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건축가 조병수 ②

스위스에 교환 학생으로 가셨을 때 경험이 궁금해요. 최근 『건축 문답』이라는 책에서 건축가 이동준은 스위스 건축이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다면 만드는 방식까지 고려해서 실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소장님과 가장 맞닿은 지점이 아닌가 싶어요.
스위스는 3개의 문화권 - 루가노 지역의 이탈리아 문화권, 취리히 지역의 독어 문화권, 그리고 제네바 쪽의 불어 문화권으로 나뉘어요. 서로 좀 싫어하죠. 저는 취리히에 가 있었고요. 어쨌건 취리히 대학도 이성주의적 건축, 이탈리아 합리주의(Italian rationalism)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당시 학장인 마리오 캄피(Mario Campi) 교수도 루가노 지역에서 오셨는데, 이탈리아 영향을 많이 받으셨죠. 그 당시에 안토니오 츄치(Antonio Chuchi)라는 학자분을 모셔서 강의를 했고,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마치고 제가 하버드로 돌아왔을 때 그분도 또 하버드에 방문 교수로 오셨어요. 츄치 교수의 수업을 들었던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오래된 것(old)과 새것(new)을 도면상에서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굉장히 혼나는 거예요. 뭐가 뭔지 알고 해야 한다는 거죠.
만드는 것에서도 그래요. 예를 들자면 일본의 이세 신궁(Ise Shrine)은 나무 몇 개로 아주 간결하게 짜 맞히듯 만드는데, 스위스 건물도 그렇죠. 명료한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취리히 대학은 만들기와 재료(material)에 대해 강력했던 것 같아요.
 
프랑스 불어 문화권은 그 당시에 로맨틱하고 멋을 부리는 것 같았고 이탈리아 문화권도 저와 동료 학생들은 싫어했죠. 그 당시에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유명할 때인데 우리 학교 학생들이나 교수들은 그의 건축을 비판했어요. 형태를 가지고 포스트 모던처럼 형상화하는 방식이라고요. 강남 교보빌딩처럼 두꺼운 벽돌 건물 같아 보이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붙여서 만드는 치장 벽돌(face brick)이에요. 그런 색상이나 질감이나 투박함이 실제로 안에 들어가 보면 다른 건물이 되어요. 형태적으로 과장되어 진실하게 드러나지 않죠. 그렇지만 따뜻해 보이고 전통성을 가지고 있고요.
 
취리히 대학은 그런 면에서 달랐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가장 모던하다고 해야 하나? 그로피우스 이후로 이어진 미스 반 데어 로에처럼,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표현하는 쪽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 이유로 하버드와 취리히 대학이 교환 학생 프로그램이 있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 연구소를 같이 공유해왔죠. 취리히 대학(ETH)과 하버드 대학이 어떤 공통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교환 학생으로 갔을 때 마리오 캄피 교수가 점심에 초대해서 라파엘 모네오 교수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둘이서 함께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하면서, 자유롭게 공부하고 서로 배울 기회를 주고자 하는데 도장을 찍었다고요. 서로 학점도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수업도 안 들어와도 되고요. 마리오 캄피 교수는 합리주의(rationalism)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명쾌한 건축을 주장하셨던 분이고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 교수도 텍토닉(tectonic)한 건물을 만드는 데 관심이 많은 분이다 보니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스위스에 계시는 동안 유럽을 돌아볼 기회도 있으셨나요?
저희 때에는 비행깃값도 비싸서 많이 못 다녔어요. 몬태나 대학교 4학년 때 유럽에 가는 스튜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비행깃값이나 경비를 따로 내야 하기 때문에 못 갔어요. 당연히 너무 가고 싶었죠. 대학원에서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통해서 갈 수 있게 된 거죠.
스위스 대학에서는 경비도 지원해줘서 터키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어요. 유럽도 다닐 수 있었는데 정말 포스트 카드에서 본 것처럼 아름다울지 궁금했어요. 관광 사진만 보면 아름다운데 막상 가보면 그렇지 않은 곳이 많잖아요. 처음 스위스 공항에서 내려 버스 타고 들어가는 데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그런데 많이 돌아보면 볼수록 좀 실망스러웠어요. 프랑스 파리에서도 그랬고요. 생각할수록 성 베드로 성당(Saint Peter's church)과 같은 곳은 감동적이지 못했죠. 너무 형식이나 형태에 치중한 게 아닌가 싶었어요.
 
유럽에서는 현대 건축물이 좋았어요.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건물에 들어가 봐도 좋더라고요. 그러니까 1900년대 초나 이후에 지어진 것들 아니면 1700~1800년대 지었더라도 에펠탑 이후의 철과 콘크리트, 공장이라든지 모던한 건축은 좋은데 돌로 붙여서 요란하게 장식한 성당 건축물은 잘 모르겠더라고요. 우연히 가다가 성당 문이 열려서 들어가서 보니 형태는 클래식한 성당이고 그 안은 콘크리트 건물이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독창성(originality)이 있어야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죠.
 
그러다가 터키에서 폐허 같은 고대 도시를 봤을 때는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유럽에 한 학기 체류하면서 슬라이드를 5통 정도 찍었는데, 터키에서는 보름 만에 한 20통 찍은 것 같아요. 마을과 언덕에서 양 치는 아이들, 언젠가 꼭 와서 살고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았어요.
터키에서 더 감동을 받아 좋다고 했더니 그때 갔던 유럽이나 미국 친구들이 ‘야, 너 여기 한국과 허름한 게 비슷해서 그런 게 아니냐’고, 놀렸죠.(웃음)
 
르코르뷔지에가 주도하는 국제주의 건축이 태생한 배경에 르코르뷔지에가 배제한 스위스 건축가의 유기적 모더니즘이 있습니다. 유기적 모더니즘의 태도가 지금 많은 지역 건축가들이 시도하는 것과 연결 지점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물론 케네스 프램튼이 말하는 비평적 지역주의와도 연결되고요. 소장님에게도 스위스의 경험이 연관되는 게 있으신가요?
학술적으로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마르셀 메일리(Marcel Meili) 교수의 작은 건물에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모던하고 현대적인 건물을 설계하면서도 지금까지 자신들이 건물을 지어왔던 형식이나 양식을 반영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죠. 그런 것들은 학교에서 배우거나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는 이해하지 못 하는 의미일 수 있겠다 싶어요. 그런 건물들은 결국 토속적인(Vernacular) 건축에서 나오죠. 풍토, 재료와 잘 맞는 건축물들은 굉장히 좋아요. 그래서 우리도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건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한옥이라는 형식은 현대적인 요구사항과 잘 안 맞는 거죠. 면적도, 층수도 많이 필요하고 건폐율도 많이 잡아야 하고 사용의 편리성을 고려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사실 뜯어보면 우리도 현대적인 지역성, 그런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하버드대에서 ‘경험과 인식’이라는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쓰셨습니다. 네모난 박스 안에 정적이면서 순수한 공간의 아우라를 담고자 하셨어요. 당시에 표현하고자 하셨던 건 어떤 것일까요?
그때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알았다면 너무나 다행이겠죠.(웃음) 뭔지 모르는 단계에서 시작한 거예요. 누구나 똑같은 것 같아요. 논문 프로젝트를 하고 나면 내가 왜 잘못했는지, 어떻게 하면 안 되는지, 어떤 것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겠다든지 어렴풋이 아는 정도죠.
저는 동양적인 것에서 출발하고자 했어요. 1970~80년대에는 현대 건축에 대한 비판이 많았으니까요. 현대 건축은 죽었다, 모든 것들을 망가트리는 말라비틀어진 건축일 뿐이다, 껍질만 있고, 알갱이가 없어졌다고 했죠 현대 건축의 실패에 관한 책도 많이 나왔을 때인데 그게 과연 무엇인가, 왜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선택은 여러 가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 알베르토 페레스 고메스(Alberto Pérez-Gómez) 맥길대학교 교수의 『현대 과학의 위기와 건축(Architecture and the Crisis of Modern Science)」이라는 책이 막 나왔어요. 현대 문명이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섰고, 모든 걸 인간 중심적으로 보고자 했고 통제하며 만들다 보니 결국 인간이 살 수 없는 방향으로 가버렸다는 이야기인 거죠.
인간 중심적으로 보게 된 시작점은 어떻게 보면 르네상스 때가 아닐까, 투시도법을 통해 예수님이 가운데 앉아 계시고 열두 제자가 하나의 소실점을 향하는 다빈치의 회화는 인간의 통제적인 방식을 보여주죠. 그 이후로 만들어진 건축이나 도시에 대해서도 상당한 비판을 하는 편이었죠.
결국은 동양적인 생각이나 방식에서 뿌리를 찾는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설령 지난 100년 가까이 단절되었다고 해도 말이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대부분 마음속 깊숙이 스스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역사도 자신들 위주로 쓰죠.
 
저는 모더니즘 자체가 동양의 영향에 의해 나왔다고 생각해요. 불교의 선종이나 도가사상을 통해서 추상성이 나오게 되고, 송나라 때에 추상적인 그림들이 나오면서 자연을 함축적으로 이해하고자 했죠. 동양의 영향으로 몬드리안의 추상적인(abstract) 회화가 나오게 되었고 건축물들도 그 방향으로 가고요. 나중에 반고흐부터 인상주의(impressionism)로 흘러간 것을 보더라도 사실 동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전까지 서양 문명에서는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나 물질적인 것 이외에는 이해를 못 했던 것 같아요.
 
다만 중세 때에는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미스테리어스(mysterious)한 것들을 믿었던 것 같고요. 중세의 그림들을 보면 신화적인 것들이 나타나는데, 르네상스 이후로는 그야말로 카메라 속에 담겨있는 것처럼 적나라하게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리는 거죠.
그러다가 반 고흐로 와서 어떤 인상을 담게 되고 그림자도 까만 게 아니라 파랗게 혹은 노랗게 표현한다든지 하고요. 우리나라 그림을 보면 그늘진 부분을 까맣게 표현하는 부분들이 없었거든요. 어떤 인상(impression)을 담는 것들을 인상주의(impressionism)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미 추상적인 그림이 있잖아요. 십장생화도 그렇고 단청도 그렇고요. 오방색의 오방이라는 것 자체도 굉장히 개념적이죠. 동서남북에다가 중앙을 설정하고, 이 세상의 색도 5가지로 함축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니 철학적으로 이미 정리가 다 되어있는 거죠.
 
그런 배경이 근본이 되어서 나온 것이 모더니즘인데, 결국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게 되었고, 결국 껍질만 있는 박스 건물만 주장하게 된 것을 모더니즘의 실패라고 많이 비판했고요.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모더니즘이랄까요? 사람들의 따뜻한 감성이나 경험적이고 인식적인 부분들이 많이 무시되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 역시 저 혼자의 생각이 아니라, 알베르토 페레스 고메스 교수라든지 다른 분들의 주장에 도움을 받은 거죠
 
그러면서 우연히 고유섭 선생님의 한국 미술사에 관한 책, 한국 미술사 미학론 논문을 봤어요. “한국 미술은 내 몸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적인 그림이다”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걸 통해서 뭔가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죠.
뭐랄까,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만드는 것에 대한 공허함, 그래서 깊이감이 없어 보이는 것을 못 참을 것 같았어요. 그려놨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뜯어내고 싶은 거죠. 형태적으로 만드는 것은 부수고 싶고, 껍질 같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작업을 보면 새 건물보다 기존 건물을 고치는 리노베이션이 더 많았던 것 같고요. 이런 여러 가지로 인해 ‘경험과 인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논문에서 박스 안에 빛이 들어오는 원초적인 공간을 만드셨는데요. 무엇을 제안하고자 하셨나요?
르네상스 이후로 건축에서 시각적인 접근이 너무 크게 장악한 게 아닌가 싶었죠. 시각적인 표현이 강하지 않더라도 감동을 줄 수 있고 감성을 자극할 수 있고, 자연이나 인간의 따뜻한 부분을 드러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죠. ‘경험과 인식’은 시각적으로 보이는 비례감의 반대말로써 이야기했던 거예요. 도릭, 이오니아식, 로코코 형식처럼 여러 양식이 나오지만 다 시각적인 발전이거든요. 경험적인 발전이 아니죠.
제가 좋아하는 부석사라든지, 한국 마을의 구도를 보면, 우리나라 건축은 자연과 어떻게 놓이느냐에 대한 배치의 방식, 경험의 방식으로 이뤄져요. 건물의 형태가 바뀐 건 별로 없는 거죠. 신라 때부터 조선까지 쭉 넘어와도 양식은 바뀌었지만 크게 모양이 바뀌지는 않았거든요. 그런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정림 건축에서 실무를 하셨는데, 달동네 프로젝트도 그때 나온 건가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88 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안 돼서였어요. 우리나라가 나름대로 엄청 발달한 거죠. 만나는 사람마다 저에게 물었어요. “한국이 엄청 발전했지? 몰라보게 바뀌었지?” 제가 볼 때는 별로 발전한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런 건물들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많이 봤기 때문에 감동적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연히 정릉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달동네에 갔어요. 그 언덕에 있는 친구네 집에 갔다가 새벽에 그곳이 너무 아름다워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당시 정릉에 있는 교회도 가끔 갔는데, 그곳 목사님이나 주변 분들과도 어울리고 싶었죠. 정말 사람 사는 마을 같고 따뜻해서 좋아했어요. 그래서 정림건축에 있는 동안에는 달동네를 방문하는 어떤 클럽을 만든 거죠. 매주 주말마다 방문하고 목요일 저녁마다 지하 공간에 모여 토론하다가 ‘이것만이 내가 갈 길이다’하고 독립해서 달동네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첫 프로젝트로 달동네 프로젝트를 하고, 신당동에 세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중 두 개가 지어졌어요.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옆집과 동의가 안 되어 진입로 확보가 안 되었어요. 너무 힘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때 심장병이 생겼어요. 해결이 안 돼서 세 번째 프로젝트는 결국 지어지지 않았고 설계비도 다 물러줬어요. 너무 스트레스받던 차에 옛날 알던 교수님이 독일로 오지 않겠냐고 해서 도망을 갔죠.
 
달동네 프로젝트에서는 어떤 제안을 하셨나요? 주거 공간을 개선하려고 하신 건지 혹은 마을에 대한 접근이었는지요.
제가 추구한 것은 공간을 개선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이 공간을 통해서 배우고자 하는 거였어요.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보자는 거죠. 아파트가 이렇게 많이 지어지는 이유는 그 뒤에 우리가 이해 못 하는 결탁이 있을 거다. 왜 아파트는 저리 높게 지을 수 있게 해주면서 달동네는 이렇게 규제가 심할까? 뭐하나 지으려면 사선 제한에다가 정북 사선, 옆집과의 관계와 도로 규정 등 규제가 심한데, 뭐가 잘못된 것일까?
달동네의 구조가 우리에게 편안한 이유는 뭘까? 건폐율로 따지면 요즘 짓는 동네보다 더 높은데, 모든 집이 마당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바깥에 나와서 세수하고 앉아서 쉴 수 있는 마당이 있는 거죠. 어떻게 건폐율도, 용적률도 높고, 많은 사람이 높은 밀도로 사는데 인간적인 동네가 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같이 연구해보자는 것이었죠. 그중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곳은 동숭동 언덕이에요. 최근 10년 동안 엄청나게 인기 있는 곳이 되었는데, 당시에 제가 좋아하는 건물이 몇 개 있어, 저 나름 아름답고 좋은 건물이 많다고 생각했었죠.
 
그 연구를 통해서 배운 게 더 많으셨다는 거네요.
경험적이고 인식적인 부분이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썼던 글을 읽어보면 어릴 때 길에 다닐 때 그림자나 조명 빛, 냄새 등의 기억이 있는데,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라든지, 걸어 다닐 때의 그림자 등이 그야말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달동네처럼 꼬불꼬불한 길은 왜 좋을까? 이게 정말 좋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토론해보자는 거였죠.
 
이때의 경험들이 다른 작업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나요?
현대적으로 법규라든지 경제 시스템 등이 달라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조금 작게 짓더라도 마당이 있으면 좋겠고, 형식은 다르지만 하나하나의 공간적 경험이나 순간들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퇴근해서 집에 온다면, 저녁에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 공간의 느낌이 어떨까? 달동네에서는 집에 오면 굉장히 좋잖아요. 마을에 사람들도 앉아있고 마당이 있고요. 물론 하수 시설이나 환경은 열악하죠. 그래서 그 당시에 생각했던 것은 제반 시설(하수 등)만 잘해주면 굉장히 좋은 곳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런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어떤 것일까 질문을 던졌죠.
그 당시 지은 2개 프로젝트를 보더라도 직접적으로 유사하게 적용했던 부분은 있었던 것 같아요. 계단이라든지, 계단과 계단 사이의 외부 공간이 조금씩이나마 있으면서 내부 공간과 연계하고자 했던 거죠. 좀 더 큰 동네나 계획도시 내의 작업에 직접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으로 꾸준히 질문을 던졌던 거죠.
 
성북동 사무실은 독일을 다녀오신 후에 내신 건가요?
그렇죠. 독일에 머물면서 자연이 좋다는 생각을 더 확실히 가지게 되었어요. 독일 대학 내에 숲길을 많이 걸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귀국길 비행기에서 한국에 오면 두 가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는 내 사무실은 항상 나가서 테라스에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곳을 얻으려 다니는데, 대학로 전체에 없었어요. 그래서 성북동에 공간을 마련해서 일도 하고 조그만 마당에 앉아서 작업도 하게 되었죠.
 
성북동 사무실에서 재료가 켜켜이 보이는 벽의 단면 사진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어떻게 보면 적은 예산으로 직접 현장까지 해결해야 하는 건축가의 숙명일 수도 있지만, 그걸 통해서 건축하는 접근방식이 크레프트맨쉽으로 더 심화한 듯했습니다. 성북동 사무실은 직접 지으신 거죠?
네, 직접 시공까지 다 한 거죠. 굉장히 즐거웠어요. 우리가 쓸 공간을 만든다는 것처럼 행복한 게 없었어요. 당시에 독일에서 쫓아온 학생과 경희대학교 건축과 다닌다는 3학년 학생이 도와주고 있었는데, 같이 질통을 지고 그랬어요. 그때 허리가 망가져서 나중에 고생도 했죠. 뜻대로 안 된 부분도 많았어요. 기술적으로 많이 해결하지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해나간 건물이어서 좀 더 자유롭게, 더 손맛이 느껴지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소장님의 건축은 구조의 작동 방식을 완전히 이해한 다음에 ‘이렇게 해결하면 되지 않아? ‘하며 해법까지 나오는 것 같아요. 짓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건축을 한다는 게 아마 그런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했는데요.
아직도 인상 깊은 소장님의 말 중 하나가 ‘노출콘크리트를 가장 싸게 쓸 수 있는 노하우를 알고 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건축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연구하시는 것 같아요.
저렴하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친환경적인 경우가 많아요. 친환경 소재라도 비싼 소재는 따지고 보면 친환경이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요. 재활용을 했는데 오히려 거기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훨씬 더 많은 거죠. 저렴하게 하면 손이 적게 가고, 톱질도 두 번 할 걸 한 번 해서 끝나는 경우가 많죠.
 
ㄱ’자 집과 ‘ㅡ’자 집 주택은 초기 프로젝트입니다.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달동네서 하셨던 작업과 여건과 상황이 달라 다른 고민을 하셨을 것 같아요. 
달동네에서는 골목이 좋았고 마당이 좋았고, 마당을 통해서 사람들의 삶이 들여다보이는 거죠.
일자 집의 형식은 시골 가면 많았던 것 같아요. 옛날 한옥이 아니고 요즘 간단하게 지은 집들도 일자 집인데, 항상 마당이 있고 그 앞에 담장이 있고 앞집이 있고, 멀리 보면 산이 보이고 그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집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조경이라고는 약간 풀을 심거나 장독대가 있거나 씻는 공간이 있거나 그런 정도고, 마당과의 관계, 앞 담장과 앞집이 있고 멀리 산이 보이는 관계인 경우가 많은 것 같고요. 
‘ㄱ’자 집과 ‘ㅡ’자 집은 형태적으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죠. 평면적으로 담장과 마당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에 의해서 달라지는 거고요. 건물 자체도 사실 의미가 없는 건데, 관계성에 의해서 삶을 담아내는 상황이 생기는 거죠. 그 관계가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용해보자 했고, 또 평면 형식에 대해 실험해보고 싶었어요.  
한편으로 ‘ㅡ자’라는 단조로운 기하학적인 형태가 주변 담장이나 주변 집들, 삶의 모습이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유기적 상황과 대응하면서 서로가 좀 더 아름답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순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죠.
 
'ㄱ'자 집에서는 불 켜진 것이 보이는 게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산 ‘ㄱ’자 집의 건축주는 학교 선생님이셨어요. 저녁 늦게까지 아이들 점수를 매기고 있을 때 선생님이 작업하는 공부방과 방이 서로 바라다보이는 그 관계나, 바깥에 나와서 걸을 때 그 공간을 통해 따뜻한 삶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좋았어죠. 옛집들은 담장이라는 걸로 프라이빗하게 막혀 있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창호지 정도만 막혀서 다 열려 있었잖아요. 그 안에서 소리가 들리고 빛이 보이고요.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만들었던 것 같아요.
 
건축가 박헬렌주현과 같이 하셨던 파주 우리마을 프로젝트도 인상 깊은 초기작 중 하나인데요. 적은 예산이지만 공간을 다양하게 하면서도 재료 자체가 갖는 질감을 다 표현한 작업입니다. 당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셨을지 궁금합니다.
우리마을의 경우 원래 그렇게 평평한 땅이 아니었더라고요. 여러 다른 용도로 쓰느라 언덕의 돌을 파내고 깎아낸 흔적이 있었어요. 밑에서 주어온 돌을 보니 약간 붉은 색이었어요. 그 밑에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를 파야 하는데 돌이 꽤 많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라 그걸로 돌담을 만들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다음에 이곳은 지적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라 영역을 구분하는 게 중요했어요. 제가 들은 이야기로는 18세 이상 친구들은 한쪽 방향으로 계속 걷는다고 해요 그래서 영역 구분에 대해 요청을 하셨고 그걸 동그란 공간과 기하학적인 ‘ㅡ’자 공간으로 배치하면서 그걸 통해서 움직이는 상상을 했던 거죠. 건물 자체의 형태를 멋있게 만들고자 했다기보다는 땅에서 나온 재료를 활용하고, 형태를 배치하면서 만드는, 공간을 정의하는 프로젝트가 되었어요.
그런데 ‘ㅡ’자나, ‘ㄱ’자나, ‘ㄷ’자나, 우리나라 건물들이 보면 다 편복도식이에요. 서양 건축은 공간 안으로 들어가서 방들이 나열되잖아요. 우리는 펼쳐져서 바람도 잘 통하고 햇빛도 잘 들게 만드는 거죠.  
 
얇은 나무를 겹쳐서 구조를 보강하는 방법도 썼는데, 늘 최적화된 구조 방식을 찾아내는 듯합니다. 판단하신 근거가 있을까요?
저층부는 콘크리트 구조로 했고, 상층부는 목구조로 했어요. 얇은 목재(2by 재)를 두 겹으로 하고 중간에 스틸 파이프를 설치하면 효율적인 구조가 되죠. 목구조 자체가 단열효과가 좋고 비용도 비교적 적게 들어가고 빨리 시공할 수 있는 방식이죠. 좀 따듯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박공 구조로 했어요. 아이들을 생각하고 땅을 생각하면서 효율적으로 참 열심히 만든 프로젝트였습니다.
 
합판에 오일 스테인을 바른 마감이 그대로 건물 외관의 인상을 만들어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구조적인 질서도 잘 갖추려고 하셨다는 생각도 들고요.
평창동 ‘ㅡ’자 집도 전면 합판에 오일 스테인으로 마감한 거였죠. 합판은 지금도 2만원대  정도밖에 안 하는데, 1.2m X 2.4m가 아마 재료 중에 가장 저렴한 재료일 거예요. 처마가 있다든지, 바람을 잘 통하게 한다든지, 습기 문제만 크게 발생하지 않게 한다면 괜찮은 재료예요. 나중에 파주 어유지 동산도 합판을 활용했고, 아마도 비용 때문에 합판을 많이 사용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재료가 순수하고 담백한 느낌도 주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꾸밈없이 그런 걸 썼죠.
 
진행 임진영
사진 텍스처 온 텍스처(texture on texture)
인터뷰 ③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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