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③

여러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택도시연구원을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천기술개발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우리 팀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만든 이후, 불행히도 제가 회의에 빠져들었어요. 그때가 거의 2년 좀 넘었을 때였는데 이것도 여성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내부에서 받는 견제는 항상 있었지만, 나보다 남자들을 먼저 승진시키더라고요. 별것 아니었지만, 예를 들면 월급을 더 많이 준다거나 했어요. 또 제가 후배라 해서 선배가 슬그머니 얹혀가려는 상황도 기분이 얹짢았고요. 여기에 계속 있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이 물이 저에게 너무 작아서 마음대로 뛰놀지 못하겠더라고요. (웃음) 당시 외부 원고 청탁도 많이 들어올 때였는데 원고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고, 여러모로 자유롭지가 않았어요.

또 제도 개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어딜 가든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모든 회의에 들어가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바꿔나가고 그랬죠. 그것도 한 2년 하니 지치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관둬야 하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갈 데가 없는 건 괜찮아요. 오라는 데가 없는 건 찾으면 돼요. 더 큰 문제는, 도대체 내가 가고 싶은 곳도 없었어요. (웃음) 요새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벤처를 만들듯 하고 싶은 걸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때는 희귀한 케이스였어요. 더군다나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사람들은 제가 어떤 조직에서 일하기를 기대하잖아요. 그래서 몇 달 동안 고민했어요.

어느 날 새벽에 혼자 앉아 있는데 불현듯 ‘아니, 가고 싶은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으면, 그냥 하고 싶은 거 혼자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우, 나 천재다!’ 했어요. (웃음) 그래서 그때 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물론 혼자서 했던 것은 아니에요. 주변에 벤처 형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회사를 만들었어요. 물론 제가 주도적으로 일하는 거지만. 그렇게 해서 ‘서울포럼’이 만들어졌어요.

 

서울포럼으로 독립한 게 가장 힘든 선택이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선택이었어요. 그때 스스로 바보라고 생각한 게 뭐냐면, 30대 중반까지 한 번도 이런 독립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박사 학위도 받았으니 어느 조직에 가서 팀장이나 기관장 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 자신의 폭, 제 세계의 폭을 한정시켜놨던 거죠. 사람이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 그런 거죠. 그때 완전히 알을 깨고 나온 거예요. 그때 독립한 것이 인생에서 저 자신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고, 또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됐다고 믿습니다. (웃음)

 

서울포럼에서 도시건축과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기획, 출판, 저술까지 다 아우르셨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기획 업무가 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말해 설계에 주력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설계 잘하는 사람은 워낙 많아요. 저는 스스로 특정 프로젝트를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저 자신을 잘 파악했던 거죠.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는 아직 그런 요구가 별로 없었어요. 활동했던 시기가 1990년대인데, 마침 앞서 얘기했던 민영화와 세계 자본주의에 관련된 일들이 말하자면 물밀 듯이 생길 때였어요. 그러면서 기획에 대한 요구(needs)가 필요해진 거죠. 솔직히 그전까지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지만, 이제는 ‘무엇을 지을까? 어떤 구성으로 해서 짓는 게 좋지? 이건 누구하고 함께 하면 좋지? 기술은 어떻게 하면 좋지?’ 등등을 기획하는 수요가 있었어요. 그걸 파악했기 때문에 시작했던 거였어요. 건축 설계는 가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했지요. 인사동 프로젝트는 제가 재미있어서 한 거였어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제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잖아요.

출판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보면 대기만성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30대 중반부터 신문에 칼럼을 쓰곤 했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작가이기도 했고, 글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서 책도 많이 읽었어요. 언젠가는 책을 쓰겠다고도 했지만,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이유가 있더라고요. 글에 대해서 확실하게 눈을 떴을 때가 미국에 있을 때였는데, 영어로 글을 써야 하니 항상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미국에 있는 애들이 나보고 글을 참 잘 쓴다는 이야기는 했어요. 문법만 조금 고치면 될 뿐, 톤이나 글의 시작이 굉장히 좋고, 주제 개념도 참 좋다고요. 영어라 소극적이었던 거였는데, 한글로 쓰게 되니 막 폭발을 하는 거죠.

또 프레젠테이션을 매우 잘한다는 것도 주택공사에 가서 알았어요. 미국에서 영어로 할 때는 항상 조심스러웠던 거죠. 미국에서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야기하던 것이 나중에 다 힘이 됐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프리젠테이션인지 알게 된 거예요. 미국에서는 확실히 그런 게 훈련이 돼요. 무엇을 하든 상대편, 즉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해요. 또 콘셉트 없이 이야기하면 바로 외면당해요.

이 분야에서 강홍빈 선배가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인데, 제가 그분에게 인정을 받았어요. (웃음) 농담 삼아 “강홍빈을 이겨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는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항상 후배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이제 동료로구나’라는 메시지를 선배의 눈에서 읽었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여성이나 남성이나 우리는 일하면서 프로로 인정받을 때, 동료로 인정받을 때, 그리고 내가 정말 잘한다는 것을 상대편이, 그것도 일 잘하는 상대편이 존경해줄 때 기분이 매우 좋아지잖아요. 그래서 자신감도 생겼고, 스스로도 ‘나가도 먹고살기는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사람들은 저를 까칠하다고 보는 편이지만 저는 꽤 사교에 능한 편이에요. 혼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아해요. 이중적이죠.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게 해주려는 성향이 있어요. 사람들 만나면 나도 모르게 흥이 나고, 얼굴이 환해져요. 일단 접하기 힘든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툭툭 던지는 제 이야기가 자극도 되고 하니까. 그러다 보니 클라이언트 관리도 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서울포럼 하면서 제 여러 가지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출판도 전혀 생각이 없다가 하게 됐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결론은 어쩌다 하게 된 게 참 많다는 거네요. <서울성>이란 책을 처음 냈었는데, 그 책은 서울포럼을 시작하면서 저를 알리고 싶어서 계획했던 책이에요. 유명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였고 계약까지 갔는데 저자로서는 달갑지 않은 조건을 걸더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직접 내자 하면서 출판하게 된 거예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하면서 온갖 종류의 인쇄 과정은 다 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서울포럼을 차리고 처음 발간한 책 <서울성> @김진애 제공
서울포럼 당시 건축가 조성룡과 대담, 당시 많은 도시 건축 콘텐츠가 인터넷 웹진 아크포럼을 통해 소개되었다. @김진애 제공
사무실에서 작업중인 김진애 박사 @김진애 제공
1994년 타임 표지 @김진애 제공

당시 대표작은 역시 <자라기> 시리즈가 아닐까 싶어요. 건축, 도시 분야에 대한 전문 가이드북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건축계 후배들에게 가장 큰 영향과 도움을 준 것이 <매일 매일 자라기>, <프로로 자라기>, <사람으로 자라기> 책 세 권일 거예요. <매일 매일 자라기>는 거의 바이블처럼 됐더라고요. 이 책은 지금도 가끔 읽으면서 감탄해요. 그 책이 어느 정도 임팩트가 있었냐 하면, 다른 분야에서 읽은 사람들이 꽤 되더라고요. 그중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진작 읽었더라면 하는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 책을 읽은 책 마케터가 훗날 출판사 사장이 됐는데, ‘나중에 김진애 선생님의 책을 꼭 내리라’라고 했대요. 바로 다산북스의 사장이에요. 다산북스는 꽤 성공한 출판사예요. 제가 국회의원이 된 후 찾아왔더라고요. 그분이 그 세 권의 책을 정말 좋아했는데, 건축 분야에만 묻혀 있는 게 너무 아깝다고 해서 다시 내게 됐던 거예요. <매일 매일 자라기>는 <인생을 바꾸는 건축 수업>으로 다시 냈는데 이것은 오히려 잘 안됐어요. <사람으로 자라기>는 <한 번은 독해져라>로 재출판 됐는데, 초 베스트셀러가 됐죠. <프로로 자라기>는 시대에 따라 변경할 부분들이 있어 다시 써주기로 했는데, 아직 시간이 없어 못 쓰고 있는 상황이에요.

 

포럼과 함께 교류도 많이 하셨습니다. 당시 40대 건축가들에게 파티도 열어주셨다고 들었어요. 당시 젊은 건축가였던 최욱 소장님도 인상 깊은 에피소드로 기억하더라고요.

제가 ‘turn-40’ 파티를 했어요. 마흔이 됐을 때 양력설부터 음력설까지 한 달 정도 걸리잖아요? 그때부터 광고를 했어요. 나 마흔이 되니, 파티를 열어 달라고요. 그래서 3번을 했어요. 한번은 여자 친구들끼리만 모여서 파티를 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친구들과도 속 이야기를 별로 안 하는 사람인데, 그날은 분위기가 마치 에포크-메이킹 이벤트처럼 된 거예요. 고해성사하듯 미래에 대한 불안과 꿈, 상황에 대한 진단 등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아 이게 turn-40 때문에 그렇구나’를 깨달았어요.

당시 함께 한 친구들이 나보다 조금씩 어린 친구들이어서 그 친구들에게 파티를 해주다 40대 중반이 되었어요. 그러고 나니 후배들에게도 해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때부터는 대게 같은 분야에 있는 사람들에게 파티를 열어줬어요. 최욱, 박인석, 황두진, 김영준, 공철, 함인선 또 동생처럼 아주 괜찮게 여겼던 고 이종호, 많은 사람을 그때 만났죠.

 

인터넷 웹진 아크포럼(Archforum)도 진행하셨어요.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시기에 양질의 콘텐츠를 접할 수 있었던 인상적인 사이트였습니다.

내 인생 중 가장 기뻤던 순간 중 하나가 인터넷이 나왔을 때였어요. ‘야호’를 외쳤죠. 그러고 나니 당연히 웹진에 관심이 갔어요. 관심이 안 둘래야 안 둘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97년인가 98년인가부터 몇 년 동안 했어요. 재밌었어요.

 

말씀하신 대로 웹진 개념도 익숙하지 않은 시기에 아크포럼은 소통의 장을 열었어요. 인터넷 웹진에 대한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하셨지만, 그 채널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궁금해요.

뭘 하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런 거 별로 없어요. 항상 묻는 거 좋아하고, 듣는 거 좋아하고, 또 통하는 거 좋아해요. 여기저기에 관심이 많아요. 사람들이 자꾸 많이 이야기하면 화제가 되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세상이 바뀌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이 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때마다 그런 일을 한 거뿐이죠. 또 아무래도 제가 건축, 도시계획뿐만 아니라, 인문계, 문화예술, 기업이나 정치계 쪽도 많이 알고 있어서 여러 사람들을 엮어주기가 좋았던 거죠.

기존의 고정관념과 판타지를 깨주는 역할에 대한 마음은 계속 있었어요. 제 철학이기도 하거니와, 우리나라 건축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걸 깨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시장에서 필요한 판타지는 있어야 해요. 스타도 필요하고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하지만 매번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요. “드라마에 나오는 건축가는 모두 다 허상이에요. 실제로 건축가는 돈도 많지 않고, 시간도 없고, 연애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만 크고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라고요. 그걸 가장 잘 그린 게 영화 <건축학개론>이라고 말해요. 건축가를 가장 근사하게 그렸고, 그 마음속에 들어가는 여성 건축주가 굉장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거든요. 사람들이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끔 하고 싶었어요.

또 다른 것은 ‘좋은’이라는 개념을 더 많이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세상에 탁월하고 훌륭한 것, 엄청난 것이 있을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야기를 못 한다고요. 좋은 것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공유해야 해요.

 

건축 분야에 특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도시로 넓혀야 한다’라는 거예요. 그 부분에서는 아마도 제가 영향을 꽤 줬을 거예요. 지금도 저를 도시건축 PD나 도시건축가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그거예요. 건축가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멋진 건물을 짓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도시를 만드는데 건축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잘 안 해요. 그런데 도시건축가라고 하면 일단 ‘어 뭐야?’란 반응이 나와요. 건축하는 사람들이 도시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두고, 도시를 생각하면서 건축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제 취향이자 제인 제이콥스와 한나 아렌트로부터 받은 영향이에요. 도시가 근사해지면 사회가 훨씬 좋아진다고 생각해요.

그다음, 여러 분야를 엮어야 해요. 섞는다는 것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솔직히 잘 안 돼요. 제가 했을 때도 잘 안 됐고, 지금도 잘 안 돼요. 지금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이 승효상 선생님인데, 구성원이 너무 건축 중심이에요. 그렇게 되면 건축의 외연이 넓어지지 않아요. 건축은 정말 위대한 거지만, 사회에서의 건축은 아주 작다는 현실을 알아야 해요. 그러면 외연을 넓혀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요.

또 시민들의 귀를 붙들어야 해요. ‘내가 얼마나 훌륭한 건축가인가’만 이야기해서는 시민의 귀를 붙잡을 수 없어요. 뉴스공장에서 제가 하는 ‘도시 이야기’ 코너가 인기 있는 이유는, 듣고 있으면 자신의 이야기 같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관심 있는 사안처럼 만드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처음 도시 이야기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작전으로 해야 하나를 고민했어요. 일단 진행자인 김어준 공장장이 도시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물론 멋진 공간에는 관심이 있지만요. 이 사람의 관심을 끌어야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제 출발점이었어요.

두 번째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사람 이야기가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다들 자신의 이야긴 줄로 생각하게 돼요.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고 효과적이에요. 얼마 전 오랜만에 <집놀이>라는 책을 썼는데, ‘공간 감수성’이라는 이야기로 책을 풀어갔어요. 건축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공간 감수성이 사람들에게 훨씬 더 쉽게 다가가요. 건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전문가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항상 제 뿌리가 건축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제 인식의 뿌리, 훈련이 건축에서 출발해서 많은 영향을 받아요. 가령 제 글쓰기는 구조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요. 디테일은 또 다른 문제지만, 확실히 구조가 강해요. 건축의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건축에서 드러나는 생각들이 있는 거예요. 즉 아까 말한 ‘좋은 건축이 많아야 우리 사회가 바뀐다’라는 생각이 워낙 확고하다 보니 그걸 여러 분야에 전파하려고 노력해요. 건축이 얼마나 세상을 바꿀 수 있나를 말하는 거죠.

현업에서 떠나있어 보니까 좋은 게 있어요. 현업에 있는 건축가들이 힘든 게, 뭐든 프로젝트로 만들어야 하잖아요. 뭐든 나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야 자신들도 먹고살 수 있으니까요. 현업을 안 하니까 프로젝트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서 너무 신나더라고요. 그래서 ‘도시 이야기’에서도 그런 제 철학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거겠고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94년 <타임>지 차세대 리더 100인에 선정된 것입니다. 그 타이틀로 인해서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잃은 것은 없어요. 글쎄, 잃은 것도 있을 수 있겠네요. 무지 바빠졌으니까요. 그러나 얻은 게 더 많아요. 서울포럼 시작한 지 몇 년 안 돼서였을 거예요. 1990년에 창업하고 1994년 말에 있었던 일이니까요. 일단은 개인적인 마케팅에는 매우 도움 됐어요. 난생처음 겪은 일이었는데, 마치 스타 탄생 같았어요. 저녁 늦게 사무실에 돌아갔는데, 조성룡 선생님이 전화했었다고 메시지가 있더라고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에요. 전화를 걸었더니 “타임지 나온 거 몰라요?” 하시더라고요. 찾아보니 그런 기사가 났더라고요.

다음 날 아침 출근했는데 사무실 앞에 기자들이 쫙 깔려있고 전화가 엄청나게 오는 거예요. 언론에는 원래 익숙한 사람인데도 기자들이 몰려온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전에는 전문가로서는 꽤 알려졌어도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처음으로 전문가 이상의 셀럽이 된 거예요. 그 점이 굉장히 다른 점이에요.

또 하나, 개인적으로 중요한 것이 있는데, 여성 전문가는 어느 정도 재목으로 자라기 전에는 아무도 기대를 안 해줘요. 기대주가 아닌 거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기대받는 사람이 된 거죠. 저에게 뭐든지 다 하라더라고요.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다 하는 위치가 되니까 부담이 되고 또 좋기도 했어요. 제가 하는 발언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지니 좋고요. 그때 “걷고 싶은 도시가 가장 좋은 도시다”라는 이야기를 계속했고, 히트를 쳐서 여러 정책에 도움이 됐어요. 사회적 영향력이 높아지는 건 힘이 생기는 거죠.

대신 귀찮은 일이 엄청나게 생기기도 해요. 정치권에서 가장 귀찮게 하고요. 한 10년 동안 지방선거나 총선 있을 때, 대통령 선거 있을 때, 2년마다 와서 난리를 쳤어요. 연락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어떤 의도인지 알잖아요. 포섭하려는 것인지, 다른 일인지. 그래서 일절 전화를 안 받고 다 비서에게 맡겼어요. 바꿔주지 말고, 메시지 남기라고요. 대신 정치권에서 연락 오면 다 회신을 해야 했어요. 저도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니까요. 당연히 다 회신하고 만나서 우아하게 거절해주고 그래야 해요. 유일하게 회신을 안 한 게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어요. (웃음) 서울시장이 되기 전 이야기예요. 그것도 직접 전화 걸었다는데, 아마 굉장히 기분 나빴을 거예요.

 

특별히 그분만 거절한 이유가 있나요?

그 의도를 아니까요. 그때가 서울시장 나가려던 때니까 어떤 사안인 줄 알았고, 그 사람됨을 아니까요. 나중에 이명박 시장 때 여러 가지 폭발해서 서울시가 저에게 고소하겠다 난리 친 적이 있었어요. 특히 시청 앞 광장 비판했을 때요. 치졸한 일도 많이 했어요. 가령 제가 서울시청에서 꽤 알려진 강연자인데, 이명박 서울시장일 때 서울시에서 강연 제안이 왔어요. 보통 외부에서 기획해서 결제가 올라가잖아요? 그래서 어떤 강연 자리냐 물었더니 간부들을 위한 강연이고 시장이 나오기도 한다더라고요. “이명박 서울시장이 저 엄청나게 싫어할걸요. 가능하겠어요?”라며 물어봤어요. 괜찮다고 해서 오케이하고 준비도 다 해놨는데, 전날 잘렸어요. 아마도 보고 과정에서 잘린 거겠죠.

 

2000년 인사동길 프로젝트를 진행하셨어요. 당시 전벽돌을 바닥에 쓰고 골목에 관한 이야기를 만든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인사동 프로젝트의 핵심은 사실 지하를 다 손본 거예요. 프로젝트 시작하고 인사동에 자주 가보잖아요? 특히 2월부터 3월 사이 해동될 때, 수도가 터져서 수시로 보도를 엎어요. 안 되겠다 싶어서 서울시에 지하부터 손봐야겠다고 했어요. 그 때문에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시장에게 보고를 못 하게 해요. 지상만 하면 되지, 굳이 지하를 건드리려 하느냐고요. 그래서 사진을 찍어다가 갖은 작전을 다 썼어요. 이렇게 계속 보도를 뒤집어엎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설득했어요. 인사동길은 원래 물길인데, 여러 물길이 합쳐지는 곳이라 복개된 하천을 복원하기는 참 어려웠어요. 그러니 지하를 손봐야 한다고 했죠. 수도관, 도시가스, 전기 배선 다 다시 하고 꽤 큰 배수관을 심었어요. 그거 하느라 시간도 오래 걸리고 욕도 많이 먹었죠. 돌아보면 굉장히 잘한 거예요. 외관은 아무 때나 바꿀 수 있지만, 지하는 필요할 때 꼭 해야 하거든요.

.인사동길 설계가 길 설계로는 거의 첫 세대에 속한 프로젝트라서 모든 걸 새로 고안했어야만 했어요. 도심에서 이런 프로젝트를 한 게 처음이다 보니 여러 일도 있었어요. 설계 중에는 루머가 번지기도 했어요. 제가 인사동길 초입의 은행나무를 모두 베어버린다는 거예요. 상인들이 반대하고 난리가 났었죠. 서로가 예민했던 시기기도 했었고, 서울시에 대한 불신도 깔려 있었고요

 

인사동 물길에 대한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거죠?

그럼요. 물론 좀 더 자연스러운 형상으로 디자인하고 싶었죠. 그런데 그때만 하더라도 주차와의 싸움이었어요. 자신의 가게 앞에 뭐라도 들어오면 안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돌을 몰래 설치해야 할 때도 있었어요. 그런 것들은 합의가 이루어지기가 어렵고요. 인사동길이 완공될 즈음에, 조선일보에서 물확이나 돌을 엄청나게 비판했었죠. 저한테 사전 설명도 안 듣고 그런 비판이 나오더군요. 실용적인 측면에서 그 큰 돌들은 주차를 막기 위한 장치인데, 차가 다니던 때라서 인도와 차도 구분이 안 되는 곳에서 사고가 나면 책임 소재가 문제된다고 해서 만든 장치였죠. 더구나 인사동길에는 벤치를 놓으면 안 된다고 해서 앉을 수도 있는 장소를 만든 건데, 상인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게 앞은 안된다고 난리였죠. (웃음) 결국 몰래 먼저 배치하고 나서, 민원이 들어오면 위치를 조정하곤 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정형으로 하지 않았던 거구요.

지금은 돌과 물확의 수가 많이 줄었는데 사람들이 잘 쓰고 있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게 앉을 수 있고 겨울에는 가게에서 방석 같은 것을 깔아주면 얼마나 좋으냐, 또 물확에 상인들이 식물을 키우면 얼마나 좋겠냐고 제안했던 건데, 제가 나이브했던 거죠. (웃음) 그중에 몇 개가 남아 있어요. 몇 개는 텃밭처럼 식물을 심을 수 있게도 했어요. 덩굴 같은 게 타고 올라가게 했는데, 2년을 못 버티더라고요. 지금은 그런 시도가 가능할지도 몰라요. 중간중간에 남아있는 돌에 사람들이 여러 명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 웃겨요. 모르는 사람들이 등을 맞대고 앞뒤로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저게 도시구나 싶어요. (웃음)

인사동 골목을 잎새로 표현한 스케치 @김진애 제공
인사동 공사 현장에서 @김진애 제공
인사동 석물에 새긴 시 '귀천' @김진애 제공
남인사마당에 놓여 있던 나뭇잎 모양 석물, 인사동 골목을 표현했다. @김진애 제공

전벽돌을 사용해서 바닥을 검은색으로 정한 게 이후 인사동 거리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했어요. 불편함 때문에 민원도 많았었고요.

그렇죠. 지금은 상당히 단단하게 돌바닥으로 바꾸었잖아요. 그때도 찻길 때문에 문제가 되었거든요. 일단 전벽돌로 결정하는데도 너무나 힘들었어요. 그때 대통령 빼고는 다 만나서 보고했어요. 당시 고건 시장이 지지를 해주더라고요. “외국도 벽돌로 마감했던데, 2~30%는 깨져있던데요?” 하더라고요. 나중에 오세훈 전 시장은 ‘하이힐이 빠지는 포장’이라고 비판을 했어요. 길에 차가 안 들어오면 파손 걱정을 많이 안 해도 돼요. 당시 고민했던 건 쉽게 들어내서 하수도 보수공사를 할 수 있는 공법이었어요. 바닥에 모래를 채우고 쉽게 벽돌을 빼놓을 수 있게 한 건데, 당시에는 차도에 대해 난리를 쳤죠.

제가 설계했을 때도 포장 재료로 돌을 고려했어요. 오히려 인사동에 안 어울린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인사동에는 전벽돌이 어울리지 않나요? 전벽돌은 궁궐에도 많이 쓰이고 벽돌이라는 자재가 질박하고 사람들에게 익숙하잖아요. 중간중간 차량 속도를 늦추기 위한 포장 장치, 작은 골목 입구에 돌을 깔아서 들어가는 공간 어휘들이 지금도 남아있어요.

 

바닥재가 전벽돌이 되면서 이후 인사동에는 검은 톤의 건물이 많이 들어섰어요.

저도 그 현상이 참 좋더라고요. 그 전벽돌로 시공하는 과정이 엄청 힘들었어요. 시방서에 전벽돌로 써놨는데도 시공 과정 중에 종로구청이 그냥 일반 벽돌로 깔겠다고 하는 거예요. 시범 포장을 해놨는데, 왜 그 주황색, 노랑색, 벽돌색, 녹색 같은 거로 했더라고요. 우여곡절 끝에 전벽돌을 관철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작은 것 하나도 실현하려면 그렇게 어려워요.

솔직히 고건 시장 시절에는 돈이 별로 없어서라도 바닥에 돌을 쓴다는 걸 생각도 못 할 지경이었지요. 예산이 3배는 들거든요. 이명박 시장 때 잘했다고 할 수 있는 건, 도시 공간에 돈을 좀 써도 괜찮다는 의식을 심은 거였을 거예요. 그랬더니 오세훈 시장 때는 정말 돈을 들이부었어요. 저는 현재의 인사동 돌 포장 방식이 별로 마땅치는 않습니다. 이런 바닥 디자인은 별로 맘에 안 들어요. 무슨 로비처럼, 완전히 실내 공간처럼 만들어버렸거든요.

 

오세훈 전 시장 때 바닥재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바꾸었죠?

오세훈 시장 때 대부분 바꾸어서 인사동길은 별로 이야기할 게 없어요. 남인사마당에 인사동의 골목길 패턴을 잎사귀 모양으로 표현해서 돌에 새겼었는데, 그 돌도 없어졌어요. 그나마 몇 가지 살아남은 게 있는데, 항아리들도 남인사마당에 있던 걸 북인사마당에 갔다 둔 거예요. 물이 흘러야 하는데, 여름에 흐르겠죠. 북인사 물길의 두꺼비를 없애지 않은 건 너무 웃겨요. 처음엔 이걸 보고 ‘김진애, 너무 복고적이다’라고 비판받아서 저는 없앨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시민들도 관광객들도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인사동의 안내판이 남아있는 것도 신기하지 않아요? 이런 게 살아남았더라고요. 이제는 이 정도 작은 안내판을 두어도 장사가 되는 거예요. 인사동의 큰 12골목과 작은 12골목이 있는데, 골목 안에 있는 게 진짜거든요.

인사동길 완공됐을 때 여러 비판을 받았어도 제가 죽을 때까지 몇십 년은 갈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세훈 전 시장이 완전히 다 바꿔버리더라고요. 그건 욕심이에요. 그 정도 예산을 들여서 작업했던 걸 다 없애 버렸으니까. 전벽돌이 깨진다는 것 말고는 큰 동기가 없었거든요.

 

북인사마당 입구도 많이 바뀌었나요?

그렇진 않고요. 이명박 전 시장의 여러 업적 중 하나는 서울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거예요. 그 전 고건 시장은 너무 조심스러웠어요.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진행이 안 되었어요. 당시에도 차량 진입을 막는 걸 왜 생각하지 않았겠어요. 그때는 상인들이 반대해서 안 되었죠. 북인사마당도 남인사마당처럼 만들고 싶었지만, 너무 반대가 심해서 자그마하게 만들었죠. 이명박 전 시장 이후에 많이 바뀌어서 북인사마당이 넓어졌어요. 관광객들이 만나는 데는 좋죠. 보시면 알겠지만 큰 집회를 못 하게 만들었어요. 부분적으로 인사동길에 차를 못 들어오게 한 것은 잘한 일이에요.

 

인사동길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상징과 은유를 가져오면서도 직설적이지 않고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는 점이었어요. 당시 이런 공공공간 개선 프로젝트도 생소하던 때였는 데다가, 워낙 직설적인 관 주도 프로젝트가 많았으니까요.

솔직히 저도 자신이 없었는데, 여러 시도를 해볼 수 있었어요. 참고할 것도 없고 참조할 것도 없을 때였죠. 재료도 그렇고, 포장 패턴도 그렇고, 사인물도 그렇고. 북인사동 복두꺼비는 마지막에 들어온 거예요. 조금씩 신뢰를 쌓으면서 마지막에 설계 변경으로 추가했는데, 사실은 이보다 더 크게 만들고 싶었어요. (웃음)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 거예요. 물동이도 꽤 나중에 추가되었는데 당시에도 말이 많았어요. 그나마 물동이는 오세훈 전 시장도 맘에 들어 했나 보죠.

 

인사동길 정비사업이 완료되던 시기가 인사동길 변화가 가속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어요. 이후 가게가 많이 바뀌었죠?

그럼요. 두 번쯤 바뀐 것 같아요. 88 올림픽 때 이곳을 관광지로 가꾸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2001년에 이곳을 정비한 거죠. 그때 확 변했어요. 일단 임대료가 올라가니까요. 또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니까 큰 건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죠. 쌈지빌딩이 대표적이에요. 제가 생각하기에 쌈지빌딩은 도시형 특히 거리에 접한 건축물로는 최고라고 생각해요. 그다음 중국 관광객이 늘고 난 다음에 또다시 큰 변화가 있는데, 그때는 관광상품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재개발의 영향을 받았어요. 이곳은 재개발 지구 안에 있거든요. 인사동 거리 안에 4층 건물들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 주변으로 고층 레지던셜 호텔들이 들어오면서 인사동 거리도 따라서 변해요.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다음 인터뷰 ④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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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⑤ 대부분 20~30대 때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에 40~50대에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요. 에너지는 또 나와요. 체력이 있어야 일할 수 있는 건 확실해요. 어느 정도 타고 나는 게 있지만, 꾸준히 노력하기도 해야 해요. 제가 지금껏 끊임없이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체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에요. 아무래도 젊었을 때보다는 체력이 떨어지니까 신경을 쓰긴 하죠. 그렇다고 특별히 체력 관리를 하지는 않아요. 저는 강아지들과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운동인 셈이에요. 낮에 가능한 한 많이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최대한 노력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기본적으로 튼튼한 편이고 크게 아팠던 적도 없어요. 항상 농담으로 “울 엄마는 열을 낳았다. 나는 둘밖에 안 낳았다. 아이 열 키우는 에너지와 비교가 안 되니 얼마든지 더 일할 수 있다”라고 말해요. 저는 지금도 배가 고파요.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자기 체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도 있어요. 제 경우 열정적으로 장시간 일해도 괜찮은 편에 속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패턴을 파악하고 체력을 어떻게 안배해야 좋을지 계획해야 해요. 저도 나름의 작전이 있어요. 요즘 [KBS 열린토론] 프로그램을 매일 저녁 진행하는데, 워낙은 아침 시사 프로그램 제안이 들어왔어요. 한 마디로 얘기했지요. “아침 시간은 나를 위해서만 쓰는 시간이다. 아침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김어준 공장장뿐이다.” (웃음) 저에겐 새벽 시간이 정말 중요해요.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서 열 시까지 약 너덧 시간 동안은 꼭 내 일을 해요. 하루에 다섯 시간을 집중해서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돼고 하루가 여유로워요. 그 이후 낮에 하는 일들, 예를 들어 사람 만나는 일 등은 물론 일이긴 하지만 노는 것과 비슷하죠. 그 때문에 기력이 소진되지는 않아요. 이제껏 유일하게 소진됐던 시간은 국회의원 시절 4대강 사업을 다룰 때였어요. 정말 쓸데없이 벌인 일에 제 체력을 소모한 거죠.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③ 여러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택도시연구원을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천기술개발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우리 팀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만든 이후, 불행히도 제가 회의에 빠져들었어요. 그때가 거의 2년 좀 넘었을 때였는데 이것도 여성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내부에서 받는 견제는 항상 있었지만, 나보다 남자들을 먼저 승진시키더라고요. 별것 아니었지만, 예를 들면 월급을 더 많이 준다거나 했어요. 또 제가 후배라 해서 선배가 슬그머니 얹혀가려는 상황도 기분이 얹짢았고요. 여기에 계속 있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이 물이 저에게 너무 작아서 마음대로 뛰놀지 못하겠더라고요. (웃음) 당시 외부 원고 청탁도 많이 들어올 때였는데 원고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고, 여러모로 자유롭지가 않았어요. 또 제도 개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어딜 가든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모든 회의에 들어가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바꿔나가고 그랬죠. 그것도 한 2년 하니 지치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관둬야 하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갈 데가 없는 건 괜찮아요. 오라는 데가 없는 건 찾으면 돼요. 더 큰 문제는, 도대체 내가 가고 싶은 곳도 없었어요. (웃음) 요새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벤처를 만들듯 하고 싶은 걸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때는 희귀한 케이스였어요. 더군다나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사람들은 제가 어떤 조직에서 일하기를 기대하잖아요. 그래서 몇 달 동안 고민했어요. 어느 날 새벽에 혼자 앉아 있는데 불현듯 ‘아니, 가고 싶은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으면, 그냥 하고 싶은 거 혼자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우, 나 천재다!’ 했어요. (웃음) 그래서 그때 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물론 혼자서 했던 것은 아니에요. 주변에 벤처 형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회사를 만들었어요. 물론 제가 주도적으로 일하는 거지만. 그렇게 해서 ‘서울포럼’이 만들어졌어요.   서울포럼으로 독립한 게 가장 힘든 선택이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선택이었어요. 그때 스스로 바보라고 생각한 게 뭐냐면, 30대 중반까지 한 번도 이런 독립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박사 학위도 받았으니 어느 조직에 가서 팀장이나 기관장 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 자신의 폭, 제 세계의 폭을 한정시켜놨던 거죠. 사람이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 그런 거죠. 그때 완전히 알을 깨고 나온 거예요. 그때 독립한 것이 인생에서 저 자신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고, 또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됐다고 믿습니다. (웃음)   서울포럼에서 도시건축과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기획, 출판, 저술까지 다 아우르셨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기획 업무가 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말해 설계에 주력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설계 잘하는 사람은 워낙 많아요. 저는 스스로 특정 프로젝트를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저 자신을 잘 파악했던 거죠.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는 아직 그런 요구가 별로 없었어요. 활동했던 시기가 1990년대인데, 마침 앞서 얘기했던 민영화와 세계 자본주의에 관련된 일들이 말하자면 물밀 듯이 생길 때였어요. 그러면서 기획에 대한 요구(needs)가 필요해진 거죠. 솔직히 그전까지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지만, 이제는 ‘무엇을 지을까? 어떤 구성으로 해서 짓는 게 좋지? 이건 누구하고 함께 하면 좋지? 기술은 어떻게 하면 좋지?’ 등등을 기획하는 수요가 있었어요. 그걸 파악했기 때문에 시작했던 거였어요. 건축 설계는 가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했지요. 인사동 프로젝트는 제가 재미있어서 한 거였어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제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잖아요. 출판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보면 대기만성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30대 중반부터 신문에 칼럼을 쓰곤 했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작가이기도 했고, 글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서 책도 많이 읽었어요. 언젠가는 책을 쓰겠다고도 했지만,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이유가 있더라고요. 글에 대해서 확실하게 눈을 떴을 때가 미국에 있을 때였는데, 영어로 글을 써야 하니 항상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미국에 있는 애들이 나보고 글을 참 잘 쓴다는 이야기는 했어요. 문법만 조금 고치면 될 뿐, 톤이나 글의 시작이 굉장히 좋고, 주제 개념도 참 좋다고요. 영어라 소극적이었던 거였는데, 한글로 쓰게 되니 막 폭발을 하는 거죠. 또 프레젠테이션을 매우 잘한다는 것도 주택공사에 가서 알았어요. 미국에서 영어로 할 때는 항상 조심스러웠던 거죠. 미국에서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야기하던 것이 나중에 다 힘이 됐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프리젠테이션인지 알게 된 거예요. 미국에서는 확실히 그런 게 훈련이 돼요. 무엇을 하든 상대편, 즉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해요. 또 콘셉트 없이 이야기하면 바로 외면당해요. 이 분야에서 강홍빈 선배가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인데, 제가 그분에게 인정을 받았어요. (웃음) 농담 삼아 “강홍빈을 이겨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는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항상 후배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이제 동료로구나’라는 메시지를 선배의 눈에서 읽었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여성이나 남성이나 우리는 일하면서 프로로 인정받을 때, 동료로 인정받을 때, 그리고 내가 정말 잘한다는 것을 상대편이, 그것도 일 잘하는 상대편이 존경해줄 때 기분이 매우 좋아지잖아요. 그래서 자신감도 생겼고, 스스로도 ‘나가도 먹고살기는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사람들은 저를 까칠하다고 보는 편이지만 저는 꽤 사교에 능한 편이에요. 혼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아해요. 이중적이죠.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게 해주려는 성향이 있어요. 사람들 만나면 나도 모르게 흥이 나고, 얼굴이 환해져요. 일단 접하기 힘든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툭툭 던지는 제 이야기가 자극도 되고 하니까. 그러다 보니 클라이언트 관리도 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서울포럼 하면서 제 여러 가지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출판도 전혀 생각이 없다가 하게 됐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결론은 어쩌다 하게 된 게 참 많다는 거네요. <서울성>이란 책을 처음 냈었는데, 그 책은 서울포럼을 시작하면서 저를 알리고 싶어서 계획했던 책이에요. 유명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였고 계약까지 갔는데 저자로서는 달갑지 않은 조건을 걸더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직접 내자 하면서 출판하게 된 거예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하면서 온갖 종류의 인쇄 과정은 다 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② 대학 입학 당시 공대 800명 중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셨다고 들었습니다. 3명이었다가 한 명이 되었어요. 그 세 명이 모두 이화여고를 나왔어요. 너무 흥미롭지 않아요? (웃음) 이화여고에는 확실히 항상 ‘야’성이 있는 것 같아요. 기독교적이기도 하지만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있어요. 그 중 숨겨져 있는 게 ‘야’성이에요. ‘뭔가를 바꾸고 싶다’, ‘뭔가 다르게 하고 싶다’라는 것이 항상 있어요. 그 가기 어렵다는 공대 한 기수에 3명이나 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화여고를 다닌 것은 매우 고마워하죠. 나머지 두 명이 여러 이유로 같이 못 다니게 돼서 혼자 다니는 바람에 많이들 물어보는데, 저는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요. 나중에 같이 들어갔던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당시 상계동 캠퍼스였는데, 입구 들어갈 때 긴 잔디밭을 통과해야 해요. 거기에 맨날 시커먼 남자들이 너댓 명 앉아서 ‘기루다’라는 일종의 브리지 카드 게임을 하고 있어요. 여자가 지나가면 다 같이 쳐다보는 게 친구는 그렇게 싫었다고 하더라고요. 글쎄 나는 싫고 말고 할 게 없었어요. 남이 쳐다보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었어요. 미니스커트도 입고 다니고, 내가 등장해서 분위기 바뀌면 오히려 재밌어하고 그랬죠. 그건 제 체질인가 봐요. 물론 가끔 짜증 나는 것은 있었어요. 가장 짜증 나는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 제가 서울공대 전설이 된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어서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는 것 때문인데 그건 별 것 아니고요. 지금도 그걸 많이 이야기하더라고요.   화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왔죠. 사실이 아니에요. (웃음) 과장이 됐을 수도 있죠. 손잡이가 얼마나 더러우면. (웃음) 손잡이도 제대로 없어서 끈으로 해놓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만지기 싫을 정도로 더러워서 그랬을 거예요. 발로 차고 들어갔다니, 나 같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요. (웃음) 대학 때 연극부를 했는데, 7년 만에 서울 공대에 여자가 들어온 거예요. 역사적 사건이니 무대에 서야 한다고 난리였죠. 그것도 좋겠다 해서 무대에 두 번 올랐어요. 모여서 합숙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하잖아요? 냄비가 뜨거워서 스웨터를 잡아당겨 손잡이를 잡고 그랬는데, 남자들이 보기에는 터프한 게 놀랍고 신선했나 봐요. 그 때문에 홀딱 반한 남자들도 많았어요. (웃음) 솔직히 인생을 돌아봤을 때 좋았던 것은, 당시 저는 제가 그렇게 예쁜지 몰랐어요. 나중에 그때 사진을 돌아보니 예쁘고 매력적이더라고요. 중요한 건 그때는 그걸 몰랐다는 사실이에요. 제 언니가 워낙 예쁘고 매력적이어서 저는 외모경쟁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실력 경쟁만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는 거예요. (웃음) 그때부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요. 서울 공대 다니면서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것을 배웠던 것 같아요. 항상 몇천 명 무대에 여자 몇 명이었기 때문에 주목의 대상인 것은 확실했어요. 거기서 별로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그거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대학 생활은 불행했어요. 대학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죠.   당시 대학 다니셨던 분들은 암흑시대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시대적 상황이기도 하고 당시 건축 교육의 수준 때문이기도 하고요. 연애하고 여행하고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학교가 일 년 중 반은 문을 닫아서, 아예 안 다녔어요. 공대는 심하게 데모하지도 않았어요. 남자들은 선배들에게 불려가서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여자는 시켜주지도 않았어요. 네트워크고 뭐고 그런 거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어디에 관심 있으셨나요? 가장 재밌었던 건 도시에 관한 책을 접했던 것이에요. 대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조교 하나가 저를 부르더니 몇 가지를 이야기해줘요. 그림 트레이스를 많이 해봐라, 사진 책 보면 평면을 그려봐라, 영어 원서를 읽으라고 하면서 당장 세 권을 추천해주는 거예요. 그중 하나가 찰스 젠크스가 쓴 <Architecture 2000 and Beyond>라는 유명한 책이었어요. 바로 종로서점 가서 원서를 샀어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2학년 학생이 그걸 보느라 정말 혼났어요. (웃음) 당시 선배로부터 받은 조언은 그거 하나만 기억나요. 덕분에 당시 원서를 많이 찾아 읽었어요. 미국문화원에서 도서관을 운영했는데, 학교가 하도 노니까 그곳에 가서 책을 읽었어요. 미국의 1960~70년대가 끓어오르는 혁명 시대였잖아요. 그때 매우 많은 저작들, 특히 도시사회학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어요. 두 가지 주제에 심취했는데, 도시사회학 분야의 주제와 ‘이상 도시(Ideal City)’에 대한 거예요. 이상 도시에 대한 미국 책은 낱낱이 읽었어요. 제 머리가 일찍 깬 거예요. 반면 건축과를 가자마자 너무 싫었던 것은 건축의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거였어요. 작가가 일필휘지로 그려내거나 하는 판타지가 무척 못마땅했던 거예요. 그런 부분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건축과를 잘못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도서관에 다니면서 다시 사회학과를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도시사회학, 문화인류학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요. 당시에는 학교가 너무 재미없었고, 설계라고는 배운 적이 없어요. 학교가 어떤 지경이었냐면, 어떤 교수는 ‘미국 주택교통부 장관이 여자 출신이다’ 이러더라고요. 요즘 같으면 손들고 뭐든 말했겠지만 당시엔 속으로만 ‘아휴’ 했어요. (웃음) 또 어떤 교수님은 나만 들어가면 ‘여기 앉아요~’하며 먼지까지 털어주시면서 완전히 레이디 취급하는 거예요. 솔직히 저는 서울대에서 배운 게 없어요. 그때는 대학 졸업하면 그저 일하면 되는가 보다 하고 교수님이 소개해 준 설계사무소에 취직했어요. 거기서 처음으로 토시를 끼고 구조설계도를 그리는 걸 배웠어요. 처음 구조설계도를 그릴 때는 정말 신기했어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설계사무실은 어쨌든 일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떻게든 배울 수가 있었죠. 나중에 이광노 교수님이 라멘도 그리는 저를 보고서 ‘어, 이 자식 봐라’ 하더라고요. (웃음) 그곳도 몇 달 후 관두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혹은 선배가 하는 새로운 기획팀에 가서 일도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난 후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생 절반이 다 대학원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때까지 대학원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정말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는 거죠. 그러다가 다들 대학원에 가 있는 것을 보고,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 분위기도 조금 나아져 있어서 1년 사회생활 하다가 가게 되었죠. 대학원 가서는 꽤 알차게 공부했어요. 주종원 교수님(도시설계 전공)을 지도교수로 선택했고 프로젝트도 꽤 했고요. 졸업 후 박정희 대통령 말기 때 KIST에 생긴 신행정수도 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설계사무소에서 꽤 재미있게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가 1977년에 쓴 소셜믹스(social mix)에 대한 논문을 보고 당시 강홍빈 팀장이 전화 걸어서 인터뷰를 했어요. 일종의 스카우트를 한 거죠.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① 지난 2018년 5월, 김진애 박사를 만났다. 그가 2000년에 설계했던 인사동길에서다. 검은 전벽돌 바닥과 골목을 상징했던 많은 장치는 사라졌고 인사동길의 성격도 달라졌지만, 석물과 간판, 골목길 안의 이야기들은 이제 인사동길의 일부가 되었다. 표구방과 필방 대신 호객을 위한 입간판과 플랜카드가 내걸린 인사동길 사이로, 김진애 박사의 힘 있는 목소리가 흘렀다. 서울대 공대의 유일한 여학생, 도시건축가, 기획자, 편집자이자 발행인, <타임>지 선정 차세대 리더 100인,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에서 국회의원, 그리고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까지, 김진애 박사를 소개하는 수식어는 전문가로서 폭넓은 행보를 보여준다. 도시와 건축 분야의 전문가로서 그가 보여준 연구와 설계, 그리고 전시와 출판도 의미 있지만, 건축기본법과 건축도시공간연구소를 만든 것은 중요한 성과 중 하나다. 국회의원으로서 4대강 곳곳을 누비며 전문가의 역할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성 전문가의 아카이빙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김진애 박사가 던진 방향은 명확했다. 자신의 프로젝트를 강조하기보다 전문가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는 것. “전문가의 역할은 왜 필요한가? 또 그런 역할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여러분 앞길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있는가?” 건축계의 영웅적 서사와 과잉된 자아를 비판하면서도, 인터뷰 곳곳에는 건축이 외연을 넓혀 더 넓은 세계와 만나길 바라는 바람이 묻어 있었다. 건축과 도시 분야의 프로페셔널을 말했던 ‘자라기 시리즈’는 이제 한 사람이 어떻게 전문가가 되고 성장해 시민이 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전히 자신의 토대를 만들고 있는 것은 건축이지만, 세상을 향해 큰 걸음을 걸어온 그의 세상은 도시를 넘어 사회와 전방위로 만난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인사동길에서는 그의 목소리를 알아본 라디오 애청자들, 그의 책을 좋아한 팬들이 악수를 청해왔다. “요즘은 귀엽다는 소리를 들어야 성공을 한 거예요. (웃음)” 전문가의 엄격함은 종종 까칠함처럼 보이지만, 그런 긴장감을 무너뜨리는 김진애 박사의 필살기는 ‘귀여움’이다. 여전히, 지금도 김진애 박사는 인생이 주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