 빨리 풀어내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비전공이라고 해도 점프가 가능하다고 봐요. 문제 해결방식을 알고 다른 접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GSD 같은 곳에서는 더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싶어 하죠. 그래야 같은 스튜디오 프로젝트에서 같은 선생님이 가르치더라도 전혀 다른 접근이 나오니까요. 물론 기본적으로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그래도 생각하는 각도가 더 달라지니까요.

 

건축의 경우 도면을 그리거나 읽어내는 등 스킬이 필요한 분야라서 만만치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너무 모르고 가서 디테일 같은 것은 따라잡아야 할 것들이 많았죠. 정말 잘 그리는 선배를 보면 입이 벌어지는데, 그런 건 열심히 물어보고 어깨너머로 연습하면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미술을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고, 미적인 관심은 옛날부터 있었어요. 비례와 시각적인 감각은 있어야 해요. 전공을 시작하면서 미친 듯이 그동안 못 봤던 건물 보러 다녔죠. 더 잘 그리면 더 좋았겠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할 것을 못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던 때는 포스트모던이 한창이었던 시기였잖아요. 당시에 영향을 받으셨나요?

제게 큰 영향을 준 건 라파엘 모네오 교수님이에요. 그때 GSD 건축과 학장이셨어요. 그분이 하신 건, 정말 다양한 건축가를 학교에 불러 모은 거예요. 스페인 사람만 부른 것이 아니라 당시 논의가 되고 있던 사람, 대립점에 있는 여러 사람까지요. 포스트모던과 같은 담론에 맞는 환경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로버트 벤투리도 있었고, 헤르초크 드 뫼롱이 초기 작품을 소개하는 렉쳐도 들었고, 그러면서도 피터 아이젠만의 웩스너 센터(Waxner Center) 같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 작업도 많이 나올 때였고 자하 하디드의 홍콩 프로젝트도 ‘와 이럴 수가!’하며 보았죠. 로비 전시장에는 안도 다다오의 초기 주택 청사진 도면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모네오가 준 첫 번째 과제는 학교에 있는 옛날 벽돌 건물을 실측한 후 도면 작업을 하는 것이었어요. 19세기의 미학(aesthetic)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모네오는 그 시대에 건축가는 어떤 그림이 필요했고, 그 그림을 통해 그때의 건축물 개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기회를 준 거였어요. 굉장히 전통적이고 촉각적인(tactile) 벽돌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어떻게 조합했는지, 벽 뒤에 있는 디테일을 상상해서 그려보라고 했죠. 그래서 세 사람이 한 팀이 돼서 큰 테이프자로 건물을 직접 재면서 입면을 그려야 했어요. 그리고는 데리다, 푸코의 철학을 말하는 헤이즈 교수의 강의실로 뛰어가고요. 매우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이론도 이론이지만 건축은 지어야 하는 공간임을 체득한 게 참 좋았어요. 매우 개념적이지만 나름대로 공간을 힘들게 만들어내는 조형 작업인 스튜디오, 또 현실적인 건축물을 도시와 사회개념을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건축가들의 스튜디오 등 스튜디오도 다양해서 여러 접근(approach)을 체험했어요.

 

당시 함께 공부하셨던 한국 건축가분들도 많으셨죠.

조병수 선생님은 도시 계획(urban planning)에 계셨어요. 제가 초년병으로 논문 도면을 보조했던 분이 민선주 선생님, 박승홍 씨는 제가 너무 초보라서 그림에 손을 못 대게 하셨어요. (웃음) 서혜림 씨, LA에서 활동하시는 앨리스 김, 조경 쪽으로는 박도경 씨가 계셨고. 현재 조경가로 활약하는 김미경은 제 룸메이트였어요.

 

그 시기에 같이 작업하셨던 분들은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면을 보입니다. 유학을 본격적으로 가게 된 세대라서 동시대의 건축 흐름을 책이나 다른 경로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얻고 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요.

네, 굉장히 운이 좋았죠. 한 학파가 아닌 다양한 생각과 접근법을 가진 건축가들과 공부할 기회였기 때문에 굉장히 감사하죠. 물론 발품을 팔아서 열심히 보러 다니기는 해야 했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정보를 빨리 흡수할 수 있던 게 좋았어요.

 

반면에 그 세대는 동시대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한국성이라는 화두가 나오기도 하고, 나는 한국 사람인데 한국 건축은 뭐가 특징이지?라는 고민을 결국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혹시 선생님은 그런 계기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개별적인 관심사를 끌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 부분에서 한쪽이 약할 수밖에 없어요. 한국 건축에 대한 저의 경험은 한옥에서 산 경험 그리고 한국에서 방문한 사찰이나 고택 정도이지만 깊게 연구할 기회가 없었어요. 서울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는 윤장섭 교수님께서 은퇴하셨을 때라서 기회를 놓쳤어요. 그래서 잘 모르지만 나름대로 공부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저는 미국 사람, 한국 사람을 다 떠나서 그냥 짬뽕 된 사람으로 저 자신을 편하게 받아들였어요. 요즘은 그런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태어나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컴퓨터와 매체를 통해서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세계인이라는 공감대가 생길 수 있죠. 한국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서양 공간이든 한국 공간이든 내가 좋아하는 공간, 만들고 싶은 공간이 있었을 때 그걸 바라보고 배워서 응용하고 싶다고 생각했지, 분류하지(categorize)는 않았던 것 같아요.

 

이른 나이에 외국에서 생활하고, 교육 과정도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지금은 그 경계가 많이 없어졌습니다만 당시 조경과 건축이라는 분야는 경계가 명확했을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를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둘 다 공부하고 싶어서 갔는데 한 지붕 세 가족이었어요. (웃음) 도시 계획, 조경, 건축 다 달라요. 다 그 분야가 먼저라고 이야기하고, 다 같이 시작해야 한다고 하죠. (웃음) 건물을 지어놓고 조경을 채우라고 해서는 안 된다, 건물 다 짓고 나서 어반 플래너에게 작업하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런 것 같아요. 물론 많이 좋아졌어요. 제가 건축과 조경을 동시에 했던 두 번째 학생이었고 그다음부터는 복수전공이 많아져서 나아졌대요. 아직 과목이 나누어져 있지만, 결국은 다 공간을 다루기 때문에 양쪽에 다 관심을 가지고 보니까요. 팀워크로 디자인한다는 게 원래 힘들어요.

다만 같이 공부를 하더라도 둘 중 하나의 전공(specialty)은 있어야 해요. 제 경우, 건축 쪽으로 더 했고요. 알로에마임 프로젝트를 할 때도 저는 건축, 조경 다 전공이었지만 건축 쪽으로 더 작업했고요. 예를 들어 그리팅가든 뒤 연못을 디자인할 때 과감하게 연못을 넓혀서 다리를 제안하신 분은 정영선 선생님이셨어요.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결과물이 훨씬 더 잘 나오는 거예요. 건물 옆에 있는 수목도 선생님 생각이 너무 잘 맞았고, 연못 물도 다리 쪽은 탁한 물이고 반대편은 맑은 물인데, 그런 디테일은 전문가에게서 나오는 것이죠. 그렇게 협업해야 해요. 학교에서 기초를 습득하고 실무에서 같이 협업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 되기까지 노력을 해야 하죠. 하지만, 한 사람이 두 개 다 잘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너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하나의 전공을 가지되 더 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협업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사실 구조도 건축을 알아야 아름다운 구조가 나오고요.

 

대학원 작업 중 기억에 남는 건 어떤 게 있나요?

사무엘 베켓의 연극 ‘Text for Nothing’의 무대장치(stage set)를 디자인하는 프로젝트가 많이 기억나요. 그 연극에는 무대 장치가 명시되어있지 않아요. 그래서 글을 읽고 무대 장치를 제안하는 과제였어요. 모래 위에서 배우 한 명이 나와서 모놀로그를 하는데, 저는 ‘무대‘의 영역을 1막, 2막, 3막,…, 막마다 배우가 모래에 발자국으로 그리면서 걷는 길(path)이 무대가 되도록 했어요. 선에서 타원형, 다시 원으로 가는 개념이죠. 베켓의 이 연극은 초현실적(surrealism)이잖아요. 자신이 여기 있으면 저쪽에서 자신의 손이 막 가는 게 보이는, 자신이 하나의 존재인데 분리되어 보이는 내용처럼, 타원의 초점(foci)이 가장 멀었을 때는 선이고, 같았을 때는 원이지만 그 사이에는 여러 모양의 타원이 나오는 특성이 이 연극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타원의 점과 두 초점(foci)과의 거리의 합은 항상 같기 때문이죠. 무대 초점(foci)에 위치한 두 조형물은 막이 바뀌며 무대가 다시 그려질때마다 움직이고, 관중이 동그랗게 앉아있으니까 관객의 관점에서 연극 도중 한번은 겹쳐 보이게 돼요. 그 보이는 순간들이 원과 타원이 되는 임계점(critical point)과 맞으면서 어느 순간에는 떨어져 보이고, 어느 순간은 같이 보일 수 있는 것을 해보려고 시도했죠. 평이 좋았어요, 저도 그 작업이 재밌었고요.

한국의 것을 해보겠다고 시도한 졸업논문 작업도 있었어요. 오행을 공부해서 나름대로 펜슬 드로잉으로 그려보고, 개념 모델을 만들어, 졸업 작품의 시작으로 삼았어요. 이 초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서도 스튜디오를 했어요. 학생들이 어떻게 접근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토탈미술관에서 제가 건축 전시를 큐레이팅한 적이 있는데, 그때 토마스 한이 이 아이디어를 빌려서 작품을 내기도 했죠.

 

대학원 작업 초기 작업이 완공된 작업보다 표현이 더 강렬한 것 같아요. 

대학원 가서 그렇게 밤을 많이 샌 적이 없어요. (웃음) 샌드위치 하나 사면 그게 점심이 되고 저녁이 되었죠. 당시에 3D 프린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손으로 잘라서 풀칠하고. 서혜림 선생님이 모델용 종이 껍질 벗겨서 페인트칠하는 걸 가르쳐줘서 칠하던 기억도 나고, 재밌었어요. OH

+ 진행 임진영
+ 사진 정멜멜 

다음 인터뷰 ②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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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영역을 뛰어넘는 시각과 건축의 확장, 건축가 박 헬렌 주현 ① 2006년 이후 꼭 12년 만의 인터뷰다. 봄비치고는 제법 빗줄기가 거셌던 3월, 이태원 아파트 자택에서 박헬렌주현을 만났다. 하버드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생은 우연히 들은 건축 역사 수업에서 18세기 블레, 르듀의 거대한 상상의 공간에 열광하며 건축을 찾아 나선다. 조경을 탐닉하고 다시 건축 분야까지 전공하면서 얻은 것은 전문 영역에 대한 이해, 시각의 확장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어떻게 협업해야 하는가에 대한 유연한 태도이다. 초현실주의와 해체주의건축에 대한 관심, 땅과 건축이 갖는 관계 구성과 구축, 경계를 넘나드는 협업 작업과 전시 참여 등 2000년대 중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박헬렌주현은 경기대 건축대학원의 실험을 이끌었던 일원이자, 자신의 스튜디오를 통해 건축을 만들어가던 젊은 건축가였다. 2006년 이후 건강 문제로 잠시 휴식을 취한 이후에도 건축가 박헬렌주현의 대표 프로젝트인 ‘그리팅가든’은 드라마 <시크릿 가든>부터 최근 <김비서가 왜그럴까>까지, 꾸준히 드라마와 광고를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간혹 영상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볼 때마다 “천정을 지붕 색으로 칠했어야 했는데” 한다는 건축가의 말은 작업에 대한 남은 갈증을 전해준다. 자신이 직접 리노베이션한 자택에서 여전히 차분하고 맑은 목소리로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물리학, 조경, 건축   이 집의 인테리어도 초기 작업(1999년) 중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접이식 문이 인상적이에요.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절할 공간이 부족해서 만든 거예요. 다행히 이 아파트는 벽 구조가 아니라서 거실과 서재를 구분하는 벽을 튼 거예요. 서재의 책상 앞에 병풍을 치고 상을 놓으면 딱 접이식 문 위치까지 상이 놓여요. 그 앞 거실 공간에 돗자리를 놓고 교회 다니시는 분은 뒤에 서 계시고, 절하시는 분만 앞으로 오면 대충 수용돼요. 평소에는 접이문을 닫고, 현관 쪽 중간 유리문을 닫으면 저 서재는 반-공적인(semipublic) 공간이 되어서 독립적으로 외부손님을 만날 수 있어요.   실용적인 공간 활용이네요. 사무실은 2006년에 정리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10여 년 만의 인터뷰네요. 그렇죠? 2006년에 미국에 가고, 남은 일 정리는 2007~2008년까지 한 것 같아요.   1964년에 서울에서 나셨습니다. 아버님이 교육자시라고 알고 있어요. 아버지께서는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오래는 아니지만 영어 선생님이셨어요.   교육하는 집안의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학교라는 분위기, 선생님이 되어 가르치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작은어머니도 스웨덴 분이셨지만, 유치원 원장으로 몬테소리를 처음 도입하셨죠. 우리 집은 할머니가 더 활동적이셨어요. 교육 열정이 많으시고 여자가 집에 있는 것보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저에겐 할머니가 큰 롤모델이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도 어렸을 때 혼자 일본으로 유학을 하러 가셨어요. 신여성이었죠. 자전거 타고 스타킹에 하얀 드레스 입고, 그런 사진들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접하셨겠네요. 제 기억엔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보다 더 바쁘셨던 것 같아요. 증조할머니도 아들보다 계속 할머니하고 지내시길 원했고. 가부장적인 집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집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관훈동 종로경찰서 옆집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사셨고, 엄마와 아버지가 결혼해 그곳에서 시집살이하셨어요. 아빠가 둘째 아들이셨는데, 셋째 아들 내외분도 거기 계셨고, 사촌들도 있었어요. 대가족이죠. 집은 큰 기와집이었어요. 종로경찰서 대로변 쪽으로 기와지붕을 한 2층 벽돌 건물이 더해졌는데, 1층은 상가였고 2층은 안쪽 한옥에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던 걸로 기억해요. 한옥은 문간방 있는 옛날집이니라 옛날식으로 대문, 중문, 사랑채, 안채로 되어 있고요. 원하시는 대로 개조하셔서 앞은 한옥인데 뒷면은 복도로 다 연결해서 화장실도 붙이시고 부엌도 붙이시고, 희한하게 개조가 된 한옥에 벽돌 상가 건물이 연결되어 있었어요.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내신 건가요? 관훈동 일대에 대한 기억이나 경험이 많이 남아 계실 것 같아요. 초등학교 2~3학년까지 살았죠. 그러고 나서는 진짜 계단이 있는 혜화동 양옥집으로 이사를 하였어요. 인사동 생각이 많이 나요. 그때는 인사동에 차가 못 들어가서 똥지게로 정화조 청소를 해야 하는 좁은 골목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었는데, 아직도 그 골목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수도약국. 아프면 늘 수도약국에 가서 약을 지었는데, 아직도 남아 있어요. 인사동이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그 뒷길의 도시 구조(Urban fabric)는 아직 있어요. 옛날 같지는 않지만요.   당시 인사동은 고미술품 거래가 활발하고 예술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는데, 그 동네의 인상도 남아있나요? 대학 방학 때, 한국에 나오면 관훈동 집에 있었어요. 그제서 고미술 가게가 눈에 들어와서 많이 들어갔죠. 그때는 오래된 표구사들이 참 많았어요. 어머니께서 표구할 게 있으시면 같이 따라가서 비단 구경도 하고 그랬는데 다 없어졌어요. 요즘 가면 인사동에 무슨 가게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을 떠나 하와이에 가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하와이에는 1978년에 갔어요. 그때가 중2 때였어요. 처음에는 식구들이 다 같이 하와이로 갔다가, 아버지가 다시 한국으로 나오시게 되었어요. 저희는 한국에서 다 자퇴하고 하와이에서 학교를 시작한 상태라 애매하잖아요. 본의 아니게 기러기 아빠로 바뀐 거죠. 하와이에 살 때는 지루했죠. 사실 휴양지가 은퇴한 분들에게는 좋은데, 젊은 사람들에게는 하루면 섬 한 바퀴를 돌고 오는 곳이니까요. ‘나는 눈 내리는 곳으로 다시 갈 거야, 대학은 서부도 안 본다, 동부만 본다.’(웃음) 그렇게 되었죠.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없으셨나요? 있었죠. 다행인 것은 하와이에는 동양인이 많아요. 영어를 하지만 동양인이었고 하와이 사람들은 굉장히 따뜻했어요. 하와이에서는 가족과 같이 있었고, 모든 게 느리고 다 웃어주고, 고등학교도 작은 학교로 가서 좀 수월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대학교에 갔을 때 서양인이 더 많은 환경에서 보내게 되면서 미국, 서양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것 같아요.   흥미롭게도 전공이 물리학입니다. 건축, 설계라는 분야와 물리학은 상당히 거리가 느껴지는데, 하버드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건축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사실 고등학교 때는 건축을 몰랐어요. 수학, 과학을 잘했고요. 물리가 진짜 재미있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기 전에 물리 선생님이 캘리포니아의 천문학 캠프에 가보라고 팸플릿을 주시는 거예요. 본토에 가보자 했죠. 비교하자면 거제도 섬에서 서울도 아닌 부산에 가는 거잖아요. (웃음) 그곳에서 경험한 모든 게 좋았어요. 그래서 더 물리학에 빠졌고, 고등학교 4학년 때는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다 마쳤기 때문에 하와이주립대(UH)에 가서 수학과 물리과목을 더 들었어요. 재미있더라고요. 하버드대학교에 갔을 때는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물리 공부만 생각했어요. 다 이과 코스에 교양과목만 넣고 시작을 했죠. 그런데 하버드대학에서는 다양하게 해보라는 분위기가 있어요. 너무 한쪽만 파지 말고 ‘뷔페에서 다 먹어보고 나서 싫은 거 좋은 거 가려보라’는 조언이 좋았죠. 그래서 건축 역사 수업(History of Architecture)을 들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에드워드 세클러 교수라고, 빈(Vienna)에서 오신 역사학자였어요. 아인슈타인처럼 중력을 따르지 않는 머리와 커다란 안경을 쓰신 분이었는데, 옛날 유리로 만든 슬라이드를 보여줬어요. 유리 슬라이드는 해상도가 참 좋아요. 특히 크게 확대했을 때, 엄청났죠. 그 슬라이드들을 프로젝터 두 대로 계속 보여주면서 강의하시는데, 제가 완전히 넘어갔어요. 그때 블레(Etienne Louis Boullee, 1728~99년), 르듀(Claude Nicholas Ledoux, 1736~1806년) 등 18세기 계몽주의(enlightenment) 시대의 작업과 앙리 라브르스트(Henri Labrouste)의 생트 쥬느비에브 도서관 같은 건물이 등장하는데, 그때까지 그런 건물을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서울에서 하와이에 가서 살다가 케임브리지에 있는 학교 건물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앞에서 펼쳐지는 건물과 상상의 공간들이 너무 좋아서 이 코스를 들어야겠다 결심했죠. 신청해서 가보니 GSD 대학원생과 같이 듣는 코스였어요.   대학생도 같이 들을 수 있었나요? 과목은 대학원 코스였는데 학부 학생들이 같이 들을 수 있었어요. 뭣도 모르고 좋으니까 들어간 거죠. 그곳에 박승홍 씨, 고 장림종 씨 다 앉아 계시더라고요. 한국분들 같아서 인사하고 제가 건축이 재미있다고 하니까 놀러 오라고 하시고, 놀러 가니까 당시 GSD에서 학생으로 계셨던 서혜림 씨에게 저를 소개해주고. (웃음) 서혜림 씨는 졸지에 저를 데리고 구경시켜주게 되면서 만나게 되었어요. 문제는 그 코스의 중간고사 성적이 너무 안 좋았어요. 선생님께 중간고사를 못 본 것 같다고 아무래도 패스 패일(pass-fail)로 해야겠다고 이야길 했죠. 왜냐하면 그런 시험을 처음 쳐봤거든요. 성적을 보시더니 아무 말씀 안 하시고 사인을 해주시는 거예요. (웃음) 그 때부터 아주 마음 편하게, ‘패스 패일이니까 패일은 안 하겠지’ 하면서 즐겁게 수업을 들었어요. 그다음부터 전공을 바꾸려고 했는데, 당시 하버드 학부에는 건축전공이 없었어요. 물리학 전공으로 졸업을 하지만 건축 쪽으로 대학원을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부터는 대학원에서 같이 듣는 건축 역사 코스를 많이 듣기 시작했어요. 그나마 학부에 시각 환경 스터디(Visual Environment Study)가 있어서 비쥬얼 아트 분야 과목을 들으면서 신이 났었죠.   물리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게 된 것도 흥미롭지만, 건축뿐만 아니라 조경학 석사도 받으셨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같은 시점에 제가 물성물리학 연구실(Material Science Lab)에 가서 지도교수님 밑에서 물리학 개별 연구(independence study research)를 했어요. 그 교수님은 정말 휴일도 없고, 주말도 없고, 연구실에서 사시는 거예요. 물론 물리가 좋았지만, 교수님처럼 사는 것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게 되니까, 제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걸 알았죠. 거기서 결단을 내렸어요. 대학교 3~4학년 사이 여름에 하버드 디자인대학원(GSD)에서 건축, 조경 분야가 적성에 맞는지 시도해볼 수 있는 ‘커리어 디스커버리’ 여름학교에 응모했어요. 그때 제가 건축이 좋다고 난리니까 기숙사를 책임지시는 교수님이 자신이 아는 여자 건축가를 한번 만나보라고 하셨어요. 당시 기숙사에서는 학생이 쿠폰을 내면 선생님을 기숙사 다이닝룸으로 초대할 수 있었어요. 비싼 식사는 못 하니까, 만날 방법을 가르쳐주신 거죠. 그런데 소개해주신 분이 조경 교수님이셨어요. 제 마스터가 잘못 아셨던거예요. (웃음) 그때 그분이 조경에 대해서 완전히 전도를 하셔서, 커리어 디스커버리는 조경 분야로 갔어요. 거기서 교수님들이 제 작업을 좋아해 주시고, 원서 내라고 해주시니 즐겁게 조경 프로그램으로 GSD를 간 거죠. 가서 보니 건축이 또 있는 거예요. 하면 할수록 역사나 여러 체계를 보았을 때 건축을 같이 공부하고 싶었어요. 다시 지원했죠. 건축을 2학년(second year)부터 했는데 당시에는 두 가지 학위를 같이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제가 제안을 해야 했어요. 필수과목(required subject)은 다 하되, 선택과목(elective)의 경우 겹치는 것을 같이 인정해주면, 조금만 더 하면 되었죠. 그런 식으로 제안하고 허락을 받아서 공동 학위(joint degree)를 할 수 있었어요.   묘한 인연이 이어졌네요. 그렇죠. 대학교 3학년 때는 건축 코스를 패스 패일했는데, GSD에서는 성적이 좋아서 상을 받고 졸업을 했어요. (웃음) 처음엔 선생님이 아무 말 안 하고 사인을 해줄 정도였는데, 배우고 터득을 하다 보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거든요. 처음부터 낙심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물리를 좋아해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건축, 조경에 관심을 두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 흥미로워요. 전혀 다른 전공을 공부하면서 물리에 접근할 때의 사고방식과 창작 과정의 사고방식에 차이를 느끼셨나요? 테크닉컬하게 배운 면이 직접 응용되는 건 구조 계산을 빨리하고 숫자에 익숙하다는 것과 공간 개념이지만, 큰 부분이 아닌 것 같고요. 중요한 건 한 분야(field)를 깊게 공부하고 나면, 문제 해결 방식으로써 한 방법은 터득했다는 거예요. 한 가지 규율(discipline)을 어느 정도 깊이 있게 하면, 거기에서 배운 디스플린이 다른 분야에서도 문제 해결 능력으로 적용되어서 훨씬 빨리 풀어내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비전공이라고 해도 점프가 가능하다고 봐요. 문제 해결방식을 알고 다른 접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GSD 같은 곳에서는 더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싶어 하죠. 그래야 같은 스튜디오 프로젝트에서 같은 선생님이 가르치더라도 전혀 다른 접근이 나오니까요. 물론 기본적으로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그래도 생각하는 각도가 더 달라지니까요.   건축의 경우 도면을 그리거나 읽어내는 등 스킬이 필요한 분야라서 만만치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너무 모르고 가서 디테일 같은 것은 따라잡아야 할 것들이 많았죠. 정말 잘 그리는 선배를 보면 입이 벌어지는데, 그런 건 열심히 물어보고 어깨너머로 연습하면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미술을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고, 미적인 관심은 옛날부터 있었어요. 비례와 시각적인 감각은 있어야 해요. 전공을 시작하면서 미친 듯이 그동안 못 봤던 건물 보러 다녔죠. 더 잘 그리면 더 좋았겠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할 것을 못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던 때는 포스트모던이 한창이었던 시기였잖아요. 당시에 영향을 받으셨나요? 제게 큰 영향을 준 건 라파엘 모네오 교수님이에요. 그때 GSD 건축과 학장이셨어요. 그분이 하신 건, 정말 다양한 건축가를 학교에 불러 모은 거예요. 스페인 사람만 부른 것이 아니라 당시 논의가 되고 있던 사람, 대립점에 있는 여러 사람까지요. 포스트모던과 같은 담론에 맞는 환경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로버트 벤투리도 있었고, 헤르초크 드 뫼롱이 초기 작품을 소개하는 렉쳐도 들었고, 그러면서도 피터 아이젠만의 웩스너 센터(Waxner Center) 같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 작업도 많이 나올 때였고 자하 하디드의 홍콩 프로젝트도 ‘와 이럴 수가!’하며 보았죠. 로비 전시장에는 안도 다다오의 초기 주택 청사진 도면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모네오가 준 첫 번째 과제는 학교에 있는 옛날 벽돌 건물을 실측한 후 도면 작업을 하는 것이었어요. 19세기의 미학(aesthetic)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모네오는 그 시대에 건축가는 어떤 그림이 필요했고, 그 그림을 통해 그때의 건축물 개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기회를 준 거였어요. 굉장히 전통적이고 촉각적인(tactile) 벽돌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어떻게 조합했는지, 벽 뒤에 있는 디테일을 상상해서 그려보라고 했죠. 그래서 세 사람이 한 팀이 돼서 큰 테이프자로 건물을 직접 재면서 입면을 그려야 했어요. 그리고는 데리다, 푸코의 철학을 말하는 헤이즈 교수의 강의실로 뛰어가고요. 매우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이론도 이론이지만 건축은 지어야 하는 공간임을 체득한 게 참 좋았어요. 매우 개념적이지만 나름대로 공간을 힘들게 만들어내는 조형 작업인 스튜디오, 또 현실적인 건축물을 도시와 사회개념을 바탕으로 만들어내는 건축가들의 스튜디오 등 스튜디오도 다양해서 여러 접근(approach)을 체험했어요.   당시 함께 공부하셨던 한국 건축가분들도 많으셨죠. 조병수 선생님은 도시 계획(urban planning)에 계셨어요. 제가 초년병으로 논문 도면을 보조했던 분이 민선주 선생님, 박승홍 씨는 제가 너무 초보라서 그림에 손을 못 대게 하셨어요. (웃음) 서혜림 씨, LA에서 활동하시는 앨리스 김, 조경 쪽으로는 박도경 씨가 계셨고. 현재 조경가로 활약하는 김미경은 제 룸메이트였어요.   그 시기에 같이 작업하셨던 분들은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면을 보입니다. 유학을 본격적으로 가게 된 세대라서 동시대의 건축 흐름을 책이나 다른 경로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얻고 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요. 네, 굉장히 운이 좋았죠. 한 학파가 아닌 다양한 생각과 접근법을 가진 건축가들과 공부할 기회였기 때문에 굉장히 감사하죠. 물론 발품을 팔아서 열심히 보러 다니기는 해야 했지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정보를 빨리 흡수할 수 있던 게 좋았어요.   반면에 그 세대는 동시대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한국성이라는 화두가 나오기도 하고, ‘나는 한국 사람인데 한국 건축은 뭐가 특징이지?’라는 고민을 결국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혹시 선생님은 그런 계기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개별적인 관심사를 끌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 부분에서 한쪽이 약할 수밖에 없어요. 한국 건축에 대한 저의 경험은 한옥에서 산 경험 그리고 한국에서 방문한 사찰이나 고택 정도이지만 깊게 연구할 기회가 없었어요. 서울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는 윤장섭 교수님께서 은퇴하셨을 때라서 기회를 놓쳤어요. 그래서 잘 모르지만 나름대로 공부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저는 미국 사람, 한국 사람을 다 떠나서 그냥 짬뽕 된 사람으로 저 자신을 편하게 받아들였어요. 요즘은 그런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태어나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컴퓨터와 매체를 통해서 정보를 공유하기 때문에 세계인이라는 공감대가 생길 수 있죠. 한국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서양 공간이든 한국 공간이든 내가 좋아하는 공간, 만들고 싶은 공간이 있었을 때 그걸 바라보고 배워서 응용하고 싶다고 생각했지, 분류하지(categorize)는 않았던 것 같아요.   이른 나이에 외국에서 생활하고, 교육 과정도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지금은 그 경계가 많이 없어졌습니다만 당시 조경과 건축이라는 분야는 경계가 명확했을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를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둘 다 공부하고 싶어서 갔는데 한 지붕 세 가족이었어요. (웃음) 도시 계획, 조경, 건축 다 달라요. 다 그 분야가 먼저라고 이야기하고, 다 같이 시작해야 한다고 하죠. (웃음) 건물을 지어놓고 조경을 채우라고 해서는 안 된다, 건물 다 짓고 나서 어반 플래너에게 작업하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런 것 같아요. 물론 많이 좋아졌어요. 제가 건축과 조경을 동시에 했던 두 번째 학생이었고 그다음부터는 복수전공이 많아져서 나아졌대요. 아직 과목이 나누어져 있지만, 결국은 다 공간을 다루기 때문에 양쪽에 다 관심을 가지고 보니까요. 팀워크로 디자인한다는 게 원래 힘들어요. 다만 같이 공부를 하더라도 둘 중 하나의 전공(specialty)은 있어야 해요. 제 경우, 건축 쪽으로 더 했고요. 알로에마임 프로젝트를 할 때도 저는 건축, 조경 다 전공이었지만 건축 쪽으로 더 작업했고요. 예를 들어 그리팅가든 뒤 연못을 디자인할 때 과감하게 연못을 넓혀서 다리를 제안하신 분은 정영선 선생님이셨어요.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결과물이 훨씬 더 잘 나오는 거예요. 건물 옆에 있는 수목도 선생님 생각이 너무 잘 맞았고, 연못 물도 다리 쪽은 탁한 물이고 반대편은 맑은 물인데, 그런 디테일은 전문가에게서 나오는 것이죠. 그렇게 협업해야 해요. 학교에서 기초를 습득하고 실무에서 같이 협업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 되기까지 노력을 해야 하죠. 하지만, 한 사람이 두 개 다 잘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너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하나의 전공을 가지되 더 큰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협업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사실 구조도 건축을 알아야 아름다운 구조가 나오고요.   대학원 작업 중 기억에 남는 건 어떤 게 있나요? 사무엘 베켓의 연극 ‘Text for Nothing’의 무대장치(stage set)를 디자인하는 프로젝트가 많이 기억나요. 그 연극에는 무대 장치가 명시되어있지 않아요. 그래서 글을 읽고 무대 장치를 제안하는 과제였어요. 모래 위에서 배우 한 명이 나와서 모놀로그를 하는데, 저는 ‘무대‘의 영역을 1막, 2막, 3막,…, 막마다 배우가 모래에 발자국으로 그리면서 걷는 길(path)이 무대가 되도록 했어요. 선에서 타원형, 다시 원으로 가는 개념이죠. 베켓의 이 연극은 초현실적(surrealism)이잖아요. 자신이 여기 있으면 저쪽에서 자신의 손이 막 가는 게 보이는, 자신이 하나의 존재인데 분리되어 보이는 내용처럼, 타원의 초점(foci)이 가장 멀었을 때는 선이고, 같았을 때는 원이지만 그 사이에는 여러 모양의 타원이 나오는 특성이 이 연극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타원의 점과 두 초점(foci)과의 거리의 합은 항상 같기 때문이죠. 무대 초점(foci)에 위치한 두 조형물은 막이 바뀌며 무대가 다시 그려질때마다 움직이고, 관중이 동그랗게 앉아있으니까 관객의 관점에서 연극 도중 한번은 겹쳐 보이게 돼요. 그 보이는 순간들이 원과 타원이 되는 임계점(critical point)과 맞으면서 어느 순간에는 떨어져 보이고, 어느 순간은 같이 보일 수 있는 것을 해보려고 시도했죠. 평이 좋았어요, 저도 그 작업이 재밌었고요. 한국의 것을 해보겠다고 시도한 졸업논문 작업도 있었어요. 오행을 공부해서 나름대로 펜슬 드로잉으로 그려보고, 개념 모델을 만들어, 졸업 작품의 시작으로 삼았어요. 이 초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에서도 스튜디오를 했어요. 학생들이 어떻게 접근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토탈미술관에서 제가 건축 전시를 큐레이팅한 적이 있는데, 그때 토마스 한이 이 아이디어를 빌려서 작품을 내기도 했죠.   대학원 작업 초기 작업이 완공된 작업보다 표현이 더 강렬한 것 같아요.  대학원 가서 그렇게 밤을 많이 샌 적이 없어요. (웃음) 샌드위치 하나 사면 그게 점심이 되고 저녁이 되었죠. 당시에 3D 프린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손으로 잘라서 풀칠하고. 서혜림 선생님이 모델용 종이 껍질 벗겨서 페인트칠하는 걸 가르쳐줘서 칠하던 기억도 나고, 재밌었어요. 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