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①

로트링펜으로 그린 미래도시 스케치, 김찬중 제공
자유로운 곡면과 독특한 형태, 건축가 김찬중의 건축은 형태가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형태 안에는 공간 구성, 구조, 예산과 제작에서 최적화된 체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_시스템 랩 대표이자 경희대학교 교수인 건축가 김찬중은 산업 재료와 제작 방식을 건축에 끌어와 한국의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하면서 만들기와 텍토닉 주제를 탐색하는 건축가이다. 제작 방식에 대한 프로세스에 개입하고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면서 김찬중의 주제는 컴포넌트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컨버전스로 확장하고 있다. 이번 스페셜 테마에서는 건축가 김찬중과 인터뷰를 통해 그의 건축적 관심사와 생각을 나누고, 그가 지금까지 시도해왔던 다양한 건축 실험에 대해 들어본다.
 
 
아버지는 전문경영인이셨고 어머니는 한국 최초의 누드 크로키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강명순 화백님이십니다. 예술과 현실의 대립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목격했다고 하셨어요.
두 분의 역량 차이는 관리의 유무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모든 걸 매니지먼트하는 성향이었고 어머니는 모든 걸 흐트러뜨려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그림을 구상할 때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이 몰입하는 상태여서 두 분의 마찰이 많았죠. 아버진 휴지 한 통을 쓰더라도 ‘4인 가족 기준으로 어느 기간이면 다 소진할 수 있는지’까지 원칙이 있었어요. 항상 모든 게 정돈된 게 숨막혀서 아버지에게 반항도 많이 했어요.
지금은 달라요. 보기에 좋은 어질러짐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집중할 때 어질러지는 것은 괜찮지만, 끝나고 나면 모두 치우고 다시 어지르자는 입장이에요. 쌓아두는 건 창의적인 일이 아니라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더라고요.
공간도 중요하지만 라이프스타일도 그래요. 자신의 정체성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좋고 나쁘고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서 라이프스타일이 구성되면 굉장히 멋있어 보여요. 그렇지 않고 그냥 사는 경우는 족보 없는 물건들로 둘러싸이게 되는 거죠. 좋은 물건들과 디자인이 있는데 정체성이 없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이 살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인지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어머님이 자유로움이 충만하신 분이라면 아버님은 말씀하신 대로 관리하고 경영하는 분이시죠. 어느 분께 더 영향을 받으셨나요?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결국 어머니 성향이 더 맞는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처럼 정리하는 데 기쁨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논리와 규칙을 다시 세팅하는 것이지 청소의 개념이 아니에요. 그걸 할 줄 알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죠. 처음 몇몇 제자들과 사무실을 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비지니스라고 할 만큼 사무실 규모가 커졌는데, 관리하고 오퍼레이션을 짜고 타당성을 검토하고 논리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제 성향과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공간> 지를 자주 보셨다고 들었어요.
다섯 살, 여섯 살부터 봤던 기억이 있어요. 어머니가 창간호부터 모으셨을 거예요. 그중에서도 기억하는 특집이 있어요. 김태수 선생님, 김수근 선생님의 특집호. 당시에는 김수근 선생님이 발행인인 줄 몰랐어요. <공간>에 자주 나와서 ‘와, 대단한 분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본인 잡지였어요.(웃음) 그래도 역시 대단한 분이신 건 맞지만요.
 
당시에 도면이란 걸 인식했나요?
인식했죠. 저희 세대는 아카데미 과학 교재, 조립식 장난감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등각도에 익숙해요. 조립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과 잡지의 도면이 같다는 걸 인지했어요. 탱크나 전투기, 군함, 자동차를 만드는데 그 그림이 필요했는데, 집을 만드는 데에는 이런 게 필요한가 보다 했죠. 아카데미 과학 교재를 접한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레고처럼 부품과 부품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일종의 ‘형태 맞추기’죠. 도면 나오고 액소노메트리(axonometry)가 나오면 ‘사진은 여기서 찍었나보다’와 같은 논리로 연결하는 훈련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로트링펜으로 그린 미래도시에 관한 스케치를 보면, 단순히 그림을 그렸다기보단 계획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약간의 자폐 성향이 있었다고 해요. 혼자만 있으려고 하고 말도 거의 안 하고요. 방에 들어가서 온종일 혼자 그런 걸 그리고 있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그냥 그리는 게 재밌어서였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운전을 좋아하셔서 매일 나를 조수석에 태워 데리고 다녔어요. 그러면 집에 와서 그날 본 모든 길을 다 그렸어요. 약국, 양복점, 상회. 걱정을 많이 하셨죠. 커서 지도상회 같은 걸 하려고 하려나?(웃음) 사실 그게 매핑(mapping)이잖아요.   
미래도시의 경우엔 다 이야기가 있었어요. 기억나는 건 공항, 비행기, 배, 항구가 나오는데, 쓰레기를 태워 발전하고 그 에너지로 방파제에 불을 켜는 연관성이 있었어요. 활주로를 짧게 하고, 수직 이착륙기로 착륙하고요. 건물은 국방부의 경우 미사일처럼 만든다든지 해서 기호화되어 있었어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죠.(웃음) 도시를 논리로 이해한다기보다 상징체계가 지배하는 도시로 이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인지하는 방식은 단순했지만, 도시가 지속할 수 있으려면 순환되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고 있었죠.
 
유학을 위해 준비한 포트폴리오 첫 장에 그때 그린 스케치를 넣었는데, 어떤 걸 전달하고 싶었나요?
포트폴리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얘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나는 어릴 때 이런 사람이었고, 지금은 이렇다’라는 개연성을 찾기를 바랐던 거예요. 자동차 스케치도 넣었어요. 한동안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거든요.
 
유년 시절의 집과 동네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유년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반포아파트예요. 딱 개발 붐이 일어났을 때의 아파트 키즈죠.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서 놀던 게 기억에 남는데, 그때는 차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스팔트 위에서 야구하고 땅따먹기하고 놀이터처럼 놀았어요. 안전하고 집의 시각적 범위 안에 있었던 거죠. 물성(material)만 달랐지, 어떻게 보면 콘크리트 바닥도 자연의 한 부분이었어요. 행복하고 자연스러웠어요.
한강 둔치가 정비되기 전이라 잡초가 우거져있었고 아파트에 살지만 강까지 바로 갈 수 있었어요. 한강 다리 밑도 많이 갔고요. 또 강가에 떨어지는 해, 낙조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보통 해지는 걸 보면서 각오를 다지지는 않잖아요. 내일은 뭐할까? 어떻게 할까? 미래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 건축가 김수근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어머니가 공간화랑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김수근 소장님을 만났어요. 소장님이 직접 사무실을 구경시켜 줬는데, 설계실 풍경이 충격적이었어요. 그땐 제도판이 있었잖아요? 경사진 책상이 주는 긴장감 같은 게 강렬했어요.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 화판을 책상에 괴어놓고 한동안 그렇게 썼죠.
 
그런 환경에 노출된 것 자체가 흥미로운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여러 가지 자극을 받는데, 그때의 감수성은 놀랍고 신기한 거예요. 중요한 건 노출되고 따라 할 수 있는 기회와 분위기인 것 같아요. 제도판을 보고 와서 집에 화판이 없었다면 그냥 그 자극은 없어지는 거죠. 마침 화판도 있겠다, 펜 통에 목탄 같은 것도 꽂혀있으니 해보는 거죠. 어머니 화실이 설계실의 환경과 비슷했어요.
또 동네 친구 집에 가면 플라스틱 통에 구멍 있는 템플레이트, 컴퍼스가 종류별로 엄청 많았어요. 그게 만들어내는 비쥬얼이 충격적이었어요. 그 집에 가면 컴퍼스로 그리기만 했어요. 그 친구 아버지가 우리나라 그래픽 디자이너 1세대인 서울대학교 김교만 교수님이었어요. 굉장히 신망받는 분이었죠. 그분의 작업을 생각해보면 컴퍼스를 많이 썼겠다 싶어요.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가장 큰 영향은 어머니가 아닐까 싶어요. 누드 크로키를 그리셨던 분이기 때문에 인체의 곡면에 익숙하지 않았을까 싶고요. 어머니와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아름다운 건, 인간의 몸이다”, “인간의 몸은 랜드스케이프다”라는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계셨어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젊은 여자의 몸이 아니라 시장 바닥에 앉은 촌부의 몸에 많은 게 담겨 있다고 보셨죠. 누드를 성적인 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삶이 몸에 맞춰지는 것이고, 살아온 모습이 경이로운 거라고 많이 말씀하셨어요. 나도 어렸을 때 어머니의 누드모델을 많이 했고요.
저에겐 굉장히 자유로웠는데 세상은 자유롭지 못했죠. 불편한 진실이었던 거고 지금도 완전히 자연스럽지만은 않아요. 지금도 누드화 하나만으로 전시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 어머니는 고집 짱이었죠.(웃음) 아버지가 꺾을 수도 없고 꺾으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아버지가 화가였다면 이야기가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어머니가 화가였기 때문에 생활 속에 좀 더 밀착된 게 있었어요. 내가 궁금해하면 “너도 옆에서 그려봐”하고 옆에 종이를 깔아 준다든지 했죠. 어머니랑 있을 때는 눈치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자동차에 관한 관심은 언제부터였나요?
묘한 게 도시와 차는 항상 ‘같이’ 있었으니까요. 중학교 2학년 때 벨기에에서 살았던 친구 집에 놀러 갔어요. 유럽에 살았으니 집에 BMW, 벤츠, 아우디 같은 자동차 브로셔가 많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완전히 매료된 거예요. 내가 알던 차와 전혀 다른 세계가 거기에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부터는 화교가 운영하는 명동의 책방에 가서 <car and drive>, <car styling> 같은 류의 일본 잡지를 사 왔어요. 그때 자동차를 디자인으로 접하게 된 계기였죠. ‘clay model’ 깎는 모습도 잡지를 통해 봤고요. 어린 시절, 모터쇼, 미래에 관한 얘기를 담은 콘셉트 카를 보면서 영향을 받았어요.
나름 상당한 지식을 쌓았는데,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울산 현대자동차에 계신 친구를 졸라서 울산 현대자동차 엔지니링 센터에 보름 동안 머물 정도였어요. 자동차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어서 디자이너 아저씨들을 놀라게 했죠. 그러면서 친해졌어요. ‘커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될 거예요’라고 했는데, 한국의 현실을 이야기하며 그 꿈을 접게 한 것도 결국 그 디자이너 아저씨들이었어요. 그래도 그분들이 너무 멋있었어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으셨던 거네요.
고등학교 때 그런 꿈을 꾸었고 잠시 건축을 잊었어요. 차는 항상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거든요. 건축은 만화에 나오는 미래도시가 전부였고 <공간> 지에서도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건축에 관심이 있었지만, 자동차가 훨씬 강렬했어요. 대학은 건축과로 갔지만 어떤 유전자가 남아있는 거예요. 가지 못한 곳이기 때문에 약간의 아쉬움도 있고요. 그래서 산업디자인을 가르치는 아내에게 많은 이야기를 상의하고 의견을 듣는 데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웃음)
 
자동차 디자인과 건축은 어떻게 다르다고 느꼈나요?
정말 이상하지만, 자동차는 왠지 이 세상 물건 같지 않았어요.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비율과 선의 총체적인 세팅, 감성, 광채가 감동적이었어요. 한번은 건축도 디자인 분야도 아닌 분이 말씀하셨어요. 잘은 몰라도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일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요. 디자이너는 하루하루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바꾸지만, 건축은 이것저것 다 해보고 오랫동안 영글어서 산모의 고통을 겪은 후 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 같다고요. ‘매일의 고통, 지속성의 고통’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건축의 사이클이 너무 길어요. 그런 부분이 상당히 부담되고요. 디자인은 사이클이 빠르니까 결과를 빨리 볼 수 있는데, 건축은 긴 호흡 뒤에 나오는 결과라 더 선호했던 것 같아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려 했으나 대학 진학 때 아버지가 반대하셨다고 하셨어요.
산업디자인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셨고, 그때 고민이 많았어요. 반대의 가장 큰 이유는 산디과가 미대 안에 있어서였어요. 대신 건축과를 가면 건설사 사장이 되는 줄 아셨죠. 실제로 건축가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보고 조금 싫어하시기는 했어요. 지금 건축가 지망 학생들이 저에게 상담하는 내용이 그때와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금융 분야로 가거나 변호사, 의사가 되면 억대 연봉이란 비교가 저희 때부터 시작한 내용이었으니까요. 그때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이 150만 원이었는데 저는 한 달에 70만 원 받았거든요. 물론 지금은 두 배까지 차이는 안 나지만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선택하게 계기가 있나요?
당시에는 사실 정보랄 것이 없었어요. 그저 컷트라인 중심으로 생각하고 학교 분위기를 보는 정도였어요. 저희 때 첫 선지원 후시험제를 시행했어요. 지원했던 학교에 떨어지고 재수하게 되었는데, 두 번째는 좀 더 안전하게 지원하게 되었죠.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가 건축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솔직히 학교 환경 자체에는 실망이 컸어요. 그 당시 건축과에서 설계 전공 분위기는 좋지 않았거든요. 지금은 건축학과와 공학과로 분리되면서 훨씬 디자인 지향적인 분위기지만요.
 
당시 고려대 건축공학과는 공학 분야가 주를 이루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학창시절 제도판은 보통 1인당 1개씩 부여되는데 설계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저는 3개를 사용했어요. 학교 내 설계실에 여유가 많았고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작업실 문화도 거의 없었고요.
주변에 건축 설계에 관해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웠을 것 같아요.
보통 1학년 때는 제도 수업만 하는데, 갑자기 혼자 공모전에 참여했어요. 건축사협회 주관의 학생공모전으로 주제가 <신접살림을 위한 단독주택>이었어요. 설계를 잘 모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리던 가닥은 있고, 규모가 작아서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모형 없이 90x180 크기의 패널 1개 제출하는 것이었어요. 3월에 입학하여 4월에 공모안을 제출한 거니까 무모했죠.(웃음) 당시 배운 것이 나무 그리기뿐이었는데도요. 그래서 나무가 엄청 많은 집을 그렸어요.(웃음)
당시에는 스프레이 풀이 있다는 것도 몰라서 딱풀로 붙이다가 다 써버린 거에요. 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해서 밥풀로 붙였어요.(웃음) 종이에 밥풀이 뚫고 나오고 아주 장관이었어요. 그렇게 5개 정도의 그림을 패널에 붙였어요. 그걸 들고 서초동 건축사협회 앞에 가보니 전국의 건축과 학생들이 인산인해였어요. 너무 놀랐죠. 그때 ‘시다(보조)’라는 개념을 처음 알았어요. 한 패널에 ‘시다’ 여럿이 붙어서 마무리하고 레터링 글자를 붙이고 있고, 옆에서 군복 입은 사람이 심각하게 무게 잡으며 지시하고 있고요. 저는 레터링도 모르니 글씨를 직접 써서 제출했는데, 내 패널이 시각적으로 얼마나 뒤떨어지는지 보게 되니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게다가 혼자 왔으니까요. 너무 창피해서 패널을 신문지와 테이프로 붙여서 가리고 접수 줄에 섰어요.
그런데 우리 학교 선배들이 저를 발견한 거예요. 제가 제출하는 거라고 하니 형 셋이 와서 구경했죠. 접수할 때 신문지는 뜯어서 제출하라고 하는데 너무 부끄러웠어요. 밥풀로 막 붙인 제 패널을 본 접수자가 어느 학교 몇 학년이냐고 물어보더니, 내년엔 잘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심사위원도 아니고 접수하는 사람도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였으니.(웃음)
 
창피했지만, 1학년짜리가 작품을 내러 왔더라고 학교에 소문이 났어요. 졸업한 선배들 귀까지 들어가서, 어느 날 대학원 실로 저를 부르더라고요. 졸업한 선배들이 쭉 앉아서 “얘가 걔야?”하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그런데, 하는 말은 “너 용기도 대단하다”였어요. 이런 열정이 있는 후배라면 작업실을 만들 수 있겠다 해서 당시 200만 원을 주면서 작업실을 만들라고 했죠. 공모전은 떨어졌지만 작업실을 만들 후원금을 받게 된 거예요. 그 돈으로 제기시장 안의 작은 재봉 공장을 전세로 얻어, 건축과 3명을 더 모아 공부를 시작했어요. 한 달에 한 번 선배들이 리뷰도 해주고요.
 
그 계기로 건축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 거네요.
선배들과 많이 싸웠어요.(웃음) 싸움이라기보다는 건축에 대한 토의 혹은 논쟁이었어요. 2학년 1학기 때 주택설계를 했는데, 집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선배들에게 공격을 많이 받았죠.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모여서 나름 심각했던 거죠. 아무래도 설계에 너무 소외된 지역에 있다 보니, 설계하겠다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밀도 있게 했어요.
그때 책도 많이 읽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피터 아이젠만이 쓴 책이었는데, 모르는 단어를 형광펜으로 그어보니 나중엔 눈이 부셔서 책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웃음) 당시 고대 철학과 다니던 중학교 동창에게 물어보니, 그 책에는 6개의 학문이 혼재되어 있다는 거예요. 기호학, 논리학, 언어학, 현상학, 구조주의 등… 그에 대한 기본 소양이 없으면 읽을 수 없대요. 이 책을 쓴 건축가는 그것에 대해 알기 때문에 책을 쓴 것이니, 건축가라면 철학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친구와 각 분야의 인문서들을 읽고 공부를 하기로 했어요. 그 친구의 도움으로 밀도 있게 공부하면서 피터 아이젠만의 글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이론서들을 읽으며 나름 논리적으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요.
설계에 관하여 동기들과 의견을 나누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대학원 형들과 많이 교류했어요. 그 와중에 피터 아이젠만의 논리적 싸움에 대한 배움이 있었고, 큰 힘이 되었어요. 누가 더 논리적일 수 있느냐의 게임으로 볼 때 중요한 지점이었어요. 저는 작업에서 공격당하는 처지이었고,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름의 사고체계를 만들기 시작했죠.
 
학교 수업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작업실을 통해 채워졌을 것 같아요. 책이나 정보는 어떤 방식으로 얻었나요? 
앞서 말했던 철학과 친구의 도움이 컸어요. 그리고 잡지 아티클을 보면 인용문과 각주가 쭉 나오니, 그중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들을 골랐어요. 주말이면 교보에 가서 다양한 분야를 둘러보며 도움 될 것 같은 책들을 골랐고요. 그때 아내와 연애할 때인데, 우스갯소리로 만약 우리가 대학 때 헤어졌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데이트 비용을 무조건 책에 써서였을 것이라 말해요. 그 정도로 책을 많이 샀어요.
 
그 당시 해외의 건축 흐름을 파악할 수 있던 매체가 많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는 무조건 책을 많이 읽고 판단하자는 주의에요. 작가의 관점을 보는 편이에요. 사람과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거기에 동화되게 돼요. 책도 집중해서 보면 그에 대한 지적 보상을 스스로 만들게 되면서 그편이 되요. 제가 생각하는 독서의 위험성이란 다 읽고 나면 추종의 위험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보고, ‘내 생각은 이래’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나라의 독서습관에는 그런 경향이 별로 없어요. 읽고 정리하는 것이 무슨 공부겠어요. 내 생각은 어떻고, 네 생각과 차이는 어떻고 가 중요하지. 한국 사람들은 정보를 모으는 것에 대해 강박적이지만,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거든요.
 
피터 아이젠만의 책은 어떤 면에 매료되었나요?
피터 아이젠만의 책을 읽고 나서, 그처럼 사고하는 시기가 있었어요. 모든 건축의 원리는 1부터 100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의 피터 아이젠만은 벽돌 한 장도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요. 내가 그리는 1cm의 선으로 인해 큰 재화와 노동력이 낭비되거나 비상식적인 상황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부분이 조심스러웠어요. 피터 아이젠만이 말하는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이란 공공성에 관한 부분이라기보다는, 건축가의 시점에서 미학적인 이유만으로 만들어내는 무책임함에 대한 경고였어요. 그렇기에 설계 전체나 부분에 대해서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곧 건축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게 피터 아이젠만의 논조였죠.
하우스 텐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보자면 집이 설계되는 모든 과정에 이유가 구문처럼 분석되어 있었어요. 왜 창이 이곳에 뚫려야 하고, 슬래브가 어디까지 나고 등등….당시 그 책이 지적으로 보였고, 저에게 엄청나게 큰 영향을 주었어요. 그러나 여기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는 없더라고요. 그 사람이 겪어야 할 불편함보다는 건축가의 책임에 대해서만 언급되고, 그 두 영역을 전혀 다른 카테고리로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그것에 영향을 받고, 심취했었죠.
그런데 피터 아이젠만도 건축 실무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본인의 이론으로 학계에서는 승부수를 던질 수 있었지만, 실제 영역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변하기 시작해요. 다른 사람들은 잘 인지하지 못했지만, 저처럼 그를 맹신하던 사람은 그 변화를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피터 아이젠만이 엑스트라 콘텍스트(Extra context)라는 키워드를 들고나오더라고요. 계속 똑같은 것이 반복되고 있을 때 생뚱맞음이 들어오면서 전체적인 이야기를 다시 한번 환기시키며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거예요. 글쓰기의 방법론 중 하나로 건축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스스로를 합리화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가 변절자로 보이기 시작했죠.(웃음)
 
그걸 인지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가요?
1994년 정도였던 것 같아요. 너무 실망스러워서 피터 아이젠만이게 편지를 쓰려고까지 했어요. 그런데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으니.(웃음)
아무튼, 그 뒤로 ‘랭귀지(language)’가 가진 함정에 대해 주의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는 매너리즘이고, 하나는 변절이에요. 피터 아이젠만의 경우 자기 언어를 이론적으로 설득시키기 위해 논리(logic)를 이야기하지만, 나중에는 논리를 제외한 모든 게 다 있더라고요.(웃음) 반면 프랭크 게리나 자하 하디드는 변절의 문제에서 벗어나 있어요. 매너리즘이지만 사람들은 그 매너리즘으로 인한 브랜드를 사고 싶어 하죠. 물론 모든 환경을 하나의 언어로 푼다는 것은 여전히 의구심이 들지만요. 어쨌건 건축 언어에 대해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끼게 되었어요.
 
말씀하신 ‘랭귀지’라는 것은 건축에서 어휘로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면 사고체계의 근원적 방향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첫 번째가 강해요. ‘랭귀지’란 곧 사람들이 지각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맞겠어요. 저 역시 사고하는 방식 체계와 결과물은 다르지만, 매 프로젝트마다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고체계를 랭귀지라 한다면 저도 강한 랭귀지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표현되는 현상에 관한 것으로 보자면 작업 안에서 각각 카테고리가 있어요. 이 프로젝트는 ‘어떤 카테고리로 일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각 작업이 다른 성향으로 가게 돼요.
피터 아이젠만을 계기로 무언가를 추종하기보다는 다양한 정보들을 펼쳐두고 공통적인 속성들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죠.
 
자기 생각으로 소화하고 말하는 게 중요하겠어요.
지금의 사회 현상도 그래요. 정보는 많아요. 진짜 뉴스도 많고 가짜 뉴스도 많아요. 그런데 결국 본인의 판단이 가장 중요해요. 어디에 기준을 두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조선일보 혹은 딴지일보가 하는 말을 100% 진실이라고 믿고 살 것인가죠. 자기 세상을 어떻게 규정하고 살든, 중요한 것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넓은 스펙트럼에서 각자의 논조를 파악하고 공통 사실만을 사실(fact)로 보고 나머지는 주장으로 파악하는 것, 그리고 내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앞서 말했듯이, 책을 읽고 나서 저자에게 동요되어 버리거나 자신만의 의견을 갖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저는 아침마다 한 시간 정도를 브라우징하는 데에 쓰는데, 모든 종류의 뉴스 채널을 모아서 간략히 보고 나서 그러죠. “에잇, 거지 같은!(웃음)” OHS
 
진행 임진영
녹취 및 정리 우경희 
사진 이강석
인터뷰 ②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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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영국대사관, F.J. 마셜 9월 27일 3:00PM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영국대사관, F.J. 마셜 * 9월 16일 오후 2시부터 참가 신청 가능  * 이 프로그램은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와 연계한 스페셜 프로그램입니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티켓 혹은 방문 스탬프를 소지하셔야 입장 가능합니다.(입장 시 현장 확인) * 프로그램 신청 시 오픈하우스 웹사이트 회원가입이 필수(가입 시 휴대폰 본인 인증)이며 신청한 본인만 참여 가능합니다. 참가비는 무료이나 노쇼 방지를 위해 예약금 결제 후 참석 시 반환합니다. 자세한 방법은 How to를 참고해주세요.  * 이 프로그램은 대사관 보안관리 규정 상, 신청자 명단과 신분증으로 본인 대조 후 입장이 가능하므로 신분증(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여권, 학생증)을 반드시 지참해 주십시오. * 대사관 사진 촬영은 일부 제한되는 곳이 있으며, 보안상 동선과 이동이 제한될 수 있으므로 현장에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 대사관 오픈하우스 신청 완료후 참가자 분들에 한해 개별적으로 영문 이름 등 추가 정보를 요청드릴 예정이오니 꼭 회신해 주십시오. ​​​​​​​ 2019년 9월 27일 (금)  15:00 /15:30 / 16:00 / 16:30  프로그램 예상 시간 : 40분 프로그램 진행 : 영국대사관 지금의 주한 영국 대사관저는 1884년 영국과 조선이 수교한 이후1890년에 착공해1892년에 완공한 영사관저 건물이다.서울에서 지어진 네 번째 서양식 건축물로 알려졌으며, 개화기 대사관 중에서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사용되는 유일한 외교공관이기도 하다.  건물의 설계는 상해건설국 책임건축가였던 F.J.마셜(F.J.Marshall)이 맡았고, 당시 중국이나 인도 등에 주재한 다른 영국공관들처럼 붉은색 2층 벽돌 건물로 지었다.관저 외관은19세기 빅토리아 양식에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건축 스타일이 더해졌다.당시 사용된 초석은 대사 부인인 원터 힐리어가1890년7월에 세웠으며, 이 초석은 현재도 대사관저 안 복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준공 당시1층(124평, 410㎡)에는 접견실과 사무실,서재, 식당, 응접실이 있었고, 2층(121평, 400㎡)에는 목욕탕이 딸린4개의 침실이 배치되었다.  1892년 영사관저가 완공된 후 고종은 건물의 평면과 사진을 보여달라고 영국 정부에 요청하고, 1910년 덕수궁 석조전을 설계하면서 영국 건축가 J.R 하딩( J.R.Harding)에게 맡길 정도로 이 건축 양식에 매료되었다고 전한다. 영국 외교관들은 건축물뿐만 아니라 정원을 꾸미는 데도 정성을 쏟아,대사관 응접실 너머로 장미꽃과 나무, 잔디가 어우러진 우아한 영국식 정원이 펼쳐진다. 1974년에는 수영장이 생겼고, 1980년대에는 오랜 시간 논의 끝에 테니스 코트 또한 재정비되었다.   글 : OHS 사진 및 자료: 영국대사관, 문화재청 제공
SPECIAL Interview 강력하고 능동적인 구축 체계를 만들다, 건축가 김찬중 ① 자유로운 곡면과 독특한 형태, 건축가 김찬중의 건축은 형태가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형태 안에는 공간 구성, 구조, 예산과 제작에서 최적화된 체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더_시스템 랩 대표이자 경희대학교 교수인 건축가 김찬중은 산업 재료와 제작 방식을 건축에 끌어와 한국의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하면서 만들기와 텍토닉 주제를 탐색하는 건축가이다. 제작 방식에 대한 프로세스에 개입하고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면서 김찬중의 주제는 컴포넌트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컨버전스로 확장하고 있다. 이번 스페셜 테마에서는 건축가 김찬중과 인터뷰를 통해 그의 건축적 관심사와 생각을 나누고, 그가 지금까지 시도해왔던 다양한 건축 실험에 대해 들어본다.     아버지는 전문경영인이셨고 어머니는 한국 최초의 누드 크로키화가이자 서양화가인 강명순 화백님이십니다. 예술과 현실의 대립을 어렸을 때부터 많이 목격했다고 하셨어요. 두 분의 역량 차이는 관리의 유무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모든 걸 매니지먼트하는 성향이었고 어머니는 모든 걸 흐트러뜨려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그림을 구상할 때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이 몰입하는 상태여서 두 분의 마찰이 많았죠. 아버진 휴지 한 통을 쓰더라도 ‘4인 가족 기준으로 어느 기간이면 다 소진할 수 있는지’까지 원칙이 있었어요. 항상 모든 게 정돈된 게 숨막혀서 아버지에게 반항도 많이 했어요. 지금은 달라요. 보기에 좋은 어질러짐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집중할 때 어질러지는 것은 괜찮지만, 끝나고 나면 모두 치우고 다시 어지르자는 입장이에요. 쌓아두는 건 창의적인 일이 아니라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더라고요. 공간도 중요하지만 라이프스타일도 그래요. 자신의 정체성을 잘 인지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좋고 나쁘고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자신의 정체성이 담겨서 라이프스타일이 구성되면 굉장히 멋있어 보여요. 그렇지 않고 그냥 사는 경우는 족보 없는 물건들로 둘러싸이게 되는 거죠. 좋은 물건들과 디자인이 있는데 정체성이 없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이 살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인지를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어머님이 자유로움이 충만하신 분이라면 아버님은 말씀하신 대로 관리하고 경영하는 분이시죠. 어느 분께 더 영향을 받으셨나요?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결국 어머니 성향이 더 맞는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처럼 정리하는 데 기쁨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논리와 규칙을 다시 세팅하는 것이지 청소의 개념이 아니에요. 그걸 할 줄 알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죠. 처음 몇몇 제자들과 사무실을 할 때와는 달리 지금은 비지니스라고 할 만큼 사무실 규모가 커졌는데, 관리하고 오퍼레이션을 짜고 타당성을 검토하고 논리를 만드는 게 생각보다 제 성향과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공간> 지를 자주 보셨다고 들었어요. 다섯 살, 여섯 살부터 봤던 기억이 있어요. 어머니가 창간호부터 모으셨을 거예요. 그중에서도 기억하는 특집이 있어요. 김태수 선생님, 김수근 선생님의 특집호. 당시에는 김수근 선생님이 발행인인 줄 몰랐어요. <공간>에 자주 나와서 ‘와, 대단한 분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본인 잡지였어요.(웃음) 그래도 역시 대단한 분이신 건 맞지만요.   당시에 도면이란 걸 인식했나요? 인식했죠. 저희 세대는 아카데미 과학 교재, 조립식 장난감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등각도에 익숙해요. 조립 과정을 보여주는 그림과 잡지의 도면이 같다는 걸 인지했어요. 탱크나 전투기, 군함, 자동차를 만드는데 그 그림이 필요했는데, 집을 만드는 데에는 이런 게 필요한가 보다 했죠. 아카데미 과학 교재를 접한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레고처럼 부품과 부품을 어떻게 맞추어야 할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일종의 ‘형태 맞추기’죠. 도면 나오고 액소노메트리(axonometry)가 나오면 ‘사진은 여기서 찍었나보다’와 같은 논리로 연결하는 훈련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로트링펜으로 그린 미래도시에 관한 스케치를 보면, 단순히 그림을 그렸다기보단 계획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약간의 자폐 성향이 있었다고 해요. 혼자만 있으려고 하고 말도 거의 안 하고요. 방에 들어가서 온종일 혼자 그런 걸 그리고 있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저는 그냥 그리는 게 재밌어서였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운전을 좋아하셔서 매일 나를 조수석에 태워 데리고 다녔어요. 그러면 집에 와서 그날 본 모든 길을 다 그렸어요. 약국, 양복점, 상회. 걱정을 많이 하셨죠. 커서 지도상회 같은 걸 하려고 하려나?(웃음) 사실 그게 매핑(mapping)이잖아요.    미래도시의 경우엔 다 이야기가 있었어요. 기억나는 건 공항, 비행기, 배, 항구가 나오는데, 쓰레기를 태워 발전하고 그 에너지로 방파제에 불을 켜는 연관성이 있었어요. 활주로를 짧게 하고, 수직 이착륙기로 착륙하고요. 건물은 국방부의 경우 미사일처럼 만든다든지 해서 기호화되어 있었어요. 포스트 모더니즘이죠.(웃음) 도시를 논리로 이해한다기보다 상징체계가 지배하는 도시로 이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인지하는 방식은 단순했지만, 도시가 지속할 수 있으려면 순환되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고 있었죠.   유학을 위해 준비한 포트폴리오 첫 장에 그때 그린 스케치를 넣었는데, 어떤 걸 전달하고 싶었나요? 포트폴리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얘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나는 어릴 때 이런 사람이었고, 지금은 이렇다’라는 개연성을 찾기를 바랐던 거예요. 자동차 스케치도 넣었어요. 한동안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거든요.   유년 시절의 집과 동네에 대한 기억이 궁금해요. 유년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반포아파트예요. 딱 개발 붐이 일어났을 때의 아파트 키즈죠.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서 놀던 게 기억에 남는데, 그때는 차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스팔트 위에서 야구하고 땅따먹기하고 놀이터처럼 놀았어요. 안전하고 집의 시각적 범위 안에 있었던 거죠. 물성(material)만 달랐지, 어떻게 보면 콘크리트 바닥도 자연의 한 부분이었어요. 행복하고 자연스러웠어요. 한강 둔치가 정비되기 전이라 잡초가 우거져있었고 아파트에 살지만 강까지 바로 갈 수 있었어요. 한강 다리 밑도 많이 갔고요. 또 강가에 떨어지는 해, 낙조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보통 해지는 걸 보면서 각오를 다지지는 않잖아요. 내일은 뭐할까? 어떻게 할까? 미래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SPECIAL 건축가 김찬중 오픈하우스서울 2019 올해의 건축가 특집은 건축가 김찬중을 만난다. 더_시스템 랩 대표이자 경희대학교 교수인 건축가 김찬중은 산업 재료와 제작 방식을 건축에 끌어와 한국의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하면서 메이킹과 텍토닉 주제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제작 방식에 대한 프로세스에 개입하고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면서 김찬중의 주제는 콤포넌트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컨버전스로 확장하고 있다. 올해 오픈하우스서울 2019에서는 건축가 김찬중의 대표작을 방문하고 경험할 수 있는 스페셜 이슈를 준비했다. 건축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인터뷰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OpenHouse 가로골목 + MCM M:AZIT OpenHouse KHVatec OpenHouse 구 폴 스미스 플래그쉽 스토어 (현 헤리티크뉴욕) OpenHouse 우란문화재단  OpenHouse PLACE 1 OpenHouse 서울식물원 온실  OpenStudio 더_시스템 랩 오픈스튜디오   
Interview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한 시대”,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 한국에 오신 지 2년이 되어간다. 한국에 오기 전 서울에 대해 접할 기회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2003년과 2004년에 처음 한국을 짧게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이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4년 후인 2017년에 다시 왔을 때 변화한 서울의 모습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여러 고궁이 복원되고 녹지가 조성되어 수많은 매력적인 공간들이 새로 생겨나 있었다. 주한 영국대사로 부임하기 전, 2017년 하반기에 서울에 머물며 한국어를 공부했다. 이때 여러 장소를 방문하여 서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한 곳을 고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사관 옆에 있는 덕수궁은 산책하기 매우 좋다. 생각에 잠겨야 할 때 종종 덕수궁을 걷곤 한다. 가끔은 연필과 스케치북을 챙겨가서 덕수궁을 스케치하기도 한다. 서울의 박물관과 미술관도 매우 좋아한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청계천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 그리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자주 간다. 각 박물관의 특별전도 다 챙겨보려고 노력한다. 내가 오기 전 옛 서울의 모습을 매번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돈의문박물관마을도 찾아가기 좋은 장소다. 광장시장과 같은 서울의 전통 시장도 좋아하는 곳 중 하나다. 동대문 시장의 수많은 옷과 액세서리의 종류는 갈 때마다 매번 놀랍다. 야구팬이기 때문에 잠실 야구경기장 또한 내 리스트의 상위 10위에 항상 포함돼 있다. 이 모든 장소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경험은 바로 인왕산 등산이다. 인왕산에 오르면 서울의 멋진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윤동주 문학관에서 그의 삶과 시를 감상하는 것 또한 매우 감명 깊었던 경험 중 하나다.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위치한 서울시 중구 정동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과거 한국에서 영국대사관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사관도 영국대사관이 유일하다. 정동이라는 장소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조선 시대와 대한제국의 수많은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중구 정동에서 살며, 또 일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다. 그 시대에 건축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축물 대부분은 현재 박물관 또는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여 영국의 선대 외교관들이 130여 년 전 사용했던 건물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역사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정동에는 영국문화원도 있다. 한국 최초의 현대 교육 기관 중 한 곳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위치한 이곳에서 영국문화원은 다양한 연령층에 영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사관저가 1890년에 지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벽돌과 석재를 이용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서양식 건물이다. 그로부터 130여 년이 흘렀고, 보기 드물게 여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건축, 디자인 강국으로 유명한 영국인데, 혹시 새로운 건축 디자인에 대한 욕심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영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자국의 디자인 및 건축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와 전통 또한 존중한다. 선대 외교관들이 한영 관계를 구축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건물을 이어받아 오늘날까지 우리의 파트너들을 환영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는 종종 서울시청 서소문 건물 13층에 올라 정동의 전경을 눈에 담는다.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 사이에 영국 관저가 자리한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이러한 건물을 현대식 건축물로 바꾼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한국에 부임한 후부터 계속 살고 계실 텐데, 대사님과 가족들은 어느 공간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불편함과 좋은 점은 무엇인지, 1890년에 지어진 건물에 산다는 것에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 관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1층의 테라스와 2층의 발코니이다. 두 곳 모두 관저의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이며, 2층 발코니에서는 남산도 조금 보인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더욱 사랑받던 장소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테라스와 발코니는 복잡한 도시 속 휴식과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공간이다. 관저 인테리어는 현대 생활방식을 따라가기 위해 여러 차례 리모델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19세기 건축 양식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Interview “대사관은 일종의 무대이자 만남의 장소”, 리누스 폰 카스텔무르 주한 스위스 대사 한국에 오신 지 3년이 되어 가는데, 한국에 오기 전 서울에 대해 접할 기회가 있었는지, 또 서울에서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지 궁금하다. 주한 스위스 대사로 정식 근무하기 전, 서울에 익숙해지고 또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짧게 머물다 간 적이 있다. 나에게 서울은 동북아시아가 아닌 매우 새로운 아시아였다. 서울은 흥미로운 도시라 좋아하는 장소를 꼽자면 매우 많다. 우리는 서울 안에서도 중심지에 살고 있어서 이 일대를 산책하듯 걸어 다니는 것을 즐긴다. 도시에서의 특권이자 가장 호사스러운 행위는 바로 시내를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점 같다. 나무와 빌딩 등 온갖 것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난 경험이다. 얼마 남아있지 않아 아쉽지만, 한국의 전통 건축도 좋아한다. 예를 들어 도시 안에 있는 종묘를 정말 좋아한다. 그 외에 인근의 작은 장소들도 좋아한다. 만약 사람들과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알고자 하고,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인상을 얻고자 한다면, 시내를 걸으며 관찰하는 것이 좋다. 비록 서울은 유럽의 소도시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도시지만, 도시산책자이면서 도시관찰자로서 서울 생활에 큰 즐거움을 얻고 있다. 지난 5월 스위스대사관이 정식 개관했다. 초기에 신축이냐 이전이냐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다. 이 부지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새 건물을 짓게 된 중요한 동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우리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항상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옵션도 있고 제약들도 있다. 당시 명백한 사실은 전임자들이 보기에 기존 대사관 건물이 너무 작고, 낡았으며,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만약 부지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건물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복원할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철거하고 새로운 대사관 건물을 지을 것인가? 더 나아가 이 부지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대사관 부지의 경제적 가치가 높으니 그냥 땅을 팔고 심플하게 도심의 고층 오피스 건물 공간을 임대해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거주지를 매입할 것인가? 그것들은 고민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결국, 기존 대사관 건물은 지속할 수 없고, 우리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양국 관계의 밀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고, 한국도 G20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점차 중요한 국가가 되어가고 있었으며, 한국은 스위스의 중요한 경제, 문화, 과학기술 파트너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한국 내 스위스의 존재를 업그레이드하고, 좀 더 강화하고 싶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건축물에 투자하게 되었다. 또 스위스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과거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대사관이 이 자리에 둥지를 튼 지 40년이 넘었고, 그동안 스위스는 한국과 우호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구축해왔을 뿐 아니라 좋은 파트너 관계도 형성해왔는데 왜 굳이 장소를 옮겨야 하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웃 환경이 그때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외부환경은 개발로 인해 바뀌고 있는데? 우리도 역시 변화할 거야.’ 그래서 가장 합리적인 합의점은 부지를 그대로 유지하되 새로운 건물을 짓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대한 타워를 짓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대사관은 클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때마침 우리는 기존 건물의 디자인이 건축물로서 매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소는 그대로 가져가되 건물을 바꾸자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국제현상공모를 시작했다. 스위스대사관 건물을 국제공모를 통해 짓는다. 모스크바도 그랬고, 베이징도 곧 그럴 것이다. 스위스는 물론이고, 유럽 국가, 아프리카, 미국, 아시아 건축가들이 참여해 경쟁한다. 서울 프로젝트의 경우 70명이 넘는 건축가들이 참여했었다. 스위스대사관의 주변은 급변하는 서울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규모 재개발을 통해 주변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결과적으로 스위스대사관이 돈의문 일대 땅의 흔적을 기억하는 곳이 된 셈이다. 대사관과 변화된 주변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일종의 대화, 과거와의 다이얼로그’라고 생각한다. 지금 건물은 모던한 빌딩이지만 과거의 일부를 여전히 반영하고 있다. 최종 당선작의 제목은 “스위스 한옥”이었는데, 재미있는 부분은 스위스에는 한옥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마당이 있는 한국 전통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은 스위스 건물인 것이다. 내 생각에 건축가는 한국에 한국과 아무런 상관없는 단순한 스위스 건축물을 짓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설계 초기부터 주변 환경과의 다이얼로그를 염두에 둔 것 같다. 그들은 한국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스위스적이지만 동시에 한국적이면서도 이곳 환경과 잘 어울리는 것을 원했다. 보다시피 스위스대사관은 전통 한옥이 아니다. 한옥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건축물이다. 나는 이곳의 다이얼로그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도 주변의 다양한 요소들과 서로 대위(counterpoints)를 이룬다는 것이 흥미롭다. 30-40년 전에는 이곳에 거의 비슷한 모양의 한옥 건물들만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모두가 변해가고 있지만 어떤 것들은 그대로 있기도 하고 우리도 변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지를 경제적 논리로 접근할 생각이 없었고, 우리에게 충분할 정도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곳의 가장 큰 호사는 주변에 고층빌딩이 없어서 머리 위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현대적으로 변해야 했고, 다른 형태와 규모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획일적인 것은 싫었다. 결국, 우리의 새로운 시도가 언덕진 이곳의 지형이라든가 주변 개별 건물들, 도시를 향해 열려 있는 건물 배치,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작은 주변 동네 등등과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음악으로 이야기하자면 마치 바흐의 다성(polyphonic)이나 대위법(counterpoint) 같은 것이다. 즉 동일한 한 가지만 있는 것보다 다양한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고 건축물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마당, 처마 등 한옥의 구성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낸 당선작이 인상적이다. 처음 당선안을 보셨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처음 건축물 모형을 봤을 때, 말굽 모양의 낮은 건축물이 아름다운 마당을 껴안고 있는 듯한 매우 보기 좋은 형상이었다. 일단 유기적인 형태가 마음에 들었고, 건축물이 가장 낮은 지점에서 상승하기 시작해 마치 위쪽을 동경하듯 천천히 상승하면서 높은 지점에서 끝나는 개념 또한 마음에 들었다. 지금 인터뷰 하고 있는 3층이 가장 높은 지점이다. 과시적이지 않고 아주 미묘하게 가라앉은 매우 겸손한 건축물이라고 생각한다. 재료 또한 마찬가지다. 콘크리트, 목재, 유리 등과 같은 건축 재료들도 겸손한 재료들이다. 결코, 화려한 재료가 아니다. 이 건축물의 화려한 점은 바로 전혀 화려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지점이다. 또한, 지난해 2월 이곳에 입주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이곳이 매우 실용적이라는 점도 발견했다. 건축물의 기능성이 매우 뛰어났다. 앞마당도 공식 오픈 전에 다양하게 테스트해 봤는데, 정말 활용도가 높았다. 앞마당이 건물의 서로 다른 영역들을 서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사람들도 이곳에 머무르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여기서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스위스 기업, 한국 대학 등등 정말 다양한 분야와의 다양한 배치 및 구성으로 많은 행사를 했는데, 매번 모두 다 잘 어울렸다. 정말 다기능적이며 효율적인 건축물이다. 이런 것이 매우 흡족했다. 대사관이 대상 국가의 지역성을 반영하려는 노력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이 대사관은 스위스대사관인지만, 우리는 지금 서울에 있다. 그래서 주한 스위스대사관으로 스위스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서로 대화하는 건축물을 갖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자, 나를 타인에게 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스위스 집을 짓지만, 그 집은 서울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을 반영해야 한다. 그것이 주재하는 나라에 대한 일종의 존중의 표시라고 생각하며 주재국의 문화와 건축을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사관에서 직접 생활하고 사용해보셨을 텐데, 가장 좋아하는 장소 혹은 풍경은 어디인가? 아주 많다. 그렇지만 이야기했듯이 나는 마당을 정말 좋아한다. 건물 안에 앉아 있으면 밖이 보이는 투명성도 좋아한다. 완전하게 노출된 것이 아니라, 보호받는 느낌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것이 좋다. 또 벽 상층부가 트여 있어서 사무실이 부분적으로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 좋다. ‘아 저기 불빛이 있네, 저기 누가 있구나’라고 알아채게 된다. 나는 팀원들을 상사로서 체크하고 통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럴 생각도 없는데, 이곳에선 한 팀으로 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 있어서 좋다. 또한, 우리 가족이 사는 대사관저 층도 좋아하는데, 다만 처음에 업무 공간과 우리 가족의 주거 공간이 너무 가까운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운 적이 있었다. 어떤 경우는 그 가까움이 실이 되는 경우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우였다. 지금 와서 보니 출퇴근 교통체증을 겪지 않아도 되니 좋다. 또한, 직원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안심되면서도 이제는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대사관과 대사관저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공간이자 도시 안의 또 다른 영토이다. 어쩌면 도시 안의 섬일 수도 있을 텐데, 외교 공간이 도시와 소통하고 교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도시에서 외교 공간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듣고 싶다. 나는 대사관이 섬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무대(stage)라고 생각한다. 만남의 장소라고나 할까.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스위스인들과 한국인들이 만나는 곳, 그래서 서로 소통하고, 논의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사실 일반적으로 ‘스위스는 진지하고, 정중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우리는 한국과 친구가 되고 싶고, 또한 교류를 증가시키고 싶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기술 등등 다분야에 걸쳐 말이다. 물론 대사관이 한국의 도시 안 스위스 영토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을 어떤 의미에서는 열린 집, 다양한 교류를 위해 개방된 오픈하우스로 사용하고 싶다. 지금의 외교란 주재국에서 나의 관심사와 위치를 표현하고 최대한 효과 / 활동을 극대화해야 한다. 대사관도 사람들이 오가며 만나고 교류하는 장소다. 이제 더는 대사관이 성곽으로 둘러싸인 닫힌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대사관이 비밀 정보를 다루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업무의 80% 정도는 공개 정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국인들에게 최대한 다가가고 싶고 그것이 대사관이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열려있어야 하며, 매력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곳은 무대이자 만남의 장소다. 개관식 때 인사말 중에서 “스위스대사관은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보루도 아니거니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피난처도 아니다”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보호되어야 할 공간이면서 또 교류를 위한 외교 공간의 성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에 대한 설명을 더 듣고 싶다. 앞서 부분적으로 언급했듯, 스위스는 현대 국가며, 동시대 국가다. 물론 전통과 과거를 이어가면서 말이다.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나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동시대적이며 현대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우리를 보호해 줄 건물을 원하지도 않는다. 물론 스위스는 19세기 하이디의 무대이긴 했지만 현재를 살아가고있으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존중받고, 책임감 있는 구성원으로서 한국과 함께 친구로서 쌍방향으로 역할 하고자 한다. 그것이 매우 기능적인 접근을 한 이유다. 우리가 전달하고 싶은 또 다른 가치는 겸손함과 진정성이다. 스위스는 과시적인 국가가 아니며, 참된 가치를 지향한다. 보통의 재료들로 매우 정제된 미묘한 건축을 만들었고, 이것이 좋은 명함과 같다고 생각한다. 건축이 흥미롭다고?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이 다 하는 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우리고, 우리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래서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고 상호 협력과 활동을 위해 열린 대사관이고자 한다. 이번 행사는 서울도시건축 비엔날레의 일환으로 열렸다. 외교에 대한 중요도가 갈수록 높아지는 시점에, 문화 외교 또한 중요한 시대가 아닐까 싶다. 공공의 영역에서 문화 교류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화란 다가가야 하며 서로 나누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가고, 호기심이 생겨 일부러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처음은 다른 사람의 전통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에는 두렵지만, 알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되고, 서로 평행 하는 지점들이 보게 된다. 예를 들면 한국과 스위스는 비록 문화적으로 매우 다르고, 지리학적으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공예(craftsmanship) 같은 것은 한국인들에게도 스위스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전통을 매우 존중하는 것 또한 비슷하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엮는다. 크기로 따진다면 서울이 월등히 크고, 인구수도 스위스 전체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다. 역사, 문화 등 극명하게 다른 지점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점들은 또 비슷하다. 그래서 스위스는 글로벌 거버넌스의 책임감 있는 구성원이자 이해당사자로서 공동의 입장을 구축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한국에선 한국의 친구들과 또 다른 나라에선 각 국가의 친구들과 함께 말이다. 서로 배울 것들이 많다. 도시 경영, 어바니즘, 도시계획 등등 서로 다 다르지만, 그 다름에서 교차를 통해 새롭게 알고 배울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행복한 도시다. 안전하고, 기능적이며, 매력 있는 도시를. 그래서 서로 배울 것들을 배우며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이번 오픈하우스를 통해 스위스대사관을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이 공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경험하기 위한 팁을 준다면 어떤 게 있을까? 앞서 건축에 대해 언급한 부분들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가이드 투어를 4회 여는 동안 많은 사람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것 또한 또 하나의 다이얼로그라고 생각한다. 이것에 큰 가치를 두고 있다. 또한, 앞으로 더 많은 스위스 건축가와 한국 건축가의 교류를 기대하며 이를 통해 두 나라 간 전문적인 네트워크를 확장하고자 한다. 그리고 새 대사관 개관의 해를 축하하고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연말에는 파티를 계획 중이다. 이를 통해 한국과 스위스 사이 민간, 전문, 기업 등을 비롯해 공식, 비공식 등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교류할 예정이다. 진행 OHS
2019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스페셜 프로그램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한 시대”, 사이먼 스미스 주한 영국대사 한국에 오신 지 2년이 되어간다. 한국에 오기 전 서울에 대해 접할 기회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2003년과 2004년에 처음 한국을 짧게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이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4년 후인 2017년에 다시 왔을 때 변화한 서울의 모습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 여러 고궁이 복원되고 녹지가 조성되어 수많은 매력적인 공간들이 새로 생겨나 있었다. 주한 영국대사로 부임하기 전, 2017년 하반기에 서울에 머물며 한국어를 공부했다. 이때 여러 장소를 방문하여 서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인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한 곳을 고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사관 옆에 있는 덕수궁은 산책하기 매우 좋다. 생각에 잠겨야 할 때 종종 덕수궁을 걷곤 한다. 가끔은 연필과 스케치북을 챙겨가서 덕수궁을 스케치하기도 한다. 서울의 박물관과 미술관도 매우 좋아한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청계천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 그리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자주 간다. 각 박물관의 특별전도 다 챙겨보려고 노력한다. 내가 오기 전 옛 서울의 모습을 매번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돈의문박물관마을도 찾아가기 좋은 장소다. 광장시장과 같은 서울의 전통 시장도 좋아하는 곳 중 하나다. 동대문 시장의 수많은 옷과 액세서리의 종류는 갈 때마다 매번 놀랍다. 야구팬이기 때문에 잠실 야구경기장 또한 내 리스트의 상위 10위에 항상 포함돼 있다. 이 모든 장소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경험은 바로 인왕산 등산이다. 인왕산에 오르면 서울의 멋진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윤동주 문학관에서 그의 삶과 시를 감상하는 것 또한 매우 감명 깊었던 경험 중 하나다.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위치한 서울시 중구 정동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과거 한국에서 영국대사관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사관도 영국대사관이 유일하다. 정동이라는 장소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조선 시대와 대한제국의 수많은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중구 정동에서 살며, 또 일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다. 그 시대에 건축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축물 대부분은 현재 박물관 또는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여 영국의 선대 외교관들이 130여 년 전 사용했던 건물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역사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정동에는 영국문화원도 있다. 한국 최초의 현대 교육 기관 중 한 곳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위치한 이곳에서 영국문화원은 다양한 연령층에 영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사관저가 1890년에 지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벽돌과 석재를 이용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서양식 건물이다. 그로부터 130여 년이 흘렀고, 보기 드물게 여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건축, 디자인 강국으로 유명한 영국인데, 혹시 새로운 건축 디자인에 대한 욕심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영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자국의 디자인 및 건축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와 전통 또한 존중한다. 선대 외교관들이 한영 관계를 구축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건물을 이어받아 오늘날까지 우리의 파트너들을 환영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는 종종 서울시청 서소문 건물 13층에 올라 정동의 전경을 눈에 담는다. 수많은 역사적 건물들 사이에 영국 관저가 자리한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이러한 건물을 현대식 건축물로 바꾼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한국에 부임한 후부터 계속 살고 계실 텐데, 대사님과 가족들은 어느 공간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불편함과 좋은 점은 무엇인지, 1890년에 지어진 건물에 산다는 것에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 관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1층의 테라스와 2층의 발코니이다. 두 곳 모두 관저의 아름다운 정원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이며, 2층 발코니에서는 남산도 조금 보인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더욱 사랑받던 장소가 아닐까 싶다. 지금도 테라스와 발코니는 복잡한 도시 속 휴식과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공간이다. 관저 인테리어는 현대 생활방식을 따라가기 위해 여러 차례 리모델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19세기 건축 양식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⑤ 대부분 20~30대 때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에 40~50대에 어떻게 일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요. 에너지는 또 나와요. 체력이 있어야 일할 수 있는 건 확실해요. 어느 정도 타고 나는 게 있지만, 꾸준히 노력하기도 해야 해요. 제가 지금껏 끊임없이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체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에요. 아무래도 젊었을 때보다는 체력이 떨어지니까 신경을 쓰긴 하죠. 그렇다고 특별히 체력 관리를 하지는 않아요. 저는 강아지들과 산책하는 것이 유일한 운동인 셈이에요. 낮에 가능한 한 많이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최대한 노력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기본적으로 튼튼한 편이고 크게 아팠던 적도 없어요. 항상 농담으로 “울 엄마는 열을 낳았다. 나는 둘밖에 안 낳았다. 아이 열 키우는 에너지와 비교가 안 되니 얼마든지 더 일할 수 있다”라고 말해요. 저는 지금도 배가 고파요.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자기 체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도 있어요. 제 경우 열정적으로 장시간 일해도 괜찮은 편에 속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패턴을 파악하고 체력을 어떻게 안배해야 좋을지 계획해야 해요. 저도 나름의 작전이 있어요. 요즘 [KBS 열린토론] 프로그램을 매일 저녁 진행하는데, 워낙은 아침 시사 프로그램 제안이 들어왔어요. 한 마디로 얘기했지요. “아침 시간은 나를 위해서만 쓰는 시간이다. 아침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김어준 공장장뿐이다.” (웃음) 저에겐 새벽 시간이 정말 중요해요.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서 열 시까지 약 너덧 시간 동안은 꼭 내 일을 해요. 하루에 다섯 시간을 집중해서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 돼고 하루가 여유로워요. 그 이후 낮에 하는 일들, 예를 들어 사람 만나는 일 등은 물론 일이긴 하지만 노는 것과 비슷하죠. 그 때문에 기력이 소진되지는 않아요. 이제껏 유일하게 소진됐던 시간은 국회의원 시절 4대강 사업을 다룰 때였어요. 정말 쓸데없이 벌인 일에 제 체력을 소모한 거죠.
Interview 프로페셔널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축가 김진애 ④ 정치권의 프러포즈를 계속 거절하셨지만, 2003년에는 열린우리당 창당 멤버로 참여하셨어요. 그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면 남에게 통제되고 싶지 않아요. 그때가 막 50대로 넘어갈 때예요. 농담처럼 ‘Turn-50’를 맞으면서 세 가지 시나리오를 세웠어요. 이것도 마찬가지로 ‘여성 전문가’의 상황과 관련되기도 해요. 여성 전문가로서 40대 중반이 넘고 나면 다들 뭘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와요. 첫째는 오퍼레이션 방식을 바꿔야 하나 하는 고민이었어요. 뭐냐 하면, 이른바 큰 프로젝트들을 빅 피쉬(Big fish)들이 장악하면서 여성 전문가들을 거북해하는 성향이 있어요. 자기들이 쓰고 싶을 때만 여성 전문가들을 쓰려는 성향이랄까요. 좀 만만하게 쓰고 싶은 심리겠죠? 현실이에요. 그런 현상을 넘어선다는 게 무척 어려워요. 빅 피쉬로 일하려면 사업 오퍼레이션이 좀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특히 도시건축계에서는. 그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두 번째, 주문자에게 엮이는 게 싫으니 다품종 대량 생산을 하는 길로 가야 하나. 투자를 좀 해서 마련해 놓으면 밥벌이에 신경을 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였죠. 세 번 째는 공공 영역 활동 쪽으로 더 나갈까? 공공 영역의 활동 제안은 나름 끊임없이 받아 왔으니까요. 이 세 가지 시나리오를 놓고 몇 년 동안 저울질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등장한 거예요. 참여정부에는 이래저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기도 했거니와,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지금 촛불혁명 후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오면서 그렇듯이요. 정치를 안 하겠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돈 쓰면서는 못하겠다는 거였어요. 다른 건 어느 정도 자신 있어요. 사람들과 노는 것도 잘하고, 정책도 잘 알고, 정치 프로세스도 잘 알고 다 좋은데, 돈으로 얽히는 건 못하겠다는 생각이었지요. 돈이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하는 방식이 너무 싫었어요. 그때 마침 공영선거에 관한 법이 생겼고 선거 자금이나 정치 자금에 대해서도 좀 더 투명해졌고, 제안도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던 거죠.   무엇보다 2007년 건축기본법을 만든 것은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자문 건설기술ㆍ건축문화선진화위원회 위원장을 할 때, ‘건축기본법’과 ‘아우리(건축도시공간연구소, auri)’를 만들었어요. 이건 인정해줘야 해요. 건축계 역사상 이런 업적을 남긴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그때 사협회에서 상을 준다는 것도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런 업적은 좀 널리 알려주세요. (웃음) 선진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저에게 위원장 역할이 올 거라 생각을 못 했어요. 그때가 정치권에 들어가자마자 지역구 용산에 출마해서 떨어지고, 말하자면 야인으로 있을 때였죠. 사람들은 제가 그 위원회를 만들어서 위원장 자리에 앉았을 거라 여기기도 하는데, 저는 절대 그런 사람이 못돼요. 자리가 저를 찾아와서 맞으면 하는 거예요. 나중에 들어보니, 청와대에 있는 어떤 분이 나를 눈여겨봤다고 해요. 그 이유도 들어보니, 당시 국토부에서 별로 마땅찮은 사람들을 위원장으로 자꾸 추천했었는데, 보다 못해 어느 날 “김진애 어때요?”라고 했대요. 그랬더니 갑자기 좌중이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져서, ‘이 사람이 하면 되겠다’ 했다더라고요. (웃음) 제가 국토부에서 악명이 높은 편이죠. 성격도 강하고 발언도 세고, 이미 정치권에 들어가 있고 해서요. 위원장 지명됐을 때 국장이 찾아와서 설명하는데, 자주 안 나오셔도 된다고 해서 “아니 매일 나갈 거 아니면 뭣 하러 위원장을 해요? 다른 할일 없어요.” 했어요. (웃음) 그렇게 위원장을 2년 반 했어요. 준비 단계에서 이미 전문가들이 많은 안들을 짜놨어요. 다들 연구원과 기본법을 만드는 게 소원이더라고요. 과제 리스트를 죽 보는데, 이 두 가지는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거라서 자신이 없다, 열심히는 해보겠다고 했죠. 결국은 두 과제를 다 성사시켰어요. 첫해는 아우리(ARUI)를 만들었고, 두 번째 해에는 건축기본법 만들었으니까 제가 생각해도 참 놀라운 일이에요. 제 노력도 있었지만, 전폭적으로 지지해줬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서거 10주기를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니 마음이 그렇네요. 노무현 대통령은 저를 전문가로서도 믿어줬지만,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믿어줬어요. 개인적으로 가깝거나 그러진 않았고 그저 몇 번 위원회를 통해 보고했을 뿐인데, 노무현 대통령 지원이 없었더라면 성사 못 시켰을 거예요.   건축도시공간연구소 만들 때는 국회 예산을 따야 하는 거라 총리실에서 난리였지요. 당시 예산 책정 때문에 언론에서도 비난받고,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부탁하러 찾아가면 “연구소 만들면 당신이 소장되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 자리에 지원할까 봐 숙덕거리더라고요. “내가 만든 기관에 장으로 가겠소?”라고 할 수도 없고, 정말 질렸죠. 초대 연구소장으로 얼마 전 돌아가신 온영태 교수가 역할을 하였는데, 정말 다행이었어요. 저와 철학을 공유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국책연구소에 관한 법 개정이 힘들어서, 국토연구원의 부속 기관으로 출발했는데 나름 역할과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요. 지금도 운영은 별도로 하고 있지만, 독립기관이 되면 좋겠는데, 언젠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 ‘도시’가 들어간다는 거로 또 건축계에서 반대하고 난리였어요. 연구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건축사협회장, 건축가협회장, 청년건축가협회장 등등 평소에는 만나지도 않는 협회장들과 여러 번 모여서 설득하고 엮는 일을 했어요. 맨날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죠. ‘도시’가 들어가는 걸 굉장히 반대했지만, 결국 ‘도시공간’으로 들어갔어요. 건축의 외연을 얼마나 키우는 건데, 왜 그걸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위원장직을 맡은 동안에는 열심히 설득했지요.   건축기본법은 건축 문화의 기틀을 만드는 일이었는데요. 그 역시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건축기본법 만드는 과정은 거의 기적이었어요. 그건 정말 노무현 대통령 없었으면 안 될 일이었어요.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하자면, 국토부, 산자부, 문화부, 기재부 등등 관련 부처들이 다 반대했어요. 국토부는 이 위원회가 대통령 직속 위원회라서 국토부의 위상이 낮아진다고 하고, 문화부는 건축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영역을 빼앗긴다고 생각했고, 산자부는 자신들의 디자인 산업 영역이 줄어든다고 반발하고, 기재부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라는 부분을 지적하며 소극적이고, 하나같이 반대했어요.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하다 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할 수 없다. 대통령 보고를 잡아라’ 했어요.대통령 보고를 잡으려면 적어도 한 달 반 전부터 스케줄을 확정해놓아야 해요. 날짜를 잡아 놓고 한참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아요?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잡힌 거예요. 대통령이 평양에 가시니까 결과적으로 우리 보고회가 취소된 거예요. ‘아 이제 건축기본법은 끝났다. 어쩔 수 없다.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서 7월경에 일본 출장을 가 있는데, 갑자기 국장이 전화해서 남북정상회담이 일주일 뒤로 연기됐다고 하더라고요. 한 열흘밖에 안 남아 있을 때였어요. 그래서 정신없이 준비해서 보고하게 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