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⑤

대부분 20~30대 때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에 40~50대에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요.

에너지는 또 나와요. 체력이 있어야 일할 수 있는 건 확실해요. 어느 정도 타고 나는 게 있지만, 꾸준히 노력하기도 해야 해요. 제가 지금껏 끊임없이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체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에요. 아무래도 젊었을 때보다는 체력이 떨어지니까 신경을 쓰긴 하죠. 그렇다고 특별히 체력 관리를 하지는 않아요.

저는 강아지들과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운동인 셈이에요. 낮에 가능한 한 많이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최대한 노력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기본적으로 튼튼한 편이고 크게 아팠던 적도 없어요. 항상 농담으로 “울 엄마는 열을 낳았다. 나는 둘밖에 안 낳았다. 아이 열 키우는 에너지와 비교가 안 되니 얼마든지 더 일할 수 있다”라고 말해요. 저는 지금도 배가 고파요.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자기 체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도 있어요. 제 경우 열정적으로 장시간 일해도 괜찮은 편에 속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패턴을 파악하고 체력을 어떻게 안배해야 좋을지 계획해야 해요. 저도 나름의 작전이 있어요. 요즘 [KBS 열린토론] 프로그램을 매일 저녁 진행하는데, 워낙은 아침 시사 프로그램 제안이 들어왔어요. 한 마디로 얘기했지요. “아침 시간은 나를 위해서만 쓰는 시간이다. 아침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김어준 공장장뿐이다.” (웃음)

저에겐 새벽 시간이 정말 중요해요.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서 열 시까지 약 너덧 시간 동안은 꼭 내 일을 해요. 하루에 다섯 시간을 집중해서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돼고 하루가 여유로워요. 그 이후 낮에 하는 일들, 예를 들어 사람 만나는 일 등은 물론 일이긴 하지만 노는 것과 비슷하죠. 그 때문에 기력이 소진되지는 않아요. 이제껏 유일하게 소진됐던 시간은 국회의원 시절 4대강 사업을 다룰 때였어요. 정말 쓸데없이 벌인 일에 제 체력을 소모한 거죠.

@김진애 제공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건 유학 때부터 생긴 습관인가요?

30대 중반부터예요. 둘째 아이 낳고 난 이후인데, 첫째 때와는 달리 둘째를 낳고 나니까 내 시간 갖기가 그리 힘들더라고요. 그때 애하고 같은 시간에 자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면 딱 좋다는 걸 알았어요. 애가 아침에는 별로 보채지 않고 먹고 나면 2~3시간 혼자서도 잘 지내니까 저는 옆에서 일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유지하고 있어요. 인생에서 좋은 습관 중 하나같아요.

 

저자로 쓴 책이 30권이 훨씬 넘더라고요. 엄청난 작업량이에요. 인터뷰 전 <인간의 조건>, <도시 읽는 CEO>, <인생을 바꾸는 건축 수업>, <왜 공부하는가>, <여자의 독서>를 꼭 읽었으면 한다고 추천해주셨는데요. 이 책들을 추천하신 이유가 있나요? 책이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게 넘쳐나서 쓰는 것일 텐데,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궁금해요.

그 다섯 권은 제가 원해서 쓴 책은 아니에요. (웃음) <인간의 조건>만 제외하고는 다 제안이 들어와서 쓴 거예요. <인간의 조건>은 비례 대표할 때 지역구 출마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썼던 책이고요. 다른 정치인들처럼 쓰는 건 못 하겠고, 갑자기 한나 아렌트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한나 아렌트에 대한 내 존경심을 표현해야겠다.’ 해서 일종의 오마주처럼 쓰게 된 거예요. 만약 국회의원으로 계속 있었다면 좀 더 알려졌겠죠.

다른 네 권은 요청이 들어와서 낸 거예요. <도시 읽는 CEO>는 CEO 시리즈 중 하나였는데, 상당히 평이 좋아서 상도 받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굉장히 신선해 했어요. <인생을 바꾸는 건축 수업>은 <매일매일 자라기>를 바꿔서 낸 거고요. <매일매일 자라기>를 썼을 때는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서 썼을 때예요. 그 시리즈 세 권을 쓴 건 이화여대 겸임교수를 할 때예요. 학생들이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책을 쓴 거예요. 꼭지 몇 개를 써서 학생들에게 주기도 했는데, 한 번 쓰기 시작하니까 정신없이 재밌게 썼어요. 그래서 차례로 <프로로 자라기>, <사람으로 자라기>를 썼어요. 쓰고 싶은 욕망이 엄청나게 높아져 있는 때였어요.

<왜 공부하는가>는 다산북스에서 공부에 관한 책을 써달라고 제안을 해서 썼어요. 처음에 ‘왜 건축을 공부하는가’를 제안하길래 그런 거 잘 못 쓴다고 했더니, 그럼 마음대로 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썼는데, 출판사에서 <왜 공부하는가>라고 제목을 붙였어요. 그런데 이 책은 처음에 톤 잡기가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가르치거나 하는 책을 잘 못 써요. 유일하게 첫째, 둘째, 셋째 이런 식으로 쓴 게 ‘자라기’ 책이에요. 그러다 한번 톤을 정하니까 쭉 써지는데, 공부가 얼마나 내 인생을 끌어온 큰 힘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많이 쓰니 사람들이 물어봐요. 어떻게 그렇게 많이 쓰냐고요. 별로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침마다 작업하는 게 대개 글 쓰는 거예요. 글 쓰고, 인터넷 검색하면서 놀고 그러는 거예요. 어쨌든 그냥 끄적이는 것까지 포함해서 하루에 평균 10매는 써요. 1년이면 3,600매잖아요? 그중에서 1/3만 간추리면 책이 되는 거지요.

책을 어느 정도 쓰면 에너지가 소진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별로 그렇지 않더라고요. 확실히 저는 주제가 많은 사람이에요. 최근에 낸 <집 놀이> 책은 원래 공간 프로젝트로 3개 주제를 구상하고 지난 5년 동안 준비해 온 거예요. 집, 도시, 일상공간 이렇게 세 가지 주제지요. 집 주제에도 한 권만으론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세 권으로 쓰려고 계획했고 첫 번째 책이 나왔는데, 시간을 두고 다른 두 권을 더 낼 거예요.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를 [뉴스공장] 방송에서 3년째 하고 있는데, 책 써달라는 요청을 무척 많이 받았지요. 지금 열심히 쓰고 있어요. 올해 나올 거예요.

책 쓰는 게 처음에는 어려워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니까 그리 어려운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여전히 글쓰기란 무척 어려워요. 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오디오가 지원된다고, 내가 옆에서 말하는 것 같다는 평을 많이 해요. 말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잘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아마 책 쓰기가 덜 힘든 것 같아요.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 쓰지 않을까 싶어요.

 

말과 글이 일치되기 쉽지 않은데, 박사님의 경우 독서로 축적된 통찰과 사고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영향을 줬을 거예요. 말하는 것처럼 쓸 수 있는지 없는지란 확실히 달라요. 유시민 작가의 책이 많이 팔리는 이유는 시대성을 반영하기 때문도 있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마치 내가 하는 이야기 같아 흡인력이 커지기 때문일 거예요. 글 안에서 내가 보이면, 사람들이 공감하게 되는 거예요.

사람마다 다른 글쓰기 방식이 있어요. 제 경우에 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구조적이라는 평과 함께 말하듯이 쓴다는 평은 많이 들어요. 글을 쉽게 쓴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려고 저는 얼마나 힘들겠어요? 좀 알아주세요. (웃음) 전문적인 글은 자료를 가지고 쓰니 오히려 별로 어렵지 않아요. 제 일생 해 온 훈련이 상대편을 설득하려면 어떤 레토릭을 쓸 것인가, 어떻게 해야 상대편의 마음을 파고들 것인가에 대한 것이지요. 훈련하면 분명히 늘어요. 아직도 제 책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좋아요.

 

<매일매일 자라기>도 그렇고 일했던 경험을 통해서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을 많이 쓰셨어요. 필드에서 전혀 알려주지 않는 정보이기도 했고, 어쩌면 스스로 그 시기에 알고 싶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 시절에 누가 나한테 그런 책을 줬더라면, 아마 저는 건축과를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알고도 선택했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런데 그게 너무 이상했어요. ‘왜 안 알려주지? 왜 구체적으로 얘기 안 하지? 얘기하면 훨씬 더 쉬워지고 훨씬 더 재밌어지는데’ 싶었죠. 베이스라인을 공유해야 그 위로 뭔가 더 근사하게 만들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베이스라인 수준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근사한 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화여대 강의가 계기가 되셨다고 하셨는데, 그 책을 통해서 후배 세대들한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딱 두 번 강단에 섰는데, 이화여대와 카이스트였어요. 이화여대 건축과 설계 스튜디오 강의를 2년 했는데, 솔직히 그런 전통적인 수업 자체를 즐기는 편은 아니에요. 그래도 <매일매일 자라기>를 쓸 자극을 받았으니까 보람은 있었죠. 정말 재밌었던 수업은 카이스트에서였어요. 미래도시연구소 겸임교수였는데, 딱 두 학기 ‘도시 상상’이라는 강의를 했어요. 그때 수강생이 50여 명 정도 꽤 많았는데 여러 학과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왔어요. 카이스트에 건축과는 없지만, 전자, 컴퓨터, 생명, 기계, 토목, 디자인 등등 각종 학과에서요. 16주 수업이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제가 학생들을 좀 흔들어 놨어요.

도시라는 주제가 참 좋은 이유가 있어요. 도시는 자신의 전공 분야가 무엇이든 다 그 안에 투영 가능해요. 도시를 만들 때 무엇을 생각할 수 있나, 뭘 상상할 수 있나 질문을 던지고, 뭔가 만들어 보라고 하니 얼마나 신났겠어요? 첫 과제는 SF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리포트 쓰게 하고, 둘째 과제는 팀을 짠 후 각 팀에 미래도시 상상 제안을 하는 구성이었어요. 몇 개 시나리오를 주고 각 시나리오에 대한 도시를 구상해서 내놓는 거죠.

예를 들면, 재앙 시나리오. 재앙도 환경 재앙이냐 불 재앙이냐 물 재앙이나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카이스트 학생들이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팀워크를 통해 나오는 이야기들이 아주 흥미롭더라고요. 학생들도 흥겨워했고 저도 너무 재밌더라고요. 가장 좋은 것은 수업 이후에 학생들이 가지게 된 자신감이에요. 어떤 학생은 “자기가 4년이 되도록 왜 카이스트를 다니는지 몰랐는데, 마지막 학기에 우연히 이 수업을 듣고 이제 그 의미를 찾았다”라며 후기를 써주더라고요. 후에 너무 근사하게 자라서 찾아왔어요. 그렇게 자라는 모습을 볼 때가 참 좋아요.

도시가 흥미로운 이유는, 도시가 ‘잡학’이기 때문이에요. 그 안에 정치 경제, 행정, 혁신, 복지, 교통, 기술, 예술, 건축까지 다 들어있어요. 그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게 도시예요. 역동적이죠. 그래서 굉장히 즐거워요. 인간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이 모여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항상 얘기하지만, 인간이 모여 살면 하여튼 문제가 생겨요. 인간 하나하나는 선하지만 둘만 모여도 갈등이 생기는 거죠. 인간 개인으로는 성선설, 인간사회로서는. 성악설이 맞는 것 아닐까요? 거기서 어떤 질서를 만들어 내느냐. 어떻게 해야 우리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느냐에 대한 고민을 해야 돼요. 그게 도시예요. 그래서 도시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이런 스타일의 수업은 계속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과 가리지 않는 교양 과목으로 공간에 대해 강의를 하고 싶었어요. 몇 학교에 문의도 했었어요. 이러이러한 수업을 하고 싶은데, 학교에 개설해 줄 수 없겠느냐고요. 다들 건축과든 도시과든 학과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죠. 특정 학과에 소속되는 건 별로예요. 그렇게 되면 민원에 시달리게 돼요. 그리고 여러 작업 요청에 계속 시달리는 게 힘들어요. 그러다 보면 자문을 안 해줄래야 안 해줄 수가 없게 되고요. 그런 처지가 되기 싫어요. 그래서 어디 소속되는 것을 원치 않는 거예요. 소속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살고 있어요.

 

실무 작업을 멈추게 된 계기가 있나요?

현실 정치를 하면서 그만둔 거죠. 우리 분야에서 싫은 것 중 하나가 ‘ㅂ자 돌림병’이에요. 우리 사회의 ㅂ자 돌림병을 상대로 평생을 싸워 왔는데, 그게 부정, 부패, 비리, 부실 같은 거예요. 그런데 부동산도 ㅂ자 더라고요. 우리 분야가 피곤한 이유는 항상 민원과 이익과 연결돼 있다는 거예요. 전문가로 활동할 때도 아무래도 제 영향력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기대하면서 민원이 끊임없이 들어와요. 예를 들면 어느 지역의 그린벨트를 풀어달라고 하기도 하고요. 그런 부분 때문에 엄청나게 오해를 받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딱 끊은 거예요. 출판이나 강연 등은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마음이 훨씬 편해졌어요.

특히 국회의원 그만두고 난 후에 명확하게 이야기했어요.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요. 누군가에게 자문해주는 것도요. 국회의원 한 번 하고 나면, 관두더라도 여전히 제 영향력이 있다고 여기거든요. 제 발언을 이용하기도 하니까 아예 자문도 안 해줘요. 결국 ‘자문비도 못 받고, 고문비도 못 받고 이제 뭐 먹고 살지?’ 생각하다가, “저는 책 쓰니까요. 제 책이 꽤 잘 팔려요”라고 해요. 사람들은 나보고 뭐 먹고 사냐고 묻지만, 책 쓰고 강연하는 것만도 국회의원 하는 것보다 나아요. 그래서 글을 많이 쓰는 거예요.

건축가, 도시계획가, 작가, 국회의원 등등 특정 직업을 호칭하는 것이 의미 없을 만큼 여러 방면에서 활동해오고 계십니다. 자신을 설명하는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요새 [열린토론] 진행하면서 저 자신을 “시민, 김진애입니다”라고 소개해요. 이것저것 다 찍고 이제 시민으로 돌아왔다고 말해요. 저를 교수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은데, “저 교수 아닙니다”라고 해요. 박사라 부르는 건 박사학위가 있으니 오케이죠. 그런데 전 국회의원, 전 00위원장 이렇게 불리는 것도 마땅찮고요. 도시 전문가라는 사람이 [열린토론] 진행까지 하느냐 물으면, “도시가 원래 잡학이고, 저는 잡학박삽니다. 이 모든 걸 돌아서 드디어 시민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시민은 열린토론을 진행할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하지요.

 

라디오 활동이 맞으시나요?

TV는 싫어요. TV는 생방송이 아니니까 여러 방식으로 기획을 하고, 또 자기들 입맛에 맞게 편집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나가지 않으려 하죠. 물론 맘에 드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나가죠. 라디오처럼 자신의 목소리로 콘텐츠와 아우라를 전달하는 게 진짜라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라디오 진행은 언젠가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기회가 올지는 몰랐죠.

[열린토론] 진행을 수락한 이유는 그런 제안을 제 연배의 여성에게 했다는 점 때문이에요. 솔직히 KBS를 다시 봤어요. 처음엔 사양하는 입장에서 “글쎄요. 저는 [열린토론] 외에는 관심이 없는데요”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그 프로를 다시 살려 오더라고요. 앞서 롤 모델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제 연배에서 새로운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어요. 제가 자랄 때 ‘여자가 이렇게 할 수 있다’라는 롤 모델을 찾을 수 없어서 힘들었기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을 하지요.

라디오 [뉴스공장]에서 ‘도시 이야기’ 코너를 시작할 때도 ‘세속적인 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내용은 안 하겠다’고 제작진들에게 이야기했어요. 건축에는 멋과 허영심이 작용해요. 그게 없으면 또 지탱되지 않는 분야가 건축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방송에서 멋진 공간, 근사한 건축을 알려달라는 압력이 꽤 있는 거고요. 저는 그런 요구에 거부감이 있는 편이고요. 적절하게 균형을 잡으려 노력을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죠.

꼭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 일이 있나요?

‘7585 프로젝트’도 저에겐 있어요. 일흔다섯부터 여든다섯까지 할 프로젝트도 있을 정도로 하고 싶은 게 쌓여있어요. 사실 제가 하고 싶어 했던 것 중 하나가 포장마차예요. 어른을 위한 장난감을 만들어 팔고도 싶었고요. 정치하느라 못했어요. 한 십 년, 이십 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영화감독을 하고 싶다고 했을 것 같아요. 영화감독은 못 해도 영화 시나리오는 쓰고 싶다고 끊임없이 최면을 걸어요. 죽기 전에 추리소설은 꼭 써야 해요. 플롯도 써놨어요. 그 외 무슨 일을 실제로 할지는 저도 몰라요. ‘제가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나게는 해드리겠다’라고 늘 말하죠.

[열린토론] 진행하는 것도, [도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어요. [뉴스공장 도시이야기] 덕분에 도시건축에 대해서 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기도 끌고 제 이미지가 좀 더 친근해졌는데, 그게 좋아요. 예전에 정기용 선생을 주제로 한 다큐영화 제목이 <말하는 건축가>였잖아요. 요즘 제가 정확히 그 ‘말하는 건축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괜찮은 역할 중 하나라 보지요.

젊은 건축학도들에게 많이 이야기하는데 건축을 전공했다고 해서 꼭 건축가가 될 필요는 없어요. 건축과 출신 중에도 건축가가 되는 경우가 얼마 안 되고, 거기서도 자기 이름을 건 프로젝트를 하는 건축가도 몇 % 안 돼요. 역사에 남는 건 더더욱 적고요. 일자리도 일감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그러니까 설계만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다고 늘 이야기해왔어요. 제가 공공건축가를 많이 이야기했던 것도 다른 일감들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전문성으로 공공 봉사하는 방식이죠. 그 외에도 문화 관련이나 방송 쪽에도 건축 분야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아요? 그런 영역을 계속 넓히는 게 필요합니다. 제가 그런 역할을 어느 만큼 보여줬다면 그걸로 오케이죠.

 

박사님도 여성으로 싸워서 이룬 성취가 있으실 텐데요. 지금 2~30대 여성들도 현재와 싸우고 있어요. 지금 여성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일단 미투 운동 이후의 여성에 관해 이야기해보죠. 이전에도 페미니즘 열풍이 있었지만 대중적 이슈가 되지는 못한 한계가 있었는데, 지금을 보면 예민함의 강도가 훨씬 강해졌다고 봐요. 여성, 남성에게 다 영향을 미칠 거고, 간단치 않을 거로 생각해요. 어떤 사람들은 펜스 룰이라든가, 여자들이 더 위축될 거라든가, 남자들은 여자들을 일에서 더 멀리하고, 여자 대 여자의 싸움이 될 거라는 등 미투 운동의 부작용을 걱정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한 마디로 이야기하고 싶어요. 여자들의 사회 진출은 많아질 수밖에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늘어날 거고, 만약 그렇게 여자를 멀리하는 조직이나 사람은 결국 도태될 거라고요. 저는 무척 긍정적으로 보죠. 어떤 과정이 있든 간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건 맞아요. 다만 그 과정에서 엄청 골치 아픈 일들을 많이 겪을 거고요.

요즘은 남자들과 이야기할 때 다른 분위기를 느껴요. 남자들도 꽤 신경 쓰면서 말해요. 제 경우 어렸을 때 여성스럽지 않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여성인가, 여성으로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답을 찾은 게, 이른바 양성성에 대한 거예요. ‘남성안의 여성성, 여성 안에 남성성’이죠. 모든 인간에게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있다는 생각을 20대에 다 정리했어요. 저는 남성성이 꽤 강한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제가 별로 여자답지 않다고 말하지만 제 안에 여성성도 무척 강해요. 밖으로 잘 안 보여줄 뿐이죠. 저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귀찮아서인 것도 있고요. 제가 남성성이 강하다면, 그것도 많이 훈련했기 때문이에요.

남성성은 의지, 결단, 추진력, 네트워크 능력 같은 건데, 훈련으로 길러져요. 그런데 여성성이라는 정교함, 치밀함, 관계성, 엮어냄 이런 건 훈련으로 되긴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감성적으로 훨씬 더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야 해요. 우리 사회가 정말 발전하려면 남성 안의 여성성을 끌어내야 한다고 늘 주장하죠. 여자 안에 숨어 있는 남성성을 감추려고 하지 말고 떳떳하게 드러내야 한다고요. 우리 안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마음대로 오가면서 적절한 상황에 끌어내서 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요.

저는 그렇게 노력했어요. 사실 남들이 저보고 남자 같은 여자라고 한다면, 그건 인정해요. 저는 파워 의지도 강렬하고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를 좋아한 것처럼 결단과 의지를 키우려고 노력했어요. 한동안 제 여성성에 대해 의심하기도 했고, 죽이려고 한 적도 있어요. 관계라든가 배려라든가 섬세함 같은 걸 많이 감추려 했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런 노력이 쓸데없다는 걸 알았어요. 모든 인간이 자기 안에 숨어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끊임없이 오가며 살라고 말하고 싶어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는 못 나갈 분야가 없고, 못 넘을 벽이 없고, 한계라는 건 거의 없어요. 요즘 4차 산업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다른 게 아니에요. 기술적인 적인 건 다 일어나는 거고, 여러 분야의 감수성을 높여야 발전 가능한 게 4차 산업이거든요. 그게 바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잘 조화시키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질적 발전을 이루기가 어려워요. 산업화나 정보화만 하더라도 훈련된 남성성만으로 넘어올 수 있었어요. 좀 더 크리에이티브 해지려면 남성성과 여성성을 오가야 합니다. 남자, 여자가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좀더 창의적이기 위해서는 남성성, 여성성에 대해 거침없이 드러내고 반가워 해주어야 해요.

미투 운동이 이뤄지고 나서 굉장히 반가우면서도, 서로 눈치 보여서 불편해지기도 하지요? 여성들끼리도 눈치 보는 거 아시죠? 요즘 딸 눈치도 봐요. (웃음) 우리 딸이 30대 초반이에요. 상당히 리버럴한 분위기라 요즘 사건에 대해 많이 대화하게 되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딸이 저를 비판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제가 딸을 비판하곤 하지요. 여자들끼리 또 세대를 넘어서 이런 대화 또는 토론을 하는 것도 굉장히 좋은 거라고 봐요.

제 개인적인 모토가 ‘자라자, 배우자, 평생토록!’이잖아요. 저의 인생관은 인간성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을 다 발휘해보자는 거예요. 가능하면 더 느끼고, 더 많이 만들어내고, 조금이라도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하면 좋죠. 가능한 한 많은 걸 느끼고 알고 또 하고, 떠나고 싶어요.

 

정치는 현실 참여인데, 그래도 기회가 있다면 정치를 하실 의사가 있으신가요? 선거는 안 나갈 거예요. 정치에서 하고 싶은 역할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서울시장. 그런데 그건 지나갔죠. 글쎄, 다음번에 나가볼까요? 그런데 플랜을 짜기가 싫어요. (웃음) 50대만 해도 뜻을 세우면 플랜을 짰는데, 이젠 하기가 싫어요. 그냥 기회가 오면 잘하면 돼요. 이런 게 나이 든 거겠지요.

<알쓸신잡 3> 피렌체, 두오모 오르는 길에 유희열, 유시민과 함께 @김진애 제공
<알쓸신잡 3> 프로그램 중 부산 달동네에서 @김진애 제공

<알쓸신잡>은 대중과 더 폭넓게 만난 경험이셨을 텐데요. 도시와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에서 어떤 점이 가장 즐거우셨나요? 방송의 환경이나 프로그램 성격도 이전과 다를 텐데, 자신이 그대로 관찰당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시즌 3이 되어서야 첫 여성 출연자가 나왔다고 꽤 화제가 되었지요? 시즌 1, 아주 괜찮은 프로가 나와서 좋았는데, 여성이 없었죠. 설마 시즌 2에는 여성 패널이 있을 거라 여겼는데 또 아재들뿐이라서 저도 꽤 세게 비판을 했었어요. 그 비판이 통했던지, 출연 요청이 오대요. (웃음) 시즌 4를 한다면 여성 둘이 있으면 좋겠어요. 지식 교양 예능 프로일수록 양성이 섞이는 게 좋고요, 비율도 맞으면 그에 따른 역동적인 케미가 생길 테니까요.

여성 출연자를 구하기 어렵다고 제작진들이 고충을 토로하던데, 글쎄 잘 믿어지진 않습니다마는, 여성 전문가들이 훨씬 더 준비성을 따지고 대중적인 자리에 나가는 걸 주저하는 현상은 있는 거 같아요. 대중매체에 나가면 주목받아 좋은 점도 있지만,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면 비판도 받고 욕도 먹고 이른바 ‘입방아질’에 오르지요. 요샌 SNS가 활발하니 더욱더 그렇고, 여성은 집중 표적이 되기도 하고요. 여성 전문가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권하고 싶어요. 그 고개를 넘어서야 또 다른 게 보인다고, 또 다른 걸 이룰 수 있다고요.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재밌었어요. 대화의 역학도 흥미로웠고요. 생각 많고, 느낌 많고, 아는 것 많고, 말 많이 하고 싶어하는 잡학박사들이 모인지라 녹화 시간이 넘 길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요. 하루 열여섯 시간 말하고 다니는데, 노동 강도가 높아요. <알쓸신잡>도 완벽할 수야 없지만, 그 도시의 면면을 깊이 들여다본다는 것, 공간에서부터 촉발되는 지식과 인간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얘기한다는 것, 아주 신선하죠. 서로서로 자극하고요. 대화하다 보면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몰라요. 예측 불가, 그게 큰 재미죠.

제가 TV 싫어한다고 했지만, 한번 출연을 결정하면 완전히 맡겨요. <알쓸신잡> 제작진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요. 편집을 어떻게 하든 어떤 효과를 넣든 그들의 재량이죠. TV의 경우에는 물론 출연자들도 중요하지만, 제작진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김진애는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라는 평을 꽤 들었는데, 제가 그런 스타일이에요. 맡기고 나서,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는 거죠. 그래도 옷도 신경 쓰고 메이크업도 하고 말도 줄이려 노력했는데요? (웃음)

이번 시즌 3은 절반은 해외도시라서 어떤 반응이 올까 궁금했는데, 흥미로운 건, 해외 도시 에피소드보다 국내 도시 에피소드가 훨씬 더 호응도가 높더라고요. 반가운 현상이에요. 그만큼 공감도가 높고 시청자들이 가보신 데도 많고 가보고 싶어 하는 데도 많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우리 역사, 인물, 자연, 문화, 도시에 관한 관심이 크다는 게 좋고요. 실제로 출연자들도 국내 도시들 다닐 때 훨씬 더 재미있었고, 영혼적으로도 여유로웠어요. ‘우리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리 좋아요. OHS

 

진행 임진영

사진 정멜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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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⑤ 대부분 20~30대 때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에 40~50대에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요. 에너지는 또 나와요. 체력이 있어야 일할 수 있는 건 확실해요. 어느 정도 타고 나는 게 있지만, 꾸준히 노력하기도 해야 해요. 제가 지금껏 끊임없이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체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에요. 아무래도 젊었을 때보다는 체력이 떨어지니까 신경을 쓰긴 하죠. 그렇다고 특별히 체력 관리를 하지는 않아요. 저는 강아지들과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운동인 셈이에요. 낮에 가능한 한 많이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최대한 노력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기본적으로 튼튼한 편이고 크게 아팠던 적도 없어요. 항상 농담으로 “울 엄마는 열을 낳았다. 나는 둘밖에 안 낳았다. 아이 열 키우는 에너지와 비교가 안 되니 얼마든지 더 일할 수 있다”라고 말해요. 저는 지금도 배가 고파요.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자기 체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도 있어요. 제 경우 열정적으로 장시간 일해도 괜찮은 편에 속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패턴을 파악하고 체력을 어떻게 안배해야 좋을지 계획해야 해요. 저도 나름의 작전이 있어요. 요즘 [KBS 열린토론] 프로그램을 매일 저녁 진행하는데, 워낙은 아침 시사 프로그램 제안이 들어왔어요. 한 마디로 얘기했지요. “아침 시간은 나를 위해서만 쓰는 시간이다. 아침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김어준 공장장뿐이다.” (웃음) 저에겐 새벽 시간이 정말 중요해요.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서 열 시까지 약 너덧 시간 동안은 꼭 내 일을 해요. 하루에 다섯 시간을 집중해서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돼고 하루가 여유로워요. 그 이후 낮에 하는 일들, 예를 들어 사람 만나는 일 등은 물론 일이긴 하지만 노는 것과 비슷하죠. 그 때문에 기력이 소진되지는 않아요. 이제껏 유일하게 소진됐던 시간은 국회의원 시절 4대강 사업을 다룰 때였어요. 정말 쓸데없이 벌인 일에 제 체력을 소모한 거죠.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③ 여러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택도시연구원을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원천기술개발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우리 팀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만든 이후, 불행히도 제가 회의에 빠져들었어요. 그때가 거의 2년 좀 넘었을 때였는데 이것도 여성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내부에서 받는 견제는 항상 있었지만, 나보다 남자들을 먼저 승진시키더라고요. 별것 아니었지만, 예를 들면 월급을 더 많이 준다거나 했어요. 또 제가 후배라 해서 선배가 슬그머니 얹혀가려는 상황도 기분이 얹짢았고요. 여기에 계속 있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이 물이 저에게 너무 작아서 마음대로 뛰놀지 못하겠더라고요. (웃음) 당시 외부 원고 청탁도 많이 들어올 때였는데 원고도 마음대로 쓰지 못했고, 여러모로 자유롭지가 않았어요. 또 제도 개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어딜 가든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모든 회의에 들어가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바꿔나가고 그랬죠. 그것도 한 2년 하니 지치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관둬야 하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고 보니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갈 데가 없는 건 괜찮아요. 오라는 데가 없는 건 찾으면 돼요. 더 큰 문제는, 도대체 내가 가고 싶은 곳도 없었어요. (웃음) 요새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벤처를 만들듯 하고 싶은 걸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때는 희귀한 케이스였어요. 더군다나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사람들은 제가 어떤 조직에서 일하기를 기대하잖아요. 그래서 몇 달 동안 고민했어요. 어느 날 새벽에 혼자 앉아 있는데 불현듯 ‘아니, 가고 싶은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으면, 그냥 하고 싶은 거 혼자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우, 나 천재다!’ 했어요. (웃음) 그래서 그때 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물론 혼자서 했던 것은 아니에요. 주변에 벤처 형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회사를 만들었어요. 물론 제가 주도적으로 일하는 거지만. 그렇게 해서 ‘서울포럼’이 만들어졌어요.   서울포럼으로 독립한 게 가장 힘든 선택이었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선택이었어요. 그때 스스로 바보라고 생각한 게 뭐냐면, 30대 중반까지 한 번도 이런 독립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박사 학위도 받았으니 어느 조직에 가서 팀장이나 기관장 정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저 자신의 폭, 제 세계의 폭을 한정시켜놨던 거죠. 사람이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 그런 거죠. 그때 완전히 알을 깨고 나온 거예요. 그때 독립한 것이 인생에서 저 자신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고, 또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됐다고 믿습니다. (웃음)   서울포럼에서 도시건축과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기획, 출판, 저술까지 다 아우르셨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기획 업무가 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말해 설계에 주력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설계 잘하는 사람은 워낙 많아요. 저는 스스로 특정 프로젝트를 가장 적합한 방향으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저 자신을 잘 파악했던 거죠.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는 아직 그런 요구가 별로 없었어요. 활동했던 시기가 1990년대인데, 마침 앞서 얘기했던 민영화와 세계 자본주의에 관련된 일들이 말하자면 물밀 듯이 생길 때였어요. 그러면서 기획에 대한 요구(needs)가 필요해진 거죠. 솔직히 그전까지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지만, 이제는 ‘무엇을 지을까? 어떤 구성으로 해서 짓는 게 좋지? 이건 누구하고 함께 하면 좋지? 기술은 어떻게 하면 좋지?’ 등등을 기획하는 수요가 있었어요. 그걸 파악했기 때문에 시작했던 거였어요. 건축 설계는 가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프로젝트가 있으면 했지요. 인사동 프로젝트는 제가 재미있어서 한 거였어요. 앞서도 얘기했지만 제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잖아요. 출판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보면 대기만성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30대 중반부터 신문에 칼럼을 쓰곤 했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작가이기도 했고, 글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서 책도 많이 읽었어요. 언젠가는 책을 쓰겠다고도 했지만,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이유가 있더라고요. 글에 대해서 확실하게 눈을 떴을 때가 미국에 있을 때였는데, 영어로 글을 써야 하니 항상 자신이 없었던 거예요. 미국에 있는 애들이 나보고 글을 참 잘 쓴다는 이야기는 했어요. 문법만 조금 고치면 될 뿐, 톤이나 글의 시작이 굉장히 좋고, 주제 개념도 참 좋다고요. 영어라 소극적이었던 거였는데, 한글로 쓰게 되니 막 폭발을 하는 거죠. 또 프레젠테이션을 매우 잘한다는 것도 주택공사에 가서 알았어요. 미국에서 영어로 할 때는 항상 조심스러웠던 거죠. 미국에서 얼굴이 시뻘게져서 이야기하던 것이 나중에 다 힘이 됐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프리젠테이션인지 알게 된 거예요. 미국에서는 확실히 그런 게 훈련이 돼요. 무엇을 하든 상대편, 즉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해요. 또 콘셉트 없이 이야기하면 바로 외면당해요. 이 분야에서 강홍빈 선배가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인데, 제가 그분에게 인정을 받았어요. (웃음) 농담 삼아 “강홍빈을 이겨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는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항상 후배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이제 동료로구나’라는 메시지를 선배의 눈에서 읽었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여성이나 남성이나 우리는 일하면서 프로로 인정받을 때, 동료로 인정받을 때, 그리고 내가 정말 잘한다는 것을 상대편이, 그것도 일 잘하는 상대편이 존경해줄 때 기분이 매우 좋아지잖아요. 그래서 자신감도 생겼고, 스스로도 ‘나가도 먹고살기는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사람들은 저를 까칠하다고 보는 편이지만 저는 꽤 사교에 능한 편이에요. 혼자 있는 것을 무척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좋아해요. 이중적이죠.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게 해주려는 성향이 있어요. 사람들 만나면 나도 모르게 흥이 나고, 얼굴이 환해져요. 일단 접하기 힘든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툭툭 던지는 제 이야기가 자극도 되고 하니까. 그러다 보니 클라이언트 관리도 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서울포럼 하면서 제 여러 가지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출판도 전혀 생각이 없다가 하게 됐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결론은 어쩌다 하게 된 게 참 많다는 거네요. <서울성>이란 책을 처음 냈었는데, 그 책은 서울포럼을 시작하면서 저를 알리고 싶어서 계획했던 책이에요. 유명 출판사에서 관심을 보였고 계약까지 갔는데 저자로서는 달갑지 않은 조건을 걸더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직접 내자 하면서 출판하게 된 거예요. 밀라노 트리엔날레 하면서 온갖 종류의 인쇄 과정은 다 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② 대학 입학 당시 공대 800명 중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셨다고 들었습니다. 3명이었다가 한 명이 되었어요. 그 세 명이 모두 이화여고를 나왔어요. 너무 흥미롭지 않아요? (웃음) 이화여고에는 확실히 항상 ‘야’성이 있는 것 같아요. 기독교적이기도 하지만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있어요. 그 중 숨겨져 있는 게 ‘야’성이에요. ‘뭔가를 바꾸고 싶다’, ‘뭔가 다르게 하고 싶다’라는 것이 항상 있어요. 그 가기 어렵다는 공대 한 기수에 3명이나 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화여고를 다닌 것은 매우 고마워하죠. 나머지 두 명이 여러 이유로 같이 못 다니게 돼서 혼자 다니는 바람에 많이들 물어보는데, 저는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요. 나중에 같이 들어갔던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당시 상계동 캠퍼스였는데, 입구 들어갈 때 긴 잔디밭을 통과해야 해요. 거기에 맨날 시커먼 남자들이 너댓 명 앉아서 ‘기루다’라는 일종의 브리지 카드 게임을 하고 있어요. 여자가 지나가면 다 같이 쳐다보는 게 친구는 그렇게 싫었다고 하더라고요. 글쎄 나는 싫고 말고 할 게 없었어요. 남이 쳐다보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었어요. 미니스커트도 입고 다니고, 내가 등장해서 분위기 바뀌면 오히려 재밌어하고 그랬죠. 그건 제 체질인가 봐요. 물론 가끔 짜증 나는 것은 있었어요. 가장 짜증 나는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 제가 서울공대 전설이 된 것은 여자 화장실이 없어서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는 것 때문인데 그건 별 것 아니고요. 지금도 그걸 많이 이야기하더라고요.   화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왔죠. 사실이 아니에요. (웃음) 과장이 됐을 수도 있죠. 손잡이가 얼마나 더러우면. (웃음) 손잡이도 제대로 없어서 끈으로 해놓기도 하고 그랬잖아요. 만지기 싫을 정도로 더러워서 그랬을 거예요. 발로 차고 들어갔다니, 나 같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요. (웃음) 대학 때 연극부를 했는데, 7년 만에 서울 공대에 여자가 들어온 거예요. 역사적 사건이니 무대에 서야 한다고 난리였죠. 그것도 좋겠다 해서 무대에 두 번 올랐어요. 모여서 합숙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하잖아요? 냄비가 뜨거워서 스웨터를 잡아당겨 손잡이를 잡고 그랬는데, 남자들이 보기에는 터프한 게 놀랍고 신선했나 봐요. 그 때문에 홀딱 반한 남자들도 많았어요. (웃음) 솔직히 인생을 돌아봤을 때 좋았던 것은, 당시 저는 제가 그렇게 예쁜지 몰랐어요. 나중에 그때 사진을 돌아보니 예쁘고 매력적이더라고요. 중요한 건 그때는 그걸 몰랐다는 사실이에요. 제 언니가 워낙 예쁘고 매력적이어서 저는 외모경쟁은 일찌감치 포기했고 실력 경쟁만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는 거예요. (웃음) 그때부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크게 개의치 않았고요. 서울 공대 다니면서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것을 배웠던 것 같아요. 항상 몇천 명 무대에 여자 몇 명이었기 때문에 주목의 대상인 것은 확실했어요. 거기서 별로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그거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대학 생활은 불행했어요. 대학 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죠.   당시 대학 다니셨던 분들은 암흑시대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시대적 상황이기도 하고 당시 건축 교육의 수준 때문이기도 하고요. 연애하고 여행하고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요. 학교가 일 년 중 반은 문을 닫아서, 아예 안 다녔어요. 공대는 심하게 데모하지도 않았어요. 남자들은 선배들에게 불려가서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여자는 시켜주지도 않았어요. 네트워크고 뭐고 그런 거 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어디에 관심 있으셨나요? 가장 재밌었던 건 도시에 관한 책을 접했던 것이에요. 대학교 2학년이 되자마자 조교 하나가 저를 부르더니 몇 가지를 이야기해줘요. 그림 트레이스를 많이 해봐라, 사진 책 보면 평면을 그려봐라, 영어 원서를 읽으라고 하면서 당장 세 권을 추천해주는 거예요. 그중 하나가 찰스 젠크스가 쓴 <Architecture 2000 and Beyond>라는 유명한 책이었어요. 바로 종로서점 가서 원서를 샀어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2학년 학생이 그걸 보느라 정말 혼났어요. (웃음) 당시 선배로부터 받은 조언은 그거 하나만 기억나요. 덕분에 당시 원서를 많이 찾아 읽었어요. 미국문화원에서 도서관을 운영했는데, 학교가 하도 노니까 그곳에 가서 책을 읽었어요. 미국의 1960~70년대가 끓어오르는 혁명 시대였잖아요. 그때 매우 많은 저작들, 특히 도시사회학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어요. 두 가지 주제에 심취했는데, 도시사회학 분야의 주제와 ‘이상 도시(Ideal City)’에 대한 거예요. 이상 도시에 대한 미국 책은 낱낱이 읽었어요. 제 머리가 일찍 깬 거예요. 반면 건축과를 가자마자 너무 싫었던 것은 건축의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거였어요. 작가가 일필휘지로 그려내거나 하는 판타지가 무척 못마땅했던 거예요. 그런 부분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건축과를 잘못 들어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서 도서관에 다니면서 다시 사회학과를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도시사회학, 문화인류학 책을 많이 읽게 되었고요. 당시에는 학교가 너무 재미없었고, 설계라고는 배운 적이 없어요. 학교가 어떤 지경이었냐면, 어떤 교수는 ‘미국 주택교통부 장관이 여자 출신이다’ 이러더라고요. 요즘 같으면 손들고 뭐든 말했겠지만 당시엔 속으로만 ‘아휴’ 했어요. (웃음) 또 어떤 교수님은 나만 들어가면 ‘여기 앉아요~’하며 먼지까지 털어주시면서 완전히 레이디 취급하는 거예요. 솔직히 저는 서울대에서 배운 게 없어요. 그때는 대학 졸업하면 그저 일하면 되는가 보다 하고 교수님이 소개해 준 설계사무소에 취직했어요. 거기서 처음으로 토시를 끼고 구조설계도를 그리는 걸 배웠어요. 처음 구조설계도를 그릴 때는 정말 신기했어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설계사무실은 어쨌든 일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떻게든 배울 수가 있었죠. 나중에 이광노 교수님이 라멘도 그리는 저를 보고서 ‘어, 이 자식 봐라’ 하더라고요. (웃음) 그곳도 몇 달 후 관두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혹은 선배가 하는 새로운 기획팀에 가서 일도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난 후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생 절반이 다 대학원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때까지 대학원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정말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는 거죠. 그러다가 다들 대학원에 가 있는 것을 보고,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 분위기도 조금 나아져 있어서 1년 사회생활 하다가 가게 되었죠. 대학원 가서는 꽤 알차게 공부했어요. 주종원 교수님(도시설계 전공)을 지도교수로 선택했고 프로젝트도 꽤 했고요. 졸업 후 박정희 대통령 말기 때 KIST에 생긴 신행정수도 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설계사무소에서 꽤 재미있게 일하고 있을 때였는데 제가 1977년에 쓴 소셜믹스(social mix)에 대한 논문을 보고 당시 강홍빈 팀장이 전화 걸어서 인터뷰를 했어요. 일종의 스카우트를 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